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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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한은 삼한 중 하나로, 현재의 경상도 지역에 위치했던 고대 국가 연맹체이다. 중국 진나라에서 한반도로 이주해 온 유민들이 마한의 땅을 분할받아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진한은 벼농사, 누에치기, 길쌈 등을 통해 경제 활동을 했으며,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진한은 사로국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신라로 발전하였으며, 신라 건국 이전에는 마한의 통제를 받다가, 마한 멸망 후에는 사로국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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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한 - 진국
진국은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 사이 한반도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로 추정되지만, 실존 여부, 위치, 규모에 대한 학계 논쟁이 있으며, 사서 기록에 따라 위만조선에 복속된 국가로, 또는 삼한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 삼한 - 소벌도리
소벌도리는 신라 건국 설화 속 돌산고허촌 촌장으로, 박혁거세를 발견하고 양육하여 신라 건국에 기여, 사량부 대인이 되었으며, 그의 후손은 경주 최씨와 진주 소씨의 시조가 되었다. - 진한 - 사벌국
사벌국은 삼한 시대 진한의 소국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일대에 위치했으며, 마한의 지배를 받다가 신라 중심의 진한 연맹에 참여했으나 신라의 세력 확장에 249년 멸망하여 이후 신라의 사벌주가 설치되고 상주로 개칭되었다. - 진한 - 조문국
조문국은 신라 벌휴 이사금 2년에 신라에 복속된 삼한 시대의 부족 국가이며, 의성군 금성면 일대가 도읍지로 추정되고 374여 기의 고분군과 조문국 경덕왕릉이 남아 있다. - 경상도의 역사 - 국학
국학은 신라 시대 귀족 자제 교육 기관으로,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교육하여 문치주의 전환과 고려 시대 유교 확립에 기여했다. - 경상도의 역사 - 진국
진국은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 사이 한반도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로 추정되지만, 실존 여부, 위치, 규모에 대한 학계 논쟁이 있으며, 사서 기록에 따라 위만조선에 복속된 국가로, 또는 삼한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진한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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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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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토착 이름 | 진한 (辰韓) |
통용되는 긴 이름 | 진한 연맹 |
일반 명칭 | 진한 |
시대 | 고대 |
정부 형태 | 연맹 |
시작 사건 | 건국 |
시작 연도 | 기원전 194년 |
종료 사건 | 신라에 병합 |
종료 연도 | 4세기 |
이전 | 진 |
이후 | 신라 |
공용어 | 한어 |
종교 | 무속 신앙 |
현재 국가 | 대한민국 |
역사 | |
건국 시기 | 기원전 2세기 |
멸망 시기 | 356년 |
불교 수용 | 527년 |
진흥왕의 정복 활동 | 551년–576년 |
통일신라 | 676년–935년 |
선대 | 진국 |
계승 | 신라 |
정치 | |
정부 형태 | 군주국 |
군주 칭호 | 왕 |
주요 지도자 | 혁거세 (초대) 진흥왕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경순왕 (마지막) |
주요 지도자 재임 기간 | 기원전 57년 – 4년 540년–576년 654년–661년 661년–681년 681년–692년 927년–935년 |
언어 및 민족 | |
공용어 | 진한어 |
민족 | 한인 |
2. 형성
《삼국지》, 《후한서》 및 《후한서》를 인용한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한은 중국 진(秦)에서 한반도로 이주해 온 유민들이 세운 나라라고 한다. 마한은 이들에게 동쪽 땅을 내주어 살게 하였다고 전해진다.[12]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진한을 이루는 12개의 소국은 다음과 같다.[11]
《삼국사기》에는 중국인들이 진(秦)나라의 난리를 피해 동쪽으로 와서 마한 동쪽에 있는 진한(辰韓) 사람들과 섞여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점차 세력이 커졌고, 이에 마한이 이들을 경계하게 되었다고 한다.[12]
《북사》에는 신라가 본래 진한의 후예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한은 고구려 동남쪽에 위치하며, 한나라 때의 낙랑 지역에 해당한다. 진한은 진(秦)나라에서 노역을 피해 온 사람들이 세운 나라로, 마한이 이들에게 동쪽 땅을 주어 살게 했다고 한다. 진한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과 비슷한 언어와 풍습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라를 '방(邦)', 활을 '호(弧)', 도둑을 '구(寇)', 술잔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이라 불렀으며, 서로를 '도(徒)'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는 마한과는 다른 모습이었다.[13]
《북사》에는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옥저까지 진격했다가 돌아갔는데, 이때 남은 사람들이 신라를 세웠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관구검의 부대가 신라를 세웠다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여 논란이 있다.[14]
《북사》에는 신라가 초기에 백제에 부용(附庸), 즉 속국이었다는 기록이 있다.[15] 《양서》에는 신라가 백제 동남쪽 5천여 리 밖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 남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에 접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라는 나라가 작아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내지 못하다가, 521년(신라 법흥왕 8년)에 처음으로 백제를 통해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고 한다.[16]
