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탱 술루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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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스탱 술루크는 1782년 생도맹그에서 태어난 아이티 군인으로, 아이티 혁명에 참여하여 중장까지 진급했다. 1847년 아이티 대통령이 되었고, 징글린이라는 사설 민병대를 조직하여 권력을 강화하며 흑인 우대 정책을 펼쳤다. 1849년 아이티 제2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포스탱 1세가 되었으며, 귀족 제도를 창설하고 유럽식 중앙집권 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갈등, 나바사 섬에 대한 미국과의 대립을 겪었으며, 1858년 쿠데타로 퇴위하여 망명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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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탱 술루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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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포스탱 1세 |
원래 이름 | Faustin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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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아이티 황제 |
재위 | 1849년 8월 26일 ~ 1859년 1월 15일 |
대관식 | 1852년 4월 18일 |
작위2 | 아이티의 제7대 대통령 |
재임2 | 1847년 3월 1일 ~ 1849년 8월 26일 |
전임2 | 장 밥티스트 리셰 |
후임2 | (아이티 황제로 칭제) |
휘 | 포스탱 엘리 술루크 |
출생일 | 1782년 8월 15일 |
출생지 | 프티고아브, 생도맹그 |
사망일 | 1867년 8월 3일 |
사망지 | 앙세아보, 아이티 |
왕조 | 술루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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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타노 코이치 |
어머니 | 마리-카트린 술루크 |
배우자 | 아델리나 레베크 |
자녀 | 올리브 술루크 셀리타 술루크 |
종교 | 부두교 |
개인 정보 | |
전체 이름 | 포스탱-엘리 술루크 |
통치 정보 | |
계승 | 아이티 황제 |
전임 | 자신 (아이티 대통령으로서) |
후임 | 파브르 제프라르 (아이티 대통령으로서) |
재임 유형1 | 재임 중 |
배우자 | 아델리나 레베크 (1847년 결혼) |
자녀 | 올리브 공주 셀리타 공주 |
2. 초기 생애
포스탱 엘리 술루크는 1782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생도맹그의 프티고아브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이티 혁명 중 1793년 해방령을 통해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프랑스가 노예제를 다시 시행하려 하자 이에 반발하여 1803년 혁명군에 자원 입대하였다. 아이티가 독립을 쟁취한 1804년 이후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1806년 아이티군 중위로 임관했다. 이후 약 40년 동안 꾸준히 군에 복무하며 대령 계급을 거쳐 중장까지 진급하였고, 마침내 아이티군 최고 지휘관이자 대통령 경호대 최고 사령관의 중책을 맡게 되었다.
2. 1. 출생과 가족
포스탱 엘리 술루크는 1782년 8월 15일,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의 작은 마을 프티고아브에서 태어났다. 술루크의 어머니 마리 카트린 술루크는 1744년 포르토프랭스에서 태어났으며, 민족 만딘카족 출신의 크레올인이었다.2. 2. 아이티 혁명 참여
포스탱 엘리 술루크는 1782년 8월 15일,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의 작은 마을 프티고아브에서 아이티인 어머니 마리 카트린 술루크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만딘카족 출신의 크레올인이었다. 술루크는 1791년에 시작된 아이티 혁명에 대응하여 프랑스 혁명 시기 생도맹그의 민사 위원이었던 레제 펠리시테 손토나가 1793년에 발령한 해방령의 결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프랑스 정부가 노예 제도를 재건하려 시도하면서 그의 자유가 심각하게 위협받자, 술루크는 1803년 자유 시민으로서 흑인 혁명군에 입대했다. 그는 1804년까지 사병으로 싸웠고, 그 해 혁명의 승리로 생도맹그는 아이티로 독립을 달성했다. 이 과정에서 존경받는 군인이 된 술루크는 1806년 아이티군의 중위로 임명되었으며, 라마르 장군의 부관이 되었다.
