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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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라시 전투는 1757년 로버트 클라이브가 이끄는 영국 동인도 회사와 벵골 태수 시라주 앗 다울라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벵골은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방글라데시와 서벵골 지역을 아우르는 독립 국가였다. 영국은 벵골 나바브 시라주 앗 다울라의 요새 강화에 대한 불만을 이유로 캘커타를 공격하고, 윌리엄 요새를 점령하여 블랙홀 사건을 일으켰다. 전투는 벵골군의 화약이 젖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작되었고, 미르 자파르의 배신으로 벵골군이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하며 인도의 식민지 지배를 본격화했고, 프랑스는 인도에서 철수했다. 플라시 전투 이후 미르 자파르가 벵골 태수로 임명되었고, 영국은 24개 군의 자민다리를 수여받고 막대한 금액을 착취하며 인도 식민지화를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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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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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 이름 | 플라시 전투 |
일부 | 벵골 전쟁 및 7년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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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757년 6월 23일 |
장소 | 벵골, 플라시 |
좌표 | 23.80° N 88.25° E |
결과 | 영국의 승리 |
영토 변경 | 영국 동인도 회사가 벵골의 일부 지역을 합병 |
교전 세력 | |
교전 세력 1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동인도 회사 |
교전 세력 2 | 벵골 프랑스 동인도 회사 |
지휘관 | |
지휘관 1 | 로버트 클라이브 킬패트릭 소령 그랜트 소령 미르 자파르 알리 칸 (배신) 에어 쿠테 소령 나디아의 라자 크리슈나찬드라 로이 |
지휘관 2 | 시라즈 우드다울라 (처형) 디완 모한랄 미르 마단 (전사) 야르 르투프 칸 (배신) 라이 두르라브 (배신) St. Frais |
병력 규모 | |
병력 규모 1 (영국 동인도 회사) | 영국군: 750명 토파스: 100명 인도인 세포이: 2,100명 포병: 100명 선원: 50명 대포: 8문 (야포 6문, 곡사포 2문) 총합: 3,100명 |
병력 규모 2 (벵골) | 50,000명 야포 53문 (대부분 32, 24, 18파운드 포) |
병력 규모 (프랑스) | 포병 55명 (야포 6문) 총합: 45,000명 |
피해 규모 | |
피해 규모 1 | 사망: 27명 부상: 50명 |
피해 규모 2 | 사망 및 부상: 500명 |
관련 전투 |
2. 배경
18세기까지 영국 동인도 회사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포르투갈 동인도 회사 간의 경쟁은 종식되었다. 프랑스는 프랑스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인도에 샹데르나고르와 퐁디셰리 (현재의 푸두체리 구) 두 개의 기지를 확보하고, 인도 무역에 늦게 참여했지만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며 영국의 지배를 위협했다.
1756년 6월, 벵골의 나바브(태수) 시라지 웃 다울라는 관세 문제와 요새 강화에 대한 영국의 소극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콜카타의 윌리엄 요새를 공격했다. 1754년 프랑스-인디언 전쟁이 발발했고, 1756년 5월 17일 인도에서 영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프랑스는 콜카타 구원을 거부했다.[9] 이 공격으로 윌리엄 요새는 함락되었고, 영국인 포로들은 블랙홀 사건으로 다수가 사망했다.[9]
시라지 웃 다울라는 콜카타 점령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벵골 나바브 자리를 둘러싼 내부 분열과 군 총사령관 미르 자파르의 배신 음모에 직면했다. 미르 자파르는 영국과 은밀히 연락하며 나바브 자리를 약속받았다. 오만한 성격의 시라지 웃 다울라는 가신들의 반감을 샀고, 이는 음모를 더욱 키웠다.
1756년 12월, 마드라스에서 로버트 클라이브가 도착하여 1757년 1월 콜카타를 탈환하고, 2월에는 후글리에서 나바브 군대를 격파했다. 영국과 내통하던 미르 자파르는 시라지 웃 다울라에게 강화를 권했고, 시라지 웃 다울라는 이를 수용했다. 그러나 3월, 영국이 프랑스 거점 샹데르나고르를 함락하자, 시라지 웃 다울라는 영국에 축하를 표하면서도 프랑스인 망명자 인도는 거부하며 대립했다.
영국은 미르 자파르와 계속 내통하여 6월 4일 시라지 웃 다울라에 대한 비협조, 콜카타 공격 배상금 지불, 콜카타 남쪽 칼피까지의 영토를 영국 자민다리에 귀속시키는 조건으로 나바브 자리를 약속했다. 시라지 웃 다울라는 음모를 의심하여 미르 자파르를 찾아갔지만, 의심을 풀고 함께 영국군에 맞서기 위해 콜카타 북쪽 플라시로 향했다.
2. 1. 무굴 제국의 쇠퇴와 벵골의 번영
무굴 제국의 하위 행정 구역이었던 벵골 수바는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현재의 방글라데시와 인도의 서벵골 주를 포함하는 벵골 지역의 대부분을 아울렀다. 1741년부터 1751년까지 마라타 연맹은 라구지 봉슬레의 지휘 아래 벵골을 여섯 번 침공했다. 1751년, 마라타는 벵골 나바브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에 따르면 알리바르디 칸의 전 궁정 관리였던 미르 하비브(마라타로 전향)가 벵골 나바브의 명목상 통제 하에 오리사의 지방 총독으로 임명되었다.[2] 이로 인해 벵골 나바브는 벵골과 비하르의 차우트로 연간 120만인도 루피를 지불하기로 합의한 마라타의 종속국이 되었고, 마라타는 다시는 벵골을 침공하지 않기로 동의했다.[3][4] 벵골 나바브는 또한 이전 몇 년간의 "차우트" 미납액에 대한 320만인도 루피를 마라타에게 지불했다.[5]영국 동인도 회사는 마드라스의 포트 세인트 조지, 콜카타의 포트 윌리엄, 그리고 서인도의 봄베이 성에 세 개의 주요 기지를 두고 영-무굴 전쟁 이후 인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기지들은 잉글랜드의 이사회에서 임명된 대통령과 의회가 통치하는 독립적인 총독부였다. 영국은 다양한 군주와 나바브들과 동맹을 맺어 찬탈자와 반란자로부터의 안보를 약속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나바브들은 안보를 대가로 그들에게 양보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18세기까지 영국 동인도 회사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또는 포르투갈 동인도 회사 간의 모든 경쟁은 종식되었다. 프랑스 역시 루이 14세 하에 프랑스 동인도 회사를 설립했고, 인도에 벵골의 샹데르나고르와 카르나틱 지역 해안의 퐁디셰리 (현재의 푸두체리 구) 두 개의 중요한 기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둘 다 퐁디셰리 총독부의 통치를 받았다. 프랑스는 인도 무역에 늦게 참여했지만, 빠르게 인도에 자리를 잡았고 영국의 지배를 넘볼 태세였다.
