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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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무르는 튀르크어 '테무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철을 의미하며 14세기에 활동한 군사 지도자이다. 칭기즈 칸의 후예는 아니었지만 '아미르' 칭호를 사용하며 '위대한 아미르' 또는 '절름발이 티무르'로 불렸다. 그는 칭기즈 칸의 후손을 칸으로 옹립하고 사위가 되어 권력을 행사했으며, '사히브 키란'이라는 칭호로도 불렸다. 티무르는 차가타이 칸국의 혼란을 틈타 권력을 잡고, 정복 전쟁을 통해 중앙아시아를 넘어 이란, 아프가니스탄, 조지아, 델리 등을 지배하며 티무르 왕조를 세웠다. 그는 군사적 재능과 잔혹함으로 평가받으며, 사후에는 그의 후손들이 권력 다툼을 벌였다. 그의 유산은 중앙아시아의 번영과 함께, 파괴와 학살로 얼룩져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국가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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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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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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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티무르 |
전체 이름 | 슈자우드딘 티무르 |
칭호 | 베그 술탄 구르칸 |
별칭 | 아미르 티무르 사히브-이-키란 타메를란 티무르 랑 악사크 티무르 |
출생 | 1320년대 |
출생지 | 케쉬 근처, 차카타이 칸국 |
사망 | 1405년 2월 18일 |
사망지 | 파라브, 티무르 제국 |
매장지 | 구르에아미르, 사마르칸트, 우즈베키스탄 |
종교 | 수니파 이슬람교 |
통치 | |
즉위일 | 1370년 4월 9일 |
통치 시작 | 1370년 4월 9일 |
통치 종료 | 1405년 2월 18일 |
대관식 | 1370년 4월 9일, 발흐 |
전임자 | (없음) |
후임자 | 칼릴 술탄 |
작위 | 티무르 제국의 아미르 |
가계 | |
왕조 | 티무르 왕조 |
아버지 | 아미르 타라가이 |
어머니 | 테키나 카툰 |
배우자 | |
배우자 | 사라이 물크 카눔 |
부인 | 츠판 물크 아가 알자즈 투르칸 아가 투칼 카눔 딜 샤드 아가 토우만 아가 |
자녀 | |
자녀 | 우마르 셰이크 미르자 1세 자한기르 미르자 1세 미란 샤 샤 루흐 |
기타 |
2. 이름
'티무르'는 튀르크어 '테무르(Temür, 현대 우즈베크어로는 'Temur')'의 이란어형이다.[425] 테무르는 철(鐵)을 의미하는 돌궐어에서 나온 것으로, 튀르크인과 몽골인들의 이름에 흔히 사용되었다. 철이라는 뜻의 테무르는 현대 투르크어에서 테미르(temir)로 변형되어 그대로 통용되고 있고 남성의 이름에 자주 사용되고 있다.
티무르는 자신의 부계 혈통이 투마나이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징기스칸의 고조부인 투마나이칸의 후손이라는 티무르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티무르와 징기스칸은 같은 부계 혈통을 가진 친족이 된다.[428] 투마나이칸의 현손(玄孫)인 카라차르 노얀은 황제의 장관으로서, 트란스옥시아나 통치자이자 후임자의 아들인 차가타이칸을 도왔다.[429][430] 13~14세기 기록에는 카라차르에 대한 언급이 많지 않지만, 티무르 제국 시기 자료에서는 몽골 제국 초기 역사에서 카라차르의 역할을 상당히 강조한다.[431][432] 또한 이들 사료에서는 징기스칸이 차가타이칸의 딸을 카라차르에게 시집보내어 이들 간에 부자 관계를 형성하였다고 강조한다.[433] 티무르는 카라차르와 차가타이의 딸의 후예라고 주장함으로써 차가타이의 친족임을 주장하였다.[434]
1360년 동차가타이 한국의 투글루크 티무르가 트란스옥시아나를 침공하자, 티무르는 그에게 복종하여 투글루크 티무르의 아들 일리야스 호자의 부관으로 임명되는 한편, 바를라스부의 옛 영지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곧 일리야스 호자를 배신하고, 카라우나스부의 아미르 후사인과 결탁하여 세력을 확대해 본거지로써 사마르칸트를 손에 넣었다. 이 기간에 전장에서 다리 한쪽을 다쳐 ‘절름발이 티무르’를 뜻하는 Tīmūr-i Langtr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것이 서양에서 그를 부르는 이름이 되어 타메를란이라고 부른다.[15][47]
티무르 시대 몽골의 전통은 칭기즈 칸의 후예가 아닌 사람이 한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한을 자칭할 수 없었다. 그는 대신 '아미르'(지휘관)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때때로 그 앞에 '부주르그(buzurg)' 또는 '칼란(kalān)', 즉 '위대한'을 붙여 '위대한 아미르'라 했다.[426]
그가 칭기스 칸의 후손들을 허수아비 칸으로 세워 그의 이름으로 통치한 뒤에는 '부마'(хүргэн|/kürügän/mn)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이는 '사위'라는 의미인데, 그가 칭기스 가문의 공주와 결혼했기 때문에 이런 호칭을 사용할 수 있었다.[426] 티무르의 후손들인 무굴 제국의 군주들은 이를 근거로 스스로의 왕조를 '구르칸(Gurkān) 왕조'라고 불렀다.[427]
이란 사서들에서 그는 '''티무리 랑'''(تيمور لنگ|Tīmūr-i Langfa)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의미이다. 그의 적들은 그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싶을 때 그를 이렇게 불렀다. 몽골에서도 그를 싫어하는 이들은 역시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뜻의 '''도고론 테무르'''(Доголон Төмөр)라 불렀다. 유럽에서 그를 부를 때 사용하는 '''태멀레인'''(Tamerlane)은 '티무리 랑'의 변형이다.
“티무르”라는 표기는 아랍어 철자에서 유래하며,[142] 페르시아어 철자를 기반으로 “티무르”라고도 표기된다. 페르시아어로는 “절름발이 티무르”를 뜻하는 “타메를랑(Tamerlane)”, “티무리 랑(Tīmūr-i Lang)”, “티무르 이 랑(Tīmūr-i Lang)”이라고도 불리며, 페르시아어 이름 Tīmūr-i Lang이 영어로 변형된 타메를랑(Tamerlane)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143][144] “절름발이 티무르(Tīmūr-i Lang)”라는 별명은 유럽에서도 널리 퍼져 타메를랑 외에도 타메를레인(Tamerlane), 탐벌레인(Tamburlaine) 등으로 불린다.[144] 또한 이 이름은 중세 몽골어로는 Temür, 현대 우즈베크어로는 Temur이며, “템무르”라고도 표기된다. 『명사』 등의 한자 자료에서는 “帖木児”라고 표기된다.
어원은 “철”을 의미하며,[145][146][147] 이 이름을 가진 투르크계, 몽골계 인물은 적지 않았다. 티무르 자신도 한때 투글루크 티무르 휘하에 있었고, 그의 패권 확립 과정에서 다른 “티무르”라는 이름을 가진 여러 인물들과 적대 관계를 맺었다(티무르 멜릭, 티무르 타슈 등).
티무르는 칭기즈칸의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생전에 “한”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고,[140][148][149] “큐레겐(구르간, 한의 사위)”, “아미르(장, 사령관)” 칭호를 사용했다.[150][151] 티무르가 주조한 화폐에는 차가타이 가문의 한의 이름과 함께 큐레겐 칭호가 새겨졌고, 모스크의 금요 예배에서도 한의 이름과 큐레겐 칭호가 쿠트바에 포함되어 낭송되었다.[149] 그가 죽고 약 20년 후, 티무르 제국에서 편찬된 역사서 『자파르나마』에서 그가 생전에 사용하지 않았던 “하가안(한)”, “술탄” 칭호가 추증되었다.[152]
역사가들이 저술한 연대기에서는 티무르를 “사히브 키란(사히브 기란, Sahib Qiran, “행운의 두 별이 만나는 때 태어난 지배자”[153], “길조의 합(길조의 별인 금성과 목성이 태양과 겹치는 천문 현상)의 지배자”[154], “별자리의 지배자”[155])”라는 칭호로 부른다. 그 역사가들 중, 야즈디는 티무르와 함께 알렉산드로스 3세를, 니잠 아딘 샤르미는 칭기즈칸과 티무르의 손자 우마르를 “사히브 키란”으로 칭했다.[156]
3. 부계 조상 및 칭기즈 칸과의 관계
4. 배경
1320년대를 전후하여 차가타이 칸국에서는 전통적인 유목생활을 중시하는 세력과 정주지대에 정착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토착 귀족들과 협력하려는 세력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었다.[438] 1347년 카잔 칸이 피살당하면서 차가타이 칸국은 동부와 서부로 분열되었다. 트란스옥시아나를 중심으로 한 서부 지역에서는 카잔 칸을 살해한 카자간이 실권을 잡았으나, 1358년에 암살당한다. 카자간의 죽음 이후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은 다시 무정부 상태로 돌아갔고, 투글루크 티무르가 이끄는 동차가타이 한국이 이 지역을 침공하여 차가타이 칸국을 재통일했다. 티무르는 이때 역사에 처음 등장한다.[439]
티무르는 칭기스 칸이 차가타이에게 부여한 4개 천호 중 하나인 바를라스부 출신이다. 티무르의 가문은 바를라스부의 명문이었지만, 티무르가 태어날 무렵에는 소수의 하인만을 거느린 가문이었다.[440] 그러나 그의 가문은 칭기스 가문과 공통 조상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적 명망은 매우 높았다.[441] 티무르의 아버지 아미르 타라가이는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바를라스부 내에서 존경받았다.[441]
티무르는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 칭기즈칸과 공통 조상인 툼비나이 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23] 툼비나이의 증손자인 카라차르 노얀은 황제의 신하였으며, 후에 황제의 아들인 차가타이가 트란스옥시아나를 통치하는 것을 도왔다.[24][25] 티무르는 이 혈통을 통해 차가타이 칸들과의 친족 관계를 주장했다.[28]
티무르의 어머니 테키나 카툰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자파르나마''는 그녀의 이름만 언급하고 있으며, 요한 3세는 그녀가 미천한 출신이라고 주장했다.[24] 이븐 칼둔은 티무르 자신이 어머니의 혈통이 페르시아 영웅 마누체르로부터 내려온다고 설명했다고 전했다.[29] 이븐 아랍샤는 그녀가 칭기즈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30]
티무르는 트란스옥시아나의 케시(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샤흐리사브즈) 근처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당시 차가타이 칸국의 일부였던 사마르칸트에서 남쪽으로 약 80km 떨어진 곳이다.[32] 그의 이름 '테무르'는 차가타이어로 "철"을 의미한다.[33] 이는 칭기즈 칸의 출생 이름인 '테무진'과 어원적으로 관련이 있다.[34][35] 티무르 왕조의 역사는 티무르가 1336년 4월 8일에 태어났다고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자료는 1320년대 후반의 출생일과 일치한다. 학자들은 1336년이라는 날짜가 티무르를 훌라구 칸의 후손이자 일칸국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아부 사이드 바하두르 칸의 유산과 연결하기 위해 고안되었을 것이라고 의심한다.[36][37] 그는 몽골 부족 출신이었는데, 이 부족은 여러 면에서 튀르키예화되었다.[38][39][40][41][42][43][44] 그의 아버지 타라가이는 이 부족의 하급 귀족으로 묘사된다.[32]
어린 시절 티무르는 소규모 추종자들과 함께 여행객들을 습격하여 가축을 약탈했다.[37] 1363년경 티무르는 양을 훔치려다 오른쪽 다리와 손에 화살을 맞아 두 손가락을 잃고 평생 장애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부상은 시스탄 칸의 용병으로 복무하는 동안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티무르의 부상과 장애는 "절름발이 티무르" 또는 페르시아어로 '테무르(-이) 랑'이라는 별명을 낳았고, 이는 서구에서 타메를레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5. 생애
그 후 트란스옥시아나의 패권을 둘러싸고 아미르 후사인과 대립했으며, 1369년에 후사인의 본거지 발흐를 공격해 후사인을 죽이고 트란스옥시아나의 패권을 장악했다. 1370년에 후사인이 내세운 칸인 카불 샤를 처형하고 그 대신에 오고타이의 후손인 수우르가트미시를 칸으로 옹립하였다. 그 해 후사인의 과부로써 칭기스칸의 자손이기도 한 왕녀를 왕비로 맞이하여 칭기스칸 가문의 사위(구르칸)를 자칭했다.
