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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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발해는 926년 발해가 거란에 멸망한 후, 발해 유민들이 세운 여러 부흥 세력 중 하나이다. 927년 대광현이 고려로 망명한 후, 대씨 세력이 압록강 유역에서 건국했으며, 일본 및 후당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935년 열만화의 쿠데타로 정안국이 건국되면서 멸망했다. 고려는 후발해를 말갈로 인식했으며, 삼국유사에는 후발해를 포함한 주변 국가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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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국은 938년 발해 유민 열만화가 건국한 국가이며, 요나라에 대항하여 송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공동 공격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986년 요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 옛 잔존국 - 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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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란국은 926년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 옛 발해 지역에 세운 나라로, 야율배가 왕으로 임명되었으나 요나라의 영향력 아래 놓이며 축소되었고, 발해를 계승하여 일본과의 외교를 유지하려 했다. - 정안국 - 흥료국
흥료국은 1029년 발해 유민 대연림이 요나라에 반발하여 동경요양부에서 건국한 나라로, 대연림은 황제를 칭하고 천경이라 칭했으나 고려와 요나라의 외교 관계 속에서 고립되고 양상세의 배신으로 1년 만에 요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후발해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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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현지 이름 | 중국어: 한국어: |
일반 명칭 | 후발해 |
존속 기간 | 927년 ~ 935년 |
정치 체제 | 군주제 |
공용어 | 발해어 |
종교 | 발해 불교, 발해 유교, 발해 도교, 발해 샤머니즘 |
수도 | 미상 |
역사 | |
성립 | 927년 |
멸망 | 935년 |
이전 | 발해 |
이후 | 정안국 |
지도자 | |
국왕 | 대씨 |
현재 국가 |
2. 역사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후, 발해 유민들은 요나라에 저항하며 부흥 운동을 펼쳤다. 발해 멸망 직후, 발해 영토는 요나라에 병합되거나 동란국에 편입되었지만, 일부는 고구려 유민들이 독립을 유지했다.[8]
927년부터 거란은 왕족을 처형하기 시작했으나, 태자 대광현 등 일부는 생존했다. 대광현은 발해 유민들을 이끌고 고려로 피신했고, 고려 태조는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8] 이후 대광현은 서쪽 압록강 저항 세력을 규합하여 927년 홀한성에 "후발해"를 건국했다.[8] 그러나 935년 장군 열만화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안국을 건국하면서 후발해는 멸망했다.[8]
후발해에 대한 연구는 동란국, 발해 유민, 각지의 반란, 『송사』 기록 등 다양한 사료를 종합하여 이루어지지만, 사료 해석에 따라 연구자 간의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8]
과거에는 발해 멸망 후 발해 사절이 중원 왕조에 파견된 것을 근거로 후발해와 같은 계승 국가가 건국되었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929년 일본에 파견된 사절 배휴는 발해 사신이 아닌 동란국 사신으로 밝혀졌고, 야율우지 묘지 발굴을 통해 이들 사절이 동란국 사절이라는 가설이 주류가 되었다.[8]
2. 1. 건국 배경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발해 왕 대인선은 포로가 되었다.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발해 영토에 동란국을 설치하여 장자 야율배를 동란왕으로 삼고 '인황왕'이라 칭했다. 많은 발해인들은 상경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당나라풍 문화를 유지했지만, 상당수는 고려로 망명했다.[8]거란은 대인선을 통해 군사들을 이끌고 요양으로 개선했지만, 귀국 길에 야율아보기가 죽었고, 인황왕 야율배는 야율아보기의 유해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에 발해 부흥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은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의 동생(이름 미상)이었고, 옛 수도를 포함한 북방의 영토를 세력권으로 하였다.[8]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 세력을 평정하지 못한 거란은 928년 사민을 통해 동란국의 중심을 상경용천부 천복성에서 요양으로 옮겼다. 이에 따라 발해의 옛 지역은 발해의 태자인 대광현에 의해 다스려지게 되었다.[8]
