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주 (청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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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승주는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에 활동한 군인, 정치가이다. 명나라에서 이자성의 반란군을 진압하고 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투항했다. 청나라에서는 관료로 등용되어 남명 세력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으며, 강희제 치세에 은퇴하여 고향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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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주 (청나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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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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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홍승주 |
한자 표기 | 洪承疇 |
자 | 언연(彥演) |
호 | 형구(亨九) |
관직 | |
소속 | 명(明), 청(淸) |
직책 | 명 총독, 청 대학사 |
생애 | |
출생 | 1593년 10월 16일 |
출생지 | 복건성(福建省) 난안시(南安市) |
사망 | 1665년 4월 3일 |
사망지 | 복건 난안구(南安) |
시호 | 문양(文襄) |
경력 | |
과거 | 진사 |
청나라 관직 정보 | |
작위 | 3등 아다하 하판 |
문영전 대학사 임기 시작 | 1658년 |
문영전 대학사 임기 종료 | 1661년 |
전자전 대학사 임기 시작 | 1653년 |
전자전 대학사 임기 종료 | 1658년 |
비서원 대학사 임기 시작 | 1644년 |
비서원 대학사 임기 종료 | 1653년 |
계요 총독 임기 시작 | 1639년 |
계요 총독 임기 종료 | 1641년 |
계요 총독 전임 | 오아헝 (계요보정 총독) |
계요 총독 후임 | 양성무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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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나라에서의 생애
홍승주는 1627년 산시 부정사 참정이 되었다. 1629년 한성이 반란군 왕좌계에게 포위되자, 산시 총독 양학의 명을 받아 구원에 나섰다. 1630년 연수 순무로 임명되었다. 상관인 양학은 회유책을 썼지만, 반란군은 불리해지면 투항했다가 다시 이탈했기에 홍승주는 적장을 단호하게 처리했다.
1631년 양학이 면직되자 후임 산시 삼변 총독으로 임명되어 섬멸 방침으로 전환했다. 이후 각지의 농민군을 격파해 나갔고, 반란군은 산시성으로 근거지를 옮겨갔다.
1634년 2월, 각 성의 군대를 일원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오성 총독이 설치되고, 진기유가 임명되었으며, 홍승주는 그 휘하에 편입되었다. 같은 해 6월, 진기유는 이자성의 거짓 투항에 속아 실각하고, 12월, 홍승주는 산시 삼변 총독을 유지한 채 태자태보, 병부상서 직함을 더하여 오성 총독도 겸임하게 되었다.
1635년 1월, 각지의 농민 반란군은 형양에서 회합(형양대회)하였고,[6] 이자성이 각 반란군이 협력하여 명나라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홍승주는 먼저 허난성으로 들어가 반란군의 대부분이 산시성으로 이동하자 군대를 돌렸다. 이때 이자성은 함양을 격파하고 시안에 육박했으며, 고영상·장헌충은 관군에게 견제당하여 허난으로 들어갔다.
1635년 8월, 명나라 조정은 다시 지역별로 분담하여 진격하는 방침으로 전환하여 노상승을 오성 총독으로 삼아 중원을 다스리게 하고, 홍승주에게는 북서부를 다스리게 했다.
1636년, 관중의 전임 감독을 명받은 홍승주는 임동에서 민군을 격파했다. 홍승주의 부장인 손전정이 자오곡에서 闯王고영상을 격파했고, 고영상은 베이징으로 보내져 처형되었다. 闖王(闯王)의 칭호는 이자성[7]이 계승하여 농민 반란군의 수령이 되었다.
2. 1. 농민 반란 진압
산시성과 삼변의 총독을 역임하며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5] 1638년 통관 남원 전투에서 이자성을 크게 격파하였고, 이자성은 18명의 병력만 이끌고 간신히 탈출하였다.[5] 이후 북변으로 배치되어 청의 침공을 방어하였다.1627년 산시 부정사 참정이 되었다. 1629년 한성이 반란군 왕좌계에게 포위되자, 산시 총독 양학의 명을 받아 구원에 나서 이름을 떨쳤고, 1630년 연수 순무로 임명되었다. 상관인 양학이 회유책을 썼지만, 반란군은 불리해지면 투항했다가 다시 이탈했기에 홍승주는 적장을 단호하게 처리했다. 1631년 양학이 면직되자 후임으로 산시 삼변 총독으로 임명되어 섬멸 방침으로 전환했다. 이후 각지의 농민군을 격파해 나갔고, 반란군은 산시성으로 근거지를 옮겨갔다.
