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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 (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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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기(韓暨)는 후한 말에서 조위 시대에 활약한 인물로, 군의 호족에게 원수를 갚고 관직에 나아가 수배(水排)를 개발하여 효율을 높이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효렴으로 천거되었으나 은거 생활을 하였고, 조조를 거쳐 조위 건국 후 의성정후, 태상, 사도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한기는 청렴함과 검소한 삶을 실천했으며, 사후 공후(恭侯)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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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 (조위)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한기
원어 이름韓曁
로마자 표기Han Ji
공지(公至)
작위남향정후(南鄉亭侯)
시호공후(恭侯)
출생지허난성팡청현
사망일238년 4월 10일
직업정치인
조상한신
조부한수(韓脩)
아버지한춘(韓純)
자녀한조(韓肇)
한요(韓繇)
관직 경력
관직알자(謁者)
낙릉태수(樂陵太守)
사금도위(司金都尉)
태상(太常)
태중대부(太中大夫)
사도(司徒)
재임 기간 (사도)238년 2월 12일 ~ 238년 4월 10일
군주 (사도)조예
재임 기간 (태중대부)234년 ~ 238년 2월 12일
군주 (태중대부)조예
재임 기간 (태상)226년 ~ 234년
군주 (태상)조비 / 조예
재임 기간 (사금도위)? ~ 226년
군주 (사금도위)헌제 (220년까지) / 조비 (220년부터)
승상 (사금도위)조조 (220년까지)
재임 기간 (알자)? ~ ?
군주 (알자)헌제
승상 (알자)조조
재임 기간 (낙릉태수)? ~ ?
군주 (낙릉태수)헌제
승상 (낙릉태수)조조

2. 생애

한기(韓紀)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형이 군의 호족 진무(陳茂)에게 모함당해 사형당하는 일을 겪었다. 겉으로는 슬픔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품팔이로 돈을 모아 몰래 사람을 구해 원수를 갚았고, 이 일로 명성을 얻었다.[32] 이후 효렴으로 추천되고 사공에게 임명되었으나, 이름을 바꾸고 노양 산속으로 은거했다.[32] 그곳에서 행인들을 노략질하려는 산적 무리를 교화하기도 했다.[32] 원술과 유표의 초빙을 피해 은거했으나, 유표가 앙심을 품자 의성장으로 출사했다.[32]

건안 13년, 조조형주를 점령하고 유종을 굴복시킨 후 한기를 승상사조속으로 삼았다. 이후 악릉태수, 감야알자를 역임했다.[32] 그는 야금(제철) 작업에서 물의 힘을 이용하는 수배(水排)를 개발하여 이전보다 3배나 효율을 높였다. 7년간의 노력으로 물품이 풍족해져 포상을 받았고, 구경에 버금가는 사금도위(司金都尉)에 임명되었다.[32]

220년, 문제가 조위를 건국하자 의성정후에 봉해졌다.[32] 황초 7년에는 태상으로 승진하고 남향정후(2백 호)로 봉해졌다.[32] 당시 조위는 후한의 제후국 시절 서울 에 종묘가 있었는데, 한기는 낙양으로 종묘를 옮기고 제사를 개혁할 것을 건의하여 옛 제사를 폐지했다.[32]

태화 3년 11월, 낙양에 종묘가 완성되자 부절을 받고 고제, 태제, 무제, 문제의 위패를 업에서 모셔와 12월 10일에 낙양 종묘에 안치했다.[34] 태상으로 8년간 재직하다 병으로 물러났고, 경초 2년 2월 11일[34] 사도가 되었으나, 4월 9일[34] 사망했다.[32][34] 시호는 공후(恭侯)이다.[32]

2. 1. 어린 시절과 복수

한기(韓紀)는 어렸을 때, 군의 호족 진무(陳茂)가 아버지와 형을 모함하여 사형을 당하게 하였다.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않으면서 품팔이로 돈을 벌어 몰래 사람을 구해 원수를 갚았고, 이 일로 유명해졌다.[32] 효렴으로 천거되고 사공에게 벽소되었으나 도리어 성명을 바꾸고 노양의 산 속으로 은거 · 피란했다.[32] 산민들이 무리지어 행인들을 노략하려 하자, 가재를 흩어 우주(牛酒)를 제공하고 우두머리를 설득하여 교화시켰다.[32] 원술의 초빙을 피하여 산도의 산으로 들어갔고, 형주목 유표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천릉의 경계로 달아났으나 유표가 깊은 한을 품었으므로 이를 두려워하여 출사해, 의성장(의성현의 현장)이 되었다.[32]

