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지게스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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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아지게스족은 '이아지게스 메타나스타이' 등으로 불린 사르마티아계 민족으로, 19세기 프랑스 학자에 따르면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치세에 티서강 서쪽, 그란강, 도나우강 동쪽 산맥에 거주했다. 유목민에서 반정주민으로 변화하여 도시에서 생활했으며, 고대 이란어 방언을 사용했다. 무덤은 직사각형이나 원형 형태였으며, 무덤에서 빈곤한 장신구가 발견되었다. 흑해 북서쪽 해안에 거주하다 판노니아 분지로 이주했으며, 꿀, 우유, 치즈를 주로 섭취했다. 군사적으로는 중갑과 콘투스 창을 사용했고, 기병대로 구성되었다. 이아지게스족은 로마 제국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으며, 다키아 전쟁에서 로마를 지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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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지게스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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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원
이아지게스(Iazyges)라는 이름은 ‘이아지게스 메타나스타이’(Iazyges Metanastaela, Ἰάζυγες Μετανάσταιgrc) 혹은 야지게스(Jazygesla)[1], 때로는 ‘약사마타이’(Iaxamataela)[2]로 라틴화되었다. 이아지게스족의 이름은 ‘이아주게스’(Iazuges)로 표기되기도 했다. ‘야자마타이’(Jazamataela), ‘이아시다이’(Iasidaela), ‘라티게스’(Latigesla), ‘키지게스’(Cizygesla) 등은 이아지게스족 이름의 잘못된 명칭들이다. 이름의 어근은 원시 이란어군의 ‘야즈-‘(*yaz-*, ‘제물을 바치다’)에서 비롯한 것으로 추정되며, 종교적 희생 의식을 전문으로 하는 계급이나 부족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아지게스족은 티서 강 평야로 이주하기 전에는 유목민이었으나, 이주 후에는 반정주민이 되어 도시에서 생활했다. 이들은 티서 강 일대의 도시로 이주했음에도 가축을 방목하였다. 고대 이란어의 방언을 사용했으나, 다른 사르마티아 방언과는 꽤 달랐다.
19세기 프랑스 고전학자 피터 에드먼드 로랑에 따르면,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치세에 이주하여 ‘메타나스테’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호전적인 사르마티아계 민족인 이아지게스 메타나스타이(Iazyges Metanastæ)는 티서강 서쪽과 흐론강, 도나우강의 동쪽 산맥에 살았다. 그리스어 메타나스타이(Μετανάσταιgrc)는 ‘이주민’을 뜻한다. 스키타이인과 사르마티아인 연합체는 스스로를 이아지게스라고 칭했는데, 로랑은 이를 고대 교회 슬라브어 ѩзꙑкъ|cu (''językŭ'', "말, 언어, 민족")와 연결시켰다.
3. 문화
로마인 저술가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에 따르면, 이아지게스인은 전장에서 싸우기에 너무 나이가 들면 아들들에게 죽임을 당했고[2], 지리학자 폼포니우스 멜라는 이들이 바위 아래로 던져졌다고 한다.
3. 1. 장례 풍습
이아지게스족의 무덤은 직사각형이나 원형이 많았지만,[2] 타원형, 육각형, 심지어 팔각형도 있었다.[1] 무덤들은 평평했고 현대 묘지처럼 묘역에 무리지어 있었다. 무덤 출입구는 주로 남쪽, 남동쪽, 남서쪽을 향했다. 출입구 폭은 0.6m에서 1.1m 사이였고, 무덤 자체 지름은 5m에서 13m 사이였다.[1]
티사 평원 이주 후, 이아지게스족은 심각한 빈곤에 시달렸다. 이는 무덤에서 발견된 빈약한 부장품에 반영되었는데, 주로 점토 용기, 구슬, 때로는 브로치로 채워졌다. 철제 단검과 검은 매우 드물게 발견되었다. 이아지게스족의 브로치와 팔찌는 라텐 양식으로, 다키아인들이 이들에게 뚜렷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후기 무덤에서는 물질적 풍요가 증가하여, 2세기에서 4세기 초 무덤의 86%에서 무기가, 5%에서 갑옷이 발견되었다. 로마 국경 근처 이아지게스족 무덤은 강한 로마의 영향을 보여준다.
3. 2. 식단
판노니아 분지로 이주하기 전, 흑해 북서쪽 해안가 티라스 북쪽에 살던 시절, 지리학자 스트라보는 이아지게스족의 식단이 주로 꿀, 우유, 치즈로 구성되었다고 기록했다.[1] 이주 후, 이아지게스족은 가축을 길렀으며, 고기를 보존하기 위해 소금이 필요했지만[2] 영토 내에 소금 광산이 없었다.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이아지게스족은 로마인들로부터 곡물을 얻었다.
이아지게스족은 무게 분배가 고르지 않은, 매달린 비대칭 통 모양 항아리를 사용했다. 항아리를 매달기 위해 사용된 밧줄은 옆면 칼라의 가장자리에 감겨 있었고, 밧줄이 항아리에 꽉 묶여 원을 그리며 돌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회전 운동으로 인해, 항아리의 용도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작은 매달린 항아리는 노랑물봉선(Impatiens noli-tangere) 씨앗을 사용하여 알코올을 발효시키는데 사용되었고, 더 큰 매달린 항아리는 버터를 휘젓고 치즈를 만드는데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3. 3. 군사
이아지게스족은 슈가로프 헬름,[1] 철, 청동, 각양구조, 말굽으로 만든 어린갑 등 무거운 갑옷을 갖췄다. 이 어린갑은 가죽 보호복에 꿰매어 비늘 조각들이 부분부분 포개어졌다.[2] 이들은 콘투스라 불리는 길고 두 손으로 사용하는 랜스를 마갑을 갖춘 말 위에서 휘둘렀다. 이아지게스족의 군대는 전적으로 기병 중심이었다. 이들은 말에 안장 깔개를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아지게스족은 본래 갈리아족에게서 비롯된 트럼펫 같은 관악기를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3. 4. 종교
이아지게스족의 마을 중 하나인 보르마논은 온천이 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보름'(Borm)으로 시작되는 취락들의 이름이 온천이 있는 장소를 나타내는 데 유럽의 부족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온천이 있던 곳들은 여러 켈트 부족민들에게 종교적으로 중요한 장소였다. 그렇지만 온천의 종교적 중요성이 그 개념 자체적으로 이아지게스족에게도 전파되었는지에 대해선 알려져 있지 않다. 이아지게스족은 종교의식에서 말꼬리를 사용하였다.
4. 경제
이아지게스족이 티서강과 다뉴브강 사이의 평야로 이주했을 때, 이들의 경제는 매우 열악했다. 폰투스 스텝 및 흑해와의 교역 단절, 영토 내 광물 자원 부족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또한, 로마군은 잘 조직된 군대 때문에 이아지게스족이 약탈하기 어려운 상대였다.[2] 이아지게스족은 역사 대부분 기간 동안 대규모 교역품을 갖추지 못했고,[2] 소규모 약탈과 원예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바나트 지역에서는 로마 국경과 인접한 이아지게스족 영토 내에서 3세기 말에 지어진 도기 작업장들이 발견되었다. 이 작업장들은 브르샤츠–치르벤카, 그라디나리–셀리스테, 티미쇼아라–프라이도르프, 티미쇼아라–드라가시나, 호도니, 판체보, 돌로보, 이즈빈 시 야부차 등에서 발견되었다.
마르코만니 전쟁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키아를 통한 록솔라니족과의 교역을 허용하여 이아지게스족을 흑해 교역망에 다시 연결시켰다. 이 교역로는 260년까지 지속되다가 고트족이 티라스와 올비아를 점령하면서 중단되었다. 이아지게스족은 로마와도 교역했지만, 그 규모는 작았다. 로마 주화는 다뉴브 리메스 전역에 흩어져 있었지만, 특히 이아지게스족 영토 내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이아지게스족은 유목민이었으나, 티서 평원에 정착한 후에는 반(半)정착 생활을 하며 도시에서 생활했다. 이들은 가축 방목을 위해 도시를 옮겨 다녔다.