2. 2. 유럽 열강의 인도 진출
무굴 제국의 하위 행정 구역이자 벵골 나바브 치하의 독립 국가였던 벵골 수바는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 방글라데시와 인도의 서벵골 주를 포함하는 벵골 지역의 대부분을 아울렀다. 1741년부터 1751년까지 마라타 연맹은 라구지 봉슬레의 지휘 아래 벵골을 여섯 번 침공했다. 1751년, 마라타는 벵골 나바브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벵골 나바브는 마라타의 종속국이 되었고, 마라타는 다시는 벵골을 침공하지 않기로 동의했다.[3][4]영국 동인도 회사는 마드라스의 포트 세인트 조지, 콜카타의 포트 윌리엄, 봄베이 성에 세 개의 주요 기지를 두고 인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영국은 다양한 군주와 나바브들과 동맹을 맺어 안보를 약속하는 정책을 채택했고, 나바브들은 안보를 대가로 그들에게 양보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18세기까지 영국 동인도 회사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또는 포르투갈 동인도 회사 간의 경쟁은 종식되었다.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인도에 벵골의 샹데르나고르와 카르나틱 지역 해안의 퐁디셰리 (현재의 푸두체리 구) 두 개의 중요한 기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프랑스는 인도 무역에 늦게 참여했지만, 빠르게 인도에 자리를 잡았고 영국의 지배를 넘볼 태세였다.
2. 3. 7년 전쟁과 카르나틱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은 영국과 프랑스 간의 권력 투쟁과 인도 아대륙에서 유럽의 군사적 우위 및 정치적 개입의 시작을 알렸다. 1746년 9월, 마에 드 라 부르도네는 해군 함대를 이끌고 마드라스를 포위, 점령했다.(마드라스 전투) 그러나 뒤플렉스는 이 합의를 어겼다. 안와루딘 칸이 영국을 지지하며 개입했지만, 연합군은 프랑스군에 의해 궤멸되었다. 영국군은 퐁디셰리를 포위했지만 실패했다. 1748년 아헨 조약으로 마드라스는 영국에 반환되었다.
아헨 조약 이후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지역 군주들의 분쟁에 간접적으로 개입했다. 뒤플렉스는 데칸의 니잠과 카르나틱 주의 나바브 자리를 놓고 벌어진 분쟁에 개입했다. 두 경우 모두 뒤플렉스의 후보자들이 조작과 암살을 통해 왕좌를 차지했다. 1751년 중반, 프랑스 후보인 찬다 사히브는 영국 후보인 왈라자의 거점인 트리치노폴리를 포위했다.
1751년 9월 1일, 클라이브 대위는 아르코트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찬다 사히브는 군대 일부를 보내 도시를 되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콘지에바람과 트리치노폴리에서의 성공으로 영국은 카르나틱을 확보했고 왈라자는 나바브가 되었다.
알와르디 칸은 무르시다바드를 점령한 후 벵골 나바브가 되었다. 그는 유럽인들의 요새 강화를 허용했지만, 전쟁 유지를 위해 많은 돈을 징수했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의 대리전을 경계했다. 영국은 파루크시야르의 파르만을 완전히 누리지 못한다고 불평했고, 원주민 상인들에게 관세 없이 거래할 수 있는 통행증을 부여하며 나바브의 수입에 해로운 행위를 했다.
1756년 4월, 알와르디 칸이 사망하고 시라주 앗 다울라가 뒤를 이었다. 그는 유럽 회사들이 인도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이윤을 의심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요새를 개선하자 그는 즉시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영국이 거부하자, 나바브는 코심바자르를 포위하고 캘커타로 이동했다. 캘커타의 방어는 허약했고, 1756년 6월 16일, 시라즈의 군대가 도시를 점령했고, 6월 20일 요새가 항복했다.
캘커타 포위 공격에서 포로들은 캘커타의 블랙홀에 갇혔다. 가로 세로 18x 크기의 감옥에 146명이 갇혔고, 6월 21일 문이 열렸을 때 23명만이 살아남았다. 나바브는 상황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나바브의 군대는 캘커타와 주변 지역의 영국 공장을 약탈했다.
1756년 8월 16일, 캘커타 함락 소식이 마드라스에 전해지자, 클라이브 대령과 왓슨 제독의 지휘 하에 원정군이 파견되었다. 1757년 1월 2일, 캘커타를 되찾고 의회가 복원되었다. 윌리엄 요새가 강화되었고 도시 북동부에 방어 태세가 준비되었다.