2. 2. 은거와 출사

한기는 군의 호족 진무(陳茂)가 아버지와 형을 모함하여 사형을 당하게 하자,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않으면서 품팔이로 돈을 벌어 몰래 사람을 구해 원수를 갚았고, 이 일로 유명해졌다.[32] 효렴으로 천거되고 사공에게 벽소되었으나 도리어 성명을 바꾸고 노양의 산 속으로 은거 · 피란했다.[32] 산민들이 무리지어 행인들을 노략하려 하자, 가재를 흩어 우주(牛酒)를 제공하고 우두머리를 설득하여 교화시켰다.[32] 원술의 초빙을 피하여 산도의 산으로 들어갔고, 형주목 유표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천릉의 경계로 달아났으나 유표가 깊은 한을 품었으므로 이를 두려워하여 출사해, 의성장(의성현의 현장)이 되었다.[32]

건안 13년, 조조유종을 굴복시켜 형주를 손에 넣고, 한기를 벽소하여 승상사조속으로 삼았고, 나중에는 악릉태수가 되었고, 감야알자로 옮겼다.[32]

2. 3. 조조 휘하에서의 활약

건안 13년, 조조유종을 굴복시켜 형주를 손에 넣고, 한기를 불러 승상사조속으로 삼았다. 나중에 한기는 악릉태수가 되었고, 감야알자로 옮겼다.[32] 이전에는 야금에 말이나 사람을 썼는데(각각 마배(馬排), 인배(人排)라 한다), 효율이 좋지 않았다. 한기는 물을 이용하는 수배(水排)를 개발하여 이전에 비해 3배의 이익을 내었고, 임직 7년 만에 물품들이 충실하게 갖춰져 포상을 받았고 사금도위(司金都尉)가 더해져 구경의 반열에 버금가는 지위에 올랐다.[32]

한기는 이어서 주철 산업을 담당하는 알자로 재배치되었다.[12] 옛날에는 모든 용광로풀무가 100마리의 역마에 의해 작동되었다. 이후 산업은 수동 노동을 사용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한기가 산업을 맡았을 때 수동 노동이 너무 비효율적이고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동한 초기에 두시가 고안한 방법을 사용하여 풀무를 작동하기 위해 수력 발전을 도입했다. 이러한 변화 이후 산업에서 생산되는 주철의 양은 이전보다 3배 증가했다.[13] 한기는 7년 동안 주철 산업을 감독했으며, 주철 생산량이 높게 유지되면서 훌륭한 직무를 수행하여 조조의 군대가 무기와 장비를 꾸준히 공급받을 수 있도록 했다. 조정은 한기의 훌륭한 성과를 칭찬하고 그를 사금도위로 승진시키는 조서를 내렸다. 이는 한 관료 계급에서 구경 바로 아래의 지위였다.[14]

2. 4. 조위 건국 이후

220년, 문제가 조위를 건국하자 한기는 의성정후에 봉해졌다.[32] 황초 7년에는 태상으로 승진하고 남향정후(읍 2백호)로 승급되었다.[32]

당시 조위는 후한의 제후국이던 시절의 서울 에 종묘가 있었는데, 제도가 아직 완전히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한기는 업의 신주를 낙양으로 옮겨 종묘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도록 주청하여, 한나라의 구시대적 제사를 폐지했다.[32]

태화 3년 11월, 종묘가 완성되자 한기는 부절을 받아 고제, 태제, 무제, 문제의 위패를 업에서 모셔왔고, 12월 10일에 신주를 낙양의 종묘에 안치했다.[34]

한기는 태상으로 8년간 재직하다가 병을 이유로 물러났다.[32] 경초 2년 2월 11일[34]에는 사도가 되었으나, 4월 9일[34]에 사망했다.[32][34] 사후 '공후(恭侯)'라는 시호가 내려졌다.[32]

2. 5. 청렴함과 죽음

한기는 청렴한 관리였다. 아버지와 형을 모함한 호족 진무(陳茂)에게 복수한 일로 유명해졌다.[32] 효렴으로 천거되고 사공에게 벽소되었으나, 성명을 바꾸고 노양의 산 속으로 은거하였다.[32] 원술과 유표의 초빙을 피했으나, 유표가 한을 품자 두려워 출사하여 의성장이 되었다.[32]

