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프리트비라자 3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프리트비라자 3세는 12세기 차하마나 왕조의 왕으로, 여러 중세 연대기에 언급되어 있으며, 특히 궁정 시인 찬드 바르다이가 쓴 '프리트비라자 라소'에 묘사되어 있다. 그는 1166년경에 태어나 1177년에 즉위했으며, 초기에는 어머니의 섭정을 거쳐 통치했다. 프리트비라지는 주변국과의 갈등을 겪었으며, 구르 왕조와의 전쟁에서 타라이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타라이 제2차 전투에서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그는 '마지막 힌두 황제'로 칭송받기도 하며, 대중문화에서 영웅으로 묘사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델리의 역사 - 인드라프라스타
    인드라프라스타는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판다바의 고향 도시이자 쿠루 왕국의 수도로, 현재 뉴델리의 푸라나 킬라가 유력 후보지이지만 고고학적 증거 부족으로 논쟁 중이다.
  • 델리의 역사 - 노예 왕조
    노예 왕조는 1206년 쿠트부딘 아이바크가 건국하여 1290년 할지 왕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델리 술탄국을 통치한 왕조로, 일투트미쉬의 지배 확립, 라지야 술타나와 기야스 웃딘 발반의 통치, 몽골 침입 방어 등의 역사를 거쳤다.
프리트비라자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코타에서 온 프리트비라자 차우한을 묘사한 사후 그림
코타에서 온 테라스에 앉아 볼스터에 기대고 있는 프리트비라자 차우한을 묘사한 사후 그림
이름프리트비라자 차우한
로마자 표기Prithviraj Chauhan
왕조차하마나 왕조
종교힌두교
통치
작위사파달라크샤 국왕
재위 시작1177년경
재위 종료1192년 12월
전임자소메슈와라
후임자고빈다라자 4세
생애
출생일1166년 5월 22일
출생지구자라트 주
사망일1192년
사망 장소아지메르
배우자산요기타
가족 관계
아버지소메슈와라
어머니카푸라데비 (칼라추리 공주)

2. 사료

프리트비라지 라소 사본, 마하라자 만 싱 푸스타크 프라카시, 조드푸르


프리트비라자 3세의 치세 당시 만들어진 비문은 그 수가 적고 왕 자신이 직접 발행한 것도 아니다. 그에 대한 정보의 상당 부분은 중세 시대의 전설적인 연대기에서 비롯된다. 타라이 전투에 대한 이슬람 기록 외에도, 그는 힌두교와 자이나교 작가들이 쓴 여러 중세 ''카뱌''(서사시)에 언급되어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프리트비라자 비자야'', ''함미라 마하카뱌'', 그리고 ''프리트비라지 라소''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헌들은 프리트비라자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역사적 사실로서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렵다. ''프리트비라자 비자야''는 프리트비라자 치세에 쓰인 유일하게 현존하는 문학 작품이다. 프리트비라자를 위대한 왕으로 널리 알린 ''프리트비라지 라소''는 그의 궁정 시인 찬드 바르다이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과장된 묘사가 많아 역사 연구 자료로서는 한계가 있다.

프리트비라자를 언급하는 다른 연대기나 문헌으로는 ''프라반다-친타마니'', ''프라반다 코샤'', ''프리트비라자 프라반다'' 등이 있다. 이 문헌들은 프리트비라자 사후 수 세기가 지난 뒤에 쓰였으며, 과장되거나 시대착오적인 일화들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자이나교 승려들의 전기를 담은 산스크리트어 문헌인 ''카라타라-가차-파타발리''에도 프리트비라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 문헌은 1336년에 완성되었지만, 프리트비라자를 다루는 부분은 대략 1250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찬델라 왕조의 시인 자가니카가 쓴 ''알하-칸다''(또는 ''알하 라소'') 역시 프리트비라자가 찬델라 왕국과 벌인 전쟁을 과장하여 묘사하고 있다.

이 외에도 몇몇 인도 문헌에서 프리트비라자를 언급하지만,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정보를 많이 제공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1363년에 편찬된 산스크리트 시 모음집 ''샤르가다라-파다티''에는 그를 칭송하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으며, 1455년에 쓰인 ''카나다데 프라반다''는 그를 자롤 차하마나 왕조의 왕 비라마데의 전생으로 묘사하고 있다.

3. 초기 생애

프리트비라지는 차하마나 왕 소메슈바라와 카르푸라데비(칼라추리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리트비라지와 그의 남동생 하리라자는 모두 구자라트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아버지 소메슈바라가 외가 친척들의 도움으로 차우루크야 궁정에서 성장한 곳이기도 하다.

중세 문헌 『프리트비라자 비자야』에 따르면, 프리트비라지는 자예스타 달 12일에 태어났다. 이 문헌은 출생 연도를 명시하지 않았지만, 출생 당시의 점성학적 행성 위치가 길조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역사학자 다샤라타 샤르마는 이 기록과 다른 행성 위치 정보를 바탕으로 프리트비라지의 출생 연도를 서기 1166년(VS 1223년)으로 추정했다.

프리트비라지에 대한 중세 전기들은 그가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프리트비라자 비자야』는 그가 6개 언어에 능통했다고 기록한 반면, 『프리트비라자 라소』는 14개 언어를 배웠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다소 과장된 표현일 수 있다. 『라소』는 또한 그가 역사, 수학, 의학, 군사학, 회화, 철학(미맘사), 신학 등 다양한 학문에 정통했다고 전한다. 두 문헌 모두 프리트비라지가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고 공통적으로 언급한다.

