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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시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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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시디아는 지중해와 인접한 지역으로, 토로스 산맥으로 인해 따뜻한 기후가 제한되는 지역이다.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히타이트 시대에는 독립적인 공동체로 존재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셀레우코스 왕조, 아탈로스 왕조 등 여러 세력의 지배를 받았으며, 로마 시대에는 갈라티아 속주에 편입되었다.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중심지였으며, 비잔틴 제국 시대에는 지진, 역병, 아랍의 침입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1세기에 셀주크 투르크의 지배를 받으면서 비잔틴 제국과 투르크 사이에서 영유권이 바뀌었으며, 7세기 비잔틴 시인 게오르기오스가 이 지역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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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시디아
개요
테르메소스 극장
테르메소스의 극장
위치남부 아나톨리아
언어피시디아어
주요 도시테르메소스
사가라소스
로마 속주아시아
갈라티아
피시디아 위치
피시디아의 위치

2. 지리

토로스 산맥의 높이 때문에 지중해의 따뜻한 기후가 내륙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피시디아 지역은 삼림을 이루기에는 너무 건조하지만, 산봉우리에서 연간 평균 1000mm, 산기슭에서 500mm의 강수량을 보이는 산에서 물이 공급되어 작물이 자란다. 이 물은 고원을 비옥하게 만들고, 주로 산기슭에 세워진 피시디아의 도시들은 이러한 혜택을 받았다. 관개된 토양은 과일 재배와 축산에 매우 적합하다.

3. 역사

피시디아 지역은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기원전 8천 년에서 3천 년 사이에 형성된 정착지들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히타이트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14세기 이전에 피시디아인들의 조상이 이 지역에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기록에는 "살라와사"라는 산악 지역이 언급되는데, 이곳은 나중에 사갈라소스로 확인되었다.[2] 피시디아는 히타이트가 ''아르자와''라고 부르던 지역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피시디아어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인도유럽어족아나톨리아어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헤로도토스의 기록(7.76)에는 피시디아인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2] 피시디아인과 팜필리아인이 같은 민족이라는 점에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헤로도토스는 피시디아인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에포루스는 두 민족을 모두 언급하며, 한 민족은 내륙에, 다른 민족은 해안에 살았다고 기록했다. 팜필리아는 초기에 그리스 등 다른 지역에서 온 이주민들을 받아들였고, 비옥한 땅 덕분에 내륙의 피시디아보다 더 문명화되었다. 피시디아는 야생적이고 산악 지형을 유지했으며, 외부 세력이 지배하기 가장 어려운 지역 중 하나였다.

히타이트 시대부터 피시디아는 독립적인 공동체의 본거지였다. 호전적인 성향으로 알려진 이곳은 리디아인과 페르시아인에게서도 대체로 독립 상태를 유지했다. 페르시아는 기원전 6세기에 아나톨리아를 정복하고 지역을 사트라프로 나누어 통제하려 했지만, 끊임없는 봉기와 혼란을 겪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페르시아로 가는 길에 사갈라소스를 정복했지만, 테르메소스는 저항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이 지역은 안티고노스 1세,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를 거쳐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가 셀레우코스 왕조를 세우면서 피시디아를 장악했다.[3] 셀레우코스 왕조는 전략적 요충지에 그리스 식민지를 건설하고 현지인을 헬레니즘화했다.[3] 그러나 헬레니즘 시대 왕들은 아나톨리아가 셀레우코스 왕조,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왕조, 갈라티아인 등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었기 때문에 피시디아를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했다.[3] 피시디아의 도시들은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그리스 문화를 완전히 받아들이고 자체 화폐를 주조한 마지막 도시 중 하나였다.[3]

아민타스 왕이 기원전 25년 사망한 후, 로마는 피시디아를 갈라티아 속주의 일부로 만들었다. 기원전 3년에는 호모나데시안족이 멸망했다.

로마 시대 동안 피시디아는 퇴역 군인들을 통해 식민지화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8개의 식민지가 세워졌으며, 안티오크와 사가라소스가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이 속주는 점차 라틴화되어, 3세기 말까지 라틴어가 공식 언어로 사용되었다.

피시디아는 중요한 초기 기독교 중심지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첫 번째 여행에서 안티오크에서 설교했고,[3] 두 번째[4] 및 세 번째[5] 여행에서도 이 지역을 방문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1년에 기독교를 합법화한 후, 피시디아의 안티오크는 기독교 수도 대교구이자 피시디아 민간 속주의 수도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대부분의 피시디아 도시들은 내전과 외적의 침략으로 인해 요새화되었다.

이 지역은 518년 지진, 541–543년경의 역병, 7세기 중반의 지진과 아랍의 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시리아의 이슬람 정복으로 무역로가 단절된 후, 이 지역은 중요성이 감소했고, 8세기에는 습격이 증가했다. 11세기에 셀주크가 이 지역을 점령하고 셀주크 술탄국을 세웠다. 피시디아는 비잔틴 제국과 투르크 사이에서 자주 주인이 바뀌었다. 1176년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술탄 킬리치 아르슬란은 마누엘 콤네노스를 격파했다.

