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뤽티도르 18일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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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뤽티도르 18일 쿠데타는 1797년 9월 4일(프랑스 혁명력 프뤽티도르 18일) 프랑스 총재정부에서 일어난 쿠데타이다. 1797년 선거에서 왕당파가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구체제로의 회귀 움직임을 보이자, 공화파 총재들은 군부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결과 왕당파 의원들이 체포, 추방되었고, 선거 결과가 무효화되었으며, 공화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이 사건은 프랑스 혁명의 성과를 지키고 공화정을 유지하는 데 영향을 미쳤으나,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고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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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뤽티도르 18일 쿠데타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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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사건명 | 프뤽티도르 18일 쿠데타 |
발생일 | 1797년 9월 4일 |
장소 | 파리, 프랑스 |
결과 | 공화파의 승리 |
결과 상세 | 입법부 내 왕정주의자 다수 종식 클리시 클럽 탄압 다수의 왕정주의자 추방, 유배 또는 투옥 |
![]() | |
교전 세력 | |
교전 1 | 프랑스 총재정부 |
교전 2 | 원로원 내 왕정주의자 500인회 내 왕정주의자 |
지휘관 | |
총재정부 | 장프랑수아 르벨 루이마리 드 라 레벨리에르레포 폴 바라스 |
군사 | 샤를피에르 오주로 라자르 오슈 |
왕정주의자 | 프랑수아마리 바르텔레미 샤를 피슈그루 프랑수아 바르베마르부아 |
병력 규모 | |
총재정부 | 30,000명 |
왕정주의자 | 216명의 왕정주의자 의원 |
피해 규모 | |
왕정주의자 | 65명의 의원이 프랑스령 기아나로 추방 18명 투옥 3명 도주 |
2. 배경
1797년 3월과 4월에 실시된 평의원 선거에서 왕당파가 대거 약진하여 오백인회와 원로원 양원에서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1] 이는 프랑스 혁명 이후 수립된 공화정에 대한 반동적인 움직임으로, 왕당파는 혁명 시기의 급진적인 개혁 조치들을 되돌리고 구체제로 회귀하려는 시도를 하였다.[1]
의회 내 왕당파의 세력 확대는 총재 정부 내부의 권력 구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기존 총재였던 르 투르누르가 물러나고, 왕당파의 지지를 받는 바르텔레미가 새 총재로 선출되었다. 이로 인해 총재 정부는 바라스, 루벨, 라 루베리에르 레포 등 공화파 총재들과, 왕당파에 동조하는 카르노 및 바르텔레미 총재 사이의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었다.
공화파 총재들은 왕당파의 부상과 이들의 정책 방향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공화정을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반격을 준비했다. 바라스, 루벨, 라 루베리에르는 쿠데타를 통해 의회 내 왕당파 세력을 제거하기로 모의하고 군부의 지원을 확보하려 하였다.[3] 특히 나폴레옹은 왕당파로 의심받던 피슈그뤼 장군의 반역 혐의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며 쿠데타의 명분을 뒷받침했다.[2][6] 이러한 정치적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면서 결국 1797년 9월 4일(프랑스 혁명력 프뤽티도르 18일) 쿠데타가 발발하게 된다.
