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루트비히 3세 (바이에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루트비히 3세는 1913년부터 1918년까지 바이에른의 마지막 국왕이었다. 그는 바이에른의 섭정 루이트폴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참전했다. 1912년 부친의 사망으로 섭정직을 승계한 후, 1913년 사촌 오토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편에 섰으나, 전쟁 말 독일 혁명으로 인해 1918년 퇴위하고 망명했다. 이후 1921년 헝가리에서 사망했으며, 뮌헨 프라우엔 교회에 안치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바이에른의 섭정 - 마리아 아나 폰 외스터라이히 여대공 (1610년)
    마리아 아나 폰 외스터라이히 여대공은 페르디난트 2세의 딸로 태어나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여 바이에른 선제후비가 되었으며, 남편 사후 아들의 섭정을 맡아 바이에른 정치에 참여하다가 뮌헨에서 사망했다.
  • 바이에른의 섭정 - 루이트폴트 폰 바이에른 섭정 왕자
    루이트폴트 폰 바이에른 섭정 왕자는 바이에른 왕국의 왕족으로, 조카들의 섭정 기간인 "프린츠레겐텐차이트"에 예술과 문화를 부흥시키고 뮌헨을 유럽의 주요 문화 중심지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 1급 무공훈장 (바이에른) 수훈자 - 빌헬름 카를 폰 우라흐 공작
    빌헬름 카를 폰 우라흐 공작은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우라흐 공작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우라흐 공작이 되었고, 알바니아와 리투아니아 왕위 후보에 거론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는 독일군 장군으로 참전했다.
  • 1급 무공훈장 (바이에른) 수훈자 - 아돌프 프리드리히 추 메클렌부르크 대공자
    아돌프 프리드리히 추 메클렌부르크 대공자는 독일 탐험가이자 식민지 총독, IOC 위원으로서 중앙아프리카 탐험, 독일령 토골란트 총독 재임, 발트 연합 공국 공작 추대 시도, IOC 위원 활동, 독일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 역임, 학문적 기여 등 다방면으로 활동했다.
  • 제1차 세계 대전의 군주 - 메흐메트 6세
    메흐메트 6세는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술탄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에 즉위하여 제국의 몰락을 겪고 튀르키예 독립 전쟁 이후 폐위되어 망명지에서 사망했다.
  • 제1차 세계 대전의 군주 - 알베르 1세 (벨기에)
    알베르 1세는 1909년부터 1934년까지 벨기에 국왕으로 재위하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침공에 저항했고, 전후 국가 재건, 남성 보통 선거권 도입, 자연 보호에 헌신했으나 등반 중 사고로 사망했다.
루트비히 3세 (바이에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루트비히 3세, 1910년대
이름루트비히 3세
독일어 이름Ludwig Ⅲ.
전체 이름루트비히 루이트폴트 요제프 마리아 알로이스 알프리트 폰 비텔스바흐
출생일1845년 1월 7일
출생지뮌헨, 바이에른 왕국, 독일 연방
사망일1921년 10월 18일
사망지샤르바르, 헝가리 왕국
매장일1921년 11월 5일
매장지뮌헨 프라우엔키르헤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서명Ludwig III of Bavaria signature.svg
통치
칭호바이에른 국왕
재위 기간1913년 11월 5일 – 1918년 11월 13일
즉위일1913년 11월 5일
전임자오토
후임자군주제 폐지
섭정게오르크 폰 헤르틀링
오토 폰 단들
계승바이에른 국왕
가문
왕가비텔스바흐가
아버지루이트폴트 폰 바이에른 섭정 왕자
어머니오스트리아 대공비 아우구스테 페르디난데
배우자 및 자녀
배우자마리아 테레사 폰 에스터라이히-에스테 (1868년 2월 20일 결혼, 1919년 2월 3일 사망)
자녀루프레히트 왕세자
아델군데, 호엔촐레른 공비
마리아, 칼라브리아 공작 부인
카를 왕자
프란츠 왕자
마틸데, 작센코부르크고타 공비
볼프강 왕자
힐데가르데 공주
노트부르가 공주
빌트루드, 우라흐 공작 부인
헬름트루드 공주
디틀린데 공주
군델린데, 프라이징-리히테네크-모스 백작 부인

2. 초기 생애

젊은 시절 루트비히, 1868년경


루트비히는 뮌헨에서 바이에른의 섭정 루이트폴트와 그의 아내인 오스트리아 대공녀 아우구스테 페르디난데(토스카나 대공 레오폴트 2세의 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루이 14세와 윌리엄 정복자의 후손이었다. 루트비히는 그의 할아버지인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1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루트비히는 어린 시절 뮌헨 레지덴츠의 선제후 방들과 비텔스바흐 궁전에서 지냈으며, 열 살 때 가족과 함께 로이히텐베르크 궁전으로 이사했다.

