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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엔키르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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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라우엔키르헤는 15세기 뮌헨에 건설된 후기 고딕 양식의 대성당으로, 두 개의 돔이 특징적인 랜드마크이다. 12세기에 세워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를 대체하여 건설되었으며, 20년 만에 벽돌로 지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피해를 입었으나 복원되었고, 현재는 뮌헨 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으로 사용된다. 내부에는 다양한 예술 작품과 루드비히 4세 등 비텔스바흐 왕가의 묘가 있으며, 14세기부터 21세기에 걸쳐 주조된 10개의 종이 있다. 뮌헨 시는 프라우엔키르헤 탑보다 높은 건물을 짓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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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엔키르헤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프라우엔키르헤 뮌헨 - 페터스키르헤 타워에서 본 모습
프라우엔키르헤
위치독일 바이에른주 뮌헨 Frauenplatz 12
교단로마 가톨릭교회
웹사이트공식 웹사이트
지위공동 대성당
기능적 지위활동 중
건축가요르크 폰 할스바흐
건축 양식고딕 건축 르네상스 (돔)
건축 기간12세기 이전
실제: 1468년–1488년
완공 연도1524년 (돔 추가)
높이98.57m
길이109m
너비40m
관구뮌헨-프라이징 대교구
대주교라인하르트 마르크스 추기경
사제몬시뇰 클라우스 페터 프란츨
지휘자루치아 힐츠 (Domkapellmeisterin)
오르간 연주자루벤 슈투름
마르틴 벨젤 (보조 오르간 연주자, 2013–2021, 부 오르간 연주자, 2021–2022)
몬시뇰 한스 라이트너 (2003–2021)
종교
축성1494년
지리

2. 역사

뉘른베르크 연대기에서 본 뮌헨 전경, 중앙의 프라우엔키르헤


구 프라우엔키르헤와 신 프라우엔키르헤의 평면도


12세기에 뮌헨의 첫 번째 성벽 옆에 후기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교회가 세워졌다. 이 교회는 알터 페터 교회에 이어 도시의 두 번째 교구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후기 고딕 건축 양식의 대성당은 지기스문트 대공과 뮌헨 시민들의 위임을 받아 15세기에 건설되었다.

요르크 폰 할스바흐가 대성당을 건설하였으며, 1468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479년에 자금 고갈로 교황 식스토 4세면죄부를 부여했다.

1919년,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의 지도자 오이겐 레비네는 프라우엔키르헤를 "혁명 사원"으로 선포했다.[6]

제2차 세계 대전 후반, 연합군의 공습으로 대성당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교회 지붕이 붕괴되었고, 탑 하나가 크게 파손되었으며, 내부에 보관되어 있던 대부분의 역사적 유물들이 폭격으로 파괴되거나 잔해와 함께 사라졌다. 전쟁 직후 복원 작업이 시작되어 1994년에 완료되었다.[7]

2. 1. 건립 배경

12세기 뮌헨의 첫 번째 성벽 옆에 후기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교회가 세워졌다. 이 교회는 알터 페터에 이어 도시의 두 번째 교구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후기 고딕 건축 양식의 대성당은 지기스문트 대공과 뮌헨 시민들의 위임을 받아 15세기에 건설되었다.

요르크 폰 할스바흐가 대성당을 불과 20년 만에 건설하였다. 인근에 석재 채석장이 없고 재정적인 이유로 벽돌이 건축 자재로 선택되었다. 1468년 건설이 시작되었고, 1479년 자금 고갈로 교황 식스토 4세면죄부를 부여했다.[5] 1488년 두 탑(높이 98m)이 완공되었고, 1494년 교회가 봉헌되었다. 고딕 양식 특유의 높은 개방형 첨탑을 세울 계획이었으나, 재정난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고 1525년까지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었다.

