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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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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키온은 코린트만 근처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그리스 신화 시대부터 로마 시대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케네 시대에는 왕이 통치했고, 이후 도리아인의 침략과 참주 정치를 거치며 독립을 유지했다. 기원전 4세기에는 예술의 중심지로 번영했으며, 회화와 조각 기술이 발달했다. 아카이아 동맹에 가입했으나 로마에 의해 해체되었고, 중세 시대에는 쇠퇴하여 1920년까지 바실리코라는 이름으로 불리다 현재는 시키오나로 불린다. 시키온은 아폴론 신전, 극장 등 다양한 고대 유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아라투스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2. 역사

시키온은 코린트만에서 약 약 3.22km 떨어진 낮은 삼각 고원에 세워졌으며, 도시와 항구 사이에는 올리브 나무와 과수원이 있는 비옥한 평야가 있었다.

미케네 그리스 시대에는 26명의 신화적인 왕과 7명의 아폴론 신전 성직자에 의해 통치되었다고 전해진다. 파우사니아스는 아이기알레우스를 시작으로 24명의 왕 목록을 제시했는데, 아가멤논에 의해 미케네에 복종된 후 도리아인 찬탈자 팔케스가 등장한다.[2]

도리아인의 침략 이후 시키온은 아르고스의 지배를 받으며, 세 개의 도리아 부족과 하나의 이오니아인 부족, 그리고 농노(κορυνηφόροιgrc 또는 κατωνακοφόροιgrc) 계급으로 구성되었다.[1]

기원전 676년부터 시키온은 오르타고리데스 참주 아래 독립을 되찾았고, 특히 클레이스테네스는 이오니아인에게 유리한 헌법 개정과 디오니소스 숭배로의 종교 대체, 제1차 신성 전쟁 (기원전 590년)에서의 주도적인 역할로 유명하다.[4]

기원전 556년 스파르타에 의해 클레이스테네스의 후계자가 추방된 후, 시키온은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입하여 조각, 목공예, 청동 작업, 코린트식 도자기와 유사한 도자기 등 다양한 산업을 발전시켰고, 회화 기술이 발명되었다고도 전해진다.[1]

페르시아 전쟁에서 시키온은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 전투에 참여했으며, 델포이의 뱀 기둥에 그 이름이 새겨졌다. 기원전 5세기에는 아테네 함대의 공격을 받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코린토스 전쟁에서는 스파르타코린토스 편에 섰다.[1]

기원전 369년 테베에 점령된 후, 기원전 368년부터 366년까지 에우프론의 통치를 받았다. 기원전 4세기에는 에우포무스의 회화 학교, 팜필루스와 아펠레스 등의 화가, 리시포스와 그의 제자들의 조각 등으로 예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1]

기원전 323년 에우프론(젊은이)에 의해 민주정이 복구되었으나, 라미아 전쟁 동안 마케도니아에 정복되었다. 이후 크라테시폴리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 등의 지배를 거쳐, 기원전 303년 데메트리우스 폴리오르케테스에게 정복되어 "데메트리아스"로 불리기도 했다.

데메트리우스는 클레온을 참주로 임명했으나, 이후 에우티데무스와 티모클레이다스에게 살해되었고, 기원전 267년경 클레이니아스가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 민주 정부는 체육관을 건설하고, 시키온의 제노크라테스는 예술사를 출판했다.

기원전 264년 클레이니아스가 아반티다스에게 살해된 후, 참주 정치가 이어지다가 기원전 251년 시키온의 아라투스가 도시를 정복하고 아카이아 동맹에 편입시켰다. 시키온은 아이톨리아의 습격(기원전 241년)과 클레오메네스 3세의 포위 공격(기원전 224년)을 겪었지만, 기원전 146년까지 아카이아 연맹의 일원으로 안정적인 민주정을 유지했다.