칭기스칸의 부계 자손(황금씨족)이 아니었던 티무르와 그의 후계자들은, 스스로 칸에 즉위하지 않고 아미르 칭호를 사용하였다. 명목상 칸이었던 칭기스칸 가문의 사위이자, 칸의 곁에 있는 최고 유력자로서 권력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1370년 중앙아시아에서 티무르 가문의 권력이 확립되고, 티무르 가문에 의한 지배가 진행되면서 이를 티무르 왕조(티무르 제국)이라고 불렀다.
티무르는 칭기스칸의 세계 제국 건설이라는 꿈을 이상으로 삼았고,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전투에서 승리하여 전리품을 휘하 부족들에게 분배해야 했으므로 대외 원정을 계속했다. 트란스옥시아나 통일 직후 황금씨족이 아님에도 칸을 칭하던 카마르 웃 딘을 응징하기 위해 모굴 칸국을 침공했으며, 쿵그라트 부족이 지배하던 호라즘을 병합했다. 1375년 주치의 후예 토크타미시를 지원하여 주치 울루스(킵차크 칸국)의 칸에 추대하고 주변 세력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1380년부터 일 칸국 왕조 해체 이후 분열 상태였던 이란으로 눈을 돌려 호라산을 정복하고, 1386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전쟁 끝에 아프가니스탄,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등을 지배했다.
1388년 토크타미시가 티무르 제국 치하의 아제르바이잔을 공격하자, 티무르는 토크타미시를 격파하고 이란 원정을 재개했다. 1392년에 시작된 5년간의 전쟁에서 페르시아령 쿠르디스탄을 공격했다.[442] 1393년 시라즈 함락 후 무자파르 왕국은 티무르의 속국이 되었으나, 샤 만수르 왕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티무르가 진압하여 무자파르 왕국을 완전히 합병했다. 이로써 티무르는 이란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곧바로 티무르는 킵차크 한국이 조지아를 이용해 이란 북부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조지아를 파괴했다.[443] 같은 해 8월, 티무르는 시라즈에서 8일 만에 바그다드까지 진격하여 성을 급습하였다. 술탄 아흐마드 잘라이르는 시리아로 피난했고, 맘루크 왕조 술탄 바르쿠크가 그를 보호하며 티무르의 사절을 살해하였다. 티무르는 바그다드 통치를 위해 사르바다르 왕자 쿠와자 마스우드를 남겨뒀지만, 아흐마드가 돌아오면서 쫓겨났다. 아흐마드는 인기가 없었지만 카라 코윤루의 카라 유수프에게서 원조를 받았다. 1399년 아흐마드는 오스만 제국으로 다시 피난했다.[444] 한편, 바그다드에 입성하며 맘루크 왕조와 대치하게 된 티무르는 테렉 강 인근에서 토크타미시를 격파하고 볼가 강 유역까지 진군했다. 킵차크 한국의 수도 사라이와 여러 무역 거점을 파괴하고 모스크바 대공국까지 침입한 뒤 1396년에 귀환했다.
1398년 티무르는 델리 술탄 왕조를 격파하고 델리를 점령했다. 1399년에 시작된 7년 전쟁에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반란을 일으킨 3남 미란 샤를 굴복시키고, 그루지아,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시리아로 진입하여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모술을 정복했다.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드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하여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저지하고, 아나톨리아의 오스만 영지를 옛 튀르크 영주들에게 반환했다. 이 원정을 통해 몽골 제국의 서쪽 절반이 티무르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오스만 제국, 맘루크 왕조가 티무르에게 명목상 복속하여 티무르의 지배 영역은 대제국으로 발전했다.
1368년, 한족 군대가 몽골을 중국에서 몰아내고 명나라가 건국되었다. 명 태조 주원장과 그의 아들 영락제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속국으로 삼았다. 1394년, 홍무제의 사절단은 티무르에게 그를 신하로 대하겠다는 서신을 전달했으나, 티무르는 사절인 부안, 곽기, 유위를 가두었다.[445] 1397년 홍무제의 사절 진덕문과 영락제의 즉위를 알리는 사절단 역시 억류되었다.
티무르는 결국 중국 침공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몽골 고원의 몽골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부하라까지 준비를 마쳤다. 엥크 칸은 그의 손자 올제이 테무르 칸을 보냈는데, 그는 사마르칸드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부얀시르 칸"으로도 알려졌다.[446]
1404년 말, 티무르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를 공격하여 원나라의 옛 영토를 되찾고자 했다. 그러나 원정 도중 오트라르에서 병에 걸려 1405년 2월에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 맏아들 자한기르의 둘째 아들 피르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티
5. 1. 초기 생애
티무르는 트란스옥시아나의 케시(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샤흐리사브즈) 근처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당시 차가타이 칸국의 일부였던 사마르칸트에서 남쪽으로 약 80km 떨어진 곳이다.[32] 그의 이름 '테무르'는 그의 모국어인 차가타이어로 "철"을 의미한다(비교: 우즈베크어 ''Temir'', 튀르키예어 ''Demir'').[33] 이는 칭기즈 칸의 출생 이름인 '테무진'과 어원적으로 관련이 있다.[34][35] 후대 티무르 왕조의 역사는 티무르가 1336년 4월 8일에 태어났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생애 동안의 대부분의 자료는 1320년대 후반의 출생일과 일치하는 나이를 제시한다. 많은 학자들은 1336년이라는 날짜가 훌라구 칸의 후손이자 그 해에 사망한 일칸국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아부 사이드 바하두르 칸의 유산과 연결하기 위해 고안되었을 것이라고 의심한다.[36][37]
그는 바를라스라는 몽골 부족[38][39] 출신이었는데, 이 부족은 여러 면에서 튀르키예화되었다.[40][41][42][43][44] 그의 아버지 타라가이는 이 부족의 하급 귀족으로 묘사된다.[32] 그러나 만츠는 티무르가 자신의 성공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나중에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를 과소평가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그가 특별히 권력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타라가이는 상당히 부유하고 영향력이 있었다고 말한다.[37] 이는 1360년 아버지가 죽은 후 티무르가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파르나마에서 알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재산에 대한 우려를 시사한다.[45] 타라가이의 사회적 중요성은 아랍샤가 그를 아미르 후세인 카라우나스의 궁정의 거물로 묘사한 사실에서 더욱 암시된다.[30] 게다가 모굴리스탄의 위대한 아미르 하미드 케레이드의 아버지는 타라가이의 친구였다고 한다.[46]
히주라력 736년 샤아반(Sha'ban)월 25일 화요일 밤[157](1336년4월 8일[158][159][160][161][162]/4월 9일[159]) 사마르칸드 남부 키슈(Kesh) 근교 호자 일갈(Khoja Ilgar) 마을에서 바를라스 부족의 귀족 아미르 타라가이(Amir Taraghai)의 집에서 태어났다.[163][164][165] 후대의 사서에서는 타라가이와 티무르 부자는 칭기스칸으로부터 차가타이에게 왕부로 주어진 바를라스 부족의 천인대장 카라찰 노얀(Qarachaar Noyan)의 후손이라고 전해지지만, 카라찰에서 타라가이에 이르는 인물들은 동시대 사료에 기록이 없는 자들뿐이며, 사실인지 의심스럽다고 여겨진다.[166] 바를라스 부족은 마웨라안나흐르를 지배하는 몽골의 국가에 속해, 모굴리탄(동투르키스탄)을 지배하는 동차가타이 칸국(모굴리탄 칸국)과 대립하고 있었다.
티무르의 유년기와 청년기 행적에 대해 기록된 신빙성 높은 기록은 극히 적다.[159] 바를라스 부족의 지류 출신인 아버지 타라가이의 집은 부유하다고는 할 수 없었고,[167] 티무르를 따르는 종자는 겨우 4, 5명[168] 또는 10명 정도였다.[169] 젊은 시절 티무르는 승마와 궁술을 배우고,[145] 페르시아어와 튀르크어에 더해 몽골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170]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타라가이에게 길러졌으며, 사냥과 가축 감시에 종사했다.[172] 이윽고 티무르의 인망과 능력에 매료된 탓인지, 그의 주위에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173]
젊은 시절 티무르는 차가타이 한국의 동서분열과 혼란을 틈타 하인들을 데리고 가축을 약탈하는 도적질을 일삼았지만, 뛰어난 군사지휘자로서 그 재능을 발휘하면서 서서히 인망을 모아 서차가타이 한국의 유력자로까지 성장하였다. 클라비호(Clavijo)의 보고와 아랍샤의 전기(傳記)에 따르면, 젊은 티무르는 수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약탈 행위를 저질렀다고 한다.[159] 티무르는 전리품을 후하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부하의 수는 늘어 강도단의 규모는 300명까지 불어났다고 전해진다.[174]
1363년경 티무르는 목동에게서 양을 훔치려고 했지만, 오른쪽 다리와 오른쪽 손에 두 개의 화살을 맞았고, 그 결과 두 손가락을 잃었다. 두 부상 모두 그를 평생 장애를 갖게 했다.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부상이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남서부의 다슈티 마르고에 있는 시스탄 칸의 용병으로 복무하는 동안 발생했다고 믿는다. 티무르의 부상과 장애는 "절름발이 티무르" 또는 페르시아어로 ''테무르(-이) 랑''이라는 별명을 낳았는데, 이는 서구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타메를레인이라는 이름의 어원이다.
이윽고 티무르는 서차가타이 칸국의 유력자 카자간에게 발탁되어, 20세가 되기 전에 카자간의 측근으로 등용된다.[175] 이때 티무르는 카자간의 손자 아미르 후세인(Amir Husain)과 친밀해진다.[175] 1358년경 카자간이 암살되고, 카자간의 아들 아브둘라흐(Abdullāh)가 실각하자, 통제력을 잃은 마웨라안나흐르 각지에 귀족들(아미르)이 할거하게 된다.[176] 당시 세력 구도는 다음과 같다.
