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타 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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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타 덴은 일본의 기업가로, 1926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도쿄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1950년 수입 잡화 판매점 후지타 상점을 창업했으며, 1971년 일본 맥도날드를 설립하여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일본 맥도날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일본 토이저러스, 일본 블록버스터 등을 설립하는 등 사업을 확장했다. 저서 '유대 상법 세계 경제를 움직인다'를 통해 경영 철학을 알렸으며, 2004년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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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타 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후지타 덴 |
출생일 | 1926년 3월 13일 |
사망일 | 2004년 4월 21일 |
출생지 |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히가시요도가와구 (현재의 요도가와구)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
국적 | 일본 |
직업 | 사업가 |
알려진 업적 | 일본 맥도날드 설립자 |
학력 | |
출신 학교 | 도쿄 대학 대학원 법학정치학연구과/법학부 |
가족 | |
배우자 | 정보 없음 |
자녀 | 장남: 후지타 겐 |
2. 생애
1926년 오사카부 오사카시에서 태어난 후지타 덴은 도쿄대학교 법대에 다니던 1950년에 '후지타 상점'을 설립했다. 1971년에는 '일본 맥도날드'를, 1989년에는 '일본 토이저러스'를, 1991년에는 '일본 블록버스터'를 설립하였다.
1967년 처음 맥도날드 햄버거를 맛본 후지타는 맥도날드의 효율성과 인기에 감탄하여, 1971년 일본에서 맥도날드 프랜차이즈를 시작했다. 그는 일본 도쿄의 고급 지역인 긴자 (銀座)의 미쓰코시 백화점에 첫 번째 맥도날드를 열었다.
'일본 맥도날드'를 경영하면서 일본에서 '가격 경쟁' 열풍을 일으키는 등 경제 감각과 회사 경영에 뛰어난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다. 테리야키 맥버거 (テリヤキマックバーガー)와 치킨 타츠타 (チキンタツタ)와 같은 일본식 메뉴를 도입하여 성공을 거두었다.[3]
1978년에는 햄버거 수요층이 야구 팬과 일치하는 점에 착안하여 일본 맥도날드의 프로 야구(NPB) 진입을 모색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저술가로서도 활약하여 1972년에 펴낸 '유태인의 상술'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의 첫 번째 책인 《유대인의 사업 방식》에서 그는 유대인들이 비즈니스 세계를 장악했다고 설명하며 독자들에게 유대인의 사업 방식을 사용하여 부자가 되라고 권고했다.
2002년 7월, 일본 맥도날드의 실적 부진과 건강 악화로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2004년 4월 21일,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후지타 상점 창업
후지타 덴은 1926년 3월 13일 오사카부 오사카시에서 태어났다.[8] 구제 오사카부립 키타노고등학교와 구제 마쓰에고등학교를 거쳐 도쿄 대학 법학부에 진학했다.[8]3세 때 센리야마로 이주하여 미시마군 센리 제2 보통 소학교 (현재의 스이타 시립 센리 제2 초등학교)에 다녔다. 성적은 우수했지만, 어머니가 교사에게 선물을 하지 않아 내신서를 좋게 받지 못해 재수를 거쳐 (구제) 키타노 중학에 진학했다.[8]
1950년 도쿄대학교 법대에 재학 중 수입 잡화 판매점 "후지타 상점"을 설립했다.[9] 1951년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8]
1968년, 후지타는 아메리칸 오일(후지타의 저서에서는 "유대인 회사"로 표현)로부터 나이프와 포크 300만 개의 주문을 받았다.[10] 기후현 세키시의 업체에 제조를 발주했지만, 모내기 시기와 겹쳐 기한 내에 상품을 완성하지 못했다. 배로 운송하면 납기를 맞출 수 없어, 보잉 707을 전세 내어 30000USD (일본 엔으로 1000만엔)의 비용을 들여 납기 내에 납품했다.[10]
다음 해에는 아메리칸 오일로부터 나이프와 포크 600만 개의 주문을 받았으나, 또다시 생산이 늦어져 비행기를 전세 내게 되었다.[10] 두 번의 비행기 전세로 큰 손실을 입었지만, 이를 통해 유대인들의 신용을 얻어 "약속을 지키는 일본인"이라는 정보가 세계 각지의 유대인에게 전해졌다고 한다.[10]
후지타 덴의 초기 생애 및 사업 관련 연표는 다음과 같다.