2. 3. 군 경력
프랑스 정부가 노예제를 다시 도입하려 하자 자유가 위협받는다고 느낀 술루크는 1803년 자유 시민으로서 흑인 혁명군에 입대했다. 그는 1804년 아이티 혁명이 승리로 끝나 아이티가 독립을 이룰 때까지 사병으로 복무했다. 이 과정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1806년 아이티군의 중위로 임명되었고, 라마르 장군의 부관으로 활동했다.1810년에는 알렉상드르 페티옹 대통령 하에서 기병대에 배치되었다. 이후 약 40년간 아이티군에서 꾸준히 복무하며 필리프 게리에 대통령 시절에는 대령 계급까지 올랐다. 마침내 장 바티스트 리셰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아이티군 최고 지휘관이자 대통령 경호대의 최고 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3. 통치
1847년 리셰 대통령 사망 후, 보이에주의자들은 다루기 쉬운 허수아비로 여겼던 포스탱 술루크를 후임자로 내세웠다. 1847년 3월 2일, 술루크는 아이티의 제7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초기에 술루크는 꼭두각시 역할을 수행하는 듯 보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내세웠던 후원자들을 배신하고 아이티의 절대 군주로서 권력을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그는 반대 세력을 폭력적으로 탄압하며 권력 기반을 다졌고[5], 당시 사회적으로 논란이 많았던 부두교를 공개적으로 옹호하여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한편 폭력적인 이미지를 굳혔다.[7] 이러한 권력 강화는 이후 그가 황제로 즉위하는 기반이 되었다.
3. 1. 대통령 취임
1847년, 리셰 대통령이 사망하자, 그의 재임 기간 동안 허수아비 노릇을 시킬 인물을 찾던 보이에주의자들은 새로운 대통령 후보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시선은 곧 포스탱 술루크에게 향했는데, 당시 보이예주의자들은 술루크를 다소 둔하고 무지하여 조종하기 쉬운 인물로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65세였던 술루크는 아이티의 제7대 대통령직 제안을 수락하고, 1847년 3월 2일에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초기에 술루크는 보이예주의자들의 기대대로 꼭두각시 역할을 수행하는 듯 보였다. 그는 전임 대통령의 각료들을 그대로 유지하며 이전 정책을 이어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술루크는 자신을 내세웠던 후원자들을 배신하고 아이티의 절대 군주로서 자신의 권력을 다지기 시작했다. 마크 컬란스키는 그의 저서 ''섬의 대륙: 카리브해의 운명을 찾아서''에서 술루크가 "징글린이라는 사설 민병대를 조직하고, 반대하는 모든 사람, 특히 물라토들을 체포, 살해, 불태우면서 정부에 대한 권력을 공고히 했다"고 기술했다. 술루크의 권력 강화 과정에서 아이티 흑인 인구를 우대하는 인종 차별 정책이 심화되었으며, 이는 1848년 4월 16일 포르토프랭스에서 벌어진 물라토 학살과 같은 사건으로 이어졌다.[5] 술루크는 루이지애나 출신의 흑인들에게 아이티 이민을 권유하기도 했다. 뉴올리언스 출신의 아프로 크리올인 에밀 데스던스는 1859년 술루크의 대리인으로서 최소 350명의 이주 희망자들에게 아이티행 무료 교통편을 마련해주었다. 이 이주민들 중 상당수는 나중에 루이지애나로 돌아갔다.[6] 술루크는 모든 반대 세력을 강력하게 억압했으며,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폭력 행위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살해되었다. 또한, 당시 아이티는 로마 가톨릭 신자가 다수였음에도 술루크가 공개적으로 부두교를 옹호한 것은 그의 폭력적인 이미지와 더불어 부정적인 평판을 강화하는 요인이 되었다.[7] 그는 포르토프랭스의 대통령 관저에 만보(여성 사제)와 보코르(남성 마법사)를 상주시키기도 했다.