지역 | 중심 부족 | 지도자 |
---|---|---|
카쉬카다리야 | 바를라스 부족 | 티무르의 삼촌 |
호젠트, 페르가나 | 자라이르 부족 | 바야지드(Bayazid) |
카불 | 카라나우스(Karanauz) 부족 | 후세인 (카자간의 손자) |
발흐 | 수르두즈(Sulduz) 부족 | 오르제이 부카(Orjei Buqa) |
이 외에도 각지의 도시에서 튀르크-몽골계 귀족과 토착 세력이 할거하며 서로 다투고 있었다.
1360년 동차가타이 한국의 투글루크 티무르가 트란스옥시아나를 침공하자, 티무르는 그에게 복종하여 투글루크 티무르의 아들 일리야스 호자의 부관으로 임명되는 한편, 바를라스부의 옛 영지를 하사 받았다. 그러나 곧 일리야스 호자를 배신하고, 카라우나스부의 아미르 후사인과 결탁하여 세력을 확대해 본거지로써 사마르칸드를 손에 넣었다. 이 기간에 전장에서 다리 한쪽을 다쳐 ‘절름발이 티무르’를 뜻하는 Tīmūr-i Lang 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것이 서양에서 그를 부르는 이름이 되어 타멜랑(또는 타메렝)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5. 2. 권력 장악
1360년 동차가타이 한국의 투글루크 티무르가 트란스옥시아나를 침공하자, 티무르는 그에게 복종하여 투글루크 티무르의 아들 일리야스 호자의 부관으로 임명되는 한편, 바를라스부의 옛 영지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곧 일리야스 호자를 배신하고, 카라우나스부의 아미르 후사인과 결탁하여 세력을 확대해 본거지로써 사마르칸드를 손에 넣었다. 이 기간에 전장에서 다리 한쪽을 다쳐 ‘절름발이 티무르’를 뜻하는 Tīmūr-i Langtr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것이 서양에서 그를 부르는 이름이 되어 타멜랑(또는 타메렝, 크리스토퍼 말로위(Christopher Marlowe)에 따르면 타메를란(Tamerlane))이라고 부른다고 한다.[15][47]그 후 트란스옥시아나의 패권을 둘러싸고 아미르 후사인과 대립했으며, 1369년에 후사인의 본거지 발흐를 공격해 후사인을 죽이고 트란스옥시아나의 패권을 장악했다. 1370년에 후사인이 내세운 칸인 카불 샤를 처형하고 그 대신에 오고타이의 후손인 수우르가트미시를 칸으로 옹립하였다. 그 해 후사인의 과부로써 칭기스칸의 자손이기도 한 왕녀를 왕비로 맞이하여 칭기스칸 가문의 사위(구르칸)를 자칭했다.

1360년 2월부터 3월에 걸쳐, 모굴리스탄 칸국의 투글루크 티무르 칸(Toghrul Temür)이 파견한 군대가 마웨라안나흐르(Mawarannahr)에 침입했다. 티무르는 투글루크 티무르의 군대에 출두하여, 아미르들이 물러간 후 투글루크 티무르를 알현했다.[177] 알현 자리에서 티무르의 부하 사이프 앗딘(Sayf al-Din)은 투글루크 티무르에게 티무르의 재능을 열거하며, 주군을 하지 대신할 지도자로 추천했다.[177] 알현 후 티무르는 하지 대신 바를라스 부족(Barlas)의 지도자 지위를 부여받고 키쉬(Kesh)의 통치를 인정받았다.[178]
1361년 3월부터 4월에 걸쳐 투글루크 티무르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다시 마웨라안나흐르를 공격했고, 티무르는 바를라스 부족의 지도자 지위와 키쉬 통치권을 재차 인정받았다. 또한 투글루크 티무르는 티무르의 재능을 인정하여, 마웨라안나흐르의 통치자로 임명한 아들 일리아스 호자(Ilyas Khoja)의 후견인으로 삼았다.[181] 그러나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티무르는 아내와 소수의 종자를 데리고 일리아스 호자의 곁을 떠나 산중으로 도망쳤다.[182]
5. 3. 정복 전쟁
티무르는 젊은 시절, 차가타이 한국의 혼란을 틈타 하인들과 가축을 약탈하는 도적질을 일삼았다. 그러나 뛰어난 군사 지휘 능력을 발휘하며 인망을 얻어 서차가타이 한국의 유력자로 성장했다.1360년 동차가타이 한국의 투글루크 티무르가 트란스옥시아나를 침공하자, 티무르는 그에게 복종하여 투글루크 티무르의 아들 일리야스 호자의 부관으로 임명되고 바를라스부의 옛 영지를 받았다. 그러나 곧 일리야스 호자를 배신하고 카라우나스부의 아미르 후사인과 결탁하여 세력을 확대, 사마르칸트를 본거지로 삼았다. 이 시기에 전장에서 다리를 다쳐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뜻의 'Tīmūr-i Lang'으로 불렸는데, 이것이 서양에서 그를 부르는 이름인 타메를란이 되었다.
이후 트란스옥시아나의 패권을 두고 아미르 후사인과 대립했으며, 1369년 후사인의 본거지 발흐를 공격해 그를 죽이고 트란스옥시아나의 패권을 장악했다. 1370년 후사인이 내세운 칸인 카불 샤를 처형하고 오고타이의 후손인 수우르가트미시를 칸으로 옹립했다. 그 해 후사인의 과부이자 칭기즈 칸의 자손인 왕녀를 왕비로 맞아 칭기스칸 가문의 사위(구르칸)를 자칭했다.
칭기스칸의 부계 자손(황금씨족)이 아니었던 티무르와 그의 후계자들은 스스로 칸에 즉위하지 않고 아미르 칭호를 사용했다. 명목상 칸이었던 칭기스칸 가문의 사위이자 칸 곁의 최고 유력자로서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1370년 중앙아시아에서 티무르 가문의 권력이 확립되고 티무르 가문에 의한 지배가 진행되면서 이를 티무르 왕조(티무르 제국)라고 불렀다.
티무르는 칭기스칸의 세계 제국 건설이라는 꿈을 이상으로 삼았고,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전투에서 승리하여 전리품을 휘하 부족들에게 분배해야 했으므로 대외 원정을 계속했다. 트란스옥시아나 통일 직후 황금씨족이 아님에도 칸을 칭하던 카마르 웃 딘을 응징하기 위해 모굴 칸국을 침공했으며, 쿵그라트 부족이 지배하던 호라즘을 병합했다. 1375년 주치의 후예 토크타미시를 지원하여 주치 울루스(킵차크 칸국)의 칸에 추대하고 주변 세력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1380년부터 일 칸국 왕조 해체 이후 분열 상태였던 이란으로 눈을 돌려 호라산을 정복하고, 1386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전쟁 끝에 아프가니스탄,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등을 지배했다.
1388년 토크타미시가 티무르 제국 치하의 아제르바이잔을 공격하자, 티무르는 토크타미시를 격파하고 이란 원정을 재개했다. 1392년에 시작된 5년간의 전쟁에서 페르시아령 쿠르디스탄을 공격했다.[442] 1393년 시라즈 함락 후 무자파르 왕국은 티무르의 속국이 되었으나, 샤 만수르 왕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티무르가 진압하여 무자파르 왕국을 완전히 합병했다. 이로써 티무르는 이란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곧바로 티무르는 킵차크 한국이 조지아를 이용해 이란 북부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조지아를 파괴했다.[443] 같은 해 8월, 티무르는 시라즈에서 8일 만에 바그다드까지 진격하여 성을 급습했다. 술탄 아흐마드 잘라이르는 시리아로 피난했고, 맘루크 왕조 술탄 바르쿠크가 그를 보호하며 티무르의 사절을 살해했다. 티무르는 바그다드 통치를 위해 사르바다르 왕자 쿠와자 마스우드를 남겨뒀지만, 아흐마드가 돌아오면서 쫓겨났다. 아흐마드는 인기가 없었지만 카라 코윤루의 카라 유수프에게서 원조를 받았다. 1399년 아흐마드는 오스만 제국으로 다시 피난했다.[444] 한편, 바그다드에 입성하며 맘루크 왕조와 대치하게 된 티무르는 테렉 강 인근에서 토크타미시를 격파하고 볼가 강 유역까지 진군했다. 킵차크 한국의 수도 사라이와 여러 무역 거점을 파괴하고 모스크바 대공국까지 침입한 뒤 1396년에 귀환했다.
1398년 티무르는 델리 술탄 왕조를 격파하고 델리를 점령했다. 1399년에 시작된 7년 전쟁에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반란을 일으킨 3남 미란 샤를 굴복시키고, 그루지아,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시리아로 진입하여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모술을 정복했다.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드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하여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저지하고, 아나톨리아의 오스만 영지를 옛 튀르크 영주들에게 반환했다. 이 원정을 통해 몽골 제국의 서쪽 절반이 티무르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오스만 제국, 맘루크 왕조가 티무르에게 명목상 복속하여 티무르의 지배 영역은 대제국으로 발전했다.
1360년경, 티무르는 주로 투르크계 부족민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끄는 유력한 군 지도자로 부상했다.[15] 차가타이 칸국의 칸과 함께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볼가 불가리아를 멸망시킨 카자간과 가족적 연관 및 이해관계를 맺고 10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호라산을 침략했다.[47] 이는 그가 이끈 두 번째 군사 원정이었으며, 그 성공은 호라즘과 우르겐치 정복 등의 추가적인 작전으로 이어졌다.