2. 1. 출생과 가족



루트비히는 뮌헨에서 바이에른의 섭정 루이트폴트와 그의 아내인 오스트리아 대공녀 아우구스테 페르디난데(토스카나 대공 레오폴트 2세의 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윌리엄 정복자의 후손이었다. 피렌체 출신인 아우구스테는 네 자녀에게 항상 이탈리아어로 말했다. 루트비히는 그의 할아버지인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1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868년 2월 20일, 그는 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족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했다.

2. 2. 교육 및 군 경력



루트비히는 1852년부터 1863년까지 페르디난트 폰 말라제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1861년 16세의 나이에 그의 삼촌인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2세 국왕으로부터 제6 예거 대대의 소위로 임관되면서 군 경력을 시작했다. 1년 후 그는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열여덟 살에 왕가의 왕자로서 바이에른 입법부 상원의원이 되었다.

1866년 바이에른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루트비히는 중위 계급이었다. 그는 헬름슈타트 전투에서 허벅지에 총알을 맞고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그가 군대에 대해 다소 반감을 갖게 된 데 기여했다. 그는 바이에른 군무공훈 훈장 1등 기사십자훈장을 받았다.

3. 결혼과 자녀

1867년 6월, 루트비히는 사촌인 오스트리아의 마틸다 대공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루트비히는 마틸다의 18세 된 이복 사촌인 오스트리아-에스테의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녀를 만났다. 1868년 2월 20일, 두 사람은 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교회에서 결혼했다.

루트비히의 삼촌은 그리스의 오토 1세 국왕이었으나 1862년에 폐위되었다. 루트비히는 여전히 그리스 왕위 계승 순위에 있었지만, 왕위를 계승하려면 로마 가톨릭 신앙을 버리고 그리스 정교회 신자가 되어야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삼촌인 모데나의 프란체스코 5세 공작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결혼 조건으로 루트비히가 그리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자녀들을 가톨릭 신앙으로 양육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1843년 그리스 헌법은 그리스 국왕이 동시에 다른 나라의 통치자가 되는 것을 금지했다. 그 결과, 루트비히의 남동생 레오폴트가 아버지 사후 그리스 왕위 계승권을 물려받았다.

결혼으로 루트비히는 부유해졌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로부터 헝가리의 샤르바르 영지와 모라비아(현재 체코의 이바노비체 나 하네)의 에이바노비츠 영지를 상속받았다. 이 수입으로 루트비히는 바이에른의 로이트슈테텐에 영지를 구입했고, 이후 바이에른에서 가장 크고 수익성이 높은 영지 중 하나로 확장했다. 루트비히는 농업에 대한 관심 때문에 "밀리바우어"(낙농업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루트비히와 마리아 테레지아는 대부분 로이트슈테텐에 거주했으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통해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출생사망배우자
루프레히트1869년 5월 18일1955년 8월 2일바이에른의 마리아 가브리엘 공녀(1900년 결혼, 자녀 4명)
아델군데1870년 10월 17일1958년 1월 4일호엔촐레른의 빌헬름 왕자(1915년 결혼)
마리아 루트비가1872년 7월 6일1954년 6월 10일부르봉-시칠리아의 페르디난트 피우스 왕자(1897년 결혼, 자녀 6명)
카를1874년 4월 1일1927년 5월 9일
프란츠1875년 10월 10일1957년 1월 25일크로이의 이사벨라 안토니아 공녀(1912년 결혼)
마틸데1877년 8월 17일1906년 8월 6일작센-코부르크고타의 루트비히 왕자(1900년 결혼, 자녀 2명)
볼프강1879년 7월 2일1895년 1월 31일
힐데가르데1881년 3월 5일1948년 2월 2일
노트부르가1883년 3월 19일1883년 3월 24일
빌트루트1884년 11월 10일1975년 3월 28일우라흐의 빌헬름 공작(1924년 결혼)
헬름트루트1886년 3월 22일1977년 6월 23일
디틀린데1888년 1월 2일1889년 2월 15일
군델린데1891년 8월 26일1983년 8월 16일프라이징-리히텐에크-모스의 요한 게오르크 백작(1919년 결혼, 자녀 2명)



