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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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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빌론 회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제국을 분할하기 위해 열린 회의이다. 회의는 알렉산드로스 사후 그의 측근 세력인 소마토필라케스가 주도하여 열렸으며, 왕위 계승과 제국 분할을 결정했다. 필리포스 3세가 왕으로 추대되고 페르디카스가 섭정이 되었으며, 주요 인물들에게 제국의 영토가 분배되었다. 바빌론 회의의 결정은 이후 트리파라디소스 회의에서 수정되었으며, 디아도코이 전쟁을 촉발하고 헬레니즘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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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회의
바빌론 분할
알렉산더 제국의 진화
알렉산더 제국의 진화
날짜기원전 323년
장소바빌론
결과알렉산더 제국의 분할
교전 세력알렉산더 제국의 장군들
주요 인물페르디카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레온나토스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안티파트로스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
배경
원인알렉산더 대왕의 갑작스러운 죽음
목표제국 통치권 분할 및 계승
결과
주요 내용제국의 여러 지역이 장군들에게 분할됨
페르디카스가 섭정으로 임명됨
알렉산더 4세와 필리포스 3세가 공동 왕으로 선포됨
영향디아도코이 전쟁의 시작
헬레니즘 시대의 도래
관련 정보
관련 전투/회의트리파라디소스 분할

2. 바빌론 회의의 배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급서하면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다. 왕비 록사네가 임신 중이었고, 태어날 아이의 성별이 알려지지 않아 후계자 문제가 복잡해졌다. 네아르코스는 대왕과 후궁 바르시네 사이의 아들 헤라클레스를 지지했으나, 서자라는 이유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멜레아그로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이복형 아리다이오스를 지지하며 페르디카스와 대립했다. 페르디카스는 록사네의 아이가 아들일 경우를 대비해 출산 후 섭정을 세울 것을 주장했다.

에우메네스의 중재로 아리다이오스가 필리포스 3세로 즉위하고, 록사네의 아들이 태어나면 공동 왕위에 올리며 페르디카스가 섭정을 맡는 타협안이 마련되었다. 이후 페르디카스는 대왕의 영토 분배를 주도했고, 멜레아그로스와 그의 지지자 300명은 페르디카스에 의해 살해되었다.

2. 1.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과 후계 문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급서했을 때, 왕비 록사네는 임신 중이었지만, 태어날 아이의 성별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남겨진 신하들 사이에서 왕위 계승 순서에 대해 의견이 충돌했다. 네아르코스는 대왕과 후궁 바르시네의 아들 헤라클레스를 밀었지만, 그는 서자였기 때문에 찬동자는 나타나지 않았다.[8] 한 병사가 알렉산드로스의 이복형 아리다이오스의 이름을 외치자, 그를 지지한 멜레아그로스페르디카스와 대립했다. 페르디카스는 록사네의 뱃속의 아이가 남자일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출산을 기다렸다가 출산 후에 섭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9]

에우메네스의 중재로 타협하여, 아리다이오스가 필리포스 3세로 즉위하는 대신 록사네의 아들(후의 알렉산드로스 4세)이 남자라면 그를 필리포스의 공동 통치자로 왕위에 앉히고, 그의 섭정으로 페르디카스가 통치하게 되었다. 섭정 페르디카스는 대왕의 유장(遺將)들과 사트라프들에게 대왕 유령(遺領)의 분배를 주도했다.[2]

얼마 지나지 않아 멜레아그로스와 그를 지지하는 약 300명의 병사는 페르디카스에 의해 살해되었다.

2. 2. 권력 투쟁의 시작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갑작스럽게 사망했을 때, 왕비 록사네는 임신 중이었다. 태어날 아이의 성별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남겨진 신하들 사이에서 왕위 계승 순서에 대해 의견이 충돌했다. 네아르코스는 대왕과 후궁 바르시네의 아들 헤라클레스를 밀었지만, 그는 서자였기 때문에 찬성하는 사람은 없었다.[8] 한 병사가 알렉산드로스의 이복형 아리다이오스의 이름을 외치자, 그를 지지한 멜레아그로스와 반대한 페르디카스가 대립했다. 페르디카스는 록사네가 임신한 아이가 남자일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출산을 기다렸다가 출산 후에 섭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9]

에우메네스의 중재로 타협하여 맺은 협정은 아리다이오스가 필리포스 3세로 즉위하는 대신 록사네의 아들(후에 알렉산드로스 4세)이 남자라면 그를 필리포스 3세의 공동 통치자로 왕위에 올리고, 그의 섭정으로 페르디카스가 통치하게 하는 것이었다. 섭정 페르디카스는 대왕의 부하 장수들과 사트라프들에게 대왕의 유산을 분배하는 것을 주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멜레아그로스와 그를 지지하는 약 300명의 병사는 페르디카스에 의해 살해되었다.[13]

3. 바빌론 회의의 결정 내용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제국은 바빌론 분할을 통해 여러 부분으로 나뉘었다. 이 회의의 주요 결정 사항은 다양한 사료에 기록되어 있지만, 세부 내용에는 차이가 있다.

