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성도정 (14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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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평성도정(枰城都正) 이하는 1436년(세종 18)에 태어나 1510년(중종 5)에 사망한 조선의 왕족이다. 효령대군의 손자이자 보성군의 아들로, 문학에 재능을 보였으며 평성부령, 평성정 등을 거쳐 평성도정에 이르렀다. 아들 이심원이 고모부 임사홍을 논핵한 일로 인해 부친과 갈등을 겪었으며, 이심원의 불효를 이유로 아들을 고발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말년에 중풍으로 고생했으며, 사후 정의대부 평성군으로 추증되었다.
1436년(세종 18)에 태어났으나 생일은 미상이다. 아버지는 효령대군 보의 차남 보성군 합이고, 어머니는 청풍군부인 합천 이씨(淸風郡夫人 陜川李氏)로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 이무창(李茂昌)의 딸이다. 쌍둥이 동생으로 물거군 이철과 같이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학을 잘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장동면 영남리(長東面南嶺里, 현 장단군 장동면 정수리 강대위동) 불당고개(佛堂谷) 임좌(壬坐)에 부인 선녕현부인 인천 채씨와 합폄으로 매장되었다. 신도비문은 판중추 윤탕로(尹湯老)가 짓고, 부제학 이언호(李彦浩)가 썼으며 사간 김희수(金希壽)의 글씨로 새겼다.
보성군 합(寶城君, 1416년 ~ 1499년 음력 9월 1일)을 아버지로, 청풍군부인 합천 이씨를 어머니로 두었다. 형제로는 신풍도정 순, 율원군 종, 춘양군 래, 물거군 철이 있다.
[1]
실록
왕비와 함께 어가로 거둥하여 양주 달천에서 주연을 베풀다
세조실록
1462-10-27
2. 생애
평성부령(枰城副令)에 임명되고 1462년(세조 8) 10월 27일 세조가 양주 달천(楊州 達川)에서 종친과 관원들을 불러 주연을 베풀때 평성부령으로 행사에 참석하였다.[1] 1463년(세조 9년) 평성정(枰城正)으로 승작하였으며, 그해 8월 세조가 서교(西郊)에 거둥하여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고, 바로 만강대장(彎强隊將)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10월 2일 세조가 풍양(豊壤)의 강무(講武)에 방문할 때 수행하고, 바로 사자위장(獅子衛將)에 임명되었다. 1466년 평성도정(枰城都正)으로 승작하고, 그해 백관장(百官將)에 임명되었다. 1467년(세조 13) 장수(將帥)의 재질(才質)이 있는 자를 뽑을 때 한 사람으로 선발되어 왕명으로 손자를 강독하였다. 1468년(세조 14) 1월 27일 내금위장(內禁衛將)에 임명되었고, 그 날 세조의 온양 행궁을 수행하였다.
