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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모로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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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와라노 모로자네는 후지와라노 요리미치의 아들로, 호리카와 천황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강화하고 시라카와 천황의 인세이를 지지하며 섭관 정치의 쇠퇴를 겪었다. 그는 섭관, 좌대신, 태정대신 등을 역임했으며, 와카와 음악에도 능했다. 일기 《교고쿠칸파쿠키》를 남겼으며, 아들 후지와라노 모로미치에게 관백 자리를 물려주고 출가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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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모로자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씨족후지와라 북가미도류
이름후지와라노 모로자네
로마자 표기Fujiwara no Morozane
별칭교고쿠도노(京極殿), 고우지도노(後宇治殿)
법명호가쿠(法覚)
생애
시대헤이안 시대 중기 - 후기
출생조큐 3년 (1042년)
사망고와 3년 2월 13일 (1101년 3월 14일)
묘소알 수 없음
관직
관위종1위
직위섭정, 관백, 태정대신
주군고레이제이 천황 → 고산조 천황시라카와 천황호리카와 천황
가족 관계
아버지후지와라노 요리미치
어머니후지와라노 기시 - 후지와라노 요리시게의 딸
형제미치후사, 토시츠나, 카쿠엔, 타다츠나, 간시/히로코, 모로자네
양형제겐시/모토코, 토시후사, 닌가쿠, 노부이에
배우자정실 : 미나모토노 레이시 (후지와라노 노부이에의 양녀)
미나모토노 요리쿠니의 딸, 후지와라노 모토사다의 딸, 후지와라노 나가나리의 딸, 타이라노 유키치카의 딸, 미나모토노 노리아키 (源則成)의 딸, 타이라노 사다치카 (平定親)의 딸, 미나모토노 아키후사의 딸 또는 미나모토노 모로카타의 딸, 후지와라노 타다토시 (藤原忠俊)의 딸, 호겐 세이엔 (清円)의 딸 도는 홋쿄 라이엔 (頼円)의 딸
자녀카쿠지츠(覚実), 닌겐(仁源), 모로미치, 이에타다, 카쿠신, 츠네자네, 세이기(静意), 토우마(澄真), 요시자네, 타다노리, 닌토(仁澄), 진판, 교겐, 조우치(増智), 에이자네(永実), 켄가쿠 (玄覚), 후지와라노 타다나가(藤原忠長), 후지와라노 모토타카의 아내 등
양녀 : 켄시/카타이코, 토쿠시 내친왕

2. 약력

후지와라노 요리미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후지와라노 요리시게의 딸 기시이다. 어머니가 다른 형제들은 모두 다른 가문에 양자로 보내졌으나, 모로자네는 형 미치후사가 급사하면서 섭관가의 후계자가 되었다.[2][3]

모로자네는 양녀 후지와라노 켄시(미나모토노 아키후사의 딸)를 시라카와 천황에게 입내시켜 황후로 삼았다. 켄시가 낳은 호리카와 천황을 통해 외척으로서 권력을 강화했다.

숙부인 후지와라노 노리미치 및 사촌 형 후지와라노 노부나가와 섭관, 후지와라 씨장자 자리를 두고 대립했으나, 시라카와 천황의 지지와 조토몬인 쇼시의 유언을 바탕으로 승리하였다. 노리미치는 좌대신직을 모로자네에게 양보하기도 했다.

시라카와 천황이 인세이를 시작한 후에도 천황의 의향을 존중하며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시라카와 상황은 원청 인사마저도 모로자네에게 맡겼고, 모로자네도 상황의 딸 이쿠호우몬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슬픔에 잠긴 상황을 대신해 장례를 준비하였다.[5][6]

와카에 능통했으며, 『고슈이와카집』 등 칙찬 와카집에 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7] 비파피리 등 음악에도 재능을 보였다. 일기로 『교고쿠칸파쿠키』를 남겼다.

3. 정치 활동

모로자네는 양녀 켄시/카타이코 (미나모토노 아키후사의 딸)를 시라카와 천황에게 입궁시켰다. 켄시/카타이코는 천황의 총애를 받아 장남 아츠후미 친왕을 낳아 중궁으로 책봉되었고 (\[\[아츠후미 친왕]]은 요절하지만, 후에 타루히토 친왕(후의 호리카와 천황)을 낳는다), 모로자네의 후궁 정책은 성공했다. 이후 숙부이자 관백인 노리미치 생전부터, 노리미치 및 사촌 형인 노부나가와 섭관·후지와라 씨장자의 지위를 둘러싸고 대립했다. 하지만 원래 요리미치에서 노리미치로 계승될 때, "노리미치는 1대 한정으로 하고, 다음 대는 요리미치의 자녀에게 계승시킨다"라는 유언이 있었고, 죠토몬인 쇼시/아키코의 감시도 있었기 때문에, 노리미치·노부나가 부자는 모로자네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2][3] 오히려 노리미치가 좌대신직을 모로자네에게 양보하는 등, 유언을 실행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요리미치・모로자네 집안의 권세를 깎기 위해 스스로도 타격을 입을 것을 각오하고, 고산조 천황이 시행한 엔큐의 장원정리령 시행을 사실상 용인하기도 했다.