2. 1. 1797년 선거
1797년 3월과 4월에 실시된 제3차 평의원 선거에서 왕당파가 다수 의석을 확보하였다. 1797년 4월 선거는 왕당파와 온건 공화파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입법부인 오백인회와 원로원 모두에서 과반수가 교체되었다.[1]왕당파가 다수를 점하게 되자, 총재 르투르뇌르가 물러나고 왕당파 성향으로 알려진 바르텔레미 후작이 의회에 의해 새 총재로 선출되었다. 또한 프랑수아 바르베-마르부아가 원로원 의장으로,[1] 군주제 복원에 동조하는 것으로 알려진 피슈그뤼가 오백인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2]
새롭게 다수파가 된 왕당파 의원들은 구체제로의 회귀를 시도하며, 성직자 시민헌장 서약을 거부한 성직자들과 망명자(에미그레)를 적대하는 법률의 폐지를 추진했으며,[1] 망명자의 친척에 대한 정치 활동 제한을 완화하고 기피 성직자의 시민권을 회복시키려 하였다. 또한 기존 총재 정부의 장관 4명에 대한 해임을 요구하기도 했다.[1]
이러한 상황은 기존 총재였던 바라스, 루벨, 라 루베리에르 레포 등 공화파에게 큰 위기감을 주었다.[6] 나폴레옹이 피슈그뤼의 반역 행위에 대한 증거 문서를 제출하자,[2][6] 공화파 총재들은 의회 전체가 공화국에 반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판단하고,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고 왕당파를 제거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하게 된다.[2][6]
2. 2. 왕당파의 정책
1797년 4월 선거 이후, 왕당파와 온건 공화파는 오백인회와 원로원 양원에서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었다.[1] 이 새로운 다수파는 성직자 시민헌장에 대한 서약을 거부한 성직자들과 망명자들을 겨냥한 기존 법률들을 폐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이전 자코뱅 정부 시절 임명된 장관 4명의 해임을 요구하기도 했다.[1]왕당파가 다수를 점한 의회는 퇴임하는 총재 르투르뇌르의 후임으로 잘 알려진 군주주의자인 바르텔레미 후작을 선출하여 총재정부에 합류시켰다. 또한, 프랑수아 바르베-마르부아가 원로원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1] 군주제 복원에 동조하는 인물로 평가받던 장-샤를 피슈그뤼가 오백인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2]
2. 3. 총재 정부 내 갈등
1797년 3월과 4월에 실시된 세 번째 평의원 선거에서 왕당파가 다수를 차지했다. 이 선거 결과, 오백인회와 원로원 양원 모두에서 왕당파와 온건 공화파가 과반수를 확보하게 되었다.[1] 왕당파의 요구로 기존 총재 르 투르누르가 물러나고, 카르노와 사상적으로 가까우며 왕당파로 간주되던 외교관 바르텔레미가 새로운 총재로 선출되었다.[1] 이로 인해 총재 정부 내부는 바라스, 루벨, 라 루베리에르 레포를 중심으로 한 공화파 총재들과, 카르노 및 바르텔레미 총재 사이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의회 다수를 점한 왕당파는 혁명기의 급진적 개혁 조치들을 되돌리고 구체제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들은 망명자(에미그레) 친척에 대한 정치 활동 제한을 완화하고, 성직자 시민헌장 선서를 거부했던 기피 성직자들의 시민권을 회복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1] 또한 왕당파에 동조하는 것으로 알려진 피슈그뤼가 오백인회 의장으로,[2] 바르베-마르부아가 원로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1]
이러한 왕당파의 부상에 위협을 느낀 바라스, 루벨, 라 루베리에르 등 공화파 총재들은 반격을 모색했다. 이들은 쿠데타를 통해 왕당파 세력을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푸셰와 같은 인물들을 동료로 끌어들였다. 또한, 의회 내 영향력을 가진 탈레랑에게는 외무 장관직을 약속하며 협력을 확보했다.
