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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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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소의 난은 당나라 말기 환관의 횡포와 농민 수탈, 자연재해 등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발생한 대규모 농민 반란이다. 874년 왕선지와 황소가 봉기하여 세력을 확장, 당나라 전역을 약탈했다. 황소는 장안을 점령하고 황제를 칭했지만, 결국 이극용 등의 토벌군에 패하여 884년 사망하며 난은 종결되었다. 이 난은 당나라의 쇠퇴를 가속화시켜 907년 당나라 멸망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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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의 난
지도
황소의 난
시기875년 ~ 884년
장소중국 당나라
원인탐관오리의 횡포
극심한 흉년과 기근
결과당나라의 멸망을 가속화
군벌의 발호
사회 혼란 심화
주요 인물황소
왕선지
교전 세력
반란군황소의 난군
정부군당나라 조정
지휘관 및 지도자
반란군황소
왕선지
상양
최사
주매
전군
임언
주박
장귀후
정부군증원유
고병
이계용
왕중영
이극용
양복광
병력 규모
반란군수십만 명 (최대 60만 명 추정)
정부군불명확 (반란군에 비해 열세)
주요 전투
전투황매 전투
장안 함락
양주 공방전
진령 전투
관련 인물
관련 인물주전충
기타
영향당나라 멸망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
평가농민 반란으로 평가
당나라 몰락을 가속화한 중요한 사건

2. 원인

당나라 말기 환관의 횡포와 농민 수탈, 정치 부패,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사회 불안이 커졌다. 859년 왕소의 난과 868년 방훈의 난 등 반란이 잇따랐다. 874년(혹은 875년) 복주의 전 소금도둑 왕선지가 활주에서 봉기했고, 조주의 소금도둑 황소가 호응했다. 이 지역은 자연재해 피해가 심했고, 방훈의 난 잔당들이 활동하던 곳이었다. 왕선지와 황소의 봉기 당시 규모는 수천 명이었지만, 굶주린 농민과 산적 등을 흡수하면서 반란은 빠르게 대규모로 확대되었다.

2. 1. 정치적 부패와 사회 혼란

당나라 말기에 시작된 환관의 횡포와 농부에 대한 수탈이 황소의 난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2. 2. 경제적 어려움과 자연재해

당나라 말기에는 환관의 횡포와 농민 수탈이 심해졌고, 정치 부패와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사회 불안이 커졌다. 859년 왕소의 난과 868년 방훈의 난 등 반란이 잇따라 발생했다.

870년경부터 당나라에서는 가뭄과 메뚜기떼 등의 자연재해가 자주 발생하여 농민들의 고통이 커졌다. 874년의 상소에 따르면 장안과 낙양 사이 지역부터 동쪽 바다까지 넓은 지역이 가뭄 피해를 입었고, 보리 수확량은 절반으로 줄었으며, 백성들은 아까시나무 잎으로 연명해야 했다. 보통 흉년에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지역 전체가 굶주림에 시달려 이마저도 어려웠다.

하지만 관리들은 백성을 구제하지 않고, 실정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 기근으로 인구가 감소하면 자신의 평가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875년에는 가뭄 지역에 메뚜기떼가 습격하여 초목을 모두 먹어 치웠다. 그 피해는 수도 장안 부근까지 미쳤지만, 장안 주변을 담당하는 경조윤은 황제 희종에게 "메뚜기는 곡식을 먹지 않고 모두 가시덤불을 안고 죽었다"는 터무니없는 보고를 올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874년(혹은 875년) 복주의 전 소금도둑 왕선지가 활주에서 봉기했고, 조주의 소금도둑 황소가 호응했다. 이 지역은 자연재해 피해가 심했고, 방훈의 난 잔당들이 활동하던 곳이었다. 왕선지와 황소의 봉기 당시 규모는 수천 명이었지만, 굶주린 농민과 산적 등을 흡수하면서 반란은 빠르게 대규모로 확대되었다.

3. 경과

저장성에서 구보의 반란(859년~860년), 쉬저우에서 방훈의 반란(868년~869년) 등이 이전에 일어났는데, 황소의 난은 이러한 반란들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산둥성의 왕선지, 황소 등이 난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대부분 황소와 혈연을 맺은 자, 원래 부하였던 자, 파산 농민, 유랑 무리, 부패한 당나라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었다.