카자간이 살해된 후, 많은 권력 주장자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칭기스칸의 또 다른 후손이자 동차가타이 칸국의 칸인 카슈가르의 투글루크 티무르가 이 내분을 끊고 침략했다. 티무르는 침략자와 협상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대신 그와 합류하여 트란스옥시아나를 상으로 받았다. 이 무렵 그의 아버지가 사망했고, 티무르는 바를라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 후 투글루크는 그의 아들 일리야스 호자를 트란스옥시아나의 지배자로 임명하려 했지만, 티무르는 소규모 병력으로 이 침략을 격퇴했다.[47]
티무르의 투르크-몽골 유산은 그가 몽골 제국과 이슬람 세계를 통치하려 할 때 기회와 도전을 동시에 제공했다.[37] 몽골 전통에 따르면, 티무르는 칭기즈칸의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칸'이라는 칭호를 주장하거나 몽골 제국을 통치할 수 없었다. 따라서 티무르는 소유르가트미시를 괴뢰 샤가타이 칸으로 세워 명목상 발흐의 통치자로 삼고, 그는 칭기즈칸의 장남인 조치의 계보를 이은 자의 "보호자"로 행세하는 척했다.[48] 티무르는 대신 '아미르'(장군)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트란스옥사니아의 차가타이 칸국 통치자의 이름으로 행동했다.[37] 이러한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티무르는 칭기즈칸 계보의 공주와 '귀레겐'(왕족 사위)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칸의 칭호와 마찬가지로, 티무르는 이슬람 세계의 최고 칭호인 칼리프를 주장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직책은 무함마드의 종족인 쿠라이시에게만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티무르는 신에 의해 정해진 "초자연적인 개인적 권력"을 가진 자로서 자신의 신화와 이미지를 만들어 이러한 도전에 대응했다.[48] 티무르의 가장 유명한 칭호는 '사히브 키란'('합일의 군주')이었는데, 이는 점성술에 뿌리를 두고 있다.[49] 이 칭호는 그 이전에도 무함마드의 숙부인 함자 이븐 압드 알-무탈리브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고,[50] 마므루크 술탄 바이바르스와 일칸국의 여러 통치자들도 자신을 지칭하는 데 사용했다.[50] 그런 점에서 그는 단순히 정복자를 지칭하는 이슬람 세계의 기존 전통을 따랐다.[50]
이 칭호는 토성과 목성이라는 두 개의 "상위 행성"의 합을 의미하는데, 이는 길조의 징조이자 새로운 시대의 표시로 여겨졌다.[49] A. 아즈파르 모인에 따르면, '사히브 키란'은 메시아적 칭호로, 티무르가 "예언자 계보에서 내려온 기다려온 메시아"일 가능성을 암시하며, "새로운 시대, 아마도 종말 이전의 마지막 시대를 개막할" 것이라고 했다.[49]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신을 알리의 영적 후손으로 묘사하여 칭기즈칸과 쿠라이시의 혈통을 모두 주장했다.[51]
티무르는 그 후 35년 동안 여러 전쟁과 원정에 힘썼다. 그는 적들을 정복하여 국내 통치를 공고히 할 뿐만 아니라, 외국 강대국들의 영토를 침범하여 영토 확장을 추구했다. 서쪽과 북서쪽으로의 정복은 그를 카스피 해 근처의 땅과 우랄 강과 볼가 강 유역으로 이끌었다. 남쪽과 남서쪽의 정복은 바그다드, 카르발라와 이라크 북부를 포함한 페르시아의 거의 모든 주를 포함했다.
티무르의 가장 강력한 적수 중 하나는 징기스칸의 후손인 또 다른 몽골 지배자 토크타미쉬였다. 토크타미쉬는 티무르의 궁정에서 망명자였던 후에 동쪽 킵차크와 골든 호드의 지배자가 되었다. 즉위 후 그는 호라즘과 아제르바이잔의 소유권을 놓고 티무르와 다퉜다. 그러나 티무르는 여전히 러시아에 대항하여 그를 지원했고, 1382년에 토크타미쉬는 모스크바 대공국을 침략하여 모스크바를 불태웠다.
러시아 정교회 전통에 따르면, 나중에 1395년에 랴잔 공국의 국경에 도달한 티무르는 예레츠를 점령하고 모스크바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바실리 1세는 군대를 이끌고 콜롬나로 가서 오카 강 유역에서 멈추었다. 성직자들은 유명한 블라디미르의 성모 이콘을 블라디미르에서 모스크바로 가져왔다. 길을 따라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오, 신의 어머니여, 러시아의 땅을 구원하소서!"[52][53] 갑자기 티무르의 군대가 후퇴했다. 8월 26일 티무르로부터 러시아 땅이 기적적으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여, 가장 거룩한 신의 어머니의 블라디미르 이콘을 맞이하는 것을 기념하는 전 러시아 축제가 제정되었다.[54]

1335년 일칸국 통치자 아부 사이드 사후 페르시아에는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 결국 페르시아는 무자파르 왕조, 카르티드 왕조, 에르트니드 왕조, 초반 왕조, 인주 왕조, 잘라이르 왕조, 사르바다르 왕조 사이에 분열되었다. 1383년 티무르는 페르시아 정복이라는 장기간의 군사 원정을 시작했지만, 1381년 사르바다르 왕조의 쿠자 마수드가 항복한 후 이미 페르시아 대호라산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티무르는 페르시아 원정을 헤라트에서 시작했다. 헤라트가 항복하지 않자 티무르는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대부분의 시민들을 학살했다. 헤라트는 샤 루흐가 1415년경 재건을 명령할 때까지 폐허로 남았다.[55] 그 후 티무르는 장군을 파견하여 반란을 일으킨 칸다하르를 점령했다. 헤라트 점령으로 카르티드 왕조는 항복하여 티무르의 봉신이 되었고,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1389년 티무르의 아들 미란 샤에 의해 완전히 병합되었다.
티무르는 그 후 자그로스 산맥을 점령하기 위해 서쪽으로 향하며 마잔다란을 통과했다. 페르시아 북부를 여행하는 동안 그는 당시 마을이었던 테헤란을 점령했는데, 테헤란은 항복했기 때문에 관대하게 다뤄졌다. 그는 1384년 솔타니예를 포위 공격했다. 1년 후 대호라산이 반란을 일으켰고, 티무르는 이스피자르를 파괴하고 포로들을 산 채로 성벽에 박았다. 이듬해 미흐라바니드 왕조의 지배하에 있던 시스탄 왕국이 황폐화되었고, 수도 자랑은 파괴되었다. 티무르는 그 후 수도 사마르칸트로 돌아가 티무르의 조지아 침공과 토크타미시-티무르 전쟁 침공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1386년 티무르는 자그로스 산맥을 점령하려 할 때처럼 마잔다란을 통과했다. 그는 이전에 점령했던 솔타니예 근처로 갔지만, 대신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거의 저항 없이 타브리즈와 마라가를 점령했다.[56] 그는 국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도록 명령했고, 이 세금은 솔타니예에 대한 통제권도 함께 부여받은 아딜 아카에 의해 징수되었다. 아딜은 나중에 티무르가 그를 부패로 의심했기 때문에 처형되었다.

티무르는 그 후 조지아와 골든 호드 원정을 시작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하여 페르시아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일시 중단했다.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장군들이 페르시아에서 정복한 도시와 땅을 잘 보호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섭정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그의 아들 미란 샤는 반란을 일으킨 봉신 왕조들을 병합해야 했지만, 그의 영토는 유지되었다. 그래서 그는 페르시아의 나머지 지역, 특히 남쪽의 두 주요 도시인 이스파한과 쉬라즈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1387년 군대와 함께 이스파한에 도착했을 때, 그 도시는 즉시 항복했고, 그는 일반적으로 항복한 도시들(헤라트와 달리)을 다루었던 것처럼 상대적으로 관대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이스파한이 세금 징수원과 티무르의 병사들을 살해하면서 티무르의 세금에 반항하자, 그는 도시 시민들을 학살하라고 명령했고, 사망자 수는 10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추산된다.[57] 한 목격자는 각각 약 1,500개의 머리로 만들어진 28개 이상의 탑을 세었다.[58] 이것은 "도시에 대한 테러의 체계적인 사용...타메를레인의 전략적 요소의 필수적인 요소"로 묘사되어 왔으며, 그는 이것이 저항을 억제함으로써 유혈 사태를 예방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학살은 선택적이었고, 그는 예술가와 교육받은 사람들을 보호했다.[57] 이것은 후에 다음 위대한 페르시아 정복자 나디르 샤에게 영향을 미쳤다.
티무르는 그 후 1392년에 서쪽으로 5년간의 원정을 시작하여 이란 쿠르디스탄을 공격했다.[59] 1393년 쉬라즈는 항복 후 함락되었고, 무자파르 왕조는 티무르의 봉신이 되었지만, 왕자 샤 만수르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패배했고, 무자파르 왕조는 병합되었다. 그 직후 조지아가 황폐화되어 골든 호드가 북부 이란을 위협하는 데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60] 같은 해 8월 티무르는 쉬라즈에서 단 8일 만에 바그다드로 행군하여 바그다드를 기습했다. 술탄 아흐마드 잘라이르는 시리아로 도망쳤고, 맘루크 술탄 바르쿠크는 그를 보호하고 티무르의 사절들을 죽였다. 티무르는 사르바다르 왕자 쿠자 마수드를 바그다드를 통치하도록 남겨두었지만, 아흐마드 잘라이르가 돌아왔을 때 쫓겨났다. 아흐마드는 인기가 없었지만 카라 코윤루의 카라 유수프의 도움을 받았고, 1399년 다시 도망쳤는데, 이번에는 오스만 제국으로 갔다.[61]
카르사크파이 비문

한편, 이제 킵차크 칸국의 칸이 된 톡타미시는 자신의 후원자에게 등을 돌려 1385년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했다. 티무르의 불가피한 반응으로 톡타미시-티무르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 티무르는 콘두르차 강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 후 톡타미시와 그의 군대 일부는 탈출할 수 있었다. 톡타미시의 초기 패배 후, 티무르는 톡타미시의 영토 북쪽에 있는 모스크바 대공국을 침공했다. 티무르의 군대는 랴잔을 불태우고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그는 남쪽에서 톡타미시의 재침공으로 인해 오카 강에 도착하기 전에 철수했다.
톡타미시와의 갈등 초기 단계에서 티무르는 10만 명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700마일 이상 스텝 지대를 진격했다. 그런 다음 그는 서쪽으로 약 1,000마일을 진격하며 10마일이 넘는 전선을 형성했다. 진격하는 동안 티무르의 군대는 북쪽으로 충분히 진출하여 백야 지역에 도달했고, 이로 인해 무슬림 병사들이 살라트의 긴 일정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 불평했다. 그때 톡타미시의 군대는 볼가 강 동쪽 기슭, 오렌부르크 지역에 포위되었고 1391년 콘두르차 강 전투에서 궤멸되었다.
갈등의 두 번째 단계에서 티무르는 카프카스 지역을 통해 톡타미시의 영토를 침공하는 다른 경로를 선택했다. 1395년 티무르는 테렉 강 전투에서 톡타미시를 패배시키며 두 군주 간의 싸움에 종지부를 찍었다. 톡타미시는 자신의 권력이나 명성을 회복할 수 없었고, 약 10년 후 현재 튜멘 지역에서 사망했다. 티무르의 군사 작전 기간 동안 그의 군대는 킵차크 칸국의 수도인 사라이와 아스트라한을 파괴하여 킵차크 칸국의 실크로드를 교란시켰다. 킵차크 칸국은 티무르에게 패한 후 더 이상 권력을 유지하지 못했다.
