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드할리야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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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투드할리야 2세는 히타이트 제국의 왕으로, 기원전 1375년경 아르누완다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서부 아나톨리아의 아르자와, 북쪽의 카스카족, 동쪽의 미탄니 등 여러 세력과 전쟁을 벌였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수도 하투샤가 카스카족의 공격으로 파괴되기도 했다. 투드할리야 2세의 계승 문제와 관련하여, 투드할리야 1세와의 동일 인물 여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하며, 하투실리 2세의 존재 여부도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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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14세기 사람 - 투드할리야 1세
투드할리야 1세는 기원전 15세기경 히타이트를 통치한 왕으로, 히타이트 신왕국 시대의 시조로 여겨지지만 동시대 사료 부족으로 가계와 재위 기간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며, 미탄니와의 전쟁, 알레포 파괴, 아나톨리아에서의 정복 활동을 펼쳤다. - 히타이트의 왕 - 하투실리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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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와탈리 2세는 기원전 13세기 히타이트 제국의 왕으로, 수도를 하투사에서 타르훈타사로 이전하고 카데시 전투에서 람세스 2세와 대결하였으며, 윌루사(트로이)와의 조약을 통해 히타이트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 역사에 관한 - 광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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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드할리야 2세 | |
---|---|
기본 정보 | |
칭호 | 히타이트 왕 |
배우자 | 니칼마티 |
자녀 | 아슈무니칼 |
계승자 | 아르누완다 1세 |
이전 통치자 | 하투실리 2세 (?) |
통치 기간 | 기원전 1425년경 – 기원전 1390년경 |
가계 | |
아버지 | 하투실리 2세 (?) |
어머니 | 아슈무-헤바 (?) |
2. 왕위 계승 및 정체성 논란
투드할리야라는 이름을 가진 히타이트 왕들의 순서 문제는, 그 이름을 가진 처음 두 왕이 같은 사람인지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학자들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칸투질리의 아들로 확인된 투드할리야는 무와탈리 1세가 Ḫimuili와 칸투질리(투드할리야의 아버지와 동일하지 않을 수 있음)라는 관료들에게 살해된 후 왕위를 계승했다.[4] 이 문서에서 논의되는 왕은 아르누완다 1세의 장인이자 선임자였다.[5]
이러한 불확실성 때문에 학자들은 증거 해석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많은 학자들은 한 명의 투드할리야(I[6] 또는 I/II[7])를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투드할리야 1세와 투드할리야 2세라는 두 명의 별도 왕으로 간주한다.[8]
자크 프뢰는 두 왕을 구분하는 근거를 제시했는데, 투드할리야 1세는 재위하지 않은 칸투질리의 아들이었던 반면, 투드할리야 2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했다는 점에 주목한다.[9] 투드할리야 2세의 여동생 지플란타위야는 왕의 딸이었다.[10] 또한 프뢰는 히타이트 왕국과 키주와트나 사이의 Šunaššura 조약이 양측의 두 다른 왕들에 의해 일련의 동등 및 불평등 조약 배치를 반영한다고 주장하며,[11] 무르실리 2세의 “십자형 인장”에서 세 명의 투드할리야를 조상으로 식별하고,[12] 시리아와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반복적인 군사 행동을 한 투드할리야들은 지나치게 긴 재위를 피하기 위해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3]
