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조십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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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조십이전은 708년부터 958년까지 일본에서 발행된 12종의 동전으로, 율령제 하에서 화폐 제도를 정비하고 헤이조쿄 천도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발행되었다. 당나라의 개원통보를 본떠 제작되었으며, 와도개진을 시작으로 만년통보, 진구카이호 등을 거쳐 겐겐 타이호까지 발행되었다. 발행 초기에는 쌀 2kg의 가치를 지녔으나, 점차 가치가 하락하여 유통이 부진해졌고, 결국 겐겐 타이호 발행 이후 동전 발행이 중단되었다. 이후 일본은 물품 화폐 경제로 회귀했으며, 황조십이전은 일본 화폐사에서 중요한 시기를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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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조십이전 | |
---|---|
개요 | |
명칭 | 황조십이전 |
종류 | 화폐 |
시대 | 나라 시대 ~ 가마쿠라 시대 |
국가 | 일본 |
사용 기간 | 683년 ~ 958년 |
목록 | |
![]() | |
와도카이호 (和同開珎) | 708년 주조 |
만넨다이호 (萬年通寶) | 760년 주조 |
진고카이호 (神護景雲) | 765년 주조 |
류진신보 (隆平永寶) | 796년 주조 |
조와쇼호 (承和昌寶) | 835년 주조 |
조간에이호 (貞觀永寶) | 859년 주조 |
간표타이호 (寬平大寶) | 890년 주조 |
엔기쓰호 (延喜通寶) | 907년 주조 |
조헤이겐포 (承平元寶) | 935년 주조 |
겐로쿠호 (乾元大寶) | 958년 주조 |
특징 | |
재료 | 구리, 철 |
형태 | 둥근 형태에 네모난 구멍 |
무게 | 다양함 |
가치 | 시대에 따라 변동 |
역사적 배경 | |
주조 목적 | 국가 재정 확보 및 경제 활성화 |
유통 | 주로 귀족, 사찰, 상인 계층에서 사용 |
영향 | 일본 화폐 제도 발전의 기초 마련 |
참고 | |
관련 용어 | 일본의 화폐사 |
같이 보기 | 와도카이호 |
2. 역사
708년 와도개진이 처음 발행되었는데, 이는 일본에서 실제로 유통된 것이 확실한 가장 오래된 화폐이다. 711년 화폐 축적을 장려하는 축전서위령이 발포되었으나, 실제로는 쌀이나 베 같은 물품 화폐가 일반적이었고, 기나이와 그 주변 지역 외에는 화폐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구리 생산량이 매우 적어 화폐 제조에 어려움이 있었다.
760년 발행된 만년통보는 후지와라 나카마로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장수를 기원하며 발행했고, 신공개보는 쇼토쿠 천황과 도쿄가 정권의 정통성을 보여주기 위해 발행했다. 이처럼 황조십이전 발행은 경제적 요인보다는 정치적 목적이 컸다.[3]
황조십이전은 시간이 지나면서 크기와 무게가 줄고 품질이 저하되었다. 조와창보 이후로는 크기와 품질이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되었는데, 이는 조와창보가 이후 화폐의 기준 품질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4]
화폐 가치는 시간이 지나면서 크게 하락했다. 와도개진 발행 초기 1문으로 쌀 2kg을 살 수 있었지만, 9세기 중반에는 100분의 1에서 200분의 1 수준으로 가치가 떨어졌다.[5] 연희통보와 건원대보는 납 함량이 높아 '연전'이라고 불렸다.[6] 가치 하락으로 화폐 유통은 제한되었고, 12세기 후반 송나라 화폐가 대량 유입될 때까지 일본 내 화폐 유통은 활발하지 않았다.