군사적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방데의 반란 진압 경험이 있는 오슈 장군과 나폴레옹 휘하의 오주로 장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3] 나폴레옹 본인은 쿠데타 성공 후 들어설 정권의 불안정성을 예상하고 실패의 여파를 피하기 위해 직접 나서지 않았다. 대신 나폴레옹은 피슈그뤼의 반역 혐의에 대한 증거 문서를 제공하며 쿠데타의 명분을 만들었고,[2] 공화파 총재들은 이를 근거로 의회 전체가 공화국 전복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비난하며 쿠데타를 정당화하려 했다.[2]
3. 쿠데타의 전개
1797년 3월과 4월 선거에서 왕당파가 의회 다수를 차지하자,[1] 바르텔레미가 총재로 선출되고 피슈그뤼가 오백인회 의장이 되는 등[1][2] 왕당파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에 위협을 느낀 공화파 총재 바라스, 루벨, 라 루베리에르는 군부의 지지를 얻어 쿠데타를 계획했다.[6] 나폴레옹이 피슈그뤼의 반역 혐의 증거를 제공한 것도 쿠데타의 명분이 되었다.[2][6] 라자르 오슈와 피에르 오주로가 이끄는 군대가 파리로 동원되었다.[3][6]
1797년 9월 4일(프랑스 혁명력 프뤽티도르 18일) 새벽, 파리에 계엄령이 선포되며 쿠데타가 실행되었다.[1] 군대의 지원 아래 왕당파 및 반대파 세력은 신속하게 제압되었다. 피슈그뤼와 총재 바르텔레미 등 주요 인물들이 체포되었고,[1] 총재 카르노는 국외로 망명했다.[1][6]
쿠데타 결과, 49개 데파르트망의 선거가 무효화되었고,[1] 200명 이상의 의원이 체포되었으며, 이 중 60여 명이 "마른 단두대"라 불린 프랑스령 기아나의 카옌으로 추방되었다.[1][6] 빈 총재 자리는 필리프 메를랭 드 두에와 프랑수아 드 뇌프샤토가 임명되어 채워졌다.[4][6]
쿠데타 이후 공화파가 정부를 장악하고 에미그레 친척에 대한 법률 부활, 기피 성직자 탄압 재개 등 반동적인 조치가 이어졌다.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고 경제적으로는 긴축 정책이 시행되었다. 구 귀족은 외국인으로 취급되었고 공채 이자의 일부가 무효화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798년 선거에서도 정부 비판 세력이 다수 당선되자, 총재 정부는 1798년 5월 11일(프랑스 혁명력 플로레알 22일) 다시 개입하여 106명의 당선을 무효화하는 《플로레알 22일의 쿠데타》를 일으켰다.
한편, 80문 전열함 푸드루아는 이 사건을 기념하여 잠시 '딕스-위트 프뤽티도르'(Dix-Huit Fructidor)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다.
3. 1. 쿠데타 모의
1797년 3월과 4월에 실시된 평의원 선거 결과, 왕당파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왕당파의 요구로 기존 총재 르 투르뇌르가 해임되고, 카르노와 가까우며 왕당파에 우호적인 외교관 바르텔레미가 새로운 총재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총재 정부 내부는 바라스를 중심으로 한 공화파와 바르텔레미-카르노 중심의 온건파(또는 왕당파 동조 세력) 간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의회 다수를 점한 왕당파 의원들은 혁명으로 인한 급진적인 개혁에 반감을 드러내며 프랑스 사회를 구체제로 되돌리려 시도했다. 이들은 에미그레(망명자) 친척의 정치 활동 제한을 완화하고, 기피 성직자들에게도 시민권을 회복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다음 선거에서 왕당파가 승리하여 과반수를 차지할 경우 공화정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총재들 사이에서 고조되었다.[6]
이러한 왕당파의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낀 총재 바라스, 루벨, 라 루베리에르 레포는 공화정을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반격을 준비했다. 세 총재는 군부의 지지를 확보하여 쿠데타를 통해 의회 내 왕당파 세력을 축출하기로 결정하고 비밀리에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6] 이들은 계획 실행을 위해 정보 수집과 공작에 능한 푸셰를 동료로 끌어들였다. 또한, 의회 내에서 영향력이 강했던 탈레랑 역시 외무 장관직을 약속받고 쿠데타 계획에 동참했다.