2. 1. 투드할리야 1세와 2세의 구분
투드할리야라는 이름을 가진 히타이트 왕들의 순서를 정하는 문제는, 그 이름을 가진 처음 두 왕이 같은 사람인지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학자들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칸투질리의 아들로 확인된 투드할리야는 무와탈리 1세가 Ḫimuili와 칸투질리(반드시 투드할리야의 아버지와 동일하지 않음)라는 관료들에게 살해된 후 왕위를 계승했다.[4] 이 문서에서 논의되는 왕은 아르누완다 1세의 장인이자 선임자였다.[5]이러한 불확실성 때문에 학자들은 증거 해석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 많은 학자들은 한 명의 투드할리야(I[6] 또는 I/II[7])를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투드할리야 1세와 투드할리야 2세라는 두 명의 별도 왕으로 간주한다.[8]
두 왕을 구분하는 근거는 자크 프뢰에 의해 제시되었는데, 그는 투드할리야 1세가 재위하지 않은 칸투질리의 아들이었던 반면, 투드할리야 2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했다는 점에 주목한다.[9] 투드할리야 2세의 여동생 지플란타위야는 왕의 딸이었다.[10] 또한 프뢰는 히타이트 왕국과 키주와트나 사이의 Šunaššura 조약이 양측의 두 다른 왕들에 의해 일련의 동등 및 불평등 조약 배치를 반영한다고 주장하며,[11] 무르실리 2세의 “십자형 인장”에서 세 명의 투드할리야를 조상으로 식별하고,[12] 시리아와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반복적인 군사 행동을 한 투드할리야들은 지나치게 긴 재위를 피하기 위해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3]
2. 2. 하투실리 2세 존재 여부
과거에는 투드할리야 2세와 투드할리야 3세 사이에 하투실리 2세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무와탈리 2세와 알레포 왕 탈미-샤룸마 사이의 조약 문서에서 대왕 "하투실리"가 언급되지만, 현재 이것은 실제로는 다른 인물의 별칭이거나 다른 시대의 하투실리 1세에 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어, 존재가 의문시되고 있다. 더 나아가 하투실리 2세를 투드할리야 2세의 공동 통치자로 보는 의견도 있으며,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3. 가족 관계
Freu의 재구성에 따르면, 투드할리야 1세와 투드할리야 2세는 할아버지와 손자 관계이며, 짧은 재위 기간으로 기록이 희미한 하투실리 2세가 그 사이 세대에 해당한다.[14]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투드할리야 2세는 하투실리 2세의 아들이었을 것이다.[15]
투드할리야 2세에게는 지플란타위야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여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아마도 오빠가 어렸을 때 그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17] 나중에 지플란타위야는 오빠와 올케를 상대로 마법을 부린 혐의를 받았는데, 투드할리야 2세와 그의 아내 니칼-마티, 그리고 그들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시행된 반마법 의식의 묘사에서 이를 알 수 있다.[18] 아들들은 부모보다 먼저 사망한 것으로 보이지만, 딸 아슈무-니칼은 살아남았다. 그녀의 남편 아르누완다는 투드할리야가 선택한 후계자가 되었고, 아마도 양자였으며, 장인과 함께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19]
4. 통치 기간
투드할리야 2세는 기원전 1375년경 선왕 아르누완다 1세를 계승하여 히타이트의 대왕으로 즉위했다. 아르누완다 1세는 히타이트에 외적의 침입이라는 많은 문제를 남겼다.
하투샤 동쪽의 아지(하야사)는 히타이트의 핵심지를 공격했고, 두 차례의 원정으로 항복시킬 수 있었다. 남쪽의 키주와트나는 속국이 아닌 직접 통치 형태로 바뀌었으며, 이후 투드할리야 2세와 아르누완다 1세의 공동 통치 시기에 히타이트 왕국에 병합될 것으로 추정된다.[28] 서쪽의 알자와는 타르훈타라두 왕의 지휘 아래 카파도키아 지방의 티와누와(티아나)까지 침입하여 이집트 왕 아멘호테프 3세에게 딸을 바치며 접근을 시도했다.