이미지 | 전명 | 주조 연도 |
---|---|---|
![]() | 와도개진 | 708년 (와도 원년) |
![]() | 만년통보 (萬年通寳) | 760년 (덴표호지 4년) |
![]() | 신공개보 (神功開寳) | 765년 (덴표진고 원년) |
![]() | 융평영보 (隆平永寳) | 796년 (엔랴쿠 15년) |
![]() | 부수신보 (富壽神寳) | 818년 (고닌 9년) |
![]() | 승화창보 (承和昌寳) | 835년 (조와 2년) |
![]() | 장년대보 (長年大寳) | 848년 (가쇼 원년) |
![]() | 요익신보 (饒益神寳) | 859년 (조간 원년) |
![]() | 정관영보 (貞觀永寳) | 870년 (정관 12년) |
![]() | 관평대보 (寛平大寳) | 890년 (간페이 2년) |
![]() | 연희통보 (延喜通寳) | 907년 (엔기 7년) |
![]() | 건원대보 (乹元大寳) | 958년 (텐토쿠 2년) |
황조십이전의 개주(改鑄)는 화폐 가치 하락을 초래했다. 당시 화폐는 소액 통화였고, 고액 거래는 묶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위조 화폐나 가치가 낮은 당나라, 송나라의 돈이 섞여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기 쉬웠다.[2]
정부는 물가 통제와 돈의 가치 고정을 시도했지만, 이는 오히려 중국 돈을 이용한 환전사기를 조장했다. 신전 발행 시마다 1000%의 디노미는 시민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구화를 10분의 1로 줄이는 것은 대량 용해를 통한 구리 소재화를 유발했고, 환전을 거부하게 만들었다.[2]
일본은 황화 구리를 이용할 수 없는 제련 기술의 한계와 산화 구리 광산의 자원 고갈로 구리 가치가 상승했다. 이는 파전(破銭, 돈을 녹여 구리 덩어리로 이용하는 행위)을 유발하여 돈의 품위를 낮추는 원인이 되었다.[7]
984년 (에이칸 2년) "금파전령(禁破銭令)"이 내려졌지만, 사찰 등은 "국가 안녕 기원"을 명목으로 구리 등롱 제작에 사용하여 용해를 계속했다. 황조전(皇朝銭)의 현존 매수가 적고, 특히 후기 것은 저품질로 인해 희귀해져 고가에 거래된다.
당시 헤이안 귀족들은 경제 지식이 부족하여 유통 부진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불(神佛)의 가호에 의존했다. 후지와라노 사네스케의 '쇼유키'에 따르면, 고전(古銭) 발견이 신전 발행을 위한 조작이었을 가능성이 있고, 신전의 가치 폭락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8]
건원대보 발행 후, 조정의 쇠퇴와 겹쳐 민간에서 정부 발행 동전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동전은 더 이상 발행되지 않았다. 이후 일본에서는 11세기 초를 기점으로 화폐 사용 기록이 끊어져 쌀이나 비단 등의 물품 화폐 경제로 되돌아갔다.[8] 다만 기나이 등에서는 금속 화폐 수요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장물 피해액을 산정하는 장물 감문이나 고가법 등 공정 가격 결정에 화폐 환산이 사용되었다. 이후 경제가 발달하면서 중국에서 수입한 송전, 원전, 명전 등이 사용되었다.
황조십이전 폐지 후, 송전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까지 일본에 화폐가 없던 공백기에는 물품 가치를 나타낼 때 "준견법(准絹法)"이라 하여 비단 양을 기준으로 하는 방식이 수 세기 동안 사용되었다. 준견법이 고안된 초창기인 11세기 무렵에는 표준적인 비단 가치가 그대로 사용되었으나, 13세기 무렵에는 비단의 실체를 떠나 가상적인 비단 가치를 계산 단위로 사용하게 되었다. 전 10문을 가리키는 "전 1필"이라는 단위는, 이때의 계산 단위였던 준견 1필이 전 10문이었던 데에서 유래한다. 준견법은 도래전 보급과 함께 14세기 무렵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황조십이전이 발행되지 않게 된 이후, 일본에서 공적으로 주조된 화폐 발행은 오랫동안 끊겼으며, 도래전과 사주전이 유통되었다. 동전의 공적인 주조 재개는 건원대보 발행 이후 600년 이상이 지난 에도 막부에 의한 1608년 (게이초 13년)의 게이초 통보 혹은 1627년 (간에이 4년)의 간에이 통보까지 기다려야 했다.
2. 1. 발행 배경 및 목적
황조십이전은 당나라의 개원통보를 본떠 화폐 제도를 정비하고, 헤이조쿄 천도에 필요한 막대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발행되었다. 율령 정부는 화폐 가치와 구리 지금(銅地金) 본래 가치의 차액을 통해 재정을 확보하려 했다.[3]708년에 최초로 발행된 와도개진은 일본에서 실제로 유통된 것이 확실한 가장 오래된 화폐이다. 이전의 부본전과 무문은전은 실제 유통 여부가 불확실하다. 711년에는 화폐 축적을 장려하는 축전서위령이 발포되었으나, 실제로는 쌀이나 베와 같은 물품 화폐가 일반적이었고, 기나이와 그 주변 지역 외에는 화폐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일본의 구리 생산량은 매우 적어 화폐 제조에 어려움이 있었다.
