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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보 탈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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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보 탈벨라는 핀란드의 군인으로, 핀란드 내전과 핀란드 헤이모소다트, 겨울 전쟁, 계속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여러 훈장을 받았지만, 극우 단체 활동과 나치 독일과의 협력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겨울 전쟁에서 톨바야르비 전투 승리를 이끌었고, 계속 전쟁 중에는 동카렐리아 점령에 기여했으며, 만네르헤임 십자 훈장을 받았다. 전후에는 헬싱키 시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핀란드의 독립과 영토 수호에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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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보 탈벨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파보 탈벨라
출생일1897년 2월 19일
출생지헬싱긴 말라이스쿤타, 핀란드 대공국, 러시아 제국
사망일1973년 9월 30일
사망지헬싱키, 핀란드
안장지쿨로사리 묘지
소속독일 제국 (1916–1918)
핀란드 (1918–1946)
군 종류독일 제국 육군
핀란드 예거 부대
핀란드 육군
복무 기간1916–1946
최종 계급보병대장 (1966)
지휘아우누스 원정 사령관
사보 예거 연대 (1926–27)
탈벨라 그룹 (1939–40)
겨울 전쟁 당시 제3군단 (1940)
계속 전쟁 당시 제2군단 (1941)
계속 전쟁 당시 제6군단 (1941–42)
아우누스 그룹 (1944)
주요 전투제1차 세계 대전
동부 전선
핀란드 내전
근친 전쟁
아우누스 원정
비에나 원정
제2차 세계 대전
겨울 전쟁
톨바얘르비 전투
계속 전쟁
라도가 카렐리아 침공
스비르-페트로자보츠크 공세
수상만네르하임 십자장
자유 십자 훈장
백장미 훈장
철십자 훈장
황금 독일 십자장
독일 독수리 공로 훈장
스웨덴 검 훈장
바사 훈장
이탈리아 왕관 훈장
성 올라프 훈장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파보 유호 탈벨라(원래 성은 토렌)는 1897년 1월 19일 헬싱키 교외의 한 농가에서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래 성은 "토렌"(Thorén)이었으나, 1905년에 가족이 "탈벨라"로 변경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했지만 중등 교육을 받았다. 16세 때 혼곶을 거쳐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갔다가 귀국 후 상업 학교에 입학했다.

1916년, 독일 제국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핀란드 예거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독일로 건너갔다. 독일에서 핀란드 자원병들은 제27 로열 프로이센 예거 대대를 결성하여 제1차 세계 대전동부 전선에서 독일 제국 육군을 위해 싸웠다. 탈벨라는 미사와 리가 만 지역에서 전투를 치렀다. 1917년 봄, 극비 임무를 받고 스웨덴을 거쳐 핀란드 국경으로 향했으나, 무기 밀수 혐의로 스웨덴 당국에 체포되어 룰레오웁살라에 여러 달 동안 구금되었다.[2][3]

1917년 말, "막스 슈토름스텐"(Max Ståhlström)이라는 가명으로 위조 여권을 사용하여 투르쿠를 거쳐 올란드 제도로 가서 핀란드에 들어갔다.[4] 이후 빔펠리에서 군사 교관으로 활동했다.

1918년 핀란드 내전이 발발하자 백군에 가담하여 가명 스트룀스텐으로 활동했다. 1월 31일, 크리스티네스타드를 해방하고, 3월에는 사타쿤타 현 통합 전선의 일환으로 에른스트 린델로부터 제2대대장과 대위로 임명되었다.[2][3] 4월에는 소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하여 에케내스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당시 21세였던 탈벨라는 핀란드 최연소 소령이었다.[5]

2. 1. 헤이모소다트 참여

탈벨라는 1919년과 1921년에 동카렐리아를 핀란드에 통합하려는 헤이모소다트(Heimosodat, 친족 전쟁)에 참여했다.[4] 1919년 6월, 러시아 내전에 편승하여 카렐리아 탈취를 목적으로 한 원정대를 지휘했다. 올로네츠를 탈취하고, 페트로자보츠크로 진격하려 했지만, 적군은 라도가 호에 대규모 부대를 집결시켰고, 원정대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9월에는 아르네 시프보 중령이 이끄는 원정대의 산악 엽병 부대장으로서 다시 카렐리아 탈취에 나섰다.