1478년(성종 9) 아들 주계부정 이심원이 자신의 고모부 임사홍을 논핵한 일로, 아들 주계부정 이심원과 아버지 보성군 합이 갈등하였다. 보성군은 손자 이심원을 불효죄로 고소하였다. 이 때 그는 아버지 보성군의 명으로 1480년 11월 29일 '장자(長子)인 전 주계 부정 이심원(朱溪副正 李深源)은 심사(心行)가 패역(悖逆)하므로, 승중(承重)558) 하기가 마땅하지 아니하니, 원컨대 차자(次子) 임정 부정(臨汀副正) 이혼원(李混源)으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하소서. 그리고 청컨대 〈심원의〉 패역하고 불순(不順)한 죄를 국문(鞫問)하고, 그 제사를 받드는 당부(當否)를 예조(禮曹)로 하여금 상의(商議)하도록 하소서. (長子前朱溪副正深源, 心行悖逆不宜承重, 願以次子臨汀副正混源奉祀。 請鞫悖逆不順之罪, 而其奉祀當否, 令禮曹商議。[2])'라는 차자를 올렸다. 그러자 이심원의 아내가 남편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자 그해 12월 16일 '이심원(李深源)이 신에게 불효(不孝)하기 때문에, 신이 상언(上言)하여 둘째 아들 이혼원(李混源)으로 봉사(奉祀)하도록 청하였는데, 심원은 그 죄를 면하고자 하여 처(妻)를 시켜서 상언(上言)하게 하여 신이 상언한 것을 신의 아비 이합(李㝓)이 한 것으로 하였으니, 심원의 간사함이 이와 같습니다. 청컨대 죄주소서. ("深源不孝於臣, 故臣上言, 請以次子混源奉祀, 而深源欲免其罪, 使妻上言, 以臣上言, 爲臣父㝓所爲, 深源奸詐如此。 請罪之。[3])'라는 상소를 올렸다. 바로 왕명으로 강원도(江原道) 이천현(伊川縣)으로 유배되었다. 1485년(성종 6) 2월 6일 성종이 이심원을 서용하려 할 때 그의 상소 내용이 문제제기되기도 하였다. 성종은 이심원을 서용하지 못하고 그가 조부 보성군에게 불효했는가를 신하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그는 이심원과 보성군 간의 갈등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였다.
1488년(성종 19) 여름부터 중풍(中風)으로 말을 더듬고 반신불수(半身不遂)가 되어[4], 병석에 누웠다. 1507년(중종 1) 보성군의 상사 때 들어가려는 그의 처 채씨(蔡氏)를 강성부정 견손((江城副正 堅孫)이 강제로 축출했다.[5] 이 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에 강성부정 견손은 '평성정(枰城正)이 불효한 것은 조부의 유서가 있기 때문이다. (枰城正爲不孝, 以有祖父遺書[6])'라고 반박하여 다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1507년(중종 1) 2월 평성정으로 강작되었는데[7], 강작된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중종 5년 2월의 중종실록까지도 그의 작위를 평성도정 또는 평성정이라 칭하고 있다. 오랫동안 중풍을 앓던 그는 1510년(중종 5) 9월 21일에 사망하였다. 후에 정의대부 평성군으로 승작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1436년(세종 18)에 효령대군의 차남 보성군 합과 청풍군부인 합천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쌍둥이 동생으로 물거군 이철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였다.[1] 평성부령(枰城副令)에 임명되었고, 1462년(세조 8) 10월 27일 세조가 주최한 행사에 참여하였다.[1] 1463년(세조 9년) 평성정(枰城正)으로 승진하였으며, 그해 8월 세조의 사냥 행차를 구경하고 무관직인 만강대장(彎强隊將)에 임명되었다. 1464년(세조 10년) 10월 2일 세조의 강무(講武)를 수행하고 사자위장(獅子衛將)에 임명되었다.[1] 1466년(세조 12년) 평성도정(枰城都正)으로 승진하고 백관장(百官將)에 임명되었다.[1] 1467년(세조 13년) 장수의 재능을 인정받아 왕에게 손자를 강독하도록 추천받았다.[1] 1468년(세조 14) 1월 27일 내금위장(內禁衛將)에 임명되었고, 세조의 온양 행궁을 수행하였다.[1]
2. 2. 가족 간의 갈등과 유배
1478년(성종 9년) 아들 주계부정 이심원이 자신의 고모부 임사홍을 논핵한 일로, 아들 주계부정 이심원과 아버지 보성군 합이 갈등하였다.[2] 보성군은 손자 이심원을 불효죄로 고소하였다. 이때 평성도정은 아버지 보성군의 명으로 1480년 11월 29일 '장자인 전 주계 부정 이심원은 심사가 패역하므로, 승중하기가 마땅하지 아니하니, 원컨대 차자인 임정부정 이혼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하소서. 그리고 청컨대 심원의 패역하고 불순한 죄를 국문하고, 그 제사를 받드는 당부를 예조로 하여금 상의하도록 하소서.'라는 차자를 올렸다.[2] 그러자 이심원의 아내가 남편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자 그해 12월 16일 '이심원이 신에게 불효하기 때문에, 신이 상언하여 둘째 아들 이혼원으로 봉사하도록 청하였는데, 심원은 그 죄를 면하고자 하여 처를 시켜서 상언하게 하여 신이 상언한 것을 신의 아비 이합이 한 것으로 하였으니, 심원의 간사함이 이와 같습니다. 청컨대 죄주소서.'라는 상소를 올렸다.[3] 바로 왕명으로 강원도 이천현으로 유배되었다.[3] 1485년(성종 6) 2월 6일 성종이 이심원을 서용하려 할 때 그의 상소 내용이 문제 제기되기도 하였다.[3] 성종은 이심원을 서용하지 못하고 그가 조부 보성군에게 불효했는가를 신하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그는 이심원과 보성군 간의 갈등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였다.