760년에 발행된 만년통보는 후지와라 나카마로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장수를 기원하며 발행했으며, 신공개보는 쇼토쿠 천황과 도쿄가 정권의 정통성을 보여주기 위해 발행했다. 이처럼 황조십이전의 발행은 경제적 요인보다는 정치적 목적이 컸다.[3]
황조십이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크기와 무게가 줄어들고 품질이 저하되었다. 이는 구리 생산량 감소 때문이었다. 조와창보 이후로는 크기와 품질이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되었는데, 이는 조와창보가 이후 화폐의 기준 품질이 되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4]
화폐 가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크게 하락했다. 와도개진 발행 초기에는 1문으로 쌀 2kg을 살 수 있었지만, 9세기 중반에는 100분의 1에서 200분의 1 수준으로 가치가 떨어졌다.[5] 연희통보와 건원대보는 납 함량이 높아 '연전'이라고 불릴 정도였다.[6] 가치 하락으로 인해 화폐 유통은 제한되었고, 12세기 후반 송나라 화폐가 대량 유입될 때까지 일본 내 화폐 유통은 활발하지 않았다.
이미지 | 전명 | 주조 연도 |
---|---|---|
와도개진 | 708년 (와도 원년) | |
만년통보 (萬年通寳) | 760년 (덴표호지 4년) | |
신공개보 (神功開寳) | 765년 (덴표진고 원년) | |
융평영보 (隆平永寳) | 796년 (엔랴쿠 15년) | |
부수신보 (富壽神寳) | 818년 (고닌 9년) | |
승화창보 (承和昌寳) | 835년 (조와 2년) | |
장년대보 (長年大寳) | 848년 (가쇼 원년) | |
요익신보 (饒益神寳) | 859년 (조간 원년) | |
정관영보 (貞觀永寳) | 870년 (정관 12년) | |
관평대보 (寛平大寳) | 890년 (간페이 2년) | |
연희통보 (延喜通寳) | 907년 (엔기 7년) | |
건원대보 (乹元大寳) | 958년 (텐토쿠 2년) |
2. 2. 개주(改鑄)와 가치 하락
황조십이전의 개주(改鑄)는 화폐 가치 하락을 초래했다. 당시 화폐는 소액 통화였고, 고액 거래는 묶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위조 화폐나 가치가 낮은 당나라, 송나라의 돈이 섞여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기 쉬웠다. 이를 "돈의 가치가 낮아진다"고 표현했다.[2]정부는 물가 통제와 돈의 가치 고정을 시도했지만, 이는 오히려 중국 돈을 이용한 환전사기를 조장했다. 얇고 작은 돈으로 변조는 쉬웠고, 신전 발행 시마다 1000%의 디노미는 시민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구화를 10분의 1로 줄이는 것은 대량 용해를 통한 구리 소재화를 유발했고, 환전을 거부하게 만들었다.[2]
일본은 황화 구리를 이용할 수 없는 제련 기술의 한계와 산화 구리 광산의 자원 고갈로 구리 가치가 상승했다. 이는 파전(破銭, 돈을 녹여 구리 덩어리로 이용하는 행위)을 유발하여 돈의 품위를 낮추는 원인이 되었다.[7]
984년 (에이칸 2년) "금파전령(禁破銭令)"이 내려졌지만, 사찰 등은 "국가 안녕 기원"을 명목으로 구리 등롱 제작에 사용하여 용해를 계속했다. 황조전(皇朝銭)의 현존 매수가 적고, 특히 후기 것은 저품질로 인해 희귀해져 고가에 거래된다.
