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 요시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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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라 요시미치는 일본의 법조인, 정치인으로,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에 걸쳐 활동했다.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농상무성 관료를 거쳐 변호사로 활동하며 광산 관련 소송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사법대신, 추밀원 의장을 역임했으며,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추밀원 의장으로서 독일·이탈리아와의 동맹 체결에 반대하기도 했다. 1944년 사망 후 남작 작위를 받았다.
1867년 3월 23일 나가노현 스자카시에서 하라 모사쿠(原 茂作일본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 스자카 번의 아시가루 고가시라(小頭일본어) 일을 했지만 원래는 농민이었다.
1940년 고노에 후미마로가 신체제 운동으로 인해 추밀원 의장에서 물러나자, 하라 요시미치가 후임 추밀원 의장이 되었다. 1941년 독소 전쟁 발발 직후 어전회의에서 마쓰오카 요스케와 함께 소련과의 전쟁을 주장했다. 이후 내대신 기도 고이치를 통해 오카다 게이스케, 요나이 미쓰마사 등 중신들과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12월 8일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1]
2. 생애
2. 1. 법률 생활
1890년 제국대학 법학대학(지금의 도쿄 대학 법학부) 영문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제국대학 재학 당시에는 변호사를 지망했지만, 개업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농상무성의 관리가 되었다. 1893년 농상무성에서 물러난 하라는 변호사 일을 시작했다.[1]
1893년 4월 도쿄 교바시에 법률 사무소를 열었고, 광산 소송을 비롯한 여러 민사 소송을 맡았다. 하토야마 가즈오, 오가와 헤이키치, 하나이 다쿠조 등과 함께 일본 변호사협회, 국제변호사협회 설립에 참여했다. 1911년에는 도쿄 변호사 회장에 취임하여 3번 더 연임했고, 제1 도쿄 변호사회장을 2번 연임했다. 이 사이 미쓰이 은행, 미쓰비시 은행 등의 법률 자문을 맡았으며 미쓰이 신탁 임원, 미쓰이 보덕회장 등을 지냈다. 또 도쿄 제국 대학, 와세다 대학, 주오 대학, 가쿠슈인 대학에서 상법을 강의하기도 했다. 1930년 사법대신 사임 후, 주오 대학 학장으로서 일했다.[1]
2. 2. 사법대신
1927년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사법대신으로 입각했다. 법무상으로서 1928년 치안유지법에 의거하여 일본공산당의 일제 검거, 즉 3·15 사건을 실시했으며, 이듬해 1929년 4월 16일에도 300명 이상의 공산당원을 검거했다.[3] 또한 1928년 사상검사를 설치, 치안유지법을 개정하여 국체 변혁에 대해서는 최고형을 사형으로 하는 수정 조항을 추가했다.[3]
2. 3. 추밀원 의장
1940년 6월 고노에 후미마로가 신체제 운동으로 인해 추밀원에서 물러나자 하라 요시미치가 후임 추밀원 의장이 되었다.[1] 같은 해 9월 독일·이탈리아와의 동맹 체결에 대해 추밀원에서 배심할 때 동맹 체결에 반대하였으며,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를 비판했다.[1] 그러나 1941년 6월 독소 전쟁이 발발하자 7월 2일 어전회의에서 마쓰오카와 함께 소련과의 전쟁을 주장했다.[1] 그 후 하라는 내대신 기도 고이치를 통해 오카다 게이스케, 요나이 미쓰마사 등 중신들과 함께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지만,[1] 결국 12월 8일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1]
전쟁 중 도조 내각으로의 권력 집중에 따라 추밀원은 그 기능을 상실했다.[1] 1944년 8월 7일 추밀원 의장 재직 중 하라는 7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1]
3. 태평양 전쟁 전범 행위
3. 1. 침략 전쟁 지지 및 선동
1940년 9월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 조약 체결에 대해 추밀원에서 심의했을 때, 하라 요시미치는 삼국 동맹 참여에 반대하며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를 비판했다. 그러나 1941년 6월 독소전이 발발하자 7월 2일 어전회의에서 마쓰오카와 함께 소련에 대한 전쟁 개시를 주장했다. 9월 6일 어전회의에서는 군부가 작성한 제국 국책 수행 요령을 심의하면서, "외교 교섭이 주된 것인지, 전쟁 준비 완비가 주된 것인지 묻고 싶다", "이 요강안에서는 전쟁이 주가 되고 외교가 종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그 반대가 아닌가"라고 발언했다.[1] 쇼와 천황은 이 발언을 듣고 메이지 천황의 와카 "사방의 바다 모두 형제라고 생각하는 세상에 어찌 파도가 일어 소란스러울까"를 읊으며 "나는 고 메이지 대제의 평화 애호의 정신을 이어받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1] 하라는 내대신 기도 고이치와 통하여 오카다 게이스케, 요나이 미쓰마사 등 중신들과 연락하여 전쟁 회피에 노력했지만, 12월 8일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 돌입했다.[1]
4. 저서
- 《변호사 생활의 회고》, 다이쿠샤
- 강연록 『우리 변호사 제도의 진전과 제국 변호사회의 설립』(1-6), 『정의』(권11-12). 제국 변호사회(1935-1936).
- 『변호사 생활의 회고』 법률신보사, 1935, 오조라샤(大空社)에서 복각.
5. 가족
참조
[1]
서적
December 8, 1941: MacArthur's Pearl Harbor
https://books.google[...]
Texas A&M University Press
[2]
서적
Indomitable Will
https://books.google[...]
Bloomsbury
[3]
서적
Eyewitness to World War II: Unforgettable Stories and Photographs From History's Greatest Conflict
https://books.google[...]
National Geographic
[4]
뉴스
枢密院議長・民事裁判の大御所、死去(昭和19年8月8日 毎日新聞(大阪))
毎日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
1994
[5]
웹사이트
原 嘉道
http://www6.plala.or[...]
2024-12-29
[6]
아시아역사자료센터
原嘉道
[7]
간행물
『官報』第343号「叙任及辞令」
1928-02-22
[8]
간행물
『官報』第4438号・付録「辞令二」
1941-10-23
[9]
웹사이트
原嘉道
https://jahis.law.na[...]
『人事興信録』第8版
1928-07
[10]
웹사이트
原嘉道
https://dl.ndl.go.jp[...]
『人事興信録』14版下
[11]
웹사이트
林田敏義
https://dl.ndl.go.jp[...]
『人事興信録』14版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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