건안 13년, 조조에게 벽소되어 승상사조속, 악릉태수, 감야알자를 역임했다.[32] 물을 이용하는 수배(水排)를 개발하여 야금의 효율을 3배로 높였고, 임직 7년 만에 물품을 충실하게 갖춰 포장을 받고 사금도위가 더해져 9경의 반열에 버금가는 지위에 올랐다.[32]

황초 원년, 문제가 조위를 창건하자 의성정후에 봉해졌고, 황초 7년에는 태상으로 승진하고 남향정후(읍 2백호)로 승급되었다.[32] 업에 있던 종묘를 낙양으로 옮기고 제사를 정비하는 데 공헌했다.[32] 태화 3년 11월, 종묘가 완성되자 부절을 받아 고제, 태제, 무제, 문제의 위패를 업에서 모셔오고, 12월 10일에 신주를 낙양의 종묘에 안치했다.[34] 관직에 8년 있다가 질병을 이유로 물러났다.[32] 경초 2년 2월 11일[34] 사도가 되었고, 4월 9일[34] 사망했다.[32][34] 시호는 공후(恭侯)이다.[32]

한기는 죽기 전에 간소한 장례를 치러달라고 유언했고, 조예는 그의 겸손함을 칭찬하며 유언에 따라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22]恭侯중국어는 '공손할 공'(恭) 자를 써서 '공후'라고 읽는다.

3. 가계

이름관계관직비고
한조(韓肇)장남남향정후(南鄉亭侯)아버지 한기의 작위를 물려받음[25]
한방(韓邦)한조의 아들장림(長林)야왕현령(野王縣令), 신성군 태수(新城郡太守)학문과 재능이 뛰어났으나 권력 남용으로 처형[25][26]
한요(韓繇)차남고양군 태수(高陽郡太守)[27]
한홍(韓洪)한요의 아들어사대[27]
한수(韓壽)한홍의 아들덕정(德貞)산기상시(散騎常侍), 하남윤덕과 정직함으로 유명, 사후 표기장군(驃騎將軍) 추증[28]
한밀(韓謐)한수의 아들시중(侍中)가충의 외손자, 아버지보다 재능이 뛰어나지만 오만하다는 평[29]
한위(韓蔚)한수의 아들팔왕의 난사마륜에 의해 처형, 한기 가계 단절[30]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Sanguozhi
[3] 서적 Chuguo Xianxian Zhuan
[4] 서적 Chuguo Xianxian Zhuan
[5] 서적 Sanguozhi
[6] 서적 Sanguozhi
[7] 서적 Sanguozhi
[8] 서적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Sanguozhi
[11] 서적 Sanguozhi
[12] 서적 Sanguozhi
[13] 서적 Sanguozhi
[14] 서적 Sanguozhi
[15] 서적 Sanguozhi
[16] 서적 Sanguozhi
[17] 서적 Sanguozhi
[18] 서적 Sanguozhi
[19] 서적 Sanguozhi
[20] 서적 Chuguo Xianxian Zhuan
[21] 서적 Chuguo Xianxian Zhuan
[22] 서적 Chuguo Xianxian Zhuan
[23] 서적 Chuguo Xianxian Zhuan
[24] 서적 Sanguozhi
[25] 서적 Sanguozhi
[26] 서적 Chuguo Xianxian Zhuan
[27] 서적 Chuguo Xianxian Zhuan
[28] 서적 Jin Zhugong Zan
[29] 서적 Jin Zhugong Zan
[30] 서적 Jin Zhugong Zan
[31] 문서 삼국지 위서 한기전에는 [[경초]](景初) 2년([[238년]]) 봄에 조칙을 내렸을 때, "태중태부(太中大夫) 한기는 몸과 덕을 수양하여 뜻과 절개가 고결하며, 나이는 여든이 넘었는데도 바른 도리를 준수함이 더욱 굳으니 가히 순박하고 독실하며, 나이가 들수록 부지런하고 발분한다고 할 수 있다. 한기를 사도(司徒)로 임명하라." 라고 나와있다. 이로 보아 한기는 158년 이전에 태어난 것이 확실하다.
[32] 서적 삼국지
[33] 서적 초국선현전
[34] 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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