4. 통치

프리트비라자 3세는 아버지 소메슈바라의 뒤를 이어 1177년경 약 11세의 어린 나이에 차하마나 왕조의 왕위에 올랐다. 초기에는 어머니 카르푸라데비(Karpuradevi)가 섭정을 맡아 카담바바사(Kadambavasa), 부바나이카말라(Bhuvanaikamalla) 등 유능한 신하들의 도움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1180년경 친정을 시작한 프리트비라자는 사촌 나가르주나의 반란을 진압하고 바다나카 왕조를 정복하는 등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이후 찬델라 왕조의 제자카부크티(분델칸드)를 침공하여 승리하고, 구자라트의 차우룩야 왕조와도 전쟁을 벌이는 등 주변 세력과의 경쟁과 갈등을 이어갔다. 특히 구르 왕조의 술탄 무함마드 고리와의 충돌은 그의 통치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여러 차례의 소규모 교전 끝에[4] 1191년 타라이 제1차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4], 1192년 타라이 제2차 전투에서는 무함마드 고리의 전략에 패배하여 사로잡혔다.[4] 이 패배는 북인도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4. 1. 초기 통치

프리트비라지는 아버지 소메슈바라가 프리트비라자 2세의 사후 차하마나 왕으로 즉위하면서 구자라트에서 아즈메르로 거처를 옮겼다. 소메슈바라는 1177년(빅라마 삼밧 1234년)에 사망했는데, 이때 프리트비라지는 약 11세였다. 소메슈바라 재위 시대의 마지막 비문과 프리트비라지 재위 시대의 첫 번째 비문 모두 이 해에 기록되었다. 어린 나이였던 프리트비라지는 어머니를 섭정으로 하여 왕위에 올랐다. 《함미라 마하카뱌》(Hammira Mahakavya)는 소메슈바라 자신이 프리트비라지를 왕위에 올려놓고 숲으로 은퇴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

즉위 초기에 프리트비라지의 어머니는 섭정 평의회의 도움을 받아 국정을 운영했다. 이 시기의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카담바바사(Kadambavasa): 당시 수상으로 재직했으며, 민간 전설에서는 카이마사(Kaimasa), 카이마쉬(Kaimash), 카임바사(Kaimbasa) 등의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젊은 왕에게 헌신적인, 능력 있는 관리이자 군인으로 묘사된다. 《프리트비라자 비자야》(Prithviraja Vijaya)는 그가 프리트비라지 초기 통치 기간 동안 모든 군사적 승리를 이끌었다고 명시한다. 그러나 두 가지 다른 전설에 따르면, 카담바바사는 나중에 프리트비라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프리트비라자 라소》(Prithviraja-Raso)는 프리트비라지가 왕의 총애를 받는 첩 카르나티(Karnati)의 방에서 그를 발견한 후 죽였다고 주장한다. 《프리트비라자 프라반다》(Prithviraja-Prabandha)는 프라타파 심하(Pratapa-Simha)라는 사람이 장관에 대해 음모를 꾸미고, 장관이 반복되는 무슬림 침략에 책임이 있다고 프리트비라지를 설득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역사적으로 더 신뢰할 수 있는 《프리트비라자 비자야》가 그러한 사건을 언급하지 않으므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 부바나이카말라(Bhuvanaikamalla): 프리트비라지 어머니의 외삼촌으로, 이 시대의 또 다른 중요한 장관이었다. 《프리트비라자 비자야》에 따르면, 그는 비슈누를 섬기는 가루다처럼 프리트비라지를 섬긴 용감한 장군이었다. 이 책은 또한 그가 "nāga|나가sa를 제압하는 기술에 능숙했다"고 명시한다. 15세기 역사가 조나라자에 따르면, 여기서 "nāga|나가sa"는 코끼리를 가리킨다. 그러나 하르 빌라스 사르다는 나가를 부족의 이름으로 해석하고 부바나이카말라가 이 부족을 패배시켰다고 추측했다.


역사가 다샤라타 샤르마에 따르면, 프리트비라지는 1180년(빅라마 삼밧 1237년)경에 국정의 실질적인 통제권을 장악하며 친정을 시작했다.

4. 2. 주변국과의 갈등

프리트비라자의 첫 군사적 활동은 그의 사촌 나가르주나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구다푸라(오늘날의 구르가온일 가능성이 있는 지역)를 되찾은 것이었다. 나가르주나는 프리트비라자의 삼촌인 비그라하라자 4세의 아들로, 차하마나 왕위를 둘러싼 두 가문 분파 간의 경쟁 관계 속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프리트비라자 비자야』에 따르면, 나가르주나는 프리트비라자의 권위에 도전하며 구다푸라 요새를 점령했다. 이에 프리트비라자는 보병, 낙타 기병, 전투 코끼리, 기병으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구다푸라를 포위했다. 나가르주나는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으나, 그의 장군으로 추정되는 데바바타는 계속 저항했다. 결국 프리트비라자의 군대가 승리하여 나가르주나의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을 사로잡았다. 같은 기록에는 패배한 병사들의 머리로 만든 화환이 아제르 요새 문에 걸렸다고 전해진다.

