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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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제순은 1858년 태어나 1916년 사망한 대한제국의 문신으로, 을사오적 및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비판받았다. 1883년 문과에 급제한 후 관료 생활을 시작하여 이조참의, 외부대신 등을 역임하며 외교 문제에 관여했다. 특히 1905년 제2차 한일 협약 체결에 전권위원으로 서명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데 기여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에도 서명했다.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친일 행위로 인해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고 재산이 몰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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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 이완용
이완용은 대한제국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되어 친일 행위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지만, 한일 병합에 기여하고 1926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 을사 보호 조약 관련자 - 정미칠적
한일신협약 체결에 적극 협력하여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고 부귀영화를 누린 이완용, 송병준, 이병무, 고영희, 조중응, 이재곤, 임선준 7인을 정미칠적이라고 한다. - 을사 보호 조약 관련자 - 을사오적
을사오적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하여 매국 행위를 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다섯 명의 대신을 지칭하며, 조약 체결 후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친일 행위를 지속하여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친일파로 규정되어 비판받고 있다. - 대한제국의 의정대신 - 조병세 (18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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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순택은 심의겸의 11대 손으로, 조선 후기 문신이자 대한제국 의정대신을 역임했으며, 갑신정변 당시 청나라 군대 출동을 요청하고 을사조약에 반대하다가 1906년에 사망했다.
박제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박제순 |
한자 표기 | 朴濟淳 |
로마자 표기 | Bak Jesun |
한국어 음차 표기 | Pak Chesun |
호 | 평재 |
호 (한자) | 平齋 |
호 (로마자 표기) | Pyeongjae |
출생 정보 | |
출생일 | 1858년 12월 7일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용인시 |
사망 정보 | |
사망일 | 1916년 6월 20일 |
사망 장소 |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
정치 경력 | |
직업 | 한국 정치인 |
소속 정당 | 온건개화파 잔존 세력 |
직책 |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
재임 기간 | 1905년 11월 28일 ~ 1907년 |
재임 기간1 | 1909년 ~ 1910년 8월 11일 |
군주 | 고종 순종 |
이전 총리 | 이완용 |
이전 총리1 | 한규설 |
다음 총리 | 이완용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박홍수 |
어머니 | 대구 서씨 부인 |
배우자 | 고씨 |
자녀 | 박부양 (아들) |
기타 정보 | |
종교 | 유교(성리학) |
작위 | 조선귀족 자작 |
2. 생애
1858년 12월 7일 경기도 용인시에서 반남 박홍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홍수는 유신환의 문하에서 김윤식과 함께 공부해 김윤식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12]
1883년 과거에 합격하고 청나라 톈진에 파견되었다가 귀국 후 여러 관직을 거쳤다. 1898년 외부대신에 취임했고, 1899년 마산포 사건을 일본과 협력하여 해결했다.[8] 1901년 일본에 가서 한국 중립화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1905년 제2차 영일동맹에 대해 한국 주재 영국과 일본 공사에게 항의했고,[9] 같은 해 을사늑약 체결에 참여하여 을사오적 중 한 명으로 비판받았다. 이후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이완용 내각의 내무대신을 지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에 서명했다.[3] 처형 위협 속에 조약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한일 병합 후,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역임했다.[14] 1916년 사망했다.
2. 1. 생애 초기
반남 박홍수의 아들로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상도촌(현 용인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홍수는 유신환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이 인연으로 같은 동문이었던 김윤식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다.[12] 어려서부터 암기에 뛰어났고 일찍이 글을 깨우쳤다고 한다. 소년 시절에는 여러 번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1883년 과거에 합격한 후 청나라 톈진으로 파견되었다.[2]2. 2. 관료 생활
박제순은 용인시와 서울특별시 외곽에서 하급 관료이자 김윤식의 지지자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반남 박씨이다.[2]1883년 과거 시험에 합격한 후 톈진으로 파견되었다. 1898년 10월 9일 외부대신으로 승진하여, 1905년 을사늑약(을사조약) 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조약으로 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본 제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1905년 11월 28일에는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박제순은 1905년부터 1907년까지, 그리고 1909년부터 1910년까지 대한제국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1899년 4월,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가 군함을 이끌고 마산포에 입항하여 마산포 할양을 요구한 마산포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 정부가 민간인 명의로 주변 토지를 매입하도록 하여 사건을 해결하였다.[8] 1901년 10월에는 일본에 가서 한국 중립화안을 일본 정부에 제안하기도 했다.
