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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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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녕대군은 조선 태종의 장남으로, 1394년에 태어나 1462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그는 1404년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방탕한 사생활과 부왕 태종과의 갈등으로 인해 1418년에 폐위되었다. 이후 동생인 세종이 왕위에 오르도록 돕는 등, 세종 시대에 형제간의 우애를 다졌다. 숭례문 현판 글씨를 쓰는 등 예술적 재능을 보이기도 했으며,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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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 제
작위조선왕세자 → 대군
봉호양녕대군
시호강정(剛靖)
출생1394년
출생지한성
사망1462년 10월 8일
사망지한성
묘소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종교유교
가족 관계
아버지태종
어머니원경왕후 민씨
배우자수성부부인 광산 김씨
자녀10남 17녀
재위 정보
재위 기간1404년 8월 6일 ~ 1418년 6월 3일
유형재위
전임자왕세자 이방원
후임자왕세자 이도
가문
왕조이씨
가문전주 이씨
분파양녕대군파
기타
이제(李禔)
후백(厚伯)
로마자 표기Yi Je
로마자 표기(봉호)Yangnyeong Daegun
로마자 표기(시호)Gangjeong
관련 링크전주이씨 양녕대군파
(재)지덕사-전주이씨 양녕대군파 종회

2. 생애

1394년 태종원경왕후 민씨의 장남으로 한성부에서 태어난 양녕대군(讓寧大君)은,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과 잦은 비행으로 1418년 폐세자가 되었다. 이후 팔도를 유랑하며 풍류객으로 살다가 1462년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생애는 크게 세자 시절과 폐세자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세자 시절 (1394년 ~ 1418년)


  • 출생과 성장: 1394년 한성부에서 태어나, 1402년 이름을 제(禔)로 받고 원자로 책봉되었다. 1404년 왕세자가 되었고, 1407년 김한로의 딸과 혼인했다.
  • 자유분방한 성격과 부왕과의 갈등: 유교적 교육과 궁중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잦은 비행으로 태종과 갈등을 빚었다. 1417년 왕친록(王親錄)을 몰래 열어보고, 곽선의 첩과 관계를 가지는 등 문제가 계속되었다.
  • 세자 폐위: 1418년 유정현 등의 상소로 세자에서 폐위되고, 경기도 이천으로 쫓겨났다. 황희 등 소수만이 폐위를 반대했다.

폐세자 이후 (1418년 ~ 1462년)

  • 팔도 유랑과 풍류 생활: 경기도 광주 사저로 거처를 옮긴 후, 팔도를 유랑하며 사대부, 풍류객, 기녀들과 교류했다.
  • 동생 세종과의 관계: 세종 즉위 후 석방되었고, 세종은 형을 배려하여 여러 차례 비행에도 불구하고 벌하지 않았다.
  • 계유정난수양대군 지지: 1453년 계유정난에서 수양대군을 지지하고, 안평대군 사사를 간청하기도 했다.
  • 죽음: 1462년 69세로 사망했으며, '나라의 예장을 받지 말고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양녕대군은 세자 폐위라는 큰 사건을 겪었지만, 동생 세종의 배려와 자신의 자유로운 성격 덕분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국보 1호 숭례문 현판을 썼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예술적 재능도 뛰어났던 인물로 평가된다.

2. 1. 출생과 왕자 시절

1394년 조선 태종원경왕후 민씨의 장남으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 성은 이(李), 휘는 제(禔), 자는 후백(厚伯)이다. 조선 효령대군, 세종, 성녕대군의 첫째 친형이다.[3]

1402년(태종 2년) 3월 8일 제(禔)란 이름을 받았고 그 해 4월 18일에 원자(元子)로 책봉되었다.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1406년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왔다.[12] 어려서 학자인 계성군 이래(李來)의 문하에서 효령대군, 충녕대군 등과 함께 수학하였으나 수업은 뒷전이고 참새나 바깥 풍경을 보며 다른 생각을 하였다 한다.

