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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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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사홍은 15세기 후반 조선의 문신으로, 연산군 시대에 채홍사로 활동하며 간신으로 지목받았다. 효령대군의 외손이자, 성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승정원 도승지,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성종 시대에는 언관 활동을 통해 개혁을 시도하고, 경연에 참여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과부 재혼 사건과 흙비 발언 등으로 사림파와 갈등을 겪으며 유배되기도 했다. 연산군 시대에는 아들 임숭재가 부마가 되면서 높은 품계를 받았으나,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사형 위기에 처했다. 중종 반정으로 처형되었으며, 갑자사화의 배후로 지목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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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홍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글 이름임사홍
한자 이름任士洪
로마자 표기Im Sahong
자(字)이의(而毅)
신상 정보
출생일1445년
출생지조선 한성부
사망일1506년 음력 9월 2일 (향년 62세)
사망지조선 한성부 (암살됨)
국적조선
학력
과거 급제1465년(세조 11) 알성문과 급제
정치 활동
소속 정당훈구파 세력
주요 경력문신
작가
외척
정치인
사상가
주요 직책前 조선국 병조판서
재임 기간1502년 ~ 1506년
가족 관계
배우자본부인 전주 이씨(보성군 합의 딸), 첩실 1명
자녀슬하 4남 2녀 (임광재, 임희재, 임문재, 임숭재)
부모임원준(부)
친척임견(조부), 보성군 이합(장인), 남치신(외숙부)

2. 생애

임사홍은 1445년 의정부좌찬성 임원준과 정경부인 의령 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 남규(南珪)는 개국 공신 남재의 후손이었고, 중종 때 사림파 정치인 남곤은 그의 외사촌 형이었다. 그러나 남곤은 임사홍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1] 처음 이름은 사의(士毅)였으나 후에 사홍(士洪)으로 고쳤다. 효령대군의 손녀이자 보성군 이합의 딸인 전주 이씨와 혼인하여 왕실의 인척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한성부의 저명한 문인에게서 배웠다. 훗날 간신으로 평가받으면서 그의 스승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음서로 출사하여 사재감사정을 지냈고,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1465년(세조 11년) 세조의 왕명을 받고 특별히 경서를 강론하였으며,[2] 사재감사정으로 재직 중 1465년 알성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요직에 발탁되었다.

1466년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다른 응시자와 답이 같다는 이유로 급제하지 못했다. 홍문관교리 등을 지내며 조정의 공신들과 외척들이 권력을 남용한다고 비판하였으며, 한명회, 신숙주 등 당대 권신들의 월권행위를 줄기차게 비난했다.

1468년 외척인 남이강순 등이 역모를 한다고 비난받을 때, 그들의 역모를 믿지 않았던 그는 공격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1469년 ~ 1474년 사이(조선 성종 재위 기간) 조정의 대신들에게 ‘소인배’라는 말을 들을 만큼, 임사홍은 조정 대신들의 큰 공공의 적으로 몰리게 된다.

1468년(예종 1년) 예종 즉위 후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이 되고, 1469년(예종 2년) 1월 1일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원접사절단의 일행으로 개성에 파견되었다.[3] 윤 2월에 되돌아와 통훈대부로 승진, 사재시정(司宰寺正)이 되었다.

성종 즉위 후 행예문관 전한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行藝文館典翰知製敎 兼經筵侍講官)이 되어 경연에 참여하였고,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과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를 겸하였으며 춘추관 수찬관(修撰官)을 겸하여 《세조실록》,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내불당 철거를 청하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고, 1471년 1월 경연시강관(侍講官)이 되어 대간이 불경을 사올 것을 건의한 것을 논박하고, 흉년을 대비한 곡식 수송을 독촉할 것을 건의하였다.

1471년한명회, 신숙주 등과 경연시강관으로 성균관 문묘에서 경연을 강론하였고, 10월 9일 왕에게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강론하고 상으로 활 1장을 하사받았다. 10월 11일 밤에 경연을 강하고 유의(襦衣)를 선물로 받았다.

1471년 말 예문관 전한(藝文館典翰)이 되고 1472년 1월 평안도병마절도사의 선위사로 파견되었다.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 강직한 성품으로 소신으로 직언을 했다. 그해 승정원 승지로 발탁되었다가 경연관이 되었다. 훗날 그가 27세의 나이에 승지로 발탁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4]

1472년 경연관으로 경연에서 재상도 금지령을 어기고 잘못하면 용서함이 없이 벌을 주어야 된다고 건의했다가 승정원승지들이 문제삼았으나 성종이 '임사홍이 아뢴 말을 무엇 때문에 핍박하여 쓰게 하였는가'며 승지들을 꾸짖었다.[5]

1472년 6월 행 사헌부 집의(行司憲府執義)가 되었다. 7월에는 종친과 결탁하여 불법을 행한 김지경·김계창·방호련 등을 처벌할 것을 건의하였고, 부패행위 등을 자행한 이숙(李塾)·강의산(康義山)·김정광(金庭光)·이숭수(李崇壽) 등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왕이 무마시키자 이틀 뒤 다시 김계창, 김지경 등을 탄핵하였다. 8월에는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성준(成俊)과 함께 오백창(吳伯昌) 등을 옥사를 그르쳤다 하여 탄핵하는 등 불법이나 위법행위를 자행한 대소신려들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였다.

1473년 11월에는 사예(司藝)로 성종이 주관하는 경연(經筵)에 강관(講官)으로 참여하였다. 1475년 새로 형방승지가 된 신정(申瀞)을 도와주기도 했다.[8]

1478년(성종 9년) 4월 승정원 도승지로 재직 중일 때 흙비가 내리는 변괴가 발생하자, 임사홍은 이것이 대단하지 않은 변괴이며, 국가 제사를 앞두고 술을 금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왕과 승지들은 임사홍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은 이를 하늘의 경고로 여겨 근신하고 술을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임사홍은 "무조건 언론에서 하라는 대로만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항의했다.[1]

삼사는 임사홍이 퇴폐 향락 풍조를 부추기고 하늘의 뜻을 우습게 여겼다고 비난했다. 또한 임사홍이 효령대군의 손녀사위이며 두 아들이 예종과 성종의 사위로서 왕실의 겹사돈이었던 점을 들어, '외척의 발호를 경계해야 한다'는 태종이 세운 조선 정치론에 따라 그를 맹렬하게 성토했다. 결국 임사홍은 파직되어 유배되었고, 아무도 그를 구제하지 않았다.[1]

1488년 11월 성종의 특별 지시로 절충장군 부호군(折衝將軍副護軍)에 제수되었다. 성종은 이를 끝까지 거부했고, 귀양에서 풀어주려 애쓰다가 안되자 둘째 아들 임숭재와 자신의 서녀 휘숙옹주를 혼인시키기까지 했다.[10]

1490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관압사(管押使)가 되어 연경에 다녀왔으며, 1491년 9월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흙비 때 과도한 근신을 비판한 일로 계속 언관들의 탄핵에 시달렸다. 1491년 다시 선위사(宣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이후에는 사역원에서 한어(漢語)를 가르치기도 했다.

1492년 2월 그를 선위사로 삼은 것이 옳지 못하다며 사헌부사간원이 탄핵하였다. 이후 1492년 한 해 동안 사헌부사간원에서 계속 그를 탄핵하였다. 그해 9월 승문원에 출사하여 한어(漢語)를 가르쳤다.

1496년(성종 26년) 행 부호군(行副護軍)이 되었다.

연산군 즉위 후 공신적장자에 대한 가자로 1계급 승진하여 가선대부가 되었다. 1497년 4월 가선(嘉善)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이때 대간이 그의 가자가 부당하다고 논박하였으나 연산군이 듣지 않았다. 그해 12월 다시 가선 대부 상호군(嘉善大夫上護軍)이 되었다.

연산군 때에 그 아들 임숭재가 부마(駙馬)로 임금의 총애를 얻자, 그 연줄로 갑자기 높은 품계에 올랐다. 그러나 아들 임희재김종직의 문하생으로 무오사화 당시 곤장 100대를 맞고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그러나 희재는 뒤에 1504년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하였다.