1393년 5월, 티무르의 군대가 안주단을 침략하여, 마잔다란의 이스마일파 공격 1년 만에 이스마일파 마을을 크게 파괴했다. 요새와 터널 시스템으로 볼 때 마을은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티무르의 병사들은 위쪽 수로를 끊어 터널을 물로 채웠다. 티무르가 이 마을을 공격한 이유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종교적 신념과 신의 뜻을 수행하는 자로서의 그의 자기 인식이 그의 동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62] 페르시아 역사가 흐완드미르는 페르시아 이라크에서 이스마일파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 지역 주민 중 일부는 이에 불만을 품었고, 흐완드미르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티무르에게 불만을 제기하여, 그가 이스마일파를 공격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62]
14세기 후반, 1320년부터 델리 술탄 왕조를 통치해 온 투글루크 왕조는 쇠퇴하였다. 대부분의 지방 총독들이 독립을 선언하였고, 술탄 왕조는 이전 영토의 일부로 축소되었다.[64] 이러한 혼란은 티무르의 주목을 끌었고, 그는 1398년 술탄 나시르우드딘 마흐무드 샤 투글루크 통치 시절 인도 아대륙을 침략하였다. 1398년 9월 30일 9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인더스 강을 건넌 그는 툴람바를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하였다.[64] 그는 손자인 피르 무하마드를 선봉에 세워 6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무탄을 함락시켰다.[64] 대부분의 귀족들이 항전 없이 항복했기 때문에 그의 침략은 별다른 저항 없이 진행되었지만, 그는 툴람바와 디팔푸르 사이의 술라지 강에서 말릭 자스랏이 이끄는 2,000명의 병력의 저항에 직면하였다. 자스랏은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63][64] 다음으로 그는 라즈푸트 지도자 라이 둘 찬드가 방어하고 있던 바트너 요새를 함락시키고 파괴하였다.[65]
델리로 진군하는 동안 티무르는 카라반을 약탈한 후 숲 속으로 사라지는 자트 농민들의 저항에 직면하였다. 그는 수천 명의 자트족을 죽이고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았다.[66][67] 그러나 델리의 술탄 왕조는 그의 진격을 막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68]
델리 함락 (1398)
이 전투는 1398년 12월 17일에 벌어졌다. 전투 전, 티무르는 인도 원정에서 이전에 포로로 잡은 약 10만 명의 노예들을 학살했다. 이는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69]
술탄 나시르우드딘 마흐무드 샤 투글루크와 말루 이크발의 군대는 사슬 갑옷을 입힌 전투 코끼리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코끼리의 엄니에는 독이 발라져 있었다. 타타르 군대가 코끼리를 두려워하자, 티무르는 자신의 군인들에게 진지를 앞에 파도록 명령했다. 그런 다음 티무르는 낙타에 실을 수 있는 만큼 많은 나무와 건초를 싣게 했다. 전투 코끼리가 돌격해오자, 티무르는 건초에 불을 지르고 쇠막대로 낙타를 찔렀다. 고통에 울부짖는 낙타들이 코끼리들을 향해 돌격했고, 티무르는 코끼리가 쉽게 공황 상태에 빠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등에서 불꽃이 솟구치는 낙타들이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기이한 광경에 직면하자, 코끼리들은 방향을 돌려 자신의 진영으로 돌격했다. 티무르는 나시르우드딘 마흐무드 샤 투글루크의 군대의 혼란을 이용하여 손쉽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나시르우드딘 마흐무드 샤 투글루크는 잔여 병력과 함께 도망쳤다.[70][71][72]
델리 술탄국의 함락은 티무르의 가장 크고 가장 파괴적인 승리 중 하나였다. 당시 델리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델리 시는 약탈당해 폐허로 변했고, 인구는 노예로 전락했다.[73] 도시 함락 후, 시민들의 투르크-몽골족에 대한 반란이 발생하여 도시 성벽 안에서 보복적인 대학살이 일어났다. 델리 시민들의 3일간의 반란 후, 도시는 시민들의 부패한 시체 냄새로 진동했고, 그들의 머리는 구조물처럼 세워졌으며 시체는 티무르의 병사들에 의해 새들의 먹이로 남겨졌다고 한다. 티무르의 델리 침공과 파괴는 여전히 인도를 휩쓸고 있던 혼란을 지속시켰고, 도시는 수십 년 동안 막대한 손실에서 회복할 수 없었다.

1399년 말 이전에 티무르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1세와 이집트의 마멜루크 술탄 나시르 앗딘 파라지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바예지드는 아나톨리아에 있는 투르크멘과 무슬림 통치자들의 영토를 병합하기 시작했다. 티무르가 아나톨리아 베이의 투르크멘 통치자들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자, 그들은 티무르의 보호를 받았다.
1400년, 티무르는 조지아를 침략했다. 생존자 중 6만 명이 넘는 현지 주민들이 노예로 잡혔고, 많은 지역이 인구 감소를 겪었다.[74] 그는 또한 소아시아의 시바스를 약탈했다.
그런 다음 티무르는 시리아로 눈을 돌려 알레포를 약탈했고,[75] 다마스쿠스를 포위했다.[76] 장인들을 제외한 도시 주민들은 학살당했고, 장인들은 사마르칸드로 강제 이주되었다.
티무르는 1401년 6월 바그다드를 침략했다. 도시 함락 후 시민 2만 명이 학살당했다. 티무르는 모든 병사가 최소한 두 개의 잘린 사람 머리를 가져와 자신에게 보여주라고 명령했다. 죽일 사람이 부족해지자 많은 전사들은 전투 중에 포로로 잡힌 사람들을 죽였고, 포로가 부족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아내를 참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77] 영국 역사가 데이비드 니콜은 그의 저서 "몽골 워로드"에서 익명의 당대 역사가를 인용하여 티무르의 군대를 "온 시골을 뒤덮고 약탈하고 파괴하는 개미와 메뚜기"에 비유했다.[78]
앙카라 전투, 오스만 왕조 간극기
한편, 티무르와 바예지드 1세 사이에는 수년간 모욕적인 서신이 오갔다. 두 통치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모욕했지만, 티무르는 바예지드의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약화시키고 그의 군사적 성공의 중요성을 축소하는 것을 선호했다.
다음은 티무르가 오스만 술탄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 발췌문이다.
> 믿으시오, 당신은 고작 개미일 뿐입니다. 코끼리와 싸우려 하지 마시오. 그들은 당신을 발밑에 짓눌러 버릴 것입니다. 당신과 같은 하찮은 왕자가 우리와 겨룰 수 있겠소? 그러나 당신의 허풍은 놀랍지 않습니다. 투르크멘은 결코 판단력 있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충고를 따르지 않으면 후회할 것입니다.[79]

마침내 티무르는 아나톨리아를 침공하여 1402년 7월 20일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드를 패배시켰다. 바예지드는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고 이후 감옥에서 사망하여 12년간의 오스만 왕조 간극기를 초래했다. 티무르가 바예지드와 오스만 제국을 공격한 명분은 셀주크 왕조의 권위 회복이었다. 티무르는 몽골 정복자들에 의해 통치권을 부여받았던 셀주크인들을 아나톨리아의 정당한 통치자로 여겼는데, 이는 다시 한번 티무르가 칭기즈 칸의 정통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402년 12월 티무르는 기독교 성 요한 기사단의 요새였던 스미르나 도시를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스스로를 ''가지'' 혹은 "이슬람의 전사"라고 칭했다.
5. 4. 명 원정 시도와 죽음
1368년, 한족 군대가 몽골을 중국에서 몰아내고 명나라가 건국되었다. 명 태조 주원장과 그의 아들 영락제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속국으로 삼았다. 1394년, 홍무제의 사절단은 티무르에게 그를 신하로 대하겠다는 서신을 전달했으나, 티무르는 사절인 부안, 곽기, 유위를 가두었다.[445] 1397년 홍무제의 사절 진덕문과 영락제의 즉위를 알리는 사절단 역시 억류되었다.티무르는 결국 중국 침공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몽골 고원의 몽골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부하라까지 준비를 마쳤다. 엥크 칸은 그의 손자 올제이 테무르 칸을 보냈는데, 그는 사마르칸드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부얀시르 칸"으로도 알려졌다.[446]
1404년 말, 티무르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를 공격하여 원나라의 옛 영토를 되찾고자 했다. 그러나 원정 도중 오트라르에서 병에 걸려 1405년 2월에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 맏아들 자한기르의 둘째 아들 피르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티무르의 침공 우려로 자유관의 요새가 강화되었다.[87]
티무르는 봄에 전투를 선호했지만, 이례적으로 겨울 원정을 시작했다. 1404년 12월, 명나라에 대한 군사 원정을 시작하고 명나라 사신을 구금했다. 그는 시르다리야 강 건너편에 진을 치고 있는 동안 병이 들었고, 1405년 2월 17일 또는 18일에 파라브에서 사망했다.[89] 그의 사망 후, 부안을 비롯한 명나라 사신들은 그의 손자인 할릴 술탄에 의해 석방되었다.[82]
클레멘츠 마크햄에 따르면, 티무르의 시신은 향료와 장미수로 방부 처리되어 흑단 관에 넣어져 사마르칸트로 보내져 매장되었다.[90] 그의 묘인 구르-에-아미르는 여전히 사마르칸트에 있다.[91]
티무르는 명나라 원정 계획을 1397년 말부터 진행했으며[332], 이 원정은 이교도에 대한 “성전”으로 간주되었다.[333][334] 티무르의 동방 원정의 진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원정을 앞두고 티무르는 대규모 손자의 결혼식을 열고, 동시에 죄인들에게 형벌을 내렸다.[335] 식이 끝나기 전에, 모든 귀족 앞에서 피르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선포했다.[335]
1404년 11월 27일, 티무르는 사마르칸드를 출발하여 동방 원정을 향했다.[336] 진군 중 티무르는 화해를 청하는 토크타미쉬의 사자를 만나 원조를 약속했다.[337][338] 이 해는 기후가 나빠 1월에 오트랄에 간신히 도착했지만, 티무르는 병에 걸렸다.[339]
티무르는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술을 계속 마셨지만 결국 쓰러져,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1405년 2월 18일 오트랄에서 병으로 사망했다.[320][340][343]
티무르의 시신은 장식된 관에 실려 은밀히 사마르칸드로 운반되었다.[343] 승하 후 5일 뒤, 티무르의 시신은 사마르칸드의 구르-에-아미르 묘에 안치되었다.[340][344] 3월 18일 사마르칸드를 점령한 할릴 술탄에 의해 다시 공식적인 장례식이 거행되었다.[340]
6. 평가
티무르는 군사적인 면에서 천재적인 인물로, 평생 동안 벌인 전투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정을 할 때 이슬람교적인 문화로서 도시 건설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약탈과 파괴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칭기즈 칸은 항복하는 적을 살려주었지만, 티무르는 항복하는 적도 가차없이 죽이는 잔인함을 보였다.[37]
티무르 1대에 쌓아올린 티무르 왕조는 그 지배도 티무르 개인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티무르 생전에 확고한 지배 체제가 준비되지 못했다. 그래서 티무르 사후 그의 제국은 급속도로 흔들리고 분열되었다.