1875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삼촌 프란체스코 5세가 사망하면서 자코바이트 계승권을 상속받아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자코바이트들은 그녀를 "메리 4세와 3세 여왕" 또는 "메리 3세 여왕"이라고 불렀다.[1]

4. 바이에른 섭정 (1912-1913)

1912년 12월 12일, 루트비히의 아버지 루이트폴트가 사망했다. 루이트폴트는 그의 조카인 루트비히 2세 국왕의 퇴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다른 조카인 오토 왕을 위해서도 섭정을 수행했다. 오토는 1886년부터 명목상 국왕이었지만, 1883년부터 의료 감독하에 있었고, 그가 적극적으로 통치할 정신적 능력을 갖추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오랫동안 알려져 있었다. 루트비히 3세는 즉시 아버지를 이어 섭정이 되었다.

거의 즉시, 언론과 사회의 특정 세력들은 루트비히가 스스로 왕위에 오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바이에른 의회는 당시 회기 중이 아니었고, 1913년 9월 29일까지 회합하지 않았다.

5. 바이에른 국왕 (1913-1918)

1912년 아버지 루이트폴트가 사망하면서 섭정을 계승한 루트비히 3세는, 이듬해 헌법 개정을 통해 오토 1세를 폐위시키고 바이에른 국왕으로 즉위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루트비히 3세는 베를린에 공식 서한을 보내 바이에른의 연대를 표명했다. 이후 루트비히 3세는 알자스(Alsace)와 벨기에의 앤트워프(Antwerp)시를 병합하여 바이에른이 바다로 접근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의 숨겨진 목표는 승전 후 독일 제국(German Empire) 내에서 프로이센(Prussia)과 바이에른 간의 권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1]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루트비히 3세에게 입대 허가를 요청하여 바이에른 군대에 입대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히틀러의 회고록 나의 투쟁(Mein Kampf)에 기반한 것으로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있다. 역사가 이언 커쇼(Ian Kershaw)는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고려할 때, 이 이야기는 관료적인 절차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지적하며, 오히려 관료적 실수로 인해 히틀러가 입대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2][3]

70세의 루트비히 3세 초상화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독일의 상황이 점차 악화되자, 게오르크 폰 헤어틀링(Georg von Hertling)은 독일 총리 겸 프로이센 총리가 되었고, 오토 리터 폰 단들(Otto Ritter von Dandl)이 1917년 11월 11일 바이에른 총리와 동등한 직책인 "왕실 가정 및 외부 장관"이자 "장관회의 의장"이 되었다. 프로이센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였다는 비난을 받은 루트비히 3세는 전쟁 중 인기가 점점 떨어졌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독일 혁명이 바이에른에서 발발했고, 1918년 11월 2일, 루트비히 3세는 정비례 대표제(proportional representation) 도입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헌법 개혁을 승인하고, 헌정 군주제를 의회 군주제로 전환했다. 그러나 11월 7일, 그는 가족과 함께 뮌헨을 떠나 잘츠부르크(Salzburg) 근처 아니프 궁전(Anif Palace)으로 피신해야 했다.[4]

1918년 11월 12일, 휴전 협정 다음 날, 오토 리터 폰 단들(Otto Ritter von Dandl) 총리는 루트비히 3세를 설득하여 아니프 선언(Anif declaration)을 발표하도록 했다. 이 선언에서 루트비히 3세는 모든 공직자들의 충성 맹세를 해제하고, 더 이상 정부를 이끌 수 없다고 밝혔다. 쿠르트 아이즈너(Kurt Eisner)가 이끄는 새 공화주의(republicanism) 정부는 이를 퇴위로 해석했고, 이는 738년간 이어진 비텔스바흐 가문(House of Wittelsbach)의 바이에른 통치를 종식시켰다.[4]

