타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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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나이스는 아조프해 북동부에 위치한 고대 도시 유적지로, 현대 로스토프나도누에서 서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기원전 7세기부터 그리스 상인들이 교역을 위해 방문했으며, 기원전 3세기 말 밀레토스인에 의해 엠포리움으로 발전했다. 보스포루스 왕국 시대에는 아르콘이 통치했으며, 서기 330년 고트족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5세기 후반까지 유적은 유지되었다. 14세기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해 재건되었고, 이후 제노바 공화국이 관리했지만, 티무르,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등 여러 세력의 지배를 받으며 쇠퇴했다. 1823년 고고학적 유적과 문헌을 통해 타나이스의 위치가 확인되었으며, 1955년부터 체계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유전학 연구를 통해 R1a 하플로그룹의 특징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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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이스 | |
---|---|
기본 정보 | |
이름 | 타나이스 |
로마자 표기 | Tanais |
지리 정보 | |
위치 | 러시아, 로스토프 주, 네드비고프카 |
지역 | 메오티스 습지 |
역사 | |
유형 | 정착지 |
건설 주체 | 밀레토스 정착민 |
건설 시기 | 기원전 3세기 후반 |
폐허 시기 | 서기 5세기 후반 |
시대 | 헬레니즘 시대 ~ 고대 후기 |
문화 | 그리스인, 사르마티아인 |
고고학 정보 | |
상태 | 폐허 |
관리 정보 | |
소유 | 공공 |
일반 공개 | 예 |
2. 위치
아조프해의 가장 북동쪽 부분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곳을 마이오티스 호수라고 불렀다. 고대 타나이스 유적지는 현대 도시인 로스토프나도누에서 서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도시 중심부는 남쪽으로 최대 20m의 고도 차이를 보이는 고원 지대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자연 계곡이, 서쪽으로는 인공적으로 만든 도랑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타나이스는 고대 그리스의 밀레토스인들이 시장을 세우기 훨씬 이전인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주변의 많은 쿠르간 묘역이 이를 증명한다. 기원전 3세기 말, 밀레토스 상인들이 이곳에 엠포리움(무역 기지)을 세우면서 헬레니즘 문화권의 중요한 무역 거점으로 발전했다. 스트라본의 ''지리학''에도 언급될 정도로 번성했으며, 흑해 무역, 초원길 무역, 돈 강을 통한 북방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3. 역사
이후 보스포루스 왕국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로마 시대에는 왕궁이 들어서는 등 변화를 겪었다. 서기 330년 고트족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완전히 버려지지는 않았고, 서기 5세기 후반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강의 퇴적 작용 등으로 점차 쇠퇴하여 아조프에게 중심지 역할을 넘겨주었다.
14세기경 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해 재건되었고, 이후 제노바 공화국이 관리하며 킵차크 칸국과의 무역 기지로 다시 중요해졌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1392년 티무르에게 정복된 것을 시작으로 1471년 오스만 투르크, 1696년 러시아 제국, 1711년 다시 오스만 투르크, 그리고 1771년 최종적으로 러시아 제국에게 차례로 정복당하는 역사를 거쳤다.
3. 1. 초기 역사
타나이스 유적지는 고대 그리스의 밀레토스인들이 시장을 세우기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유적지 근처에서 발견된 300개가 넘는 매장 쿠르간 묘역은 이곳이 이미 청동기 시대부터 점유되었으며, 쿠르간 매장 방식이 고대 그리스 시대와 로마 시대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리스 상인들은 기원전 7세기부터 공식적인 정착지 없이 이 지역에서 유목민들과 교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기원전 3세기 말, 밀레토스 출신 상인들이 이곳에 엠포리움(무역 기지)을 세우면서 타나이스는 헬레니즘 문화권의 가장 북동쪽 거점으로 빠르게 발전했다. 타나이스는 세 가지 주요 무역로가 만나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첫째는 알타이 산맥과 스키타이 지역으로 이어지는 광활한 초원길 무역, 둘째는 그리스가 장악한 항구들을 연결하는 흑해 무역, 셋째는 돈 강을 따라 북쪽에서 내려오는 모피와 노예 무역이었다. 고대 지리학자 스트라본 역시 그의 저서 ''지리학''(11.2.2)에서 타나이스를 언급했다.
타나이스는 아르콘이 다스렸으며, 보스포루스 왕국 영토의 동쪽 끝에 위치했다. 로마 시대에는 항구와 아고라를 잇던 프로필레아 문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보스포루스 왕들의 궁궐이 들어서면서 도시의 중심 기능에 변화가 생겼다. 사우로마테스(서기 175-211)와 그의 아들 레스쿠포리스(서기 220년경)와 같은 왕들은 이곳에 공공 비문을 남기기도 했다.
서기 330년, 타나이스는 고트족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이후에도 서기 5세기 후반까지 사람들이 계속 거주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로에 토사가 쌓여 막히고(이는 산림 벌채의 결과로 추정된다), 도시의 중심 기능은 점차 인근의 작은 도시인 아조프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3. 2. 그리스 식민 도시 건설
타나이스 유적지는 고대 그리스의 밀레토스인들이 시장을 세우기 훨씬 이전부터 사람이 살던 곳이었다. 유적지 근처에서 발견된 300개가 넘는 쿠르간 (봉분) 묘역은 이곳이 청동기 시대부터 점유되었음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 상인들은 기원전 7세기경부터 공식적인 정착지 없이 이 지역에서 유목민들과 교류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그리스의 식민 도시는 두 가지 종류로 나뉘는데, 모 도시 국가 시민들이 이주하여 세운 '아포이키아'와 순수한 무역 거점인 '엠포리움'이 있었다.