2. 4. 시라주 앗 다울라의 즉위와 콜카타 점령
알와르디 칸은 그의 군대가 무르시다바드를 공격하여 점령한 후 벵골 나바브의 왕위에 올랐다. 알리바르디가 벵골의 유럽인들에게 취한 태도는 엄격했다고 한다. 마라타의 벵골 침공 동안 그는 유럽인들의 요새 강화와 영국인들의 마라타 도랑 건설을 허용했다. 반면에 그는 전쟁 유지를 위해 그들로부터 많은 돈을 징수했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가 지역 군주와 통치자를 이용하여 대리전을 벌였던 남인도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알와르디는 그러한 상황이 그의 주에서 발생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따라서 유럽인들과의 거래에서 신중함을 발휘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마찰이 있었다. 영국은 항상 그들이 파루크시야르가 발행한 1717년의 파르만(farman)을 완전히 누리지 못한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영국은 나바브의 백성을 보호하고, 원주민 상인들에게 관세 없이 거래할 수 있는 통행증을 부여하고, 그들의 지역으로 들어오는 상품에 대해 막대한 관세를 부과했는데, 이는 나바브의 수입에 해로운 행위였다.[1]1756년 4월, 알와르디 칸이 사망하고 그의 23세 손자 시라주 앗 다울라가 그의 뒤를 이었다. 그의 성격은 맹렬한 성질과 미약한 이해력의 조합이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유럽 회사들이 인도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이윤을 의심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그들 간의 또 다른 전쟁을 예상하여 요새를 개선하기 시작하자 그는 허가 없이 그렇게 했다는 이유로 즉시 그러한 활동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2] 영국이 건설을 중단하기를 거부하자, 나바브는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코심바자르의 요새와 공장을 포위하고 여러 영국 관리를 포로로 잡은 후 캘커타로 이동했다.[3] 캘커타의 방어는 허약하고 미미했다. 수비대는 180명의 군인, 50명의 유럽인 자원병, 60명의 유럽인 민병대, 150명의 아르메니아인과 포르투갈인 민병대, 35명의 유럽인 포병 및 40명의 선박 자원병으로 구성되었으며, 거의 50,000명의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나바브의 군대에 맞섰다. 6월 16일, 시라즈의 군대가 도시를 점령했고, 6월 20일, 잠시의 포위 공격 후 요새가 항복했다.[4][5][6][7][8]
1756년 6월, 벵골의 나바브(태수) 시라지 웃 다울라는 관세 문제와 요새 강화에 대한 영국의 답변에 불만을 품고, 콜카타의 윌리엄 요새를 공격했다. 그보다 앞서, 1754년에는 프랑스-인디언 전쟁이 발발했고, 1756년 5월 17일 인도에서 영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프랑스는 콜카타 구원을 거부했다.[9] 이 공격으로 윌리엄 요새는 점령되었고, 영국인 포로가 감옥 내에서 다수 사망하는 블랙홀 사건이 일어났다.[9]
캘커타 포위 공격에서 포로로 잡힌 사람들은 시라즈에 의해 그의 경비대 장교들에게 인도되었고, 그들은 그들을 윌리엄 요새의 일반 감옥인 캘커타의 블랙홀에 가두었다. 이 감옥은 크기가 18x이고 작은 창문 두 개가 있었으며 원래 영국인들이 단 6명의 죄수를 가두기 위해 사용했지만, 146명의 죄수가 갇혔다. 6월 21일, 감옥 문이 열렸고 146명 중 23명만이 걸어 나왔고 나머지는 질식, 열사병 및 섬망으로 사망했다.[10] 나바브는 자신의 포로들이 갇힌 상황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결과 대부분의 포로들이 불행하게 사망했다. 한편, 나바브의 군대와 해군은 캘커타 시와 주변 지역의 다른 영국 공장을 약탈하는 데 바빴다.[11][12][13][14]
3. 전투의 전개
1757년 6월 23일, 로버트 클라이브가 이끄는 영국 동인도 회사군은 프랑스 세력과 연합한 벵골 태수(나바브) 시라지 웃다울라와 콜카타 북쪽 플라시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투는 몹시 덥고 습한 오전 7시경 벵골 나바브 측의 포격으로 시작되었다.
클라이브가 이끄는 영국 동인도 회사군은 유럽인 병사 950명, 인도인 용병(시파이) 2,100명, 9문의 포와 100명의 포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프랑스 동인도 회사와 동맹한 벵골 나바브 시라주 앗다울라는 보병 6만 2000명, 기병, 그리고 40명의 프랑스 병사가 조작하는 중포를 포함한 53문의 포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벵골 나바브 군대의 대부분을 이끌던 미르 자파르는 영국과 내통하고 있었으며,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4] 시라주 앗다울라는 미르 자파르가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 것을 그의 작전이라고 믿었다. 이 때문에 벵골 나바브에게 충실한 부대는 모한 랄과 미르 마단이 이끄는 12,000명과 프랑스 포병뿐이어서, 실제 전투는 거의 대등한 병력으로 진행되었다.
낮이 되면서 몬순기(우기)의 폭우로 소강상태가 되었는데, 영국 동인도 회사군은 신속하게 장비를 비로부터 보호하고 비가 멈출 때까지 대기했다.[4] 그러나 벵골 나바브 군의 병사들은 훈련 부족으로 상황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폭우 속에 화약통과 총, 포를 방치하여 화약이 물에 젖어 점화되지 않게 되었다.
비가 멈춘 오후 2시경부터 반격을 시작한 영국 동인도 회사군 앞에서 시라주 앗다울라의 군대는 화약이 물에 젖어 화기를 사용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공격받아 미르 마단이 전사하는 등 참패했다. 한편, 미르 자파르의 군대는 방관만 하고 있었다.