3. 2. 권력 강화와 억압 정치
1847년 장바티스트 리셰 대통령 사망 후, 보이에주의 통치 계급은 다루기 쉬운 허수아비로 여겨졌던 포스탱 술루크를 후임자로 선택했다. 1847년 3월 2일, 술루크는 아이티의 제7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처음에는 전임자의 각료를 유지하며 꼭두각시 역할을 수행하는 듯 보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내세웠던 후원자들을 배신하고 절대 군주로서의 권력을 다지기 시작했다.술루크는 '징글린'(Zinglin|징글린ht)이라는 사설 민병대를 조직하여 정부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을 확보해 나갔다. 이 조직은 술루크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 특히 물라토들을 체포하고 살해하거나 재산을 불태우는 등 잔혹한 탄압을 자행했다.[5] 이러한 폭력적인 권력 강화 과정은 아이티 흑인 인구를 우대하는 인종 차별 정책으로 이어졌으며, 1848년 4월 16일에는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물라토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5]
한편, 술루크는 미국 루이지애나 출신의 흑인들에게 아이티로 이주할 것을 권유했다. 뉴올리언스 출신의 아프로 크리올인 에밀 데스던스는 술루크의 대리인으로 활동하며 1859년에 최소 350명의 이주를 도왔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나중에 루이지애나로 돌아갔다.[6]
술루크 정권 하에서는 모든 반대 세력에 대한 강력한 억압이 이루어졌고,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폭력 행위가 끊이지 않아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술루크는 당시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던 부두교를 공개적으로 옹호했는데, 이는 로마 가톨릭이 주류였던 사회에서 그의 폭력적인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7] 그는 포르토프랭스의 대통령 관저에 만보(여사제)와 보코르(남성 마법사)를 항상 머물게 하기도 했다.
3. 3. 아이티 제2제국 선포
술루크는 대통령 취임 후 초기에는 보이에주의자들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듯 보였으나, 곧 자신의 후원자들을 배척하고 절대 군주로서 권력을 다지기 시작했다. 그는 사설 민병대를 조직하고 반대 세력, 특히 물라토를 탄압했으며, 1848년에는 포르토프랭스에서 물라토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5] 또한 공개적으로 부두교를 신봉하여 가톨릭 중심 사회에서 그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는 한편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7]
이러한 권력 강화는 1849년 8월 26일, 상원과 하원이 그를 아이티 제국의 황제 포스탱 1세로 추대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이로써 장 자크 데살린(자크 1세) 황제가 암살된 후 1806년에 폐지되었던 제국이 아이티 제2제국으로 부활하게 되었다(1811년부터 1820년까지는 앙리 크리스토프의 아이티 왕국이 존재했다).
포스탱 1세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를 모방하여 화려한 대관식을 준비했다. 그는 파리의 상인에게 나폴레옹의 대관식과 동일한 의상을 주문했으며, 자신의 왕관 제작에만 2000GBP, 기타 부속품에 3만파운드를 지출했다고 전해진다. 1849년 12월에는 오랜 동반자였던 아델리나 레베크와 결혼하여 황후로 삼았다.
1852년 4월 18일, 포르토프랭스에서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 역시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본뜬 것이었으며, 상원 의장이 황제와 황후에게 훈장과 목걸이를 걸어주자 포스탱 1세는 "자유 만세, 평등 만세!"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 대관식 장면은 세브랭(Severyn)이 조각하여 1852년 뉴욕에서 출판된 ''아이티 제국 앨범''에 그림으로 남아 있다.
3. 4. 귀족 제도

황제로 즉위한 술루크는 가장 먼저 아이티 귀족 제도를 창설했다. 1849년 9월 20일 공포된 제국 헌법은 황제에게 세습 작위를 만들고 신민에게 다른 훈장을 수여할 권한을 부여했다.
존 손더스와 웨스트랜드 마스턴의 잡지 ''The National'' 5권과 6권(1859년 발행)에 따르면, 제국 귀족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첫 번째 특허장은 1850년 12월 21일 술루크에 의해 발행되었다. 다른 자료에서는 이 목록에 "300명의 슈발리에"와 "400명의 귀족"을 추가하기도 한다. 이후 작위 창설로 귀족의 수는 늘어났으며, 아이티 왕국의 앙리 크리스토프 국왕이 발행했던 작위가 술루크에 의해 재발행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크리스토프 치하에서 샤를 피에르에게 수여되었던 ''Comte du Terrier-Rouge'' 작위는 술루크 치하에서 제너럴 게리에 드 프로페트에게 동일하게 수여되었다.
