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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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흥료국은 1029년 발해 유민 출신인 대연림이 요나라의 통치에 반발하여 건국한 국가이다. 대연림은 요나라 동경요양부에서 황제를 칭하고 천경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여진족이 합류하여 세력이 커졌지만, 고려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내부 반발과 배신으로 1030년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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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료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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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현지 이름 | |
통용되는 긴 이름 | 싱랴오 |
일반 명칭 | 싱랴오 |
정부 형태 | 군주제 |
시작 연도 | 1029년 |
종료 연도 | 1030년 |
성립 사건 | 건국 |
종료 사건 | 멸망 |
수도 | 랴오양 |
정치 | |
지도자 칭호 | 황제 |
지도자 | 대연림 (Dae Yeon-rim) |
지도자 재임 기간 | 1029년 – 1030년 |
역사 | |
이후 | |
통계 | |
기타 정보 | |
현재 국가 | 중국 |
2. 역사
1029년 대연림이 요(遼)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에서 흥료국[2]을 건국하고 황제를 칭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연호를 천경(天慶)이라 하였고, 남북의 여진족이 합류하여 세력이 커졌지만, 고려는 흥료국의 국서를 거부했다.[2] 왕도평(王道平)과 황편(黃翩)이 불응하고, 하행미(夏行美)가 내부(來附)하지 않아 요해처가 끊어지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1030년 요는 소효목(蕭孝穆)을 도통(都統)으로, 소필적(蕭匹敵)을 부도통으로, 소포노(蕭蒲奴)를 도감(都監)으로 삼아 흥료국을 공격했다. 대연림은 성문을 굳게 잠그고 대비하였으나, 양상세(楊詳世)의 배신으로 성문이 열려 멸망했다.[2]
2. 1. 건국 배경
발해 유민 출신으로 요(遼)의 동경 사리군상온(東京 舍利軍詳穩)이었던 대연림은 1029년 요나라의 통치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그는 요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에서 흥료국[2]을 건국하고 황제를 칭했으며, 연호를 천경(天慶)이라 하였다.같은 해, 후발해국이 멸망한 지(1018년) 불과 11년 후, 발해 태조 대조영의 7세손이자 요나라 동경요양부의 사리군 장군이었던 대연림은 백성들의 고통을 틈타 요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동경요양부에서 독립하여 만주 땅에 "흥료국"을 건국하였다.
당시 동경요양부는 10세기에 거란족에 의해 발해인들이 집단 거주하던 곳이었다. 이곳은 문화적으로도 번성하여, 만주 지역에서 여러 발해 계열 국가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시기부터 몽골 시대까지 그 번영이 지속되었으며, 도시화된 발해인들의 대규모 중심지였다.
대연림은 연호를 천경이라 하고, 스스로를 천흥황제라 칭했다. 이 반란 세력에는 여진족도 합류하여 규모가 확대되었다.
2. 2. 건국 과정
1029년, 후발해국이 멸망(1018년)한 지 불과 11년 후, 발해 태조 대조영의 7세손이자 요(遼) 동경요양부의 사리군 장군 대연림이 백성들의 고통을 틈타 요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2] 당시 동경요양부는 10세기에 거란족에 의해 발해인들이 집단 거주하던 곳으로, 문화적으로도 번성하여 만주 지역에서 여러 발해 계열 국가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때부터 몽골 시대까지 도시화된 발해인들의 대규모 중심지였다.대연림은 스스로를 천흥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천경(天慶)이라 하였다.[2] 그는 요의 통치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군사를 일으켜 동경요양부에서 흥료국을 건국했다.[2] 남북의 여진도 대연림에게 합류하여 세력이 커졌다.[2]
고려는 흥료국의 군사 지원 요청을 거절했고, 요나라에 복무하던 다른 발해인들도 흥료국 합류를 거부했다.[1] 소수의 여진족만이 대연림의 정권에 합류했다.
2. 3. 대외 관계
1029년 대연림이 요(遼)에 대항하여 흥료국을 건국한 후, 남북의 여진족이 이에 합류하여 세력이 커졌다. 그러나 고려는 흥료국의 국서를 거부하였고, 내부적으로도 반대 세력이 존재하여 어려움을 겪었다.[2]대연림은 고려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냈으나, 고려는 요나라에 맞서 약간의 군대를 보냈을 뿐, 추가 지원 요청은 거절하였다. 다른 발해인들 역시 흥료국 합류를 거부했으며, 소수의 여진족만이 대연림 정권에 합류하였다. 많은 이들이 흥료국의 약점을 깨닫고 멸망 전에 고려로 도망쳤다.[1]
1030년, 흥료국과 그 동맹국인 여진족, 고려는 요나라의 협공에 패배하였다.[1]
2. 4. 멸망
1030년, 흥료국은 요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요는 남경유수(南京留守) 연왕(燕王) 소효목을 도통(都統)으로, 국구상온(國舅詳穩) 소필적을 부도통으로, 해륙부대왕(奚六部大王) 소포노를 도감(都監)으로 삼아 대연림을 공격했다.[2] 대연림은 성문을 굳게 잠그고 대비하였으나, 장군 양상세(楊詳世)가 배신하여 성문을 열면서 멸망했다.[1]흥료국 멸망 후, 옛 발해 귀족들은 요의 수도 근처로 강제 이주당했고, 일부는 고려로 도망쳤다.
3. 역대 황제와 연호
참조
[1]
논문
The Ecological, Economic, And Ethno-Cultural Frontiers Of North China: State Formation In The Eastern Intermediate Zone—a History Of The Qai 奚
https://repository.u[...]
University of Pennsylvania
[2]
문서
흥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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