5. 1. 통치 스타일

루트비히 3세의 통치 기간은 짧았지만, 보수적인 성향과 가톨릭 사회 교리, 특히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1] 그는 1912년 루이트폴트 섭정에 의해 임명된 게오르크 폰 헤어틀링(Georg von Hertling) 총리를 유임시켰으며, 뮌헨 레지덴츠(Munich Residenz) 대신 비텔스바흐 궁전(Wittelsbacher Palais)에서 주로 생활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루트비히 3세는 베를린에 공식 서한을 보내 바이에른의 연대를 표명했다. 그는 나아가 바이에른의 영토 확장을 주장했는데, 알자스(Alsace)와 벨기에의 앤트워프(Antwerp)를 합병하여 바다로의 접근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승전 후 독일 제국(German Empire) 내에서 프로이센(Prussia)과 바이에른 간의 권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1]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루트비히 3세에게 입대 허가를 요청하여 바이에른 군대에 입대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히틀러의 회고록 나의 투쟁(Mein Kampf)에 기반한 것으로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있다.[1] 역사학자 이언 커쇼(Ian Kershaw)는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고려할 때, 이 이야기는 관료적인 절차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지적하며, 오히려 관료적 실수로 인해 히틀러가 입대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2][3]

1917년, 전쟁으로 독일의 상황이 악화되면서 헤어틀링은 독일 총리 겸 프로이센 총리가 되었고, 오토 리터 폰 단들(Otto Ritter von Dandl)이 바이에른 총리직을 승계했다. 루트비히 3세는 프로이센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으로 비판받으며 점차 인기를 잃어갔다. 전쟁 말, 독일 혁명이 바이에른에서 발발하면서 그의 통치는 위기를 맞았다.

1918년 11월 2일, 루트비히 3세는 정비례 대표제(proportional representation) 도입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헌법 개혁을 승인하고, 헌정 군주제를 의회 군주제로 전환했다. 그러나 11월 7일, 그는 가족과 함께 뮌헨을 떠나 잘츠부르크(Salzburg) 근처 아니프 궁전(Anif Palace)으로 피신해야 했다.[4]

11월 12일, 오토 리터 폰 단들(Otto Ritter von Dandl) 총리는 루트비히 3세에게 아니프 선언(Anif declaration)을 발표하도록 설득했다. 이 선언에서 루트비히 3세는 모든 공직자들의 충성 맹세를 해제하고, 더 이상 정부를 이끌 수 없다고 밝혔다. 쿠르트 아이즈너(Kurt Eisner)가 이끄는 새 공화주의(republicanism) 정부는 이를 퇴위로 해석했고, 이는 738년간 이어진 비텔스바흐 가문(House of Wittelsbach)의 바이에른 통치를 종식시켰다.[4]

5. 2.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루트비히 3세는 바이에른의 연대를 표명하기 위해 베를린에 공식 서한을 보냈다. 이후 루트비히 3세는 바이에른을 위해 알자스(Alsace)와 벨기에의 앤트워프(Antwerp)시를 합병하여 바다가 영토확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숨겨진 목표는 승전 후 독일 제국(German Empire) 내에서 프로이센(Prussia)과 바이에른 간의 권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1]

독일의 선전포고 1~2일 후, 루트비히 3세는 25세의 오스트리아인으로부터 바이에른 군대(Bavarian Army)에 입대 허가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받았는데, 이 청원은 즉시 승인되었고,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바이에른 군대에 입대하여 제16 예비 바이에른 보병 연대에 배치되어 복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히틀러의 회고록 나의 투쟁(Mein Kampf)에 근거한 것으로, 역사가 이언 커쇼(Ian Kershaw)는 위기 상황에서 이러한 사소한 문제를 처리하는 데 필요했을 관료적 노력 때문에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커쇼는 관료적 실수가 히틀러의 입대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본다. 실제로 동맹국의 국민으로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로 보내졌어야 했다. 1924년 바이에른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히틀러는 1914년 8월 5일경 수천 명의 다른 청년들과 함께 입대를 신청했지만 당국이 지원자들로 압도되어 처음에는 거절당했고, 결국 제2 보병 연대(제2 대대)에서 복무하도록 소환된 후, 주로 훈련받지 않은 신병들로 구성된 바이에른 예비 보병 연대 16(리스트 연대)에 배치되었다.[2][3]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독일의 상황이 점차 악화되자, 게오르크 폰 헤어틀링(Georg von Hertling)은 독일 총리 겸 프로이센 총리가 되었고, 오토 리터 폰 단들(Otto Ritter von Dandl)이 1917년 11월 11일 바이에른 총리와 동등한 직책인 "왕실 가정 및 외부 장관"이자 "장관회의 의장"이 되었다. 프로이센에 대한 눈먼 충성심을 보였다는 비난을 받은 루트비히 3세는 전쟁 중 인기가 점점 떨어졌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독일 혁명이 바이에른에서 발발했다.