갑자사화이극균과의 친분 때문에 처형당할 뻔했으나 폐비 윤씨를 변호한 일로 죄를 면했다. 그는 '채홍사' 중 하나가 되었으나 수치심을 느껴 연산군이 부여한 채홍사 일을 태만하게 하였다.[11] 연산군은 그에게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기도 했다.[11]

임사홍은 사화 이후 정식으로 등용되어 병조판서가 되었지만 조정의 원로대신 취급을 받지 못했다.[12] 그는 채홍사 노릇을 소극적으로 하였으며, 평안도에서 미인을 뽑아오라는 명을 받았으나 기준에 맞는 미인이 없어 어렵겠다는 보고를 올리기도 했다.[12] 그러자 연산군은 벌컥 성을 내며 신하들 앞에서 그를 매도하였다.[12]

임사홍은 유자광과 함께 이극균의 친구였다 하여 처형당할 뻔하기도 했다.[13]

총명했던 임사홍은 이러한 파행의 세월이 영원히 계속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14] 그리고 머지않아 자신이 먼저 희생될 것이라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연산군의 폭주를 막지 않았고, 자신에게 가해진 모욕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도 책임의 일부를 지고 타죽을 것을 알면서도 집에 불을 지르는 사람과 같았다.[14] 그는 사회가 뒤집어쓰고 있던 위선의 껍질을 벗기는 것에 만족하고, 그로 인해 풀려난 야만성에 희생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14]

1504년 8월 초 병이 나았다는 이유로 특별히 품계가 올라[15] 8월 16일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었다.[16]

1505년 조선에 입국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로 임명된 이조 판서 김수동(金壽童)이 원접사직을 사양하자, 임사홍이 원접사가 되었다. 그해 9월 숭록대부(崇祿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10월 병조판서로서 연산군에게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는 이에게 가족을 데리고 함께 부임할 수 있게 배려해 줄 것을 청하여 성사시켰다.[17] 그 뒤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는 이 역시 가족들을 함께 데리고 가도록 편의를 봐줄 것을 건의하였으나 사헌부, 사간원의 비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06년 음력 9월 2일 중종 반정 때 아우 임사영과 함께 반정군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향년 62세였다. 시신은 여주군 능현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임사홍이 죽은 뒤 20여 일 후, 새 임금 중종에게 의금부가 “임사홍은 … 악한 일을 하도록 부추겼고, …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으니 그 죄는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재산을 몰수해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21] 결국 그는 부관참시되었고, 훗날 누군가 시신을 다시 수습하여 매장하였다.

2. 1. 생애 초반

임사홍은 1445년 의정부좌찬성 임원준과 정경부인 의령 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개국 공신 남재의 후손인 남규(南珪)였으며, 중종 때 사림파 정치인 남곤은 그의 외사촌 형이었다. 그러나 남곤은 임사홍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1] 처음 이름은 사의(士毅)였으나 후에 사홍(士洪)으로 고쳤다. 효령대군의 손녀이자 보성군 이합의 딸인 전주 이씨와 혼인하여 왕실의 인척이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글재주가 뛰어났다. 한성부의 저명한 문인에게서 배웠으나, 훗날 간신으로 평가받으면서 그의 스승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2. 1. 1. 출생과 초기 활동

임사홍은 1445년 의정부좌찬성 임원준과 남규(南珪)의 딸인 정경부인 의령 남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남규(南珪)는 개국 공신 남재의 후손이며, 연산군과 중종 때의 사림파 정치인인 지정 남곤의 친할아버지로, 그는 남곤의 외사촌 형이기도 했다.

그러나 남곤은 임사홍을 안좋게 보았는데, 중종 말 김안로를 제거하면서 김안로가 임사홍보다도 더 사악한 인간이라 지목했다. "임사홍(任士洪)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노기(盧杞)의 재주도 안로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김안로는 임사홍과 노기를 합쳐 한몸이 된 사람이다. 우리들이 어떻게 끝까지 그 사람의 수족(手足)을 견제할 수 있겠는가? 그가 하루를 밖에 있으면 조정이 하루가 편안하고, 한 해를 밖에 있으면 조정이 한 해가 편안할 것이다. 이렇게만 되면 만족하겠는데"[1]라는 것이다.

처음 이름은 사의(士毅)였으나 뒤에 사홍(士洪)으로 개명하였다. 효령대군의 손녀딸이자 보성군 이합의 딸인 전주 이씨와 결혼하여 왕실의 인척이 되었다. 그를 비난한 이심원보성군의 아들 평성도정의 아들로 처 이씨의 배다른 조카였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았고 글을 잘 지었다. 그 뒤 한성부의 저명한 문인에게 수학하였으나 그가 후일 간신의 대명사로 몰렸으므로 그의 스승이 누군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2. 1. 2. 청년기

음서로 출사하여 사재감사정을 지냈다. 그 뒤 성균관에 입학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1465년(세조 11년) 세조의 왕명을 받고 특별히 경서를 강론하였다.[2]

사재감사정을 거쳐 사직으로 재직 중 1465년 알성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요직에 발탁되었다.

2. 1. 3.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반

1466년 다시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다른 응시자와 답이 같다는 이유로 급제하지 못하였다. 그 뒤 사재감사정(司宰監司正)을 거쳐 홍문관교리 등을 지냈다. 그는 조정의 공신들과 외척들이 권력을 남용한다고 비판하였으며 당대의 권신인 한명회, 신숙주 등의 월권행위를 줄기차게 비난하기도 했다.

1468년 외척인 남이강순 등이 역모를 한다고 비난할 때, 그들이 역모를 했다고 믿지 않던 그는 남이, 강순 공격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1469년 ~ 1474년 사이(조선 성종 재위 기간) 조정의 대신들에게 ‘소인배’라는 말을 들을 만큼, 임사홍은 조정 대신들의 큰 공공의 적으로 몰리게 된다. 그러나 1478년 언관들과의 사소한 일로 마찰을 빚게 된다.

1468년(예종 1년) 예종 즉위 후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이 되고, 1469년(예종 2년) 1월 1일 사섬시정(司贍寺正) 최영린(崔永潾)과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김신몽(金信蒙)·성균 사성(成均司成) 고태정(高台鼎) 등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원접사절단의 일행으로 개성에 파견되었다.[3] 윤 2월에 되돌아와 통훈대부로 승진, 사재시정(司宰寺正)이 되었다.

2. 2. 관료 생활

임사홍은 1466년(세조 12년)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다른 응시자와 답이 같다는 이유로 급제하지 못했다. 그 뒤 사재감사정(司宰監司正)을 거쳐 홍문관교리 등을 지냈다. 그는 조정의 공신들과 외척들이 권력을 남용한다고 비판하였으며, 한명회, 신숙주 등 당대 권신들의 월권행위를 줄기차게 비난했다.

1468년 예종 즉위 후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이 되고, 1469년 1월 1일 사섬시정(司贍寺正) 최영린(崔永潾) 등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원접사절단의 일행으로 개성에 파견되었다.[3] 윤 2월에 되돌아와 통훈대부로 승진, 사재시정(司宰寺正)이 되었다.

성종 즉위 후 행예문관 전한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行藝文館典翰知製敎 兼經筵侍講官)이 되어 경연에 참여하였고,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과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를 겸하였으며 춘추관 수찬관(修撰官)을 겸하여 《세조실록》,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69년 성종 즉위 직후 조정에 내불당을 철거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다. 1470년 다시 내불당 철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려 왕실이 내불당을 옮길 것을 결정하고 대신들에게 적당한 곳을 물색하게 했다. 1471년 1월 경연시강관(侍講官)이 되었으며, 경연장에서 대간이 불경을 사올 것을 건의한 것을 논박하고, 흉년을 대비한 곡식 수송을 독촉할 것을 건의하였다.

1471년한명회, 신숙주 등과 경연시강관으로 성균관 문묘에서 경연을 강론하였고, 10월 9일 왕에게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강론하고 상으로 활 1장을 하사받았고, 10월 11일 밤에 경연을 강하고 유의(襦衣)를 선물로 받았다.