코린토스 파괴(기원전 146년) 이후 시키온은 이스토미아 경기의 회장직을 얻었으나, 키케로 시대에는 빚더미에 빠졌고, 로마 제국 시대에는 코린토스와 파트라에에 가려져 쇠퇴했다. 파우사니아스 시대(서기 150년)에는 거의 황폐해졌다.

중세 시대에 시키온은 더욱 쇠퇴하여 주교의 관할지가 되었고, 7세기 슬라브족 정착 시기에는 피난처 역할을 했다.[1] 제4차 십자군 이후에는 "바실리카"로 알려진 아카이아 공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빌헬름 2세 드 빌레아르두앵 공(1246–1278)은 고대 아크로폴리스에 성을 세웠다.[5] 이후 니콜로 아차이올리, 네리오 1세 아차이올리 등 피렌체 가문의 지배를 받았고, 모레아 전제공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를 거쳐 1458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었다.[7][8][9][10]

1920년까지 ''바실리코''라는 이름의 마을은 고대 시키온 유적지 옆에 위치해 있었으며, 현재는 시키오나로 불린다.

2. 1. 고대

시키온 위치


오늘날의 고대 시키온 극장


시키온의 도리아 신전 발굴 현장


시키온은 코린트만에서 3km 가량 떨어진 낮은 삼각 고원 위에 세워졌다. 도시와 항구 사이에는 올리브 숲과 과수원이 있는 비옥한 평야가 있었다.[1]

미케네 그리스 시대에 시키온은 26명의 신화적 왕과 7명의 아폴론 사제에 의해 통치되었다.[2] 파우사니아스가 제시한 왕의 목록은 토착민인 아이기알레우스로 시작하여 24명의 왕으로 구성된다. 목록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왕인 아가멤논은 시키온을 미케네에 복종시켰고, 그 뒤를 이어 도리아인 찬탈자 팔케스가 등장한다. 파우사니아스는 로도스의 카스토르와 자료를 공유했는데, 그는 역사 표를 편집하는 데 왕 목록을 사용했다. 이 공통 자료는 펠릭스 야코비에 의해 기원전 4세기 후반 시인 시키온의 메나에크무스가 쓴 소실된 ''시키오니카''로 확인되었다.[3]

도리아인의 침략 이후 도시는 아르고스의 지배를 받았다. 이 공동체는 세 개의 도리아 부족과 이오니아인 부족으로 나뉘었고, 그 외에 땅에서 일하는 농노(κορυνηφόροι|, korynēphóroigrc 또는 κατωνακοφόροι|, katōnakophóroigrc) 계급이 있었다.[1]

기원전 676년 이후 시키온은 오르타고리데스라고 불리는 일련의 참주 아래에서 독립을 되찾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클레이스테네스(기원전 600년~560년 통치)로, 그는 이오니아인에게 유리하도록 도시의 헌법을 개정하고 도리아 종교를 디오니소스 숭배로 대체했으며, 제1차 신성 전쟁 (기원전 590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1][4]

그의 후계자 아이스키네스는 기원전 556년 스파르타인에 의해 추방되었고, 시키온은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입했다. 이 기간 동안 시키온인들은 조각, 목공예, 청동 작업, 코린트식 도자기와 유사한 도자기 등 다양한 산업을 발전시켰다. 또한 시키온에서는 회화 기술이 발명되었다고 여겨졌다. 기원전 6세기 말, 스파르타의 에포르 킬론의 주도로 도리아의 지배가 재확립되었다.[1]

페르시아 전쟁 동안 시키온인들은 살라미스 해전에 15척의 삼단 노선, 플라타이아 전투에 3,000명의 중장 보병을 파견했다. 델포이의 뱀 기둥에서 시키온은 다섯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기원전 479년 9월, 시키온 분견대는 미칼레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다.[1]

기원전 5세기에 시키온은 아테네 함대의 공격을 받았다. 시키온인들은 아테네와 두 번의 전투를 벌였다.[1]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시키온은 스파르타코린토스를 따랐다. 니키아스의 평화 동안 시키온은 스파르타에 충성했다.[1] 시칠리아 원정 동안 시키온인들은 200명의 중장 보병을 시라쿠사를 구원하는 부대에 기여했다. 기원전 4세기 초, 코린토스 전쟁에서 시키온은 다시 스파르타 편에 섰다.[1]

기원전 369년 시키온은 테베에 의해 점령되었다.[1] 기원전 368년부터 366년까지 시키온은 에우프론에 의해 통치되었다.

