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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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함녕군 이인은 조선 태종과 신빈 신씨의 장남으로, 1402년에 태어났다. 1429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금·은 세공 면제를 성사시키며 외교적 업적을 남겼다. 성품이 활달하고 언변이 뛰어나 세종의 신임을 받았으며, 단종과 세조 시대에도 종친으로서 활동했다. 1467년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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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녕군 | |
|---|---|
| 기본 정보 | |
| 원어 이름 | 諴寧君 |
| 휘 | 인(䄄) |
| 별칭 | 공녕군(恭寧君) |
| 자 | 정경(整卿) |
| 가족 관계 | |
| 아버지 | 태종 |
| 어머니 | 신빈 신씨 |
| 배우자 | 전주군부인 전주 최씨 |
| 자녀 | 1남 2녀 |
| 생애 | |
| 출생일 | 1403년 1월 28일 (양력) |
| 사망일 | 1467년 11월 5일 (양력) |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 작위 및 시호 | |
| 작위 | 조선 태종의 왕자 |
| 시호 | 양정(襄靖), 정민(貞敏) |
2. 생애
함녕군(咸寧君) 이인(李䄄)은 1402년(태종 2년) 조선 태종과 신빈 신씨(신녕궁주)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정경(整卿)이다.[1]
함녕군은 성품이 활달하고 언변이 뛰어났다고 한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보여준 활쏘기 실력과 외교적 수완은 이러한 성품을 잘 보여준다.
1413년(태종 13년) 정윤(正尹)에 봉해졌고, 이듬해에는 원윤(元尹)에 봉해졌다. 이때 생모 신씨도 신녕옹주에 책봉되었다. 1416년(태종 16년) 2월 2일, 병조참판 최사강(崔士康)의 딸과 혼인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1417년(태종 17년) 공녕군(恭寧君)에 봉해졌다. 1429년(세종 11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당시 황제였던 선덕제로부터 금·은 세공(歲貢) 면제를 허락받았다.
1430년(세종 12년) 정1품상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공녕군에 올랐고, 부인 최씨는 전주군부인으로 진봉되었다. 1433년(세종 15년) 군호가 혜령군(弘寧君)과 비슷하고 태종의 시호인 공정(恭定)과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함녕군으로 개봉(改封)되었다.[2]
1467년(세조 13년) 사망하였으며,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3. 성품과 일화
1452년 단종이 즉위하고 사정전에서 종친들을 만났을 때 함녕군도 참여하였다.[1]
1453년(단종 1) 2월 세조가 명나라에서 예부의 자문을 받아 돌아와 보고하자, 단종이 연회를 열어 세조를 위로할 때 함녕군도 함께 했다. 같은 해 5월, 세조가 단종의 혼인을 서두를 때 종친들과 함께 단종에게 왕비를 맞이하도록 청하였다.[1]
1454년(단종 2) 단종이 함녕군에게 말 1필을 하사하였다.[1]
3. 1. 명나라 사신 행적과 외교적 성과
1429년(세종 11) 함녕군은 계품사로서 명나라 북경에 가서 금은 세공 면제를 요청하여 허락받고 돌아왔다. 이때 선덕 황제는 함녕군에게 중국 비단옷 4벌과 표리(表裏) 10필, 금대(金帶) · 서대(犀帶) 각각 1개, 100냥 등을 선물했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 사신이 물소뿔로 만든 서대를 찰 수 없었는데, 함녕군이 받자마자 바로 착용하여 그 후부터 우리나라 사신들도 중국에서 물소뿔 관대를 찰 수 있게 되었다.[1]
외국 사신들은 북경에 오면 회동관(會同館)에, 조선 사신은 옥하관(玉河館)에 머물렀다. 활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달자(達子)의 사신들이 태감 윤봉에게 요청하여 함녕군과 활쏘기 시합을 하게 되었다. 함녕군은 강궁을 힘껏 당겨 쏠 때마다 백발백중으로 과녁을 맞혔고, 이를 구경하던 외국 사신들과 달자 사신들이 모두 탄복하였다.[1]
함녕군 일행은 4개월 이상 명나라에 머물면서 금은 면공 칙서를 받아 그해 12월 말에 돌아왔다. 세종은 크게 기뻐하며 세자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모화관으로 나가 사신 일행을 맞이하였다. 이어 경회루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그 공로를 포상하였는데, 함녕군은 논 80결과 노비 8명을 하사받았다.[1]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대명회전』에서 주변 80여 나라에게 특산물을 예물 형식으로 바치도록 규정하였다. 조선은 금은 · 나전칠기 · 흰 비단 · 각색 모시 · 용무늬 대자리 · 각색 화문석(花紋席) · 표피(豹皮) · 수달피 · 붓 · 조선 종이 · 인삼 · 종마(種馬) 등 12가지였는데, 그중 가장 부담이 큰 것은 매년 황금 150냥과 백은 700냥을 보내는 것이었다. 조선은 금은이 본국 토산품이 아니라는 이유로 면공하고 다른 토산물로 대체하도록 오랫동안 요청해왔는데, 1429년(세종 11) 함녕군이 선덕제에게 주청하여 마침내 성공하였다. 함녕군은 조선 외교사에서 가장 큰 문제였던 <금은 면공>과 <종계변무> 2대 과제 중 금은 면공을 이루어 큰 업적을 남겼다. 세종이 금은 면공 주청 계품사로 이복동생 함녕군을 임명한 것은 그의 외교적 수완과 조리 있는 언변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1]
3. 2. 조선에서의 활동
1413년(태종 13년) 정윤(正尹)에, 이듬해에는 원윤(元尹)에 봉해졌으며, 생모인 신빈 신씨는 신녕옹주에 책봉되었다.[1]
1416년(태종 16년) 2월 2일, 병조 참판(兵曹參判) 최사강(崔士康)의 딸과 혼인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1417년(태종 17년) 공녕군(恭寧君)에 봉해졌다.