타나이스는 기원전 3세기 말, 밀레토스 출신 상인 모험가들에 의해 '엠포리움'으로 건설되었다. 이곳은 헬레니즘 문화권이 가장 북동쪽으로 확장된 지역 중 하나로 빠르게 발전했다. 타나이스는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중요한 무역 거점이었다. 동쪽으로는 알타이 산맥과 스키타이의 성지로 이어지는 광활한 초원을 통한 교역로가 있었고, 남쪽으로는 흑해를 통해 그리스인들이 지배하는 여러 항구와 연결되었으며, 북쪽으로는 돈 강을 따라 모피나 노예 등이 운반되어 왔다. 고대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그의 저서 ''지리학''(11.2.2)에서 타나이스를 언급하기도 했다.
3. 3. 보스포루스 왕국 시대
아르콘이 통치하는 도시 부지는 보스포루스 왕국 왕들의 영토 동쪽 가장자리에 있었다. 로마 시대에 접어들면서, 항구 구역과 아고라를 연결하던 프로필레아 문이 제거되고 보스포루스 왕들의 궁궐이 공공생활의 중심지를 차지하게 되면서 도시의 사회적 중심이 크게 변화했다.
이 시기 타나이스에는 보스포루스 왕국의 고객 왕들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사우로마테스(서기 175년~211년)와 그의 아들 레스쿠포리스(서기 220년경)는 타나이스에 공공 비문을 남긴 기록이 있다.
서기 330년, 타나이스는 고트족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이후에도 서기 5세기 후반까지 도시 유적지에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3. 4. 쇠퇴와 멸망
서기 330년 고트족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타나이스 유적지는 서기 5세기 후반까지 지속적으로 점유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강의 수로가 점차 퇴적되었는데, 이는 산림 벌채의 결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도시의 기능은 쇠퇴하였고, 활발한 생활의 중심지는 인근의 작은 도시인 아조프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이후 타나이스는 14세기경 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해 재건되었다. 1332년부터 1471년까지는 해상 제노바 공화국이 'Tana nel Mare Maggioreit'라는 이름으로 관리하였다. 이 시기 타나이스는 카파의 제노바 영사 통제 하에 있는 다른 흑해 식민지들과 마찬가지로 킵차크 칸국과의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1368년 이후 다시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 후 타나이스는 여러 세력에 의해 반복적으로 정복당했다.
3. 5. 중세 시대 이후
서기 330년 고트족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도시는 서기 5세기 후반까지 계속해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강의 수로가 점차 퇴적물로 막히게 되었는데, 이는 산림 벌채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활발한 생활의 중심지는 점차 인근의 작은 도시인 아조프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14세기경 베네치아 공화국 상인들이 이곳에 다시 도시를 세웠다. 이후 1332년부터 1471년까지는 해상 제노바 공화국이 Tana nel Mare Maggioreita라는 이름으로 이곳을 관리했다. 이 시기 타나는 카파에 있는 제노바 영사의 통제 아래 킵차크 칸국과의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1368년 이후 다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후 타나이스는 여러 세력에 의해 정복당하는 역사를 겪었다. 1392년에는 티무르에게, 1471년에는 오스만 투르크에게 점령되었다. 1696년에는 러시아 제국이 차지했으나, 1711년 다시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최종적으로 1771년에 러시아 제국에 의해 정복되었다.
4. 고고학
1823년, I. A. 스템프코프스키는 주로 로마 시대의 유물인 눈에 보이는 고고학적 유적과 고대 그리스 자료에 언급된 "타나이스"를 처음으로 연결하였다.
체계적인 현대 발굴은 1955년에 시작되었다. 최근 러시아-독일 공동 연구팀은 타나이스 유적지에서 발굴을 진행하며 도시의 중심부인 아고라를 밝히고, 보스포란 그리스 도시의 도시 계획에 대한 헬레니즘의 영향 범위를 정의하며, 주변 유목 문화에 대한 방어적 대응을 연구하고 있다.
4. 1. 유전학
타나이스 유적에서 발굴된 한 유골에서 9개의 Y 염색체 마커가 분석되었다.[1]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마커 | 값 |
---|---|
389I | 13 |
389II | 30 |
458 | 15 |
385 | 11 |
393 | 13 |
391 | 11 |
635 | 23 |
437 | 14 |
448 | 19 |
이 결과는 R1a 하플로그룹의 특징적인 유전형질을 보여준다.[1]
4. 2. 타나이스 석판
타나이스 석판은 타나이스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발견이다.4. 3. 토르 헤이에르달의 연구
토르 헤이에르달은 그의 저서 ''오딘을 찾아서''에서 타나이스와 고대 스칸디나비아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이 아이디어는 스노리 스투를루손(1178년 ~ 1241년)이 기록한 옛 노르드 사가에 기반한 것이었으나, 학계에서는 매우 논란이 많은 것으로 여겨진다. 헤이에르달은 이 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타나이스 유적지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를 직접 수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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