노부나가에게 섭관의 지위를 계승시키지 못한 채 노리미치가 사망하자, 모로자네는 좌대신으로서 이미 「이치노카미(一上)」이자 내대신인 노부나가보다 윗자리였고, 또 후지와라씨와의 관계가 희박한 동생 미야들 (\[\[사네히토 친왕 (헤이안 시대)|사네히토 친왕]], 스케히토 친왕, 섭관가에게 푸대접을 받은 산죠 겐지의 계보)이 아니라 자신과 켄시/카타이코 사이에서 태어난 타루히토 친왕의 황위 계승을 바라고 있던 시라카와 천황과 협조하여 노리미치 사망 후 즉시 모로자네가 내람(섭관)ㆍ후지와라 씨장자가 되는데 성공했다. 이 체제에는 반대 세력도 있어, 노부나가의 2년에 걸친 출사 정지 등 대립은 수년에 이르렀지만, 자신을 반대하는 귀족들의 상징이 되고 있던 내대신 노부나가를 좌대신인 자신을 뛰어넘게 하면서까지 (사실상 명예직으로 되어 있었지만, 지위적으로는 좌대신보다 윗자석) 태정대신으로 유지하면서도 이치자 선지를 받음으로써 좌대신 이하의 인사를 스스로의 뜻대로 하여 권세를 굳혔다.[4]

시라카와 천황도 모로자네에게 경의를 표하고, 원정을 시작한 뒤에도 새로운 천황의 섭정으로 돌아선 모로자네의 의향은 배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실제 시라카와 상황은 원청 인사마저도 모로자네의 인선에 맡겼고,[5] 모로자네도 상황의 딸 이쿠호우몬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슬픔에 잠긴 상황을 대신해 장례 준비를 하였다.[6]

그러나, 켄시/카타이코의 입내는 무라카미 겐지의 세력 신장을 의미했고, 또한 적남 모로미치와 모로자네 자신의 잇단 사망으로 어린 나이의 타다자네가 뒤를 이을 수 밖에 없었던 점과 호리카와 천황의 요절에 따라 섭관가가 천황의 외척 자리를 잃게 되었다. 모로자네 현역 시기에는 섭관 정치는 평안했으나, 그의 사후에 결과적으로 약화가 진행되게 되었다.

4. 섭관 정치의 쇠퇴

모로자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후 섭관 정치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적자 모로미치와 모로자네 자신의 잇따른 사망으로, 어린 타다자네가 뒤를 이으면서 섭관가의 권위가 약화되었다.[7] 호리카와 천황의 요절로 섭관가가 천황의 외척 지위를 상실하면서, 시라카와 법황(法皇)의 원정이 강화되었다. 이는 귀족 중심의 정치 질서에서 무사 계급의 성장과 왕권 강화로 이어지는 역사적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5.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 - 사망비고
아버지후지와라노 요리미치
어머니후지와라노 기시후지와라노 요리나리의 딸
정실미나모토노 레이시후지와라노 노부이에의 양녀, 미나모토노 모로후사의 딸
측실미나모토노 요리쿠니의 딸
측실후지와라노 모토사다의 딸
측실후지와라노 나가나리의 딸? - 1128[10]
측실타이라노 유키치카의 딸
측실미나모토노 노리아키의 딸
측실타이라노 사다치카의 딸
측실미나모토노 아키후사의 딸
또는 미나모토노 모로카타의 딸
측실후지와라노 타다토시의 딸
측실호겐 세이엔의 딸
또는 호쿄 라이엔의 딸
장남후지와라노 모로미치1062년 - 1099년미나모토노 레이시 소생
차남후지와라노 이에타다1062년 - 1136년미나모토노 요리쿠니의 딸 소생, 카잔인 가의 시조
3남카쿠신1065년 - 1121년미나모토노 요리쿠니의 딸 소생,
미나모토노 노리나리의 딸이라는 설도 있음
4남죠이1069년 - 1151년미나모토노 요리쿠니의 딸 소생
5남후지와라노 츠네자네1068년 - 1131년후지와라노 모토사다의 딸 소생, 오이노미카도 가의 시조
6남후지와라노 요시자네1070년 - 1132년후지와라노 모토사다의 딸 소생
7남후지와라노 타다노리1076년 - 1141년후지와라노 나가나리의 딸 소생, 나니와 가의 시조
8남조치? - 1135년후지와라노 나가나리의 딸 소생,
타이라노 사다치카의 딸이라는 설도 있음
9남카쿠지츠1052년 - 1092년타이라노 사다치카의 딸 소생
10남닌겐1058년 - 1109년미나모토노 노리나리의 딸 소생, 텐다이좌주 제40세
11남쵸신1069년 - 1096년타이라노 사다치카의 딸 소생
12남나가미타이라노 사다치카의 딸 소생
13남닌쵸1079년 - 1134년미나모토노 아키후사의 딸
또는 미나모토노 모로카타의 딸 소생
14남진한1093년 - 1174년후지와라노 타다토시의 딸 소생,
미나모토노 레이시 또는 닌쵸와 동복형제라는 설,
고후쿠지 다이죠인 제3세
15남교겐1097년 - 1155년후지와라노 타다토시의 딸 소생,
미나모토노 레이시라는 설, 텐다이좌주 제48세
16남겐카쿠? - 1138년호겐 세이엔의 딸
또는 호쿄 라이엔의 딸 소생
후지와라노 타다나가생모 불명
생모 불명, 후지와라노 모토타카의 처[11]
양녀후지와라노 겐시미나모토노 아키후사의 딸
양녀도쿠시 내친왕고산조 천황의 황녀,
모로자네의 양녀가 되어 호리카와 천황에게 입내[8]