1407년(태종 7년) 9월 25일 영락제의 명으로 하진표사(賀進表使)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이때 완산부원군 이천우(李天祐), 단산부원군 이무(李茂), 계성군 이래(李來), 제학 맹사성(孟思誠), 총재 이현(李玄), 서장관 집의 허주(許稠) 등 백여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연경에 다녀왔다.

영락제는 그에게 특별히 시를 지어서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1409년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1412년에서 1413년까지 부왕 태종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을 1년간 하였다.

2. 2. 세자 시절

1394년 한성부에서 태종원경왕후 민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404년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07년에는 김한로의 딸과 혼인하여 세자빈을 맞이하였다. 1409년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1412년에서 1413년까지 부왕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을 1년간 하였다.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講武時率行)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세자 시절 그는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유교적 교육과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숭례문의 현판 휘호를 남길 정도로, 평소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2. 2. 1. 부왕과의 갈등

태종은 양녕대군에게 여러 차례 여색을 멀리하고 왕으로서의 자질과 덕망을 쌓으라고 타이르지만, 양녕대군은 오히려 부왕이 여색을 밝히고 후궁을 들이는 것을 지적하며 갈등이 계속되었다.[7] 1417년에는 태종이 보관하라고 준 왕친록(王親錄)을 몰래 열어본 것이 알려지면서 더욱 부왕의 불신을 샀다. 또한 전중추 곽선(郭旋)의 첩과 관계를 가진 사실도 드러났다.[5]

양녕대군은 김호생이라는 붓 만드는 장인을 몰래 대궐로 불러 붓을 만들게 하기도 했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태종이 심문했지만, 김호생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태종은 그에게 벼슬을 내렸다.

1410년에는 외삼촌인 민무구, 민무질이 옥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원경왕후는 이 일로 병석에 눕게 되었고, 다른 외삼촌인 민무휼과 민무회가 문병을 왔다. 이들은 양녕대군을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양녕대군은 이들을 외면하고 오히려 외가를 비난했다.[4]

양녕대군은 세자 시절, 스승인 계성군 이래에게 개 짖는 소리를 내며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이래는 태종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이후에도 세자의 언행을 낱낱이 보고했다. 세자는 글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새덫을 놓아 참새 사냥을 즐기는 등 자유분방한 행동을 계속했다.

태종이 궁으로 데려온 기생 출신 첩의 존재를 알게되자, 태종은 그 기녀를 사형에 처했다. 양녕대군은 부왕 역시 여러 여인을 첩으로 거느리는 것을 언급하며 항의하다가 끌려나가기도 했다.

2. 2. 2. 세자 폐위

1404년(태종 4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부왕 태종과 마찰을 빚었다.[3] 그는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 생활, 왕세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태종은 여러 차례 그에게 품행을 바로잡도록 충고했지만, 그는 품행을 바꾸지 않았다.[7]

1417년 태종이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라고 준 왕친록(王親錄)을 열어봤다가 발각되었고, 전중추 곽선(郭旋)의 첩을 취한 사실도 밝혀졌다. 1415년 5월에는 그의 삼촌이자 전임 국왕인 정종의 기생 초궁장과 간통하여 스캔들을 일으켰다. 양녕대군은 초궁장이 그의 삼촌의 여인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4] 1417년 2월 15일, 양녕대군은 곽선의 첩인 어리를 몰래 궁궐로 데려왔다. 태종은 분노하여 양녕대군을 궁궐에서 그의 장인 김한로의 집으로 유배 보냈다. 그러나 김한로는 양녕대군과 어리의 만남을 주선하였고, 어리는 왕세자의 아이를 낳았다.[5]

결국 유정현 등이 세자 양녕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 1418년(태종 18년) 5월에 세자에서 폐위되었다.[8] 이때 양녕의 폐위를 반대한 것은 황희 등 소수였다. 세자 폐위 이후 양녕대군은 경기도 이천군으로 보내졌다.[12] 그 대신에 아우인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김시양(金時讓)은 저서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양녕대군의 폐세자 원인에 대해 세 가지 추론을 제시했다.[12] 첫째는 양녕이 태종의 뜻이 세종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자리를 사양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양녕이 폐세자 된 뒤 한성에서 외지로 쫓겨나 경기도 이천군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세종이 몰래 양녕을 불러 위로했다는 것이다.[12]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와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세자(양녕대군)의 계속된 비행으로 아버지 태종이 몇번 질책하자, 불만을 품고 태종에게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아버지(태종)은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시면서 왜 저만 못하게 하시느냐”하는 상소를 올려 태종을 비난했다. 이에 분노한 태종은 세자를 폐하고 동생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한다.[13]