3. 1. 초기 역사

피시디아 지역은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해 왔으며, 역사 시대에 알려진 일부 정착지는 기원전 8천 년에서 3천 년 사이에 형성되었다.

3. 2. 청동기 후기 및 철기 시대

고전적인 피시디아인들의 조상은 기원전 14세기 이전에 이 지역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당시 히타이트 기록은 나중에 사갈라소스로 확인된 "살라와사"라는 산악 지역을 언급하고 있다.[2] 당시 피시디아는 히타이트가 ''아르자와''라고 부르던 지역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피시디아어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인도유럽어족아나톨리아어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헤로도토스의 기록(7.76)에는 공백이 있지만, 이 구절에서 피시디아인을 언급한 것으로 추측하기는 어렵다.[2] 피시디아인과 팜필리아인이 같은 민족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지만, 두 민족 사이의 구별은 초기에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헤로도토스는 피시디아인을 언급하지 않지만, 소아시아의 민족 중 팜필리아인을 열거하고, 에포루스는 두 민족을 모두 언급하여, 한 민족은 내륙 민족에, 다른 민족은 해안 민족에 정확히 포함시켰다. 팜필리아는 초기에 그리스와 다른 지역에서 식민지를 받아들였으며, 이로 인해, 그리고 그들의 영토의 더 큰 비옥함과 결합하여 내륙의 이웃보다 더 문명화되었다. 피시디아는 야생적이고 산악 지형을 유지했으며, 외부 세력이 지배하기 가장 어려운 지역 중 하나였다.

히타이트 시대부터 피시디아는 히타이트의 지배를 받지 않는 독립적인 공동체의 본거지였다. 호전적인 파벌로 알려진 이곳은 리디아인과 심지어 기원전 6세기에 아나톨리아를 정복하고 더 큰 통제를 위해 지역을 사트라프로 나눈 페르시아인에게서도 대체로 독립 상태를 유지했으며, 끊임없는 봉기와 혼란에 대처할 수 없었다.

3. 3.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로 가는 길에 사갈라소스를 정복했지만, 테르메소스는 저항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이 지역은 안티고노스 1세의 영토가 되었다가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를 거쳐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가 셀레우코스 왕조를 세우면서 피시디아를 장악했다.[3] 셀레우코스 왕조는 전략적 요충지에 그리스 식민지를 건설하고 현지인을 헬레니즘화했다.[3] 그러나 헬레니즘 시대 왕들은 아나톨리아가 셀레우코스 왕조,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왕조, 갈라티아인 등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었기 때문에 피시디아를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했다.[3] 피시디아의 도시들은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그리스 문화를 완전히 받아들이고 자체 화폐를 주조한 마지막 도시 중 하나였다.[3]

3. 4. 로마와 비잔티움 제국 시대

아민타스 왕이 기원전 25년 투쟁 중 사망한 후, 로마는 피시디아를 새로운 갈라티아 속주의 일부로 만들었다. 호모나데시안족은 기원전 3년에 마침내 멸망했다.

로마 시대 동안 피시디아는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퇴역 군인들과 함께 식민지화되었다. 가난한 이탈리아 지역에서 온 식민지 주민들에게 이 지역의 주요 매력은 농업이었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피시디아에 8개의 그러한 식민지가 세워졌으며, 안티오크와 사가라소스가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이 속주는 점차 라틴화되었다. 라틴어는 3세기 말까지 이 지역의 공식 언어로 남아 있었다.

피시디아는 중요한 초기 기독교 중심지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첫 번째 여행에서 안티오크에서 설교했다.[3] 그는 두 번째[4] 및 세 번째[5] 여행에서도 이 지역을 방문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1년에 기독교를 합법화한 후, 피시디아의 안티오크 (시리아의 총대주교구 포함 여러 동명이 도시가 있음)는 기독교 수도 대교구이자 피시디아 민간 속주의 수도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대부분의 피시디아 도시들은 내전과 외적의 침략으로 인해 심하게 요새화되었다.

이 지역은 518년 지진, 541–543년경의 역병, 그리고 7세기 중반의 또 다른 지진과 아랍의 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시리아의 이슬람 정복으로 무역로가 단절된 후, 이 지역은 중요성이 감소했다. 8세기에 습격이 증가했다. 11세기에 셀주크가 이 지역을 점령하고 셀주크 술탄국을 중앙 아나톨리아에 세웠다. 피시디아는 비잔틴 제국과 투르크 사이에서 자주 주인이 바뀌었다. 1176년 술탄 킬리치 아르슬란은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마누엘 콤네노스를 격파했다.

4. 주요 인물


  • 피시디아의 게오르기오스 (7세기) - 비잔틴 제국의 시인

참조

[1] 서적 The New Century Classical Handbook Appleton-Century-Crofts 1962
[2] 논문 The Oracle and Cult of Ares in Asia Minor https://grbs.library[...] 2005
[3] 성경
[4] 성경
[5]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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