4. 1. 수입품
이아지게스족은 역사상 대부분 기간 동안 조직적인 생산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입된 도자기 유물은 드물게 발견된다. 청동 또는 은제 용기, 암포라, 테라코타 제품, 램프 등과 같은 일부 물품은 극히 드물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일부 암포라와 램프가 이아지게스족 영토에서 발견되었는데, 종종 로마와의 국경 근처의 주요 강 유역 근처에서 발견되었지만, 유적지의 위치로 인해 이러한 물품이 이아지게스족의 유적, 정착지 또는 묘지의 일부인지, 아니면 그 지역에 주둔하거나 그 근처에 있던 로마 군인들의 분실물인지 판단하기가 불가능하다.[1]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수입품은 ''테라 시질라타''였다. 이아지게스족 묘지에서는 완전한 형태의 ''테라 시질라타'' 용기 한 점과 다수의 파편이 바나트에서 발견되었다. 이아지게스족 정착지에서 발견되는 ''테라 시질라타'' 유물은 일부 경우 혼란스럽다. 때로는 해당 지역과의 관련성에서 유물의 시기를 특정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로마 시대에 그곳에 유입되었는지, 아니면 이아지게스족이 지배권을 획득한 후에 유입되었는지 판단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는 ''테라 시질라타'' 유물이 데타, 코바치차-차파시, 쿠빈, 바나츠카 팔란카, 판체보, 브르샤츠, 즈레냐닌-바트카, 돌로보, 델리바타, 페를레즈, 아라다츠, 보토시, 보차르에서 발견되었다. 이아지게스족 점유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는 ''테라 시질라타'' 유물은 티미쇼아라-치오레니, 호도니, 이에차 마커, 티미쇼아라-프라이도르프, 사치네즈, 크리치오바, 베치체레쿨 미크, 포에니-셀리슈테에서 발견되었다. 기원 시기가 확실한 ''테라 시질라타'' 유물은 티미쇼아라-프라이도르프에서 발견되었으며, 서기 3세기로 추정된다. 암포라 파편은 티미쇼아라-치오레니, 이에차 마커, 티미쇼아라-프라이도르프, 사치네즈, 빌레드에서 발견되었으며, 이 모두 이아지게스족 기원으로 확인되었지만, 정확한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1]
로마 시대의 중요한 정착지이자 이후 이아지게스족 정착지였던 티비스쿰에서는 3세기 이후 또는 그 이전에 수입된 도자기가 매우 적은 비율을 차지했다. 수입된 도자기는 ''테라 시질라타'', 암포라, 유약 도자기, 각인이 찍힌 백색 도자기로 구성되었다. 수입 도자기의 7%만이 3세기 이후의 "후기" 시대에서 유래되었으며, 나머지 93%는 "초기" 시대, 즉 2세기 또는 그 이전에 제작된 유물이었다.[1] 유약 도자기는 티비스쿰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았으며, 초기 시대의 유물은 바르보틴 장식이 있고 "''CRISPIN(us)''"이 각인된 소수의 파편뿐이다. 후기 시대의 유물은 안팎에 부조 장식이 있는 유약 그릇 파편 몇 개가 전부이다. 가장 흔한 암포라 유형은 드레셀 24 시밀리스이며, 하드리아누스 통치 시대부터 후기 시대까지의 유물이 발견된다. 3세기와 4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카르타고 LRA 4 유형의 암포라는 티비스쿰-이아즈에서 발견되었으며, 오파이츠 2 유형의 암포라는 티비스쿰-주파에서 발견되었다.[1]
5. 지리
이아지게스족은 티서 강 평원으로 이주하기 전에는 유목민이었으나, 이주 후에는 반(半)정착 생활을 하며 도시에 거주했다.[2] 이들은 가축 방목을 위해 도시를 옮겨다니기도 했다. 고대 이란어 방언을 사용했는데, 다른 사르마티아 방언과는 꽤 달랐다. 로마 저술가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에 따르면, 이아지게스족은 전장에서 싸우기에 너무 늙으면 아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지리학자 폼포니우스 멜라에 따르면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아지게스족의 마을에 관한 기록은 8개가 남아있으며,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2]
마을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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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케눔 |
보르마눔 |
아비에타 |
트리숨 |
파르카 |
칸다눔 |
페시움 |
파르티스쿰 |
겔레르트 언덕에도 취락이 있었다. 이아지게스족의 수도는 파르티스쿰이었으며, 오늘날 헝가리의 도시 케치케메트 부근에 위치했다. 아퀸쿰과 포롤리숨을 연결하고, 오늘날 얼베르티르셔 지역 인근을 지나는 로마 도로가 이아지게스족 영토 약 약 321.87km를 통과했다고 여겨진다. 이 도로는 흑해의 도시 국가들로 이어졌다.
이아지게스족이 지배하던 다뉴브 강과 티서 강 사이의 평야는 이탈리아와 비슷한 크기로, 길이는 대략 약 1609.34km였다. 이 지역은 대부분 습지였고, 소수의 언덕이 있었으며, 채광할 만한 금속이나 광물은 없었다.
잉글랜드인 지도 제작자 애런 애로스미스에 따르면, 이아지게스 메타나스타이는 (로마령) 판노니아와 게르마니아에서 분리된 (로마령) 다키아의 동쪽에 거주했다. 이들은 판노니아와 티비스쿠스 강(티미슈강)에서 다키아인들을 몰아냈다.
6. 역사
이아지게스족은 기원전 3세기에 아조프해 북쪽 해안을 따라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남동부에 살았다. 그곳에서 이아지게스족, 혹은 적어도 그들 중 일부는 몰도바와 우크라이나 남서부의 흑해 연안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했다.
이아지게스족이 티서강과 다뉴브강 사이의 평야로 이주했을 때, 이들의 경제는 매우 어려웠다. 폰투스 스텝 및 흑해와의 교역 단절, 영토 내 광물 자원 부족, 잘 조직된 로마군의 존재 등이 그 원인이었다. 이들은 역사 대부분 동안 대규모 교역품을 갖춘 적이 없었고, 이웃 민족에게서 소규모 약탈을 통해 교역품을 얻거나 부수적으로 원예 농업을 했다. 바나트에서는 로마 국경과 인접한 이아지게스족 영토 내에서 3세기 말에 지어진 도기 작업장들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브르샤츠–치르벤카, 그라디나리–셀리스테, 티미쇼아라–프라이도르프, 티미쇼아라–드라가시나, 호도니, 판체보, 돌로보, 이즈빈 시 야부차 등에서 발견되었다.
폰투스 스텝 및 흑해 지역과의 교역은 이아지게스족 경제에 매우 중요했다. 마르코만니 전쟁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키아를 통한 록솔라니족과의 교역을 허용하여 이아지게스족을 흑해 교역망과 다시 연결시켜주었다. 이 교역로는 260년까지 지속되다가, 고트족이 티라스와 올비아를 차지하면서 록솔라니 및 이아지게스족의 폰투스 스텝 교역망을 끊어 놓았다. 이아지게스족은 로마와도 교역했지만, 규모는 작았다. 로마의 다뉴브 리메스 전체를 따라 흩어져 있는 로마 주화가 이아지게스족 영토 내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후기 고대 시대에 들어서면서 역사 기록이 훨씬 산만해지고, 이아지게스족은 부족으로 언급되는 빈도가 줄어든다. 4세기부터 대부분의 로마 작가들은 다양한 사르마티아 부족들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사르마티아인으로 지칭하기 시작했다.
6. 1. 초기 역사
이아지게스족은 티서강 평야로 이주하기 전에는 유목민이었으나, 이주 후에는 반정착 생활을 하며 도시에 거주했다. 이들은 가축 방목을 위해 도시를 옮겨다니기도 했다.[1][2] 고대 이란어 방언을 사용했지만, 다른 사르마티아 방언과는 상당히 달랐다.기원전 3세기에 이아지게스족은 아조프해 북쪽 해안, 오늘날 우크라이나 남동부에 살았다. 그 후 흑해 연안을 따라 몰도바와 우크라이나 남서부로 이동했다. 일부는 아조프해에 남아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로마 작가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에 따르면, 이아지게스족은 전투에 참여하기에 너무 늙은 사람은 아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지리학자 폼포니우스 멜라에 따르면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아지게스족이 티서강과 다뉴브강 사이 평야로 이주했을 때 경제는 매우 어려웠다. 폰투스 스텝 및 흑해와의 교역 단절, 영토 내 광물 자원 부족, 잘 조직된 로마군의 존재 등이 그 원인이었다. 이들은 역사 대부분 동안 대규모 교역품을 갖춘 적이 없었고, 이웃 민족에게서 소규모 약탈을 통해 교역품을 얻거나 부수적으로 원예 농업을 했다. 바나트에서는 로마 국경과 인접한 이아지게스족 영토 내에서 3세기 말에 지어진 도기 작업장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6. 1. 1. 이주
이아지게스족은 티서 강 평원으로 이주하기 전에는 유목민이었으나, 이주 후에는 반정착민이 되어 도시에 살았다. 티서 강 일대의 도시로 이주했음에도 가축들을 방목하였다. 고대 이란어의 방언을 사용했으나, 다른 사르마티아 방언과는 꽤 달랐다.기원전 3세기에 이아지게스족은 아조프해 북쪽 해안가를 따라 오늘날 남동쪽 우크라이나에 거주했다. 그곳에서 이아지게스족—최소한 그들의 일부—은 흑해 해안가를 따라 오늘날 몰도바와 우크라이나 남서부가 있는 서쪽으로 이주했다. 이아지게스족 전체가 서쪽으로 이주하지 않고 일부는 아조프해를 따라 남아 있었을 수 있다.

기원전 2세기, 이아지게스족은 드네스트르강 하류 인근 스텝지대가 있는 서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아지게스족의 동쪽에 있는 이웃 부족인 록솔라니족이 아오르시족의 압박으로 서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일 수 있으며, 아오르시족 역시도 이아지게스족에 압박을 놓고 서쪽으로 이주하게끔 했다.