1905년 9월, 제2차 영일동맹이 일본의 한국 보호국 지배를 영국이 승인하는 것이라 하여, 한국 주재 영국과 일본 공사에게 조약 위반이라고 항의하였다.[9] 1905년 11월에는 일본의 강압으로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제2차 한일협약 전권위원으로 서명하여 체결되었다.[10]
2. 2. 1. 과거 급제
1883년(고종 20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주사(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主事) 겸 기연해방군사마(畿沿海防軍司馬)를 거쳐 중국 톈진에 주차천진사신종사관(駐箚天津從事官)으로 파견되었다. 귀국 후, 홍문관부교리·사간원정언·사헌부장령 등을 거쳐 통정대부로 승진, 승정원동부승지 등을 역임했다.[8]2. 2. 2. 동학 농민 운동 진압과 외교 활동
1893년 동학교도들이 보은집회를 열자,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했는데, 이때 박제순은 민씨 정권의 명령을 받고 청나라에서 파견된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만나 청나라 군사 파병 문제를 의논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흥선대원군 등의 세력이 연대할 조짐을 보이자 그는 청나라와 계속 교섭하였다.[13]1894년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충청감사 재직 중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과 경군(京軍)이 공주에서 농민군을 토벌하는 데 참여, 협조하였다. 1895년 이후 외부협판, 중추원의관, 외부대신, 육군참장 등을 지냈다. 외부대신 재직 시에는 간도행정관리권 교섭, 경흥과 의주의 개방 등 외교문제를 다루었다. 그 뒤 관제 개정 이후 외무부협판과 중추원의관을 거쳐 외무대신, 의정부찬정 등을 역임했다. 1899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전권대신으로 임명되어 조청(朝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귀국했고, 1901년 필리핀에 파견되어 조비(朝比)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고, 1902년 9월 대한제국에 파견된 벨기에의 L. 뱅카르트와 조백(朝白)수호통상조약 등을 체결했다. 1902년 10월 31일 주청전권공사(駐淸全權公使)로 파견되어 베이징에 있다가 1904년 귀국했다.[13]
1895년 이후 외부협판, 중추원의관을 거쳐 외부대신으로 복귀하여 청나라, 일본과의 갈등관계에 있었으나 어느 쪽의 편을 들지 않고 무사히 넘겼다. 외부대신 재직 중 그는 간도 지역이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여 간도행정관리권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고, 이어 경흥 및 의주의 개방 등 외교문제를 다루었다. 그밖에 1899년 조청통상조약(朝淸通商條約), 1901년 필리핀과의 조비수호통상조약(朝比修好通商條約), 1902년 조백수호통상조약(朝白修好通商條約) 등을 체결하였다. 그 뒤 육군참장, 의정부찬정 등을 지냈다.
1902년(광무 5년) 주청전권공사(駐淸全權公使)에 임명되어 베이징으로 부임하였다가 1904년 면관되어 귀국했다.
2. 2. 3. 을사늑약과 한일병합
1905년 외무부 대신이 되었다. 외무대신 재직 중 일본의 강압에 못이겨 고민하다가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을사늑약을 체결함으로써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지탄받았다.[2] 그해 의정부 의정대신 서리, 의정부 참정대신을 거쳐 의정부의정대신이 되어 내각을 이끌었다. 그러나 을사늑약에 서명한 일로 노상에서 여러 번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1909년(융희 3년) 이완용이 고종 양위 사건으로 노상에서 저격당하고 입원하자, 임시내각총리대신 서리가 되었다. 1910년 8월 내부대신으로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했다.[2]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이완용 정부에서 내무대신으로 재직하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에 서명하여 한국이 일본 제국에 공식적으로 합병되는데 영향을 주었다. 처음에 모든 대신들은 조약 체결에 반대했고, 박제순 또한 일본이 조약 체결을 강요하면 자결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처형 위협 속에 박제순을 포함한 5명의 대신이 조약에 서명했다.[3]
이 조약은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 매우 비판받았고,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이 다섯 명의 대신들은 "을사오적"으로 불렸다. 1910년 12월 6일, 한 한국군 병사가 박제순이 궁궐로 들어가는 것을 저격하려 했다. 박제순은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공사 하야시 곤스케를 비난하며 "자신을 조국에 대한 배신자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박제순은 자결을 시도했으나 하야시에 의해 저지되었고,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4]
광무 9년(1905년) 9월에는 제2차 일영동맹이 일본에 의한 한국의 보호국 지배를 영국이 승인하는 것이라 하여, 일본에 대해서는 조약 위반이라 하여 한국 주재 일영 양국 공사에게 항의하였다.[9] 같은 해 11월 일본에 의한 한국 보호국화를 인정하는 제2차 한일협약에서는 “단연 불동의”라고 말했지만,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찬성으로 간주되어, 최종적으로는 전권위원으로 서명(일본측은 하야시 곤스케가 서명)하여 체결되었다.[10] 같은 해 11월 28일에는 의정부 참정대신이 되었다.