2. 3. 세자 폐위 이후

1418년(태종 18년) 유정현 등이 세자 양녕을 탄핵했다. 이때 이미 사람들에게 신망을 잃은 양녕을 비호한 이는 황희 등 소수였다.[12] 김시양(金時讓)은 저서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양녕대군의 폐세자 원인에 대해 세 가지 추론을 했다.[12] 첫째는 양녕과 아버지 태종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양녕대군이 세자일 때 태종의 뜻이 세종(충녕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자리를 사양하여 태종이 곧 폐하고 세종을 세웠다는 것이다. 둘째는 양녕대군과 동생 충녕대군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폐위된 뒤 한성에서 외지로 쫓겨나 경기도 이천군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세종이 몰래 양녕대군을 불러 위로했다는 것이다.[12]

부왕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세자 책봉 직후라는 설과 세자 책봉 후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부왕의 침전으로 문안차 들어가던 중 그는 문 밖에서 부왕 태종과 모후 민씨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게 되었다. 부왕 태종은 '충녕과 양녕이 바뀌어 태어났더라면, 장차 백성들이 요순의 다스림을 받아 태평성대에서 살게 될 것'이라며 한탄했고, 모후 민씨 역시 '충녕이 맏이었어야 할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와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세자(양녕대군)의 계속된 비행으로 아버지 태종이 몇 번 질책하자, 불만을 품고 태종에게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아버지(태종)는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시면서 왜 저만 못하게 하시느냐”하는 상소를 올려 태종을 비난했다. 이에 분노한 태종은 세자를 폐하여 이천군으로 귀양보내고 동생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한다.[13] 그해 5월 결국 세자에서 폐위된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지난 날 부왕 태종과 방석, 방번, 그리고 방간 등 숙부들과의 골육상쟁을 떠올리며 최종적으로 충녕에게 양보하기로 결심했다는 전승도 전해진다.

이후 출궁을 청하는 상소가 거듭되어 태종은 하는 수 없이 출궁을 명하였고, 경기도 광주군의 사저로 내려갔다. 떠나는 양녕대군에게 여자 종 13인과 남자 종 10여 명을 데리고 가게 하였다. 또한 특별히 배려하여 그가 평소에 아끼고 사랑하였던 여인도 데려가게 하였고, 그 외에 일상 쓰던 여러 가지 가재도구도 다 가지고 가게 하였다. 다만 매와 활은 두고 가게 하였다고 한다. 태종은 모든 것을 양녕대군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도록 명령하였다.

대궐을 떠나던 날 양녕대군은 광나루 포구에서 "앞으로는 이 땅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며 한탄하고 눈물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광주의 사저로 나온 양녕대군에게는 《논어(論語)》와 《대학(大學)》 이외의 책은 금지시켰다. 그 뒤 그는 팔도 각지를 유랑하며 사대부, 풍류객, 기녀들과 사귀면서 일생을 마쳤다.

1418년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동생 세종은 이천군에 유배된 형 양녕대군을 석방하였다. 동생의 즉위 이후에도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세종 즉위 뒤에도 여러 번 비행을 저질렀는데,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 사후 비행의 강도가 더해졌다. 과거의 왕세자였고 현재 왕이 동생이라는 점 때문에, 일거일동이 세밀한 관찰과 감시의 대상이 되어 번번이 그것도 수십 차례에 걸쳐 언관들로부터 탄핵되었다. 특히 자신의 며느리까지 범하는 등 인간 이하의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고 이에 충격을 받아 아들이 목을 매 자결할 정도였다.