1429년(세종 11년) 왕명을 받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며, 당시 황제인 선덕제에게 금·은의 세공(歲貢) 면제를 허락받았다.
1430년 1월 (세종 12년) 정1품상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공녕군이 되었고, 배위 최씨는 전주군부인으로 진봉되었다.
1433년(세종 15년) 군호가 홍녕군(弘寧君)과 비슷하고 태종의 시호인 공정(恭定)을 피하기 위해 함녕군으로 개봉(改封)되었다.[2]
1429년(세종 11) 계품사로서 명나라 북경에 가서 금은 세공을 면제받고 돌아올 때, 선덕 황제가 함녕군에게 중국 비단옷 4벌과 표리(表裏) 10필, 금대(金帶) · 서대(犀帶) 각각 1개씩과 은화(銀貨) 100USD를 선물로 주었다. 당시 명나라에서 조선의 사신은 물소뿔로 만든 서대를 찰 수 없었는데, 함녕군이 이것을 받자마자 바로 착용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우리나라 사신들도 중국에서 물소뿔 관대를 찰 수 있게 되었다.
외국 사신들이 북경에 오면 회동관(會同館)에 머물고, 조선의 사신은 옥하관(玉河館)에 머물렀는데, 활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달자(達子)의 사신들이 태감 윤봉에게 “조선 사신 함녕군이 활을 잘 쏜다는 말을 들었는데, 특별히 강궁(強弓)을 가지고 한번 시합하기를 청합니다.”라고 요청하였다. 함녕군은 이를 흔쾌히 승낙하고 회동관으로 가서 활쏘기 시합을 했다. 함녕군이 강궁을 힘껏 당겨서 활을 쏠 때마다 백발백중으로 과녁을 맞혔으므로, 시합을 구경하던 외국 사신들과 달자 사신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함녕군 일행은 4개월 이상 명나라에 머물면서 금은 면공에 대한 명나라의 칙서를 받아 그해 12월 말에 돌아왔다. 세종은 크게 기뻐하며 세자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모화관으로 나가 사신 일행을 맞이하였다. 이어 경회루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그 공로를 포상하였는데, 함녕군은 논 80ha과 노비 8명을 하사받았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대명회전(大明會典)』에서 주변 80여 개 나라에 각 나라의 특산물을 예물(禮物) 형식으로 명나라 황제에게 바치도록 규정하였다. 조선은 금은, 나전칠기, 흰 비단, 각색 모시, 용무늬 대자리, 각색 화문석(花紋席), 표피(豹皮), 수달피, 붓, 조선 종이, 인삼, 종마(種馬) 등 12가지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부담하기 어려운 것이 해마다 황금 약 4252.43g과 백은 약 19844.65g을 명나라에 보내는 것이었다. 이는 원나라 때부터 고려에 부과되었는데, 조선에서는 금은이 본국 토산품이 아니라는 이유로 면공하고 다른 토산물로 대체하도록 명나라에 오랫동안 요청하였다. 1429년(세종 11) 함녕군이 선덕제에게 주청하여 마침내 성공하였다. 함녕군은 조선 외교사에서 가장 큰 문제였던 <금은 면공>과 <종계변무(宗系辨誣)> 두 가지 과제 중 금은 면공을 이루어 조선 외교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세종이 금은 면공을 주청하는 계품사에 이복동생 함녕군을 임명한 것은 그의 외교적 수완과 조리 있는 언변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고 사정전(思政殿)에서 종친들을 인견(引見)하고 하사품을 내릴 때 함녕군도 입시(入侍)하였다.
1453년(단종 1) 2월, 세조가 명나라에 가서 예부의 자문(咨文)을 받아 가지고 돌아와 복명하니, 단종이 연회를 베풀어 세조를 위로할 때 함녕군도 연회에 참석하였다. 같은 해 5월, 세조가 단종의 혼인을 서두를 때 종친들과 함께 단종에게 왕비를 맞이하도록 청하였다.
1454년(단종 2) 단종이 함녕군에게 말 1필을 내려 주었다.
4. 가족 관계
| 관계 | 이름 | 비고 |
|---|---|---|
| 아버지 | 태종 | 조선 제3대 왕 |
| 어머니 | 신빈 신씨 | |
| 부인 | 전주 최씨 | 찬성 증 좌의정 최사강의 딸 |
| 장남 | 덕성군 민 | |
| 며느리 | 능성 구씨 | 참의 구신충의 딸 |
| 양손자 | 팔계군 정 | 임영대군의 4남 |
| 며느리 | 파평 윤씨 | 파원부원군 윤여필의 딸 |
| 며느리 | 문화 류씨 | 사의 류종수의 딸 |
| 장녀 | 파평 윤씨 | 윤오의 처 |
| 손자 | 윤여림 | 판관 |
| 손녀 | 재령 이씨 | 참판 이맹현의 처 |
| 손녀 | 창녕 성씨 | 교리 성희증의 처 |
| 손녀 | 양성 이씨 | 판관 이익의 처 |
| 차녀 | 조졸 |
참조
[1]
웹인용
(사)전주이씨대동종약원-함녕군
http://www.rfo.co.kr[...]
2019-08-25
[2]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9월 30일(임진) 4번째기사 및 세종 60권, 15년(1433 계축 / 명 선덕(宣德) 8년) 6월 27일(무신) 1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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