프리트비라자는 바다나카 왕조와의 싸움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카라타라-가치하-파타발리』는 1182년 이전에 있었던 그의 승리를 언급한다. 신시아 탈봇은 바다나카를 바야나 주변 지역을 지배했던 왕조로 보았고, 다샤라타 샤르마는 그들의 영토가 현재의 비와니 지구, 레와리 지구, 알와르 지구 주변에 해당한다고 추정했다.

1182년에서 1183년 사이(빅람 삼밧 1239년)에 제작된 마단푸르 비문에는 프리트비라지가 찬델라 왕 파라마르디가 다스리던 제자카부크티(오늘날의 분델칸드) 지역을 "황폐화시켰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침공은 《프리트비라지 라소》, 《파라마르 라소》, 《알하 라소》와 같은 후대의 여러 민간 전설에서도 다루어진다. 《사랑가다라 파다티》나 《프라반다 친타마니》 같은 다른 문헌들 역시 프리트비라지의 파라마르디 공격을 언급하고 있다. 《카라타라-가취하-파타발리》는 프리트비라지가 디그비자야(digvijaya, 모든 지역 정복)에 나섰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그가 제자카부크티로 진군을 시작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찬델라 침공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프리트비라지가 결혼 후 델리로 돌아가던 중 그의 군대가 구리드 왕조 군의 공격을 받았다. 공격을 격퇴했지만 큰 피해를 입은 차하마나 군대는 혼란 속에서 길을 잃고 찬델라의 수도 마호바에 진을 치게 되었다. 그곳에서 왕실 정원사를 살해하면서 양측 간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찬델라 왕 파라마르디는 장군 우달에게 공격을 명령했으나 우달은 반대했다. 이때 파라마르디의 매제이자 오라이 지역을 다스리던 마힐 파리하르가 파라마르디를 부추겨 공격을 감행하게 했다. 프리트비라지는 우달의 군대를 물리치고 델리로 돌아갔다. 이후 마힐의 음모에 불만을 품은 우달과 그의 형제 알하는 찬델라 궁정을 떠나 칸나우지의 가하다발라 왕조 통치자 자이찬드 밑으로 들어갔다. 마힐은 비밀리에 프리트비라지에게 찬델라 왕국이 약화되었다고 알렸고, 프리트비라지는 다시 침략하여 시르사가르를 포위하고 점령했다. 찬델라 측은 휴전을 요청하고 그 사이 알하와 우달을 불러들였다. 자이찬드 역시 찬델라를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찬델라-가하다발라 연합군은 프리트비라지에게 패배했고, 프리트비라지는 마호바를 약탈했다. 이후 칼린자르 요새를 공격하여 파라마르디를 사로잡았다고 전해진다. 여러 전설에 따르면 파라마르디는 이 공격 직후 사망하거나 은퇴했으며, 프리트비라지는 파준 라이를 마호바 총독으로 임명하고 델리로 돌아갔다. 나중에 파라마르디의 아들이 마호바를 되찾았다고 한다.

이 전설의 역사적 정확성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마단푸르 비문을 통해 프리트비라지가 마호바를 약탈한 사실은 확인되지만, 그가 찬델라 영토를 실제로 점령했는지, 점령했다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파라마르디는 전설과 달리 프리트비라지가 사망한 후에도 거의 10년 동안 왕위를 유지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신시아 탈봇은 프리트비라지가 제자카부크티를 약탈했을 뿐이며 영토를 합병하지는 못했고, 파라마르디는 프리트비라지가 떠난 후 곧바로 왕국을 회복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R. B. 싱은 찬델라 영토 일부가 짧은 기간 동안 차하마나에 의해 합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프리트비라지는 구자라트의 차우룩야(솔랑키) 왕조의 빔마 2세와도 갈등 관계에 있었다. 《카라타라-가취하-파타발리》는 두 왕 사이에 평화 조약이 맺어졌음을 언급하는데, 이는 그 이전에 전쟁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전쟁은 서기 1187년(빅람 삼밧 1244년) 이전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베라발 비문에는 빔마 2세의 총리였던 자가드데바 프라티하라가 "프리트비라자의 연꽃 같은 왕비들에게 달과 같은 존재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차하마나 왕조에 위협적인 인물이었음을 나타낸다. 당시 빔마 2세가 어렸기 때문에, 자가드데바가 실질적으로 군사 작전을 지휘했을 가능성이 높다.

역사적 신뢰도가 낮은 《프리트비라지 라소》는 차하마나와 차우룩야 간의 갈등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전한다. 이에 따르면, 프리트비라지와 빔마 2세는 아부의 파라마라 공주 이치히니와 결혼하려 경쟁했다. 역사가 가우리샹카르 히라찬드 오자는 당시 아부의 파라마라 통치자가 다라바르샤였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허구로 보았으나, R. B. 싱은 이치히니의 아버지 살라카가 다른 파라마라 지파의 수장이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라소》는 또한 프리트비라지의 삼촌 칸하데바가 빔마 2세의 삼촌 사랑가데바의 아들 일곱 명을 죽였고, 이에 대한 복수로 빔마 2세가 차하마나 왕국을 침략하여 프리트비라지의 아버지 소메슈바라를 죽이고 나고르를 점령했다고 말한다. 이후 프리트비라지가 나고르를 되찾고 빔마 2세를 패배시켜 죽였다고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 명백히 다르다. 빔마 2세는 프리트비라지가 사망한 후에도 거의 반세기 동안 통치했으며, 소메슈바라가 사망했을 당시에는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그를 죽일 수 없었다.