기원전 4세기 동안 이 도시는 예술의 중심지로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회화 학교는 에우포무스 아래에서 명성을 얻었고, 팜필루스와 아펠레스를 학생으로 유치했으며, 리시포스와 그의 제자들은 시키온 조각을 발전시켰다.[1] 마케도니아 왕가의 친구였던 참주 아리스토라투스는 멜란티우스에 의해 초상화를 그렸다. 이 시기에 시키온은 그리스 회화의 중심지였으며, 아펠레스와 파시아스를 포함하여 그리스 전역에서 유명한 예술가들을 유치했다.

기원전 323년 에우프론(젊은이)은 민주주의를 다시 도입했지만 라미아 전쟁 동안 마케도니아인에게 정복당했다. 기원전 314년 마케도니아 사령관 알렉산더가 시키온에서 살해되었을 때, 그의 아내 크라테시폴리스가 도시를 장악하여 6년 동안 통치했고,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넘겨주었다. 기원전 308년과 303년 사이 시키온은 두 명의 프톨레마이오스 사령관에 의해 통치되었다.

기원전 303년 시키온은 데메트리우스 폴리오르케테스에게 정복당했고, 그는 고대 도시를 파괴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잠시 동안 이 도시는 "데메트리아스"라고 불렸지만 결국 옛 이름이 우세해졌다.

데메트리우스는 도시를 통제하기 위해 클레온을 참주로 임명했다. 약 20년 후, 그는 에우티데무스와 티모클레이다스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들은 시키온의 공동 참주가 되었다. 그들은 기원전 267년경 사람들에 의해 추방되었고, 클레이니아스가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 민주 정부는 체육관을 건설했다. 시키온의 제노크라테스는 예술사를 출판하여 시키온의 명성을 알렸다.

기원전 264년 클레이니아스는 아반티다스에게 살해당했고, 그는 12년 동안 참주 정권을 수립했다. 기원전 252년 아반티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르고스의 데이니아스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의 아버지 파세아스가 집권했지만, 니코클레스에게 살해당했다.

기원전 251년 시키온의 아라투스는 도시를 정복하고 마지막 참주를 추방했다. 아라투스는 민주주의를 재건하고, 망명자를 소환하여 그의 도시를 아카이아 동맹에 편입시켰다. 시키온의 번영은 기원전 241년 아이톨리아의 습격과 기원전 224년 초 클레오메네스 3세의 포위 공격으로 잠시 중단되었다.

아카이아 연맹의 일원으로서 시키온은 기원전 146년까지 안정적인 민주주의를 유지했다. 이 기간 동안 시키온은 기원전 153년과 기원전 141년 두 번의 지진으로 피해를 입었다.

코린토스의 파괴(기원전 146년)로 시키온은 영토를 획득하고 이스토미아 경기의 회장직을 얻었다. 그러나 키케로 시대에는 빚더미에 빠졌다. 로마 제국에서는 코린토스와 파트라에에 의해 가려졌고, 파우사니아스 시대(서기 150년)에는 거의 황폐해졌다.