3. 2. 군부의 개입
총재 바라스, 루벨, 라 루베리에르 3인은 왕당파의 위협에 맞서 군부의 지지를 얻어 쿠데타를 계획했다.[6] 쿠데타 실행을 위해 당시 삼브-에-뫼즈 군 사령관이었던 라자르 오슈 장군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군했으며,[3]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 역시 피에르 오주로가 지휘하는 군대를 파리로 파견하여 힘을 보탰다.[3][6] 동원된 군대는 총 8만 명에 달했으며, 이들의 무력 앞에 왕당파 의원들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6]3. 3. 쿠데타 실행
1797년 9월 4일(프랑스 혁명력 프뤽티도르 18일) 새벽, 파리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며, 왕당파 또는 1793년 헌법의 복원을 지지하는 사람은 재판 없이 처형한다는 법령이 발표되었다.[1] 쿠데타를 지원하기 위해, 당시 삼브르-에-뫼즈 군 사령관이었던 라자르 오슈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파리에 도착했고,[3] 나폴레옹은 피에르 오주로 휘하의 군대를 파견했다.[3][6] 총 8만 명의 군대가 동원되었다는 기록도 있다.[6]왕당파로 간주되던 오백인회 의장 피슈그뤼, 도미니크-뱅상 라멜-노가레, 총재 바르텔레미 및 아메데 빌로가 체포되었고, 또 다른 총재 라자르 카르노는 국외로 탈출하여 체포를 피했다.[1][6]
쿠데타 과정에서 214명의 의원이 체포되었으며,[1] 이 중 피슈그뤼, 라멜, 바르텔레미 등을 포함한 65명[1](다른 기록에는 61명[6])이 프랑스령 기아나의 카옌으로 추방되었다.[1][6] 카옌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많은 추방자가 풍토병 등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이 추방은 "마른 단두대(dry guillotine)"라고 불리기도 했다.[6]
또한, 49개 데파르트망의 선거 결과가 무효 처리되었다.[1] 추방된 바르텔레미와 망명한 카르노의 빈자리는 필리프 메를랭 드 두에와 니콜라-루이 프랑수아 드 뇌프샤토가 새로운 총재로 임명되어 채워졌다.[4][6]
4. 쿠데타의 결과
쿠데타는 성공했고, 총재 정부 내 바라스, 루벨, 라 루베리에르 등 공화파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선거로 선출된 왕당파 의원 다수가 의석을 잃었으며,[1] 왕당파를 비롯한 반대파 주요 인사들이 숙청되었다. 총재 바르텔레미와 카르노가 실각하고, 메를랭 드 두에와 프랑수아 드 뇌프샤토가 새 총재로 임명되었다.[4]
쿠데타 이후 정부 요직은 공화파가 차지했고,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과 사회 통제가 강화되었다. 망명자(에미그레) 및 성직자 시민헌장 서약을 거부한 기피 성직자에 대한 법률이 부활하거나 강화되었고, 군사 재판소가 설치되었다.[1] 언론의 자유가 억압되어 다수의 신문이 폐간되고 언론인들이 추방되었으며,[6] 구 귀족들은 외국인으로 취급되어 시민권 획득에 제한을 받았다.
경제적으로는 재정 안정을 위해 공채 이자의 3분의 2를 일방적으로 무효화하고 긴축 정책을 폈다. 종교적으로는 경신 박애교를 장려하고 가톨릭 교회를 탄압했으며, 공화력의 십요일(데카디)을 공식 휴일로 지정하여 일요일 예배를 금지하는 등 공화력에 따른 생활을 강제했다.
쿠데타는 총재 정부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강화했으나, 정치적 불안정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다. 결국 이듬해인 1798년 4월 선거에서 다시 정부에 비판적인 공화파 의원들이 다수 당선되자, 총재 정부는 또다시 선거 결과를 무효로 만드는 《플로레알 22일의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한편, 이 사건을 기념하여 80문 전열함 푸드루아는 한때 '프뤽티도르 18일'(Dix-huit Fructidor프랑스어)로 명명되기도 했다.