발해 멸망 후, 그 영토의 일부는 거란이 이끄는 요나라에 병합되었고, 일부는 요나라의 속국인 동란국에 편입되었으며, 나머지는 독립을 유지한 고구려인들이 거주했다. 발해의 피정복민들은 즉시 요나라에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8]
927년부터 거란은 새로운 통치자가 즉위할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왕족들을 모두 색출하여 처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왕족 중 몇몇은 살아남았다. 그중에는 태자 대광현도 있었다. 태자는 발해 난민들(대부분 옛 고구려 사람들)을 이끌고 남쪽 이웃인 고려로 피신했고, 새롭게 일어선 고려 태조는 그들을 관대하게 받아들였다.[8]
그 후 대씨는 서쪽 압록강 저항 세력을 규합하여 927년 홀한 성에 "후발해"를 건국했다. 그러나 장군 열만화가 쿠데타를 일으켜 935년에 정안국을 세웠다.[8]
2. 2. 후발해 건국과 발전
926년 거란(요나라)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발해 왕 대인선이 포로가 된 이후, 각지에서 발해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9][10] 대인선의 동생(이름 미상)은 상경용천부(홀한성)에서 대광현을 몰아내고 후발해를 건국하였다.[9][10]후발해는 929년 일본에 사신을 보내고, 후당에 고성사(高成詞)와 성문각(成文角)을 보내 외교 관계를 맺었다.[11] 931년과 935년에도 후당에 사신을 보냈다.[13][15]
930년에는 동란국 왕 야율배가 후당으로 망명하면서 요나라가 동란국을 폐지하고 옛 발해 영토를 직접 통치하게 되었다. 같은 해, 대광현은 압록부를 중심으로 독립하여 남해부를 회복하기도 하였다.[12]
934년, 후발해 왕(대인선의 동생)은 남해부 열씨(烈氏, 옛 발해 귀족)와 협력하여 대광현을 몰아냈다.[14] 기반이 와해된 대광현은 백성들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했다.[14]
2. 3. 후발해의 쇠퇴와 멸망
928년 거란이 동란국을 요양으로 옮기면서, 대인선의 동생(이름 미상)이 홀한성(상경용천부)에서 대광현을 몰아내고 발해 부흥을 선언하며 후발해를 건국하였다.[9][10] 930년 동란왕 야율배가 후당으로 망명하자, 요나라는 동란국을 폐지하고 옛 발해 영토를 직접 통치하였다.[12]934년 후발해 왕(대인선의 동생)은 남해부의 열씨(烈氏, 옛 발해 귀족)와 협력하여 대광현을 축출하였다.[14] 기반을 잃은 대광현은 백성들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하였고, 진림 등 160여 명이 그 뒤를 따랐다.[14]
936년 대광현을 몰아낸 열만화는 938년경 정안국을 건국하였다.
3. 후발해 주요 연표
연도 | 사건 |
---|---|
926년 | 거란(요나라)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발해 왕 대인선은 포로가 되었다. 거란은 옛 발해 영토에 동단국을 설치하고 황태자 야율돌욕을 국왕으로 임명했다. 각지에서 발해 유민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
927년 | 거란이 왕족들을 색출하여 처형하기 시작했으나,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일부 왕족들은 살아남았다. 대광현은 발해 유민들을 이끌고 고려로 피신했고, 고려 태조는 이들을 받아들였다. 대씨는 서쪽 압록강 저항 세력을 규합하여 홀한 성에 "후발해"를 건국했다. |
928년 | 거란(요)은 동단국을 요양으로 옮기고, 발해 유민의 이주를 실시했다. 많은 발해인들이 요양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당나라 풍의 문화를 유지했다. 일부 발해인들은 고려로 이주했다. 동단국의 후퇴와 함께 왕제 대모(재위 928년 ~ ?)가 홀한성(=용천부)에 들어가 발해국의 부흥을 선언(후발해(부흥))했고, 대광현도 압록부를 중심으로 독립하여 세력을 남해부(함경도)까지 회복했다. |
929년 | 발해국은 일본에 배휴를, 후당에 고성사·성문각을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일본 측 사료에는 배휴가 발해 사신이 아닌 동단국 사신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 측에 의해 거부되었다. |
930년 | 본국으로 귀국 중이던 야율배가 정쟁의 결과 후당으로 망명했고, 거란(요)은 동단국을 폐지하고 옛 발해 영토를 일시 포기했다(후발해(부흥)에 의한 동단국 병합). 같은 해, 대광현은 왕제 대모로부터 독립했다. |
931년 | 발해국이 후당으로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1] |