연도 | 내용 |
---|---|
1926년 | 오사카부 오사카시에서 출생. |
1950년 | 도쿄 대학 재학 중 수입 잡화 판매점 후지타 상점 창립. |
1951년 | 도쿄 대학 법학부 졸업. |
1968년 | 아메리칸 오일로부터 나이프와 포크 300만 개 주문 수주 및 납품. |
2. 2. 일본 맥도날드 창업과 성장
1967년 처음 맥도날드 햄버거를 맛본 후지타 덴은 맥도날드의 효율성과 인기에 감탄했다. 수입 가방과 신발을 판매하던 후지타는 1971년 일본에서 맥도날드 프랜차이즈를 시작할 기회를 잡았다. 일본인에게 맥도날드를 판매하기 위한 그의 전략은 다음과 같은 발언을 포함했다. "일본인이 키가 작고 피부가 노란 이유는 2천 년 동안 생선과 쌀만 먹었기 때문입니다. ... 만약 우리가 천 년 동안 맥도날드 햄버거와 감자를 먹는다면 우리는 키가 커지고, 피부는 하얘지고, 머리카락은 금발이 될 것입니다."[1][2]그는 일본 도쿄의 고급 지역인 긴자 (銀座)의 미쓰코시 백화점에 첫 번째 맥도날드를 열었다. 그러나 맥도날드 일본은 1971년 첫 레스토랑을 열었지만 1973년까지 텔레비전 광고와 라디오 광고를 시작하지 않았다. 현재 맥도날드 일본은 3,800개의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으며, 연간 약 40억달러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햄버거 시장의 60%). 이러한 성공의 상당 부분은 테리야키 맥버거 (テリヤキマックバーガー)와 치킨 타츠타 (チキンタツタ)와 같은 일본식 메뉴 덕분이었다.[3]
일본에서 맥도날드의 입지를 구축하고 약 10억달러의 순자산을 쌓은 후지타는 2003년 3월 5일 은퇴했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나이가 들어도 줄어들지 않아, 그는 2010년까지 일본에 10,000개의 맥도날드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2003년 12월, 맥도날드는 후지타 & Co.(후지타의 컨설팅 회사)와의 계약을 해지하기 위해 5700만달러(추정)를 지불했으며, 2400만달러의 퇴직 보너스도 지급했다. 후지타의 가족은 2005년 롱리치 사모 펀드에 매각할 때까지 맥도날드 일본의 지분 25%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해당 주식의 시장 가치는 6.74억달러였다.
1971년 후지타는 '일본 맥도날드'를 설립했다. 일본 맥도날드 경영에 있어서, 일본 전국에서 "가격 경쟁"을 일으키는 등, 경제 감각과 회사 경영에 뛰어난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지만, 만년에는 일본 맥도날드의 업적이 미진해지는 등 그늘이 드리워졌다.
1978년에는 햄버거 수요층이 야구 팬과 일치하는 것에서 착안, 일본 맥도날드의 프로 야구(NPB) 진입도 모색했다. 실제로 당시 센트럴 리그 회장인 스즈키 류지에게 리그 확장을 타진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2. 3. 기타 사업 활동
1971년에 일본 맥도날드를, 1989년에는 일본 토이저러스(미국의 장난감 전문 체인 토이저러스의 일본 법인)를, 1991년에는 일본 블록버스터(미국의 비디오 대여 체인 "블록버스터"의 일본 법인)를 설립했다.[10] 또한, 세계 최고의 넥타이·스카프 제조 판매 회사인 영국 타이락사와 제휴하여 일본 타이락스를 창업했다.맥도날드나 토이저러스와 같은 패밀리 대상의 건전한 오락으로 블록버스터를 전개했지만(맥도날드, 토이저러스, 블록버스터의 머리글자를 따서 "MTB 구상"이라고 불렀다), 결과적으로는 1999년 11월에 38개 점포 전체를 게오에 매각했다.