술루크는 자신의 정권에 대한 충성에 보답하고 아이티 군주국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여러 훈장을 제정했다. 1849년 9월 21일에는 성 파스탱 군사 훈장과 아이티 명예 군단 민사 훈장을 만들었다. 이후 1856년에는 성 마리아 막달레나 훈장과 성 안나 훈장을 추가로 창설했다. 같은 해 그는 제국 예술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4. 외교 정책
술루크의 외교 정책은 아이티 정치와 주권에 대한 외세의 침략을 막는 데 집중되었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아이티로부터 독립한 도미니카 공화국이었으며[8], 미국과는 나바사 섬 영유권을 두고 갈등을 겪기도 했다.
술루크가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매우 논쟁적이며, 내각 회의에 대한 공식 정부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 학자 머도 J. 매클로드는 술루크의 정책, 통치 방식, 상황 인식 등을 분석하며 그를 "뛰어난 지능, 현실주의, 실용주의, 그리고 뛰어난, 만약 가혹하다면 정치인이자 외교관"으로 평가했다. 또한 매클로드는 술루크의 애국심과 국내 안정을 강요하는 능력은 부인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1]
4. 1.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관계
술루크의 외교 정책은 아이티 정치와 주권에 대한 외세의 침략을 막는 데 집중되었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1844년 도미니카 독립 전쟁 이후 아이티로부터 독립한 도미니카 공화국이었다. 이는 22년간의 아이티 점령을 종식시킨 사건이었다. 술루크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백인 및 물라토 통치자들을 자신의 "천적"으로 여겼으며,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립이 아이티의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고 보았다.[8]이러한 인식 하에 술루크는 여러 차례 도미니카 공화국 침공을 시도했다. 1849년 첫 번째 침공에서는 400명의 도미니카 군대가 오코아에서 저항하자 아이티 군대가 퇴각하며 실패로 끝났다. 1850년의 두 번째 침공 시도는 영국, 프랑스, 미국의 외교적 반대로 무산되었다. 1855년, 술루크는 30,000명의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세 번째이자 마지막 침공을 감행했으나, 전투 시작과 함께 군대가 흩어지면서 또다시 실패했다.
4. 2. 미국과의 갈등
술루크는 나바사 섬의 영유권을 놓고 미국과 직접적인 갈등을 겪었다. 미국은 구아노가 발견되었다는 다소 의심스러운 이유를 내세워 아이티로부터 섬을 점령하였다. 술루크는 이러한 침략에 대응하여 군함을 섬으로 파견했지만, 미국이 채굴 작업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일부를 아이티에 보장하겠다고 약속하자 결국 군함을 철수시켰다.5. 몰락과 망명, 죽음
1858년, 파브르 제프라르 장군이 이끄는 혁명 세력에 의해 포스탱 술루크의 제정 통치는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군사적 패배와 정치적 고립 끝에 술루크는 1859년 초 퇴위하였고, 이후 자메이카로 망명했다. 그의 말년과 사망 장소에 대해서는 킹스턴에서 사망했다는 설과 아이티로 돌아와 프티고아브에서 사망했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5. 1. 제프라르의 쿠데타
1858년, 타바라 공작 파브르 제프라르 장군이 포스탱 술루크에 대한 혁명을 주도하였다. 그해 12월, 제프라르는 술루크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이티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다. 1858년 12월 20일 밤, 술루크는 아들과 충성스러운 추종자 에르네스트 루뱅, 장-바르 단 세 명만을 데리고 작은 배를 타고 포르토프랭스를 떠나 이틀 뒤 반란이 일어난 고나이브에 도착했다. 아이티 공화국이 다시 선포되었고, 1846년 헌법이 채택되었다.1858년 12월 23일, 조직된 부서 위원회는 포스탱 술루크를 해임하고 파브르 제프라르를 아이티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카프아이시앙과 아르티보니트 지역 전체가 공화국 복원에 동참했다. 그 결과, 술루크는 1859년 1월 15일 퇴위했다. 프랑스 공사관의 지원을 거부당한 술루크는 1859년 1월 22일 영국 군함을 타고 망명길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술루크와 그의 가족은 자메이카의 킹스턴에 도착하여 몇 년 동안 머물렀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킹스턴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지지만, 아이티 역사가 자크 니콜라스 레제는 그의 저서 ''아이티, 그녀의 역사와 그녀의 비방자들''에서 술루크가 실제로는 1867년 8월 아이티로 돌아온 후 프티고아브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5. 2. 망명과 죽음