이아지게스족이 판노니아 평야에 진입하게 된 경위와 시기에 관한 현대 학자들의 관점은 분분하다. 주된 논쟁은 로마인들이 이아지게스족의 이주를 허용 혹은 명령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얼푈디 언드라시는 이아지게스족이 로마의 허락이 없었더라면 판노니아의 다뉴브 지역 북동쪽과 동쪽에 있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허르머터 야노시는 이아지게스족이 로마의 승인과 지원으로 정착을 하여 다키아인들에 대한 완충국으로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모치 언드라시는 기원전 26년에 집정관이던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아우구르가 판노니아와 다키아 사이의 완충국으로써 이아지게스족 정착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제시하였다. 그렇지만, 모치는 또한 이아지게스족이 점진적으로 정착했을 수도 있어, 초기에는 이들이 로마인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존 윌크스는 이아지게스족이 아우구스투스 치세 말 (서기 14년)이나 서기 17년과 20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판노니아 평야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콘스탄틴 다이코비치우는 이아지게스족이 로마인들이 이들에게 완충국이 되라고 한 뒤인 서기 20년 무렵에 판노니아에 진입했다고 주장했다. 코리올란 오프레아누는 이아지게스족이 판노니아 평원에 정착하기를 요청 혹은 명령을 받았고, 시기는 서기 20년 무렵이라는 이론을 주장했다. 게오르게 비키르와 이온 호라치우 크리샨 등은 이아지게스족이 서기 20년 무렵인 티베리우스 치세에 대량으로 판노니아 평원에 처음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이아지게스족이 로마인들 때문에 진입했다던가 후기에 들어 허가를 받았다고 보지 않는 주요 학자들에는 도이나 베네아, 마르크 스쿠킨, 제노 피트즈가 있다. 도이나 베네아는 이아지게스족이 로마의 개입 없이 서기 1세기 전반기 어느 시기에 판노니아 평야로 서서히 들어섰다고 하였다. 제노 피트즈는 이아지게스족이 점진적으로 정착하기는 했지만, 서기 50년 무렵에 ‘대량으로’ 판노니아 평야에 도달했다는 이론을 밀어붙였다. 마르크 스쿠킨은 서기 50년 무렵 어느 시기에 이아지게스족이 스스로 움직였다고 하였다. 안드레아 바다이는 다키아인들이 서기 20년-50년 기간에 로마에 활발하게 위협을 주지 않았기에 전략적 근거가 부족한 점을 인용하며, 로마가 이주를 허용했다던가 혹은 명령했다고 하는 이론에 반대되는 주장을 하였다.
대 플리니우스의 《박물지》 (서기 77–79년)에 따르면 이아지게스족이 판노니아의 분지와 평야에 사는 한편 숲과 구릉지대에는 대게 다키아인들이 남아있었는데, 이들은 시간이 흘러 이아지게스족들에게 티서 강으로 밀려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플리니우스의 진술은 소 세네카의 ‘자연 연구서’ (서기 61–64년)에서 초기 기록들과 일치한다.
기원전 78년-76년까지, 로마인들은 당시 이아지게스족의 영토이던 다뉴브강 이북으로 원정을 펼쳤는데, 이아지게스족이 로마와 전쟁 중이던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44년에 다키아의 왕 부레비스타가 죽고 그의 왕국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 뒤에, 이아지게스족이 오늘날 헝가리 남중부인 도나우강과 티서강 사이에 있는 판노니아 평야의 소유권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역사가들은 이 상황이 판노니아의 속주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의 속주와 다키아인들 간에 완충국을 만들기를 바라던 로마인들의 요청으로 이뤄졌다고 가정하였다. 이아지게스족은 서기 20년 무렵 어느 시기에 이주 경로를 따라 바스테르나이, 게타이를 마주쳤고 방향을 돌려 다뉴브강 삼각주에 정착할 때까지 흑해 해안을 따라 남하하였다. 이 이동은 이전에 오비디우스가 제시한 것과 비교해서 타키투스가 제시한 것이 위치 면에서 크게 맞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고고학적 발견물들은 이아지게스족이 서기 50년 무렵에 다뉴브강과 티서 강 사이의 북쪽 평야를 차지하였고, 이들이 1세기 말과 2세기 초까지는 파르티스쿰-루기오 지역이 있는 남쪽 땅을 지배하지는 못했다는 점을 알려준다.
6. 1. 2. 이주 후
이아지게스족은 티서강 평야로 이주하기 전에는 유목민이었으나, 이주 후에는 반(半)정착민이 되어 도시에서 생활했다.[1] 가축을 방목하기 위해 도시를 옮겨 다니기도 했다.[2] 이들은 고대 이란어의 방언을 사용했는데, 다른 사르마티아 방언과는 꽤 달랐다. 로마 작가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에 따르면, 이아지게스족은 전투에 참여하기에 너무 늙은 사람은 아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지리학자 폼포니우스 멜라에 따르면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고 한다.이아지게스족이 티서강과 다뉴브강 사이의 평야로 이주했을 때, 이들의 경제는 매우 어려웠다. 폰투스 스텝 및 흑해와의 교역 단절, 영토 내 광물 자원 부족 등이 원인이었다. 로마는 잘 조직된 군대 때문에 약탈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이아지게스족은 역사 대부분 동안 대규모 교역품을 갖춘 적이 없었다. 이들은 이웃 민족에게서 소규모 약탈을 통해 교역품을 얻었고, 부수적으로 원예 농업을 하기도 했다. 바나트에서는 로마 국경과 인접한 이아지게스족 영토 내에서 도기 작업장이 발견되기도 했다. 3세기 말에 지어진 이 작업장들은 브르샤츠–치르벤카, 그라디나리–셀리스테, 티미쇼아라–프라이도르프, 티미쇼아라–드라가시나, 호도니, 판체보, 돌로보, 이즈빈 시 야부차 등에서 발견되었다.

폰투스 스텝 및 흑해 지역과의 교역은 이아지게스족 경제에 매우 중요했다. 마르코만니 전쟁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키아를 통한 록솔라니족과의 교역을 허용하여 이아지게스족을 흑해 교역망과 다시 연결시켜주었다. 이 교역로는 260년까지 지속되다가, 고트족이 티라스와 올비아를 점령하면서 끊어졌다. 이아지게스족은 로마와도 교역했지만, 규모는 작았다. 로마의 다뉴브 리메스 전체에 흩어져 있는 로마 주화들이 이아지게스족 영토 내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판노니아 분지 정복 이후, 이아지게스족은 남은 게르만족, 켈트족, 다키아인 일부를 다스린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부다페스트 북쪽 구릉지대는 게르만족 장례 풍습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켈트식 제조 물품은 카르파티아 분지 북쪽에서 2세기 말까지 나타났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아지게스족은 로마에 친선 관계를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현대적 관점에서 이 '친선 관계'는 불가침 조약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 시기 이아지게스족 영토 서쪽 일부는 콰디족이 점거하고 있었는데, 학자 Nicholas Higham은 이들 간의 오랜 협력을 시사한다고 본다.
티베리우스 시대에 이아지게스족은 로마의 종속 부족 중 하나가 되었다. 로마 종속국은 봉사의 대가로 보상을 받는 로마의 보호 정책에 따라 대우받았다. 종속국 왕은 '로마인의 동맹이자 친구'를 뜻하는 '소키우스 에트 아미쿠스 로마니 포풀리'라고 불렸지만, 이 관계의 의무와 보상은 모호했다. 종속국이 된 후에도 이아지게스족은 로마 국경 너머로 약탈을 했는데, 서기 6년과 16년에 그러했다. 서기 20년, 이아지게스족은 카르파티아산맥을 따라 서쪽 판노니아 스텝으로 이주하여 다뉴브강과 티서강 사이 스텝 지역에 정착, 다키아인에게서 영토를 완전히 장악했다. 서기 50년, 이아지게스족 기병대는 수에비족과 싸우던 로마의 콰디족 종속국 왕 반니우스를 도왔다.
네 명의 황제의 해인 서기 69년, 이아지게스족은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했다. 이들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이탈리아 침공을 위해 다키아인으로부터 로마 국경을 지키겠다고 제안했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들이 점령하거나 배반할 것을 우려하여 거절했다. 그는 이아지게스족 족장들에게 자신의 부대에서 복무할 것을 요구하여 다뉴브강 주변 비무장지대에 대한 공격을 막았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게르만 및 다키아 부족 대부분의 지지를 받았다.
도미티아누스의 다키아 원정은 대체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로마는 데케발루스에게 매년 800만 세스테르세스를 지불했음에도, 도미티아누스는 이 원정을 승전으로 주장했다. 도미티아누스는 로마에서 완전한 개선식이 아닌 소규모 축하식인 오바티오 행사를 받았다. 이는 제한적인 행사였으며, 민중이나 원로원이 이 전쟁이 비성공적이었음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서기 89년, 도미티아누스는 콰디족, 마르코만니족과 함께 이아지게스족을 공격했다. 이 전쟁은 로마가 패배한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로마군은 이아지게스족의 다키아 땅 동시 공격을 몰아냈다.
