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이 하지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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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소이 하지메는 한일합방을 옹호하고 조선 식민지화를 지지한 일본인이다. 그는 조선 연구를 통해 일본의 식민 통치를 위한 자료를 제공했으며,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폄하하는 저술 활동을 펼쳤다. 3.1 운동 이후에는 자유토구사를 설립하여 조선 문화 연구를 표방했지만, 이는 일본의 문화 통치 정책과 맥락을 같이했다. 호소이는 조선 지배층과 민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으며, 친일 인사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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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이 하지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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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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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일본 |
출생 | 1902년 1월 29일 |
사망 | 1980년 11월 28일 (78세) |
출생지 | 나가노현 |
직업 | 작곡가 |
장르 | 가곡 동요 |
활동 기간 | 1929년 ~ 1977년 |
배우자 | 호소이 아키코 |
주요 작품 | |
가곡 | 엄마 추억 벛꽃 |
동요 | 아기 곰 엄마 찾아 쫑쫑쫑 누구나 아기였을 때는 |
2. 생애
1923년(다이쇼 12년) 조선 문제와 관련하여 전국을 순회하는 강연 여행을 벌였다.[1] 1934년 봄부터 병으로 고생하다가 10월 19일에 사망했다. 향년 49세.
2. 1. 초기 생애와 언론 활동
18세에 나가사키 신문 기자가 되었다. 1907년 우치다 료헤이 등의 한일합방 촉진 활동을 지원하며[1]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힘썼다. 1908년 10월 9일에 통감부 체신관리국에 고용되었으나,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곧 해고당했다. 이후 조선통신사의 전신인 일한전보통신사, 조선일일신문사에 잠시 근무하였으나 이념적인 문제로 또다시 해고되었다.2. 2. 조선 연구와 식민지화 옹호
1907년 우치다 료헤이 등의 한일합방 촉진 활동을 지원하며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힘썼다.[1] 1910년 10월 조선연구회를 설립하여 조선의 고서 간행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1911년 주간 아사히(週刊朝日)의 기자가 되었으며, 잡지 「다이코쿠민」(大国民)을 경영하기도 하였다.[1]2. 3. 아사히 신문 퇴사와 3.1 운동
1912년(다이쇼 원년) 호소이는 일본으로 돌아와 도쿄 아사히 신문사(東京朝日新聞社)에 들어가 7년 동안 정치부(政治部) 기자로 일했다.[1] 1918년(다이쇼 7년)에 일어난 아사히 필화 사건, 이른바 '백홍사건'(白虹事件)으로 호소이는 아사히 신문을 자진 퇴사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시베리아 출병을 앞두고 군량미 보급을 명목으로 미곡을 매점매석했고, 이로 인해 쌀값이 폭등하여 전국적인 폭동이 일어났다. 오사카 아사히 신문은 8월 25일 자 기사에서 “'흰 무지개가 해를 뚫었다'고 옛 사람이 탄식한 불길한 징조가 사람들 머릿속에 전광석화처럼 스쳤다“라고 비판했다. 일본 정부는 이 문구를 천황제 국가의 기본법을 어기는 범죄로 간주하고 신문지법 위반 중 가장 강력한 처벌 조항인 발매 금지 처분을 내렸다. 아사히 신문사 경영진은 로비를 통해 관계자 처벌 조건으로 발매 금지 처분을 면제받았지만, 그 여파는 오사카뿐만 아니라 도쿄 아사히 신문에도 미쳤다. 결국 정부에 타협적인 편집진에 항의한 기자들은 집단으로 아사히 신문을 퇴사했고, 호소이도 이때 퇴사한 기자 중 한 명이었다.1919년(다이쇼 8년) 호소이가 식민지 조선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조선에서는 3.1 운동이 한창이었다. 3.1 운동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외치고 조선 독립운동의 구심점을 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된 민족 운동이자 민중 혁명이었다. 1920년(다이쇼 9년) 호소이는 조선 민족을 연구하기 위한 자유토구사(自由討究社)를 세웠다.[1]
2. 4. 군축회의 참여와 만주 정책 제안
1927년 제네바 군축회의에 전권대사로 임명된 사이토 마코토를 수행했다.[1] 이후 월단사(月旦社)를 세우고 「남의 소문」(人の噂)을 발행했으며,[1] 「사람과 국책」(人と国策)의 주필, 국민외지협회(国民外支協会), 독립국책협회(独立国策協会), 시국간담회(時局懇談会) 등에서 활동하며 국사를 주도했다.[1]1931년 이후 만주에 대한 정책제안서를 제출하면서 아시아를 포괄하는 ‘대일본제국의 건설’을 주장했다.[2]
3. 한국과의 관계 및 식민 통치 옹호 활동
호소이 하지메는 18세에 나가사키 신문 기자가 되었다. 1907년 우치다 료헤이 등의 한일합방 촉진 활동을 지원하며[1]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했다. 1908년 통감부에 고용되었으나,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이후 일한전보통신사, 조선일일신문사 등에 잠시 근무하였으나 이념 문제로 해고되었다.