1634년 2월, 각 성의 군대를 일원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오성 총독이 설치되고, 진기유가 임명되었고, 홍승주는 그 휘하에 편입되었다. 같은 해 6월, 진기유는 이자성의 거짓 투항에 속아 실각하고, 12월, 홍승주는 산시 삼변 총독을 유지한 채 태자태보, 병부상서 직함을 더하여 오성 총독도 겸임하게 되었다.
1635년 1월, 각지의 농민 반란군은 형양에서 회합(형양대회)하였고,[6] 이자성이 각 반란군이 협력하여 명나라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홍승주는 먼저 허난성으로 들어가 반란군의 대부분이 산시성으로 이동하자 군대를 돌렸다. 이때 이자성은 함양을 격파하고 시안에 육박했으며, 고영상·장헌충은 관군에게 견제당하여 허난으로 들어갔다.
명나라 조정은 다시 지역별로 분담하여 진격하는 방침으로 전환했다. 1635년 8월, 노상승을 오성 총독으로 삼아 중원을 다스리게 하고, 홍승주에게는 북서부를 다스리게 했다.
1636년, 관중의 전임 감독을 명받은 홍승주는 임동에서 민군을 격파했다. 홍승주의 부장인 손전정이 자오곡에서 闯王고영상을 격파했고, 고영상은 베이징으로 보내져 처형되었다. 闖王(闯王)의 칭호는 이자성[7]이 계승하여 농민 반란군의 수령이 되었다.
1638년 10월에 홍승주는 이자성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자성은 겨우 18기의 기병으로 패주하여 상락으로 도망갔고, 반란은 잦아들었다. 그러나 그 직후, 홍타이지의 남진에 대항하기 위해 선대총독으로 전임했던 노상승이 전사하자, 북방 전선을 우선시한 숭정제는 홍승주를 후임으로 전임시켰다. 이로 인해 이자성은 재기의 기회를 얻었다.
2. 2. 청과의 전쟁
산해관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를 이끌었으나 청군에 패했다.[9] 1642년 송금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청나라에 투항했다.[9] 항복 전 홍승주는 계료총독을 역임하고 있었으며, 금주성에서 포위당했던 명나라 장수 조대수를 지원하려 했다.[9] 홍승주는 양황기에 소속되었다.[9] 한편 명나라 조정에는 홍승주가 전사했다는 잘못된 보고가 전달되었고, 숭정제는 사당을 세워 그를 기리도록 지시했다.[9]3. 청나라에서의 생애
홍승주는 1644년 청군이 베이징을 점령한 직후 청나라 관료로 임명되었고, 1645년 난징에 초무강남대학사(招撫江南大學士)로 파견되었다.[11][12] 그는 호광(湖廣), 광둥성, 광시 좡족 자치구(廣西), 윈난성, 구이저우성 등 다섯 성의 총독을 맡아 남명 세력을 진압했다.[1][2] 1659년 쿤밍을 함락시킨 후 오삼계에게 영력제 추격을 맡기고 베이징으로 돌아갔다.[1][2][11][12]
1661년 강희제 즉위 후 대학사 직을 유지하다 은퇴, 1665년 고향 복건 남안(南安)에서 사망했다.
3. 1. 청나라의 관리 임명
1644년 청군이 베이징을 점령한 직후, 홍승주는 관료로 임명되었다.[11][12] 1645년(순치 2년), 초무강남대학사(招撫江南大學士)로 임명되어 난징에 파견되었다.[11][12] 공식적인 임무는 보급품 운송이었지만, 실제로는 남명 관료들을 압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11][12]1645년 5월 (순치 2년), 예친왕 도도가 남명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자, 도르곤은 변발령을 내렸다. 이에 강남의 한족들은 강하게 저항했고, 강남 점령 정책에 차질이 생겼다. 같은 해 6월, 홍승주는 도도를 대신하여 강남 각성의 선무 공작을 맡는 초무강남각성총독군무대학사로 임명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홍승주는 만주족과 한족의 대립을 완화하기 위해 주로 선무책을 사용했지만, 명 왕실에 충성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무력 탄압과 대량 학살도 자행하여 세상의 비난을 받았다.