바빌론 유적 (21세기 초)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한 직후, 그의 부하들은 권력을 분배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인장 반지를 근거로 섭정의 지위를 얻었고, 제국의 영토는 주요 장군들에게 분할되었다.
주요 결정 사항 (기원전 323년):

이 결정은 기원전 321년 트리파라디소스 회의에서 수정 및 계승되었다.
사료별 비교표:바빌론 회의의 결정 내용은 여러 사료에서 다르게 나타나며, 각 사료는 디오도로스, 유스티누스, 아리아노스덱시포스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바빌론 분할
직위/사료디오도로스유스티누스아리아노스 및 데크시포스
필리포스 3세필리포스 3세필리포스 3세
섭정페르디카스페르디카스페르디카스
최고 지휘권[25]셀레우코스 1세셀레우코스 1세
마케도니아 본국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
크라테로스[26]
일리리아안티파트로스필론안티파트로스
크라테로스
에피루스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
크라테로스
그리스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
크라테로스
시종·호위병장[25]카산드로스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1세프톨레마이오스 1세프톨레마이오스 1세
아프리카[27]프톨레마이오스 1세프톨레마이오스 1세
아라비아프톨레마이오스 1세프톨레마이오스 1세
시리아라오메돈라오메돈라오메돈
페니키아라오메돈
킬리키아필로타스필로타스필로타스
메디아페이톤페이톤페이톤
메디아아트로파테스아트로파테스
파플라고니아에우메네스에우메네스에우메네스
카파도키아에우메네스에우메네스에우메네스
팜필리아안티고노스 1세안티고노스 1세안티고노스 1세
리키아안티고노스 1세안티고노스 1세안티고노스 1세
수시아나코이노스
대 프리지아안티고노스 1세안티고노스 1세안티고노스 1세
소 프리지아[28]레온나토스레온나토스레온나토스
카리아아산드로스카산드로스아산드로스[29]
리디아메난드로스메난드로스메난드로스
트라키아뤼시마코스뤼시마코스뤼시마코스



인도 부근


인도·박트리아의 여러 나라는 현임 사트라프가 통치를 계속했다.

바빌론 분할
직책/사료디오도로스유스티누스데크시포스
인더스 강[30]포로스포로스
펀자브[31]탁시레스탁시레스탁시레스
인도 식민지[32]페이톤페이톤페이톤
코카서스 산맥 일대[33]옥쉬알테스옥쉬알테스옥쉬알테스
아라코시아시뷔르티오스시뷔르티오스시뷔르티오스
게드로시아시뷔르티오스시뷔르티오스시뷔르티오스
아레이아스타사노르스타사노르스타사노르
드라기아나스타사노르스타사노르스타사노르
소그디아나필리포스스타사노르필리포스
박트리아필리포스아뮌타스
파르티아플라타페르네스필리포스
히르카니아플라타페르네스플라타페르네스라다페르네스[34]
페르시스페우케스타스페우케스타스페우케스타스
카르마니아트레폴레모스트레폴레모스네오프톨레모스
바빌로니아알콘알콘셀레우코스
메소포타미아아르케실라오스아르케실라오스아르케실라오스


3. 1. 제국의 분할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제국은 바빌론 분할을 통해 여러 부분으로 나뉘었다. 이 회의의 주요 결정 사항은 다양한 사료에 기록되어 있지만, 세부 내용에는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주요 사료인 디오도로스의 《역사총서》, 쿠르티우스 루푸스의 《알렉산더 대왕전》, 유니아누스 유스티누스의 《지중해 세계사》 요약본, 포티오스의 《비블리오테카》에 기록된 아리아노스덱시포스의 사료를 비교하여 정리한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한 직후, 그의 부하들은 권력을 분배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인장 반지를 근거로 섭정의 지위를 얻었고, 제국의 영토는 주요 장군들에게 분할되었다. 하지만 이 분할은 일시적인 조치였으며, 이후 권력 투쟁과 추가적인 분할로 이어졌다.
주요 결정 사항 (기원전 323년):

이 결정은 기원전 321년 트리파라디소스 회의에서 수정 및 계승되었다.
사료별 비교표:

바빌론 분할
직위/사료디오도로스쿠르티우스유스티누스아리아노스 및 데크시포스
필리포스 3세필리포스 3세필리포스 3세
섭정페르디카스페르디카스페르디카스
최고 지휘권[25]셀레우코스 1세셀레우코스 1세
마케도니아 본국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
크라테로스
안티파트로스
크라테로스[26]
일리리아안티파트로스필론안티파트로스
크라테로스
에피루스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
크라테로스
그리스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
크라테로스
시종·호위병장[25]카산드로스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1세프톨레마이오스 1세프톨레마이오스 1세프톨레마이오스 1세
아프리카[27]프톨레마이오스 1세프톨레마이오스 1세프톨레마이오스 1세
아라비아프톨레마이오스 1세프톨레마이오스 1세
시리아라오메돈라오메돈라오메돈라오메돈
페니키아라오메돈
킬리키아필로타스필로타스필로타스필로타스
메디아페이톤페이톤페이톤페이톤
메디아아트로파테스아트로파테스
파플라고니아에우메네스에우메네스에우메네스에우메네스
카파도키아에우메네스에우메네스에우메네스에우메네스
팜필리아안티고노스 1세안티고노스 1세네아르코스안티고노스 1세
리키아안티고노스 1세안티고노스 1세네아르코스안티고노스 1세
수시아나코이노스
대 프리지아안티고노스 1세안티고노스 1세안티고노스 1세안티고노스 1세
소 프리지아[28]레온나토스레온나토스레온나토스레온나토스
카리아아산드로스카산드로스카산드로스아산드로스[29]
리디아메난드로스메난드로스메난드로스메난드로스
트라키아뤼시마코스뤼시마코스뤼시마코스뤼시마코스



인도·박트리아의 여러 나라는 현임 사트라프가 통치를 계속했다. 속행이라고는 해도 역시 사료에 따라 차이가 생겼다. 또한 쿠르티우스 루푸스 사료나 아리아노스 사료에는 이 지역에 관한 구체적인 기술은 남아 있지 않다.