티무르의 투르크-몽골 유산은 그가 몽골 제국과 이슬람 세계를 통치하려 할 때 기회와 도전을 동시에 제공했다.[37] 몽골 전통에 따르면, 티무르는 칭기즈 칸의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칸'이라는 칭호를 주장하거나 몽골 제국을 통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티무르는 수유르가트미시를 괴뢰 차가타이 칸으로 내세워 명목상 발흐의 통치자로 삼고, 자신은 칭기즈 칸의 장남인 조치의 계보를 이은 자의 "보호자"로 행세하는 척했다.[48] 티무르는 대신 '아미르'(amir, 장군)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트란스옥시아나의 차가타이 통치자의 이름으로 행동했다.[37] 이러한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티무르는 칭기즈칸 계보의 공주와 결혼하여 '귀레겐'(güregen, 왕족 사위)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칸의 칭호와 마찬가지로, 티무르는 이슬람 세계의 최고 칭호인 칼리프를 주장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직책은 무함마드의 종족인 쿠라이시에게만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티무르는 신에 의해 정해진 "초자연적인 개인적 권력"을 가진 자로서 자신의 신화와 이미지를 만들어 이러한 도전에 대응했다.[48] 티무르의 가장 유명한 칭호는 '사히브 키란'(Sahib Qiran, '합일의 군주')이었는데, 이는 점성술에 뿌리를 두고 있다.[49]
티무르는 실천적인 수니파 무슬림이었으며, 트란스옥시아나에 영향력이 있었던 낙슈반디 학파에 속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주요 공식 종교 고문은 하나피 학자 '압드 울-자바르 크와라즈미였다. 티르미드에서 그는 자신의 영적 멘토인 사이드 바라카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발흐 출신 지도자이며 티무르와 함께 구르 에미르에 묻혔다.[101][102][103]
티무르는 알리와 아흘 알 바이트를 높이 존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여러 학자들에 의해 "친시아파"적 입장을 취했다고 언급되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사하바의 기억을 훼손한 죄로 시아파를 처벌하기도 했다.[104] 티무르는 수니파 변론으로 시아파를 공격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동시에 종교적 이유로 수니파를 공격하기도 했다.[105]
티무르는 군사적 천재이자 뛰어난 전술가로 여겨지며, 중앙아시아 통치 기간 동안 유동적인 정치 구조 속에서 유목민들의 충성스러운 추종을 얻고 유지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 그는 또한 직관적으로뿐만 아니라 지적으로도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다. 사마르칸트와 그의 여러 여행에서 티무르는 저명한 학자들의 지도 아래 페르시아어, 몽골어, 튀르크어를 배웠다. (아흐마드 이븐 아랍샤에 따르면, 티무르는 아랍어를 할 줄 몰랐다.)[106]
존 조셉 손더스에 따르면 티무르는 "이슬람화되고 이란화된 사회의 산물"이었지, 유목민이 아니었다.[108] 티무르는 학식 있는 군주였으며, 학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고, 그들에게 관대하고 너그러웠다. 그는 페르시아 시인 하피즈와 동시대인이었다.[109][110]
티무르의 원정의 실제 동기는 그의 말처럼 "세상의 거주 가능한 모든 지역이 두 명의 왕을 가질 만큼 크지 않다"는 제국주의적 야망이라는 공통된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란 외에도 티무르는 침략한 국가들을 단순히 약탈하여 그의 고향 사마르칸트를 부유하게 하는 데 사용했고, 정복된 지역은 방치했는데, 이는 그의 사망 후 그의 제국이 비교적 빠르게 붕괴된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111]
티무르는 종종 대화에서 페르시아어 표현을 사용했고, 그의 모토는 페르시아어 구절 ''rāstī rustī'' (راستی رستیfa, "진실은 안전이다" 또는 ''"veritas salus"''를 의미함)였다.[106]
티무르는 특히 스페인과 프랑스를 포함한 여러 유럽 국가들과 수많은 서신과 외교적 교류를 가졌다. 엔리케 3세의 궁정과 티무르의 궁정 사이의 관계는 중세 카스티야 외교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1402년 앙카라 전투 당시, 펠라요 데 소토마요르와 페르난도 데 팔라수엘로스라는 두 명의 스페인 대사가 이미 티무르와 함께 있었다.
그에 대한 답례로 엔리케 3세는 1403년에서 1406년 사이에 루이 곤살레스 데 클라비호를 중심으로 사마르칸트에 있는 티무르의 궁정으로 유명한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들은 돌아오는 길에 티무르가 카스티야 왕을 "자신의 친아들과 같다"고 여겼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클라비호에 따르면, 티무르가 스페인 사절단을 잘 대우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카타이의 군주"(즉, 영락제) 즉, 중국 통치자의 사절들을 멸시했다. 클라비호의 사마르칸트 방문은 유럽 사람들에게 카타이(중국)의 소식을 전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 마르코 폴로의 여행 이후 지난 세기 동안 직접 방문한 유럽인은 거의 없었다.
프랑스 기록 보관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 1402년 7월 30일 티무르가 샤를 6세에게 보낸 서한. 아시아로 상인을 파견할 것을 제안하는 내용이며, 페르시아어로 작성되었다.[113]
- 1403년 5월 서한. 이것은 티무르가 샤를 6세에게 보낸 서한과 그의 아들 미란 샤가 바예지드 1세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며 기독교 군주들에게 보낸 또 다른 서한의 라틴어 번역본이다. 스미르나에서의 승리.[114]

티무르의 유산은 복합적이다. 중앙아시아는 그의 통치 아래 번영했지만,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델리를 비롯한 다른 아랍, 조지아, 페르시아, 인도 도시들은 약탈당하고 파괴되었으며 인구는 학살당했다. 따라서 티무르는 무슬림 중앙아시아에서는 여전히 긍정적인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의 가장 큰 잔혹 행위가 자행된 아라비아, 이라크, 페르시아, 인도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악당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븐 할둔은 당시 다른 정복자들은 할 수 없었던 일인 무슬림 세계의 상당 부분을 통일했다는 점에서 티무르를 칭찬한다.[116] 다음으로 위대한 중동 정복자인 나디르 샤는 티무르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그의 자신의 원정에서 티무르의 정복과 전투 전략을 거의 재현했다. 티무르와 마찬가지로 나디르 샤는 코카서스, 페르시아, 중앙아시아를 정복했고 델리를 약탈하기도 했다.[117]
티무르의 짧은 제국은 또한 투르크-페르시아 전통을 트란스옥시아나에 융합시켰고, 그가 자신의 영토에 편입한 대부분의 영토에서 페르시아어는 민족에 관계없이 행정과 문학 문화(''디완'')의 주요 언어가 되었다. 또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투르크 문학에 대한 일부 기여가 기록되었으며, 그 결과 투르크 문화적 영향이 확장되고 번영했다. 차가타이어의 문학적 형태는 문화적 및 공용어로서 페르시아어와 함께 사용되었다.[118]
티무르는 이전에는 기독교의 주요 종파였지만 그 이후로는 현재 아시리아 삼각지대로 알려진 작은 지역에 대부분 국한된 동방 교회를 사실상 멸절시켰다.[119]
티무르는 우즈베키스탄에서 공식적으로 국가 영웅으로 인정받고 있다. 타슈켄트에 있는 그의 기념비는 이전에 카를 마르크스의 동상이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타슈켄트에 있는 티무르 박물관은 그의 계보와 생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시 "타메를레인"은 티무르의 삶을 각색한 버전을 따른다.

1941년 6월 19일, 티무르의 시신이 그의 묘에서 발굴되었고, 소련의 인류학자인 미하일 M. 게라시모프, 레프 V. 오샤닌 및 V. 야. 제젠코바가 그의 유해를 조사했다. 게라시모프는 그의 두개골을 바탕으로 티무르의 얼굴을 복원했고, 그의 얼굴 특징이 "전형적인 몽골계 특징" 즉, 현대 용어로는 동아시아인의 특징을 보였다고 결론 내렸다.[124][125][126] 티무르의 두개골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는 그가 주로 "남시베리아 몽골계 유형"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준다.[127] 티무르는 당시로서는 장신이었다. 조사 결과 티무르는 부상으로 인해 절뚝거렸으며 오른팔이 위축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의 오른쪽 대퇴골은 슬개골과 붙어 있었고, 무릎 관절의 형태는 그가 항상 다리를 구부린 채로 있었고 따라서 현저하게 절뚝거렸을 것이라는 것을 시사한다.[128] 그는 넓은 가슴을 가졌고, 머리카락과 수염은 붉은색이었다.[129]
티무르의 묘비에는 "내가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설 때, 세상은 떨 것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게라시모프가 시신을 발굴했을 때 관 안쪽에 "내 무덤을 여는 자는 나보다 더 무서운 침략자를 풀어놓을 것이다"라는 추가적인 비문이 발견되었다고도 한다.[130] 게라시모프 주변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날조라고 주장하지만, 티무르의 저주로 알려진 이 전설은 계속해서 전해진다. 어쨌든, 게라시모프가 발굴을 시작한 지 3일 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132] 소련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하기 직전인 1942년 11월, 티무르는 이슬람식으로 재매장되었다.