1471년 말 예문관 전한(藝文館典翰)이 되고 1472년 1월 평안도병마절도사의 선위사로 파견되었다.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 강직한 성품으로 소신으로 직언을 했다. 그해 승정원 승지로 발탁되었다가 경연관이 되었다. 훗날 그가 27세의 나이에 승지로 발탁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4]

1472년 경연관으로 경연에서 재상도 금지령을 어기고 잘못하면 용서함이 없이 벌을 주어야 된다고 건의했다가 승정원승지들이 문제삼았으나 성종이 '임사홍이 아뢴 말을 무엇 때문에 핍박하여 쓰게 하였는가'며 승지들을 꾸짖었다.[5]

1472년 6월 행 사헌부 집의(行司憲府執義)가 되었다. 7월에는 종친과 결탁하여 불법을 행한 김지경·김계창·방호련 등을 처벌할 것을 건의하였고, 7월 21일에는 부패행위 등을 자행한 이숙(李塾)·강의산(康義山)·김정광(金庭光)·이숭수(李崇壽) 등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왕이 무마시키자 이틀 뒤 다시 김계창, 김지경 등을 탄핵하였다. 8월에는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성준(成俊)과 함께 오백창(吳伯昌) 등을 옥사를 그르쳤다 하여 탄핵하는 등 불법이나 위법행위를 자행한 대소신려들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였다.

1466년 이후 본직 외에도 매일 경연에 참여하였다.[6] 1473년 11월에는 사예(司藝)로 성종이 주관하는 경연(經筵)에 강관(講官)으로 참여하였다. 1475년 새로 형방승지가 된 신정(申瀞)을 도와주기도 했다.[8]

1478년(성종 9년) 4월 승정원 도승지로 재직 중일 때 흙비가 내리는 변괴가 발생하자, 임사홍은 이것이 대단하지 않은 변괴이며, 국가 제사를 앞두고 술을 금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왕과 승지들은 임사홍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은 이를 하늘의 경고로 여겨 근신하고 술을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임사홍은 "무조건 언론에서 하라는 대로만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항의했다.[1]

삼사는 임사홍이 퇴폐 향락 풍조를 부추기고 하늘의 뜻을 우습게 여겼다고 비난했다. 또한 임사홍이 효령대군의 손녀사위이며 두 아들이 예종과 성종의 사위로서 왕실의 겹사돈이었던 점을 들어, '외척의 발호를 경계해야 한다'는 태종이 세운 조선 정치론에 따라 그를 맹렬하게 성토했다. 결국 임사홍은 파직되어 유배되었고, 아무도 그를 구제하지 않았다.[1]

1488년 11월 성종의 특별 지시로 절충장군 부호군(折衝將軍副護軍)에 제수되었다. 대간들의 말대로라면 그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10] 그러나 성종은 이를 끝까지 거부했고, 귀양에서 풀어주려 애쓰다가 안되자 둘째 아들 임숭재와 자신의 서녀 휘숙옹주를 혼인시키기까지 했다.[10]

1490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관압사(管押使)가 되어 연경에 다녀왔으며, 1491년 9월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흙비 때 과도한 근신을 비판한 일로 계속 언관들의 탄핵에 시달렸다. 1491년 다시 선위사(宣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이후에는 사역원에서 한어(漢語)를 가르치기도 했다.

1492년 2월 그를 선위사로 삼은 것이 옳지 못하다며 사헌부사간원이 탄핵하였다. 이후 1492년 한 해 동안 사헌부사간원에서 계속 그를 탄핵하였다. 그해 9월 승문원에 출사하여 한어(漢語)를 가르쳤다.

1496년(성종 26년) 행 부호군(行副護軍)이 되었다.

연산군 즉위 후 공신적장자에 대한 가자로 1계급 승진하여 가선대부가 되었다. 1497년 4월 가선(嘉善)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이때 대간이 그의 가자가 부당하다고 논박하였으나 연산군이 듣지 않았다. 그해 12월 다시 가선 대부 상호군(嘉善大夫上護軍)이 되었다.

연산군 때에 그 아들 임숭재가 부마(駙馬)로 임금의 총애를 얻자, 그 연줄로 갑자기 높은 품계에 올랐다. 그러나 아들 임희재김종직의 문하생으로 무오사화 당시 곤장 100대를 맞고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그러나 희재는 뒤에 1504년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하였다.

갑자사화이극균과의 친분 때문에 처형당할 뻔했으나 폐비 윤씨를 변호한 일로 죄를 면했다. 그는 '채홍사' 중 하나가 되었으나 수치심을 느껴 연산군이 부여한 채홍사 일을 태만하게 하였다.[11] 연산군은 그에게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기도 했다.[11]

임사홍은 사화 이후 정식으로 등용되어 병조판서가 되었지만 조정의 원로대신 취급을 받지 못했다.[12] 그는 채홍사 노릇을 소극적으로 하였으며, 평안도에서 미인을 뽑아오라는 명을 받았으나 기준에 맞는 미인이 없어 어렵겠다는 보고를 올리기도 했다.[12] 그러자 연산군은 벌컥 성을 내며 신하들 앞에서 그를 매도하였다.[12]

임사홍은 유자광과 함께 이극균의 친구였다 하여 처형당할 뻔하기도 했다.[13]

2. 2. 1. 언관, 경연관 활동과 직언

1466년 다시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다른 응시자와 답이 같다는 이유로 급제하지 못하였다. 그 뒤 사재감사정(司宰監司正)을 거쳐 홍문관교리 등을 지냈다. 그는 조정의 공신들과 외척들이 권력을 남용한다고 비판하였으며 당대의 권신인 한명회, 신숙주 등의 월권행위를 줄기차게 비난하기도 했다.

1468년 예종 즉위 후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이 되고, 1469년 1월 1일 사섬시정(司贍寺正) 최영린(崔永潾)과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김신몽(金信蒙)·성균 사성(成均司成) 고태정(高台鼎) 등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원접사절단의 일행으로 개성에 파견되었다.[3] 윤 2월에 되돌아와 통훈대부로 승진, 사재시정(司宰寺正)이 되었다.

성종 즉위 후 행예문관 전한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行藝文館典翰知製敎 兼經筵侍講官)이 되어 경연에 참여하였고, 이어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과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를 겸하였으며 그 뒤 춘추관 수찬관(修撰官)을 겸하여 《세조실록》 편찬과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2. 2. 2. 개혁, 감찰 활동

1469년 성종 즉위 직후 그는 조정에 내불당을 철거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다. 1470년 다시 내불당을 철거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의 상소에 왕실은 내불당을 옮길 것을 결정하고 대신들에게 적당한 곳을 물색하게 했다. 1471년 1월에는 경연시강관(侍講官)이 되었으며, 그때 경연장에서 대간이 불경을 사올 것을 건의한 것을 논박하고, 흉년을 대비한 곡식 수송을 독촉할 것을 건의하였다.

1471년한명회, 신숙주 등과 경연시강관의 한사람으로 성균관 문묘에서 경연을 강론하였고, 10월 9일에는 왕에게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강론하고 상으로 활 1장을 하사받았고, 10월 11일에는 밤에 경연을 강하고 유의(襦衣)를 선물로 받았다.

1471년말 예문관 전한(藝文館典翰)이 되고 1472년 1월 평안도병마절도사의 선위사로 파견되었다. 그 뒤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 강직한 성품으로 소신으로 직언을 했다. 그해 승정원승지로 발탁되었다가 경연관이 되었다. 훗날 그가 27세의 나이에 승지로 발탁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4]

1472년 경연관으로 경연에서 재상도 금지령을 어기고 잘못하면 용서함이 없이 벌을 주어야 된다고 건의했다가 승정원승지들이 문제삼았으나 성종이 '임사홍이 아뢴 말을 무엇 때문에 핍박하여 쓰게 하였는가'며 승지들을 꾸짖었다.[5]

6월 행 사헌부 집의(行司憲府執義)가 되었다. 7월에는 종친과 결탁하여 불법을 행한 김지경·김계창·방호련 등을 처벌할 것을 건의하였고, 7월 21일에는 부패행위 등을 자행한 이숙(李塾)·강의산(康義山)·김정광(金庭光)·이숭수(李崇壽) 등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왕이 무마시키자 이틀 뒤 다시 김계창, 김지경 등을 탄핵하였다. 8월에는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성준(成俊)과 함께 오백창(吳伯昌) 등을 옥사를 그르쳤다 하여 탄핵하는 등 불법이나 위법행위를 자행한 대소신려들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였다.