934년 | 왕제 대모는 남해부의 열씨(옛 발해의 대신 일족)와 협력하여 대광현 세력을 몰아냈다. 대광현 정권은 멸망하고, 부민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했으며, 진림 등 160여 명도 뒤를 따랐다. |
935년 | 발해국(=후발해)이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1] 열만화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안국(딩안)을 세웠다. |
936년 | 열만화가 남해부에서 압록부로 이동했다. |
937년 | 백두산의 분화로 후발해국에 타격을 입혔다. |
938년 | 열만화 (재위 936년경 ~ 976년〜979년경), 후발해로부터 독립하여 정안국을 건국했다. |
946년 ~ 947년 | 백두산의 분화 (2번째)로 후발해국에 타격을 입혔다. |
954년경 | 발해의 추장 최오사 등 30명이 후주에 귀순했다. 이후 발해라는 명칭은 사료에서 사라지고, 정안국에 의한 정권 계승이 이루어졌다. |
4. 고려인의 후발해 인식
삼국유사 권3 '황룡사 9층탑 조'에는 신라 선덕여왕 14년(645년)에 건립된 황룡사 9층탑에 대한 기록이 있다. 고려 고종 25년(1238년)에 소실된 이 탑에는 각 층마다 주변 국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당시 고려인의 국제 정세 인식을 반영한다.[4]
안홍의 『동도성립기』와 『삼국유사』 권1·기이 제1에 나타난 9개 국가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 목록에는 7세기 중엽 신라의 주요 적국이었던 고구려와 백제는 보이지 않고, 10세기 중국 사료에 처음 등장하는 여진이 나타난다. 3층의 "오월"은 오대에 건국된 정권으로, 10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9개 국가의 이름이 10세기 초 고려인이 인식한 주변 정권 및 민족을 나타낸다는 것을 보여준다.[5]
요사의 기록에 따르면, 9층의 "수말"은 발해 멸망 후 동단국 밖에서 자립한 세력으로 추정된다.[5] 6층의 "말갈"은 요사의 기록처럼 발해 지배하에서 자립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삼국유사에서 발해를 "말갈"이라고 칭하는 점을 고려하면, 여기서의 말갈은 후발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즉, 고려인들은 후발해를 말갈로 인식하고 있었다.[5]
참조
[1]
논문
後渤海の建國 (昭和十八年十月十二日報告)
https://www.jstage.j[...]
九州帝國大學
1943
[2]
웹사이트
История государства Бохай (по материалам исследований южнокорейских учёных)
http://ihaefe.org/fi[...]
[3]
논문
Bohai/Parhae Identity and the Coherence of Dan gur under the Kitan/Liao Empire
2016
[4]
뉴스
Original meaning of Dan gur in Khitai scripts: with a discussion of state name of the Dong Dan Guo
http://www.ritsumei.[...]
立命館大学人文学会
2008-12
[5]
뉴스
Original meaning of Dan gur in Khitai scripts: with a discussion of state name of the Dong Dan Guo
http://www.ritsumei.[...]
立命館大学人文学会
2008-12
[6]
문서
후발해 건국자는 대인선의 동생으로 보인다.
[7]
문서
건국 시기가 [[927년]] ~ [[929년]] 경이라고 추정하지만 후발해의 건국을 명확하게 증명하는 문헌이 없어 분명하지 않다. [[1990년]]대 이후에 야율우지(耶律羽之) 묘지 등의 석각 사료가 발견됨으로써 후발해가 건국되었다고 보는 연구자는 많지 않다.
[8]
문서
이 때 거란군이 궤멸당했다고 하는데, 후발해 측이 먼저 공격했다고 보는 일설이 있다.
[9]
문서
대광현이 926년에 고려에 귀부했다면 대광현축출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10]
문서
후발해에 관한 연구는 [[동란국]]에 관한 발해인 사료나, 각지에 이주를 당한 발해인에 관한 사료, 각지에 반란이 발생한 사료, 송사(宋史)에 보이는 정안국에 관한 발해인 사료 등이 있는데 연구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11]
문서
발해 멸망 이후에도 발해의 사절이 중국에 파견되고 있었으므로 후발해와 같은 부흥국이 건국된 것이라 상정되어 왔지만, [[야율우지]]의 묘지 등이 발견됨에 따라 이 사절은 [[동란국]]의 사자이며, 사절의 주체가 후발해라고 보는 추정은 성립되기 어렵다고 보는 설이 있다.
[12]
문서
대광현이 926년에 고려에 귀부했다면 대광현독립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13]
문서
동란국의 사절로 보기도 한다.
[14]
문서
대광현 926년 고려 귀부설과 대립된다.
[15]
문서
동란국의 사절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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