투드할리야 2세의 죽음이 다가오자 귀족들은 아들 투드할리야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차기 대왕으로 인정했다. 투드할리야 2세는 기원전 1355년경 사망했다. 이전에는 투드할리야 1세 이전에 다른 "투드할리야"라는 대왕이 있었다고 여겨져 이 투드할리야 2세를 "3세"로 불렀고, 차기 대왕인 투드할리야 3세와 혼동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투드할리야 1세 이전의 대왕 "투드할리야"는 존재하지 않으며, 2세와 3세도 서로 다른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4. 1. 서부 아나톨리아 원정
투드할리야 2세의 아버지 재위 기간 동안, 서부 아나톨리아 연합인 아르자와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히타이트의 지배를 침범하기 시작했을 수 있다.[20] 투드할리야 2세는 아르자와를 상대로 진군하여 세하 강 유역, 하팔라, 왈라리마 등을 포함하여 이들을 물리치고 포로와 군사 장비를 본국으로 보냈다.[21] 그의 배후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그는 아슈와로 방향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아슈와는 성공적으로 진압되었다.[22] 아슈와의 동맹국 중에는 윌루시야와 타루이샤가 있는데, 이들은 그리스 [W]ilios (Ilion)와 Troia의 히타이트식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23]서부에서의 성공적인 군사 작전은 패배한 국가들로부터 히타이트 핵심 영토나 히타이트 통치 하에 있는 다른 지역으로 대량의 포로와 물품이 이동하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에는 군인과 장비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포로인 쿠쿨리가 그들 사이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결과를 낳았다. 투드할리야는 이를 진압할 수 있었다.[24]
투드할리야 2세의 통치 말년에 그는 그의 동료이자 후계자인 아르누완다 2세와 함께 아르자와의 왕 쿠판타-쿠룬타를 상대로 승리한 군사 작전을 벌이기 위해 서부 전선으로 돌아갔다.[29] 이 전쟁의 배경에는 서부 아나톨리아의 왕자 마두와타의 불안정한 행동이 있는데, 그는 투드할리야 2세에 의해 아키야의 아타르시야로부터 "구출"되어 히타이트 군주에 의해 하이아르티와 지파슐라의 산악 지역에 연이어 봉토를 받았다(이 이름은 아테우스와 아카이아인과 비교된다).[30]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두와타는 자신의 영토를 지키겠다는 맹세를 어기고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광범위하게 개입했으며, 루카 지역과 심지어 알라시야(키프로스)까지 개입했다. 그는 아르자와의 왕과 싸움을 벌여 패배했고, 적에게 그들의 계획을 배신하여 루카 지역에서 두 명의 히타이트 지휘관을 매복하여 죽게 만들었으며, 나중에 아르자와의 동맹이 되었다. 히타이트 자료는 성공을 주장했지만, 서부에서의 어떤 이득도 덧없이 사라졌다.[31]
4. 2. 북방 카스카족과의 전쟁
투드할리야 2세가 서부 지역에 집중하는 동안, 히타이트 왕국의 북부 지역은 북쪽에서 카스카족의 공격을 받았다.[25] 이들은 2년간의 군사 작전을 통해 패배했고, 투드할리야는 1년 동안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25]카슈카족은 히타이트 영내로 침입을 반복했지만, 조직적이지 않은 그들의 행동(게릴라전?)에 히타이트는 혼란스러워하며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카슈카족은 말라샨타(크즐르르마크) 남쪽의 네나사까지 침입했으며, 수도 하투샤까지 파괴되어 왕궁은 일시적으로 동방의 삼하로 이전했다. 병약한 투드할리야는 뛰어난 군인이었던 아들 슈필룰리우마에게 북방 정벌을 맡겼지만, 오랫동안 성과를 얻지 못했다.
4. 3. 동방 미탄니와의 관계
투드할리야 2세의 후계자인 아르누완다 1세는 후대의 기록에서 투드할리야가 미탄니와 이수와를 상대로 벌인 노력을 회상했다. 투드할리야는 이수와를 물리쳤고, 그들 중 일부는 동맹국인 미탄니의 샤우스타타르에게 피난처를 구했지만, 샤우스타타르는 그들의 인도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히타이트는 영구적인 이득 없이 추가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26] 아마도 이러한 맥락에서 투드할리야 2세는 키주와트나의 슈나슈슈라 2세와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는데, 투드할리야의 할아버지 시절에 그 나라가 이전에 체결했던 조약(그리고 히타이트에 대한 복종)을 상기시켰다.[27]만약 투드할리야 1세와 투드할리야 2세가 동일 인물로 확인된다면, 그는 또한 시리아에 개입하여 히타이트 대왕 무르실리 2세와 그의 조카 탈미-샤룸마 알레포 간의 후대 조약의 역사적 서문에 따르면, 도시가 미탄니로의 이탈을 용서하고 알레포를 파괴했다고 한다.[32]
4. 4. 마두와타 사건
투드할리야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서부 아나톨리아의 왕자 마두와타는 불안정한 행동을 보였다. 그는 투드할리야 2세에 의해 아키야의 아타르시야로부터 "구출"되어 히타이트 군주에 의해 하이아르티와 지파슐라의 산악 지역에 연이어 봉토를 받았다. (Ἀχαιϝοί|아카이오이grc와 Ἀχαιϝιάδες|아카이아데스grc와 비교된다.)[30]마두와타는 자신의 영토를 지키겠다는 맹세를 어기고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광범위하게 개입했으며, 루카 지역과 심지어 알라시야(키프로스)까지 개입했다. 그는 아르자와의 왕과 싸움을 벌여 패배했고, 적에게 그들의 계획을 배신하여 루카 지역에서 두 명의 히타이트 지휘관을 매복하여 죽게 만들었으며, 나중에 아르자와 동맹이 되었다. 히타이트 자료는 성공을 주장했지만, 서부에서의 어떤 이득도 덧없이 사라졌다.[31]
5. 죽음과 계승