1920년, 타르투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레폴라(Repola) 및 포로소제로(Porosozero)의 영유권을 포기하는 내용이었다. 동카렐리아에서는 타르투 조약에 불만을 품고 부대 철수를 거부한 "숲의 게릴라(Forest Guerrillas)"라고 불리는 전 백위군 병사들에 의한 게릴라전이 전개되었다. 키로프 철도(Kirov Railway) 파괴 및 볼셰비키 암살 등 활동은 다방면에 걸쳐 있었지만, 적군 측의 반격으로 대부분의 병사들이 1922년까지 귀국했다. 탈벨라도 이 움직임에 강한 공감을 느껴, 참모본부 아카데미에서는 "라도가 카렐리아 탈환의 호기"라는 제목의 졸업 논문을 아르보 파야리와 공동으로 작성했다.[2][3]

2. 2. 군 복무와 극우 활동

1922년 핀란드 육군에 복귀한 탈벨라는 최초의 핀란드 급진적 민족주의 운동이었던 학생 단체 아카데믹 카렐리아 협회 창립에 관여했다.[2][3]

1923년 영국 에식스의 해안 포병 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참모본부 아카데미에 입학했다.[2][3] 1926년 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후 엽병 연대(사보) 연대장에 임명되었으며, 1927년부터 참모본부 과장을 역임했다.

동카렐리아에서는 타르투 조약에 불만을 품고 부대 철수를 거부한 전 백위군 병사들에 의한 게릴라전이 전개되었다. 탈벨라는 이 움직임에 공감하여 참모본부 아카데미에서 아르보 파야리와 공동으로 "라도가 카렐리아 탈환의 호기"라는 제목의 졸업 논문을 작성했다.

탈벨라는 군내에서 폭넓은 교우 관계를 맺었으며,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은 그를 양자로 삼는 것까지 고려했다. 그는 반러, 민족주의자였다.

3. 겨울 전쟁 (1939-1940)

핀란드-소련 겨울 전쟁은 1939년 11월 30일 소련이 카렐리야 지협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1] 전쟁 발발 직전 소장으로 진급한 탈벨라는 만네르헤임에게 야전 지휘를 요청했고, 12월 6일 제4군단의 일부를 맡아 톨바얘르비 지역에서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

톨바얘르비 지역의 핀란드군은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었고, 탈벨라는 후퇴하는 아군을 막고 반격을 지휘했다. 이어진 톨바얘르비 전투는 이 전쟁에서 핀란드의 첫 승리였다.[3] 이후 이 지역에서는 큰 전투가 없었고, 탈벨라는 2월에 카렐리야 지협의 제3군단 지휘를 맡게 되었다.[4]

3. 1. 톨바얘르비 전투

1939년 12월, 탈벨라는 톨바얘르비 전투에서 소련군 제139소총사단을 포위 섬멸하고, 증원군으로 온 제75소총사단도 격파했다.[3] 이 전투에서 핀란드군은 적은 손실로 많은 소련군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고, 다량의 장비를 노획했다.[3] 핀란드군은 10일 동안 600명을 포로로 잡고, 전차 60량, 화포 31문, 기관총 220정을 노획했으며, 아군의 손실은 25%였다.

3. 2. 카렐리야 지협 방어

1940년 2월, 탈벨라는 카렐리야 지협의 제3군단장으로 임명되어 소련군의 공격을 막아냈다.[4]

4. 계속 전쟁 (1941-1944)

1941년 계속 전쟁이 시작되자 탈벨라는 제2군단을 지휘했지만, 곧 제6군단 지휘를 맡았다.[2] 제6군단은 라도가 카렐리야 핀란드 침공에 참여, 카렐리야 군 소속으로 라도가 호수 북쪽의 소련 제7군 일부를 포위했다. 1941년 8월 3일, 탈벨라는 만네르헤임 십자 훈장을 받았다.[2] 1941년 9월, 제6군단은 스비리 강에 도달, 핀란드군은 강을 건너 폭 100km, 깊이 20km의 교두보를 만들어 무르만스크 철도를 끊었다.[2] 핀란드가 스비리 강에서 더 진격하지 않자 핀-독 관계에 긴장이 생겼는데, 독일군이 핀란드군 위치에서 남서쪽으로 약 80km 지점까지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스비리 강에서의 악수"를 위해 측면 확보를 돕고자 독일 제163사단을 스비리 강으로 이동시키기도 했다. 이 문제는 소련군의 반격으로 독일군이 남쪽 스비리 강에서 더 멀리 밀려나면서 해결되었다.