또한, 햄버거 수요층이 야구 팬과 일치하는 점에 착안하여 1978년에는 일본 맥도날드를 통한 프로 야구(NPB) 진입도 모색했으며, 실제로 당시 센트럴 리그 회장인 스즈키 류지에게 리그 확장을 타진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2. 4. 은퇴와 사망
2002년 7월, 후지타 덴은 일본 맥도날드의 실적 부진과 건강 악화로 사장직에서 물러났다.[14] 같은 해 3월 회장 겸 CEO에 취임했으나, 2002년 12월 결산에서 창업 이후 처음으로 최종 적자를 기록하며 2003년 3월 28일 주주 총회 후 회장직에서 물러났다.[14]일본 맥도날드 경영에서 물러난 후에는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줄었고, 2004년 4월 21일 도쿄도 내 병원에서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7] 장례식은 가까운 친척들만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7] 그의 사망 후, 일본 언론은 유산에 대해 보도했고, 이후 기업가들은 상속세를 둘러싸고 정부에 질문을 제기했다. 후지타 덴은 소득세를 제외한 모든 개인 재산과 투자를 일본 상속세 대상으로 남겼다.[5]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그는 가족에게 4.62억달러를 남겼다.[6] 이는 약 491억 엔으로, 역대 6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15]
3. 경영 철학과 업적
후지타 덴은 1967년 맥도날드 햄버거를 처음 맛본 후 그 효율성과 인기에 주목했다. 1971년 일본에서 맥도날드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하며, 일본인의 체형 변화를 언급하며 맥도날드 식단을 장려하는 파격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1][2] 그는 도쿄 긴자의 미쓰코시 백화점에 첫 매장을 열었다.
일본 맥도날드는 초기에는 광고를 하지 않았으나, 1973년부터 TV와 라디오 광고를 시작했다. 테리야키 맥버거, 치킨 타츠타 등 일본 현지화 메뉴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3] 3,800개 매장에서 연간 약 40억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후지타 덴은 2003년 은퇴할 때까지 약 10억달러의 순자산을 축적했으며, 2010년까지 일본 내 맥도날드 매장이 10,000개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후지타는 사업 초기, 아메리칸 오일과의 계약에서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큰 손실을 감수하고 비행기를 전세 내는 등의 노력으로 유대인 사회의 신용을 얻었다.[10] 이를 바탕으로 일본 맥도날드(1971년), 일본 토이저러스(1989년), 일본 블록버스터(1991년) 등을 성공적으로 론칭했다.
1978년에는 햄버거 수요층과 야구 팬이 일치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프로 야구 리그 확장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스즈키 류지 센트럴 리그 회장의 반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후지타는 "가격 경쟁"을 통해 일본 전역에서 맥도날드의 성장을 이끌었으며, 2000년에는 "평일 반값 세일" 전략을 펼쳐 디플레이션 시대에도 업적을 늘려 "햄버거 왕"으로 불렸다.[13] 2001년에는 일본 맥도날드를 자스닥 시장에 상장시키기도 했다.
경영 철학 외에도 저술가로서 『유대인의 상법 세계 경제를 움직인다』(1972년)를 출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했다. 그는 "78:22의 법칙" 등을 주장하며, 일본어 연구와 주식 투자를 즐겼다. 맥도날드의 일본어 표기를 정할 때도 영어 발음보다 일본어 운율을 우선시하는 등, 사업에 자신의 철학을 반영했다.[9]
또한, 손정의에게 컴퓨터 관련 분야를 공부하도록 조언한 일화는 유명하다.[19]
그는 "노력 × 시간의 법칙"을 강조하며,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성공이 결정된다"고 믿었다. 또한 "최악의 뒤에는 반드시 최선이 있다"는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다.
3. 1. 비판과 논란
후지타 덴은 뛰어난 경제 감각과 경영 능력으로 일본 맥도날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지만, 말년에는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가격 정책 혼란: 2000년대 초, "평일 반값 세일" 등 파격적인 가격 정책을 펼쳤으나, "인플레이션이 온다"며 갑작스럽게 중단했다가 다시 가격을 인하하는 등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경영 악화를 초래했다.[13]
- BSE(광우병) 문제: BSE(광우병) 발생으로 인한 소비자들의 불안감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해 고객 이탈을 막지 못했다.[7]
- 경영 부진: 위와 같은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2001년 일본 맥도날드는 창사 이후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했고, 결국 후지타 덴은 2002년 사장직에서 물러나고 2003년에는 회장직에서도 퇴임했다.[14]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후지타 덴의 경영 능력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으며, 그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4. 한국과의 관계
한국계 일본인 기업가 손정의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만나달라는 요청을 수락한 뒤 컴퓨터 관련 사업을 해보라고 조언했다.