미르 마단의 전사 후, 시라주 앗다울라는 미르 자파르에게 조언을 구했다.[4] 미르 자파르는 코란을 얹고 시라주 앗다울라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내일 자신이 영국군에 대한 총공격을 할 것이니, 오늘은 이미 해가 져서 전투를 멈춥시다"라고 말했다.[4]
하지만 모한 랄은 전투 중지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시라주 앗다울라는 미르 자파르를 신뢰하고 전군에 전투 중지를 명했다.[4]
얼마 지나지 않아 모한 랄이 걱정한 대로 벵골군에 동요가 시작되어 도망가는 병사가 속출하여 괴멸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시라주 앗다울라도 당황하여 수도 무르시다바드로 도망쳤다.[4] 한편, 전투 중지를 제안한 미르 자파르는 영국군에 합류하여 클라이브에게 승리의 축의를 전했다.[4]
이 전투에서 양군의 손해는 영국군 전사 22명, 부상 50명에 불과했고, 벵골 나바브 군도 500명이 사상당했을 뿐이었다. 호리구치 마사키는 "역사적 의의에 비해 싸움의 규모는 작았다"고 평가했다.[4]
3. 1. 클라이브의 콜카타 탈환과 알리나가르 조약
1757년 1월, 로버트 클라이브는 마드라스에서 도착하여 콜카타를 탈환했다.[4] 2월에는 후글리에서 나바브의 군대를 격파했다.[4] 이때, 영국과 내통하던 미르 자파르는 시라지 웃 다울라에게 강화를 권했고, 시라지 웃 다울라도 이에 응했다.1757년 1월 9일, 쿡 대위와 킬패트릭 소령 휘하의 650명 병력이 후글리 구 북쪽 약 37.01km 떨어진 후글리를 공격하여 약탈했다. 이 공격을 알게 된 나바브는 군대를 소집하여 캘커타로 진격했고, 2월 3일에 주력 부대와 함께 도착하여 마라타 도랑 너머에 야영했다. 시라지 우드 다울라는 오미춘드의 정원에 본부를 설치했다. 그들의 군대 소규모 부대가 마을 북쪽 교외를 공격했지만, 그곳에 배치된 리우테넌트 르보메의 부대에 의해 격퇴되어 50명의 포로와 함께 돌아갔다.[1]
클라이브는 2월 4일 아침에 나바브의 진영을 기습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자정, 600명의 선원, 650명의 유럽인 부대, 100명의 포병, 800명의 세포이, 6문의 6파운드포로 구성된 병력이 나바브의 진영에 접근했다. 오전 6시에 짙은 안개의 엄호 아래, 선봉대가 나바브의 선발대를 마주쳤고, 그들은 화승총과 로켓을 발사한 후 도망쳤다. 그들은 어느 정도 거리를 전진하여 오미춘드의 정원 맞은편에 이르렀을 때, 오른쪽에 기병의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기병대는 영국군에서 약 27.43m 이내로 접근했고, 사격선이 발포하여 많은 수를 죽이고 나머지를 흩어지게 했다. 안개는 시야를 방해하여 걸을 수 있는 거리 이상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보병과 포병은 양쪽에서 무작위로 사격하며 천천히 움직였다. 클라이브는 정원 남쪽에 있는 좁고 높은 둑길을 이용하여 정원에 있는 나바브의 숙소를 공격할 의도였다. 나바브의 군대는 그 통로를 바리케이드로 막았다. 오전 9시쯤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면서, 영국군은 나바브의 포병이 마라타 도랑 건너편에서 발사한 두 문의 중포에 압도당했다. 영국군은 사방에서 기병과 머스킷 사격을 받았다. 그 후 나바브군은 약 1.61km 더 떨어진 다리로 향했고, 마라타 도랑을 건너 캘커타에 도착했다. 클라이브 군의 총사망자는 57명, 부상자는 137명이었다. 나바브군은 22명의 뛰어난 장교, 600명의 일반 병사, 4마리의 코끼리, 500마리의 말, 일부 낙타, 많은 수의 황소를 잃었다.[2]
이 공격으로 나바브는 겁을 먹고 2월 9일에 회사와 알리나가르 조약을 체결하여 회사의 공장을 복구하고 캘커타의 요새화를 허용하며 이전의 특권을 복원하는 데 동의했다. 나바브는 군대를 수도 무르시바바드로 철수시켰다.[2]
하지만, 3월에 영국이 프랑스의 거점 샹데르나고르를 함락시켰을 때, 시라지 웃 다울라는 영국에 축의를 표했지만, 나바브에게 도망쳐 온 프랑스인의 인도는 거부하여 대립이 생겼다.[4]
3. 2. 영국과 미르 자파르의 밀약
시라지 웃 다울라는 샹드나가르 공격 소식에 분노하여 이전의 영국에 대한 증오심을 다시 느꼈다. 그러나 아흐마드 샤 두라니 휘하의 아프가니스탄 군대가 델리를 침공하고, 서쪽에서는 마라타족의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영국에 맞서 전군을 배치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과 나바브 사이에는 깊은 불신이 싹텄고, 시라주는 프랑스 공장 책임자인 장 로와 드 부시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또한 나바브는 라이 둘라브 휘하의 대규모 군대를 무르시디바드 남쪽 약 48.28km 떨어진 플라시로 이동시켰다.[6]나바브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그의 궁정에서 커져갔다. 벵골의 상인 세스들은 시라즈의 통치 하에서 재산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을 느꼈고, 위협을 받으면 그들을 방어하기 위해 야르 루투프 칸을 고용했다.[7] 윌리엄 와츠는 로버트 클라이브에게 통치자를 전복하려는 궁정의 음모를 알렸다. 이 음모에는 군대의 지불 책임자인 미르 자파르, 라이 둘라브, 야르 루투프 칸, 상인 오미찬드 등이 포함되었다.[7]
미르 자파르의 초청으로 음모에 참여한 클라이브는 회사 고위 관리 위원회에 이 문제를 회부했고, 1757년 5월 1일 위원회는 동맹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영국과 미르 자파르 사이에는 상당한 재정적 인센티브를 대가로 나바브를 전복하는 것을 돕겠다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역사학자 W. 달림플에 따르면, 자갓 세스는 클라이브와 동인도 회사에게 400만파운드(2019년 기준 4.2억파운드), 회사 군대 지불을 위해 월 11만인도 루피(2019년 기준 143만파운드) 및 기타 토지 소유권을 제공했다.[7] 5월 2일, 클라이브는 야영지를 해체하고 절반의 병력을 캘커타로, 나머지 절반은 샹드나가르로 보냈다.
미르 자파르와 세스들은 영국과 자신의 연합을 오미찬드에게 비밀로 하고 싶어했지만, 오미찬드가 이를 알아차리고 300만 루피(30만파운드, 2019년 기준 300만파운드 이상)를 주지 않으면 음모를 배신하겠다고 위협했다. 클라이브는 위원회에 편법을 제안하여 두 개의 조약을 작성했다. 하나는 오미찬드에 대한 언급이 없는 백지에 작성된 진짜 조약이고, 다른 하나는 오미찬드의 원하는 조건을 담은 적색지에 작성되어 그를 속이는 것이었다. 위원회 위원들은 두 조약에 모두 서명했지만, 왓슨 제독은 진짜 조약에만 서명했고, 그의 서명은 가짜 조약에 위조되었다.[8][9] 1757년 6월 4일, 미르 자파르는 두 조약과 군대, 해군 전대 및 위원회에 대한 기부금을 위한 별도 조항에 서명했다.