서기 92년 초, 이아지게스족, 록솔라니족, 다키아족, 수에비족은 로마의 판노니아 속주(오늘날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북부, 헝가리 서부 등)를 공격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콰디족과 마르코만니족에게 병력 지원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고, 로마는 이들에게도 전쟁을 선포했다. 서기 92년 5월, 이아지게스족은 라팍스 제21군단을 전멸시켰다. 도미티아누스는 다음 해 1월 이 전쟁을 승리로 종결했다고 전해진다. "Signis a Sarmatis Resitvtis" 문구와 함께 로마 군단기 앞에 무릎 꿇은 이아지게스인을 나타내는 희귀한 아우레우스 주화를 바탕으로, 전멸당한 라팍스 제21군단에서 탈취당한 군단기가 종전 때 로마에 반환된 것으로 여겨진다. 서기 89년과 92년의 이아지게스-로마 전쟁 기록은 뒤섞였지만, 별개 전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아지게스족과 인접 민족의 위협은 트라야누스가 98년 말과 99년 초 다뉴브강 하류와 중류를 건너 요새 시설을 사찰하고 더 많은 요새와 도로 건설을 시작할 만큼 컸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서기 98년 저서 ‘게르마니아’에서 오시족이 이아지게스족과 콰디족에 공물을 바치고 있다고 기록했다. 종속 관계 시작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플라비우스 왕조 기간, 이아지게스족 왕자들은 로마군에서 훈련받았다. 이는 공식적으로 영예였지만, 왕들이 이아지게스족에 완전한 권력을 지녔기 때문에 인질이었다. 이아지게스족 대공들의 군대 지원 제안은 있었지만, 이들이 전쟁에서 반란이나 도주를 우려하여 거절당했다.
6. 2. 다키아 전쟁 (101년 ~ 106년)
이아지게스족은 플라비우스 왕조 시기부터 로마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 원정에도 협력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기 다키아 원정은 실패했고, 로마는 데케발루스 왕에게 매년 800만 세스테르세스를 지불하며 전쟁을 끝냈다. 도미티아누스는 로마에서 소규모 축하 행사인 오바티오를 받았는데, 이는 원로원이 이 전쟁을 실패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서기 89년, 도미티아누스는 이아지게스족을 공격했지만 패배했다. 서기 92년 초, 이아지게스족은 로마의 판노니아 속주를 공격했고, 라팍스 제21군단을 전멸시켰다. 도미티아누스는 이 전쟁을 승리로 종결했다고 알려져 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98년 말과 99년 초에 다뉴브강 하류와 중류의 요새 시설을 사찰하고 더 많은 요새와 도로 건설을 시작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오시족이 이아지게스족과 콰디족에게 공물을 바치고 있다고 기록했다.
올테니아 지역의 소유권은 이아지게스족과 로마 제국 사이의 분쟁 원인이었다. 이아지게스족은 원래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제2차 다키아 전쟁 중 로마에 점령당했다. 이 분쟁은 107년-108년에 전쟁으로 이어졌고, 미래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이들을 격파했다. 평화 조약의 정확한 조건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로마인들이 양보를 대가로 올테니아를 유지한 것으로 여겨진다.
117년, 이아지게스족과 록솔라니족은 로마를 침공했다. 다키아 속주 총독 가이우스 율리우스 콰드라투스 바수스는 침공으로 사망했다. 록솔라니족이 먼저 항복했고, 이아지게스족은 그 후 로마와 평화를 맺었다. 123년, 이아지게스족과 다른 사르마티아인들은 로마 다키아를 침공했다. 마르키우스 투르보는 이들을 격파했지만, 평화 조건과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로마인들은 독일에서 흑해에 이르는 다뉴브강 우안 전체를 따라 일련의 요새를 건설했으며, 판노니카 함대와 플라비아 모에시아 함대는 각각 상 다뉴브강과 하 다뉴브강에 배치되었다.[1]
6. 2. 1. 제1차 다키아 전쟁 (101년 ~ 102년)
이아지게스족과 다키아인의 동맹은 로마가 라인강보다 도나우강에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1] 이는 로마 군단의 배치로 나타난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세 동안에는 라인강을 따라 8개 군단이 주둔했는데, 그중 4개는 마인츠에, 나머지 4개는 쾰른에 주둔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통치 100년 이내에 로마 군사 자원은 라인강이 아닌 도나우강을 중심으로 이동하여[2] 9개 군단이 도나우강에 주둔하고 라인강에는 1개 군단만 주둔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는 12개 군단이 도나우강에 주둔했다.[1]트라야누스는 이아지게스족의 지원을 받아, 서기 101년에 데케발루스 왕에 맞서 군단을 이끌고 다키아로 진군했다.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는 이렇게 큰 군대를 이끌고 도나우강을 건너기 위해, 로마의 수석 건축가로서 캔틸레버 방식으로 철문 협곡에 다리를 건설했다. 그는 이 다리를 사용하여 도나우강을 가로지르는 60개의 교각을 가진 웅장한 다리를 만들었다. 트라야누스는 이 다리를 이용하여 다키아 깊숙이 쳐들어가, 데케발루스 왕에게 항복을 강요하고 속국 왕으로 만들었다.
6. 2. 2. 제2차 다키아 전쟁 (105년 ~ 106년)
트라야누스가 로마로 돌아온 직후, 데케발루스는 로마 영토를 약탈하기 시작했고, 로마의 종속 부족이었던 이아지게스족을 공격했다. 트라야누스는 데케발루스를 몹시도 강력한 상태로 내버려 둔 것에 실수를 저질렀다고 결론지었다. 서기 106년, 트라야누스는 11개 군단을 이끌고 다시 한번 다키아를 침입했는데, 이때도 이아지게스족의 도움을 받았다. 이아지게스족은 이 전쟁에서 로마를 도운 유일한 야만 부족이었고, 다뉴브 지역 내에서 다키아와 동맹을 맺지 않은 유일한 야만 부족이었다. 이아지게스족은 두 번의 다키아 전쟁에서 로마를 도운 유일한 부족이었으며, 다키아로 빠르게 진격했다. 데케발루스는 포로로 잡혀 개선식에서 구경거리가 될 것을 알았기에 자살을 택했다. 서기 113년에 트라야누스는 다키아를 다뉴브 동쪽에 있는 최초의 로마 속주인 새로운 로마 속주로 합병하였다. 그러나 트라야누스는 티서강과 트란실바니아산맥 사이의 스텝 지대를 다키아 속주에 포함시키지 않고 이아지게스족에게 남겨두었다.6. 3. 다키아 전쟁 이후
이아지게스족과 다키아인들의 동맹은 로마가 라인강보다 다뉴브강에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1] 이는 로마 군단의 배치로 나타난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세 동안에는 라인강을 따라 8개 군단이 주둔했는데, 그중 4개는 마인츠에, 나머지 4개는 쾰른에 주둔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통치 100년 이내에 로마 군사 자원은 라인강이 아닌 다뉴브강을 중심으로 이동하여[2] 9개 군단이 다뉴브강에 주둔하고 라인강에는 1개 군단만 주둔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는 12개 군단이 도나우강에 주둔했다.[1] 로마인들은 또한 독일에서 흑해에 이르는 도나우강 우안 전체를 따라 일련의 요새를 건설했으며, 라이티아, 노리쿰, 판노니아 속주에서는 군단이 교두보 요새를 건설했다. 이후 이 시스템은 포에토비오, 브리게티오, 카르눈툼의 주요 카스트라를 통해 하 도나우강으로 확장되었다. 판노니카 함대와 플라비아 모에시아 함대는 각각 상 도나우강과 하 도나우강에 배치되었지만, 그들은 철문의 소용돌이와 급류를 극복해야 했다.[1]

올테니아 지역의 소유권은 이아지게스족과 로마 제국 사이의 분쟁 원인이었다. 이아지게스족은 다키아인들이 올테니아를 차지하기 전부터 본래 이곳에 거주했었지만, 다키아를 속주로 세우기로 마음먹은 트라야누스가 일으킨 제2차 다키아 전쟁 중에 로마로 편입되었다. 이 지역은 모이시아와 다키아의 새로운 로마 영토 간의 한층 더 직접적인 연결을 제공했으며, 이는 트라야누스가 이 지역을 유지하기로 결정했을 이유일 것이다. 이 분쟁은 107–108년간의 전쟁으로 이어졌고, 당시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총독이자 훗날 황제가 된 하드리아누스는 이들을 격퇴했다. 강화조약의 정확한 기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로마인들이 한 차례의 공물 지불과 같은 약간의 양보 형태를 대가로 올테니아를 유지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아지게스족은 또한 이 무렵 바나트 소유권을 차지했는데, 이는 강화조약의 일부였을 것이다.