2. 2. 3. 경연 활동

1466년 이후 본직 외에도 매일 경연에 참여하였다.[6] 1473년 11월에는 사예(司藝)로 성종이 주관하는 경연(經筵)에 강관(講官)으로 참여하여 고림정(高林正) 이훈(李薰)·풍성 부정(豐城副正) 이강(李杠)과 문신(文臣)인 사예 장계이(張繼弛), 생원(生員) 손집경(孫執經) 등과 함께 경연을 강하였다. 1475년 새로 형방승지가 되어 경연에 대한 것을 모르는 신정(申瀞)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를 두고 실록은 '신정은 성품이 말을 잘하여 일찍이 형방 승지(刑房承旨)가 되어서는 아뢰는 일이 자못 자상하였다. 그러나 배우지 아니하고 재주가 없어, 천인(天人)의 이치를 그가 아는 것이 아니고, 임사홍의 말을 따라서 모르는 것을 억지로 급작스럽게 함부로 대답을 하니, 듣는 자가 그를 비웃었다.'라며 비방하기도 하였다.[8]

성종 즉위 후 행예문관 전한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行藝文館典翰知製敎 兼經筵侍講官)이 되어 경연에 참여하였고, 이어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과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를 겸하였다.

2. 2. 4. 과부 재혼 사건

1478년(성종 9년) 4월 승정원 도승지로 재직 중일 때, 흙비가 내리는 변괴가 발생했다.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은 이를 하늘의 경고로 여겨 근신하고 술을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임사홍은 이것이 대단하지 않은 변괴이며, 국가 제사를 앞두고 술을 금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왕과 승지들은 임사홍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삼사의 태도는 강경했다. 임사홍은 "무조건 언론에서 하라는 대로만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항의했다.[1]

삼사는 임사홍이 퇴폐 향락 풍조를 부추기고 하늘의 뜻을 우습게 여겼다고 비난했다. 또한 임사홍이 효령대군의 손녀사위이며 두 아들이 예종과 성종의 사위로서 왕실의 겹사돈이었던 점을 들어, '외척의 발호를 경계해야 한다'는 태종이 세운 조선 정치론에 따라 그를 맹렬하게 성토했다. 결국 임사홍은 파직되어 유배되었고, 아무도 그를 구제하지 않았다.[1]

2. 2. 5. 사림파와의 갈등

그는 몰락하자 주변 친구들도 왕래를 끊었고,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글과 서예를 가르치며 소일하였다. 1488년 11월 성종의 특별 지시로 절충장군 부호군(折衝將軍副護軍)에 제수되었다.

대간들의 말대로라면 그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10] 그러나 성종은 이를 끝까지 거부했고, 귀양에서 풀어주려 애쓰다가 안되자 둘째 아들 임숭재와 자신의 서녀 휘숙옹주를 혼인시키기까지 했다. 성종이 임사홍을 총애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보니 스스로도 임사홍의 혐의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기도 했다.[10]

2. 2. 6. 유배 생활

그가 몰락하자 그의 주변에 오던 친구들도 왕래를 끊었고 그는 실의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글과 서예를 가르치며 소일하였다. 그 뒤 성종의 특별 지시로 1488년 11월 절충 장군 부호군(折衝將軍副護軍)에 제수되었다.[10]

대간들의 말대로라면 그는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그러나 성종은 이를 끝까지 거부했고, 그를 귀양에서 풀어주려 애쓰다가 안되자 둘째 아들 임숭재와 자신의 서녀 휘숙옹주를 혼인시키기까지 했다. 임사홍이 워낙 총애하던 신하이기도 했지만, 나중에 보니 스스로도 임사홍의 혐의라는 것이 의심스러워져서이기도 했다.[10]

그러다 한학과 중국어에 능통하였고 일본어, 여진어 등도 구사하는 재주를 인정받아 1490년(성종 21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관압사(管押使)가 되어 연경에 다녀왔으며, 1491년 9월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흙비 때 과도한 근신을 비판한 일로 계속 언관들의 탄핵에 시달렸다. 1491년 다시 선위사(宣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이후에는 사역원에서 한어(漢語)를 가르치기도 했다.

1492년(성종 23년) 2월 그를 선위사로 삼은 것이 옳지 못하다며 사헌부사간원이 탄핵하였다. 이후 1492년 한 해동안 사헌부사간원에서 계속 그를 탄핵하였다. 그해 9월 승문원에 출사하여 한어(漢語)를 가르쳤다.

1496년(성종 26년) 행 부호군(行副護軍)이 되었다.

2. 2. 7. 교육, 외교 활동

임사홍은 유배지에서 글과 서예를 가르치며 소일하였다. 1488년 11월 성종의 특별 지시로 절충장군 부호군(折衝將軍副護軍)에 제수되었다.[10] 성종은 임사홍의 혐의가 의심스러워 그를 귀양에서 풀어주려 했고, 둘째 아들 임숭재와 자신의 서녀 휘숙옹주를 혼인시키기까지 했다.[10]

한학과 중국어에 능통하고 일본어, 여진어 등도 구사하는 재주를 인정받아 1490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관압사(管押使)가 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1491년 9월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흙비 때 과도한 근신을 비판한 일로 언관들의 탄핵에 시달렸다. 1491년 다시 선위사(宣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귀국 이후에는 사역원에서 한어(漢語)를 가르치기도 했다.

1492년 2월 사헌부사간원이 그를 선위사로 삼은 것이 옳지 못하다며 탄핵하였다. 이후 1492년 한 해 동안 사헌부사간원에서 계속 그를 탄핵하였다. 그해 9월 승문원에 출사하여 한어(漢語)를 가르쳤다.

1496년 행 부호군(行副護軍)이 되었다.

2. 2. 8. 정계 복귀와 무오사화 전후

1488년 11월 성종의 특별 지시로 절충 장군 부호군(折衝將軍副護軍)에 제수되었다.[10] 성종은 임사홍의 혐의가 의심스러워 그를 귀양에서 풀어주려 했고, 둘째 아들 임숭재와 자신의 서녀 휘숙옹주를 혼인시키기까지 했다.[10]

한학과 중국어에 능통하고 일본어, 여진어 등도 구사하는 재주를 인정받아 1490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관압사(管押使)가 되어 연경에 다녀왔으며, 1491년 9월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흙비 때 과도한 근신을 비판한 일로 계속 언관들의 탄핵에 시달렸다. 1491년 다시 선위사(宣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이후에는 사역원에서 한어(漢語)를 가르치기도 했다.

1492년 2월 사헌부사간원이 그를 선위사로 삼은 것이 옳지 못하다며 탄핵하였다. 이후 1492년 한 해동안 사헌부사간원에서 계속 그를 탄핵하였다. 그해 9월 승문원에 출사하여 한어(漢語)를 가르쳤다.

1496년 행 부호군(行副護軍)이 되었다.

연산군 즉위 후 공신적장자에 대한 가자로 1계급 승진하여 가선대부가 되었다. 1497년 4월 가선(嘉善)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이때 대간이 그의 가자가 부당하다고 논박하였으나 연산군이 듣지 않았다. 그해 12월 다시 가선 대부 상호군(嘉善大夫上護軍)이 되었다.

연산군 때에 그 아들 임숭재가 부마(駙馬)로 임금의 총애를 얻자, 그 연줄로 갑자기 높은 품계에 올랐다. 그러나 아들 임희재김종직의 문하생으로 무오사화 당시 곤장 100대를 맞고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그러나 희재는 뒤에 1504년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하였다.