이러한 그의 비행에 대해 신하들은 여러 번 탄핵하였으나 세종은 그를 배려해 벌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453년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조카 수양대군의 편을 들어 그를 독려했고, 심지어는 안평대군을 사사하라고 간청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계유정난이 끝나자 단종을 죽이라고 간청까지 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동생 세종에 대한 보복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이에 대한 이유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세종이 왕이 된 후, 형제간의 관계는 강화되었고, 세종은 종종 양녕대군을 궁궐로 초대했다. 세조의 통치 기간 동안, 양녕대군은 가장 연장자 왕족의 지위를 누렸고, 세조는 종종 궁중 연회에 양녕대군을 초대했다.

양녕대군은 세조 8년인 1462년,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0] 양녕대군의 묘는 18년간의 폐쇄 끝에 2018년 대중에게 재개방되었다.[11]

2. 4. 사망

1462년(세조 8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와 서에 능하였으며, 국보 1호였던 숭례문의 현판 글씨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10]

자녀는 정실에서 3남 5녀를 두고, 측실에서 7남 12녀를 두었다. 죽으면서 유언하기를 '나라의 예장을 받지 말며 묘비도 세우지 말고 상석도 놓지 말며 산소 치장을 극히 검소하게 하라.'고 하였다. 강정(剛靖)의 시호가 내려졌다.

장지는 경기도 금천군 강적골 곤좌간향에 안장되었는데,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산65-42'(양녕로 167)이다. 사후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석물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7대손 참판 만(曼)과 8대손 성항(性恒)이 상의하여 단출한 상석을 놓고 짤막한 묘비를 세웠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합 전야인 8월 26일 밤 갑자기 파괴되었다.

사후 그는 음란함과 문란함의 대명사가 되어 그의 시문과 작품 중 상당수가 인멸되거나 사라졌다. 또한 1457년(세조 2년)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시까지 언급되며 문제시되었다. 그러나 숙종 때 숙종이 우연히 퇴락한 그의 사당을 발견함으로써 복권되고 사당 개수의 명이 내려졌다.

1462년, 세조 재위 중 한성부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67세(만 69세)였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아버지태종1367년 6월 13일1422년 5월 30일조선의 제3대 왕
어머니원경왕후 민씨1365년 7월 29일1420년 8월 18일태종의 왕비
배우자이름출생사망비고
정부인수성부부인 광산 김씨??김한로의 딸
봉지련??기생
어리??곽선의 첩이었던 기생
초궁장??정종의 애첩
정향??기생
칠점생??기생
이름 미상??노비 출신
이름 미상??
자녀이름출생사망비고
적1남순성군 희안공 이개1414년 6월 23일1462년 9월 2일
적2남함양군 이안공 이포1417년1475년 6월 21일
적3남서산군 이혜1420년1451년 4월 10일
적1녀재령군주?1444년여주 이씨 이자에게 출가
적2녀???경주 이씨 이번에게 출가
적3녀영평현주??안동 김씨 김철균에게 출가
적4녀???밀양 박씨 박수종에게 출가
적5녀영천군주1412년1442년 4월 5일
서1남고정부정 이겸??
서2남장평부정 이흔??이승만의 15대조
서3남계천도정 이성??
서4남봉산부정 이순??
서5남안창정 이심??
서6남밀산부정 이광석??
서7남금지부정 이광근??
서1녀이애중1451년?상장 이종경과 혼인
서2녀???연안 김씨 김암과 혼인
서3녀???안동 권씨 권치중의 처, 외손녀가 연산군의 후궁 숙의 곽씨
서4녀???현감 김승간과 혼인
서5녀???사직 김오와 혼인
서6녀???광산 김씨 김원과 혼인
서7녀???한치형의 초취
서8녀이구지??안동 권씨 권덕영과 혼인
서9녀???강진 유씨 유석번과 혼인
서10녀???봉사 김의와 혼인
서11녀???부안 임씨 임중과 혼인
서12녀이건이??



양녕대군은 본처인 수성군부인 김씨와의 사이에서 3남 5녀를 두었으며, 첩에게서 7남 12녀를 낳았다.[14] 그의 서8녀 이구지는 남편 권덕영 사후 권덕영의 종 천례와의 사이에서 딸 준비를 얻었다.[16][17] 준비는 1488년 무렵 평민에게 출가하였으나 남편의 인적사항은 전하지 않는다.