광무 11년(1907년) 이완용 내각에서도 내무대신을 지냈고, 융희 4년(1910년) 8월 22일 한일 병합 조약에 서명하고, 같은 해 10월 16일 조선귀족으로 자작에 서임되어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역임하였다.
2. 3. 한일 병합 이후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에 내부대신으로서 서명한 뒤,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14] 은사공채 10만 원을 받았으며, 정4위에 서위되었다.한일 병합 조약 이후 경학원의 대제학에 임명되어 친일 활동을 지속하였으며, 상속자 박부양은 중추원 서기관을 지냈고, 이들 부자는 일제 강점기 동안 남부럽지 않게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15] 1916년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했다.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화족 작위인 자작(子爵) 작위를 받고 일본 제국 의회의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나중에 조선총독부 중앙고문원으로 근무했다. 2005년에 제정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한국이 일본에 합병되었을 당시 친일 협력을 한 9명의 후손들의 재산이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몰수되었다.[5]
3. 사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그의 작위를 습작한 박부양과 함께 선정되었다.[2]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일제강점기 초기의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2] 2005년 제정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일본에 한국이 합병되었을 당시 친일 협력을 한 9명의 후손들의 재산이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몰수되었다.[5]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증조부 | 박긍원(朴肯源) |
할아버지 | 박종면(朴宗冕) |
아버지 | 박홍수(朴弘壽, 1814년 ~ 1901년) |
어머니 | 대구 서씨 |
형 | 박제일(朴齊一, 1835년 ~ ?) |
형 | 박제성(朴齊盛, 1840년 ~ ?) |
부인 | 고씨 |
장남 | 박부양(朴富陽, 1905년 ~ 1974년) |
자부 | 김씨 |
손자 | 박승유(朴勝裕, 1924년 ~ 1990년) |
차남 | 박이양(朴彝陽) |
5. 서훈
참조
[1]
웹사이트
Pak Chesoon
http://100.daum.net/[...]
[2]
웹사이트
Pak Chesoon
http://koreandb.nate[...]
[3]
서적
Korea's Fight for Freedom
Fleming H. Revell Company
[4]
서적
The Tragedy of Korea
https://ia600208.us.[...]
E.P. Dutton
[5]
뉴스
South Korea: Crackdown On Collaborators
https://query.nytime[...]
The New York Times
2007-12-24
[6]
웹사이트
ko:청안군 이재순 등에게 서훈하라는 조령
https://db.itkc.or.k[...]
2022-03-27
[7]
웹사이트
比利時國 三等獅子寶星勳章 佩用準許
https://db.history.g[...]
조선/대한제국 관보
1901-10-26
[8]
웹사이트
コトバンク「馬山浦事件」
https://kotobank.jp/[...]
[9]
문서
海野(1995)pp.148-150
[10]
문서
海野(1995)pp.159-161
[11]
간행물
『官報』第1310号・付録、「辞令」
1916-12-13
[12]
서적
친일정치 100년사
동풍
1995-07-01
[13]
서적
한국과 중국 100년
기파랑
[14]
서적
친일파 99인 1
돌베개
1993-02-01
[15]
저널
日帝韓人貴族의 近況
1960-03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시간과 역사 품은 도서관, 한국의 오늘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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