하지만 나고르에서 차하마나와 차우룩야 사이에 전투가 있었다는 증거는 존재한다. 비카네르 근처 차를루 마을에서 발견된 두 개의 비문은 서기 1184년(빅람 삼밧 1241년) 나고르 전투에서 사망한 모힐 병사들을 기리고 있다. 모힐은 차우한(차하마나)의 한 지파이므로, 이 비문들은 《프리트비라지 라소》에 묘사된 전투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서기 1187년 이전의 어느 시점에 자가드데바 프라티하라는 프리트비라지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카라타라-가취하-파타발리》에 따르면, 아바야다라는 수장이 부유한 사파달락샤(차하마나 영토) 방문객들을 약탈해도 되는지 자가드데바에게 물었을 때, 자가드데바는 프리트비라지와 매우 어렵게 조약을 맺었다고 답하며, 만약 사파달락샤 사람들을 괴롭히면 당나귀 배에 꿰매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다샤라타 샤르마는 자가드데바가 조약을 지키려 애쓴 점으로 미루어 보아, 차하마나-차우룩야 갈등이 프리트비라지에게 유리하게 끝났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R. C. 마주마다르와 사티시 찬드라 같은 역사가들은 프리트비라지의 구자라트 원정이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빔마 2세에게 패배한 후 1187년까지 조약을 맺게 되었다고 본다.[2][3]

아부산 주변 지역은 차우룩야의 봉신이었던 찬드라바티 파라마라 왕조의 다라바르샤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의 동생 프라할라다나가 쓴 ''파르타-파라크라마-비야요가''에는 프리트비라지가 아부를 야습했으나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사건은 프리트비라지의 구자라트 원정 중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델리 킬라 라이 피토라의 조각상


『프리트비라지 라소』는 프리트비라지가 만도바라의 나하르 라이와 무굴족 수장 무드갈라 라이를 패배시켰다고 언급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순전히 허구로 보인다. 이러한 인물들의 존재를 암시하는 역사적 기록은 없다.

현재 폐허가 된 킬라 라이 피토라 요새의 건설은 프리트비라지에게 돌려진다. 『프리트비라지 라소』에 따르면, 델리의 통치자 아낭팔 토마르가 도시를 사위인 프리트비라지에게 주었고, 다시 되찾으려 할 때 패배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으로 부정확한데, 델리는 프리트비라지의 삼촌인 비그라하라자 4세에 의해 차하마나 영토에 병합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 증거는 아낭팔 토마르가 프리트비라지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의 딸과 프리트비라지의 결혼에 대한 주장은 나중에 날조된 것으로 보인다.

4. 3. 구르 왕조와의 전쟁

프리트비라자의 선대 통치자들은 12세기까지 인도 아대륙 북서부 지역을 점령했던 이슬람 왕조들의 여러 차례 침략에 직면했다.[4] 12세기 후반, 가즈니를 기반으로 한 구르 왕조가 차하마나 왕국의 서쪽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다. 프리트비라자가 아직 어렸던 1175년, 구르 왕조의 통치자 무함마드 고리는 인더스강을 건너 멀탄을 점령했다. 1178년에는 차우룩야 왕조(솔랑키 왕조)가 다스리던 구자라트를 침략했다. 구자라트로 진군하는 과정에서 구르 군대는 여러 사원을 파괴하고 바티(Bhati)족이 지배하던 로드루바(Lodhruva)를 약탈하는 등 차하마나 왕국의 서쪽 국경을 통과한 것으로 보인다.[4] 『프리트비라자 비자야』는 구르 군대의 활동이 차하마나 왕국에게 라후(힌두 신화에서 태양을 삼키는 존재)와 같았다고 묘사하지만, 두 왕국 간의 직접적인 군사 충돌은 언급하지 않는다.[4] 구자라트로 가는 길에 구르 군대는 나둘라의 차하마나족이 통치하던 나둘라 요새를 포위했다. 당시 프리트비라지의 수상 카담바바사(Kadambavasa)는 이 분쟁에 개입하지 말고 거리를 두라고 조언했다.[4][4] 차하마나 왕국이 즉각적인 침략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1178년 카사라다 전투에서 구자라트의 차우룩야족이 무함마드 고리 군대를 격파하여 후퇴시켰기 때문이다.[4]

이후 몇 년간 무함마드 고리는 차하마나 왕국의 서쪽 영토에서 세력을 강화하며 페샤와르, 싱드, 펀자브를 정복했다. 그는 근거지를 가즈니에서 펀자브로 옮기고 동쪽으로 제국을 확장하려 했으며, 이는 결국 프리트비라지와의 충돌로 이어졌다.[4]

『프리트비라자 비자야』는 무함마드 고리가 프리트비라지에게 사절을 보냈다고 언급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4] 13세기 하산 니자미(Hasan Nizami)의 『타즈울 마아시르(Taj-ul-Maasir)』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수석 판사 키와움울 멀크 루크누드딘 함자(Qiwam-ul Mulk Ruknud Din Hamza)를 프리트비라지의 궁정에 보내 "적대감을 버리고 정의로운 길을 추구하라"고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무함마드는 프리트비라지에 대한 전쟁을 결심했다.[4]