독일 역사가 하르트만 셰델은 미완성 탑이 있는 뮌헨의 모습을 ''뉘른베르크 연대기''에 담았다. 이후 빗물이 탑 천장의 임시 지붕을 정기적으로 침투하자, 1525년 예산 친화적인 설계로 탑을 완공했다. 이 디자인은 후기 비잔틴 건축 양식을 따랐으며, 솔로몬의 성전으로 잘못 알려진 예루살렘의 바위 돔을 본뜬 것으로 추정된다.[5] 각 탑 꼭대기의 돔은 교회를 뮌헨의 독특한 랜드마크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건물 부피는 약 200000m3이며, 원래 20,000명이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나중에 일반인을 위한 신도석이 도입되었다. 15세기 후반 뮌헨 인구가 13,000명에 불과했고 알터 페터에 이미 교구가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 정도 규모의 두 번째 교회가 도시에 세워진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2. 2. 건설 과정

12세기에 뮌헨의 첫 번째 성벽 옆에 후기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교회가 세워졌다. 이 교회는 알터 페터 교회에 이어 도시의 두 번째 교구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후기 고딕 건축 양식의 대성당은 지기스문트 대공과 뮌헨 시민들의 위임을 받아 15세기에 건설되었다.

대성당은 요르크 폰 할스바흐에 의해 불과 20년 만에 세워졌다. 인근에 석재 채석장이 없고 재정적인 이유로 벽돌이 건축 자재로 선택되었다. 1468년에 건설이 시작되었고, 1479년에 자금이 고갈되자 교황 식스토 4세면죄부를 부여했다.

저녁의 프라우엔키르헤


두 탑은 모두 높이가 98m가 조금 넘으며, 1488년에 완공되었고 교회는 1494년에 봉헌되었다. 고딕 양식의 전형적인 높은 개방형 첨탑을 세울 계획이 있었지만, 당시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계획을 실현할 수 없었다. 탑은 1525년까지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다.

독일 역사가 하르트만 셰델은 미완성 탑이 있는 뮌헨의 모습을 그의 유명한 ''뉘른베르크 연대기''에 담았다. 빗물이 탑 천장의 임시 지붕을 정기적으로 침투했기 때문에, 탑은 1525년에 완공되었지만 예산 친화적인 설계를 사용했다. 이 새로운 디자인은 후기 비잔틴 건축 양식에서 모델을 따왔으며, 예루살렘의 바위 돔을 본뜬 것일 수 있다.[5] 각 탑 꼭대기에 있는 돔은 교회를 뮌헨의 독특한 랜드마크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건물의 부피는 약 200000m3이고 원래 20,000명의 사람들이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일반 사람들을 위한 신도석이 도입되었다. 15세기 후반 뮌헨의 인구가 13,000명에 불과했고 이미 알터 페터에 교구가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 정도 규모의 두 번째 교회가 도시에 세워졌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2. 3. 탑의 완공과 독특한 디자인

두 탑은 모두 높이가 98m가 조금 넘으며, 1488년에 완공되었고 교회는 1494년에 봉헌되었다. 고딕 양식의 전형적인 높은 개방형 첨탑을 세울 계획이었지만, 당시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계획을 실현할 수 없었다. 탑은 1525년까지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다.[5]

독일 역사가 하르트만 셰델은 미완성 탑이 있는 뮌헨의 모습을 그의 유명한 ''뉘른베르크 연대기''(셰델의 세계 연대기)에 담았다. 빗물이 탑 천장의 임시 지붕을 정기적으로 침투했기 때문에, 탑은 1525년에 완공되었지만 예산 친화적인 설계를 사용했다. 이 새로운 디자인은 후기 비잔틴 건축 양식에서 모델을 따왔으며, 솔로몬의 원래 성전으로 잘못 여겨진 예루살렘의 바위 돔을 본뜬 것일 수 있다.[5] 각 탑 꼭대기에 있는 돔은 교회를 뮌헨의 독특한 랜드마크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2. 4.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 시기

1919년,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의 지도자 오이겐 레비네는 프라우엔키르헤를 "혁명 사원"으로 선포했다.[6]