2. 2. 중세

중세 초기에 시키온은 쇠퇴를 거듭했다. 시키온은 주교의 관할지가 되었으며, 이후 "헬라스"로 불린 것을 보아 7세기에 그리스에 슬라브족 집단이 정착하면서 피난처를 찾는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 제4차 십자군 이후, 바실리카(Basilikata)로 알려진 이 정착지는 아카이아 공국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공국의 영토가 되었다. 빌헬름 2세 드 빌레아르두앵 공(1246–1278)은 코린토스의 방어를 보완하기 위해 고대 아크로폴리스의 폐허 위에 성을 세웠다.[5] 1369년경, 바실리카 인근의 많은 마을들이 터키 해적의 습격으로 인해 버려졌다.[6] 코린토스와 함께 바실리카는 앙주 왕가의 신하였던 피렌체 출신 니콜로 아차이올리에게 넘어갔고, 그는 1362년에 도나토 아차이올리에게 이를 양도했다. 도나토의 아들 안젤로 아차이올리는 1372년까지 코린토스와 바실리카를 그의 사촌인 아테네 공국 공작 네리오 1세 아차이올리에게 저당 잡혔다.[7] 네리오가 1394년에 사망했을 때, 코린토스와 바실리카는 그의 딸 프란체스카 아차이올리에게 상속되었고, 그녀는 케팔로니아와 자킨토스 백작 카를로 1세 토코와 결혼했다. 이 조항에 대해 네리오의 또 다른 딸인 바르톨로메아 아차이올리와 그녀의 남편인 모레아 전제공국의 전제공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가 이의를 제기했다. 뒤이은 분쟁 이후, 프란체스카와 카를로는 바실리카와 메가라만 유지할 수 있었고, 코린토스는 전제공 테오도로스에게 넘어갔다.[8] 마지막으로, 모레아의 전제공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는 1427년에 아카이아 공국으로부터 다른 지역과 함께 바실리카를 점령했다.[9] 오스만 제국은 1458년에 코린토스와 바실리카를 침략하여 정복했으며, 1460~1461년에 모레아 정복을 완료하기 2년 전이었다.[10]

3. 고대 유적



시키온에는 다음과 같은 고대 유적들이 남아있다.

4. 신화

미케네 그리스 시대에 시키온은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26명의 신화적 왕과 7명의 아폴론 사제에 의해 통치되었다.[1] 파우사니아스가 제시한 왕의 목록[2]은 토착민인 아이기알레우스로 시작하여 24명의 왕으로 구성된다. 목록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왕인 아가멤논은 시키온을 미케네에 복종시켰고, 그 뒤를 이어 도리아인 찬탈자 팔케스가 등장한다. 파우사니아스는 로도스의 카스토르와 자료를 공유했는데, 그는 역사 표를 편집하는 데 왕 목록을 사용했다. 이 공통 자료는 펠릭스 야코비에 의해 4세기 후반 시인 시키온의 메나에크무스가 쓴 소실된 ''시키오니카''로 설득력 있게 확인되었다.[3]

유세비우스의 연대기 및 기타 그리스-로마 자료에 따른 왕들은 다음과 같다.

순서이름비고
1아이기알레우스
2유롭스
3텔키스
4시키온의 아피스
5시키온의 텔크시온
6아이기루스
7투리마쿠스
8레우키포스
9메사푸스
10에라토스
11플렘나에우스
12오르토폴리스
13마라토니우스 또는 코로누스
14마라토스
15에키레우스 또는 코로누스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오르토폴리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16코락스
17시키온의 에포페우스
18라메돈
19시키온
20시키온의 폴리보스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아드라스토스에 의해 계승됨
21이나코스
22파에스투스
23아드라스토스
24시키온의 제욱시푸스일부 자료에서는 파에스투스의 직접적인 계승자로 본다.
25펠라스구스
26폴리페이데스아가멤논 이전의 군주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이 왕들을 잇는 일곱 명의 아폴로 카르네이우스의 사제들이 통치했다.

순서이름통치 기간(년)비고
1아르켈라우스1
2아우토메돈1
3테오클리투스4
4에우네우스6
5테오노무스9
6암피기에스12
7카리데무스1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망명. 첫 번째 올림피아드(기원전 1128년) 352년 전에 사제.