2. 2. 9. 채홍사 거부와 연산군과의 갈등

갑자사화이극균과의 친분 때문에 처형당할 뻔했으나 폐비 윤씨를 변호한 일로 죄를 면했다. 그는 방방곡곡을 다니며 얼굴이 예쁜 여자를 찾아내 연산군에게 바치는 '채홍사'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수치심을 느낀 그는 이를 모욕적인 대우라고 여겨 연산군이 부여한 채홍사 일을 태만하게 하였다.[11]

연산군은 그가 미녀를 데려오는 실적이 신통치 않음을 지적하며 "다 죽게 된 거나 마찬가지인 신세에서 구해줬거늘, 쓸모없는 늙은이가 은혜도 모르는구나" 하며 경연장에서 그에게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기도 했다.[11]

임사홍은 사화 이후 정식으로 등용되어 병조판서가 되었지만 결코 조정의 원로대신 취급을 받지 못했다. 주 임무는 여전히 글씨 쓰기와 묏자리 알아보기, 그리고 채홍사로서 지방을 다니며 미인들을 모아오기였다.[12]

그가 채홍사 노릇을 했다는 사실은 후대에 간신으로 손가락질받게 되는 근거의 하나인데, 사실 그가 적극적으로 임했던 것 같지는 않다. 미인이 많다고 소문난 평안도에서 미인을 뽑아오라고 보냈더니 뽑기는 뽑았지만 기준에 두루 맞는 미인이 하나도 없어 안되겠다는 보고를 올린 내용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12] 그는 처음에는 할 수 없다고 피하다가 마지못해 채홍사로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그러자 연산군은 벌컥 성을 내며 신하들 앞에서 그를 매도하였다.[12]

이미 뽑았다면 거느리고 와서 복명(復命)함이 옳거늘, 달랑 보고만 올리는 것이 무엇이냐? 전에 사홍이 여러 사류(士類)에게서 배척을 받기 거의 수십년에, 내가 특별히 임용하여 마치 물에서 건지고 불에서 구해준 것과 같으니, 나라를 위하여 신명을 다 바쳐야 하거늘! 사홍은 약간의 재주가 있다고 하나 덜 떨어진 자이다.중국어

이후에도 그는 채홍사를 회피하거나 소극적으로 하였다. 그러자 연산군은 그가 이극균과 친했던 점을 언급하며 그를 위협하기도 했다.

2. 2. 10. 폐비 윤씨 사건 확대

연산군은 즉위 초 사초를 통해 자신의 생모가 폐비 윤씨이며, 사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산군은 생모를 왕후로 추숭하려 했으나, 사림파 관료들은 성종의 유지를 이유로 반대했다.

후대의 사림들은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의 사형 사실을 몰래 알려 갑자사화를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신수근, 유자광 등과 함께 폐비 윤씨의 생모 장흥군부인 신씨를 연산군과 만나도록 주선했다고도 한다. 임사홍은 신수근과 함께 궐내에 출입하던 유자광을 통해 연산군에게 접근했다. 연산군은 임사홍을 통해 외할머니 고령군부인 신씨를 만났고, 신씨가 전해 준 피 묻은 적삼을 보고 이성을 잃어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는 것이 사림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임사홍은 갑자사화 당시 이극균과의 친분 때문에 처형될 뻔했으나, 과거 폐비 윤씨를 변호한 일로 죄를 면했다. 따라서 임사홍이 갑자사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다는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 연산군은 이미 즉위 초부터 생모에 대한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사건의 계기라는 외할머니 장흥군부인 신씨도 이미 즉위 초부터 소재를 파악해 한양에서 살게 하면서 쌀과 곡식을 자주 지급해주고 있었다.[12]

임사홍의 셋째 아들 임희재도 갑자사화 도중 능지처사로 사형당했다. 후대 사림들은 임사홍이 아들이 죽임을 당하던 날에도 슬픈 내색 없이 연회를 베풀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실록 기록에는 임사홍이 같은 시각 연좌제로 투옥되었다가 임희재의 처형 전날 한양에서 추방당한 상황이라 신빙성이 부족하다.[12]

후대 사림들은 임사홍을 갑자사화의 주범으로 규정하고, 그가 원한을 가진 사람들에게 복수했다고 주장했다.

2. 2. 11. 가정의 불행

임사홍은 셋째 아들 임희재를 잃는 불행을 겪었다. 임희재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김종직의 제자가 되었다.[13] 연산군 4년 아버지 임사홍과 관련된 추문을 극복하고 장원급제를 하기도 하였다. 야사에 따르면 임희재는 집 병풍에다가 연산군을 진시황에 비기며 그의 폭정을 비판하는 시를 썼는데, 연산군이 어느 날 임사홍의 집에 찾아갔다가 이 병풍을 보고 격노하여 임희재를 죽이겠다고 하자 임사홍이 "그렇지 않아도 이놈이 불초하여 제가 먼저 처치하시라고 아뢰려 하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3] 아들이 죽던 날,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잔치를 벌이고 흥청거리며 놀았으며[13] 그날 저녁에야 연산군 일행이 떠나간 뒤 세인의 이목을 피해 대성통곡했다 한다.

다른 야사에서는 임희재가 아버지의 잘못을 간하자 연산군에게 그가 참소하여 죽이게 했다고도 한다.[13] 최용범은 이 설의 신빙성을 의심하며, '사실이라면 참으로 비정한 아버지, 인간성이 결여된 사람으로 보인다.'고 평하였다.[13] 그러나 실록에는 임희재가 무오사화에 희생된 이목의 도당으로서, 이목의 집을 수색했을 때 시국을 비판하는 임희재의 편지가 나왔기 때문에 희생된 것으로 적혀 있다.[13]

임사홍 자신도 유자광과 함께 이극균의 친구였다 하여 처형당할 뻔하기도 했다.[13] 임사홍보다 연산군에게 더 가까웠던 또 다른 아들 임숭재 역시 연산군에게 농락당했다. 임숭재는 개인적으로 미인을 알선해서 연산군에게 공급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자신의 누이동생인 문성정(文城正) 이상의 부인도 있었다.[13]

2. 2. 12. 위선과 야만성에 대한 체념

임사홍은 사화 이후 정식으로 등용되어 병조판서가 되었지만, 조정의 원로대신 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의 주된 임무는 글씨 쓰기, 묏자리 알아보기, 그리고 채홍사로서 지방을 다니며 미인들을 모아오는 것이었다.[12]

채홍사 노릇은 후대에 그가 간신으로 손가락질받게 되는 근거 중 하나인데, 사실 그는 이 일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는 평안도에서 미인을 뽑아오라는 명을 받았으나, 기준에 맞는 미인이 없어 어렵겠다는 보고를 올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12] 그는 처음에는 채홍사 일을 피하려 했으나, 마지못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에 연산군은 크게 화를 내며 신하들 앞에서 그를 매도하였다.[12] 이후에도 임사홍은 채홍사 일을 회피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연산군은 그가 이극균과 친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위협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가장 사랑하던 셋째 아들 희재를 잃었다. 임희재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김종직의 제자가 되었다.[13] 연산군 4년에는 아버지 임사홍과 관련된 추문에도 불구하고 장원급제를 하기도 하였다. 야사에 따르면, 임희재는 집 병풍에 연산군을 진시황에 비유하며 폭정을 비판하는 시를 썼는데, 이를 본 연산군이 격노하여 그를 죽이려 했다. 이때 임사홍은 "그렇지 않아도 이놈이 불초하여 제가 먼저 처치하시라고 아뢰려 하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3] 아들이 죽던 날,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잔치를 벌이고 흥청거리며 놀았고, 그날 저녁 연산군 일행이 떠난 뒤에야 세인의 이목을 피해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다른 야사에서는 임희재가 아버지의 잘못을 간하다가 연산군에게 참소되어 죽임을 당했다고도 한다.[13] 최용범은 이 설에 대해 '사실이라면 참으로 비정한 아버지, 인간성이 결여된 사람으로 보인다'며 의문을 제기했다.[13] 그러나 실록에는 임희재가 무오사화 때 희생된 이목의 도당이며, 이목의 집을 수색했을 때 시국을 비판하는 임희재의 편지가 발견되어 희생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3]

임사홍 자신도 유자광과 함께 이극균의 친구였다는 이유로 처형당할 뻔했다.[13] 임사홍보다 연산군에게 더 가까웠던 또 다른 아들 임숭재 역시 연산군에게 농락당했다. 임숭재는 개인적으로 미인을 알선하여 연산군에게 바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자신의 누이동생인 문성정(文城正)의 부인도 있었다.[13]

