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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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허성택은 일제강점기 당시 노동운동가였으며, 해방 후 남로당 계열의 노동운동을 주도하다가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했다. 그는 1927년 반일 운동을 시작하여 1933년 소련으로 망명,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했다. 1935년 귀국하여 노동운동을 하다가 1936년 투옥되었고, 해방 후 남로당 산하 노동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9월 총파업'을 주도했으나 실패했다. 1948년 월북 후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여 내각 노동상, 석탄공업상 등을 역임했으나, 1958년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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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성택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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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08년 |
| 출생지 | 함경북도 |
| 사망 | 1958년 |
| 정당 | 조선로동당 |
| 모교 | 동방 노동자 공산대학 |
2. 생애
함경북도 성진(현 김책시) 출신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노동조합과 연계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허국택, 허성탁 등의 가명을 사용하였다.[1] 사회주의 및 경제 지식의 필요성을 느끼고 1933년 소련으로 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했다. 1935년 귀국 후 노동운동과 반일운동에 투신하다 1936년 성진농민조합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1] 1940년부터는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참여했다.[1]
1945년 해방 후에는 남한에서 남로당 계열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를 조직하고 의장을 맡아 노동운동을 이끌었다.[1] 1946년 9월에는 해방 이후 최대 규모의 파업인 '9월 총파업'을 주도하였으나 미군정과 우익 단체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잠적, 이후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1948년 4월 월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에 참여했다. 초대 내각 노동상을 시작으로[2] 교통성 부상, 석탄공업상 등 요직을 거쳤으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도 선출되었다. 1958년 노력훈장을 수여받았으나, 같은 해 김일성의 권력 강화 과정에서 벌어진 반종파투쟁 중에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이후의 행적은 불명확하다.
2. 1. 일제강점기 활동
함경북도 성진(현 김책시) 출신으로, 1927년 일제강점기 조선 내 노동조합과 연대하여 반일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허국택, 허성탁, 허영식 등 여러 가명을 사용하였다.[1] 1930년대 초, 사회주의와 경제 지식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과 독립운동에 더 효과적으로 기여하고자 1933년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모스크바에 위치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하였고, 1934년 졸업하였다.1935년 한반도로 돌아온 후, 노동조합과 연대하여 일제에 맞선 적극적인 파업 투쟁과 반일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1936년 '성진농민조합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1] 출소 후 1940년부터는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참여하며 민족 해방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다.[1]
2. 2. 해방 이후 남한에서의 활동과 월북
1945년 해방 이후, 허성택은 남한에서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남로당 계열의 노동운동 단체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를 조직하고 의장으로 활동했다.[1] 이는 당시 열악한 환경에 처한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조직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한 중요한 활동이었다.1946년 9월, 허성택은 전평을 이끌고 해방 이후 최대 규모의 파업인 '9월 총파업'을 주도했다. 이 총파업은 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 요구와 함께 미군정의 정책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성격을 가졌다. 그러나 미군정 경찰과 우익 반공 청년단체의 강경한 무력 진압으로 인해 파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9월 총파업 실패 이후, 허성택은 미군정의 수배를 피해 약 1년간 잠적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결국 체포되어 1년 동안 복역하게 되었다.
1948년 4월, 남한에서의 정치적 활동에 한계를 느낀 허성택은 월북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과정에 참여하며 북한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 연도 | 직책 및 활동 |
|---|---|
| 1948년 8월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 |
| 1948년 9월 | 초대 내각 노동상[2] (김일성 내각) |
| 1954년 | 내각 교통성 부상 |
| 1956년 |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
| 1957년 5월 |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 |
| 1957년 8월 |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 1957년 9월 | 내각 석탄공업상 |
| 1958년 | 노력훈장 수여 |
1957년 석탄공업상 임명 이후 허성택의 공식적인 행적은 기록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1958년 8월 종파 사건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부의 반종파 투쟁 과정에서 숙청되었다는 설[1]과 정치적으로 좌천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2. 3. 북한에서의 활동과 숙청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9월 총파업'을 주도하였으나, 미군정 경찰의 탄압을 피해 1년간 잠적하다 체포되어 1년간 복역하였다. 출소 후 1948년 4월 월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에 참여하였다.월북 이후 허성택은 북한 정권에서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 연도 | 주요 활동 및 직책 |
|---|---|
| 1948년 8월 |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선출 |
| 1948년 9월 |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출, 초대 내각 노동상 임명[2] |
| 1954년 | 내각 교통성 부상 (일부 자료에서는 운수상으로도 표기) |
| 1956년 |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선출 |
| 1957년 5월 |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 선출 |
| 1957년 8월 |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출 |
| 1957년 9월 | 내각 석탄공업상 임명 |
| 1958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력훈장 수여 |
함경북도 성진(현재의 김책시)에서 태어나 자랐다. 1927년 일제강점기 조선의 노동조합과 연대하여 반일운동을 시작했으며, 이 시기 허국택, 허성탁, 허영식 등의 가명을 사용했다. 1930년대 초, 사회주의와 경제 지식 없이는 노동운동과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1933년 소련으로 망명했다.
[1]
웹사이트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20-04-11
195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력훈장을 수여받았으나, 같은 해 김일성의 1인 독재 체제 강화 과정에서 벌어진 반종파투쟁[1]에 연루되어 숙청되었고,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그의 공식적인 활동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3. 약력
1934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했다. 1935년 한반도로 돌아와 노동조합과 연대하여 일제에 맞선 적극적인 파업과 반일운동에 투신했다. 이로 인해 1936년 성진농민조합사건으로 체포되어 3년간 복역했다. 1940년부터는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참여했다.
1945년 해방 후 귀국하여 농민 및 노동조합 조직 활동에 힘썼다. 남로당 계열의 노동운동 단체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를 조직하고 의장을 맡았다.[1] 1946년 9월, 해방 정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파업이었던 전평의 '9월 총파업'을 주도했다. 그러나 미군정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무력 진압으로 파업은 실패로 돌아갔고, 허성택은 1년간 잠적했다가 체포되어 다시 1년간 복역했다.
1948년 4월 월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에 참여했다. 같은 해 8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2]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후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김일성 내각의 초대 노동상으로 임명되었다.[2]
이후 1954년 내각 교통성 부상,[2] 1956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1957년 5월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 같은 해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1957년 9월에는 내각 석탄공업상에 임명되었다.[2] 195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력훈장을 수여받았다.[2]
1958년 이후의 공식적인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부에서 벌어진 반종파투쟁 과정에서 숙청되었거나 한직으로 좌천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일부 자료에서는 1958년에 처형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참조
[2]
뉴스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48-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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