1917년 9월부터 논의되었던 헌법 개혁이 1918년 11월 2일 왕실 정부와 모든 의회 그룹 간의 합의로 수립되었는데, 이는 정비례 대표제(proportional representation)의 도입을 예상했다. 루트비히 3세는 같은 날 헌정 군주제를 의회 군주제로 전환하는 것을 승인했다. 1918년 11월 3일, USPD의 주도로 1,000명의 사람들이 테레지엔비제(Theresienwiese)에 모여 평화를 위한 시위를 벌이고 구금된 지도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1918년 11월 7일, 루트비히 3세는 가족과 함께 뮌헨 레지덴츠 궁전에서 도망쳐 잘츠부르크(Salzburg) 근처의 아니프 궁전에 거주했다. 그는 독일 제국에서 폐위된 최초의 군주였다. 다음 날 바이에른 인민국가(People's State of Bavaria)가 선포되었다.

1918년 11월 12일, 휴전 협정 다음 날, 단들 총리는 루트비히 3세를 설득하여 퇴위(abdication)하도록 하기 위해 아니프 궁전으로 갔다. 루트비히 3세는 거절하고 대신 단들에게 모든 정부 관리, 군인, 민간 공무원을 그에 대한 충성 맹세에서 해방한다는 내용의 아니프 선언(Anif declaration) (Anifer Erklärung)을 전달했다. 그는 또한 최근 사건의 결과로 "더 이상 정부를 이끌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단들이 다음 날 뮌헨으로 돌아왔을 때, 쿠르트 아이즈너(Kurt Eisner) 정부가 이 선언을 발표했다. 문서에 "퇴위"라는 단어는 없었지만, 아이즈너 정부는 이를 퇴위로 해석하고 루트비히 3세와 그의 가족이 "인민 국가"에 반하지 않는 한 사적으로 바이에른으로 돌아오는 것을 환영한다는 성명을 덧붙였다. 이 성명은 비텔스바흐 가문(House of Wittelsbach)의 738년간의 바이에른 통치를 종식시켰다.[4]

5. 3. 독일 혁명과 퇴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 루트비히 3세는 바이에른의 연대를 표명하기 위해 베를린에 공식 서한을 보냈다. 이후 루트비히 3세는 바이에른을 위해 알자스(Alsace)와 벨기에의 앤트워프(Antwerp)시를 병합하여 바다가 없는 바이에른이 바다로 접근하기를 원했다. 그의 숨겨진 목표는 승리 후 프로이센(Prussia)과 바이에른 간의 독일 제국(German Empire) 내에서 권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1]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독일의 상황이 점차 악화되자, 게오르크 폰 헤어틀링(Georg von Hertling)은 독일 총리 겸 프로이센 총리가 되었고, 오토 리터 폰 단들(Otto Ritter von Dandl)이 1917년 11월 11일 바이에른 총리와 동등한 직책인 "왕실 가정 및 외부 장관"이자 "장관회의 의장"이 되었다. 프로이센에 대한 눈먼 충성심을 보였다는 비난을 받은 루트비히 3세는 전쟁 중 인기가 점점 떨어졌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독일 혁명이 바이에른에서 발발했다.

1918년 11월 2일, 왕실 정부와 모든 의회 그룹 간의 합의에 의해 광범위한 헌법 개혁이 수립되었는데, 이는 정비례 대표제(proportional representation)의 도입을 포함했다. 루트비히 3세는 같은 날 헌정 군주제를 의회 군주제로 전환하는 것을 승인했다. 11월 3일, USPD의 주도로 1,000명의 사람들이 테레지엔비제(Theresienwiese)에 모여 평화를 위한 시위를 벌이고 구금된 지도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11월 7일, 루트비히 3세는 가족과 함께 뮌헨 레지덴츠 궁전에서 도망쳐 잘츠부르크(Salzburg) 근처의 슐로스 아니프에 잠시 머물렀다. 그는 독일 제국에서 폐위된 최초의 군주였다. 다음 날 바이에른 인민국가(People's State of Bavaria)가 선포되었다.