총명했던 임사홍은 이러한 파행의 세월이 영원히 계속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14] 그리고 머지않아 자신이 먼저 희생될 것이라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연산군의 폭주를 막지 않았고, 자신에게 가해진 모욕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도 책임의 일부를 지고 타죽을 것을 알면서도 집에 불을 지르는 사람과 같았다.[14] 그는 사회가 뒤집어쓰고 있던 위선의 껍질을 벗기는 것에 만족하고, 그로 인해 풀려난 야만성에 희생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14]

임사홍은 자신의 아들 희재, 사촌 동생 남곤 등이 연루되었음에도 아무도 구원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사건을 추국하는 형관이 되는 것만은 한사코 거부하였다. 그러나 임사홍 본인부터가 갑자사화 때 연루되어 사형 직전까지 몰렸던 사람이라는 점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2. 3. 생애 후반

성종1488년 11월 임사홍에게 절충장군부호군(折衝將軍副護軍)이라는 벼슬을 내렸다.[10] 성종은 임사홍을 귀양에서 풀어주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둘째 아들 임숭재와 자신의 서녀 휘숙옹주를 혼인시키기까지 했다.[10]

총명한 임사홍은 이러한 파행적인 상황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14] 그리고 머지않아 자신이 먼저 희생될 것도 인식하였다. 그러나 그는 연산군의 폭주를 말리지 않았고, 자신에게 가해진 모욕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는 사회의 위선을 벗기는 것에 만족하고, 그로 인해 풀려난 야만성에 희생되기를 피하지 않았다.[14]

임사홍은 자신의 아들 희재, 사촌 동생 남곤 등이 연루되었으나 아무도 구원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임사홍 본인부터가 갑자사화 때 연루되어 사형 직전까지 몰렸던 인물이다.

1504년 8월 초 병이 나았다는 이유로 특별히 품계가 올라[15] 8월 16일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었다.[16]

1505년 조선에 입국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로 임명된 이조 판서 김수동(金壽童)이 원접사직을 사양하자, 임사홍이 원접사가 되었다. 그해 9월 숭록대부(崇祿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10월 병조판서로서 연산군에게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는 이에게 가족을 데리고 함께 부임할 수 있게 배려해 줄 것을 청하여 성사시켰다.[17] 그 뒤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는 이 역시 가족들을 함께 데리고 가도록 편의를 봐줄 것을 건의하였으나 사헌부, 사간원의 비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 3. 1. 최후

임사홍은 사화 이후 병조판서가 되었지만, 조정에서 원로대신 취급을 받지 못했다. 주된 임무는 여전히 글씨 쓰기, 묏자리 알아보기, 그리고 채홍사로서 지방의 미인들을 모아오는 일이었다.[12]

그가 채홍사 노릇을 한 것은 후대에 간신으로 비난받는 이유 중 하나인데, 실제로는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평안도에서 미인을 뽑아오라는 명을 받았으나, 기준에 맞는 미인이 없다는 보고를 올린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12] 그는 채홍사 일을 피하려다 마지못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연산군은 이에 화를 내며 신하들 앞에서 임사홍을 비난했다.[12]

이후에도 임사홍은 채홍사를 회피하거나 소극적으로 행동했다. 그러자 연산군은 이극균과의 친분을 언급하며 그를 위협하기도 했다.

그는 가장 사랑하던 셋째 아들 희재를 잃었다. 임희재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김종직의 제자가 되었다.[13] 연산군 4년, 아버지 임사홍과 관련된 추문을 극복하고 장원급제했다. 야사에 따르면 임희재는 병풍에 연산군을 진시황에 비유하며 폭정을 비판하는 시를 썼다. 연산군이 이를 보고 격노하여 임희재를 죽이려 하자, 임사홍은 "그렇지 않아도 이놈이 불초하여 제가 먼저 처치하시라고 아뢰려 하였습니다"라고 답했다.[13] 아들이 죽던 날, 그는 평소처럼 잔치를 벌이고 흥청거리며 놀았고, 그날 저녁에야 연산군 일행이 떠난 뒤 세인의 이목을 피해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다른 야사에서는 임희재가 아버지의 잘못을 간하자 연산군에게 참소하여 죽였다고 한다.[13] 최용범은 이 설의 신빙성을 의심하며 '사실이라면 참으로 비정한 아버지'라고 평했다. 그러나 실록에는 임희재가 무오사화에 희생된 이목의 도당으로서, 이목의 집을 수색했을 때 시국을 비판하는 임희재의 편지가 발견되어 희생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3]

임사홍 자신도 유자광과 함께 이극균의 친구였다는 이유로 처형당할 뻔했다.[13]

임사홍보다 연산군에게 더 가까웠던 아들 임숭재 역시 연산군에게 농락당했다. 임숭재는 개인적으로 미인을 알선하여 연산군에게 바쳤는데, 그 중에는 자신의 누이동생인 문성정(文城正) 이상의 부인도 있었다.[13]

1504년 갑자사화 때, 중종 때 사관들은 임사홍이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과 모의하여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사건을 보고하여 사림파를 숙청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임사홍은 갑자사화 때 이극균과의 친분으로 사형당할 뻔했으며, 갑자사화도 연산군 즉위 직후부터 폐비 윤씨 사건의 전말을 안다는 정황 증거들이 많아 중종 때 주장된 임사홍이 갑자사화의 주범이라는 평가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갑자사화 당시 그는 이극균과의 친분 문제로 사형당할 뻔했으나, 과거 왕비 윤씨의 폐출을 막은 공로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아들 임희재와 외사촌 동생 남곤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탓에 화를 입었으나 구제하지 못했다.

1504년 6월 자헌대부(資憲大夫) 풍성군(豊城君)을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다. 7월 초 겸 예문관 제학(兼藝文館提學), 이후 이조판서를 거쳐 다시 병조판서가 되었지만, 사림파로부터 연산군의 악행과 폐륜적인 행동을 부추긴 인물로 지목되어 비판받았다. 1495년에는 아들 임광재를, 1505년에는 아들 임숭재를 병으로 잃었다.

1504년 8월 초, 병이 나았다는 이유로 특별히 품계가 올라[15] 8월 16일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었다.[16]

1505년 조선에 입국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로 임명된 이조 판서 김수동(金壽童)이 사양하자, 임사홍이 원접사가 되었다. 그해 9월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10월 병조판서로서 연산군에게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는 이에게 가족 동반을 허락해 달라고 청하여 성사시켰다.[17] 이후 평안도병마절도사 부임자에게도 가족 동반을 건의했으나, 사헌부와 사간원의 비판으로 무산되었다.

1506년 4월 이조 판서 김수동(金壽童)이 모친상을 당해 사직하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18]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4월중국 사신에게 결례를 범했다 하여 국문을 당했다.[19]

7월 20일 우참찬으로 승진하고,[20] 7월 29일에는 다시 좌참찬이 되었다. 8월 17일 지사로 전임되었다가 닷새 만에 예문관의 제술을 맡게 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촉체(蜀體) 해서(楷書)에 능했다. 작품으로는 광주 서거정 묘비명, 금천 노사신 신도비문, 양주 박중선 묘비문, 광주 이계손 묘비명, 한확 묘비명, 연천 영원 윤호 묘비명, 월산대군 비명 등이 있다. 정승 물망에도 올랐지만, 신수근, 김수동 등에게 밀려 1506년 음력 9월 2일 중종 반정 때 아우 임사영과 함께 반정군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향년 62세였다. 시신은 여주군 능현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임사홍이 죽은 뒤 20여 일 후, 새 임금 중종에게 의금부가 “임사홍은 … 악한 일을 하도록 부추겼고, …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으니 그 죄는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재산을 몰수해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21] 결국 그는 부관참시되었고, 훗날 누군가 시신을 다시 수습하여 매장하였다.

3. 사상과 신념

임사홍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월권행위, 뇌물 수수, 범법행위를 하면 가차없이 탄핵했으며, 그 중에는 공신과 공신 자제들도 있었다.[23] 1472년 경연에서 재상이라도 금지령을 어기고 잘못하면 용서 없이 벌을 주어야 한다고 건의했다가 승정원승지들이 문제삼았으나, 성종은 '임사홍이 아뢴 말을 무엇 때문에 핍박하여 쓰게 하였는가'라며 승지들을 꾸짖었다.[5]

1477년 폐비 윤씨성종의 용안을 긁은 일로 대간, 사헌부, 의금부 등에서 탄핵을 받았을 때, 임사홍은 왕비가 세자 융(후일의 연산군)의 생모이므로 세자를 봐서라도 탄핵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그는 간사한 인물이라는 인신공격을 당하게 된다.