클라이브는 1773년 5월 10일, 인도에서의 그의 행동에 대한 의회 조사 기간 동안 국회의 하원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자신을 변호했다.
1756년 6월, 벵골의 나바브(태수) 시라지 웃 다울라는 관세 문제와 요새 강화에 대한 영국의 답변에 불만을 품고 콜카타의 윌리엄 요새를 공격했다. 1754년 프랑스-인디언 전쟁이 발발했고, 1756년 5월 17일 인도에서 영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프랑스는 콜카타 구원을 거부했다. 이 공격으로 윌리엄 요새는 점령되었고, 블랙홀 사건이 일어났다.
시라지 웃 다울라는 콜카타에서의 승리로 이름을 떨쳤지만, 벵골 나바브 자리를 두고 내분이 있었고, 군 총사령관 미르 자파르가 영국과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나바브의 오만한 태도는 가신들의 반감을 샀고, 그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가세하여 이 음모는 더욱 커져갔다.
1757년 1월, 마드라스에서 로버트 클라이브가 도착해 콜카타를 탈환했고, 2월에는 후글리에서 나바브 군대를 격파했다. 이때 미르 자파르는 시라지 웃 다울라에게 강화를 권했고, 시라지 웃 다울라도 이에 응했다. 3월 영국이 프랑스 거점 샹데르나고르를 함락시켰을 때, 시라지 웃 다울라는 영국에 축의를 표했지만, 프랑스인 인도는 거부하여 대립이 생겼다.
영국은 미르 자파르와 계속 내통하여, 6월 4일 시라지 웃 다울라에 대한 비협조, 콜카타 공격 배상금 지불, 콜카타 남쪽 칼피까지의 땅이 영국의 자민다리에 놓이는 조건으로 그에게 나바브 자리를 약속했다. 시라지 웃 다울라는 자신을 향한 음모에 불안을 느껴 미르 자파르에게 확인하기 위해 그의 저택으로 갔고, 의심이 풀리자 그와 함께 영국군을 맞이하기 위해 플라시로 향했다.
3. 3. 플라시로의 진군

1757년 6월 12일, 클라이브는 캘커타에서 온 기병대 메이저 킬패트릭과 합류했다. 연합군은 유럽인 613명, 야전포 8문과 곡사포 2문을 통제하는 포병 171명, 토파스(혼혈) 91명, 세포이(인도 용병) 2100명(주로 두사드족)[10][11] 및 선원 150명으로 구성되었다. 6월 13일, 군대는 무르시드아바드로 출발했다. 클라이브는 나바브의 사자들에게 2월 9일 조약과 관련한 불만을 제기하기 위해 무르시드아바드로 군대를 진군시키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서한을 보냈다. 인도군은 육로로 행군했고, 보급품과 포병을 실은 유럽인들은 200척의 배를 이용하여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6월 14일, 클라이브는 시라지에게 선전포고를 보냈다. 6월 15일, 시라지는 미르 자파르가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는 의심으로 그의 궁전에 대한 공격을 명령한 후, 미르 자파르로부터 전투에서 영국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 후 그는 모든 군대에게 플라시로 이동하라고 명령했지만, 군대는 체불된 급여가 지급될 때까지 도시를 떠나기를 거부했다. 이러한 지연으로 인해 군대는 6월 21일에야 플라시에 도착했다.
6월 16일, 영국군은 카트와에서 북쪽으로 약 19.31km 떨어진 전략적으로 중요한 마을과 요새에 도달했다. 이곳에는 많은 양의 곡물과 군수 물자가 비축되어 있었고, 아지 강이 흐르고 있었다. 6월 17일, 클라이브는 제39 보병연대의 쿠트 소령 휘하에 유럽인 200명, 세포이 500명, 야전포 1문 및 소형 곡사포 1문을 파견하여 요새를 점령하도록 했다. 파견대는 자정에 상륙했을 때 마을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6월 19일 새벽, 쿠트 소령은 강둑으로 가서 흰 깃발을 흔들었지만, 총탄과 총독의 반항적인 모습만 마주했다. 쿠트는 영-인도군을 분산시켰다. 세포이는 강을 건너 성벽에 발포했고, 유럽인들은 요새에서 더 멀리 건너갔다. 수비대는 진격하는 군대를 보고 진지를 포기하고 북쪽으로 도망쳤다. 이 소식을 들은 클라이브와 나머지 군대는 6월 19일 저녁에 카트와에 도착했다.
이 시점에서 클라이브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나바브는 미르 자파르와 화해했고 그를 군대의 한쪽에 배치했다. 미르 자파르는 클라이브에게 그들 사이의 조약을 지킬 의사가 있음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냈다. 클라이브는 이 문제를 부하들에게 넘기기로 결정하고 6월 21일에 군사 회의를 열었다. 클라이브가 그들에게 제기한 질문은 현재 상황에서 다른 지원 없이 군대가 즉시 코심바자르 섬으로 건너가 나바브를 공격해야 하는지, 아니면 카트와에서 진지를 강화하고 마라타나 다른 인도 세력의 지원을 기다려야 하는지였다. 회의에 참석한 20명의 장교 중 클라이브를 포함한 13명이 즉각적인 행동에 반대했고, 쿠트 소령을 포함한 나머지는 최근의 성공과 군대의 높은 사기를 언급하며 찬성했다. 회의는 해산되었고, 한 시간의 심의 끝에 클라이브는 6월 22일 아침에 바기라티 강(후글리 강의 또 다른 이름)을 건너라는 명령을 내렸다.