2. 3. 말년
1488년(성종 19년) 여름부터 중풍(中風)으로 말을 더듬고 반신불수(半身不遂)가 되어[4] 병석에 누웠다. 1507년(중종 2년) 보성군의 장례식에 참석하려던 부인 채씨(蔡氏)를 강성부정(江城副正) 견손(堅孫)이 강제로 쫓아냈다.[5] 강성부정은 평성정이 불효한 것은 조부의 유서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여[6] 논란이 되었다. 1507년(중종 2년) 2월, 평성정으로 강등되었으나[7],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랫동안 중풍을 앓던 그는 1510년(중종 5년) 9월 21일에 사망하였다. 사후 정의대부 평성군으로 추증되었다.
3. 사후
그의 묘소는 이후 장동면이 경기도 파주군 진서면과 마전군을 거쳐서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었지만, 그의 묘소가 있는 곳은 북한에 편입되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의 묘소 대신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 금암리 281-4번지(현, 충남 계룡시 금암동 281-4번지) 경충사 내에 단소가 세워졌다.
4. 가족 관계
정실 부인은 선녕현부인 인천 채씨로, 부사 증 이조참판 채신보의 딸이다. 선녕현부인에게서 주계부정 증 주계군 이심원, 예성군 이준원, 벽계수 증 벽계군 이혼원 등 3남과 전주 이씨 4녀를 얻었는데, 4녀는 각각 변효공, 설충란, 성회, 윤취, 여흥문에게 시집갔다.
후실에게서는 선곡부정 이윤원, 의신군 이징원 등 2남과 전주 이씨 2녀를 얻었다. 선곡부정은 군수 허탕의 딸 양천 허씨와 혼인하였고, 슬하에 딸을 두어 박문로에게 시집보냈다. 의신군은 전의 이씨, 언양 김씨와 혼인하였다.
첩에게서는 영의수 이청원, 사천수 이호원 등 2남 1녀를 두었다. 사천수 이호원은 진주 하씨, 평양 조씨와 혼인하였다. 서녀는 송지주에게 시집갔으며, 슬하에 아들 송탕을 두었다.
참조
[2]
실록
승지 성현 등이 불경죄를 범한 이심원의 문제를 의논하다
성종실록
1480-11-29
[3]
실록
불효죄를 범한 이심원을 강원도 이천현에 부처하다
성종실록
1480-12-16
[4]
실록
장사랑 이유녕이 상서하여 아비 이심원의 억울함을 호소하니 의논하게 하다
성종실록
1488-12-15
[5]
실록
지평 신세호·정언 박광영이 권영 등을 탄핵하니 불허하다
중종실록
1507-02-29
[6]
실록
강성 부정의 일에 대해 정원에 전교하다
중종실록
1507-02-03
[7]
실록
강성 부정의 일에 대해 정원에 전교하다
중종실록
1507-02-03
[8]
실록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다"
성종실록
1478-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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