6. 관직 이력

역임 연도관직
덴키 원년(1053년)정5위하 승전
덴키 2년(1054년)종4위하
시종
정4위하
덴키 3년(1055년)좌근위권중장
종3위
덴키 4년(1056년)오미노켄스이
정3위
곤츄나곤, 좌근위중장 유임
덴키 6년(1058년)종2위
곤다이나곤, 좌근위중장 사임
고헤이 3년(1060년)내대신
고헤이 5년(1062년)좌근위대장 겸임
고헤이 6년(1063년)정2위
고헤이 8년(1065년)종1위, 우대신, 좌근위대장 유임
타치바나씨 제성 선하
지랴쿠 4년(1068년)쿠로우도노벳토 겸대
지랴쿠 5년(1069년)도구傅 겸임
좌대신, 쿠로우도노벳토, 좌근위대장, 도구傅 유임
조호 2년(1075년)후지와라씨 장자 선하
관백 선하, 좌대신・좌근위대장 유임
좌근위대장 사임
에이호 3년(1083년)좌대신 사임
오토쿠 3년(1086년)관백 사임, 섭정 선하
간지 2년(1088년)태정대신 선하, 섭정 유임
간지 3년(1089년)태정대신 사임
간지 4년(1090년)섭정 사임, 관백 선하, 준섭정 선하
간지 5년(1091년)후지와라노 키요히라로부터 섭관가에 첫 입공(군마 2필)
간지 8년(1094년)관백 사임 (후임: 아들 모로미치)
고와 3년(1101년)출가 (법명: 호가쿠(法覚))
사망 (향년 60세)


참조

[1] 웹사이트 Fujiwara no Morozane • . A History . . of Japan . 日本歴史 https://historyofjap[...] 2022-05-14
[2] 문서 藤原道長が生前に定めておいた方針に基づいている
[3] 문서 関白職を獲得するまでの教通の忍従、特に頼通に対して従順であることは、ほとんど卑屈の域に達するものだった。ところがいったん関白に就任すると、教通はこれを自身の子である信長に譲ることを考え始める。教通は頼通が健在でいる間はたびたび関白の辞表を出したり、兼任していた左大臣を辞して頼通の嗣子・師実に譲ったりしていたが、いよいよ死期が近づいた頼通から関白を師実に譲るよう求められると、教通は天皇の裁可が必要云々を口実にこれを拒んだ。頼通は師実の関白就任を見届けることなく、延久6年(1074年)2月、83歳で死去した。
[4] 문서 当時、右大臣は源師房の死去により空席。官を飛び越えられることは大変不名誉とされていた。
[5] 서적 為房卿記 1071-12-26
[6] 서적 中右記 1089-08-08
[7] 서적 勅撰作者部類
[8] 서적 扶桑略記 1085-03-14
[9] 논문 篤子内親王論 吉川弘文館 2012
[10] 문서 藤原南家貞嗣流出身
[11] 서적 尊卑分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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