6월 23일 1:00, 그들은 플라시 마을 너머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들은 둑과 진흙 벽으로 둘러싸인 길이 약 731.52m, 폭이 약 274.32m인 락샤 바그라고 불리는 인접한 망고 숲을 빠르게 점령했다. 그 길이는 바기라티 강에 대해 대각선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숲의 북쪽에 있는 강둑에는 석조 벽으로 둘러싸인 사냥터가 있었고, 클라이브는 그곳에 숙소를 잡았다. 숲은 나바브의 참호에서 약 약 1.61km 떨어져 있었다. 나바브의 군대는 클라이브보다 26시간 먼저 자리를 잡았다. 장 르(Jean Law) 휘하의 프랑스 파견대는 이틀 안에 플라시에 도착할 것이다. 그들의 군대는 강과 직각으로 약 182.88m 뻗어있고 북동쪽 방향으로 약 4.83km 꺾이는 흙 참호 뒤에 자리 잡고 있었다. 참호를 따라 꺾이는 지점에는 대포가 설치된 요새가 있었다. 요새 동쪽 약 274.32m에는 나무로 덮인 작은 언덕이 있었다. 영국군 위치에서 약 731.52m 떨어진 곳에는 작은 탱크(저수지)가 있었고, 약 91.44m 더 남쪽에는 더 큰 탱크가 있었으며, 이 둘 다 큰 흙 무더기로 둘러싸여 있었다.
3. 4. 전투의 경과

6월 23일 새벽, 나바브의 군대는 야영지에서 나와 숲을 향해 진격했다. 보병 3만 명, 기병 2만 명, 그리고 300문의 포병으로 구성된 대규모 병력이었다. 이들은 드 생 프레가 지휘하는 프랑스 포병 50명의 지원을 받았다. 프랑스군은 숲에서 약 1.61km 이내의 연못에 포를 전진 배치했고, 그 뒤에는 미르 마단 칸과 디완 모한랄이 지휘하는 기병 5,000명과 보병 7,000명이 있었다. 나머지 45,000명의 군대는 클라이브의 군대를 포위하려는 형태로 배치되었으며, 우익은 라이 두르라브, 중앙은 야르 루투프 칸, 좌익은 미르 자파르가 지휘했다.[10]
클라이브는 상황을 지켜보며 미르 자파르로부터 소식을 기다렸다. 그는 자신의 부대에게 숲에서 나와 더 큰 연못을 향해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군대는 유럽인 보병 750명, 토파스 100명, 세포이 2,100명, 포병 100명, 그리고 50명의 해군으로 구성되었다. 포병은 6파운드포 8문과 곡사포 2문이었다.
오전 8시, 프랑스 포병대가 첫 포격을 가해 영국군에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를 신호로 나바브의 포병대도 맹렬한 포격을 시작했다. 영국군은 프랑스군과 나바브 군의 포격에 맞서 싸웠지만, 피해가 발생했다. 오전 8시 30분까지 영국군은 유럽인 10명과 세포이 20명을 잃었다. 클라이브는 군대에 숲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하여 피해를 줄였다.

세 시간이 지나도 큰 진전이 없자, 클라이브는 참모 회의를 소집하여 해질녘까지 현재 위치를 유지하고 자정에 나바브의 진영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회의 직후 폭우가 쏟아졌는데, 영국군은 탄약을 보호했지만 나바브 군대는 그렇지 못해 화약이 젖어 발사 속도가 느려졌다.
비가 그치자 미르 마단 칸은 영국군의 대포가 무력화되었다고 판단하고 기병대를 이끌고 돌격했지만, 영국군의 포도탄 공격으로 치명상을 입고 후퇴했다.
시라즈는 미르 마단이 치명상을 입었다는 소식에 동요하여 미르 자파르와 화해를 시도했다. 미르 자파르는 자신의 봉사를 약속했지만, 이 소식을 클라이브에게 전하고 진격을 촉구했다. 이후 라이 두르라브는 시라즈에게 군대를 물리고 무르시다바드로 돌아갈 것을 권했고, 시라즈는 이 조언에 따라 2,000명의 기병대를 거느리고 무르시다바드로 출발했다.
오후 2시경, 나바브의 군대는 포격을 멈추고 퇴각하기 시작했고, 생 프레와 그의 포병대는 지원 없이 남겨졌다. 이를 본 마이클 킬패트릭 소령은 생 프레의 위치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했고, 클라이브는 이를 알고 군대를 이끌고 생 프레의 위치를 공격하여 오후 3시에 점령했다.

영국군이 더 큰 웅덩이로 이동하자, 나바브 군대의 좌익(미르 자파르의 부대)이 나머지 부대보다 뒤쳐져 있는 것이 관찰되었다. 클라이브는 이들이 미르 자파르의 부대임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진격을 막기 위해 병력을 보냈다.

한편, 영국 야전포는 나바브의 진영을 포격하기 시작했고, 나바브의 많은 병력과 포병대가 참호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클라이브는 병력을 나누어 참호를 효과적으로 포격했고, 나바브 군대는 혼란에 빠졌다.
이 시점에서 클라이브는 뒤쳐진 부대가 미르 자파르의 부대임을 깨닫고, 요새와 그 동쪽 언덕을 점령하는 데 집중했다. 클라이브는 3방향 공격을 명령했고, 오후 4시 30분에 언덕과 요새를 점령했다. 오후 5시까지 영국군은 참호와 진영을 점령했고, 오후 8시에 다우드푸르에서 약 9.66km 더 나아간 곳에서 멈췄다.
영국군의 손실은 전사 22명, 부상 50명이었고, 나바브 군대는 주요 장교를 포함하여 500명의 병력을 잃었다.