반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진한의 사로국(斯盧國) 사람들이 고조선 유민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로 발굴되는 유물도 고조선 계통으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진한은 고조선 계통의 종족으로 여겨진다. 진한의 12개 소국은 진왕(辰王)에게 소속되어 있었는데, 진왕은 마한 사람이 대대로 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마한의 진왕이 진한 12국의 종주권을 가졌다는 견해와 진한의 지배자인 진왕이 따로 있었다는 견해가 대립한다.[17]
진한은 초기에는 마한의 통제를 받았고, 마한이 멸망한 뒤에는 사로국의 통제를 받았다. 사로국은 소극적으로는 '신수두' 건설과 '신한' 칭호 사용을 금지했고, 적극적으로는 해마다 조알(朝謁)과 토산물 진공(進貢)을 요구했다. 그러나 3세기 무렵부터 진한은 중국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내는 등 소국 연맹체의 세력이 크게 성장하였다. 이후 경주의 사로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신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5~6세기에 조성된 경상북도 의성군 지역 고분에서 백제식 금동관모가 출토되기도 했다. 의성은 진한 소국 중 하나인 조문국이 있던 지역이다. 금동관모와 함께 '의성양식 토기' 등도 출토되었다. 삼국사기에는 185년 조문국이 사로국에 정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역 사학자들은 당시 의성 일대의 진한이 신라뿐만 아니라 백제와도 교류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다고 보고 있다.[18]
"진한(辰韓)"이라는 이름은 고대 한국어 단어들의 조합으로, "진(辰)"은 "동쪽", "한(韓)"은 "큰"을 의미하여 "동쪽의 큰 나라"라는 뜻을 가진다.[1]
삼한(三韓)의 일부로서, 마한(馬韓)은 "남쪽의 큰 나라", 변한(弁韓)은 "빛나는 큰 나라"를 의미했다.[2]
3. 진한 12개국
이름 위치 (추정) 사로국(斯盧國) 경주시 기저국(己柢國) 영주시 풍기읍 불사국(不斯國) 영일군 혹은 청도군 근기국(勤耆國) 영일군 혹은 청도군 난미리미동국(難彌理彌凍國) 의성군 단밀면 염해국(冉奚國) 울산시 군미국(軍彌國) ? 여담국(如湛國) ? 호로국(戶路國) ? 주선국(州鮮國) ? 마연국(馬延國) ? 우유국(優由國) ?
이 중 큰 나라는 5 ~ 6천 가구, 작은 나라는 6 ~ 7백 가구의 규모였다.
《삼국사기》에는 이 외에도 훗날 신라에 병합된 소국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삼국지》에서는 진한의 소국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름 | 위치 (추정) |
---|---|
기저국(己柢國) | 안동시 |
불사국(不斯國) | 창녕군 |
근기국(勤耆國) | 포항시 또는 청도군 |
난미리미동국(難彌理彌凍國) | 밀양시 ("미리미동"이라고도 불림) |
염해국(冉奚國) | 울산 |
군미국(軍彌國) | 사천시 |
여담국(如湛國) | 군위군 |
호로국(戶路國) | 상주시 |
주선국(州鮮國) | 경산시 |
마연국(馬延國) | 밀양시 |
우유국(優由國) | 청도군 또는 영덕군 |
3세기 이전에는 진한과 변한 사이의 구별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진한과 변한의 백성들이 섞여 살았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구별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4. 경제
진한은 토지가 비옥하고 산수가 수려하여 벼, 보리, 기장, 조 등의 농업을 발전시켰다. 또한 누에치기와 길쌈을 통해 곡식과 옷감을 생산하였다. 철(鐵)을 이용하여 주변국과 무역을 하였으며, 성(城)과 울타리가 존재하였다.
5. 사회
진한은 마한과 언어가 달랐다. 다만, 양서 제이열전에서는 진한이 사용하는 어휘가 중국 진나라 언어와 비슷하다고 하여, 마한과 다르다고 애매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마한과 진한은 언어 자체가 다른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어휘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진한 땅에 중국 진나라 유민들이 이주해 오기 이전에는 진한의 토착민들이 살고 있었고, 진한의 토착민은 본래 마한과 언어가 통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19]
풍속은 유순하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드는 편두 풍속이 있어서, 머리가 납작하였다. 남녀 간에 구별이 있다.[19]
6. 문화
수렵에 능하고 가무를 즐겼다. 삼국지는 진한이 진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1] 진한과 변한은 기본적인 문화를 공유했으며, 종교적 관습에서 차이를 보였고, 명확한 경계로 구분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
이 지역에서 발견된 많은 고고학적 증거들은 인접한 왕국에서 발견된 증거들과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지 않으며, 이는 한반도 남부 지역 전반에 걸쳐 문화가 대체로 유사했음을 시사한다.[1]
진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종교는 샤머니즘으로 보이며, 이는 정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1] 농업은 쌀에 크게 의존했지만, 말, 소, 닭을 포함한 상당한 규모의 가축 사육도 이루어졌다.[1]
변한과 마찬가지로, 진한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두개골을 평평한 돌에 눌러 인공적인 두개골 변형을 시켰다.[1] 이러한 관습은 가야 연맹 시대까지 지속된 것으로 여겨진다.[1]
7. 언어
마한과 언어가 달랐다. 다만, 양서 제이열전에서는 진한이 사용하는 어휘가 중국 진나라 언어와 비슷하다고 해서 마한과 다르다고 애매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마한과 진한은 언어 자체가 다른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어휘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진한 땅에 중국 진나라 유민들이 이주해오기 이전에는 진한의 토착민들이 살고 있었고, 진한의 토착민은 본래 마한과 언어가 통했을 가능성이 높다.[19]
진한의 언어는 신라어의 조상으로 여겨지며, 이는 다시 현대 한국어의 조상으로 추정된다.[7]
그러나 신라, 백제, 고구려가 통역 없이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는 여러 증거를 볼 때, 진한에서 사용된 언어는 당시 변한, 마한 등 국가에서 사용된 언어와 매우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지』에는 진한인의 언어는 마한의 언어와 다르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지』의 저자는 실제로 진한을 방문하지 않았다.
