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우케스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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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우케스타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의 인물로, 히다스페스강 전투에서 삼단노선 의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그는 마라바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구출한 공로로 금 면류관을 받았으며, 페르시스의 태수로 임명되었다. 페르시아의 풍습을 받아들여 페르시아인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마케도니아인들에게는 반감을 샀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바빌론 회의와 트리파라디소스 협의에서 페르시스 태수직을 유지했으나, 디아도코이 전쟁에서는 에우메네스 편에 섰지만 무능한 지휘로 인해 에우메네스의 패배에 기여했다. 결국 안티고노스에게 배신 행위를 용서받지 못하고 영지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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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우케스타스 | |
---|---|
인물 정보 | |
이름 | 페우케스타스 |
유형 | 군주 |
직함 | 사트라프 |
봉직 시작 | 기원전 324년 |
봉직 종료 | 기원전 316년 |
지역 | 페르시스 |
전임 | 아리오바르자네스 |
후임 | 아스클레피오도로스 |
유형 (후임) | 후계자 |
기타 정보 | |
그리스어 | Πευκέστας (페우케스타스) |
2.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페우케스타스가 역사 기록에 처음 언급된 것은 기원전 326년 히다스페스 강을 따라 내려갈 때 삼단노선 장비 봉사를 담당하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이며, 그 이전의 그의 활동은 알려져 있지 않다.[3]
2. 1. 말라바스 전투 (기원전 325년)
페우케스타스는 기원전 325년 말라바스 공격 때 왕을 수행하던 중 혼자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위험에 빠진 왕을 레온나토스, 아브레아스와 함께 구출하고, 트로이의 아테나 신전에서 가져온 성스러운 방패로 보호하다 부상을 입어 일약 유명해졌다.[4] 이 공적으로 페우케스타스는 동방 원정 공훈 1위에 선정되었고, 수사에서 가장 먼저 공훈에 금관으로 보상받았다.[5]2. 2. 페르시스 태수 임명
페르세폴리스에 도착했을 때 페르시스총독으로 임명되었다.[28] 또한 그 전후로 그는 왕의 근위 호위관으로 승진했으며, 그때 왕은 그를 위해 원래 7명이었던 정원을 1명 늘리는 특례 조치를 취했다.[29]총독으로서 페우케스타스는 페르시아의 복장과 풍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페르시아인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마케도니아인들에게는 불만을 샀다.[30] 기원전 323년 봄, 20,000명의 페르시아 병사를 이끌고 페우케스타스는 바빌론으로 병을 앓고 있던 왕에게 달려갔으며,[31] 왕이 위독했을 때 사라피스 신전에서 참배했다.[32]
3. 알렉산드로스 사후
페우케스타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기원전 317년, 메디아 태수 페이톤이 세력 확장을 위해 파르티아를 침공하자, 페우케스타스는 1만 명의 페르시아 병사와 다른 동방 태수들을 이끌고 페이톤을 격파했다. 이후 안티고노스와 에우메네스의 갈등에서 에우메네스 편에 섰다.
페우케스타스는 에우메네스와 총지휘권을 다투는 등 권력욕은 강했지만, 파라에타케네 전투와 가비에네 전투에서 보여준 모습은 그가 겁이 많고 무능한 장군이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페우케스타스의 배신은 에우메네스의 몰락을 초래했고, 그 자신도 안티고노스에게 버림받는 결과를 맞이했다.
3. 1. 바빌론 회의와 트리파라디소스 협정
페우케스타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벌어진 여러 사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 기원전 323년 바빌론 회의에서 페르시스 태수로 유임되었고[33][34][35] (유스티누스는 바빌로니아 태수라고 언급했다)[36], 기원전 321년 트리파라디소스 협의에서도 페르시스 태수로 재임명되었다.[37]3. 2. 디아도코이 전쟁
페우케스타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기원전 323년 바빌론 회의와 기원전 321년 트리파라디소스 협의에서 페르시스 태수로 유임되었다.[33][34][35][37]기원전 317년, 메디아 태수 페이톤이 세력 확장을 위해 파르티아를 침공하자, 페우케스타스는 1만 명의 페르시아 병사와 다른 동방 태수들을 이끌고 페이톤을 격파했다. 이후 안티고노스와 에우메네스의 갈등에서 에우메네스 편에 섰다.