4. 1. 왕당파 숙청
1797년 9월 4일 새벽 쿠데타가 실행되면서, 왕당파 및 반대파 주요 인물들에 대한 숙청이 이루어졌다. 오백인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던 장-샤를 피슈그뤼, 총재 바르텔레미, 도미니크-뱅상 라멜-노가레, 아메데 빌로 등이 체포되었다.[3] 또 다른 총재였던 라자르 카르노는 체포를 피해 망명했다.[3]쿠데타 직후 왕당파 의원을 포함하여 총 216명의 의원이 체포되었고,[6] 이 중 피슈그뤼, 바르텔레미, 라멜을 포함한 61명이 프랑스령 기아나의 카옌으로 추방되었다.[1][6] 카옌은 열악한 환경과 풍토병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많은 추방자들이 그곳에서 사망하여 "마른 단두대"(Dry Guillotine)라고 불렸다.[6] 최종적으로 추방자 중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의원들 외에도 다수의 인물들이 숙청 대상이 되었다. 최근 귀국했던 망명자 160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1] "공화국에 반하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약 1,320명의 성직자들이 추방되었다.[1] 성직자 시민헌장 서약을 거부했던 기피 성직자들에 대한 박해도 다시 시작되어, 수백 명이 카옌으로 보내지거나 레 섬과 올레롱 섬의 폐허에 감금되었다.
숙청의 여파로 49개 데파르트망의 선거 결과가 무효화되었으며,[1] 바르텔레미와 카르노의 축출로 공석이 된 총재 두 자리에는 필리프 메를랭 드 두에와 프랑수아 드 뇌프샤토가 새롭게 임명되었다.[4] -- 또한, 반대파 성향의 신문 42개가 강제로 폐간되었고 언론인들은 추방되었다.[6] 망명자의 친족을 처벌하는 법률이 부활했으며, 귀국한 망명자들을 재판하기 위한 군사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구 귀족들은 외국인으로 취급되어 시민권을 회복하기 위해 별도의 귀화 절차를 거쳐야 했다.
4. 2. 새 총재 임명
프뤽티도르 18일 쿠데타의 결과, 기존 총재 중 바르텔레미는 체포되어 프랑스령 기아나의 카옌으로 추방되었으며, 카르노는 국외로 망명하여 총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발생한 두 명의 총재 공석은 필리프 메를랭 드 두에와 프랑수아 드 뇌프샤토가 새롭게 임명되어 채워졌다.[4]4. 3. 권위주의적 통치 강화
1797년 9월 4일 새벽, 파리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며, 왕당파나 1793년 헌법 복원을 지지하는 자는 재판 없이 처형한다는 법령이 공포되었다. 쿠데타를 지원하기 위해 라자르 호슈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파리에 도착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샤를-피에르 오제루 휘하의 군대를 파견했다.[3][6] 총 8만 명에 달하는 군대가 동원되어 왕당파 의원들은 저항할 수 없었다.쿠데타 직후 총재 정부는 즉각적인 반대파 숙청에 나섰다. 장-샤를 피슈그뤼, 바르텔레미, 아메데 빌로 등 왕당파 및 온건파 의원 214명이 체포되었고,[1] 이 중 피슈그뤼, 바르텔레미를 포함한 65명(다른 자료에서는 61명[6])은 프랑스령 기아나의 카옌으로 추방되었다. 카옌의 혹독한 환경과 풍토병으로 인해 많은 추방자가 사망하여, 이 조치는 "마른 단두대"라고 불렸다. 총재였던 라자르 카르노는 체포를 피해 망명했다.[1] 또한, 왕당파가 우세했던 49개 데파르트망의 선거 결과가 무효화되었다.[1]
체포되거나 망명한 총재들의 빈자리는 필리프 메를랭 드 두에와 프랑수아 드 뇌프샤토가 임명되어 채워졌다.[4] 이로써 쿠데타를 주도한 바라스, 루벨, 라 루베리에르 등 공화파 총재들의 권력이 더욱 공고해졌다.