황소와 반란군은 당나라 전역에서 약탈을 일삼았다. 이 때문에 희종쓰촨성으로 피난했다. 희종이 피난한 뒤, 황소는 장안에 들어가 국호를 대제, 연호를 금통(金統)이라 하고, 항복한 군인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하지만 대제의 통치는 경제적 기반이 없었고, 세력은 장안 근교에 그쳤다. 결국 황소의 군대는 이극용에게 격파당했고, 황소는 동쪽 산둥성의 타이산 부근에서 자결했다.

황소군은 유랑하며 약탈하는 행위를 반복했는데, 이를 유구(流寇)라 하고, 그러한 집단을 유적(流賊)이라고 불렀다. 당나라는 왕선지를 회유하려 했으나, 황소는 반대했다. 왕선지가 전사하자 황소는 잔당을 흡수해 강남으로 향했다. 879년 광저우에서 당에 관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광저우를 약탈하고 파괴했다.

남방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황소군은 북쪽으로 돌아가, 880년 장강을 건너 낙양을 함락시키고 통관을 거쳐 장안을 점령했다. 황소는 장안에서 황제에 즉위해 국호를 대제로, 연호를 금통으로 정했다.

황소군은 빈민에게 구호 물품을 지급했지만, 관리와 부호를 미워해 약탈했고, 당나라 3품 이상 고관은 추방, 4품 이하 관료는 직책을 유지했다. 이는 황소군 병사들이 관료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장안은 강남의 식량 수송에 의존했는데, 황소군이 장안을 거점으로 삼으면서 포위되어 식량 공급이 어려워졌다. 주전충이 관군에 투항하고, 돌궐 사타족 출신 이극용이 토벌에 참가했다.

883년, 황소군은 이극용에게 대패해 장안에서 퇴각, 하남에서 다시 패했다. 884년, 황소는 태산에서 조카에게 살해당했고, 10년에 걸친 난은 종결되었다.

3. 1. 초기 반란 (874년 ~ 879년)

870년경부터 당나라에서는 가뭄과 메뚜기떼 등의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농민들의 고통은 심각해졌다. 874년의 상소에 따르면 장안과 낙양의 중간 지점에서 동쪽 바다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 가뭄에 시달렸고, 보리 수확량은 절반으로 줄었으며, 백성들은 아까시나무 잎을 먹으며 연명했다. 보통의 흉작이라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지역 전체가 굶주림에 시달렸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관리는 이러한 궁핍한 백성들을 구제하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실정을 상부에 보고하는 것을 태만히 했다. 자신의 담당 지역에서 기근으로 인구 감소가 발생하는 것이 자신의 평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반란 발발 이후인 875년에는 가뭄이 발생했던 지역에 메뚜기떼가 습격하여 초목을 모두 먹어 치웠다. 그 피해는 수도 장안 부근까지 미쳤지만, 장안 주변을 담당하는 경조윤이 당시 황제인 희종에게 제출한 피해 보고는 "메뚜기는 곡식을 먹지 않고 모두 가시덤불을 안고 죽었다"는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874년(혹은 875년)에 복주의 전 소금도둑이었던 왕선지가 활주에서 봉기했고, 이에 조주의 소금도둑이었던 황소가 호응했다. 이 지역은 앞서 언급한 자연재해의 피해가 심했던 지역이었고, 방훈의 난의 잔당들이 활동하던 지역이기도 했다. 왕선지와 황소 모두 봉기 당시에는 수천 명 규모였지만, 궁핍한 농민과 산적 등을 흡수하면서 순식간에 반란은 대규모로 확대되었다. 이들 군단을 이끌고 산둥, 허난, 안후이 일대를 약탈하며 이동하는 유랑 생활을 반복했다. 도중에 반진군(藩鎮軍) 등의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근거지를 갖지 않았기에 방비가 허술한 곳으로 피신하여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유랑하며 약탈하는 행위를 유구(流寇)라 하고, 그러한 집단을 유적(流賊)이라고 부른다.