바빌론 분할
직책/사료디오도로스유스티누스데크시포스
인더스 강[30]포로스포로스
펀자브[31]탁시레스탁시레스탁시레스
인도 식민지[32]페이톤페이톤페이톤
코카서스 산맥 일대[33]옥쉬알테스옥쉬알테스옥쉬알테스
아라코시아시뷔르티오스시뷔르티오스시뷔르티오스
게드로시아시뷔르티오스시뷔르티오스시뷔르티오스
아레이아스타사노르스타사노르스타사노르
드라기아나스타사노르스타사노르스타사노르
소그디아나필리포스스타사노르필리포스
박트리아필리포스아뮌타스
파르티아플라타페르네스필리포스
히르카니아플라타페르네스플라타페르네스라다페르네스[34]
페르시스페우케스타스페우케스타스페우케스타스
카르마니아트레폴레모스트레폴레모스네오프톨레모스
바빌로니아알콘알콘셀레우코스
메소포타미아아르케실라오스아르케실라오스아르케실라오스


3. 2. 주요 인물들의 역할 분담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부하들은 권력 분배를 놓고 갈등했다. 주요 인물들의 역할 분담은 여러 사료에 기록되어 있지만, 내용에 차이가 있어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다음은 주요 사료들을 비교, 정리한 내용이다.

바빌론 회의 주요 인물 역할 분담
역할/지역디오도로스유스티누스아리아노스 / 덱시포스
마케도니아 왕필리포스 3세필리포스 3세필리포스 3세
섭정페르디카스페르디카스페르디카스
친위 기병대 사령관셀레우코스셀레우코스
마케도니아, 일리리아, 에피로스, 그리스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1], 필로[2]안티파트로스 - 크라테로스
트라키아리시마코스리시마코스리시마코스
프리기아, 팜필리아, 리키아안티고노스안티고노스[3], 네아르코스[4]안티고노스
카리아아산드로스카산드로스카산드로스
리디아메난드로스메난드로스메난드로스
카파도키아, 파플라고니아에우메네스에우메네스에우메네스
킬리키아필로타스필로타스필로타스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프톨레마이오스프톨레마이오스
시리아라오메돈라오메돈라오메돈
메소포타미아아르케실라오스아르케실라오스아르케실라오스
바빌로니아아르콘페우케스타스셀레우코스
펠라스기아아르콘
메디아페이톤아트로파테스페이톤
메디아아트로파테스아트로파테스
수사스퀴노스
페르시아페우케스타스틀레폴레모스페우케스타스
카르마니아틀레폴레모스네오프톨레모스
아르메니아프라타페르네스
히르카니아, 파르티아프라타페르네스필리포스[5], 니카노르[6]프라타페르네스
소그디아나, 박트리아필리포스스키타이오스[7], 아민타스[8]필리포스
드란기아나, 아리아스타사노르스타사노르스타사노르
아라코시아, 게드로시아시뷔르티오스시뷔르티오스시뷔르티오스
파로파미시아옥시아르테스옥시아르테스옥시아르테스
펀자브, 인도타크실레스, 포로스타크실레스, 페이톤타크실레스, 포로스
간다라페이톤페이톤페이톤
도표 주석1 유스티누스는 안티파트로스가 일리리아를 다스렸다고 주장.
2 유스티누스는 필로가 일리리아를 다스렸다고 주장.
3 유스티누스는 안티고노스가 팜필리아와 리키아를 다스렸다고 주장.
4 유스티누스는 네아르코스가 팜필리아와 리키아를 다스렸다고 주장.
5 유스티누스는 필리포스가 히르카니아를 다스렸다고 주장.
6 유스티누스는 니카노르가 파르티아를 다스렸다고 주장.
7 유스티누스는 스키타이오스가 소그디아나를 다스렸다고 주장.
8 유스티누스는 아민타스가 박트리아를 다스렸다고 주장.


3. 3. 사료별 차이점

바빌론 회의의 구체적인 결정 내용을 담은 사료는 여러 가지가 존재하지만,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다음의 다섯 사료를 비교하여 정리한다.

  • 디오도로스의 《Bibliotheca Historica영어》(''역사총서'') XVIII권 3절
  • 쿠르티우스 루푸스의 《알렉산더 대왕전》 10권 10장
  • 유니아누스 유스티누스 초록, 폼페이우스 트로구스 지음 《지중해 세계사》 XIII권 4절
  • 포티오스의 저작 《Bibliothecala》(''비블리오테카'')에 기록된 아리아노스덱시포스의 사료