2. 5. 제2차 세계 대전과 복원

제2차 세계 대전 후반, 연합군의 공습으로 대성당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교회 지붕이 붕괴되었고, 탑 하나가 크게 파손되었으며, 내부에 보관되어 있던 대부분의 역사적 유물들이 폭격으로 파괴되거나 잔해와 함께 사라졌다.[7] 전쟁 직후 복원 작업이 시작되어 1994년에 완료되었다.[7]

3. 건축

프라우엔키르헤는 고딕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단 20년 만에 완공되었다. 화려한 고딕 장식 없이 단순하게 설계되었고, 부벽(버팀벽)을 건물 안쪽에 숨겨 더욱 거대해 보이도록 하였다. 두 개의 탑은 배터 형태의 독특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으며, "적을수록 좋다"는 원칙에 따라 현대적인 외관을 보여준다.[8]

원래 쾰른 대성당처럼 탑 꼭대기에 뾰족한 첨탑을 세울 계획이었으나, 자금 부족으로 르네상스 시대에 돔 형태의 지붕이 건설되었다. 이 돔은 건물의 원래 건축 양식과는 다르지만, 현재는 뮌헨의 독특한 랜드마크가 되었다. 2004년 이후 뮌헨 시내에서는 프라우엔키르헤 탑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다.[9]

3. 1. 외관

프라우엔키르헤, 탑을 올려다본 모습


2015년 재건축


프라우엔키르헤는 20년 만에 붉은 벽돌로 고딕 건축 양식으로 건설되었다. 건물은 화려한 고딕 장식이 없고, 부벽이 내부로 이동하여 숨겨져 있어 매우 단순하게 설계되었다. 이는 두 개의 탑(배터)의 특별한 디자인과 함께 강력한 구조를 더욱 거대하게 보이게 하며 "적을수록 좋다"는 원칙에 따라 거의 현대적인 외관을 제공한다.

앱스를 둘러싼 예배당이 있는 후기 고딕 양식의 벽돌 건물은 길이 109m, 너비 40m, 높이 37m이다. 두 개의 탑은 높이가 정확히 1미터 차이가 난다는 널리 퍼진 전설과는 달리, 북쪽 탑은 98.57m인 반면 남쪽 탑은 98.45m로 불과 12cm 차이로 거의 동일하다. 원래 디자인은 쾰른 대성당처럼 탑 꼭대기에 뾰족한 첨탑을 세우는 것이었지만, 자금 부족으로 인해 건설되지 못했다. 대신 두 개의 돔은 르네상스 시대에 건설되었으며 건물의 건축 양식과 일치하지 않지만 뮌헨의 독특한 랜드마크가 되었다. 약 200,000 m³의 폐쇄 공간과 아치 높이까지 150,000 m³의 공간을 갖춘 이 건물은 일반적인 홀 교회 중 두 번째로 크며, 알프스 북쪽의 벽돌 교회 중에서는 (그단스크의 성 마리아 교회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크다.[8]

3. 2. 규모

프라우엔키르헤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고딕 건축 양식의 건물로, 화려한 장식 없이 단순하게 설계되었다. 부벽이 건물 안쪽에 숨겨져 있고, 두 탑의 독특한 디자인 덕분에 더욱 거대해 보인다.

앱스를 둘러싼 예배당이 있는 후기 고딕 양식의 벽돌 건물은 길이 109m, 너비 40m, 높이 37m이다. 두 탑의 높이는 북쪽 탑이 98.57m, 남쪽 탑이 98.45m로, 12cm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8] 원래 디자인은 쾰른 대성당처럼 뾰족한 첨탑을 세우는 것이었지만, 자금 부족으로 르네상스 시대에 두 개의 돔이 건설되었다. 이 돔은 건물의 원래 양식과는 다르지만, 현재는 뮌헨의 상징이 되었다.