3. 5. 영국의 승리와 시라주 앗 다울라의 최후
6월 23일 저녁, 클라이브는 미르 자파르로부터 만나자는 서신을 받았다. 클라이브는 다음 날 아침 다우드푸르에서 미르 자파르를 만나겠다고 답했다. 다음 날 아침 미르 자파르가 다우드푸르의 영국군 진지에 도착하자, 클라이브는 그를 껴안고 벵골, 비하르, 오디샤의 나바브로 경례했다. 그는 미르 자파르에게 시라주 앗 다울라의 탈출과 그의 보물 약탈을 막기 위해 무르시다바드로 서둘러 갈 것을 권고했다. 미르 자파르는 6월 24일 저녁에 그의 군대와 함께 무르시다바드에 도착했다. 클라이브는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시도가 있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자, 유럽인 병사 200명과 세포이 300명의 경호원과 함께 6월 29일 무르시다바드에 도착했다. 클라이브는 나바브의 궁전으로 안내되었고, 그곳에서 미르 자파르와 그의 장교들의 영접을 받았다. 클라이브는 미르 자파르를 왕좌에 앉히고 그를 나바브로 인정하며 금 루피 한 접시를 그에게 전달했다.시라주 앗 다울라는 6월 23일 자정에 무르시다바드에 도착했다. 그는 회의를 소집하여 일부는 영국에 항복할 것을, 일부는 전쟁을 계속할 것을, 일부는 도주를 연장할 것을 권고했다. 6월 24일 22시, 시라주 앗 다울라는 변장을 하고 아내와 귀중한 보석을 가지고 배를 타고 북쪽으로 탈출했다. 그의 의도는 장 로의 도움을 받아 파트나로 도망가는 것이었다. 6월 24일 자정에 미르 자파르는 시라주 앗 다울라를 추격하기 위해 여러 무리를 보냈다. 7월 2일, 시라주 앗 다울라는 라즈마할에 도착하여 버려진 정원에 몸을 숨겼지만, 이전에 시라주 앗 다울라에 의해 체포되어 처벌받았던 한 남자에 의해 곧 발견되어 미르 자파르의 형제인 지역 군사 총독에게 배신당했다. 그의 운명은 미르 자파르가 이끄는 회의에서 결정될 수 없었고, 시라주 앗 다울라를 그날 밤 살해한 미르 자파르의 아들 미란에게 넘겨졌다. 그의 유해는 다음 날 아침 무르시다바드 거리에서 행진되었고, 알리바르디 칸의 묘에 묻혔다.
영국과 미르 자파르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 따르면, 영국은 마라타 해자 내의 모든 토지와 그 너머 약 548.64m의 토지, 그리고 캘커타와 바다 사이의 모든 토지의 자민다리를 획득했다. 1717년의 칙령을 확인하는 것 외에도, 이 조약은 또한 해군 함대, 육군 및 위원회에 대한 기부를 포함하여 영국에 대한 손실에 대해 2200만원(2,750,000GBP)를 반환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시라주 앗 다울라의 재산이 예상보다 훨씬 적은 것으로 드러나자, 6월 29일 세스 및 라이 두르라브와 함께 열린 회의에서 금액의 절반을 즉시 지불하기로 결정했다. 3분의 2는 화폐로, 3분의 1은 보석 및 기타 귀중품으로 지불하기로 했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오미춘드에게 조약과 관련하여 아무것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를 듣고 그는 정신이 나갔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플라시 전투는 인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전투의 승리로 영국 동인도 회사는 벵골 지역을 장악하고, 나아가 인도 전체를 식민 지배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반면, 프랑스는 인도에서 세력을 잃고 물러나게 되었다.
이 전투는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인도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벵골의 시인 나빈 찬드라 센은 이 시기를 "인도에게 영원히 지속될 암흑의 밤"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영국의 식민 통치는 가혹했다. 전투 이후, 영국은 미르 자파르를 벵골의 새로운 통치자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그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막대한 돈을 빼앗았다.
이후 1764년 북사르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하면서, 영국은 인도의 식민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4. 1. 벵골의 종속화와 영국의 패권 확립
플라시 전투 결과, 프랑스는 벵골에서 더 이상 중요한 세력이 아니게 되었다. 1759년, 영국은 마술리파탐에서 더 큰 규모의 프랑스 수비대를 격파하고 북부 사르카르를 확보했다. 미르 자파르는 영국에 종속된 자신의 지위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느껴, 1759년 네덜란드가 영국에 대항하여 벵골에서 영국을 몰아내도록 부추기기 시작했다. 1759년 말, 네덜란드는 영국과 네덜란드가 공식적으로 전쟁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 벵골에 있는 친수라 정착지를 강화한다는 구실로 7척의 대형 선박과 1400명의 병력을 자바에서 벵골로 보냈다. 그러나 클라이브는 즉시 육상 및 해상 공격 작전을 개시하여 1759년 11월 25일 친수라 전투에서 훨씬 더 큰 네덜란드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영국은 미르 자파르를 폐위시키고 미르 카심을 벵골의 나바브로 임명했다. 이로써 영국은 벵골에서 지배적인 유럽 세력이 되었다. 클라이브는 건강 악화로 영국으로 돌아갔을 때 아일랜드 귀족 작위를 받아 플라시의 클라이브 남작이 되었고, 영국 하원 의석도 얻었다.데칸과 하이데라바드 지역, 예를 들어 아르코트, 반데와시, 탄조르 및 쿠달로르 지역에서도 투쟁이 계속되었으며, 1761년에는 아이어 쿠트 대령이 퐁디셰리에서 하이데르 알리의 지원을 받은 드 랄리 휘하의 프랑스 수비대를 격파하면서 절정에 달했다.[1] 프랑스는 파리 조약을 통해 1763년에 퐁디셰리를 돌려받았지만, 인도에서 이전의 지위를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이후 영국은 수년간 사실상 아대륙의 지배자로 부상하게 되었다.[1]
영국 동인도 회사가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벵골 태수 연합군을 격파하면서 영국의 인도 지배는 본격화되었다. 한편, 프랑스는 이듬해부터 남인도에서 발생한 제3차 카르나틱 전쟁에서도 패배하여 퐁디셰리를 점령당하면서 인도에서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플라시 전투는 인도에게 있어서 앞으로 오랫동안 지속될 영국의 식민지 지배의 서곡에 불과했다. 벵골의 시인 Nabinchandra Sen|나빈 찬드라 센영어은 이 전투 이후에 찾아온 영국 지배를 "인도에게 영원히 지속될 암흑의 밤"에 비유했다.[2]
전투 직후, 미르 자파르가 새로운 벵골 태수로 임명되었고, 시라주 웃다울라는 체포되어 살해되었다.[3] 영국은 비밀 조약으로 맺어진 조항에 따라 미르 자파르로부터 콜카타의 한 군을 포함한 24개 군의 자민다리를 수여받는 동시에 다양한 명목으로 3000만인도 루피를 넘는 금액을 착취하며 점차 괴뢰화해 갔다.[2][4] 또한, 클라이브는 전투 후에 무굴 제국의 황제 알람기르 2세로부터 받은 칙령에서 "무굴 제국의 꽃이며, 보호자이며, 가장 용감한 병사"로 평가받았다.[5]
1764년 10월의 북사르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하면서, 동인도 회사는 3개 주에서 조세 징수권(디와니)을 획득했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인도의 식민지화를 추진해 나갔다.