1918년 11월 12일, 휴전 협정 다음 날, 단들 총리는 루트비히 왕을 설득하여 퇴위(abdication)하도록 하기 위해 슐로스 아니프로 갔다. 루트비히 3세는 퇴위를 거절하고 대신 단들에게 모든 정부 관리, 군인, 민간 공무원을 그에 대한 충성 맹세에서 해방한다는 내용의 아니프 선언(Anif declaration) (Anifer Erklärung)을 전달했다. 그는 또한 최근 사건의 결과로 "더 이상 정부를 이끌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단들이 다음 날 뮌헨으로 돌아왔을 때, 쿠르트 아이즈너(Kurt Eisner)의 공화주의(republicanism) 정부가 이 선언을 발표했다. 문서에 "퇴위"라는 단어는 없었지만, 아이즈너 정부는 이를 퇴위로 해석하고 루트비히 3세와 그의 가족이 "인민 국가"에 반하지 않는 한 사적으로 바이에른으로 돌아오는 것을 환영한다는 성명을 덧붙였다. 이 성명은 사실상 비텔스바흐 가문(House of Wittelsbach)의 738년간의 바이에른 통치를 종식시키는 폐위(Dethronement)였다.[4]

6. 퇴위 이후의 삶과 죽음

루트비히 3세는 바이에른으로 돌아왔다. 그의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는 1919년 2월 3일 키엠가우(Chiemgau) 빌덴바르트 성(Wildenwart Castle)에서 사망했다.[5]

1919년 2월, 아이스너가 암살당하자, 루트비히는 자신도 암살당할까 두려워 헝가리(Hungary)로 도피한 후,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과 스위스(Switzerland)로 거처를 옮겼다. 1920년 4월 바이에른으로 돌아와 다시 빌덴바르트 성에서 살았다. 1921년 9월 헝가리 사르바르(Sárvár)에 있는 그의 성 나다슈디(Nádasdy)로 여행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으며, 10월 18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5]

1921년 11월 5일, 루트비히의 시신은 그의 아내의 시신과 함께 뮌헨으로 돌아왔다. 군주제 복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왕족, 바이에른 정부, 군인들과 약 10만 명의 관중 앞에서 국장이 거행되었다. 매장은 왕족 조상들 옆에 있는 뮌헨 프라우엔 교회(Munich Frauenkirche) 납골당에서 이루어졌다. 루프레히트 왕세자는 아버지의 서거를 계기로 무력으로 군주제를 재건하려 하지 않고,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그렇게 하기를 선호했다. 장례식 연설에서 마이클 폰 파울하버 추기경은 군주제에 대한 분명한 지지를 표명한 반면, 루프레히트는 자신이 자신의 세습 권리를 계승했다고만 선언했다.[5]

참조

[1] text
[2] book Adolf Hitler W.W. Norton & Company
[2] book Where Ghosts Walked: Munich's Road to the Third Reich Doubleday & Company
[3] book Adolf Hitler 1889–1936: Hubris https://archive.org/[...] W.W. Norton & Company
[4] website Anifer Erklärung, 12./13. November 1918 http://www.historisc[...] 2008-05-10
[5] website Beisetzung Ludwigs III., München, 5. November 1921 http://www.historisc[...] 2011-07-01
[6] book Hof- und Staats-Handbuch des Königreich Bayern https://archive.org/[...]
[7] book Hof- und Staatshandbuch des Königreichs Bayern: 1867 https://books.google[...] Landesamt
[8] website Ludwig III. (Wittelsbach) König von Bayern http://prussianmachi[...] 2020-08-07
[9] book Staatshandbuch für das Großherzogtum Hessen und bei Rhein https://archive.org/[...]
[10] website Hof- und Staatshandbuch der Österreichisch-Ungarischen Monarchie http://alex.onb.ac.a[...] 2020-08-07
[11] book Hof- und Staatshandbuch des Großherzogtums Oldenburg0: 1879 https://books.google[...] Schulze
[12] website Königlich Preussische Ordensliste https://babel.hathit[...]
[13] book Hof- und Staats-Handbuch des Königreich Württemberg https://archive.org/[...]
[14] website Guóa Oficial de España http://hemerotecadig[...] 2019-03-04
[15] book Hof- und Staats-Handbuch des Großherzogtum Baden https://digital.blb-[...]
[16] website Staatshandbuch für das Großherzogtum Sachsen / Sachsen-Weimar-Eisenach https://zs.thulb.uni[...] 2019-07-30
[17] website Sveriges Statskalender https://runeberg.org[...] 2019-02-20
[18] book Calendario generale del Regno d'Italia https://books.google[...] Unione tipografico-editrice
[19] text
[20] website Ordinul Carol I https://familiaregal[...] 2019-10-17
[21] book Almanach de Gotha https://archive.org/[...] Justus Perthe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