3. 2. 1. 에우메네스와의 관계
페우케스타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기원전 323년에 열린 바빌론 회의와 기원전 321년 트리파라디소스 협의에서 페르시스 태수로 유임되었다.[33][34][35][37]기원전 317년, 메디아 태수 페이톤이 파르티아를 침공하자, 페우케스타스는 1만 명의 페르시아 병사와 다른 동방 태수들을 이끌고 페이톤을 격파했다. 이후 안티고노스와 에우메네스의 갈등에서 페우케스타스는 에우메네스 편에 섰다. 그는 티그리스강 서쪽 태수들의 지지를 받았고, 페르세폴리스에서 화려한 연회를 열어 병사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에우메네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유품을 전시한 텐트를 설치하고 어전회의를 열거나, 편지를 위조하고, 페우케스타스의 지지자인 시비르티오스를 고소하는 등 교묘한 방법으로 페우케스타스의 영향력을 줄이고 사실상 총사령관이 되었다.[38][39]
페우케스타스는 에우메네스와 총지휘권을 다투는 권력욕이 강하고, 비겁하며, 무능한 장군으로 묘사된다. 기원전 317년 파라에타케네 전투에서는 기병대를 이끌며 큰 과오 없이 임무를 수행했지만,[40] 기원전 316년 가비에네 전투 직전에는 안티고노스의 접근에 당황하여 후퇴를 제안했다.[41][42] 가비에네 전투에서는 안티고노스의 기병 공격에 공황 상태에 빠져 무단으로 후퇴했고, 에우메네스의 반격 시도에도 동참하지 않고 더 후퇴했다.[43][44] 이로 인해 에우메네스는 아군에게 배신당해 안티고노스에게 넘겨졌고, 군대는 항복했다. 안티고노스는 페우케스타스의 배신을 불쾌하게 여겨 영지를 언급하며 거짓 약속으로 그를 격려하면서도 멀리했다.[45]
3. 2. 2. 파라에타케네 전투와 가비에네 전투
기원전 317년, 무승부로 끝난 파라에타케네 전투에서 페우케스타스는 기병 부대를 이끌었고, 이때는 큰 과오 없이 임무를 수행했다.[40] 기원전 316년 가비에네 전투 직전에 안티고노스가 월동을 하기 위해 흩어져 있던 에우메네스의 군대를 기습하려고 했을 때, 페우케스타스는 안티고노스의 접근에 당황하여 후퇴를 제안했다.[41][42] 가비에네 전투에서 페우케스타스는 에우메네스의 발목을 잡았다.[43] 안티고노스의 기병 공격에 공황 상태에 빠져 마음대로 후퇴했고, 에우메네스가 반격을 시도할 때 동참을 거부하고 더욱 후퇴했다.[44] 결과적으로 이 전투에서의 패배(전술적으로는 무승부였지만)는 에우메네스의 파멸로 이어졌다. 에우메네스는 아군에게 배신당해 안티고노스에게 넘겨졌고, 군대는 적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그 배신을 못마땅하게 여긴 안티고노스는 페우케스타스에게 영지를 거론하며 거짓 약속으로 격려하면서도 그를 멀리했다.[45]참조
[1]
서적
The Age of the Parthians
https://books.google[...]
I.B.Tauris
2007
[2]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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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jstor.or[...]
1989
[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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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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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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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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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id, VI. 30
[7]
문서
ibid, VI. 28
[8]
문서
ibid, VI. 30, VII.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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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id, VII. 23
[10]
문서
ibid, VII. 26
[11]
문서
ディオドロス, XVIII. 3
[12]
문서
フォティオス, cod. 82
[13]
문서
フォティオス, cod. 92
[14]
문서
ユスティヌス, XII. 4
[15]
문서
ディオドロス, XVIII. 3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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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id, XIX. 1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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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문서
ネポス, 「エウメネス」, 7
[19]
문서
ディオドロス, XIX. 28
[20]
문서
ibid, XIX. 38
[21]
문서
プルタルコス, 「エウメネス」, 15
[22]
문서
ibid, 16
[23]
문서
ディオドロス, XIX. 42, 43
[24]
문서
ibid, XIX, 48
[25]
문서
아리아노스, 《인디카》 18
[26]
문서
아리아노스, 《알렉산더 대왕 동정기》, VI 9 10
[27]
문서
ibid, VII 5
[28]
문서
ibid, VI 30
[29]
문서
ibid, VI 28
[30]
문서
ibid, VI 30, VII 6
[31]
문서
ibid, VII. 23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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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id, VII. 26
[33]
문서
디오도로스, XVIII 3
[34]
문서
포티오스, cod 82
[35]
문서
포티오스, cod 92
[36]
서적
유스티누스 XII 4
[37]
서적
디오도로스 XVIII 39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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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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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서적
디오도로스, XIX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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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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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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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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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서적
디오도로스, XIX 42 43
[45]
서적
ibid, XIX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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