프라우엔키르헤는 약 200,000m³의 공간을 가지고 있으며, 알프스 북쪽의 벽돌 교회 중에서는 그단스크의 성 마리아 교회 다음으로 크다.[8]

2004년에 통과된 법에 따라 뮌헨 시내에서는 프라우엔키르헤 탑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다.[9]

3. 3. 뮌헨 스카이라인과의 관계

프라우엔키르헤는 20년 만에 붉은 벽돌로 고딕 건축 양식으로 건설되었다. 건물은 화려한 고딕 장식이 없고, 부벽이 내부로 이동하여 숨겨져 있어 매우 단순하게 설계되었다. 이는 두 개의 탑의 특별한 디자인(배터)과 함께 강력한 구조를 더욱 거대하게 보이게 하며 "적을수록 좋다"는 원칙에 따라 거의 현대적인 외관을 제공한다.[8]

2004년에 통과된 법에 따라 뮌헨 시 경계 내에서는 프라우엔키르헤 탑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다.[9]

4. 내부

가톨릭 미사가 정기적으로 거행되며, 프라우엔키르헤는 여전히 교구 교회로 사용되고 있다.

4. 1. 구조

이 성당은 남부 독일에서 가장 큰 홀 교회 중 하나이다. 홀은 22개의 기둥(양쪽에 11개, 22m)의 이중 열로 3개의 구역(주 제단과 동일한 높이의 두 개의 측면 통로, 31m)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 기둥들은 공간을 감싸는 데 도움을 준다. 이 기둥들은 부피가 크지만 인상적인 높이와 건물의 높이 대 너비 비율로 인해 상당히 날씬해 보인다. 아치는 하인리히 폰 슈타우빙이 설계했다.

정문에서 보면 창문이 없고, 아치 사이에 빛이 비치는 반투명한 "벽"만 보이며, 기둥이 줄지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당의 공간적 효과는 본당 입구의 사각형 타일에 있는 발자국, 즉 소위 "악마의 발자국"에 대한 전설과 관련이 있다.

페터 칸디트, 에라스무스 그라써, 얀 폴라크, 한스 라인베르거, 한스 크룸퍼, 이그나츠 귄터와 같은 유명 예술가들의 14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풍부한 미술품 컬렉션이 마지막 복원 이후 다시 성당 내부를 장식하고 있다.[10] 주요 명소로는 고딕 양식의 본당, 이전 교회에서 제작된 일부 고딕 양식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 루트비히 4세의 묘비 기념물 등이 있다. 에라스무스 그라써는 매일의 합창 기도를 위해 1495년에서 1502년 사이에 사도와 예언자의 흉상과 작은 조각상으로 된 성가대석을 만들었는데, 이 조각상들은 바로크 시대와 고딕 리바이벌 시대의 변형에서 살아남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불탔고, 조각상만 옮겨 보존되었다. 따라서 프라우엔키르헤는 독일에서 후기 고딕 시대의 인물 조각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성소의 시각적 종점은 로만 안톤 보스가 1780년에 이전 설교단의 공명판을 위해 제작한 성모 마리아 조각상이 있는 기둥으로 형성된다. 페터 칸디트가 1620년에 완성한 이전의 높은 제단 그림은 성구실 북쪽 벽 입구로 옮겨졌으며, 성모 승천을 묘사하고 있다.

4. 2. 예술 작품

뮌헨 프라우엔키르헤 내부. 성당에 들어서면 창문 하나만 보인다.


페터 칸디트의 제단화, ''성모 승천''(1620년).


페터 칸디트, 에라스무스 그라써, 얀 폴라크, 한스 라인베르거, 한스 크룸퍼, 이그나츠 귄터 등 유명 예술가들의 14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풍부한 미술품 컬렉션이 마지막 복원 이후 다시 성당 내부를 장식하고 있다.[10] 주요 명소로는 고딕 양식의 본당, 이전 교회에서 제작된 일부 고딕 양식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 루트비히 4세의 묘비 기념물 등이 있다.

에라스무스 그라써는 1495년에서 1502년 사이에 매일의 합창 기도를 위해 사도와 예언자의 흉상과 작은 조각상으로 된 성가대석을 만들었다. 이 조각상들은 바로크 시대와 고딕 리바이벌 시대의 변형에서 살아남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불탔고 조각상만 옮겨 보존되었다. 따라서 프라우엔키르헤는 독일에서 후기 고딕 시대의 인물 조각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성소의 시각적 종점은 로만 안톤 보스가 1780년에 이전 설교단의 공명판을 위해 제작한 성모 마리아 조각상이 있는 기둥으로 형성된다. 페터 칸디트가 1620년에 완성한 이전의 높은 제단 그림은 성구실 북쪽 벽 입구로 옮겨졌으며, 성모 승천을 묘사하고 있다.