4. 평가 및 기타

양녕대군은 평소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으나 작품들은 대부분 인멸되거나 실전되었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시, 서예 등 예술에 관심을 가졌으며, 풍류를 즐기며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서울 남대문의 편액(扁額) 숭례문은 그의 필적이었다.[12]

수행이 불량하여 세자에서 폐출되었으나, 한편으로는 동생인 충녕대군의 뛰어난 자질을 인정하고 동생이 즉위할 수 있도록 일부러 어리석은 체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이 그의 본심이었다는 설과 본심이 아니었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다.

여성 관계가 복잡하여 마음에 드는 기생을 첩으로 삼아 궁궐로 데려왔으나, 태종의 노여움을 사 기생이 처형되기도 하였다. 또한, 숙부인 정종의 총애를 받은 초궁장(楚宮粧), 중신 곽선의 애첩인 어리(於里)와 스캔들을 일으켰다. 초궁장은 태종의 명으로 궁정에서 추방되었고, 어리는 양녕대군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더 나아가 노비 여성과도 관계를 가졌으며, 심지어 아들인 서산군의 첩에게도 손을 댔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서산군은 심병을 얻었다고 한다.

폐위 후에도 행동이 문제시되었으나, 매번 세종이 보호하여 처벌받지는 않았다. 폐세자였지만 왕의 친형으로서 지위를 중시받았다.

1453년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조카 수양대군의 편을 들어 그를 독려했고, 안평대군을 사사하라고 간청까지 했다. 계유정난이 끝나자 단종을 죽이라고 간청까지 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동생 세종에 대한 보복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이에 대한 이유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김시양은 '양녕이 능히 때에 따라 속마음을 감추고 이럭저럭 지내감으로 주위 사람들의 환심을 얻었으며 세종도 양녕을 높이고 사랑하여 여러 차례 대궐로 맞아들여 술을 대접하였다. 또 양녕이 사냥을 좋아하매 세종이 여러 번 성밖으로 나아가 맞이하시니 형제간의 지극한 정의가 이를 데 없었다'라고 평가하였다.[12]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산65-42에는 지덕사부묘소(至德祠附墓所)가 있는데, 지덕(至德)이란 중국 주(周)나라 때 태왕(太王)이 맏아들 태백과 둘째아들 우중을 건너뛰어 셋째아들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할 때 태백과 우중 두 형제가 부왕의 뜻을 헤아려 삭발하고 은거하며 왕위를 사양한 고사에서 유래한다. 훗날 공자(孔子)는 태백은 지덕, 우중은 청권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고사를 바탕으로 양녕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지덕사, 효령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청권사라 하였다.[18]

1966년 1월 소설가 박종화는 그의 일대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 양녕대군을 부산일보에 1968년 12월 31일까지 연재하였다.

5. 대중문화 속 양녕대군

양녕대군은 여러 미디어 매체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 1962년 영화 《周遊天下|주유천하중국어》에서는 배우 신영균이 양녕대군 역을 맡았다.
  • 2012년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는 배우 백도빈이 양녕대군을 연기했다.
  • 드라마 《세종대왕》에서는 배우 정호근이 양녕대군 역을 맡았다.

5. 1. 드라마

5. 2. 영화

참조

[1] 일반
[2] 일반
[3] 서적 Women in Korean History 한국 역사 속의 여성들 https://books.google[...] Ewha Womans University Press
[4] 웹사이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태종이 밝힌 양녕대군 폐세자 이유, "대체 너 땜에 몇명이 죽었냐" https://www.khan.co.[...] 2019-06-13
[5] 웹사이트 Crown Prince Is Ordered To Reside With Father-In-Law https://sillok.histo[...]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6] 웹사이트 Crown Prince Is Ordered To Return To Hangyeong https://sillok.histo[...]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7] 웹사이트 Crown Prince Sends Letter to King Via Chamberlain Park Ji-saeng https://sillok.histo[...]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8] 학술지 King Taejong as a statesman: From power to authority https://www.research[...] 2021-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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