이 사료들은 바빌론 분할과 트리파라디소스 분할에서 각 인물에게 주어진 역할 또는 지역에 대해 서로 다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사료별 차이점
역할 또는 지역디오도로스유스티누스아리아노스+ / 덱시포스*디오도로스아리아노스
마케도니아의 왕필리포스 3세필리포스 3세필리포스 3세+필리포스 3세 - 알렉산더 4세필리포스 3세 - 알렉산더 4세
섭정페르디카스페르디카스페르디카스+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
콤파니온 사령관셀레우코스셀레우코스n/a카산드로스카산드로스
근위대 사령관n/a카산드로스n/an/an/a
마케도니아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 - 크라테로스+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
일리리아안티파트로스필로안티파트로스+* - 크라테로스+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
에피로스안티파트로스n/a안티파트로스+* - 크라테로스+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
그리스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 - 크라테로스+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
트라키아리시마코스리시마코스리시마코스+*리시마코스리시마코스
프리기아레온나토스레온나토스+*레온나토스아리다이오스아리다이오스
프리기아안티고노스안티고노스안티고노스+*안티고노스안티고노스
팜필리아안티고노스네아르코스안티고노스+*안티고노스안티고노스
리키아안티고노스네아르코스안티고노스+*안티고노스안티고노스
카리아아산드로스카산드로스카산드로스+아산드로스아산드로스
리디아메난데로스메난데로스메난데로스+*클레이토스클레이토스
카파도키아에우메네스에우메네스에우메네스+*니카노르니카노르
파플라고니아에우메네스에우메네스에우메네스+*니카노르?니카노르?
시칠리아필로타스필로타스필로타스+*필로세노스필로세노스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프톨레마이오스프톨레마이오스+*프톨레마이오스프톨레마이오스
시리아라오메돈라오메돈라오메돈+*라오메돈라오메돈
메소포타미아아르케실라오스아르케실라오스아르케실라오스*암피마코스암피마코스
바빌로니아아르콘페우케스타스셀레우코스*셀레우코스셀레우코스
펠라스기아n/a아르콘n/an/an/a
메디아페이톤아트로파테스페이톤*페이톤페이톤
메디아아트로파테스아트로파테스n/an/an/a
수사n/a스퀴노스n/a안티게네스안티게네스
페르시아페우케스타스틀레폴레모스페우케스타스*페우케스타스페우케스타스
카르마니아틀레폴레모스n/a네오프톨레모스*틀레폴레모스틀레폴레모스
아르메니아n/a프라타페르네스n/an/an/a
히르카니아프라타페르네스필리포스프라타페르네스필리포스?필리포스?
파르티아프라타페르네스니카노르n/a필리포스필리포스
소그디아나필리포스스키타이오스필리포스*스타사노르스타사노르
박트리아필리포스아민타스n/a스타사노르스타사노르
드란기아나스타사노르스타사노르스타사노르*스타산드로스스타산드로스
아리아스타사노르스타사노르스타사노르*스타산드로스스타산드로스
아라코시아시뷔르티오스시뷔르티오스시뷔르티오스*n/a시뷔르티오스
게드로시아시뷔르티오스시뷔르티오스시뷔르티오스*n/a시뷔르티오스? 2
파로파미시아옥시아르테스옥시아르테스? 3옥시아르테스*옥시아르테스옥시아르테스
펀자브타크실레스타크실레스타크실레스*타크실레스타크실레스
인도포로스페이톤포로스*포로스포로스
간다라페이톤페이톤페이톤페이톤페이톤
도표 주석1 = 데크시포스와 아리아노스는 옥시아르테스가 박트리아의 태수로 남았다고 주장
2 = 명백한 언급은 없고, 추정만
3 = 옥시아르테스는 유스티누스의 "Extarches"를 참조



인도, 박트리아의 국가는 현직의 사트라프가 통치를 연임했다. 연임이라고 해도 사료에 의한 차이는 발생하고 있다. 또한, 쿠르티우스 루푸스의 사료와 아리아노스의 사료에 이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남아 있지 않다.

영토 경계는 기원전 300년까지 계속해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바빌론 분할"에 관한 두 가지 주요 자료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군대의 여러 파벌 연합은 아리다이오스를 왕으로 "세우고"(kathestesan) 그의 이름을 필리포스로 바꾸기로 했다.[2] "죽어가는 왕이 그의 손가락 반지를 준" 페르디카스는 "관리자"(epimeletes)가 될 예정이었다. 동료 기병대 중 가장 유능한 자들은 사트라피의 "후임자"(paralabein)가 되어 왕과 페르디카스에게 복종해야 했다. 알렉산드로스와 그 이전의 필리포스는 단순한 왕이 아니라 코린토스 동맹의 "지도자"(hegemones)였다. 페르디카스는 단순한 왕의 관리자가 아니라, 왕이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헤게모니를 계승해야 했다. 헤게몬으로서 "회의를 열어"(sunedreusas) 그는 여러 사트라피를 할당했다.

할당 목록이 이어진다. 승계 또는 승진 목록처럼 보이지만, 디오도로스는 "사트라피가 이런 방식으로 분할되었다"(emeristhesan)고 말한다. 이 단어는 "부분"(meros)을 기반으로 한다. 동료들이 사트라프로 승진하는 것이 아니라, 사트라피가 동료들에게 분할되어 분배되는 것이며, 이는 다른 개념이다. 자신의 사트라피를 소유한 사트라프는 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쿠르티우스 루푸스는 이 전환에 대해 더 자세히 썼는데, 거의 같은 내용을 말한다.[3] "주요 인물들의 회의"(consilium principum virorum) 즉, sunedrion을 열어 페르디카스는 왕이 지배하는 최고위(summa)와 사트라피 간에 "제국"(imperium)을 분할한다. 그는 "제국이 부분으로 나뉘어"(divisis imperii partibus) 즉, 제국을 방어하거나 확장할 수 있는 개인들 사이에 분할되었다고 명확히 설명한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 밑에서 ministri였던 사람들이 이제 제국을 위해 싸운다는 명분 아래 자신의 "왕국"(regna)을 확장하기 위해 싸웠다고 지적한다.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은 헬레니즘 시대의 역사적 개념을 혁신하여 이를 디아도코이 시대와 에피고니 시대로 나누고, 바빌론에서 열린 sunedrion의 결과를 분할로 보는 쿠르티우스의 견해를 채택했다. 그는 "사트라피의 첫 번째 분할"(Erste Verteilung der Satrapien)이라고 언급한다.[4] 드로이젠의 견해는 페르디카스가 현장에서 동료들 중 자신의 반대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사트라피를 분배했으며, 따라서 이 변화는 제국 내에서 진급을 기대했던 디아도코이의 정당한 승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영국 제국 내의 국회의원 출신 역사가인 조지 그로트는 적어도 바빌론에서의 할당에 대해서는 이러한 회의적인 견해를 공유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위에 언급된 모든 장교들은 아리다이오스 아래에서 분할할 수 없는 하나의 제국의 일부를 관리하는 지역 중위로 여겨졌다. ... 이 시점에서 제국을 분할한다는 이야기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5] 드로이젠의 견해가 우세했다. 두 사람과 동시대의 다른 국회의원 출신 역사가인 에드워드 번버리는 윌리엄 스미스가 주도하는 표준 참고 문헌에서 그로트가 아닌 드로이젠의 개념을 사용했다.[6]

