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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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이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의 인물로, 소마토필라케스 중 한 명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바빌론 회의에서 메디아 태수로 임명되었으며, 박트리아 반란을 진압하고 페르디카스를 암살하는 등 디아도코이 전쟁에 참여했다. 이후 동방 태수들과의 갈등, 안티고노스와의 협력 등을 거쳐 고지 아시아 지배를 시도하다가 안티고노스에게 처형되었다.

페이톤 - [인물]에 관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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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

페이톤은 크라테로스(크라테우아스와 함께 알렉산더 3세를 보좌한 크라테로스와는 다른 사람)의 아들이며, 마케도니아 서부 에오루다이아 출신의 귀족이다. 알렉산더 3세의 동방 원정에 측근 무장으로 참여했지만, 눈에 띄는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다. 인도에서는 삼단노선 의장봉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임종 시에는 다른 장군들과 함께 세라피스 신전에 들어가 신탁을 받았다.

3. 디아도코이 전쟁 초기

기원전 321년, 페이톤은 페르디카스의 이집트 원정에 참여했지만, 페르디카스가 나일 강 도하 작전에 실패하자 셀레우코스, 안티게네스 등과 함께 페르디카스를 암살했다. 트리파라디소스 회의에서 에우리디케의 반대로 섭정 자리를 얻는 데는 실패했지만, 메디아 태수 자리는 유지했다.

이후 페이톤은 세력 확장을 위해 동생 에우다모스를 태수로 앉히려 파르티아 태수 필리포스를 살해했다. 그러나 기원전 317년, 페우케스타스가 이끄는 동방 태수 연합군(페르시스 태수 페우케스타스, 메소포타미아 태수 암피마코스, 카르마니아 태수 트레폴레모스, 아라코시아 태수 시뷔르티오스, 아레이아・드라기아나 태수 스타산드로스, 간다라 태수 페이톤)에게 패배하고 셀레우코스에게 도망쳤다.

이후 페이톤은 셀레우코스와 함께 안티고노스와 손을 잡고 에우메네스 등과 싸웠다. 이 전쟁에서 페이톤은 안티고노스의 부장과 같은 지위에서 여러 지휘권을 맡았고, 파라에타케네가비에네에서 모두 좌익 기병 부대를 지휘했다. 에우메네스 사후, 페이톤은 야심을 드러내 안티고노스와 대립하다 기원전 316년에 처형되었다.

3.1. 바빌론 회의와 메디아 태수 임명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바빌론 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 페이톤은 메디아 태수로 임명되었다. 메디아는 동서 교통의 요충지였지만, 넓은 지역이라 혼자 다스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북부는 아트로파테스에게 분할되었고, 이 지역은 그의 이름을 따 메디아 아트로파테네라고 불렸다.

3.2. 박트리아 반란 진압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갑작스럽게 죽자 박트리아에 정착해 있던 그리스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보병 12,000명과 기병 3,0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조직했다.

제국의 섭정이었던 페르디카스는 페이톤에게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페이톤은 반란군을 격파하고 항복을 받아들였지만, 이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흡수하려 했다. 그러나 페르디카스와 약속했던 전리품을 원했던 병사들이 반란군을 학살하면서 페이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3.3. 페르디카스 암살

기원전 321년, 페이톤은 페르디카스의 이집트 원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페르디카스가 나일강 도하 작전에 실패하자, 셀레우코스, 안티게네스 등과 함께 페르디카스를 암살했다. 이들은 이집트 태수 프톨레마이오스와 협상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페이톤과 아리다이오스를 새로운 섭정으로 추천했다. 하지만 트리파라디소스 회의에서 에우리디케의 반대로 이들의 추천은 무산되었다.

4. 디아도코이 전쟁 중기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바빌론 회의에서 페이톤은 메디아 태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임지 메디아는 동쪽과 서쪽의 통행을 막는 전략적 요충지였지만, 혼자 지배하기에는 너무 넓어 북부는 아트로파테스에게 넘겨졌고, 그곳은 아트로파테스를 기려 메디아 아트로파테네라고 불렸다.

같은 해 알렉산드로스 사후에 박트리아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이 그곳에 머무르기를 꺼려 반란을 일으켰다. 제국 섭정 페르디카스의 명령을 받은 페이톤은 보병 12,000명과 기병 3,000명으로 구성된 반란군을 격파했다. 그는 페르디카스로부터 반란자들을 몰살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들을 자신의 세력에 통합하려 하여 적을 용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병사들은 페르디카스와 약속된 전리품을 얻으려 그들을 학살했고, 페이톤의 계획은 실패했다.

에우메네스 사후, 페이톤은 고지 아시아 지배라는 야심을 드러내 안티고노스에 대한 싸움을 시작하려 했기 때문에 경계심을 품은 안티고노스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기원전 316년)

4.1. 동방 태수들과의 갈등

기원전 321년, 페이톤은 페르디카스의 이집트 원정에 참여했지만, 페르디카스가 나일강 도하 작전에 실패하자 그를 배신하고 셀레우코스, 안티게네스 등과 함께 페르디카스를 암살했다. 이들은 이집트 태수 프톨레마이오스와 협상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페이톤과 아리다이오스를 새로운 섭정으로 지지했지만, 같은 해에 열린 트리파라디소스 회의에서 에우리디케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이때 페이톤은 메디아 태수 자리를 유지했다.

그 후, 페이톤은 고지(상부) 태수령에서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그는 동생 에우다모스를 태수로 앉히기 위해 파르티아 태수 필리포스를 살해했다. 기원전 317년, 필리포스와 같은 꼴이 될 것을 두려워한 페우케스타스가 이끄는 동방 태수 연합군(페르시스 태수 페우케스타스, 메소포타미아 태수 암피마코스, 카르마니아 태수 트레폴레모스, 아라코시아 태수 시뷔르티오스, 아레이아・드라기아나 태수 스타산드로스, 간다라 태수 페이톤)에게 패배했고, 페이톤은 셀레우코스에게 도망쳤다.

4.2. 안티고노스와의 협력

기원전 317년 페이톤은 셀레우코스와 함께 안티고노스와 손을 잡고 에우메네스 및 페우케스타스 등과 싸웠다. 이 전쟁에서 페이톤은 안티고노스의 부장과 같은 지위에 있었으며, 종종 큰 지휘권을 행사했다. 파라에타케네 전투가비에네 전투에서는 모두 좌익 기병 부대를 지휘했다.

5. 최후

에우메네스 사후, 페이톤은 고지 아시아 지배 야욕을 드러내며 안티고노스에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기원전 316년, 안티고노스는 페이톤의 야망을 경계하여 그를 체포하고 처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