시키온은 전통적으로 신화 속 메코네 또는 메코네와 동일시되어 왔다.[15][16] 이곳은 프로메테우스가 수행한 메코네의 속임수가 있었던 장소이다. 메코네는 또한 칼리마코스에 의해 "신의 자리"로 묘사되었으며, 형제 신인 제우스, 포세이돈, 하데스가 각자 세상의 어떤 부분을 다스릴지 제비를 뽑았던 장소이기도 하다.[17]

5. 관련 인물

시대인물설명
고대아이기알레우스[11]기원전 21세기경 시키온의 전설적인 창립자
고대텔리스기원전 8세기 육상 선수 (기원전 708년 올림픽 우승자)
고대부타데스기원전 7세기 조각가
고대카나쿠스기원전 6세기 조각가
고대아리스토클레스기원전 5세기 조각가
고대프락실라기원전 5세기 시인
고대아리프론기원전 5세기 시인
고대알리푸스기원전 5~4세기 조각가
고대알렉시스기원전 5세기 또는 4세기 조각가
고대에우폼푸스기원전 4세기 화가
고대팜필루스기원전 4세기 화가
고대멜란티우스기원전 4세기 화가
고대파우시아스기원전 4세기 화가
고대에우티키데스기원전 4세기 조각가
고대리시포스기원전 4세기 조각가
고대리시스트라투스기원전 4세기 조각가
고대소스트라토스기원전 4세기 판크라티아스트 (올림픽 3회 챔피언)
고대카나쿠스 더 영거기원전 4세기 조각가
고대크세노크라테스기원전 3세기 조각가 및 미술사학자
고대마콘기원전 3세기 극작가
고대티만테스기원전 3세기 화가
고대네알케스기원전 3세기 화가
고대아낙산드라기원전 3세기 화가
고대피토클레스기원전 3세기 육상 선수 (기원전 236년 올림픽 우승자)
고대아라투스기원전 271년~213년, 아카이아 동맹의 스트라테고스
고대바케이다스무용가이자 음악 교사[12]
고대다에토다스조각가[13]
고대비켈루스올림픽 우승자[14]
고대오르타고라스시키온의 참주
고대시키온의 클레이스테네스시키온의 참주
현대소티리오스 크로키다스법학자이자 총리


5. 1. 고대

미케네 그리스 시대에 시키온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26명의 신화적 왕과 7명의 아폴론 사제에 의해 통치되었다. 파우사니아스가 제시한 왕의 목록[2]은 토착민인 아이기알레우스로부터 시작하여 24명의 왕으로 구성된다. 목록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왕인 아가멤논은 시키온을 미케네에 복종시켰고, 그 뒤를 이어 도리아인 찬탈자 팔케스가 등장한다. 파우사니아스는 로도스의 카스토르와 자료를 공유했는데, 그는 역사 표를 편집하는 데 왕 목록을 사용했다. 이 공통 자료는 펠릭스 야코비에 의해 4세기 후반 시인 시키온의 메나에크무스가 쓴 소실된 ''시키오니카''로 설득력 있게 확인되었다.[3]

도리아인의 침략 이후 이 도시는 아르고스의 지배를 받았다. 이 공동체는 세 개의 도리아 부족과 이오니아인 부족으로 나뉘었고, 그 외에 농노(κορυνηφόροιgrc 또는 κατωνακοφόροιgrc) 계급이 땅에서 살면서 일했다.[1]

기원전 676년 이후 시키온은 오르타고리데스라고 불리는 일련의 참주 아래에서 독립을 되찾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테네 입법자 클레이스테네스의 할아버지인 클레이스테네스로, 기원전 600년부터 560년까지 통치했다.[4] 그는 이오니아인에게 유리하도록 도시의 헌법을 개정하고 도리아 종교를 디오니소스 숭배로 대체했을 뿐만 아니라, 제1차 신성 전쟁 (기원전 590년)의 주요 선동자이자 장군으로서 명성을 얻었다.[1]