4. 2. 프랑스의 몰락과 영국의 인도 지배
플라시 전투의 결과, 프랑스는 더 이상 벵골에서 중요한 세력이 아니게 되었다. 1759년, 영국은 마술리파탐에서 더 큰 규모의 프랑스 수비대를 격파하고 북부 사르카르를 확보했다.[1] 같은 해 미르 자파르는 영국에 종속된 자신의 지위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는 네덜란드가 영국에 대항하여 벵골에서 영국을 몰아내도록 부추기기 시작했다.[1] 1759년 말, 네덜란드는 영국과 네덜란드가 공식적으로 전쟁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벵골에 있는 친수라 정착지를 강화한다는 구실로 7척의 대형 선박과 1400명의 병력을 자바에서 벵골로 보냈다.[1] 그러나 클라이브는 즉시 육상 및 해상 공격 작전을 개시하여 1759년 11월 25일 친수라 전투에서 훨씬 더 큰 네덜란드 군대를 격파했다.[1] 영국은 이어서 미르 자파르를 폐위시키고 미르 카심을 벵골의 나바브로 임명했다.[1] 이로써 영국은 벵골에서 지배적인 유럽 세력이 되었다.[1] 클라이브는 건강 악화로 영국으로 돌아갔을 때 아일랜드 귀족 작위를 받아 플라시의 클라이브 남작이 되었고, 영국 하원 의석도 얻었다.[1]데칸과 하이데라바드 지역, 예를 들어 아르코트, 반데와시, 탄조르 및 쿠달로르 지역에서도 투쟁이 계속되었으며, 1761년에는 아이어 쿠트 대령이 퐁디셰리에서 하이데르 알리의 지원을 받은 드 랄리 휘하의 프랑스 수비대를 격파하면서 절정에 달했다.[2] 프랑스는 파리 조약을 통해 1763년에 퐁디셰리를 돌려받았지만, 인도에서 이전의 지위를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2] 이후 영국은 수년간 사실상 아대륙의 지배자로 부상하게 되었다.[2]
영국 동인도 회사가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벵골 태수 연합군을 격파하면서 영국의 인도 지배는 본격화되었다. 한편, 프랑스는 이듬해부터 남인도에서 발생한 제3차 카르나틱 전쟁에서도 패배하여 퐁디셰리를 점령당하면서 인도에서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플라시 전투는 인도에게 있어서 앞으로 오랫동안 지속될 영국의 식민지 지배의 서곡에 불과했다. 벵골의 시인 Nabinchandra Sen|나빈 찬드라 센영어은 이 전투 이후에 찾아온 영국 지배를 "인도에게 영원히 지속될 암흑의 밤"에 비유했다.
전투 직후, 미르 자파르가 새로운 벵골 태수로 임명되었고, 시라주 웃다울라는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영국은 비밀 조약으로 맺어진 조항에 따라 미르 자파르로부터 콜카타의 한 군을 포함한 24개 군의 자민다리를 수여받는 동시에 다양한 명목으로 3000만인도 루피가 넘는 금액을 착취하며 점차 괴뢰화해 갔다. 또한, 클라이브는 전투 후에 무굴 제국의 황제 알람기르 2세로부터 받은 칙령에서 "무굴 제국의 꽃이며, 보호자이며, 가장 용감한 병사"로 평가받았다.
1764년10월의 북사르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하면서, 동인도 회사는 3개 주에서 조세 징수권(디와니)을 획득했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인도의 식민지화를 추진해 나갔다.
4. 3. 인도 사회의 변화
영국 동인도 회사가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벵골 태수 연합군을 격파하면서 영국의 인도 지배는 본격화되었다. 한편, 프랑스는 이듬해부터 남인도에서 발생한 제3차 카르나틱 전쟁에서도 패배하여 퐁디셰리를 점령당하면서 인도에서 철수하게 된다.그러나 플라시 전투는 인도에게 있어서 앞으로 오랫동안 지속될 영국의 식민지 지배의 서곡에 불과했다. 벵골의 시인 Nabinchandra Sen|나빈 찬드라 센영어은 이 전투 이후에 찾아온 영국 지배를 "인도에게 영원히 지속될 암흑의 밤"에 비유했다.[1]
전투 직후, 미르 자파르가 새로운 벵골 태수로 임명되었고, 시라주 웃다울라는 체포되어 살해되었다.[2] 영국은 비밀 조약으로 맺어진 조항에 따라 미르 자파르로부터 콜카타의 한 군을 포함한 24개 군의 자민다리를 수여받는 동시에 다양한 명목으로 3000만인도 루피가 넘는 금액을 착취하며 점차 괴뢰화해 갔다.[1][3]
또한, 클라이브는 전투 후에 무굴 제국의 황제 알람기르 2세로부터 받은 칙령에서 "무굴 제국의 꽃이며, 보호자이며, 가장 용감한 병사"로 평가받았다.[4]
1764년 10월의 북사르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하면서, 동인도 회사는 3개 주에서 조세 징수권(디와니)을 획득했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인도의 식민지화를 추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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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irs of the Revolution in Bengal, Anno Domini 1757
"{{wdl|2384}}"
2013-09-30
[15]
웹인용
This Imperious Company — The East India Company and the Modern Multinational — Nick Robins — Gresham College Lectures
http://www.gresham.a[...]
Gresham College
2015-06-19
[16]
서적
Battles of the Honorourable East India Company
A.P.H. Publishing Corp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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