당시 헤이안 귀족들은 경제 지식이 부족하여 유통 부진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불(神佛)의 가호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후지와라노 사네스케의 '쇼유키'에 따르면, 고전(古銭) 발견이 신전 발행을 위한 조작이었을 가능성이 있고, 신전의 가치 폭락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8]
2. 3. 파전(破錢) 운동과 금파전령(禁破錢令)
당시 화폐는 소액 통화였고, 고액 거래에서는 묶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일일이 풀어서 각인을 감정하는 수고가 들었고, 이를 소홀히 하면 위조 지폐나 가치가 낮은 당나라, 송나라의 돈이 섞이기 쉬워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이를 "돈의 가치가 낮아진다"라고 표현했다.[2]문제는 신전 발행마다 행해진 1000%의 디노미였다. 원래 정부가 설정한 돈의 가치에 문제가 있었고, 신전의 가치가 10배라는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시민 입장에서 보면 저장하고 있던 구화가 환전에 의해 10분의 1로 줄어드는 것은 큰 타격이었다. 이 때문에 대량으로 용해하여 구리 소재로 하고 환전을 거부했다. 예를 들어 10개의 10엔짜리 동전을 신 10엔 1장으로 바꿀 수 있다면, 구 10엔은 1엔의 가치밖에 없게 되므로 구리로 하는 것이 이득이라는 논리였다.[2]
984년(에이칸 2년)에는 "금파전령(禁破銭令)"이 내려졌다. 이 금령은 사찰 등에 내려진 것을 보아도, 조정이 반대할 수 없도록 구리 등롱 등 "국가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의 불구(佛具)에 의탁하여 용해하는 방식이 취해졌을 것이다. 이 결과, 황조전(皇朝銭)의 현존 매수는 기록과 비교해도 극히 적은 것이 되었다.[2]
당시 일본의 지배층은 오늘날의 경제학 지식을 갖추지 못했던 점도 유통 부진의 원인이었다. 959년 (텐토쿠 3년) 4월 8일에 새로 만들어진 돈을 이세 신궁 등 11개 사찰에 헌납하여 유통을 기원('일본기략')하고, 986년 (칸나 2년) 6월 16일에는 여러 사찰과 능묘에 돈의 유통을 기원('본조세기')하게 했으며, 이듬해 987년 (에이엔 원년) 11월 27일에도 15대 사찰에 대해 마찬가지 명령('일본기략')을 내렸다. 당시의 지배층이 경제와 돈의 관계에 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돈의 유통 부진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했고, 대책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묵묵히 신불의 가호에 의해 사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8]
2. 4. 발행 중단과 물품 화폐 경제로의 회귀
건원대보 발행 후, 조정의 쇠퇴와 겹쳐 민간에서 정부 발행 동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사용되지 않게 되면서 동전은 더 이상 발행되지 않았다. 이후 일본에서는 11세기 초를 기점으로 화폐 사용 기록이 끊어져 쌀이나 비단 등의 물품 화폐 경제로 되돌아갔다.[8] 다만 기나이 등에서는 300년에 걸쳐 형성된 금속 화폐 자체에 대한 수요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장물 피해액을 산정하는 장물 감문이나 고가법 등 공정 가격 결정에 화폐 환산이 사용되었다. 이윽고 경제가 발달하면서 중국에서 수입한 송전, 원전, 명전 등이 사용되었다.황조십이전이 폐지된 후, 송전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까지 일본에 화폐가 없었던 공백기에는 물품의 가치를 나타낼 때 "준견법(准絹法)"이라 하여 비단의 양을 기준으로 하는 방식이 고안되어 수 세기 동안 사용되었다. 준견법이 고안된 초창기인 11세기 무렵에는 표준적인 비단의 가치가 그대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13세기 무렵이 되자 비단의 실체를 떠나 가상적인 비단의 가치를 계산 단위로 사용하게 되었다. 전 10문을 가리키는 "전 1필"이라는 단위는, 이때의 계산 단위였던 준견 1필이 전 10문이었던 데에서 유래한다. 준견법은 도래전의 보급과 함께 14세기 무렵에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황조십이전이 발행되지 않게 된 이후, 일본에서 공적으로 주조된 화폐 발행은 오랫동안 끊겼으며, 도래전과 사주전이 유통되었다. 동전의 공적인 주조 재개는 건원대보 발행 이후 600년 이상이 지난 에도 막부에 의한 1608년 (게이초 13년)의 게이초 통보 혹은 1627년 (간에이 4년)의 간에이 통보까지 기다려야 했다.
3. 황조십이전 목록
(와도 원년)
(萬年通寳)
(덴표호지 4년)
(神功開寳)
(덴표진고 원년)
(隆平永寳)
(엔랴쿠 15년)
(富壽神寳)
(고닌 9년)
(承和昌寳)
(조와 2년)
(長年大寳)
(가쇼 원년)
(饒益神寳)
(조간 원년)
(貞觀永寳)
(정관 12년)
(寛平大寳)
(간페이 2년)
(延喜通寳)
(엔기 7년)
(乹元大寳)
(텐토쿠 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