4. 3. 악마의 발자국 (Teufelstritt)

프라우엔키르헤 정문에서 보면 창문이 없고, 아치 사이로 빛이 비치는 반투명한 "벽"만 보이며, 기둥이 줄지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당의 공간적 효과는 본당 입구의 사각형 타일에 있는 발자국, 즉 소위 "악마의 발자국"에 대한 전설과 관련이 있다.[10]

악마의 발자취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내부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지만, 입구에 있는 ''Teufelstritt''(악마의 발자취)는 살아남은 명소 중 하나이다. 이는 발자국 모양의 검은 자국으로, 전설에 따르면 악마가 할스바흐가 지은 '창문 없는' 교회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조롱했을 때 서 있던 자리라고 한다. 바로크 시대에는 높은 제단이 교회 맨 끝에 있는 창문을 가렸는데, 방문객들은 입구 홀에 서서 볼 수 있었다.

전설의 또 다른 버전에 따르면, 악마는 창문이 없는 것을 조건으로 교회의 건설 자금을 지원하기로 건축가와 거래했다. 하지만, 영리한 건축가는 악마가 현관에 서 있는 지점에서 창문이 보이지 않도록 기둥을 배치하여 악마를 속였다. 악마는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고 이미 봉헌된 교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악마는 현관에 서서 격분하여 발을 구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오늘날 교회 입구에서 보이는 검은 발자국이 남게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악마는 밖으로 달려나가 교회 주변에 격렬하게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자신의 악령을 나타냈다고 한다.[11]

또 다른 버전의 전설은 악마가 건설 중인 교회를 보기 위해 바람을 타고 왔다는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는 바람을 잊은 채 성큼성큼 걸어갔고, 악마가 다시 교회를 되찾으러 오는 날까지 교회 주변에 바람이 계속 불 것이라고 한다.

5. 매장

뮌헨-프라이징 대교구의 대주교와 비텔스바흐 왕가의 묘가 이곳에 있다.

한스 크룸퍼 제작 루트비히 4세의 켄타프


인물재위 기간
루트비히 4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1294년–1347년
루트비히 5세 (바이에른 공작)1347년–1361년
슈테판 2세 (바이에른 공작)1347년–1375년
요한 2세 (바이에른 공작)1375년–1397년
에른스트 (바이에른 공작)1397년–1438년
빌헬름 3세 (바이에른 공작)1397년–1435년
아돌프 (바이에른 공작)1435년–1441년
지기스문트 (바이에른 공작)1460년–1467년
알브레히트 4세 (바이에른 공작)1467년–1508년
빌헬름 4세 (바이에른 공작)1508년–1550년
알브레히트 5세 (바이에른 공작)1550년–1579년
루트비히 3세 (바이에른)1912년–1918년


6. 오르간

현재 오르간은 1993년부터 1994년까지 게오르그 얀에 의해 제작되었다. 서쪽 갤러리에 있는 대형 오르간(1994년)[12]은 95개의 음색(140개의 랭크, 7,165개의 파이프)을 가지고 있으며, 뤼크포지티브 부서 뒤의 트래커 콘솔 및 하단 성가대 갤러리에 있는 두 번째 이동식 전기 콘솔, 이렇게 두 개의 4단 매뉴얼 콘솔에서 연주할 수 있다. 성가대 오르간(1993년)[13]은 제단 계단 근처, 오른쪽 본당 갤러리에 위치해 있다. 36개의 음색(53개의 랭크)을 가지고 있으며, 3단 매뉴얼 트래커 콘솔과 서쪽 갤러리의 두 개의 주요 콘솔에서 연주할 수 있다. 두 오르간을 합하면 131개의 음색(193개의 랭크, 9,833개의 파이프)을 가지고 있으며, 뮌헨에서 가장 큰 오르간 앙상블이다.[14]