중세 이슬람 작가들은 두 통치자 사이의 전투를 한두 번만 언급한다. 『타바카트이 나시리(Tabaqat-i Nasiri)』와 『타리크이 피리시타(Tarikh-i-Firishta)』는 두 차례의 타라이 전투를 언급하며, 『자미울 히카야(Jami-ul-Hikaya)』와 『타즈울 마아시르』는 프리트비라지가 패배한 두 번째 타라이 전투만 언급한다. 그러나 힌두교와 자이나교 작가들은 프리트비라지가 죽기 전에 무함마드를 여러 차례 물리쳤다고 주장한다.[4]

  • 『함미라 마하카브야(Hammira Mahakavya)』는 프리트비라지가 처음 무함마드를 물리친 후, 그가 약탈한 영토의 왕자들에게 사과하도록 강요하고 풀어주었다고 주장한다. 이후 무함마드가 일곱 번 더 침략했지만 모두 패배했고, 아홉 번째 침략에서 성공했다고 한다.[4]
  • 『프리트비라자 프라반다(Prithviraja Prabandha)』는 두 왕이 8번의 전투를 벌였으며, 프리트비라지가 처음 일곱 번의 전투에서 구르 왕을 물리치고 사로잡았으나 매번 풀어주었다고 한다.[4]
  • 『프라반다 코샤(Prabandha Kosha)』는 프리트비라지가 무함마드를 20번 사로잡았으나 21번째 전투에서 자신이 포로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수르자나 차리타(Surjana Charita)』와 『프리트비라즈 라소(Prithviraj Raso)』도 21번의 전투를 언급한다.[4]
  • 『프라반다 친타마니(Prabandha Chintamani)』는 전투 횟수를 22번으로 제시하며, 프리트비라지의 군대가 이전 전투에서 적 왕을 물리쳤다고 명시한다.[4]


이러한 기록들의 숫자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프리트비라지 통치 기간 동안 구르 왕조와 차하마나 왕조 사이에 두 번 이상의 교전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4][4] 힌두교와 자이나교 작가들이 언급하는 초기 승리들은 아마도 프리트비라지가 구르 왕조 장군들의 소규모 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것을 의미할 수 있다.[4]

=== 타라이 제1차 전투 ===

1190년에서 1191년 사이, 무함마드 고리는 차하마나 영토를 침략하여 타바르힌다(Tabarhindah) 또는 타바르-에-힌드(Tabar-e-Hind, 현재의 바티나(Bathinda)로 추정됨)를 점령했다. 그는 1,200명의 기병을 주둔시키고 툴락(Tulak)의 카지(Qazi) 지아우드딘(Zia-ud-din)에게 통치를 맡겼다. 이 소식을 들은 프리트비라지는 델리의 고빈다라자(Govindaraja)를 포함한 봉신들과 함께 타바르힌다로 진군했다. 16세기 무슬림 역사가 피리슈타에 따르면, 프리트비라지의 군대는 20만 명의 기병과 3천 마리의 코끼리로 구성되었다고 한다.[4]

무함마드 고리의 원래 계획은 타바르힌다 점령 후 기지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나, 프리트비라지의 진군 소식을 듣고 전투를 결심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타라이(Tarain)에서 프리트비라지 군대와 맞닥뜨렸다.[4] 이어진 전투에서 프리트비라지 군대는 구르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무함마드 고리는 부상을 입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4]

프리트비라지는 후퇴하는 구르 군대를 추격하지 않았는데, 이는 적대적인 영토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을 꺼렸거나 고리의 야망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일 수 있다.[4] 대신 그는 타바르힌다를 13개월 동안 포위하여 결국 항복을 받아냈다.[4]

=== 타라이 제2차 전투 ===

허치슨 앤드 컴퍼니(Hutchinson & co)가 그린 「라즈푸트의 최후의 항전」. 타라이 제2차 전투를 묘사하고 있다.


프리트비라지는 타라이 제1차 전투를 단순한 국경 분쟁 정도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후 무함마드 고리와의 충돌에 거의 대비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프리트비라즈 라소』에 따르면, 그는 구르 왕조와의 최종 대결 전까지 국정을 소홀히 하고 향락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4][4]

반면, 무함마드 고리는 가즈니로 돌아가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했다. 『타바카트-이 나시리』에 따르면, 그는 몇 달에 걸쳐 정예 아프간, 타지크, 투르크 기병 12만 명으로 구성된 잘 무장된 군대를 모았다. 그는 자무의 비자야라자(Vijayaraja)의 지원을 받아 멀탄과 라호르를 거쳐 차하마나 왕국으로 다시 진군했다.[4]

프리트비라지는 이웃 힌두 왕들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동맹 세력 없이 고립된 상태였다.[4] 그럼에도 그는 구르 군대에 맞서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소집했다. 프리트비라지는 100명이 넘는 라즈푸트 통치자들의 지원을 받아 전투 코끼리, 기병, 보병으로 구성된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모았다.[5][6] 16세기 무슬림 역사가 피리시타는 프리트비라지 군대의 규모를 기병 30만 명, 코끼리 3천 마리, 그리고 다수의 보병으로 추산했지만, 이는 구르 군대의 승리를 과장하기 위한 수치일 가능성이 높다.[4][4] 프리트비라지는 무함마드 고리에게 편지를 보내, 만약 그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다면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무함마드는 피로즈코(Firozkoh)에 있는 형 기야스 알딘 무함마드(Ghiyath al-Din Muhammad)와 상의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시간을 벌었다. 피리시타에 따르면, 그는 형의 답을 받을 때까지 휴전에 동의하는 척하면서 기습 공격을 계획했다.[4]