티무르를 묘사한 것으로 알려진 초상화 중에는 신뢰할 만한 것이 없으며, 그의 용모를 자세히 기록한 문헌도 적다.[345]
말년에 티무르를 직접 만났던 인물 중 하나인 아랍샤는 티무르의 용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다. 큰 머리와 짙은 눈썹,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손발이 길었지만, 오른쪽 다리는 불편했다. 눈은 촛불과 같았지만, 빛은 없었다.”[345][346] 키는 약 170cm로, 14세기 당시 사람들 중에서는 장신에 속한다.[347]
티무르는 오른쪽 다리가 불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절름발이 티무르”를 의미하는 “타메를랑(Tamerlane)” “티무르 랑(Timur Lang)”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1941년 5월부터 6월에 걸쳐,[350] 소련의 조사단이 사마르칸트의 구르 에미르 묘 조사를 실시하였고, 미하일 게라시모프에 의해 묘에 안치되어 있던 티무르의 유해도 조사되었다. 이때의 조사를 통해 티무르는 붉은색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손, 팔꿈치, 무릎의 세 곳에 화살 상처를 입었던 것이 밝혀졌다.[346] 또한, 조사단은 티무르의 얼굴을 몽골로이드를 기반으로 코카소이드의 특징이 약간 가미된 용모로 분석했다.[351]
농담이나 거짓말을 싫어하는 성격이었으며,[352] 읽어주는 글을 모두 암기할 정도로 뛰어난 기억력을 지녔다.[145][353] 티무르는 음악을 좋아하여 아랍에서 중국에 이르는 동서양의 음악가들로 구성된 연주단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354]
티무르는 읽고 쓰지는 못했지만, 그를 만난 사람들은 대개 그를 교양인이라고 생각했다.[352] 국가가 확장되면서 티무르는 역사에 대한 강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356] 원정 중 시간이 날 때면 신하에게 책을 읽어주도록 했고, 특히 역사서를 좋아했다고 한다.[352] 역사 외에도 의학, 천문학, 수학의 가치를 인정했고, 건축에도 관심을 보였다.[352] 티무르는 학자뿐만 아니라 예술가와 장인들에 대해서도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170]
티무르가 만난 학자 중 한 명으로 이슬람 세계를 대표하는 역사가 이븐 할둔이 알려져 있다. 1401년 다마스쿠스를 함락시켰을 때 티무르는 마멜루크 왕조의 사자에게 할둔의 소재를 물었고, 할둔은 티무르가 면회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티무르에게 갔다. 두 사람은 통역을 통해 대화를 나누었고, 할둔의 고향인 마그레브의 사정에 대해 강한 관심을 가진 티무르를 위해 할둔은 지리서 『마그레브의 사정』을 헌정했다.[357] 그리고 아랍어로 쓰인 『마그레브의 사정』은 후대에 뛰어난 역사서를 남기려는 티무르의 생각에 따라 그의 서기관에 의해 튀르크어로 번역되었다.[358] 할둔은 35일 동안 티무르의 진영에 머물면서 환대를 받고 티무르와 대화를 나누었다.[359] 이집트로 돌아간 후 할둔은 모로코의 마리니드 왕조 술탄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티무르의 지성과 탐구심을 칭찬하는 글을 썼다.[360]

이슬람교를 믿으면서도 몽골 전통을 따랐던 티무르는 술을 매우 좋아했으며,[366][367], 전통적인 몽골 샤머니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368] 티무르는 동료인 이슬람교도들을 살해하고 때로는 노예로 삼았다. 또한 모스크를 더럽히고 이맘을 살해하는 등 경건한 이슬람교도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행동이 많이 보였다.[366] 티무르는 마니교의 교조 마니가 그렸다는 그림을 장식하고,[354] 페르시아와 바그다드의 화가들에게 궁전을 장식하는 벽화를 그리게 했다.[370]
티무르는 독실한 무슬림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웠지만,[371], 어느 정도의 신앙심도 가지고 있었으며, 수피즘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372][373] 수피즘뿐만 아니라 정통파 이슬람에도 존경을 표했으며, 티무르는 울라마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이슬람 학자들의 저술 활동에 보호를 제공했다.[373]
티무르는 아버지 타라가이가 사사했던 수피 샴수딘 클랄을 존경했고, 자신의 군사적 성공은 클랄의 기도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회상했다.[375] 발흐 포위전 당시 티무르의 진영을 방문한 수피 사이드 바라카는 티무르의 성공을 예언했고, 티무르는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376] 바라카는 종교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티무르에게 조언을 주었고, 1404년에 사망했다.[377] 티무르는 자신이 죽은 후에는 바라카의 발치에 묻히고 싶어했고, 티무르가 죽은 후 바라카의 유해는 구르 에미르 묘에 옮겨져 티무르의 곁에 안치되었다.[378] 1397년에는 야시에 있는 수피 아흐마드 야사위의 무덤을 순례했다. 이때 야사위의 묘에 용지를 와크프로 기증하고, 영묘의 증축을 명령했다.[380]
어떤 연대기에는 티무르가 기독교 사원의 신성과 기독교도의 신앙심에 이해를 보였다는 전승이 기록되어 있다.[381] 3년 전쟁에서 아르메니아 공략 당시, 티무르는 학살을 피해 동굴 속 수도원에 숨어 있던 기독교도 집단을 만났고, 그들에게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수도원이 보관하고 있는 오래된 사본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기독교도들은 목숨보다 소중한 사본의 제공을 거절했고, 그들의 신앙심에 감동한 티무르는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한다.[381]
원정 중 티무르는 저항하는 적을 굴복시키기 위해 종종 초토화 작전을 사용했다.[382] 전투에 앞서 도시에 항복을 권하는 사자를 보냈지만, 협상이 결렬되면 도시는 학살과 파괴의 대상이 되었다.[383]
정복지에서 얻는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원칙적으로 티무르 군은 병사들에게 정복지에서의 약탈과 강간을 금지했다.[284] 하지만, 정복지에서 저항의 징후가 보이면 티무르는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 대량 학살을 자행하고 주민들을 복종시켰다. 헤라트, 이스파한에서 행해진 '보복'을 위한 학살, 델리에서는 자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학살이 자행되었다.[284] 비이슬람교도에 대해서는 학살 자체를 즐기는 경향도 있었다.[284]
사이드(예언자 무함마드의 자손), 울라마(법학자), 카디(판사) 등 이슬람 지식인들은 학살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이븐 할둔처럼 특별히 우대받은 자도 있었다.[385] 또한, 무역 진흥을 위해 상인을 중심으로 한 도시 귀족층과 종자들도 목숨을 건졌다.[385]
티무르는 수도로 삼은 사마르칸트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며, 많은 시설을 건설했다.[140] 모스크, 마드라사, 무기 공방이 건설되었고, 관개 수로도 정비되었다. 대규모 공사 현장에는 티무르 자신도 현장 시찰에 나서 건축가와 상인들을 격려하고 질책했다.[327] 티무르 통치 시대 사마르칸드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구르 에미르 묘와 비비하눔 모스크가 있다. 또한 사마르칸드 근교에는 술타니야, 시라즈, 바그다드 등 서방 도시의 이름을 딴 마을이 건설되었다.[386]
더욱이 티무르는 교역을 장려하기 위해 바자르와 낙타 대상숙소(카라반사라이) 건설, 도로 보수를 실시하여 사마르칸드는 동서 교역의 중추적인 중계 지점으로 발전했다.[140][371]
사마르칸드, 나아가 마 와라 알 나흐르 전체의 발전을 위해 티무르는 경제력이 높은 도시로 원정을 떠났다.[149][304] 정복지에서는 재산과 물자가 모아졌고, 도시에 거주하던 학자, 예술가, 장인들이 사마르칸드로 끌려왔다. 사마르칸드로 끌려온 사람들은 거처를 제공받았고, 활동에 필요한 자금이 대출되었다.[383] 이란, 시리아, 중국에서 초빙한 장인들도 더해져 사마르칸드의 수공업은 발전했지만,[140] 인재의 유출을 막기 위해 장인들의 중앙아시아 외부 이동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387]
또한 사마르칸트가 발전한 반면, 티무르에 의해 많은 인재가 끌려간 다마스쿠스에서는 수 세기에 걸쳐 기술과 문화의 발전이 정체되었다.[312]

티무르는 르네상스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세계에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396] 15세기 유럽 사람들은 티무르의 업적에 매료되면서도 두려움을 느꼈다.[397]
15세기 유럽에는 티무르의 급속한 세력 확장과 각지에서의 잔혹 행위에 불안을 느낀 사람들과 티무르를 유럽 세계의 동맹자로 환영하는 사람들이 혼재해 있었다.[398]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가 바예지드 1세를 패배시켰을 때, 그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기독교도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고 생각하며 칭찬의 말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러시아 혁명 시기에는 티무르가 투르키스탄의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영웅으로 추앙되었으나, 스탈린 시대에는 티무르의 이상화가 금지되고 “억압자”, “파괴자”로서의 이미지가 강조되었다.[406] 티무르와 차가타이어를 상징으로 하여 투르키스탄의 역사·문화적 일체성을 주장한 지식인들은 “범투르크주의자”, “민족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 탄압받았다.[407] 소련 사학계에서는 티무르와 티무르 제국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가 내려졌다.[409] 그 후 1991년 소련 붕괴로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이 독립한 후, 티무르는 민족과 국가를 상징하는 영웅으로 복권되었고,[409] 1993년 수도 타슈켄트의 아미르 티무르 광장에 있던 카를 마르크스 동상 대신 티무르 동상이 세워졌다. 1996년에는 탄생 660주년을 기념하여 유네스코의 협찬으로 대규모 축전이 열리고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샤흐리사브즈에서 기념식이 거행되었다.[410] 같은 해 아미르 티무르 박물관이 개관하고, 구르 에미르 묘와 비비하눔 모스크 등 티무르와 관련된 사마르칸트의 역사적 건축물이 복원되었다.[411] 현재 우즈베키스탄에서 발행하는 500솜 지폐 뒷면에는 티무르의 기마상이 그려져 있다. 또한 티무르는 우즈베키스탄의 전통적인 무술인 쿠라시의 수호자로 여겨지고 있다.[412]
7. 일화
1941년 6월 19일 소련의 조사에 의해 구리 아미르 사당에 있던 티무르의 검은돌 관이 처음으로 개봉되어 다리 장애 등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 일이 있은 후 3일 뒤 바르바로사 작전(독일에 의한 소련 침공)이 실행되어 소련에서 본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단이 되었다. 후에 두려움을 느낀 소련에 의해 뚜껑이 납으로 용접되어 이후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다.[447]
티무르는 티그리스 강 유역을 침공하여 타크리트 전투에서 대항하던 적들을 살해하고 그 해골로 2개의 피라미드 형 탑을 만들고, 티그리스 강에서 가져온 흙으로 그 탑을 더욱 단단하게 강화했다. 그는 탑의 기단 부분에 "법을 지키지 않고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의 운명이 무엇인지 여기 와서 보도록 하라."라는 글을 새기게 했다.[447]
티무르는 군사적 천재이자 뛰어난 전술가로 여겨지며, 중앙아시아 통치 기간 동안 유동적인 정치 구조 속에서 유목민들의 충성스러운 추종을 얻고 유지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 그는 또한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다. 사마르칸트와 여러 여행에서 티무르는 저명한 학자들의 지도 아래 페르시아어, 몽골어, 튀르크어를 배웠다. 티무르는 궁정뿐 아니라 관청의 언어이기도 했던 페르시아어를 특별히 중시했다.[107]
존 조셉 손더스에 따르면 티무르는 "이슬람화되고 이란화된 사회의 산물"이었다.[108] 티무르는 튀르크-몽골 유산을 이용하여 이슬람교 또는 샤리아, 피크흐, 몽골 제국의 전통을 이용하여 군사적 목표 또는 국내 정치적 목표를 달성했다. 티무르는 학식 있는 군주였으며, 학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고, 그들에게 관대했다. 그는 페르시아 시인 하피즈와 동시대인이었으며, 티무르가 하피즈를 불러 자신의 가잘에 나오는 "네 뺨의 검은 점 때문에 나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의 도시들을 기꺼이 줄 것이다."라는 구절에 대해 질책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티무르는 "나의 잘 다듬어진 칼날의 타격으로 나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나의 수도이자 거주지를 확장하기 위해 세계의 대부분을 정복했고, 너는 비참한 생물이여, 두 도시를 점 하나와 바꾸려 하느냐."라고 말했다. 하피즈는 굴하지 않고 "그와 같은 관대함으로 나는 당신이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가난한 상태로 전락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왕은 재치 있는 답변에 기뻐하며 시인에게 훌륭한 선물을 주고 떠나보냈다고 한다.[109][110]
티무르는 종종 대화에서 페르시아어 표현을 사용했고, 그의 좌우명은 페르시아어 구절 ''rāstī rustī'' (راستی رستیfa, "진실은 안전이다")였다.[106] 그는 10×11 보드에서 플레이되는 타메를레인 체스 변형을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12]