8. 진한과 신라의 관계
辰韓중국어은 마한 동쪽의 땅을 분할받아 살게 된 중국 진(秦) 유민들이 시초라고 《삼국지》, 《후한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12] 《삼국사기》에는 중국인들이 진(秦)의 난리를 피해 마한 동쪽으로 이주하여 진한과 섞여 살았고, 이들이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꺼렸다는 내용이 있다.[12]
《북사》에는 신라의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었으며, 이들은 진나라 때 노역을 피해 마한으로 온 유망민들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마한과 언어가 달랐고, 중국 사람들과 비슷한 언어를 사용했다.[13] 나라(國)를 邦, 활(弓)을 弧, 도둑(賊)을 寇, 연회석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行酒)을 行觴이라 하는 것이 그 예이다.
《북사]]》에는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격파하고 옥저까지 진격했을 때,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은 자들이 신라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14] 그러나 이 기록은 신라에 중국인들이 살게 된 원인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관구검의 예하부대가 신라의 선조라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반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진한의 소국 중 하나인 사로국의 원 거주민들이 고조선 유민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로 발굴되는 유물도 고조선 계통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진한은 고조선 계통의 종족으로 이해된다.
진한은 초기에는 마한의 통제를 받았고, 마한이 망한 뒤에는 사로국의 통제를 받았다. 3세기 무렵부터는 중국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내는 등 소국 연맹체의 세력이 크게 신장하였다. 이후 경주의 사로국을 중심으로 복속되며 신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경상북도 의성군 지역 고분에서는 백제식 금동관모가 출토되기도 했는데, 이는 진한 소국 중 하나인 조문국이 있었던 의성 지역이 신라뿐만 아니라 백제와도 교류했음을 보여준다.[18]
9. 참고 문헌
- 진수, 《삼국지》 〈권30 오환선비동이전 中 진한전 (辰韓傳) 및 변진전(弁辰傳)〉 (3세기)
- 일연,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일(王曆第一)편 진한 조(條)〉 (1281)
- 김광, 《대동사강(大東史綱)》 (대동사강사, 1926)
- 신채호, 《조선상고사》 〈제4편 제4장 1.계립령 이남의 별천지〉 (1931)
- 한국학중앙연구원 편, [https://web.archive.org/web/20161220165736/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ndex?dataType=080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진한" 항목]
- David Graff영어, ''북사'' 北史중국어, Albert E. Dien, Cynthia Louise Chennault, Keith Nathaniel Knapp, Alan J. Berkowitz영어 공편, 《Early Medieval Chinese Texts: A Bibliographical Guide영어》 (캘리포니아 버클리: 동아시아 연구소, 캘리포니아 대학교, 2015), 18–2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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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guk Sa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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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是、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爲六村、一曰閼川楊山村、二曰突山髙墟村、三曰觜山珍支村 或云干珍村、四曰茂山大樹村、五曰金山加利村、六曰明活山髙耶村、是爲辰韓六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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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변한제국의 위치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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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적 문화를 꽃피운 조문국
http://www.yeongnam.[...]
[19]
문서
그러나 신생아의 머리를 돌로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기록은 예전부터 의문이 많았는데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는 [[건륭제]]가 직접 집필한 <어제삼한정류(御製三韓正謬)>를 인용해 머리를 돌로 누르는 것은 어른도 감내하기 힘든 것인데 하물며 어린아이의 머리를 돌로 누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하며 이는 동이족의 풍습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범울종]]이 제멋대로 기록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건륭제는 만주족의 풍습에 아기가 태어나면 요람을 장만하여 아기를 하늘을 바라보도록 반듯하게 오래 눕혀두는데 그렇게 하면 아기의 머리가 저절로 평평해져서 편두가 된다고 기록했다. 즉, 정말로 신생아의 머리를 돌로 눌러서 편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생아를 요람에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도록 눕혀서 재웠기 때문에 머리가 평평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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