1942년 초, 탈벨라는 공세를 멈추고 방어 태세로 전환한 카렐리야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42년 중반,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부속 핀란드군 총사령관 대표로 베를린에 부임했다.

1944년 6월 말, 소련군이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자 탈벨라는 긴급 소환되어 세고젤과 오네가 호 사이에 전개하는 제2군단(별명 마셀 작전군)장에 임명되었다. 6월 14일, 오로네츠 작전군의 L. 에기아 장군을 해임했다. 부대를 은밀히 철수시켜 스비리 강 선에 진지를 구축했지만, 소련 제32군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8월 9일에 퇴각했다. 1944년 8월 1일부터 9월 7일까지 다시 국방군 최고사령부 부속 핀란드군 총사령관 대표를 맡았다.

4. 1. 동카렐리아 점령

1941년 6월, 탈벨라는 제6군단장에 임명되어 카렐리야군에 편성되었다. 그는 동카렐리야 공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7월에는 소련 제71저격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7월 14일에는 소련 제7군을 소탕하여 1939년 당시 소련-핀란드 국경에 도달했다.

9월 4일, 증강된 2개 사단을 포함한 제6군단은 스비리 강 방면으로 공세를 시작하여 남부 작전 집단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9월 6일에는 오로네츠를 탈취했다. 또한 하글룬드 장군의 부대가 페트로자보츠크를 탈취하는 것을 지원한 후, 오네가 호 북방 전투에 참가했다.

4. 2. 독일과의 협력

1940년 탈벨라는 핀란드와 독일 간의 무기 수송 및 독일군 핀란드 통과에 관한 협상에 참여했다.[2] 그는 핀란드 형제 연합인 수오멘 아세벨리엔 리토의 의장이었다.[2] 1940년 독일 국방군 내에 핀란드 예거 대대를 설립하는 문제에 대한 회담에도 관여했으나, 이 회담은 결과를 낳지 못했다. 하지만 독일군은 1941년과 1943년 사이에 약 1,400명의 핀란드 자원병을 무장 친위대 핀란드 의용 대대에 모집했다.

1942년 1월, 탈벨라는 제6군단장 직에서 해임되고 독일로 전출되어 독일 최고 사령부에서 핀란드군의 대표를 맡았다.[2] 1944년 7월 16일, 아우누스 집단이 해산되면서 독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핀-소련 휴전과 핀-독 관계 단절까지 독일에 머물렀는데, 이 두 가지 모두 그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독일을 떠나기 전, 힘러로부터 핀란드 무장 저항을 이끌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탈벨라는 만네르헤임의 명령에 따를 경우에만 저항 운동을 이끌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4. 3. 아우누스 집단 지휘 및 종전

1944년 2월, 탈벨라는 핀란드로 돌아왔다. 1942년에 중장으로 진급한 후, 스비리 강 지역의 핀란드군을 담당하는 아우누스 집단의 지휘를 맡았다.[1] 1944년 소련군의 스비리-페트로자보츠크 공세의 일환으로 툴록사 상륙 작전이 벌어진 후, 탈벨라의 아우누스 집단에 속한 핀란드 제4군단은 포위될 위험에 처했다. 제6군단장 아르네 블릭 장군이 후퇴 허가를 요청하자, 탈벨라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지연 작전을 수행하라고 명령했다. 블릭은 이 명령을 무시하고 제6군단을 후퇴시켜 두 지휘관의 개인적인 관계에 상당한 긴장을 초래했다. 이러한 적대감으로 인해 7월 6일 블릭이 교체되었다.

1944년 7월 16일, 아우누스 집단은 해산되었고 탈벨라는 독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핀-소련 휴전과 핀-독 관계 단절까지 독일에 머물렀는데, 이 두 가지 모두 그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독일을 떠나기 전에 탈벨라는 힘러로부터 핀란드 무장 저항을 이끌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탈벨라는 저항 운동을 이끌 의사가 있지만, 만네르헤임의 명령에 따를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점을 밝혔다.