3. 2. 남명 정벌
홍승주는 후베이성과 후난성 일대인 호광(湖廣), 광둥성, 광시 좡족 자치구(廣西), 윈난성, 구이저우성 등 다섯 성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남명 세력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1][2] 순치 13년(1656년)에 태부 겸 태자태사에, 순치 15년(1658년) 9월에 무영전 대학사를 받았다. 그는 각지에서 농민 반란군을 주력으로 한 남명 세력을 격파해 나갔다.순치 16년(1659년) 1월, 윈난성의 수도 쿤밍이 함락되자 남명 영력제는 미얀마로 도망쳤다.[11][12] 홍승주는 영력제를 추격하는 대신,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소수 민족이 많아 통치가 어려운 윈난 지역은 명나라의 방식에 따라 왕후를 두어야 한다고 조정에 건의했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오삼계가 평서왕으로 윈난을 통치하게 되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곤궁해진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비용을 확보하여 윈난과 구이저우의 치안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같은 해 10월, 홍승주는 눈병으로 인해 해임을 요청하여 허락받고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이후 영력제 추격은 오삼계에게 맡겨졌다.[1][2]
3. 3. 말년
1661년 순치제가 사망하고 강희제가 즉위한 후에도 홍승주는 대학사 직을 유지했으나, 곧 은퇴를 요청했다. 같은 해 5월 조정에서는 여러 논쟁 끝에 홍승주에게 한족 제도에서 경거도위(輕車都尉)에 해당하는 3등아다하하판(三等阿達哈哈番) 세습작위를 주었다. 이는 남명 세력을 연민했다는 혐의로 일부 대신들에게 불신을 샀기 때문에, 그의 지위에 비해 미미한 세습 작위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11][12]팔기에 편성된 지 8년 후에 그는 만주 양황기로 예속되었다.[13] 고령과 시력 상실로 홍승주는 사직 및 귀향을 허가받았고, 1665년 고향 복건 남안(南安)에서 자연사했다. 그의 무덤 위치는 현재 알려지지 않고 있다.
4. 등장 작품
- 2006년 드라마 《대청풍운》(배우: 쑨춘). 작중 역할 이름은 '판하오정'으로, 판원청과 홍승주를 믹스하여 모델로 한 오리지널 캐릭터이다.
- 2012년 드라마 《궁정의 눈물・산하의 사랑》 (배우: 위안 민)
- 2015년 드라마 《황후의 기록》(배우: 딩충)
참조
[1]
간행물
Hung Ch'êng-ch'ou
[2]
간행물
Šurhaci
[3]
서적
WAKEMAN JR. 1986
https://books.google[...]
[4]
문서
乾隆年間に編纂された『清史列伝』では「弐臣(節操のない臣下)」に列せられている。
[5]
문서
五省総督:山西省・陝西省・河南省・湖広(湖北省・湖南省両省)・四川省の5省の農民反乱軍を殲滅する特任官。
[6]
문서
滎陽大会については、同時代の史料のうち記載されているものが少ない事、各地の反乱軍がどうやって滎陽に集まったかなど不明な点が多い事から、実際には開催されていないものという意見が出ている。
[7]
문서
高迎祥の闖王と区別するために「李闖」とも言う。
[8]
문서
王朴・楊国柱・唐通・白広恩・曹変蛟・馬科・王廷臣・呉三桂
[9]
문서
清朝に投降した理由として、清史稿はホンタイジに厚遇された上にその高潔な人柄に感動して降ったとしているが、他にもホンタイジが送り込んだ美女の色仕掛けに誘われたという説もある。
[10]
문서
오늘날 산동성, 하북성, 천진 일대 지휘관
[11]
간행물
Hung Ch'êng-ch'ou
[12]
간행물
Šurhaci
[13]
서적
WAKEMAN JR. 1986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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