관점의 차이는 고대 역사가들 자체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차례로 그들이 알고 있거나 읽은 갈등을 분류했다. 예를 들어,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는 헤게몬인 페르디카스에게 이집트 사트라프로의 승진을 요청하고 받는다. 그곳에서 그는 알렉산드로스가 임명한 알렉산드리아의 노마르크를 처리한다. 그 후 그는 제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20년 동안 자신을 사트라프라고 칭했다. 마침내 305년에 제국에 대한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는 자신을 이집트의 파라오라고 선언했다. 그동안 그는 박물관과 도서관, 그리고 여러 나라에서 알렉산드리아로의 인구 유입을 통해 알렉산드로스의 문화적 유산을 영속시켰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역사가들은 그의 전기를 프톨레마이오스 사트라프와 프톨레마이오스 바실레우스로 나눈다. 그 이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헤타이로스였다. "디아도코스"라는 용어는 역사가들에 의해 이 모든 지위를 의미하는 데 사용되었다.

쿠르티우스는 알렉산드로스 사후 직후의 사건들에 대한 주요 자료이다. 다른 누구도 같은 깊이의 세부 사항을 제시하지 않는다. 분할 시의 사트라프 분배에 관해서는 가치가 같지 않은 여러 자료들이 있다.

유일하게 완전한 기록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의 ''역사총서''인데, 기원전 40년경에 처음 쓰여진 것이므로 더 신뢰할 수 있는 자료로 간주해야 한다.[16]

비잔틴 주교 포티우스(c. 820–893)는 자신의 ''비블리오테카''에서 279권의 책을 요약했는데, 여기에는 두 개의 관련 기록(그러나 매우 요약된)이 포함되어 있다.[17] 첫 번째는 아리아노스의 ''계속'' 또는 ''알렉산드로스 사후'' (코덱스 92)이다.[18] 두 번째는 덱시푸스의 ''역사''로, 알렉산드로스 사후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으며 (코덱스 82),[19] 아리아노스의 기록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아리아노스와 덱시푸스의 기록 비교:

> * 아리아노스: 카파도키아, 파플라고니아, 그리고 트라페주스(시노페 출신의 그리스 식민지)까지의 흑해 연안 지역은 에우메네스에게 할당되었다.

> * 덱시푸스: 에우메네스는 카파도키아, 파플라고니아, 그리고 트라페주스(트레비존드)까지의 흑해 연안 지역을 차지했다.

덱시푸스의 요약에는 아리아노스의 요약에서 발췌된 것으로 추정되는 몇 가지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 자료는 유스티누스가 폼페이우스 트로구스의 ''필리피카 역사''를 요약한 것으로, 가장 늦게 쓰여진 자료이며 다른 자료와 달라서 몇 가지 명백한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0]

후대의 모든 자료들은 디오도로스를 읽었거나, 디오도로스의 목록의 가장 유력한 출처인 카르디아의 히에로니무스를 읽은 것으로 보이며, 어느 정도 베낀 것으로 보인다. 유스티누스의 작품에 복사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사트라프의 이름은 종종 디오도로스가 그들에게 할당한 사트라피 옆에 나타나지만 (직접적으로 관련되지는 않음). ''펠라스기아''는 실제 페르시아 또는 그리스 사트라피의 이름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단어의 삽입은 목록에서 사트라프를 한 자리 옮겨놓아 그들을 혼란시켰을 수 있다. 또한, 아르메니아(다른 어떤 기록에서도 사트라피로 언급되지 않음)는 카르마니아(디오도로스의 목록에서 같은 위치에 나타남)의 실수일 수 있다.

3. 4. 트리파라디소스 회의

페르디카스 사후 기원전 321년에 개최된 트리파라디소스 회의에서 바빌론 회의의 결정은 수정되었다.[2]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인장 반지를 통해 부여받은 권한("에피멜레테스", 수호자 또는 섭정)으로, "제국을 분할하는 것이 적절한" 새로운 회의를 소집했다. 대부분의 주요 장군들이 참석했지만, 안티파트로스(펠라에 있었음), 크라테로스(킬리키아에 도착하여 대기), 안티고노스 1세(켈라에네의 요새에 머뭄)는 불참했다.[12]

분할은 즉시 이루어졌으며,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가 이집트의 사트라피를 요구하여 받은 것처럼, 임시적으로 협상된 것으로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신의 야망을 제한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15] 유럽은 아직 사트라피로 분할되지 않았고, 동부 사트라프를 교체할 필요가 없었다.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의 계획을 수행하여 수정된 페르시아 제국을 그리스, 서아시아 및 아프리카로 확장했다고 믿었고, 왕의 이름으로 최고의 권위를 주장했다.