117년에 이아지게스족과 록솔라니족이 각각 하 판노니아와 하 모이시아를 침입했다. 이 전쟁은 다키아가 이들 종족 사이에 놓였기 때문에 이들 간의 방문과 교역에 어려움이 있어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다키아 속주 총독 가이우스 율리우스 콰드라투스 바수스가 이 침입 중에 전사하였다. 록솔라니가 먼저 항복했는데, 그래서 로마인들이 록솔라니 왕을 쫓아내고 자신들이 택한 인물로 종속 왕을 세웠을 것이다. 이아지게스족은 로마와 강화를 맺기로 결정했다. 123년에 이아지게스족과 다른 사르마티아인들이 이전의 전쟁과 같은 이유로 로마령 다키아를 공격했다. 이들은 서로를 방문하거나 교역하는 것이 허용되지 못했다. 마르키우스 투르보는 로마인들이 리불루스 도미나룸의 침입 지점으로 사용했을 포타이사와 포롤리숨이라는 마을에 군단병 1,000명을 주둔시켰다. 마르키우스 투르보는 이아지게스족을 격퇴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강화 조약 기간과 맺은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169년, 이아지게스족, 콰디족, 수에비족, 마르코만니족은 다시 한번 로마 영토를 침략했다. 이아지게스족은 금광을 점령하기 위해 알버넘으로 진격했다. 이아지게스족의 전쟁 노력의 정확한 동기와 방향은 알려져 있지 않다. 파르티아 전쟁에서 장군이었고 다키아와 상부 모에시아의 총독이었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프론토는 한동안 그들을 막았지만 170년 전투에서 사망했다. 콰디족은 172년에 항복했는데, 이는 그렇게 한 최초의 부족이었다. 알려진 평화 조건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들의 왕좌에 푸르티우스라는 종속 왕을 세웠고, 콰디족은 리메스를 따라 로마 시장에 접근하는 것이 거부되었다는 것이다. 마르코만니족은 비슷한 평화를 받아들였지만 그들의 종속 왕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173년, 콰디족은 반란을 일으켜 푸르티우스를 몰아내고 아리오가에수스로 교체했는데, 그는 마르쿠스와 협상을 원했다. 마르쿠스는 마르코만니 전쟁의 성공이 위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협상을 거부했다. 그 시점에서 이아지게스족은 아직 로마에 의해 패배하지 않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173년 말과 174년 초에 이아지게스족이 얼어붙은 다뉴브강을 건너 공격하자, 마르쿠스는 그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마르코만니족에 대한 무역 제한도 그 당시 부분적으로 해제되었는데, 그들은 특정 시간과 특정 날에 로마 시장을 방문할 수 있었다. 마르쿠스에게 협상을 강요하기 위해 아리오가에수스는 이아지게스족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에게 현상금을 걸어 체포하여 로마로 데려오면 금화 1,000아우레우스, 그의 머리를 가져오면 금화 500아우레우스를 제공했다. 그 후 로마군은 아리오가에수스를 체포했지만 그를 처형하는 대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를 추방했다.
173년 겨울, 이아지게스족은 얼어붙은 다뉴브강을 건너 습격을 시작했지만 로마군은 추격을 준비했고 그들을 따라 다뉴브강으로 돌아갔다. 로마 군단병이 얼음 위에서 싸우도록 훈련받지 않았고, 그들 자신의 말은 미끄러지지 않고 그렇게 하도록 훈련받았다는 것을 알고, 이아지게스족은 매복을 준비하여 얼어붙은 강을 건너려고 시도할 때 로마군을 공격하고 흩뜨릴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로마군은 견고한 사각형을 형성하고 방패로 얼음을 파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했다. 이아지게스족이 로마군의 대열을 뚫을 수 없자, 로마군은 반격을 가해 창, 옷, 방패를 잡고 이아지게스족을 말에서 끌어냈다. 곧 양측은 얼음 위에서 미끄러져 혼란에 빠졌고 전투는 양측 간의 많은 난투로 축소되었고 로마군이 승리했다. 이 전투 이후 이아지게스족,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르마티아인들이 로마의 주요 적으로 선포되었다.
이아지게스족은 175년 3월 또는 4월 초에 로마에 항복했다. 그들의 왕자 바나다스푸스는 174년 초에 평화를 시도했지만 제안이 거부되었고 바나다스푸스는 이아지게스족에 의해 폐위되어 잔티쿠스로 교체되었다. 평화 조약의 조건은 가혹했다. 이아지게스족은 8,000명의 병력을 보조병으로 제공해야 했고, 10만 명의 로마 인질을 석방해야 했으며, 다뉴브강에서 약 14.48km 이내에 사는 것이 금지되었다. 마르쿠스는 훨씬 더 가혹한 조건을 부과하려고 했었다.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그는 이아지게스족을 완전히 근절시키고 싶어했다 하지만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으로 인해 정신이 팔렸다. 이 평화 협상 동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원로원에 평화 조약의 세부 사항을 보내는 로마 황제의 관습에서 벗어났다. 이것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 전통을 깨뜨린 유일한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 8,000명의 보조병 중 5,500명이 브리타니아로 보내져 Legio VI Victrix와 함께 복무했는데, 이는 그곳의 상황이 심각했음을 시사한다. 로마가 게르마니아와 다키아에서 전쟁으로 정신이 팔린 것을 보고 영국의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모든 증거는 이아지게스족의 기병대가 인상적인 성공을 거두었음을 시사한다. 브리타니아로 파견된 5,500명의 병사는 20년의 복무 기간이 끝난 후에도 귀국이 허용되지 않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아지게스족을 물리친 후 승리 칭호에 따라 ''사르마티쿠스''라는 칭호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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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4. 마르코만니 전쟁 (166년 ~ 180년)
169년, 이아지게스족은 콰디족, 수에비족, 마르코만니족과 함께 다시 한번 로마 영토를 침입했다. 이들은 금광을 차지하기 위해 알부르눔으로 진격했다. 이아지게스족의 전쟁 노력의 정확한 동기와 방향은 알려져 있지 않다. 파르티아 전쟁에서 장군이었고 다키아와 상부 모이시카의 총독이었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프론토는 한동안 그들을 막았지만 170년 전투에서 사망했다. 콰디족은 172년에 항복했는데, 이는 그렇게 한 최초의 부족이었다. 알려진 평화 조건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들의 왕좌에 푸르티우스라는 종속 왕을 세웠고, 콰디족은 리메스를 따라 로마 시장에 접근하는 것이 거부되었다는 것이다. 마르코만니족은 비슷한 평화를 받아들였지만 그들의 종속 왕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173년, 콰디족은 반란을 일으켜 푸르티우스를 몰아내고 아리오가에수스로 교체했는데, 그는 마르쿠스와 협상을 원했다. 마르쿠스는 마르코만니 전쟁의 성공이 위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협상을 거부했다. 그 시점에서 이아지게스족은 아직 로마에 의해 패배하지 않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173년 말과 174년 초에 이아지게스족이 얼어붙은 다뉴브강을 건너 공격하자, 마르쿠스는 그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마르코만니족에 대한 무역 제한도 그 당시 부분적으로 해제되었는데, 그들은 특정 시간과 특정 날에 로마 시장을 방문할 수 있었다. 마르쿠스에게 협상을 강요하기 위해 아리오가에수스는 이아지게스족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에게 현상금을 걸어 체포하여 로마로 데려오면 1,000아우레우스를, 그의 머리를 가져오면 500아우레우스를 제공했다. 그 후 로마군은 아리오가에수스를 체포했지만 그를 처형하는 대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를 추방했다.
173년 겨울, 이아지게스족은 얼어붙은 다뉴브강을 건너 습격을 시작했지만 로마군은 추격을 준비했고 그들을 따라 다뉴브강으로 돌아갔다. 로마 군단병이 얼음 위에서 싸우도록 훈련받지 않았고, 그들 자신의 말은 미끄러지지 않고 그렇게 하도록 훈련받았다는 것을 알고, 이아지게스족은 매복을 준비하여 얼어붙은 강을 건너려고 시도할 때 로마군을 공격하고 흩뜨릴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로마군은 견고한 사각형을 형성하고 방패로 얼음을 파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했다. 이아지게스족이 로마군의 대열을 뚫을 수 없자, 로마군은 반격을 가해 창, 옷, 방패를 잡고 이아지게스족을 말에서 끌어냈다. 곧 양측은 얼음 위에서 미끄러져 혼란에 빠졌고 전투는 양측 간의 많은 난투로 축소되었고 로마군이 승리했다. 이 전투 이후 이아지게스족,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르마티아인들이 로마의 주요 적으로 선포되었다.
이아지게스족은 175년 3월 또는 4월 초에 로마에 항복했다. 그들의 왕자 바나다스푸스는 174년 초에 평화를 시도했지만 제안이 거부되었고 바나다스푸스는 이아지게스족에 의해 폐위되어 잔티쿠스로 교체되었다. 평화 조약의 조건은 가혹했다. 이아지게스족은 8,000명의 병력을 보조병으로 제공해야 했고, 10만 명의 로마 인질을 석방해야 했으며, 다뉴브강에서 약 14.48km 이내에 사는 것이 금지되었다. 마르쿠스는 훨씬 더 가혹한 조건을 부과하려고 했었다.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그는 이아지게스족을 완전히 근절시키고 싶어했다 하지만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으로 인해 정신이 팔렸다. 이 평화 협상 동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원로원에 평화 조약의 세부 사항을 보내는 로마 황제의 관습에서 벗어났다. 이것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 전통을 깨뜨린 유일한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 8,000명의 보조병 중 5,500명이 브리타니아로 보내져 빅트릭스 제6군단과 함께 복무했는데, 이는 그곳의 상황이 심각했음을 시사한다. 로마가 게르마니아와 다키아에서 전쟁으로 정신이 팔린 것을 보고 영국의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모든 증거는 이아지게스족의 기병대가 인상적인 성공을 거두었음을 시사한다. 브리타니아로 파견된 5,500명의 병사는 20년의 복무 기간이 끝난 후에도 귀국이 허용되지 않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아지게스족을 물리친 후 승리 칭호에 따라 ''사르마티쿠스''라는 칭호를 얻었다.