5. 저서
후지타 덴은 경영자로서의 모습 외에도 저술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1972년에 펴낸 《유태인의 상술》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9] 그의 첫 번째 책인 《유대인의 사업 방식》에서 그는 유대인들이 비즈니스 세계를 장악했다고 설명하며 독자들에게 유대인의 사업 방식을 사용하여 부자가 되라고 권고했다. 이 책은 또한 후지타가 반유대주의와 자신이 겪었던 간사이 사투리로 인한 차별을 비교하는 자서전의 일부이기도 했다. 후지타가 긴자에서 첫 번째 맥도날드 레스토랑을 연 다음 해에 출판된 이 책은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어 100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유대인의 상법 세계 경제를 움직인다》(1972년)는 "78:22의 법칙", "유대교도가 되어라", "부자로부터 유행시켜라" 등의 주장을 담았다.[9]
그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출판 연도 | 제목 | 출판사 | 비고 |
---|---|---|---|
1972년 | 유대 상법 세계 경제를 움직인다 | 베스트셀러즈 | 베스트셀러 시리즈, 1983년, 2019년 재출간 |
1974년 | 머리 나쁜 놈은 손해를 본다 유대식 돈의 철학 | 베스트셀러즈 | 베스트셀러 시리즈, 1983년, 1999년 재출간 |
1983년 | 천하를 잡는 상법 0에서 1000억 엔으로 | 베스트셀러즈 | 와니의 책 베스트셀러 시리즈, 1999년 재출간 |
1985년 | 유대식 부자 나팔 부는 법 왜 나만 돈을 버는가 | 베스트셀러즈 | 와니의 책 베스트셀러 시리즈, 2000년 재출간 |
1986년 | 초상식의 머니 전략 실전 유대 상법 | 베스트셀러즈 | 와니의 책 베스트셀러 시리즈, 2000년 재출간 |
1991년 | 창업 전쟁의 극의 유대 상법 | 베스트셀러즈 | 와니의 책 |
1996년 | 승리하면 관군 성공의 법칙 | 베스트셀러즈 | |
1999년 | 후지타 덴어록 상승 경영의 카리스마 | 소니 매거진즈 | 소니 매거진즈 비즈니스북 편집부 편집 |
2004년 | 기회를 돈으로 바꾸는 방법 후지타 덴의 금전학 | 베스트셀러즈 | 와니 문고 |
1995년 | 사장의 조건 - 시부사와 에이이치 vs 이와사키 야타로 (후지타 덴 vs 사카이야 타이치) | 카도카와 쇼텐 | NHK 취재반 저, 1996년 재출간 |
2001년 | 후지타 덴 사장이 다카하시 토루 교수에게 IT 특별 강의를 받다 | 베스트셀러즈 | 다카하시 토루 저 |
6. 수상 경력
연도 | 수상 내역 |
---|---|
1986년 | 히로히토 천황으로부터 청수포장 수여[20] |
1986년 | 람수포장 수여[20] |
1999년 | 제24회 경제계 대상 감투상[20] |
1999년 ~ 현재 | 《포브스》 선정 세계 부자[20] |
2001년 | 《비즈니스 위크》 선정 아시아의 스타 매니저[20] |
7. 기타
한국계 일본인 기업가 손정의가 고등학생 때 만나달라는 요청을 수락했고, 이후 후지타 덴에게 컴퓨터 관련 사업을 해보라고 조언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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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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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t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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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Libel trial hears tall story of Big Ma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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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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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nds in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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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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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 Fujita, Japan's Mr. Joint-Ven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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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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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rger king leaves US$46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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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ポストセブンなぜ今、藤田田なのか マック創業者の「金儲け書」復刊の訳 2019.04.1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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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日、阪神、ヤクルトなどに浮上「幻の身売りプラン」 “意外な企業”も買収に動い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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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日新聞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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藤田田 日本をデフレにしたハンバーガー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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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リスマ10人を解剖する 佐野眞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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桜のように静かに散りたい 退任のマック藤田氏が心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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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NEWS
2012-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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藤田氏の遺産491億円 過去6番目、マック創業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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藤田田とは何者か?連続インタビュー第一回〈松本善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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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経済界大賞 過去の一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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経済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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