『자와미 울-히카야트(Jawami ul-Hikayat)』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소수의 병력에게 야영지의 불을 밤새도록 피우게 하여 구르 군대가 여전히 휴전을 지키며 주둔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 그러는 동안 본대는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다. 몇 마일 떨어진 곳에 도착한 후, 무함마드는 각각 1만 명의 궁수로 구성된 4개의 부대를 편성하고 나머지 군대는 예비대로 두었다. 그는 이 4개 부대에게 차하마나 진영을 기습 공격한 후 후퇴하는 척하라고 명령했다.[4]

새벽녘, 구르 군대의 4개 부대는 프리트비라지가 아직 잠들어 있는 동안 차하마나 진영을 공격했다. 짧은 교전 후, 구르 부대는 계획대로 후퇴하는 척했고, 프리트비라지는 이들을 추격하도록 유인되었다. 오후가 되자 계속된 추격으로 차하마나 군대는 지쳐 있었다. 바로 이때, 무함마드는 1만 명의 정예 기마 궁수로 구성된 예비 부대를 투입하여 차하마나 군대를 공격했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편년사 주자니(Minhaj-i Siraj Juzjani)는 1만 명의 기마 궁수가 결국 "이교도 무리"를 전복시켰다고 기록하며 구르 군대의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4] 그러나 다샤라타 샤르마(Dashratha Sharma)와 R.B. 싱(R.B. Singh)과 같은 학자들은 구르 군대의 승리가 군사력 자체보다는 기만적이고 배신적인 전략에 크게 의존한 결과라고 주장한다.[4][4] 『타즈-울-마아시르』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프리트비라지 진영은 델리의 고빈다라자를 포함하여 1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프리트비라지 자신은 말을 타고 도망치려 했으나, 사라스와티 요새(현재의 시르사(Sirsa) 근처로 추정됨) 근처에서 사로잡혔다.[4] 이후 무함마드 고리는 아지메르를 점령하고 수천 명의 수비병을 학살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삼고 도시의 사원들을 파괴했다.[4]

5. 죽음과 계승

14세기 자이나교 학자 메루퉁가의 『프라반다 친타마니』에 따르면, 프리트비라지는 구리드 침입자들을 자신의 진영으로 안내한 신하에게 복수했으나, 이후 종교적인 금식 후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쉽게 사로잡혔다고 한다. 15세기 자이나교 학자 나야찬드라 수리의 『함미라 마하카브야』는 구리드 왕이 프리트비라지의 마부와 음악가들에게 뇌물을 주었고, 이들의 배신으로 프리트비라지가 사로잡혔다고 기록한다. 마부는 프리트비라지의 말이 북소리에 맞춰 춤추도록 훈련시켰고, 구리드 군이 새벽에 기습했을 때 음악가들이 북을 치자 말이 춤을 추기 시작하여 프리트비라지가 쉽게 붙잡혔다는 것이다. 또 다른 자이나교 문헌 『프리트비라자 프라반다』는 신하 카임바사와의 갈등을 언급하며, 카임바사가 프리트비라지의 말이 특정 소리에 반응하여 춤을 춘다는 정보를 구리드 측에 알려주어 그가 사로잡히는 데 기여했다고 전한다.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의 주화


대부분의 중세 사료는 프리트비라지가 차우하만 왕국의 수도인 아제르로 끌려갔으며, 무함마드는 그를 구리드의 봉신으로 복위시키려 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얼마 후 프리트비라지는 무함마드에게 반기를 들었고,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이는 프리트비라지와 "무함마드 빈 삼"의 이름이 새겨진 '말과 황소 타는 사람' 양식의 주화가 델리 조폐국에서 발행된 사실로 뒷받침된다. 다만, 구리드가 초기 통치 시기에 옛 차우하만 영토에서 자신들의 화폐가 통용되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차우하만 양식의 화폐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프리트비라지 사후 무함마드가 차우하만 왕자인 고빈다라자를 아제르의 왕위에 앉힌 것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프리트비라지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정황은 자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출처기록된 죽음의 정황
당대 무슬림 역사가 하산 니자미무함마드에 대한 음모에 연루되어 참수형을 선고받음. 음모의 구체적인 내용은 설명되지 않음.
『프라반다 친타마니』 (약 1304년)아제르에서 돼지에게 살해당하는 무슬림을 묘사한 그림을 보고 분노한 무함마드가 도끼로 프리트비라지를 참수함.
『함미라 마하카브야』포로 생활 중 음식을 거부하다가 감옥에서 사망함. 구리드 귀족들이 석방을 건의했으나 무함마드가 무시함.
『프리트비라자-프라반다』 (15세기 또는 그 이전)금사슬에 묶여 델리로 끌려감. 아제르 감옥에서 전 장관 카임바사에게 활과 화살을 받아 무함마드를 암살하려 했으나, 카임바사가 이를 밀고함. 무함마드는 자신의 자리에 금속상을 두었고, 프리트비라지가 활을 쏘아 상을 두 동강 내자 그를 구덩이에 던져 돌팔매형으로 처형함.
민하즈-이-시라즈 (13세기), 피리시타 (16세기)포로로 잡힌 후 "지옥으로 보내졌다"고 기록함. 이는 패배 직후 처형되었음을 시사할 수 있으나, 다른 해석의 여지도 있음.
락슈미다라의 『비루드하-비디 비드반사』전투 중에 사망했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자료.[7]