그의 후계자 아이스키네스는 기원전 556년 스파르타인에 의해 추방되었고, 시키온은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입했다. 이후 시키온의 정책은 일반적으로 스파르타 또는 코린토스에 의해 결정되었다.[1]

페르시아 전쟁 동안 시키온인들은 살라미스 해전에 열다섯 척의 삼단 노선으로, 플라타이아 전투에 3,000명의 중장 보병으로 참여했다. 델포이의 뱀 기둥에서 시키온은 스파르타, 아테네, 코린토스, 테게아에 이어 다섯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기원전 479년 9월 시키온 분견대는 미칼레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다.[1]

기원전 5세기에 시키온은 아테네 함대의 함대에 의해 반복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1] 시키온인들은 아테네와 두 번의 전투를 벌였는데, 처음에는 기원전 455년 아테네의 제독 톨미데스를 상대로, 그 다음에는 기원전 453년 페리클레스를 상대로 육상 전투를 벌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시키온은 스파르타와 코린토스를 따랐다. 니키아스의 평화 동안 두 강대국이 다투었을 때, 시키온은 스파르타에 충성했다.[1] 시칠리아 원정 동안 시키온인들은 사령관 사르게우스 휘하에서 200명의 징집된 중장 보병을 시라쿠사를 구원하는 부대에 기여했다. 기원전 4세기 초, 코린토스 전쟁에서 시키온은 다시 스파르타 편에 섰다.[1]

기원전 369년 시키온은 테베에 의해 점령되었다.[1] 기원전 368년부터 366년까지 시키온은 에우프론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그는 처음에는 민주주의를 옹호했지만 스스로 참주가 되었다.

기원전 4세기 동안 이 도시는 예술의 중심지로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회화 학교는 에우포무스 아래에서 명성을 얻었고, 팜필루스와 아펠레스를 학생으로 유치했으며, 리시포스와 그의 제자들은 시키온 조각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1] 마케도니아 왕가의 친구였던 참주 아리스토라투스는 승리의 여신 니케가 있는 전차 옆에서 화가 멜란티우스에 의해 초상화를 그렸다.

5. 2. 현대


  • 소티리오스 크로키다스 - 법학자이자 총리

참조

[1] EB1911
[2] 서적 Pausanias 2.5.6-6.7
[3] 논문 "[[Felix Jacoby]] on Castor in ''[[Fragmente der griechischen Historiker|Die Fragmente der griechischen Historiker]]'' 250 F 2, noted with approval by Robertson 1999:65 and note 36"
[4] 서적 Herodotus 6.121
[5] 서적 Bon 1969: 104, 476, 482
[6] 서적 Topping 1975: 138
[7] 서적 Bon 1969: 250
[8] 서적 Bon 1969: 270; Topping 1975: 158
[9] 서적 Bon 1969: 481
[10] 서적 Fine 1987: 565
[11] 문서 As displayed on the [[Wallchart of World History]], Sicyon was founded in 2081 BC by Aegialus
[12] 웹사이트 A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Baccheidas https://www.perseus.[...]
[13] 웹사이트 A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Daetondas https://www.perseus.[...]
[14] 웹사이트 Pausanias, Description of Greece, 6.13.7 https://www.perseus.[...]
[15] 간행물 page 116, M.L. West, The Journal of Hellenic Studies, Vol. 122 (2002), pp. 109-133 (25 pages) Published by: The Society for the Promotion of Hellenic Studies
[16] 웹사이트 "'' Themis'', Jane Ellen Harrison, page 373" https://archive.org/[...] 2019-02-04
[17] 간행물 Quoted st page 115, M.L. West, The Journal of Hellenic Studies Vol. 122 (2002), pp. 109-133
[18] 웹사이트 シキュオンとは https://kotobank.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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