정부는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며 권위주의적 통치를 펼쳤다. 최근 귀국한 망명자 160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1] 망명자의 친족을 탄압하는 법률이 부활했으며, 귀국한 망명자를 재판하기 위한 군사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성직자 시민헌장 서약을 거부한 성직자들에 대한 탄압도 재개되어 약 1,320명이 추방되거나[1] 레 섬, 올레롱 섬 등의 폐허에 감금되었다.
언론의 자유는 심각하게 억압되어 42개의 신문이 발행 금지 처분을 받았고, 많은 언론인이 추방되었다. 총재 라 루베리에르 레포는 경신 박애교를 장려하여 많은 교회가 이 종교 시설로 바뀌었다. 정부는 공화력의 십요일(데카디)을 공식적인 공휴일 및 제례일로 지정하고, 전통적인 일요일 예배를 금지했다.
구 귀족 계층에 대한 차별 조치도 강화되었다. 이들을 프랑스에서 추방하자는 제안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구 귀족들은 외국인으로 취급받았으며 시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귀화 절차를 거쳐야 했다. 또한 정부는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해 공채 이자의 3분의 2를 일방적으로 무효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한편, 80문 전열함 푸드루아는 이 사건을 기념하여 한때 '프뤽티도르 18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5. 쿠데타의 영향
쿠데타는 성공했고, 즉각적인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다. 선거로 선출된 198명의 의원이 당선 무효 처리되었으며, 많은 유력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총재 중 한 명인 프랑수아 드 바르텔레미는 남아메리카의 카옌으로 추방되었고, 카르노는 국외로 망명했다. 빈자리에는 두에와 프랑수아 드 뇌프샤토가 새로운 총재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정부의 주요 직책은 공화파 인사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쿠데타 이후 사회 전반에 걸쳐 이전 혁명 정책들이 강화되었다. 에미그레(망명 귀족)의 친척에 대한 정치 활동 제한 법률이 다시 시행되었고, 군사 법정이 설치되어 망명자들에게 프랑스 귀국 명령과 함께 유죄 판결을 내렸다. 기피성직자에 대한 억압도 재개되어, 수백 명이 카옌으로 보내지거나 레 섬과 올레롱 섬의 감옥에 갇혔다. 총재 루벨 등의 지원 아래 경신박애교가 확장되었고, 많은 교회가 이 종교 시설로 전환되었다. 정부는 혁명력의 '데카디'(10일째 되는 날)를 공식적인 휴일로 지정하고 의무적으로 쉬도록 하여, 전통적인 일요일 예배를 사실상 금지시켰다. 언론의 자유 역시 크게 제한되어 다수의 신문이 발행 금지 처분을 받고 추방되었다.
과거 귀족 전체를 프랑스에서 추방하자는 제안까지 나왔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대신 옛 귀족들은 외국인으로 취급되었으며, 프랑스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는 별도의 귀화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경제적으로는 국가 부채를 줄이기 위해 채권 이자의 3분의 2를 일방적으로 무효화하는 조치가 시행되었다. 경제 장관 라멜은 지출 삭감, 공무원 급여 인하 및 동결, 간접세 부활 등 강력한 긴축 정책을 폈다. 한편, 내무 장관 프랑수아 드 뇌프샤토는 학교 교육 정비와 정부 통계 시스템 구축에 힘썼다.
그러나 프뤽티도르 쿠데타로 총재 정부가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시도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이듬해인 1798년 4월 선거에서도 정부에 비판적인 공화파 의원들이 다수 당선되었다. 이에 총재 정부는 1798년 5월 11일(플로레알 22일]), 당선자 154명 중 정부에 반대하는 106명의 선거 결과를 무효로 만드는 법안을 강행 통과시켰다. 이는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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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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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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