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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포이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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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로포이멘은 기원전 253년 아르카디아 메갈로폴리스에서 태어난 고대 그리스의 군인, 정치가이다. 그는 아카데메이아 학파에서 교육을 받고, 클레오메네스 전쟁에서 활약하며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기원전 210년 아카이아 동맹 기병대장으로 임명된 후 군사력을 강화했으며, 기원전 209년에는 최고 사령관으로 선출되어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승리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립했지만, 스파르타와의 갈등과 로마의 개입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기원전 183년 메세네에서 반란이 일어나 포로로 잡혀 독살되었으며, 그의 죽음 이후 아카이아 동맹은 복수를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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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222년에 벌어진 셀라시아 전투는 마케도니아 연합군이 스파르타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스파르타의 쇠퇴를 가져왔고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 세력 균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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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레오메네스 전쟁은 기원전 229년부터 222년까지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메네스 3세가 아카이아 동맹과 마케도니아 왕국을 상대로 스파르타의 옛 영광을 되찾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다 패배한 전쟁이다.
필로포이멘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필로포이멘
로마자 표기Philopoemen
별칭마지막 그리스인
출생기원전 253년경
출생지메갈로폴리스
사망기원전 183년
사망지메세네
군사 경력
복무아카이아 동맹
계급장군
주요 전투만티네이아 전투
메세네 전투

2. 어린 시절과 교육

필로포이멘은 메갈로폴리스의 명문가 출신으로, 아버지 클라우기스가 일찍 사망하자 아버지의 친구이자 저명한 시민이었던 클레안드로스에게 입양되어 자랐다.[3] 그는 아카데메이아 학파의 철학자 에쿠데모스와 데모파네스에게 교육을 받았다.[3] 이들은 시키온, 키레네참주를 타도하는 데 기여한 인물들로, 민주제를 옹호하여 필로포이멘에게 민주주의 정신을 심어주었다.[1][3]

필로포이멘은 기원전 4세기 테바이의 명장 에파미논다스를 존경하여 그의 검소함과 애국심을 본받고자 했다.[1][3] 그는 평생 검소한 옷을 입고 값비싼 장식을 멀리하는 등 개인적인 덕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2] 그러나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성격 때문에 에파미논다스의 온화함까지 따르지는 못했다.[1][3]

3. 클레오메네스 전쟁과 군사적 활약

기원전 223년,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메네스 3세메갈로폴리스를 침공했을 때, 필로포이멘은 도시 방어에 앞장섰다. 전투 중 말을 잃고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웠다. 그의 분전 덕분에 메갈로폴리스 시민들은 메세니아로 피난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9] 클레오메네스 3세는 메갈로폴리스가 아카이아 동맹을 탈퇴하고 스파르타의 편에 선다면 도시를 반환하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필로포이멘은 이를 강하게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기원전 222년, 셀라시아 전투에서 필로포이멘은 마케도니아안티고노스 3세가 이끄는 아카이아 동맹군 소속으로 참전했다. 그는 일리리아 부대 옆에 배치되어 전투를 벌였다. 일리리아 부대가 스파르타 군에게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필로포이멘은 독자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스파르타 군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전공으로 필로포이멘은 용맹한 지휘관으로 이름을 알렸고, 안티고노스 3세는 그를 등용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셀라시아 전투에서 패배한 클레오메네스 3세는 이집트로 망명했다.

기원전 221년부터 10년간 필로포이멘은 크레타에서 용병 대장으로 활약하며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기원전 210년, 아카이아 동맹으로 돌아온 그는 기병대장으로 임명되어 약했던 기병대를 강화하고 훈련시켰다. 같은 해, 라리사 강 전투에서 필로포이멘은 아이톨리아-엘리스 연합군을 격파하고 적장 데모판토스를 직접 죽이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9][10] 이 승리로 그의 명성은 그리스 전역에 퍼졌다. 또한, 필로포이멘은 아카이아 동맹군의 보병 장비를 개혁하여, 팔랑크스 전투에 유리하도록 긴 창과 둥근 방패로 바꾸었다.[11][12]

4. 아카이아 동맹의 지도자

기원전 209년, 필로포이멘은 아카이아 동맹의 최고 사령관(스트라테고스)에 선출되었다.[15] 그는 군제 개혁을 통해 아카이아 군의 장비를 개선하고 전술을 발전시켜 군사력을 강화했다.[15]

기원전 207년, 스파르타의 참주 마카니다스가 만티네이아를 공격하자, 필로포이멘은 아카이아 군을 이끌고 만티네이아 전투를 벌였다.[13] 이 전투에서 필로포이멘은 일대일 대결로 마카니다스를 죽이고 승리했다.[14][15][16] 이 승리로 아카이아 동맹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립했다.