177년에 이아지게스족과 부리를 비롯한 다른 게르만 부족들이 다시 로마 영토를 침략했다. 178년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벨로나 신전에서 피 묻은 창을 가져와 이아지게스족의 땅에 던졌다고 한다. 179년에 이아지게스족과 부리족이 패배했고, 이아지게스족은 로마와 평화를 받아들였다. 평화 조약은 이아지게스족에 추가적인 제약을 가했지만 일부 양보도 포함했다. 그들은 다뉴브 강 내 어떤 섬에도 정착할 수 없었고, 다뉴브 강에 배를 소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키아 속주의 총독의 지식과 승인 하에 그곳을 통해 록솔라니족과 교류하고 거래할 수 있었으며, 특정 날짜의 특정 시간에 로마 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었다. 179년에는 이아지게스족과 부리족이 로마에 합류하여 콰디족과 마르코만니족에 대항한 전쟁에 참전했는데, 이는 로마가 전쟁을 끝까지 수행하고 신속하게 평화 협정을 체결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받은 후였다.
6. 5. 마르코만니 전쟁 종전 후
이아지게스족은 마르코만니 전쟁 이후 폰투스 스텝 및 흑해와의 교역이 단절되고 영토 내 광물 자원이 부족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로마는 이전의 이웃들보다 약탈하기 어려운 상대였고, 이아지게스족은 대규모 교역품을 갖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소규모 약탈과 원예 농업에 의존했다.[1] 로마 국경과 인접한 바나트 지역에서는 3세기 말에 지어진 도기 작업장들이 발견되었다.[2]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키아를 통한 록솔라니족과의 교역을 허용하여 이아지게스족을 흑해 교역망과 다시 연결시켰다. 이 교역로는 260년까지 지속되다가 고트족이 티라스와 올비아를 점령하면서 끊어졌다. 이아지게스족은 로마와도 교역했지만, 규모는 작았다. 로마의 다뉴브 리메스 전체에 로마 주화가 흩어져 있었지만, 이아지게스족 영토 내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175년 3월 혹은 4월 초, 이아지게스족은 로마에 항복했다. 이아지게스족의 왕자 바나다스푸스는 평화를 시도했지만 거절당하고 잔티쿠스로 대체되었다. 강화 조약 조건은 가혹하여, 8,000명의 보조병 제공, 10만 명의 로마 포로 석방, 다뉴브강에서 10 로마 마일(약 약 14.48km) 내 거주 금지 등을 요구받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아지게스족을 완전히 박멸하려 했지만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으로 좌절되었다. 보조병 8,000명 중 5,500명은 브리타니아로 보내져 빅트릭스 제6군단에서 복무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아지게스족을 제압한 후 '사르마티쿠스'(Sarmaticus)라는 칭호를 얻었다.

179년, 이아지게스족은 로마와 평화를 맺었다. 평화 조약은 추가적인 제재를 가했지만, 다키아 총독의 승인 하에 록솔라니족과 교역하고 특정 시기에 로마 시장에서 교역하는 것을 허용했다. 같은 해, 이아지게스족과 부리족은 로마의 콰디족과 마르코만니족에 대한 전쟁에 참전했다.
183년에 맺어진 조약에서 콤모두스는 콰디족과 마르코만니족이 이아지게스족, 부리족, 반달족과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금지했다. 214년 카라칼라는 이아지게스족 영토를 공격했다. 236년 이아지게스족은 로마를 침입했지만 막시미누스 트락스에게 패배했고, 트락스는 '사르마티쿠스 막시무스'(Sarmaticus Maximus)라는 칭호를 얻었다. 248년과 254년, 이아지게스족, 마르코만니족, 콰디족은 판노니아를 공격했다. 260년 고트족은 티라스와 올비아를 점령하여 이아지게스족의 폰토스 스텝 및 흑해 교역을 다시 끊었다. 282년부터 283년까지 카루스 황제는 이아지게스족에 대한 원정을 이끌었다.
293년 이아지게스족과 카르피족은 로마 영토를 약탈했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전쟁을 선포했다. 294년부터 295년까지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들을 상대로 승리했다. 296년부터 298년까지 갈레리우스는 이아지게스족을 상대로 원정을 수행했다. 358년 이아지게스족은 로마와 전쟁을 벌였다. 375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브리게티오에서 이아지게스족 사절단을 만났다. 고트족 이동 시기, 이아지게스족은 북쪽과 동쪽 국경에서 고트족에게 둘러싸였고,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기에 악마의 제방(Ördögárok)이라는 토루가 이아지게스족 영토 주변에 지어졌다.
6. 6. 후기 역사와 유산
이아지게스족은 티서 평원으로 이주하기 전에는 유목민이었으나, 그곳에 정착한 후에는 반(半)정착 생활을 하였으며, 도시에서 생활했다.[1] 그들은 가축의 방목을 위해 이 도시들을 옮겨 다녔다.[2] 그들의 언어는 고대 이란어의 방언으로, 다른 대부분의 사르마티아 고대 이란어 방언과는 상당히 달랐다. 로마 작가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에 따르면, 이아지게스족은 싸움에 참여하기에는 너무 늙은 사람은 아들들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로마 지리학자 폼포니우스 멜라에 따르면,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
후기 고대 시대에 들어서면서 역사 기록이 훨씬 산만해지고, 이아지게스족은 부족으로 언급되는 빈도가 줄어든다. 4세기부터 대부분의 로마 작가들은 다양한 사르마티아 부족들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사르마티아인으로 지칭하기 시작했다. 4세기 후반에는 티서 강의 양쪽에 살았던 아가라간테스족과 리미간테스족이라는 두 사르마티아 민족이 언급되었다. 한 가지 이론은 이 두 부족이 록솔라니족이 이아지게스족을 정복한 후 형성되었으며, 이로 인해 이아지게스족은 리미간테스족이 되고 록솔라니족은 아가라간테스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론은 이 지역으로 점차 이주해 온 초기 슬라브족 부족들이 이아지게스족에게 복종했으며, 이아지게스족은 아가라간테스족으로, 슬라브족은 리미간테스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론은 록솔라니족이 이아지게스족에게 통합되었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론이 맞든, 5세기에 두 부족 모두 고트족에게 정복당했고, 아틸라 시대에는 훈족에게 흡수되었다.
7. 대외 관계
이아지게스족은 다키아인들과 동맹을 맺어 로마 제국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 때문에 로마는 라인강보다 다뉴브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기에는 라인강에 8개 군단이 배치되었지만, 100여 년 후에는 다뉴브강에 9개 군단,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는 12개 군단이 다뉴브강을 따라 배치되었다. 로마는 다뉴브강 우측 기슭을 따라 여러 요새와 다리목 요새를 건설했다. 클라시스 판노니카와 클라시스 플라비아 모이시카 함대는 각각 다뉴브 우측과 아래쪽에 배치되었지만, 철문의 소용돌이와 폭포를 넘어야 했다.
이아지게스족은 유목 생활을 하다가 티서강 평원에 정착한 후에는 반(半)정착 생활을 하며 도시에서 생활했다. 이들은 가축 방목을 위해 도시를 옮겨 다녔다. 이들의 언어는 고대 이란어의 방언으로, 다른 사르마티아 방언과는 상당히 달랐다. 로마 작가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에 따르면, 이아지게스족은 싸움에 참여하기에 너무 늙은 사람은 아들들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로마 지리학자 폼포니우스 멜라에 따르면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고 한다.
7. 1. 로마 제국
아우구스투스 시기에 이아지게스족은 친선 관계 요청을 위해 로마로 사절단을 보냈다. 현대적 관점에서 이 '친선 관계'는 불가침 조약에 가까울 수 있다. 이 무렵, 이아지게스족 영토 서쪽 일부는 콰디족이 점거하고 있었는데, 학자 니콜라스 하이엄은 이들 간에 오랜 기간 협력이 있었음을 시사한다고 한다.시간이 흘러 티베리우스 재위 기간, 이아지게스족은 로마의 새로운 종속 부족 중 하나가 되었다. 로마의 종속국들은 공헌에 대한 대가로 보상을 제공하는 로마의 보호 정책에 따라 다루어졌다. 종속국의 왕은 '소키우스 에트 아미쿠스 로마니 포풀리'(socius et amicus Romani Populi, 로마인의 동맹이자 친구)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 관계에 대한 명확한 의무와 보상은 모호했다. 종속국이 된 후에도 이아지게스족은 국경 너머 로마로 약탈을 계속했는데, 예를 들어 서기 6년과 16년에 그랬다. 서기 20년에 이아지게스족은 카르파티아산맥을 따라 서쪽 판노니아 스텝으로 이동하여 다뉴브강과 티서강 사이 스텝 지역에 정착했고, 다키아인들에게서 영토를 완전히 장악했다. 서기 50년, 이아지게스족 기병대는 수에비족과 싸우던 로마의 콰디족 종속국 왕 반니우스를 도왔다.