당나라 정부는 난을 진압하기 위해 왕선지에게 금군(禁軍) 하급 장교직을 제안하며 회유하려 했으나, 황소는 이를 강하게 반대했다. 황소는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황소와 왕선지는 별동대를 이루게 된다. 그 후 878년, 왕선지는 당나라 군대에 패하여 전사했다. 그의 잔당을 합류한 황소군은 강남으로 향했고, 양절(兩浙)과 복건(福建)을 거쳐 879년 광저우에 입성했다.

광저우는 당시 당나라의 해외 무역 중심지였으며, 타즈(大食, 아랍인)라 불린 아랍 상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광저우 입성 직전, 황소는 당나라 정부에 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 직책을 이어받고, 령남절도사(嶺南節度使) 직책을 요구했다. 천평군절도사는 황소의 고향인 복주(濮州), 조주(曹州), 극주(鄆州) 삼주를 관할했고, 령남절도사는 광저우를 관할했다. 당나라 정부는 이 요구를 거절했고, 대신 동궁(東宮, 황태자의 궁전) 경비 사단장 직책을 제안했다.

이에 분노한 황소는 광저우를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슬람 측 기록에 따르면 이슬람교도, 유대교도, 기독교도(경교) 등 총 12만 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광저우는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고, 복구에는 수십 년이 걸렸다.

3. 2. 장안 점령과 대제 건국 (880년 ~ 883년)

황소의 난 진군 경로


880년, 황소는 관군의 허점을 찌르고 채석|채석중국어(지금의 난징시 부근)에서 장강을 건너, 낙양 남쪽의 여주로 들어갔다. 여기서 스스로 천보평균대장군이라 칭했다. 같은 해 가을 낙양을 함락시켰다. 더 서쪽으로 진군하여, 장안 동쪽의 방어선인 통관을 돌파하고, 5일 후 장안을 점령했다. 당나라 희종은 성도로 피난했다.

황소는 장안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제라 하고, 연호를 금통(金統)으로 정했다. 장안에 입성한 후 황소군은 빈민에게 구호 물품을 지급했지만, 관리와 부호를 미워하여 약탈을 자행했고, 황소도 이를 통제할 수 없었다. 한편, 당나라 3품 이상 고관은 추방했지만, 4품 이하 관료는 그 직책에 남게 했다. 빈민과 산적 출신 황소군 병사들은 관료로서 일을 할 수 없었기에, 당나라 관료를 그대로 채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황소군은 심각한 식량 문제에 직면했다. 원래 장안은 식량 사정이 매우 나빠, 강남으로부터의 수송에 의존해야 했다. 장안을 거점으로 확보한 황소군은 이전처럼 공격받으면 도망치는 전술을 쓸 수 없게 되었고, 다른 군벌 세력에 포위되어 식량 공급이 어려워졌다. 장안 주변에서는 가혹한 수탈이 이루어졌고, 곡물 가격은 평상시의 1000배가 되었으며, 사람을 잡아먹는 일까지 횡행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882년, 황소군의 동주 방어사 주전충(훗날의 주온)은 황소군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관군에 투항했다. 게다가 돌궐 사타족 출신 이극용이 대군을 이끌고 황소 토벌에 참가했다.

883년, 황소군은 이극용군을 중심으로 한 당나라 군대에 대패했다. 황소군은 유지가 어려워진 장안에서 퇴각했고, 하남으로 들어갔으나, 이극용의 추격을 받아 다시 대패했다.

3. 3. 반란 진압과 황소의 죽음 (883년 ~ 884년)

883년, 황소군은 이극용군을 중심으로 한 당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장안을 지키기 어려워진 황소군은 장안을 버리고 하남으로 들어갔으나, 이극용의 추격을 받아 다시 크게 패하였다. 황소군은 궤멸되었고, 황소는 태산의 랑호곡에서 조카에게 목이 베여 죽었다. 이로써 884년 6월, 10년에 걸친 황소의 난은 종결되었다.

4. 결과 및 영향

황소의 난은 당나라를 근본적으로 붕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885년 희종은 성도(成都)에서 장안(長安)으로 돌아왔지만, 각지의 번진(藩鎮) 세력들은 당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군벌 세력이 되어 있었고, 당은 장안 주변만을 유지하는 한낱 지방 정권으로 전락했다. 이후, 주전충이극용 등 번진 세력들이 서로 다투는 시대가 되었고, 난이 끝난 지 약 20년 후인 907년에 주전충에 의해 당이 멸망했다.

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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