1919년 3.1 운동이 벌어지던 시기, 호소이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1920년 조선 민족 연구를 위한 자유토구사를 세웠고,[1] 1923년에는 조선 문제 관련 강연을 했다.[1] 1931년 이후 호소이는 만주에 대한 정책제안서를 제출하며 ‘대일본제국의 건설’을 주장하였다.[2]
3. 1. 조선문화사론과 식민 통치 정당화
1910년 한일합방 두 달 뒤, 호소이 하지메는 조선연구회를 설립하고 이듬해 《조선문화사론》을 출판했다. 이 책은 일본의 한국 통치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이었다.[1]《조선문화사론》은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폄하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호소이는 한일합방 이후 한국을 일본에 동화시키는 것을 장기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3년이나 5년 안에 단기적으로 동화시키려 하면 소동이 일어날 것이므로, 장기적으로 천천히 동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3] 이러한 주장은 《만선의 경영》(1921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3. 2. 자유토구사 활동과 문화통치 협력
1919년 3.1 운동 직후, 호소이 하지메는 "조선 문제 해결에 이 한 몸 바치기로 굳게 결심했다"고 밝히며, 1920년에 조선 민족 연구와 조선 문화의 일본 소개를 목적으로 자유토구사(自由討究社)를 설립했다.[1]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이유였고, 실제로는 당시 일본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식민지 정책을 전환하면서 내건 내선일체 구호와 효율적인 식민 통치를 위한 활동의 일환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민요, 설화, 전설 등을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일본어로 번역하는 등 조선의 문학과 문화 붐을 일으켰다.자유토구사의 활동은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과 궤를 같이 했다. 1921년 자유토구사는 조선의 소설들을 모은 《통속조선문고》(通俗朝鮮文庫, 전12책)를 출판했다. 《통속조선문고》는 이전의 조선고서간행회(1908년)나 조선연구회(1910년)에서 간행한 고서와 비교했을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였다.
특징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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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 비중 증가 | 장화홍련전 등 조선 소설을 다수 수록 |
구어체 번역 | 여자나 어린아이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구어체로 번역 |
조선 역사 평론 포함 | 제12권 《대아유기(大亜遊記)》, 제13권 《이조의 문신(李朝の文臣)》 등 조선 역사 평론 및 수필 포함 |
이러한 특징들은 조선총독부의 식민 통치 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호소이는 조선 지배층을 "썩은 독소가 가득한 옴 같은 시대에 솟아난 바실루스균"으로 폄하하면서도, 이완용, 박제순 등 친일 인사에 대해서는 "조선인에게 절조가 있는가? 주장이 있는가? 국가적 신념이 있는가?"라며 비판했다.[3] 반면, 이갑에 대해서는 "배일사상을 갖지 않는 자가 있을까?"라고 평하거나, 이상재를 일본의 대한(對韓) 정책에 있어 가장 큰 강적으로 지목하는 등 조선인의 배일 의식을 경계했다.[3]
3. 3. 조선 지배층과 민중에 대한 인식
호소이 하지메는 조선 지배층을 "썩은 독소가 가득한 옴 같은 시대에 솟아난 바실루스균"이라고 폄하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3] 그러나 친일 인사라고 해서 특별히 호의적인 평가를 내린 것은 아니었다. 이완용과 박제순에 대해 "조선인에게 절조가 있는가? 주장이 있는가? 국가적 신념이 있는가? 이 두 사람은 유감없이 대표적 답변을 할 수 있는 경력을 가진 자"라며 비판했다.[3] 이는 그들이 정권에 굶주려 주장을 바꾸고 친일파가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반면, 독립운동가 이갑에 대해서는 "그의 사상, 행동에 대하여 특별히 친일과 배일을 감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평가했다.[3] 나아가 "한국 상하 일천만 인, 한 명이라도 배일사상을 갖지 않는 자가 있을까?"라고 언급하며 조선인 전체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3] 이상재에 대해서는 그의 연설이 군중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경계하며, 일본의 대한(對韓) 정책에 있어 가장 큰 적은 종교의 산하에 숨어 있는 비밀결사라고 지적했다.[3]
호소이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이재명의 이완용 저격 등의 사건에서 조선 민중이 보인 반응을 통해, 조선인들이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속으로는 모두 배일 의식을 품고 있다고 평가했다.[3]
4. 비판
호소이 하지메는 1907년 우치다 료헤이 등과 함께 한일합방을 촉진하는 활동을 지원하며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힘썼다.[1] 1910년 한일합방 두 달 뒤에는 조선연구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1] 그의 이러한 활동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조선의 민족성을 말살하려는 시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비판받는다.
4. 1. 친일 행적 비판
1907년 우치다 료헤이 등과 함께 한일합방을 촉진하고[1]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힘썼다. 1910년 한일합방 두 달 뒤에는 조선연구회를 설립하여 조선의 고서 간행에 관심을 보였다.[1] 1931년 이후에는 만주에 대한 정책 제안서를 제출하며 아시아를 포괄하는 ‘대일본제국의 건설’을 주장하였다.[2]4. 2. 제국주의적 야욕 비판
1931년 이후 호소이는 만주에 대한 정책 제안서를 제출하면서 아시아를 포괄하는 ‘대일본제국의 건설’을 주장하였다.[2] 이러한 주장은 그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드러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5. 평가
호소이 하지메는 1907년 우치다 료헤이 등의 한일합방 촉진 활동을 지원하며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힘썼다.[1] 그는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조선의 독립 운동을 억압하는 데 앞장섰다.
1918년에는 아사히 필화 사건으로 아사히 신문에서 퇴사했는데, 이는 일본 정부의 언론 탄압에 대한 저항으로 볼 수 있지만, 그의 친일 행적을 감추기에는 역부족이다.[1] 1919년 3.1 운동이 발발했을 때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 민족 연구를 위한 자유토구사를 설립했지만, 이는 조선의 독립 의지를 꺾고 일본의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1]
1931년 이후 호소이는 만주에 대한 정책 제안서를 제출하며 '대일본제국의 건설'을 주장했는데,[2] 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적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그의 활동은 한국 근현대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친일 행적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참조
[1]
웹사이트
호소이 하지메(일본어)
https://kotobank.jp/[...]
[2]
문서
滿洲事變に関する建議書
일본방위청방위연구소
1931
[3]
서적
漢城の風雲と名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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