티무르를 묘사한 초상화 중 신뢰할 만한 것은 없으며, 그의 용모를 자세히 기록한 문헌도 적다.[345] 말년에 티무르를 직접 만났던 아랍샤는 티무르의 용모에 대해 "키가 크고 어깨가 넓다. 큰 머리와 짙은 눈썹,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손발이 길었지만, 오른쪽 다리는 불편했다. 눈은 촛불과 같았지만, 빛은 없었다."라고 묘사했다.[345][346] 키는 약 170cm로, 14세기 당시 사람들 중에서는 장신에 속했다.[347]
티무르는 오른쪽 다리가 불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절름발이 티무르"를 의미하는 "타메를랑(Tamerlane)", "티무르 랑(Timur Lang)"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클라비호의 보고서, 아랍샤의 전기, 러시아에서 편찬된 연대기는 강도단 시절에 습격에 실패하여 부상을 입었고, 그 후유증으로 다리에 장애가 남았다고 서술하고 있다.[174][348] 또 다른 전승에서는 1363년에 발생한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다리에 장애를 입었다고 전해진다.[188] 1390년 말, 티무르는 화살 상처로 인한 뼈와 관절 질환에 걸려 40일 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다.[349] 오른쪽 다리가 불편해진 후에도 티무르는 여전히 말을 자유자재로 탔지만, 세월이 갈수록 증상은 점점 심해져 말년에는 시중의 도움 없이는 승마가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292]
1941년 5월부터 6월에 걸쳐,[350] 소비에트 연방의 조사단이 사마르칸트의 구릴 아미르 묘를 조사하였고, 미하일 게라시모프에 의해 묘에 안치되어 있던 티무르의 유해도 조사되었다. 이때의 조사를 통해 티무르는 붉은색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손, 팔꿈치, 무릎의 세 곳에 화살 상처를 입었던 것이 밝혀졌다.[346] 또한, 조사단은 티무르의 얼굴을 몽골로이드를 기반으로 코카소이드의 특징이 약간 가미된 용모로 분석했다.[351]
티무르는 농담이나 거짓말을 싫어하는 성격이었으며,[352] 뛰어난 기억력을 지녔다.[145][353] 음악을 좋아하여 아랍에서 중국에 이르는 동서양의 음악가들로 구성된 연주단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354] 라바 수집에 관심을 가지고[355] 숫자 '9'에 집착했다.[352]
티무르는 읽고 쓰지는 못했지만, 그를 만난 사람들은 대개 그를 교양인이라고 생각했다.[352] 국가가 확장되면서 역사에 대한 강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356] 원정 중 시간이 날 때면 신하에게 책을 읽어주도록 했고, 특히 역사서를 좋아했다고 한다.[352] 역사 외에도 의학, 천문학, 수학의 가치를 인정했고, 건축에도 관심을 보였다.[352] 티무르는 학자뿐만 아니라 예술가와 장인들에 대해서도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170]
티무르가 만난 학자 중 한 명으로 이슬람 세계를 대표하는 역사가 이븐 칼둔(Ibn Khaldun)이 알려져 있다. 1401년 다마스쿠스를 함락시켰을 때 티무르는 마멜루크 왕조의 사자에게 칼둔의 소재를 물었고, 칼둔은 티무르가 면회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티무르에게 갔다. 두 사람은 통역을 통해 대화를 나누었고, 칼둔의 고향인 마그레브의 사정에 대해 강한 관심을 가진 티무르를 위해 칼둔은 지리서 『마그레브의 사정』을 헌정했다.[357] 그리고 아랍어로 쓰인 『마그레브의 사정』은 후대에 뛰어난 역사서를 남기려는 티무르의 생각에 따라 그의 서기관에 의해 투르크어로 번역되었다.[358] 칼둔은 35일 동안 티무르의 진영에 머물면서 환대를 받고 티무르와 대화를 나누었다.[359] 이집트로 돌아간 후 칼둔은 모로코의 마리니드 왕조 술탄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티무르의 지성과 탐구심을 칭찬하는 글을 썼다.[360]
티무르의 취미 중 하나는 체스였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체스를 즐겼다.[361] 그의 체스 실력은 상당하여 명인과도 대국을 벌였다.[354] 밤중에 혼자 거대한 체스판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겨 복잡한 전략을 세우며 말을 움직였던 일화가 알려져 있다.[318][362] 이 때문에 티무르가 체스에서 전술적 영감을 얻었다는 견해도 있다.[363] 또한 티무르가 체스를 두는 중에 아이가 태어났고, 그때 손에 들고 있던 룩 조각을 따서 아이에게 "르크(Rukh)"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전승이 있다.[364] 15세기 티무르 제국의 역사가인 하피즈 아브루는 티무르의 체스 상대를 맡았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365]
8. 티무르의 후손들
티무르는 생전에 두 번 후계자를 지명했지만, 모두 티무르보다 먼저 사망했다. 첫 번째 후계자는 아들 자항기르였으나 1376년 병으로 사망했고,[92][93] 두 번째 후계자인 손자 무함마드 술탄은 1403년 전투 중 부상으로 사망했다.[94] 후계자들의 사망 이후 티무르는 후계자를 정하지 않다가, 임종 직전에야 무함마드 술탄의 동생 피르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지명했다.[95]
그러나 피르 무함마드는 친척들의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했고, 티무르 사후 그의 후손들 사이에서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1409년이 되어서야 티무르의 막내아들 샤 루크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티무르의 후계자로 즉위했다.[96]
티무르는 43명의 부인과 측실을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정복 과정에서 얻은 여성들이었다.[98] 티무르는 이 여성들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두었다. 티무르의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아들 | 아들의 자녀 | 아들의 손주 | 아들의 증손 |
---|---|---|---|
우마르 샤이크 미르자 1세 (톨룬 아가 소생) | |||
자한기르 미르자 (투르미시 아가 소생) | |||
미란 샤 미르자 (멩글리 아가 소생) | |||
샤 루크 미르자 (토가이 투르칸 아가 소생) | |||
딸 | 배우자 | 자녀 | |
아카 베기(Aka Begi, 1382년 사망) (투르미쉬 아가 소생) | 타이치우드 부족의 아미르 무사(Amir Musa)의 아들 무함마드 베그(Muhammad Beg) | 술탄 후세인 타이치우드 | |
술탄 벡트 베굼(Sultan Bakht Begum, 1429/30년 사망) (올자이 투르칸 아가 소생) | |||
사아다트 술탄(Sa'adat Sultan) (딜샤드 아가 소생) | |||
비키잔(Bikijan) (멩글리 아가 소생) | |||
쿳툴루그 술탄 아가(Qutlugh Sultan Agha) (토가이 투르칸 아가 소생) | [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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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의 통치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티무르 생전에 쓰여진 Nizam al-Din Shami|니잠 알딘 샤미영어의 『자파르나마』이다. 1424년에서 1428년 사이에 Sharaf ad-Din Ali Yazdi|샤라프 아드딘 알리 야즈디영어는 샤미의 이전 저서를 많이 참고하여 두 번째 『자파르나마』를 저술했다. Ahmad ibn Arabshah|아흐마드 이븐 아랍샤영어는 훨씬 비판적인 시각으로 아랍어로 역사를 기록했다. 아랍샤흐의 역사는 1636년 네덜란드 동양학자 Jacobus Golius|야코부스 골리우스영어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티무르 왕조 후원 하에 쓰여진 두 편의 『자파르나마』는 아랍샤흐의 연대기와는 극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윌리엄 존스는 전자가 티무르를 "관대하고 자비로운 위대한 왕자"로 묘사한 반면, 후자는 그를 "기형이고 불경하며, 천한 출신에 혐오스러운 원칙을 가진 자"로 묘사했다고 언급했다.
『말푸자트-이 티무리』와 부록으로 첨부된 『투주크-이 티무리』는 티무르의 자서전으로 여겨지지만, 거의 확실하게 17세기의 허구로 여겨진다.[22][120] 학자 아부 탈레브 호사이니는 1637년에서 1638년 사이에 티무르의 후손인 무굴 제국 황제 샤 자한에게 이 문서들을 바쳤는데, 이는 예멘 통치자의 도서관에서 차가타이어 원본을 발견한 후였다고 주장했다. 예멘과 트란스옥시아나에 있던 티무르의 근거지 사이의 거리와 원본에 대한 다른 증거의 부재로 인해,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를 매우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며 호사이니가 문서와 그 기원 이야기를 모두 지어냈다고 의심한다.[120]
티무르는 르네상스 문화와 초기 근대 유럽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121] 그의 업적은 15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유럽인들에게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15세기 유럽에서 티무르에 대한 시각은 엇갈렸다. 일부 유럽 국가들은 그를 동맹으로 여겼지만, 다른 국가들은 그의 급속한 확장과 잔혹함 때문에 그를 유럽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122]
티무르가 앙카라에서 오스만 제국의 Bayezid I|바예지드 1세영어 술탄을 사로잡았을 때, 프랑스의 Charles VI of France|샤를 6세영어와 잉글랜드의 Henry IV of England|헨리 4세영어와 같은 유럽 통치자들은 그를 종종 칭찬하며 신뢰할 수 있는 동맹으로 여겼다. 그들은 티무르가 중동의 투르크 제국으로부터 기독교를 구원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두 왕은 또한 앙카라에서의 그의 승리가 기독교 상인들이 중동에 남아 있을 수 있게 하고 프랑스와 잉글랜드로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에 그를 칭찬했다. 티무르는 또한 성지로 향하는 기독교 순례자들의 통행권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여겨져 칭찬을 받았다.[122] 다른 유럽인들은 티무르를 유럽 문화와 기독교 종교 모두에 위협이 되는 야만적인 적이라고 보았다. 그의 권력 상승은 카스티야의 Henry III of Castile|헨리 3세영어와 같은 많은 지도자들로 하여금 사마르칸트에 사절을 파견하여 티무르를 정찰하고, 그의 백성에 대해 알아보고, 그와 동맹을 맺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설득하려고 하게 만들었다.[122]
1723년 야즈디의 『자파르나마』 번역본 서문에서 번역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123]
티무르 생전에 그의 전기를 편찬하려는 계획이 한 번 있었지만, 지나치게 과장되고 과도한 묘사와 표현을 꺼린 티무르에 의해 거절되었다.[388]
1424년경 야즈드 출신의 Sharaf ad-Din Ali Yazdi|샤라프 알딘 알리 야즈디영어가 저술한 페르시아어 연대기 『자파르나마(Zafarnama of Sultan Husayn Mirza|자파르나마영어)』는 티무르와 그의 손자 할릴 술탄의 업적을 기록하고 있다. 티무르의 업적이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389] 궁정 자료를 사용하여 구체적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전기보다 우수하다고 평가받고 있다.[390] 16세기 초 샤이바니조의 군주 Кучкунджи-хан|ca|Kotxkunju|쿠추쿤지 칸ru(재위: 1510년 - 1531년)의 명령에 따라 『자파르나마』는 차가타이어로 번역되었고, 더 나아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390]
15세기 초, 야즈디의 『자파르나마』와 같은 이름의 연대기가 Nizamaddin Sami|니잠 앗딘 샤르미영어에 의해 편찬되었다. 샤르미의 『자파르나마』는 1402년부터 1404년 사이에 티무르의 명령에 따라 편찬이 시작된 역사서이며, 티무르의 생각이 반영되어 신뢰성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391] 그러나 이전에 다른 전기가 허풍스러운 묘사 때문에 거절된 경위에 따라, 묘사는 간소하고 정보량은 다소 적다.[392]
다마스쿠스 출신의 Ahmad ibn Arabshah|아흐마드 이븐 아랍샤영어는 12세 때 사마르칸트로 끌려가 티무르가 죽을 때까지 2년 동안 그와 함께 생활했다.[345] 아랍샤는 후에 티무르의 전기를 저술했고, 그 묘사는 그의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증오심도 담고 있었다.[345]
1627년, 무굴 제국의 샤 자한에게 티무르 자신이 41세까지의 전반생을 기록한 자서전 『티무르 법전』("Memoirs of Temur")이 헌정되었다. 1610년에 오스만 제국의 예멘 총독 자파르 파샤의 도서관에서 발견된 것으로, 아부타리프 알 후사이니가 차가타이어에서 페르시아어로 번역했다.[393] 『티무르 법전』은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지만,[394] 차가타이어 원본은 확인되지 않았고 티무르 왕조의 기록에서도 자서전의 존재는 확인할 수 없다.[393] 티무르가 실제로 편찬에 참여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후세에 쓰여진 위작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무굴 제국 시대의 상황이 반영된 역사서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393][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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