메와르의 궁정 화가 타라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이 무함마드를 쏘는 그림, 약 1860년


후대의 서사시 『프리트비라자 라소』는 프리트비라지가 가즈나로 포로로 끌려가 눈이 멀었다고 묘사한다. 이 소식을 들은 시인 찬드 바르다이가 가즈나로 가서 무함마드를 속여 눈먼 프리트비라지의 활쏘기 시범을 보이게 했고, 이때 프리트비라지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화살을 쏘아 무함마드를 죽였다는 것이다. 이후 프리트비라지와 찬드 바르다이는 서로를 죽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허구적인 이야기이다. 무함마드는 프리트비라지 사후 10년 이상 더 통치했다.

프리트비라지 사후, 구리드는 그의 아들 고빈다라자를 아제르의 왕위에 봉신으로 임명했다. 1192년, 프리트비라지의 동생 하리라자가 고빈다라자를 몰아내고 조상의 왕국 일부를 되찾았다. 고빈다라자는 라나스탐바푸라(현대의 란탐보르)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차우하만 분파의 봉신 통치 왕조를 세웠다. 하리라자는 나중에 구리드 장군 쿠트브 알-딘 아이박에게 패배했다.

6. 문화적 유산

프리트비라자는 학자와 시인들을 위한 전담 부서를 운영했으며, 이 부서는 파드마나바가 책임졌다. 그의 궁정에는 다음과 같은 많은 시인과 학자들이 있었다.


  • 자야나카: 『프리트비라자 비자야』를 저술한 시인이자 역사가
  • 비디아파티 가우다
  • 바기슈바라 자나르다나
  • 비슈바루파: 시인
  • 프리트비바타: 궁정 시인 (일부 학자들은 찬드 바르다이와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한다)


『카라타라-가치하-파타발리』는 자이나교 승려 지나파티 수리와 파드마프라바가 나라나야나(현대 아제메르 근처 나레나)에서 벌인 종교적 논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당시 프리트비라지는 그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후 지나파티는 부유한 자이나 상인의 초청으로 아제메르로 갔고, 프리트비라지는 그에게 자야-파트라(승리 증서)를 수여하며 그의 학식을 인정했다.

7. 대중문화 속 프리트비라지

아제르의 프리트비라지 차우한 동상


아제르와 델리에는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을 기리는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그의 삶을 다룬 인도 영화와 텔레비전 시리즈가 여러 편 제작되었다. 여기에는 ''Prithviraj Chouhan'' (1924), 나라야나라오 D. 사르포트다르의 ''Prithviraj Sanyogita'' (1929), R. N. 바이디아의 ''Prithviraj'' (1931), ''Prithviraj Sanyogita'' (1933), B. 삼파트쿠마르의 ''프리티비라잔'' (1942), 나잠 나크비의 ''프리트비라지 삼요기타'' (1946), 하르숙 자그네슈와르 밧트의 ''Samrat Prithviraj Chauhan'' (1959), D. 요가난드의 ''라니 삼유크타'' (1962), 찬드라프라카시 드위베디의 ''삼랏 프리트비라지'' (2022) 등이 있다. 또한 힌디어 텔레비전 시리즈 ''메인 딜리 훈'' (1998–1999)과 ''다르티 카 비어 요다 프리트비라지 차우한'' (2006–2009)도 제작되었다.

라케시 프라사드가 제작한 인도 애니메이션 영화 ''Veer Yodha Prithviraj Chauhan'' (2008)이 개봉되었다. 프리트비라지는 ''아마르 치트라 카타'' (25호)에서 다룬 최초의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대적인 재해석 중 상당수는 프리트비라지를 완벽한 영웅으로 묘사하고 힌두교 국가 통합의 메시지를 강조한다.

비디오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스 II HD: 더 포고튼''에는 "Prithviraj"라는 제목의 5개 장으로 구성된 캠페인이 포함되어 있다.

8. 평가 및 영향

프리트비라자 3세 통치 시대의 비문은 단 7개만 남아 있으며, 그중 어느 것도 왕 자신이 직접 발행한 것은 아니다.[8][9][10] 이 비문들은 그의 통치와 관련된 단편적인 정보들을 제공한다.