분할 후, 회의는 7일 동안 매장되지 않은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처리하는 문제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분할 날짜는 기원전 323년 6월 18일 또는 그 무렵이었다.

width="100" |트리파라디수스 분할
역할 또는 지역디오도루스 시켈로스아리아노스
마케도니아 국왕필리포스 3세 알렉산드로스 4세필리포스 3세 알렉산드로스 4세
섭정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
친위 기병대 사령관카산드로스카산드로스
마케도니아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
일리리아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
에페이로스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
그리스안티파트로스안티파트로스
트라키아리시마코스리시마코스
헬레스폰토스 프리지아아르리다이오스아르리다이오스
프리지아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
팜필리아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
리키아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
카리아아산데르아산데르
리디아클레이토스 백색클레이토스 백색
카파도키아니카노르니카노르
파플라고니아니카노르?니카노르?
킬리키아필록세누스필록세누스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시리아라오메돈라오메돈
메소포타미아암피마코스암피마코스
바빌로니아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메디아페이톤페이톤
수사나안티게네스안티게네스
페르시아페우케스타스페우케스타스
카르마니아텔레폴레모스텔레폴레모스
히르카니아필립?필립?
파르티아필립필립
소그디아나스타사노르스타사노르
박트리아스타사노르스타사노르
드라기아나스타산데르스타산데르
아리아스타산데르스타산데르
아라코시아시비르티우스
게드로시아시비르티우스? 2
파로파미사다이옥시아르테스옥시아르테스
펀자브탁실레스탁실레스
인더스포루스포루스
간다라아게노르의 아들 페이톤아게노르의 아들 페이톤
표 참고2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4. 바빌론 회의의 결과와 의의

바빌론 회의 결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그의 부하들에게 분배되었다. 이는 단순한 승진이 아니라, 제국 자체가 분할된 것이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군대의 여러 파벌이 아리다이오스를 왕으로 세우고, 페르디카스를 관리자로 임명했다고 기록했다.[2] 유능한 동료 기병대원들은 사트라피(총독령)의 후임자가 되어 왕과 페르디카스에게 복종해야 했다. 쿠르티우스 루푸스는 페르디카스가 주요 인물들의 회의를 열어 제국을 분할했다고 기록했다.[3]

이러한 분할은 헬레니즘 시대를 열었으며, 디아도코이 시대와 에피고니 시대로 나뉜다.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은 이를 "사트라피의 첫 번째 분할"이라고 불렀다.[4] 그러나 조지 그로트는 이 시점에서 제국 분할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고 주장하며, 모든 장교들은 분할할 수 없는 제국의 일부를 관리하는 지역 중위로 여겨졌다고 말했다.[5]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는 페르디카스에게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여 이를 승인받았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노마르크를 처리한 후, 거의 20년 동안 자신을 총독이라 칭했다. 제국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기원전 305년, 그는 자신을 이집트의 파라오로 선언하고 알렉산드로스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했다. 역사가들은 "디아도코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이 모든 지위를 의미한다.

이처럼 바빌론 회의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분할과 헬레니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4. 1. 디아도코이 전쟁의 발발

네아르코스는 함대 사령관으로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페르시아인 첩 바르시네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헤라클레스를 왕으로 옹립할 것을 제안했다.[8] 그러나 펠라의 아리스토노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선택한 페르디카스에게 반지를 돌려주자고 제안했고, 투표 결과 가결되었다. 페르디카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동안 대답 없이 서 있다가 ''소마토필라케스'' 뒤로 물러섰는데, 그의 행동은 거절로 받아들여졌다.[9]

멜레아고스는 이 혼란을 틈타 페르디카스를 공격했다. 그는 페르디카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자녀들에 대한 일종의 법적 후견권을 가지고 있기에 누가 왕이 되든 "보호자"(tutela)로서 통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국고를 약탈하여 부유해지자고 선동하며 무장한 일당을 이끌고 나섰다.[9]

이때 한 평범한 병사가 나서서 알렉산드로스의 이복형제인 아리다이오스가 법적 상속자이므로 내전이 일어날 필요가 없다고 외쳤다. 군중들은 갑자기 침묵했고, 이어서 큰 찬성 투표가 이어졌다. 페이톤이 아리다이오스는 정신적 장애가 있다며 반대했지만, 그의 말은 함성에 묻혔다.[10][11]

군인들은 투표는 허용되었지만, 공식적으로 회의의 일원은 아니었다. 페이톤페르디카스레온나토스를 헤라클레스의 "보호자"로 임명하고, 크라테로스안티파트로스를 유럽 통치자로 제안했다. 이 임명은 아리다이오스와 상의 없이 채택되었다. 멜레아거는 떠났다가 아리다이오스와 함께 돌아와 군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제 페르디카스를 지지하는 파벌과 멜레아거의 지지를 받는 아리다이오스를 지지하는 두 파벌이 형성되었다. 소란 속에서 아리다이오스는 두려움에 질려 도망쳤지만, 군중들은 그를 다시 불러 알렉산드로스의 로브를 그에게 걸쳤다. 멜레아거는 아리다이오스를 방어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갑옷을 입었다. 군인들은 보디가드에게 신체적 위해를 가하겠다고 위협했다. 피터 그린에 따르면, "외국인 혐오증이 여기서 역할을 했다. 마케도니아 일반 병사들은 반 오리엔탈 군주에게 굴복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8]

멜레아거는 많은 지지자를 모았고, 이에 페르디카스는 600명의 정예 병력을 요청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이 안치된 숙소 주변에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군사 행동이 시작되었고, 미사일이 수비수들에게 쏟아졌다. 상황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되자, 멜레아거와 함께 있던 고위 장교들은 헬멧을 벗어 자신을 식별하고 페르디카스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페르디카스는 무기를 내려놓았고, 그 뒤를 이어 에피고니들이 무기를 내려놓았다.