마카니다스 사후 스파르타의 지배자가 된 나비스는 스파르타의 세력 확대를 꾀하며 아카이아 동맹과 전쟁을 일으켰으나, 필로포이멘은 메세네에서 나비스를 물리쳤다.[17] 기원전 201년 나비스가 메세네를 야습하여 점령하자, 필로포이멘은 아카이아 군 총사령관에게 메세네 구원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시민들을 이끌고 메세네로 향했고, 이를 안 나비스는 즉시 메세네에서 철수했다.[18]

5. 스파르타와의 갈등과 로마의 개입

기원전 192년, 나비스가 아이톨리아 동맹의 배신으로 암살당하자, 필로포이멘은 이 틈을 타 군대를 이끌고 스파르타로 진격하여 스파르타를 아카이아 동맹에 강제 가입시켰다.[22][23] 스파르타는 필로포이멘에게 참주로부터 해방시켜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나비스의 저택을 증여하려 했으나, 필로포이멘은 이를 거절하며 청렴함을 보였다.

스파르타의 동맹 가입은 스파르타를 지배해 왔던 사회 혁명 정권에 의해 추방된 스파르타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야기했다. 필로포이멘은 동맹 가입을 지지하는 스파르타인들만 복귀시키길 원했다.

기원전 188년, 필로포이멘은 스파르타의 반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스파르타인(아리스토크라테스에 따르면 350명,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80명)을 처형하고 도시 성벽을 파괴했으며, 스파르타 영토의 일부를 메갈로폴리스에 넘기고 시민 3000명을 노예로 팔았다.[25][26] 그는 과거 추방되었던 아카이아 동맹에 협력적인 스파르타인들을 불러들이고, 리쿠르고스가 제정한 법 제도를 폐지하고 아카이아식 제도와 교육을 강요했다. 이러한 가혹한 조치로 인해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주요 강국으로서의 역할을 마감했고, 아카이아 동맹은 펠로폰네소스 전역에서 지배적인 세력이 되었다.

6. 로마와의 관계와 최후

필로포이멘의 최후, 1910년 런던, 윌리엄 레이니 그림


안티오코스 3세를 물리친 로마는 그리스에서 큰 권세를 떨쳤다. 그러나 필로포이멘은 아카이아 동맹이 로마에 맞설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로마가 추방된 스파르타 인들의 귀국을 요구하자, 필로포이멘은 이를 거부하며 로마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31] 이러한 태도는 스파르타 내 필로포이멘 지지자들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었고, 결국 스파르타 반대파들은 로마 원로원에 직접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원로원은 여러 차례 중재안을 제시했지만, 필로포이멘과 그의 지지자들은 로마가 아카이아 동맹의 독립을 인정한 이전 조약을 근거로 이를 모두 거부했다.

기원전 183년, 필로포이멘이 70세가 되던 해, 데이노크라테스의 주도로 메세네에서 아카이아 동맹에 반기를 드는 반란이 일어났다. 데이노크라테스는 코로니스를 공격하려 했고, 이 소식을 아르고스에서 접한 필로포이멘은 즉시 기병 부대를 이끌고 출격했다. 그는 에우안드로스 언덕 근처에서 데이노크라테스를 격퇴했지만, 적의 증원군에 의해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후퇴하다 낙마하여 포로로 잡혔다.[32]

감옥에 갇힌 필로포이멘은 명예로운 죽음으로 여겨지던 독약을 마시라는 강요를 받았다. 그는 부하 장군 뤼코르타스의 안부를 묻고, 그가 무사히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자 "우리가 완전히 불행한 것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독약을 마셨다.[33]

필로포이멘의 죽음에 아카이아 동맹은 복수를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뤼코르타스의 지휘 아래 메세니아를 공격했고, 데이노크라테스는 자살했다. 필로포이멘의 유해는 메갈로폴리스로 운구되어 성대하게 장례가 치러졌으며, 역사가 폴리비오스가 그의 유골함을 운반했다.[34]

6. 1. 평가

필로포이멘은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의 마지막 위대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식견을 겸비하여 아카이아 동맹을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강자로 만들었다. 그의 강경한 대(對) 스파르타 정책과 로마에 대한 저항은 그리스의 독립을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파우사니아스는 그의 저서 ''그리스의 묘사''에서 필로포이멘을 '그리스 최후의 인물'이라고 칭송했다.[1]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필로포이멘의 공적 장례식에서 그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를 들었으며, 나중에 자신의 저서인 역사에서 그의 전기와 기억을 옹호했다.

참조

[1] 서적 Description of Greece
[2] 웹사이트 ルーブル美術館 彫刻 : 19世紀のフランス "フィロポイメン" http://www.louvre.fr[...] 루브르 미술관
[3] 서적 フィロポイメン
[4] 서적
[5] 서적 クレオメネス
[6] 서적 フィロポイメン
[7] 서적 ibid
[8] 서적
[9] 서적 フィロポイメン
[10] 서적
[11] 서적 フィロポイメン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ibid
[15] 서적 フィロポイメン
[16] 서적
[17] 서적 フィロポイメン
[18] 서적
[19] 서적 フィロポイメン
[20] 서적
[21] 서적 フィロポイメン
[22] 서적 ibid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フィロポイメン
[26] 서적
[27] 서적 フィロポイメン
[28] 서적 ibid
[29] 서적 ibid
[30] 서적 ibid
[31] 서적 필로포이멘
[32] 서적 ibid
[33] 서적 ibid
[34] 서적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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