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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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필원은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운동가이자, 해방 이후 조선인민공화국 경제부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일본 유학 중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고 일월회, 정우회, 조선공산당 등 공산주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1928년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해방 후에는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에서 활동했으며, 좌익 세력 통합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다가, 1948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하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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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제강점기 활동

하필원은 일제강점기 동안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일본 도쿄 유학 중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를 졸업하고 공산주의 단체인 일월회(日月會) 간부로 활동했다. 1926년 귀국 후 정우회(正友會)에 참여했고, 제3차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1928년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고, 석방 후에도 엠엘파(ML派) 계열에서 활동했다.

2.1. 초기 사회주의 운동

경상남도 하동 출신으로, 일본 도쿄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를 졸업하였다. 이 시기에 공산주의 단체인 일월회(日月會)의 일원이 되었으며,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6년 8월에 한반도로 들어와 공산주의 단체인 정우회(正友會)의 일원이 되었다. 1926년 11월 3일 안광천이 〈정우회 선언〉을 통하여 통일전선 노선을 발표하고 일월회를 해체하였을 때, 하필원은 이 노선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정우회에서 적지 않은 세력을 보유하고 있던 계파는 통일전선을 거부하고 있던 화요회(火曜會)였기에 정우회 내 분열 조짐이 일어나게 되었다. 〈정우회 선언〉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제3차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었는데, 이 당의 창당은 과거 일월회 성원들이 중심이 되었기에 소위 ‘엠엘파 조선공산당’이라고 불린다. 이때 하필원은 제3차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2.2. 조선공산당 활동과 투옥

1926년 12월 조선공산당 제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1월에는 제3차 조선공산당의 청년 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7년 8월 당 기관지인 조선지광의 편집위원이 되었는데, 이 시기에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자리에서 사임하였다.

1928년 2월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하필원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경성지법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다. 석방 후 여러 공산주의 단체를 전전하며 주로 엠엘파로 활동하였다.

3. 해방 이후 활동

해방 이후 하필원은 1945년 9월 6일 여운형이 이끈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경제부장을 맡았다. 같은 해 9월 8일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와 장안파 조선공산당 세력의 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계동 열성자대회'에 참여했다. 1946년 2월에는 좌익 세력 통합을 위한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가했다.

3.1. 해방 정국의 정치 활동

1945년 9월 6일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경제부장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8일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와 장안파 조선공산당 세력의 통합 논의를 위한 ‘계동 열성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46년 2월 좌익 세력 통합을 위한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가하였다. 화요회 출신인 박헌영과 갈등을 빚었으며, 1946년 11월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조선신민당 3당 합당에 거부하고 여운형의 독자 세력인 사회노동당에 입당하여 당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1947년 1월 북조선로동당의 종파주의 비판이 이어지자, 사회노동당에서 탈당하고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다. 1948년 8월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