7. 종

두 개의 탑에는 14, 15, 17, 21세기에 주조된 10개의 종이 있다. 이 종들의 조합은 유럽에서 독특하고 비할 데가 없다. "수산나"(Susanna) 또는 "살베글로케"(Salveglocke)라고 불리는 가장 무거운 종은 바이에른에서 가장 큰 종 중 하나이다. 이 종은 1490년 알브레히트 4세의 명령에 따라 한스 에른스트가 주조했다.[16]

프라우엔키르헤의 종
번호소리이름제작직경(mm)질량(kg)음높이
1
수산나(살베글로케)1490년, 한스 에른스트, 레겐스부르크2,060≈8,000a0+3북쪽
2
프라우엔글로케1617년, 바르톨로메우스 벵글레, 뮌헨1,665≈3,000c1+6북쪽
3
베노글로케1617년, 바르톨로메우스 벵글레, 뮌헨1,475≈2,100d1+7남쪽
4
빈클린1451년, 마이스터 파울루스, 뮌헨1,420≈2,000e♭1+15북쪽
5
프레젠츠글로케1492년, 울리히 폰 로젠, 뮌헨1,320≈1,600e1+9남쪽
6
칸타보나2003년, 루돌프 페르너, 파사우1,080870g1+12남쪽
7
프륌메스글로케1442년, 마이스터 파울루스, 뮌헨1,050≈800a1+10남쪽
8
스페치오사2003년, 루돌프 페르너, 파사우890540b1+10남쪽
9
미하엘스글로케2003년, 루돌프 페르너, 파사우840440c2+12남쪽
10
클링글(합창단 종)14세기, 익명740≈350e♭2+13남쪽


8. 기타

교회의 북쪽 탑에는 1980년대 중반부터 독일 대외 정보국 BND 및 다른 비밀 정보국의 무선 중계소가 있었다.[17] 이 중계소는 2018년에 철거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Frauenkirche – Dom zu unserer lieben Frau https://erlebebayern[...] 2020-06-24
[2] 웹사이트 Hochhäuser in München: Keiner baut über 100 Meter https://www.sueddeut[...] 2017-03-13
[3] 웹사이트 Aussichtspunkt: Südturm der Frauenkirche wieder geöffnet - muenchen.de https://www.muenchen[...]
[4] 웹사이트 Cathedral to our lady http://www.munich-in[...] Munich-info 2010-12-21
[5] 웹사이트 Building History (in German) http://www.muenchner[...] Der Münchner Dom 2010-12-21
[6] 서적 Modernism at the Barricades: Aesthetics, Politics, Utopia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7] 웹사이트 Munich churches:Frauenkirche http://www.mytravelm[...] My Travel Munich 2010-12-21
[8] 웹사이트 Volumen (Kubatur) der Münchener Frauenkirche https://www.gebaut.e[...] 2024-01-22
[9] 웹사이트 So schön ist Münchens Frauenkirche https://www.muenchen[...] 2019-10-18
[10] 문서 Das Hochaltarbild https://www.muenchne[...]
[11] 웹사이트 Frauenkirche http://www.destinati[...] Destination Munich 2010-12-21
[12] 웹사이트 Jann Opus 199, München, Liebfrauendom, Hauptorgel (in German) https://www.jannorge[...] 2018-02-01
[13] 웹사이트 Jann Opus 197, München, Liebfrauendom, Chororgel (in German) https://www.jannorge[...] 2018-02-01
[14] 웹사이트 Website of Hans Leitner, cathedral organist from 2003-2021 (in German) http://www.hans-leit[...] 2022-04-08
[15] 간행물 Die Orgeln der Münchner Frauenkirche und ihre Organisten Schnell & Steiner 2008
[16] 문서 Ernst, Hans
[17] 뉴스 München - BND-Technik im Glockenturm der Frauenkirche https://www.sueddeut[...] 201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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