멜레아거는 페르디카스를 사냥하는 동안 그들에게 자리를 지키라고 명령했지만, 페르디카스는 유프라테스강으로 도망쳐 헤타이로이 기병대의 레온나토스에게 증원을 받았다. 멜레아거는 페르디카스에게 돌아올 것을 요청하는 암살단을 보냈는데, 망설이면 그를 죽이라는 비밀 지령이 있었다. 페르디카스는 그들을 비난했고, 그들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 채 돌아갔다.

다음 날, 멜레아고스의 파벌 병사들은 자기 진영에 누가 없는지 확인하고 다른 생각을 품게 되었다. 반란이 일어났고, 대표단은 아르히다이오스에게 페르디카스의 체포를 명령했는지 심문했다. 아르히다이오스는 멜레아고스의 사주를 받아 명령했다고 답하며 페르디카스에 대한 조치를 거부했다. 전날 소집되었던 회의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페르디카스는 병사들을 해산시키지 않고, 보급선을 공격하여 곡물 공급을 차단했다. 기근이 시작되었다.

도시의 마케도니아인들은 또 다른 회의를 열어 국왕이 페르디카스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조건을 요청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페르디카스는 반란에 대한 조사를 요구하고 지도자들을 자신에게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르히다이오스는 눈물을 흘리며 회의에 참석하여 더 이상 피를 흘리는 것보다 왕위를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이러한 천성은 회의에서 그의 지위를 재확인하도록 했다. 에우메네스는 멜레아고스의 군대를 덜 호전적인 입장으로 이끌어 아르히다이오스를 왕으로 하고, 록사나의 아이가 아들이면 그를 아르히다이오스와 공동 왕으로 하자는 타협안을 제안했다.[12] 회의는 페르디카스에게 사절을 보내 아르히다이오스, 페르디카스, 멜레아고스의 3두 정치 체제를 수립할 것을 요청했다. 페르디카스는 멜레아고스를 아르히다이오스에게서 떼어놓기를 바라며 이를 수락했다. 아르히다이오스는 왕이 되어 필리포스 3세로 개명되었고, 알렉산드로스와 록사나의 아이는 아들이 될 것이며, 알렉산드로스 4세가 될 것이다.[12]

멜레아게르는 휴전을 맺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 양측 병사들이 모이자, 페르디카스의 병사들은 멜레아게르를 공동 섭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불만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두 지도자는 포옹했고, 멜레아게르는 페르디카스에게 자신이 들은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두 사람은 분열을 조장하는 군대 내 모든 요소를 제거하기로 합의했다.

마케도니아 관습에 따른 화해 의식은 희생된 개의 내장 사이에 있는 들판에서 무장한 양측의 집결을 요구했다. 그 후 양측은 서로에게 접근하여 뒤섞였다. 멜레아게르의 보병 부대는 코끼리가 강화된 ''헤타이로이'' 기병대를 마주했다. 기병대가 그들을 향해 돌진하자 보병대는 움찔했지만 굳건히 버텼다. 그러나 왕은 페르디카스와 반란에 대해 상의했다. 간격이 좁혀지자 왕은 부대를 오가며 페르디카스에 맞서 멜레아게르와 함께 했던 지도자들을 골라냈다. 양측이 접근하자, 페르디카스의 부하들은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진 지도자 300명을 체포하여 즉시 처형했는데, 한 기록에 따르면 전쟁 코끼리에게 짓밟혀 죽임을 당했다.[13] 멜레아게르는 처음에 살아남아 페르디카스의 부관(''히파르코스'')으로 임명되었지만, 위기가 지나고 상황이 다시 통제되자 그를 잡으러 오는 것을 본 멜레아게르는 신전에 피신했다가 살해당했다.[14] 한편, 군대는 뒤섞였고 분열은 치유되었다.

4. 2. 헬레니즘 시대의 개막



기원전 300년까지 영토 경계는 계속 논쟁의 대상이었다. "바빌론 분할"에 관한 두 가지 주요 자료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군대 여러 파벌의 연합은 아리다이오스를 왕으로 "세우고"(kathestesan) 그의 이름을 필리포스로 바꾸었다.[2] "죽어가는 왕이 그의 손가락 반지를 준" 페르디카스는 "관리자"(epimeletes)가 될 예정이었다. 동료 기병대 중 가장 유능한 자들은 사트라피의 "후임자"(paralabein)가 되어 왕과 페르디카스에게 복종해야 했다. 알렉산드로스와 그 이전의 필리포스는 단순한 왕이 아니라 코린토스 동맹의 "지도자"(hegemones)였다. 페르디카스는 단순한 왕의 관리자가 아니라, 왕이 하지 않은 헤게모니를 계승해야 했다. 헤게몬으로서 "회의를 열어"(sunedreusas) 그는 여러 사트라피를 할당했다.