네 명의 황제의 해인 서기 69년, 이아지게스족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지지를 보냈다. 이아지게스족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이탈리아 침공을 위해 군대의 부담을 덜고자 다키아인들로부터 로마 국경을 지키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아지게스족이 점령하거나 배반할 것을 우려하여 거절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아지게스족 족장들에게 자신의 부대에서 복무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이아지게스족이 다뉴브강 주변 비무장지대에 대한 공격을 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게르만 및 다키아 부족 대부분에게서 지지를 받았다.
도미티아누스의 다키아 원정은 대체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로마는 데케발루스에게 전쟁을 끝내는 대가로 매년 800만 세스테르세스를 지불했지만, 도미티아누스는 소규모 전술적 승리를 거두어 원정을 승리로 주장할 수 있었다. 도미티아누스는 로마로 돌아와 완전한 개선식이 아닌 소규모 축하 행사인 오바티오를 받았다. 도미티아누스가 22번의 군사적 승리로 임페라토르 칭호를 받은 것을 고려할 때, 이는 제한적인 행사였으며, 도미티아누스의 주장과 관계없이 민중이나 최소한 원로원은 이 전쟁이 실패한 전쟁임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서기 89년, 도미티아누스는 콰디족, 마르코만니족과 마찬가지로 이아지게스족을 공격했다. 이 전쟁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지만, 로마군이 패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로마군은 이아지게스족의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다키아 땅으로 몰아냈다.
서기 92년 초, 이아지게스족, 록솔라니족, 다키아족, 수에비족은 로마의 판노니아 속주를 공격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콰디족과 마르코만니족에게 병력 지원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고, 로마는 이들에게도 전쟁을 선포했다. 서기 92년 5월, 이아지게스족은 라팍스 제21군단을 전멸시켰다. 그럼에도 도미티아누스는 이듬해 1월에 이 전쟁을 승리로 종결했다고 전해진다. 'Signis a Sarmatis Resitvtis'라는 문구와 함께 로마 군단기를 든 이아지게스인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희귀한 아우레우스 주화를 바탕으로, 전멸당한 라팍스 제21군단에서 탈취당한 군단기가 종전 때 로마에 반환된 것으로 여겨진다. 서기 89년과 92년의 이아지게스-로마 전쟁에 관한 기록이 뒤섞여 있지만, 이들은 별개의 전쟁이었고 같은 전쟁의 연속이 아니었다. 로마 속주에 인접한 민족들과 이아지게스족이 끼친 위협은 트라야누스가 98년 말과 99년 초에 다뉴브강 하류와 중류를 건너 요새 시설을 사찰하고 더 많은 요새와 도로 건설을 시작할 만큼 컸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서기 98년에 저술한 '게르마니아'에서 오시족이 이아지게스족과 콰디족에게 공물을 바치고 있다고 기록했다. 종속 관계가 시작된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 이아지게스 왕의 아들들은 공식적으로는 영예였지만 실제로는 인질로서 로마군에서 훈련받았다. 이는 이아지게스 왕들이 이아지게스족에 대한 완전한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아지게스 대공들이 군대 지원을 제안했지만, 이들이 전쟁에서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주할 것을 우려하여 거절당했다.
이아지게스족과 다키아인의 동맹은 로마가 라인강보다 다뉴브강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했다. 이 상황은 로마 군단 배치에서도 나타난다. 아우구스투스 통치 기간에는 라인강을 따라 8개 군단(마인츠에 4개, 쾰른에 4개)이 배치되었지만, 100여 년 후에는 로마 군사 자원이 다뉴브강을 따라 모이게 되었고, 다뉴브강에는 9개 군단, 라인강에는 1개 군단만 배치되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는 12개 군단이 다뉴브강을 따라 있었다. 또한 로마는 독일에서 흑해까지 이어지는 다뉴브강 우측 기슭을 따라 여러 요새를 지었고, 라이티아, 노리쿰, 판노니아의 군단들은 다리목 요새를 건설했다. 이후 이 방어 체제는 포에토비오, 브리게티오, 카르눈툼 등 주요 카스트라와 함께 다뉴브강 하류로 확장되었다. 클라시스 판노니카와 클라시스 플라비아 모이시카는 각각 다뉴브 우측과 아래쪽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이 함대는 철문의 소용돌이와 폭포를 넘어야 했다.
169년, 이아지게스족, 콰디족, 수에비족, 마르코만니족 등은 다시 한번 로마 영토를 침입했다. 이아지게스족은 금광을 차지하려는 목적으로 알부르눔 침입을 이끌었다. 이아지게스족의 전쟁 공조 방향과 정확한 목표는 알려져 있지 않다. 파르티아 전쟁 지휘관이자 상, 하 다키아 총독이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프론토는 이들을 여러 차례 몰아냈으나 170년 전투 중 사망했다. 콰디족은 172년에 항복했는데, 이들이 최초로 항복한 부족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콰디족에 자신들이 택한 종속왕 푸르티우스를 왕좌에 세우고, 콰디족은 리메스를 따라 있는 로마 시장 접근이 거부되는 강화 조건을 제시했다. 마르코만니족은 유사한 강화 조약을 맺었지만, 종속왕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173년, 콰디족은 반란을 일으키고 푸르티우스를 왕좌에서 몰아낸 뒤 아리오가이수스를 왕으로 세웠다. 마르쿠스는 협상을 거부했는데, 마르코만니 전쟁 성과가 더 이상 위험에 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시점에서 이아지게스족은 로마에 격퇴되지 않은 상태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아지게스족이 얼어붙은 다뉴브강을 건너 173년 말과 174년 초에 공격하자 이들에 대한 관심을 다시 돌렸다. 마르코만니족에 대한 무역 제한이 부분적으로 해제되었고, 마르코만니족은 특정 날짜와 시간에 로마 시장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아리오가이수스는 이아지게스족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를 붙잡아 로마로 보내는 데 1,000 아우레우스나 머리를 가져올 경우 500 아우레우스를 주는 현상금을 걸었다. 이후 로마는 아리오가이수스를 붙잡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를 처형하지 않고 유배 보냈다.
173년 겨울, 이아지게스족은 얼어붙은 다뉴브강을 넘어 공격했으나 로마군은 추격에 대비했고 이들을 다뉴브 지역까지 추격했다. 이아지게스족은 로마 군단병이 얼음 위에서 싸우는 훈련이 안 되었고, 자신들의 말은 얼음에서 헛디디지 않고 움직이는 훈련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기습 공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단단한 진형을 짜고 방패로 빙판을 파내어 미끄러지지 않았다. 이아지게스족이 로마 대열을 무너뜨리지 못하자, 로마군은 반격하여 이아지게스족의 창, 의류, 방패를 잡아당겨 말에서 떨어뜨렸다. 빙판 위에서 미끄러지기 시작한 뒤 양측 군대는 혼란에 빠졌고 전투는 양측의 말싸움으로 바뀌었고,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 후 이아지게스족과 대개 사르마티아인은 로마의 주적으로 선포되었다.
이아지게스족은 175년 3월 혹은 4월 초에 로마에 항복했다. 이아지게스 고위 귀족 바나다스푸스는 174년 초에 강화를 시도했지만 거절당했고, 이아지게스족에게 폐위당하고 잔티쿠스로 대체되었다. 강화 조약 조건은 가혹했다. 이아지게스족은 보조병 8,000명을 제공하고 포로로 잡은 로마인 100,000명을 석방해야 했으며, 다뉴브강에서 9km 내에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마르쿠스는 더 강력한 조건을 부과하려 했고, 카시우스 디오는 마르쿠스가 이아지게스족을 완전히 박멸시키기를 원했지만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으로 방해받았다고 전했다. 이 강화 기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원로원에 강화 조약 상세 사항을 보내는 로마 황제 전통을 깼는데, 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 전통을 깼다고 기록된 유일한 사례였다. 보조병 8,000명 중 5,500명은 빅트릭스 제6군단에 복무하도록 브리타니아로 보내졌으며 그곳 상황이 심각했음을 나타낸다. 로마가 게르마니아와 다키아 전쟁에 열중하는 동안 브리튼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모든 증거는 이아지게스 기병이 인상적인 성공을 거두었음을 보여준다. 브리타니아로 보내진 5,500명은 20년 복무 기간이 끝났지만 고향으로 복귀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아지게스족을 제압한 후, 로마의 승리 칭호 관습에 따라 '사르마티쿠스'(Sarmaticus)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아지게스족은 판노니아 평원에 도착한 뒤 로마 제국을 자주 침략했지만, 진정한 위협이 된 적은 없었다. 1세기 동안 로마는 북쪽 국경, 특히 다뉴브 지역을 안정시키는 데 부족들과 친구 관계를 맺고 부족 간 불신을 심는 외교를 사용했다. 로마는 공격을 격퇴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부족들에게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다뉴브 국경 정벌을 벌이며 다뉴브 국경을 지켜냈다. 외교적 영향력과 기습적인 정벌이라는 결합은 로마가 이아지게스족을 포함한 다양한 부족들을 로마 제국의 위성국이 되게 했다. 로마가 다키아를 포기한 뒤에도, 로마는 지속적으로 사르마티아 부족들을 상대로 다뉴브 북쪽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이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콘스탄티누스 2세, 발렌티니아누스 1세 통치 기간에 두드러졌다. 이 정책을 위해 콘스탄티누스는 고트족과 사르마티아족에 대한 원정을 위한 병참을 개선시키기 위해 다뉴브강 가운데를 통과하는 영구 다리를 건설했다.