임사홍은 임금에게 충신과 간신을 가려서 쓰고, 간신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을 여러번 건의하였다. 그는 "충신과 간신을 잘 구분하여 충신을 높이고 간신을 물리치는 것이 정치의 요체입니다. 전하께서는 부디 유념하소서.[23]"라고 간하기도 했다.[23]

3. 1. 공정성

성종이 정희왕후, 인수왕비 등의 뜻에 따라 내불당을 설치했을 때 앞장서서 반대했으며, "재상이라고 해도 법을 어기면 단호하게 처벌해야 합니다"라고 진언하기도 했다.[23] 그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월권행위나 뇌물 수수, 범법행위를 하면 가차없이 탄핵하였고, 그 중에는 공신들과 공신자제들도 있었다.

1472년 경연관으로 경연에서 재상도 금지령을 어기고 잘못하면 용서함이 없이 벌을 주어야 된다고 건의했다가 승정원승지들이 문제삼았으나 성종이 '임사홍이 아뢴 말을 무엇 때문에 핍박하여 쓰게 하였는가'며 승지들을 꾸짖었다.[5]

1477년 폐비 윤씨성종의 용안을 긁은 일로 대간과 사헌부, 의금부 등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왕비는 세자 융(후일의 연산군)의 생모이므로 세자를 봐서라도 탄핵해서는 안 된다며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폐비를 반대한 일로 그는 간사한 인물이라는 인신공격을 당하게 된다.

3. 2. 충신 등용

성종 즉위 후 예문관 전한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行藝文館典翰知製敎 兼經筵侍講官)이 되어 경연에 참여했고,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과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를 겸했으며, 춘추관 수찬관(修撰官)을 겸하여 《세조실록》,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469년 성종 즉위 직후 조정에 내불당(內佛堂)을 철거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고, 1470년 다시 내불당을 철거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의 상소에 왕실은 내불당을 옮길 것을 결정하고 대신들에게 적당한 곳을 물색하게 했다.[4]

1471년한명회, 신숙주 등과 경연시강관으로 성균관 문묘에서 경연을 강론했고, 10월 9일 왕에게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강론하고 상으로 활 1장을, 10월 11일 밤에 경연을 강하고 유의(襦衣)를 선물로 받았다. 1472년 경연관으로 경연에서 재상도 금지령을 어기고 잘못하면 용서함이 없이 벌을 주어야 된다고 건의했다가 승정원승지들이 문제삼았으나 성종이 '임사홍이 아뢴 말을 무엇 때문에 핍박하여 쓰게 하였는가'며 승지들을 꾸짖었다.[5]

1473년 11월 사예(司藝)로 선정전(宣政殿)에 나가 경연을 강하였다. 1474년 통정대부 예문관 부제학(藝文館副提學)으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성종의 의경세자(의경왕)의 추가 시호를 청하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며 반대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7] 1475년 새로 형방승지가 되어 경연에 대한 것을 모르는 신정(申瀞)을 도와주기도 했다.[8]

그는 임금에게 충신과 간신을 가려서 쓰고, 간신을 분별할 줄 알아야 된다는 뜻을 여러번 건의하였다.

"충신과 간신을 잘 구분하여 충신을 높이고 간신을 물리치는 것이 정치의 요체입니다. 전하께서는 부디 유념하소서.[23]"라고 간하기도 했다.[23]

4. 평가와 의문

임사홍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연산군 때 아들 임숭재가 부마가 되어 높은 품계에 올랐으나, 갑자사화 때 이극균과의 친분으로 처형될 뻔했다가 폐비 윤씨를 변호한 일로 죄를 면했다. 그는 얼굴이 예쁜 여자들을 찾아 연산군에게 바치는 채홍사 중 한 명이었으나, 수치심을 느껴 채홍사 일을 태만하게 했다.[11] 연산군은 그에게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기도 했다.[11]

반면 홍문관 교리 등 청요직에 있을 때는 소신이 뚜렷하고 바른 말을 잘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23] 성종이 내불당을 설치하려 할 때 앞장서서 반대했으며, 법을 어기는 재상은 단호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3] 그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월권행위, 뇌물 수수, 범법행위를 하면 가차없이 탄핵했으며, 그 중에는 공신과 공신 자제들도 있었다.

그의 글씨는 당대 최고로 인정받았으며, 중국어에도 능통하여 여러 차례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왔고, 사역원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24] 최용범은 그를 '유자광과는 비교도 안되는 명문 주류이자, 세조 시대의 한명회나 유자광처럼 박학다재(博學多才)하여 거친 데라고는 없는 우아한 선비였다'고 평가했다.[23]

사림파 집권 이후, 그는 성종의 유지를 깨고 연산군에게 생모 폐비 윤씨의 일을 꺼내 많은 사람을 죽게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미 폐비 윤씨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외조모와 외숙부의 석방에 앞장서기도 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가 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최용범은 "연산군도 임사홍도 시대의 모순이 낳은 사생아들이었다. 그들은 파격과 폭력으로 채워지지 않는 허무를 채웠다."고 평가하며, 그 역시 혼란기에 권력 암투로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던 시대의 희생자라고 보았다.[25]

임사홍에 대한 왜곡 가능성은 김종직임원준의 악연, 임희재남곤김종직의 문인이었다는 점 등에서 제기되고 있다.[26] 특히 임사홍을 '간신은 겉으로 봐서는 모르는 법입니다. 임사홍 같은 경우 항상 점잖고 관대하여 인격자처럼 보였습니다'라는 표현은 사림파에 의해 철저히 버림받은 임사홍에 대한 왜곡을 보여준다.[26]

4. 1. 갑자사화 배후설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의 사형 사실을 알려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는 주장이 후대의 사림파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신수근, 유자광 등과 함께 폐비 윤씨의 생모 장흥군부인 신씨를 연산군과 만나도록 주선했다는 것이다. 임사홍은 신수근과 함께 궐내에 출입하던 유자광을 통해 연산군에게 선을 댔고, 연산군은 임사홍을 통해 외할머니 고령군부인 신씨를 만났으며, 신씨가 전해 준 피 묻은 적삼을 보고 이성을 상실해 갑자사화를 벌였다고 한다.[11]

그러나 이는 후대 사림들의 주장이고, 정작 임사홍은 갑자사화 당시 연산군에게 죽었던 이극균과의 친분 관계가 발각되어 유자광과 같이 사형당할 뻔했다. 폐비 윤씨를 적극적으로 변호한 과거 덕분에 처벌은 면했지만, 임사홍이 갑자사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다는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 연산군은 즉위 초부터 생모의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사건의 계기라는 외할머니 장흥군부인 신씨도 이미 즉위 초부터 소재를 파악해 한양에서 살게 하면서 쌀과 곡식을 자주 지급해주고 있었다.(연산 2년 음력 10월 21일)[11]

임사홍의 셋째 아들 임희재도 갑자사화 도중인 음력 10월 28일 능지처사로 사형을 당했다. 후대 사림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임사홍은 아들 희재가 죽임을 당하던 날에도 슬픈 내색을 하지 않고 평일과 다름없이 그의 집에서 연회를 베풀고 고기를 먹으며 풍악을 울리니, 연산군이 사람을 시켜 이를 엿보고는 더욱 신임과 은총을 더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실록 기록에는 임사홍은 같은 시각 연좌제로 투옥되어 있다가 임희재의 처형 전날에 한양에서 추방당한 상황이라 신빙성이 부족한 기록이다.[11]

사림파 집권 이후 그는 성종의 유지를 깨고 연산군에게 생모 폐비 윤씨의 일을 꺼내 무도하게 많은 사람을 죽게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사건의 전말을 전하기 이전에 연산군폐비 윤씨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외조모와 외숙부의 석방에 앞장서기도 했다.[11]

1990년대에 들어서야 임사홍이 갑자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임사홍의 부친 임원준김종직의 악연, 임희재와 남곤김종직의 문인이었다는 점 등을 들어 임사홍에 대한 왜곡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26]