디오도로스는 할당 목록 이후, "사트라피가 이런 방식으로 분할되었다"(emeristhesan)고 말한다. 이 단어는 "부분"(meros)을 기반으로 한다. 동료들이 사트라프로 승진하는 것이 아니라, 사트라피가 동료들에게 분할되어 분배되는 다른 개념이다. 자신의 사트라피를 소유한 사트라프는 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쿠르티우스 루푸스는 이 전환에 대해 더 자세히 썼는데, 거의 같은 내용을 말한다.[3] 페르디카스는 "주요 인물들의 회의"(consilium principum virorum), 즉 sunedrion을 열어 왕이 지배하는 최고위(summa)와 사트라피 간에 "제국"(imperium)을 분할한다. 그는 "제국이 부분으로 나뉘어"(divisis imperii partibus) 즉, 제국을 방어하거나 확장할 수 있는 개인들 사이에 분할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 밑에서 ministri였던 사람들이 이제 제국을 위해 싸운다는 명분 아래 자신의 "왕국"(regna)을 확장하기 위해 싸웠다고 지적한다.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은 헬레니즘 시대의 역사적 개념을 혁신하여 이를 디아도코이 시대와 에피고니 시대로 나누고, 바빌론에서 열린 sunedrion의 결과를 분할로 보는 쿠르티우스의 견해를 채택했다. 그는 "사트라피의 첫 번째 분할"(Erste Verteilung der Satrapien)이라고 언급한다.[4] 드로이젠의 견해는 페르디카스가 현장에서 동료들 중 자신의 반대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사트라피를 분배했으며, 따라서 이 변화는 제국 내에서 진급을 기대했던 디아도코이의 정당한 승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영국 제국 내 국회의원 출신 역사가인 조지 그로트는 바빌론에서의 할당에 대해서는 이러한 회의적인 견해를 공유하지 않았다. 그는 "위에 언급된 모든 장교들은 아리다이오스 아래에서 분할할 수 없는 하나의 제국의 일부를 관리하는 지역 중위로 여겨졌다. ... 이 시점에서 제국을 분할한다는 이야기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5] 드로이젠의 견해가 우세했다. 에드워드 번버리는 윌리엄 스미스가 주도하는 표준 참고 문헌에서 그로트가 아닌 드로이젠의 개념을 사용했다.[6]

관점의 차이는 고대 역사가들 자체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는 헤게몬인 페르디카스에게 이집트 사트라프로의 승진을 요청하고 받는다. 그곳에서 그는 알렉산드로스가 임명한 알렉산드리아의 노마르크를 처리한다. 그 후 그는 제국이 없었음에도 거의 20년 동안 자신을 사트라프라고 칭했다. 305년에 제국에 대한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는 자신을 이집트의 파라오라고 선언했다. 그동안 그는 박물관과 도서관, 그리고 여러 나라에서 알렉산드리아로의 인구 유입을 통해 알렉산드로스의 문화적 유산을 영속시켰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역사가들은 그의 전기를 프톨레마이오스 사트라프와 프톨레마이오스 바실레우스로 나눈다. 그 이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헤타이로스였다. "디아도코스"라는 용어는 역사가들에 의해 이 모든 지위를 의미하는 데 사용되었다.

참조

[1] 간행물 "Persia" Stoddart Co., Limited
[2] 문서 XVIII.2–3
[3] 문서 X.X.25
[4] 서적 Geschichte des Hellenismus Friedrich Perthes
[5] 서적 Greece Peter Fenelon Collier
[6] 서적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John Murray
[7] 문서 Book 10, Chapters 6-10
[8] 문서 Green 1990, p. 7
[9] 문서 "[[Diodorus Siculus]]' version, Book 18.2, has Meleager being sent to the soldiers as emissary and turning coat as soon as he saw them."
[10] 웹사이트 Diodorus 18A https://penelope.uch[...]
[11] 문서 This was a move of desperation. Arrhidaeus had not been proposed because he too needed a guardian. He had a nervous condition, which the ancients only knew under names considered inappropriate today, nor, in the absence of any additional information, can the moderns diagnose it. [[Diodorus Siculus]], Book 18.2, is perhaps kindest with "mental illness" (''psychikon pathos''). It was said that the condition was caused by Olympias, Alexander's mother, trying to poison him. In any case Alexander became his guardian. He was well-treated and well liked around the camp, but everyone knew that he could be taken advantage of.
[12] 문서 Green 1990, p. 8
[13] 문서 Green 1990, p. 8, citing Quintus Curtius Rufus, 10.9.11–19
[14] 문서 Green 1990, p. 8, citing Quintus Curtius Rufus 10.9.19–21
[15] 문서 Green 1990, p. 9
[16] 웹사이트 Bibliotheca Historia https://penelope.uch[...]
[17] 웹사이트 Bibliotheca http://www.tertullia[...]
[18] 웹사이트 Continuation (codex 92) http://www.tertullia[...]
[19] 웹사이트 History (codex 82) http://www.tertullia[...]
[20] 웹사이트 Epitome of Philippic History https://web.archive.[...]
[21] 서적 Anabasis Alexandri http://websfor.org/a[...]
[22] 웹사이트 Nearchus https://www.livius.o[...] livius.org 2020-03-26
[23] 웹사이트 Anabasis Alexandri http://websfor.org/a[...]
[24] 웹사이트 Anabasis Alexandri http://websfor.org/a[...]
[25] 문서 合阪學訳に従う。
[26] 문서 ユリアヌス史料では、クラテロスは国庫管理を担当。
 デクシッポス史料ではクラテロスは The general charge of affairs and the defence of the kingdom を担当している。

[27] 문서 アリアノス史料及びデクシッポス史料では、具体的に[[リビア]]と記されている。
[28] 문서 ヘレスポントス・フリュギア(Hellespontine Phyrgia)とも書く。([[ヘレスポントス]]に隣接するプリュギアの意)
[29] 문서 アリアノス史料ではカッサンドロスである。
[30] 문서 デクシッポス史料に拠ると[[ヒュダスペス川]]=インダス川間の一帯である。
[31] 문서 ユスティヌス史料に拠るとヒュダスペス川=インダス川間のサティ族を獲得した。デクシッポス史料ではポロス領の残部を獲得したことになっている。
[32] 문서 ディオドロス史料に拠るとタキレウスら現地諸王の隣接地域だというが、いずれの史料にも具体的な位置は明言されていない。
[33] 문서 ディオドロスに拠れば[[パラパニサダイ]]と呼ばれる地域。
[34] 문서 スペルは「Rhadaphernes」である。「Phrataphernes」の誤記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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