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인판타 마리아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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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 아나는 1861년에 태어나 1942년에 사망한 포르투갈의 인판타이다. 룩셈부르크 대공 빌헬름 4세와 결혼하여 6명의 딸을 두었으며, 남편의 질병으로 인해 1908년부터 1912년까지 룩셈부르크의 섭정을 역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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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인판타 마리아 아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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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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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룩셈부르크 대공비 |
재위 기간 | 1905년 11월 17일 – 1912년 2월 25일 |
섭정 | 1908년 11월 19일 – 1912년 6월 18일 |
섭정 대상 | 기욤 4세, 마리 아델라이드 |
본명 | 마리아 아나 두 카르무 엔히크 테레자 아델라이드 주아나 카롤리나 이네스 소피아 에울랄리아 레오폴디나 이자벨 베르나르디나 미카엘라 가브리엘라 하파엘라 프란시스카 드 아시스 이 드 파울라 이나시아 곤자가 |
출생일 | 1861년 7월 13일 |
출생 장소 | 독일 연방 뷔르템베르크 왕국 베르트하임암마인 브론바흐 성 |
사망일 | 1942년 7월 31일 |
사망 장소 | 미국 뉴욕 |
매장 장소 | 룩셈부르크 노트르담 대성당 |
가문 | |
왕조 | 브라간사 가문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미겔 1세 |
어머니 | 아델하이트 폰 뢰벤슈타인 |
배우자 | 기욤 4세 (1893년 결혼, 1912년 사별) |
자녀 | 마리 아델라이드 샤를로트 힐다, 슈바르첸베르크 공비 안토니아, 바이에른 왕세자비 엘리자베트, 투른 운트 탁시스 공비 조피, 작센 왕자비 |
2. 생애
1861년 7월 13일, 포르투갈의 미겔 1세 전 국왕과 아델하이트 폰 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젠베르크 왕녀의 딸로, 아버지가 왕위에서 물러나 망명 생활을 하던 중 뷔르템베르크 왕국에서 태어났다.
1893년 룩셈부르크 대공의 후계자였던 기욤과 결혼했으며, 이 결혼을 계기로 개신교 신자였던 남편 기욤은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부부는 여섯 명의 딸을 두었는데,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1907년 룩셈부르크에서는 여성의 대공위 계승을 인정하는 준살리카법이 채택되었다.
1905년 남편이 기욤 4세로 즉위하면서 대공비가 되었고, 1908년부터 남편의 병세가 악화되자 룩셈부르크의 섭정을 맡았다. 남편 사후인 1912년에는 잠시 장녀 마리아델라이드 대공의 섭정을 지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이 룩셈부르크를 점령하자 대공 일가와 함께 망명길에 올랐으며, 1942년 7월 31일 망명지인 미국 뉴욕에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