로마 제국과 사르마티아 부족 간 관계에서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은 로마 영토 내 부족 정착이었으며, 황제들은 종종 사르마티아 부족 출신 난민을 가까운 로마 영토로 받아들였다. 훈족이 러시아 스텝 지대에 도착하고 그곳에 있던 부족들을 정복했을 때, 훈족은 종종 새롭게 정복된 부족들이 머물도록 강요할 군사력이 부족했고, 그레우퉁기족, 반달족, 알란족, 고트족 같은 부족들이 훈족의 종속 대상이 되기보다는 로마 제국 영토 내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로마 제국은 이 난민 부족민을 받아들이는 데서 이익을 누렸고, 루길라와 아틸라 같은 훈족 지도자들이 로마 제국이 모든 난민 부족을 거절할 것을 요구한 조약이 맺어지고서도 이들이 정착하는 것을 계속 허용했으며, 훈족의 경쟁 부족 및 종속 부족은 발칸반도의 로마 지도자들에게 환대받았다.
이아지게스족은 다른 사르마티아 부족인 록솔라니족과 경제적, 외교적으로 강력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두 번째 다키아 전쟁 동안 이아지게스족은 로마를 지원했고, 록솔라니족은 다키아인을 지원했지만, 이아지게스족과 록솔라니족은 서로에게 중립을 유지했다. 로마의 다키아 병합 이후 두 부족은 서로 격리되었지만, 179년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평화 조약으로 이아지게스족과 록솔라니족은 총독의 승인을 전제로 다키아를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새로운 조약으로 그들은 록솔라니족과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수 세기 만에 흑해와 폰토스 스텝 지역과 간접적으로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아지게스족은 작은 왈라키아를 거쳐 왈라키아 평원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를 증명할 고고학적 증거는 거의 없다. 2세기 마지막 분기부터 이 지역에서 키프라에아 조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학자 하이엄은 이아지게스족과 콰디족 사이에 어느 정도 "장기적인 협력"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2세기 후반에 동맹을 맺었고, 이아지게스족이 판노니아 분지에 도착한 직후 서부 지역을 콰디족에게 양도한 사실에 주목했는데, 이는 명백히 충돌 없이 이루어졌다.
7. 1. 1. 고고학
이아지게스족이 티서강과 다뉴브강 사이의 평야로 이주했을 때, 이들의 경제는 매우 나빴다. 폰투스 스텝 및 흑해와의 교역 단절, 영토 내 광물 자원 부족은 이들의 교역 수준을 낮추었다. 로마는 잘 조직된 군대 때문에 이아지게스족의 이전 이웃들보다 약탈하기 훨씬 어려운 적이었다.[1][2] 이아지게스족은 역사 대부분 동안 대규모로 조직화된 교역품을 갖춘 적이 없었다. 교역품 대부분은 이웃 민족에 대한 소규모 약탈을 통해 얻었고, 일부 부수적인 원예 농업을 행하기도 했다.로마 국경과 인접하고 이아지게스족 영토 내에 있던 바나트에서 일부 도기 작업장들이 발견되었다. 3세기 말에 지어진 이 도기 작업소들은 브르샤츠–치르벤카, 그라디나리–셀리스테, 티미쇼아라–프라이도르프, 티미쇼아라–드라가시나, 호도니, 판체보, 돌로보, 이즈빈 시 야부차 등에서 발견되었다.
폰투스 스텝 및 흑해 지역에 대한 이아지게스족의 교역은 이들의 경제에 매우 중요했다. 마르코만니 전쟁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키아를 통한 록솔라니족과의 교역을 통해 이들에게 화해의 움직임을 제시하며, 이아지게스족을 흑해 교역망과 다시 연결시켜주었다. 이 교역로는 260년까지 지속되다가, 고트족이 티라스와 올비아를 차지하면서, 록솔라니족 및 이아지게스족의 폰투스 스텝 교역망을 끊어 놓았다. 이아지게스족은 로마인들과 교역하기도 했지만, 이 교역은 규모가 작았다. 로마의 다뉴브 리메스 전체에 흩어져 있는 로마의 주화가 존재하는 한편, 이아지게스족의 영토 내에서 이런 주화들이 가장 집중되어 나타난다.
트라야누스 시기 무렵, 로마인들은 다키아와 판노니아 사이에 길을 뚫었고, 서기 100년 무렵의 이아지게스 영토에서 로마 상품들의 흔적이 보이며, 대개 주요 강들이 교차하는 지점 인근에 자리 잡았다. 적은 수의 로마 금석문들과 건물들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학자 니콜러스 하이햄(Nicholas Higham)은 이아지게스 영토 내에서 상당한 정도의 로마화 혹은 외교적 또는 군사적 거점들의 존재를 시사한다고 하였다. 로마 상품들은 2세기와 서기 3세기 초에 널리 퍼져있었으며, 특히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속주의 주도이자 티서강 유역의 동쪽 지역인 아퀸쿰에 두드러졌다.
7. 2. 록솔라니족
이아지게스족은 다른 사르마티아 부족인 록솔라니족과 경제적, 외교적으로 강력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제2차 다키아 전쟁 동안 이아지게스족은 로마를 지원했고, 록솔라니족은 다키아인을 지원했지만, 서로 중립을 유지했다. 로마의 다키아 병합 이후 두 부족은 서로 격리되었지만, 179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평화 조약으로 다키아 총독의 승인을 전제로 다키아를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이아지게스족은 록솔라니족과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수 세기 만에 흑해와 폰토스 스텝 지역과 간접적으로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아지게스족은 작은 왈라키아를 거쳐 왈라키아 평원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를 증명할 고고학적 증거는 거의 없다. 2세기 마지막 분기부터 이 지역에서 키프라에아 조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7. 3. 콰디족
169년에 이아지게스족, 콰디족, 수에비족, 마르코만니족 등이 다시 한번 로마 영토를 침입했다. 이아지게스족은 금광을 차지하려는 목적으로 알부르눔 침입을 이끌었다.[1] 이아지게스족의 전쟁 공조에 대한 방향과 정확한 목표는 알려져 있지 않다.[2] 파르티아 전쟁 기간에 지휘관이었고 상, 하 다키아의 총독이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프론토는 몇 차례는 이들을 몰아냈으나 170년 전투 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콰디족은 172년에 항복했는데, 이들이 최초로 항복한 부족이었다. 알려진 강화 조건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콰디족에 자신들이 택한 종속왕 푸르티우스를 왕좌에 세우는 것과 콰디족은 리메스를 따라 있는 로마 시장에 접근이 거부되는 것이었다. 마르코만니족은 유사한 강화 조약을 받았들였지만 세워진 종속왕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173년에, 콰디족은 반란을 일으키고 푸르티우스를 왕좌에서 몰아낸 뒤 아리오가이수스를 왕으로 세웠으며, 그는 마르쿠스와 협상에 들어가고 싶어하였다. 마르쿠스는 마르코만니 전쟁의 성과가 더 이상 위험에 처하지 않았기에 협상을 거부했다. 이 시점에서 이아지게스족은 로마에 격퇴되지 않은 상태였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지만, 이아지게스족이 얼어붙은 다뉴브강을 건너 173년 말과 174년 초에 공격을 하자, 마르쿠스는 이들에 대한 관심을 다시 돌렸다. 마르코만니족에 대한 무역 제한들이 이 시기에 부분적으로 해제되기도 했었으며, 마르코만니족들은 특정한 날 특정 때에 로마 시장을 방문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마르쿠스에 협상에 나서도록 하기 위한 시도로, 아리오가이수스는 이아지게스족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를 붙잡아 로마로 보내는 데 1,000 아우레우스나 머리를 가져올 경우 500 아우레우스를 주는 등 그에 대한 현상금을 걸었다. 이 뒤에, 로마인들은 아리오가이수스를 붙잡았지만 그를 처형하기보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를 유배 보냈다.
학자 하이햄은 이아지게스족과 콰디족 간 ‘장기간의 협력’이 어느 정도가 있었다고 주장했으며, 이들이 서기 2세기 후반에 동맹이었고, 이아지게스족이 판노니아 평야에 도착한 뒤 얼마 안 지나 분명하게 분쟁 없이 자기네 영토의 서쪽 부분을 콰디족에게 주었다고 언급했다.
참조
[1]
서적
Handbuch der Geographie
Schwabe Verlag Basel
2006
[2]
서적
Handbuch der Geographie
Schwabe Verlag Basel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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