비문 이름연도 (빅람 삼밧)주요 내용
바르라 (바들라) 비문1177년 (1234년)내용 불명
팔로디 비문1179년 (1236년)프리트비라자의 신하인 라나카 카티야가 한 기증을 기록하고 있다.
마단푸르 비문 11182년 (1239년)프리트비라자가 찬델라 통치자 파라마르디의 영토를 침략했다는 내용이 있다.
마단푸르 비문 21182년 (1239년)프리트비라자의 아버지(소메슈바라)와 할아버지(아르노라자)의 이름을 언급하고, 그가 제자카부크티(찬델라 영토)를 약탈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마단푸르 비문 31182년 (1239년)시바의 이름(트리아얌바카, 찬드라셰카라, 트리푸란타)이 들어 있다.
우다이푸르 빅토리아 홀 박물관 비문1187년 (1244년)내용 불명
비살푸르 비문1187년 (1244년)내용 불명



나가리 프라차리니 사바(Nagari Pracharini Sabha)에서 출판된 ''프리트비라즈 라소''의 표지


후대의 기록에서 프리트비라자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14세기와 15세기에 쓰인 산스크리트어 문헌들은 그를 외국 왕에게 패배한 것 외에는 특별한 업적이 없는 실패한 왕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자이나교 작가들이 쓴 ''프라반다-친타마니''와 ''프리트비라자-프라반다''는 그를 무능하고 부적절하여 스스로 몰락을 자초했으며, 신하들을 학대하여 반역하게 만들었다고 서술한다. 반면, 역시 자이나교 작가가 쓴 ''함미라 마하카브야''는 다른 시각을 제시하는데, 프리트비라자를 용감한 인물로 그리면서 신하들이 탐욕 때문에 그를 배신했다고 주장한다. 이 작품은 차우한 영주를 만족시키기 위해 쓰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주인공 함미라의 조상인 프리트비라자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주로 라즈푸트 왕족의 후원을 받아 쓰인 전설적인 서사시 ''프리트비라즈 라소''는 프리트비라자를 위대한 영웅으로 묘사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프리트비라자는 점차 이슬람 세력에 맞서 싸운 애국적인 힌두교 전사로 형상화되었고, 그의 통치는 인도 역사의 두 주요 시대를 나누는 분기점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프리트비라자를 인도의 이슬람 정복 과정에서 패배한 힌두 왕으로 보는 관점은 13세기 초 하산 니자미의 ''타줄-마아시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니자미는 자신의 기록을 "믿음의 적들과의 전쟁"이자 "이슬람식 삶이 힌두교도들의 땅에 확립된 과정"으로 제시했다. ''타줄-마아시르''와 후대의 ''타바카트-이 나시리''(1260년경 저술)는 프리트비라자에 대한 구리드 왕조의 승리를 델리 술탄조 건국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한다.

16세기 이후의 전설에서는 프리트비라자가 실제 수도였던 아제메르가 아닌 인도의 정치 중심지 델리의 통치자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아불 파즐의 ''아이니 아크바리''에서는 차하마나 왕조와 아제메르의 연결 고리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처럼 프리트비라자를 델리와 연관시키는 것은 그를 이슬람 이전 인도 세력의 상징으로 부각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프리트비라자는 종종 "마지막 힌두 황제"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칭호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는데, 그 이후에도 남인도에서는 더 강력한 힌두 통치자들이 존재했고, 동시대 북인도에도 그에 버금가는 세력을 가진 힌두 통치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영국 장교 제임스 토드는 그의 저서 ''라자스탄 연대기와 고대 유적''에서 이 용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토드는 중세 페르시아어 이슬람 기록의 영향을 받아 프리트비라자를 주요 통치자로 간주하고 그의 패배를 인도의 이슬람 정복 과정에서 결정적인 사건으로 묘사했다. 토드의 영향으로 이후 여러 기록에서 프리트비라자를 "마지막 힌두 황제"로 칭하는 경향이 이어졌으며, 아제메르에 있는 프리트비라즈 기념비(''스마락'')의 비문에도 그가 "마지막 힌두 황제"로 기록되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Full Moon Days for Amsterdam, North Holland, Netherlands https://www.drikpanc[...] 2024-07-22
[2] 서적 Between 1182 and 1187, Prithviraj turned his attention towards his ancient rivals, the Solankis of Gujarat. The struggle was long drawn out and it seems that Gujarat ruler, Bhima II who had earlier beatun off an invasion by Ghurid ruler, Muizzuddin, defeated Prithviraj also. 2006
[3] 서적 Ancient India https://books.google[...] Motilal Banarsidass
[4] 서적 The Ebb and Flow of the Ghūrid Empire https://books.google[...] Sydney University Press 2018
[5] 서적 Finally, when his preparations were complete, Muhammad Ghori advanced in AD 1192 with 1,20,000 men to Lahore. From here he continued towards Tarain, the scene of his rout the year before. At the same time, an emissary from Muhammad was sent to Ajmer with a proposal that Prithviraj acknowledged Ghori suzerainty. The proposal was met with contempt by the Chauhan king. Instead, he marched to meet his enemy with a vast army that included cavalry, elephants, and a large body of infantry soldiers. As many as one hundred and fifty Rajput chiefs mustered to his banner 2006
[6] 서적 The Legacy of Muslim Rule in India https://books.google[...] Aditya Prakashan 1992
[7] 서적 Minhaz-us-Siraj and Ferishta's accounts state that after he fled the battlefield, Prithviraj was captured and put to death, while the Virudha-vidhi vidhvansa is the only text that asserts that the Chauhan king was killed on the battle-ground of Tarain. 2006
[8] 서적 History and Culture of the Indian People, Volume 05, The Struggle For Empire http://archive.org/d[...] Bharatiya Vidya Bhavan 2001
[9] 서적 A History of Rajasthan https://books.google[...] Rupa Publications
[10] 서적 Hinduism and the Ethics of Warfare in South Asia: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https://www.cambrid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