1858년, 파브르 제프라르 장군이 주도한 혁명 세력은 포스탱 술루크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이티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다. 같은 해 12월 20일 밤, 술루크는 소수의 측근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수도 포르토프랭스를 떠나 이틀 뒤 반란이 일어난 고나이브에 도착했다. 이후 아이티 공화국이 다시 선포되었고, 1846년 헌법이 채택되었다.12월 23일, 부서 위원회는 술루크를 공식적으로 해임하고 파브르 제프라르를 아이티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카프아이시앙과 아르티보니트 지역 전체가 공화국 복원에 동참하면서 술루크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결국 그는 1859년 1월 15일에 퇴위했다. 프랑스 공사관으로부터 지원을 거부당한 술루크는 1859년 1월 22일, 영국 군함의 도움을 받아 망명길에 올랐다.
술루크와 그의 가족은 자메이카의 킹스턴에 도착하여 몇 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다. 그의 사망 장소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일부에서는 그가 킹스턴에서 사망했다고 전하지만, 아이티의 역사가 자크 니콜라스 레제는 그의 저서 Haïti, son histoire et ses détracteurs프랑스어에서 술루크가 실제로는 아이티로 돌아온 후 1867년 8월 프티고아브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6. 계승
포스탱 술루크는 아델리나와 결혼하여 딸 올리브 술루크를 낳았다. 황제는 또한 1850년에 아델리나의 딸 올리브를 양녀로 삼았다. 그녀는 전하라는 칭호와 공주 작위를 받았다. 셀리타는 페티옹빌 백작 장 필리프 뤼뱅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9] 황제에게는 형제 장조제프 술루크가 있었고, 그는 11명의 아들과 딸을 두었다.
1849년 9월 20일 헌법은 포스탱 1세 황제의 직계 혈통의 적자에게 황제의 지위를 세습하도록 규정했으며, 장자 상속의 원칙을 따르고 여성은 영구적으로 배제되었다. 황제는 형제의 자녀 또는 손자를 양자로 삼을 수 있었으며, 입양된 날짜부터 황실 가족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양자로 입적된 아들은 황제의 적자와 적통 아들 다음에 즉시 왕위 계승권을 누렸다.
장조제프의 장남 맹빌조제프 술루크 공[10]는 삼촌이 왕위에 오른 후 아이티 제국 공작이자 황위 계승자로 책봉되었다.[11] 그는 마리 달베르와 결혼하여 딸 마리 아델리나 술루크 "아이티 제국 공주"를 낳았다.[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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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The Soulouque Regime in Haiti, 1847–1859: A Reevalu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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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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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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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Notes From the Last Testament: The Struggle for Hai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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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Faustin Soulouque, Emperor of Haiti His Character and His Reign
1949-10
[9]
문서
Roman Catholic Church Kingston (Jamaica) Marriages 1839–1869: Act of marriage: Pierre Joseph Amitie Vil Lubin, native of Haiti, lawful son of His Lordship Earl Philippe Vil Lubin and by his wife, Elizabeth Ulcénie. Lord Amitie Vil Lubin, married on 12/26/1861 HSH Princess Genevieve Olive Soulouque, native of Haiti, lawful daughter of Emperor Faustin Elie Soulouque and Empress Adélina Lévêque. Witnesses: Alexandre Bravo, Charles Grant, widow Lubin, Amitie Lubin, widow of Louis Lubin, Elizabeth Grant, James Male, Jean Baptiste Vil Lubin, George Clermont, A.M. Lhoste, Felicite Faustin, Ameisima Amitie, Elina Mainvaille, L. Bedonet, Elizabeth Bourke, Caroline Crosswel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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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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