4. 2. 발언 파문

1472년 경연관으로 경연에서 재상이라도 금지령을 어기고 잘못하면 용서함이 없이 벌을 주어야 된다고 건의했다가 승정원승지들이 문제삼았으나 성종이 '임사홍이 아뢴 말을 무엇 때문에 핍박하여 쓰게 하였는가'며 승지들을 꾸짖었다.[5] 그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월권행위나 뇌물 수수, 범법행위를 하면 가차없이 탄핵하였고, 그 중에는 공신들과 공신 자제들도 있었다.[23]

4. 3. 친척들과의 갈등

1478년 4월 29일 주계부정 이심원은 임사홍과 그의 아버지 임원준을 탄핵하면서, 임사홍이 자신의 숙모부이기 때문에 그 사람됨을 자세히 아는데 참으로 소인이라 하며 언관들의 파면이 부당하다고 상주했다.[30] 이심원은 성녕대군의 양자인 원천군이 정실에게는 아들이 없고 첩에게만 아들이 있었는데, 임원준성녕대군 집의 재산이 많은 것을 알고 원천군의 서자 대신 보성군을 성녕대군의 양자로 입양시키려던 것도 지적하였다.[30] 그러자 같은 날 보성군 이합이 직접 가서 임사홍의 편을 들면서 대죄하였다.[30] 성종은 같은 날 이심원과 임사홍, 임원준을 불러 대질심문을 시키기도 했다.[30] 이후 보성군 합은 주계부정 이심원을 불효죄로 고소하여 사건이 확대되었다.[30]

5.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증조부임거경(任巨卿)
할아버지임견(任肩)
아버지임원준(任元濬, 1423년 ~ 1500년/1506년(?))
어머니정경부인 의령 남씨남규의 딸, 남곤의 고모
동생임사영(任士英, 1449년~1506년)
부인전주 이씨보성군(寶城君)의 딸(효령대군의 손녀)
장남풍천위(豊川尉) 임광재(任光載, 1464년 - 1495년)예종의 딸 현숙공주와 혼인
차남임희재(任熙載, 1472년 - 1504년)김종직의 문인
삼남임문재(任文載, 1473 - ?)
사남풍원위(豊原尉) 임숭재(任崇載, 1475년 - 1505년)성종의 딸 휘숙옹주와 혼인
장녀풍천 임씨(豊川 任氏, 1468년 - ?)
차녀풍천 임씨(豊川 任氏, 1479년 - ?)
사위노종(盧種)노사신의 손자
외조부남규(南珪)
외삼촌남치신(南致信, 1420년경(?) - ?)
외사촌 동생남포(1459년 - 1540년)
외사촌 동생남곤(1471년 - 1528년)김종직의 문인
사돈노공유(盧公裕)노종의 아버지
사돈노사신


6. 관련 작품

임사홍을 다룬 작품은 다음과 같다.


6. 1. 드라마

6. 2. 영화

7. 작품


  • 서거정 묘비명 (徐居正墓碑銘)
  • 노문광공사신신도비명 (盧文匡公思愼神道碑銘)
  • 월산대군 이정비명 (月山大君李婷碑銘)
  • 이계손 묘비명(李繼孫墓碑銘)
  • 한확 묘비명(韓確墓碑銘)
  • 박중선 묘비명(朴仲善墓碑銘)
  • 영원윤호 묘비명(鈴原尹壕墓碑銘)
  • 대사헌 정경조 묘비명 글씨

8. 기타

임사홍은 대사간으로 임명되었으나 사간원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예조참의, 이조참의를 거쳐 도승지로서 성종을 보좌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종 9년 4월 21일, 임사홍은 별 생각 없이 한 말 때문에 곤경에 처하게 된다.[28]

당시 흙비가 내려 대간의 요청으로 술을 금했는데, 임사홍은 제사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술을 전부 금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말했다. 또한 대간의 말을 무조건 들어줄 필요는 없다고 성종에게 말했다.[28] 이는 사간원과 사헌부의 공격 빌미를 제공했다.

임사홍의 발언은 임금이 하늘의 꾸지람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부정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지도록 부추긴 것이며, 대간에 대한 말은 언론을 탄압하고 폭군을 양성하려는 음모라는 비판을 받았다. 언론 3사는 임사홍을 간신으로 지목하고 처벌을 주장했다.[28] 성종은 임사홍의 말을 마땅치 않게 여겼지만 죄를 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론은 임사홍의 아버지 임원준까지 끌어들여 처벌을 요구했다.[29]

성종은 대간들을 소집해 임사홍 부자를 탄핵하는 이유를 물었으나, 뚜렷한 근거가 나오지 않자 대간들을 파직시키고 임사홍도 체임시켰다. 임사홍은 말실수로 직첩을 거두게 되었다.[29]


  •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를 추숭하는 과정에서 사림파와의 갈등으로 발생했다. 임사홍이 갑자사화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는 아니지만, 반정군에게 죽은 이후 연산군의 폭정의 원인을 그가 부추긴 것처럼 전해졌다.
  • 조선시대에는 왕릉 외에는 무인석을 세울 수 없었다. 그러나 임사홍은 1504년 아버지 임원준의 무덤을 조성하면서 무인석을 배치했다.

참조

[1] 실록 연성위 김희가 김안로의 사면을 구하는 상언을 올리다. 그에 대한 삼공의 논의 중종실록 1529-05-24
[2] 실록 비현합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유생 임사홍 등에게 경서를 강하게 하다 세조실록 1465-10-15
[3] 실록 명나라 사신의 지대는 강옥과 김보의 예에 따르고 윤자운으로 주관케 하다 예종실록 1469-01-01
[4] 실록 대간이 박원종의 개차를 청하므로 의논하게 하니 모두 개차하기를 청하다 성종실록 1492-08-12
[5] 실록 임사홍이 재상도 금령을 범하면 벌하도록 청한 것을 승지들이 논죄하려 하다 성종실록 1472-04-26
[6] 실록 집의 임사홍이 김순성을 서용하지 말 것을 청하다 성종실록 1472-12-07
[7] 실록 임사홍이 의경왕의 추봉을 천자에게 주청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상소하다 성종실록 1474-08-24
[8] 실록 석강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이치에 대해 묻다 성종실록 1475-01-20
[9] 실록 우승지 임사홍이 성절사와 주문사가 모두 공신임을 아뢰다 성종실록 1477-06-25
[10] 서적 다시 쓰는 간신열전 페이퍼로드
[11] 뉴스 임사홍ㆍ원균도 할 말은 있다 http://sunday.joins.[...]
[12] 서적 다시 쓰는 간신열전 페이퍼로드
[13] 서적 다시 쓰는 간신열전 페이퍼로드
[14] 서적 다시 쓰는 간신열전 페이퍼로드
[15] 실록 임사홍 집에서 병이 나았다 하여 임 부자와 의원 등에게 가자하다 연산실록 1504-08-08
[16] 실록 임숭재·임사홍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연산군일기 1504-08-16
[17] 실록 병조 판서 임사홍이 평안도 절도사는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기를 청하다 연산군일기 1505-10-08
[18] 문서 형조 판서 이손(李蓀)이 병조판서가 되고, 신수영(愼守英)이 형조판서가 되었다.
[19] 실록 중국 사신의 실례를 책한 임사홍을 국문하다 연산군일기 1506-04-17
[20] 실록 임사홍 등을 승진시키다 연산군일기 1506-07-24
[21] 웹인용 임사홍 http://history.yj21.[...] 2012-01-16
[22] 문서 효령대군-보성군-평성군-주계부정
[23] 서적 다시 쓰는 간신열전 페이퍼로드
[24] 서적 다시 쓰는 간신열전 페이퍼로드
[25] 서적 다시 쓰는 간신열전 페이퍼로드
[26] 서적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 다시 쓰는 간신열전 살림, 페이퍼로드 2007-11, 2007-01
[27] 서적 다시 쓰는 간신열전 페이퍼로드
[28] 서적 다시 쓰는 간신열전 페이퍼로드
[29] 서적 다시 쓰는 간신열전 페이퍼로드
[30] 실록 연성위 김희가 김안로의 사면을 구하는 상언을 올리다. 그에 대한 삼공의 논의 중종실록 1529-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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