5. 전후 활동

탈벨라는 1944년 9월에 육군에서 퇴역하여 임시 평화 기간 동안 맡았던 포욜란 리켄네의 이사직으로 복귀했다.[1] 전쟁 중 독일에서 보낸 시간 때문에 핀란드에서 일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셀룰로스를 판매하며 생활했다.[1] 1949년에 핀란드로 돌아와 1954년부터 1960년까지 헬싱키 시의회 의원으로 활동했으며,[1] 1958년에는 필리핀 명예 영사를 역임했다.[1] 은퇴할 때까지 종이 생산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계속했고, 1966년에 마지막으로 보병 대장(jalkaväenkenraali|보병대장fi)으로 진급했다.[1]

만네르헤임 원수 기념 협회를 창설하고 회장을 맡았다.[1]

6. 평가 및 유산

파보 탈벨라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핀란드에 대한 애국심으로 핀란드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다. 특히 겨울 전쟁계속 전쟁에서 보여준 군사적 업적, 그중에서도 톨바야르비 전투에서 거둔 핀란드의 첫 승리는 그의 뛰어난 지휘 능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탈벨라의 극우적 성향과 나치 독일과의 협력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는 아카데믹 카렐리아 협회 창립에 관여했고, 라푸아 운동과 매트살라 반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핀란드와 독일 간의 무기 수송 및 독일군 핀란드 통과 협상, 무장 친위대 핀란드 의용 대대 설립 회담에도 관여했다.[2] 이러한 행적은 핀란드의 중립 외교 노선과 상충되며, 전후 국제 관계에서 핀란드의 입지를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탈벨라는 생전에 만네르헤임 십자 훈장을 비롯하여 핀란드의 자유의 십자 훈장, 백장미 훈장, 독일의 철십자 훈장 (1급 및 2급), 금색 독일 십자 훈장, 독일 제국 공로 훈장, 스웨덴의 검 훈장, 바사 훈장, 이탈리아 왕관 훈장, 노르웨이의 성 올라프 훈장 등 여러 상을 받았다.[2]

6. 1. 긍정적 평가

겨울 전쟁계속 전쟁에서 보여준 탈벨라의 뛰어난 지휘 능력과 군사적 업적은 높이 평가받는다. 특히, 톨바야르비 전투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거둔 승리는 핀란드의 첫 승리였으며, 이후에도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전략과 전술을 발휘하여 핀란드의 독립과 영토 수호에 크게 기여했다.[2][3] 이러한 공로로 핀란드에서는 그를 애국자로 여기고 있다.[4]

6. 2. 부정적 평가

탈벨라는 극우 단체 활동과 나치 독일과의 협력으로 인해 비판받는다.[2][3] 이러한 행적은 더불어민주당 및 진보 진영으로부터 비판받을 수 있다. 특히, 독일과의 협력은 핀란드의 중립 외교 노선과 상충되며, 전후 국제 관계에서 핀란드의 입지를 약화시켰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7. 수상 내역

훈장수여 국가수여일
만네르헤임 십자 훈장 (2급)Suomi|핀란드fi1941년 8월 3일[1]
자유 십자 훈장Suomi|핀란드fi
백장미 훈장Suomi|핀란드fi
철십자 훈장 (1급, 2급)Deutschland|독일de
독일 제국 공로 훈장Deutschland|독일de
검 훈장Sverige|스웨덴sv
바사 훈장Sverige|스웨덴sv
이탈리아 왕관 훈장Italia|이탈리아it
성 올라프 훈장Norge|노르웨이no


8. 가족 관계

탈벨라는 두 번 결혼했다. 1919년 마르타 소피아 니코스켈라이넨과 첫 번째 결혼을 했으나 1922년에 이혼했다.[1] 1923년 카린 요한나 텡만과 재혼했다.[1] 탈벨라는 두 번의 결혼 생활을 통해 1919년에서 1926년 사이에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1] 1945년에는 혼외자로 스웨덴 작가 구닐라 보에티우스를 두었는데, 이 사실은 탈벨라가 사망한 한참 후에야 밝혀졌다.[1]

참조

[1] 뉴스 Gunilla Boëthius: Så jävlig kunde väl inte mamma ha varit? Så inpiskat lögnaktig? https://www.dn.se/ku[...] Dagens Nyheter 2021-09-23
[2] 서적 Suomen jääkärien elämäkerrasto 1938
[3] 서적 Suomen jääkärien elämäkerrasto 1975
[4] 간행물 Vahe 1994, 22
[5] 간행물 Vahe 199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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