기원전 1355년경 투드할리야 2세가 사망하자, 귀족들은 그의 아들 투드할리야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차기 대왕으로 인정했다. 이전에는 투드할리야 1세 이전에 다른 "투드할리야"라는 대왕이 있었다고 여겨져 투드할리야 2세를 "3세"로 부르며 투드할리야 3세와 혼동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투드할리야 1세 이전의 대왕 "투드할리야"는 존재하지 않으며, 투드할리야 2세와 3세도 다른 인물로 여겨진다.
참조
[1]
문서
Freu 2007b: 75, 311; Kuhrt 1995: 230 dates him within the range 1400–1370 BC.
[2]
서적
The Ancient Near East: c.3000–330 BC, Volume On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0
[3]
문서
Bryce 2005: 128-129.
[4]
문서
Wilhelm 2004: 75; Bryce 2005: 122; Freu 2007a: 180-183; Freu 2007b: 20-21; Weeden 2022: 561.
[5]
문서
Bryce 2005: 128-129; Freu 2007b: 98, 102-103; Weeden 2022: 569.
[6]
문서
Astour 1989: 74; Beckman 2000: 25-27; Weeden 2022: 560-569.
[7]
문서
Klengel 1999: 104; Bryce 2005: 122-123
[8]
문서
Kuhrt 1995: 230; Freu 2007b: 18-45.
[9]
문서
Freu 2007b: 22; Wilhelm 2004: 75 n. 19 suggested that this problem can be avoided by positing that Kantuzzili did reign, for which there is no evidence.
[10]
문서
Freu 2007b: 97-98.
[11]
문서
Freu 2007b: 23-27; Beckman 1996: 13-14 thought they were successive arrangements under a single Hittite king.
[12]
문서
Freu 2007b: 27-28.
[13]
문서
Freu 2007b: 29.
[14]
문서
Freu 2007a: 180-181; Freu 2007b: 18-32.
[15]
문서
Freu 2007b: 97.
[16]
문서
Freu 2007b: 75-76.
[17]
문서
Freu 2007b: 97-9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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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u 2007b: 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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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yce 2005: 128-129; Freu 2007b: 98, 102-103; Weeden 2022: 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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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u 2007b: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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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yce 2005: 123-124; Freu 2007b: 76-79; Weeden 2022: 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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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yce 2005: 124-126; Freu 2007b: 79-85; Weeden 2022: 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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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yce 2005: 125-126; Freu 2007b: 79-84.
[24]
문서
Bryce 2005: 12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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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yce 2005: 127; Freu 2007b: 85-87; Weeden 2022: 566.
[26]
문서
Bryce 2005: 127-128; Freu 2007b: 87; Weeden 2022: 566.
[27]
문서
Beckman 1996: 14-22; Freu 2007b: 87-96, for whom the grandfather is Tudḫaliya I; Weeden 2024: 566.
[28]
문서
Freu 2007b: 103-104.
[29]
문서
Freu 2007b: 104-105, 111-112.
[30]
문서
Bryce 2005: 129-131; Freu 2007b: 105-109; Weeden 2022: 567-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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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yce 2005: 131-136; Freu 2007b: 109-116; Weeden 2022: 568-569.
[32]
문서
Beckman 1996: 89; Bryce 2005: 138-141; Weeden 2022: 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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