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포 레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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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포 레기우스는 현재 알제리에 위치했던 고대 도시로, 페니키아인들이 기원전 12세기경에 건설했다. 로마 시대에는 로마 아프리카의 주요 도시로 발전했으며,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주교로 활동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430년 반달족의 침략으로 포위되었고, 이후 반달 왕국, 동로마 제국을 거쳐 이슬람 세력에 의해 함락되었다. 11세기에 베르베르족에 의해 도시가 재건되었으며, 이후 스페인과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가 1832년 프랑스에 의해 보네(Bône)로 개명되었다. 히포는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중심지였으며, 여러 차례의 교회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또한, 가톨릭 명목 교구로 부활했으나 1867년 콘스탄티누스 교구에 통합되어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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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 레기우스 | |
---|---|
지도 정보 | |
![]() | |
기본 정보 | |
이름 | 히포 레기우스 |
다른 이름 | 히포네 |
위치 | 알제리 |
지역 | 안나바 주 |
2. 역사
히포는 𐤏𐤐𐤅𐤍|ʿpwnxpu의 라틴어화이며,[1] "항구"를 의미하는 단어 ''ûbôn''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도시는 기원전 12세기경 티레 출신의 페니키아인에 의해 처음 정착되었다.
이후 로마의 콜로니아가 되어 번성하여 로마 아프리카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534년에는 동로마 제국에 정복되었고 698년 무슬림에게 함락될 때까지 로마의 통치를 받았다. 아랍인들은 8세기에 이 도시를 재건했다.
11세기에 베르베르족 지리드가 히포 레기우스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 '벨레브 엘 아납'이라는 도시를 세웠다. 이 도시는 16세기에 스페인에 의해 잠시 점령되었다가, 이후 루이 14세 통치 시기에는 프랑스에 의해 점령되었다. 1832년, 프랑스는 이 도시를 다시 점령하고 '보네' 또는 '보나'로 개칭하였으며, 알제리 콘스탄틴(데파르트망)의 행정 중심지 중 하나로 삼았다.
2. 1. 페니키아 시대
히포는 𐤏𐤐𐤅𐤍|ʿpwnxpu으로 음역되며,[1], "항구"를 뜻하는 ''ûbôn''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2세기경 티레 출신 페니키아인들이 이 도시를 처음 건설하였다. 로마인들은 튀니지의 현대 비제르트인 히포 디아리투스와 구별하기 위해, 이곳을 누미디아 왕들의 거주지 중 하나라는 이유로 히포 레기우스("왕실의 히포")라고 불렀다. 근처의 강은 라틴어로 Ubus, 동쪽의 만은 히포 만(Hipponensis Sinusla)으로 알려졌다.2. 2. 로마 시대
히포는 우부스 강 하구 근처의 해양 도시로, 로마의 콜로니아가 되어 번성하여 로마 아프리카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이곳은 말년에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교구로 사용되었다. 430년, 반달족은 북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하여 히포 레기우스 성을 포위했다. 그 안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사제들은 침략자들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는데, 도시가 함락되면 기독교 인구의 대부분이 아리우스 신앙으로 죽거나 개종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430년 8월 28일, 포위 공격이 시작된 지 3개월 만에 75세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굶주림이나 스트레스로 사망했을 것이다. 14개월 후, 굶주림과 질병이 도시 주민과 도시 성벽 밖의 반달족을 휩쓸었다. 도시는 반달족에게 함락되었고 가이세리크 왕은 439년 카르타고 점령 때까지 이곳을 반달 왕국의 첫 번째 수도로 삼았다.534년에는 동로마 제국에 정복되었고 698년 무슬림에게 함락될 때까지 로마의 통치를 받았다.
2. 3. 반달족 시대
430년, 반달족이 북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하여 히포 레기우스를 포위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사제들은 침략자들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는데, 도시가 함락되면 기독교 인구 대다수가 아리우스 신앙으로 죽거나 개종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포위 공격이 시작된 지 3개월 만인 430년 8월 28일, 75세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도시 밖의 밀밭이 경작되지 않고 수확되지 않아 굶주림이나 스트레스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개월 후, 굶주림과 질병이 도시 주민과 도시 성벽 밖의 반달족을 휩쓸었다. 도시는 반달족에게 함락되었고 가이세리크 왕은 439년 카르타고 점령 때까지 이곳을 반달 왕국의 첫 수도로 삼았다.2. 4.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 시대
534년, 동로마 제국은 히포 레기우스를 정복하였고, 698년 무슬림에게 함락될 때까지 로마의 통치를 받았다. 아랍인들은 8세기에 이 도시를 재건했다. 이후의 역사는 현대(아랍어 및 식민지) 이름으로 취급된다.2. 5. 베르베르족, 스페인, 프랑스 시대
11세기에 베르베르족 지리드가 히포 레기우스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 '벨레브 엘 아납'이라는 도시를 세웠다. 이 도시는 16세기에 스페인에 의해 잠시 점령되었다가, 이후 루이 14세 통치 시기에는 프랑스에 의해 점령되었다. 1832년, 프랑스는 이 도시를 다시 점령하고 '보네' 또는 '보나'로 개칭하였으며, 알제리 콘스탄틴(데파르트망)의 행정 중심지 중 하나로 삼았다. 당시 이 도시의 인구는 37,000명이었으며, 이 중 10,800명은 원주민(9,400명의 무슬림과 1,400명의 귀화 유대인)이었고, 15,700명은 프랑스인, 10,500명은 이탈리아인을 포함한 외국인이었다.2. 6. 프랑스 식민지 시대
1832년 프랑스는 히포 레기우스를 다시 점령하고 그 이름을 보네(Bône) 또는 보나(Bona)로 바꾸었다. 이 도시는 알제리의 콘스탄틴(데파르트망)의 정부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1] 당시 보네의 인구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1]구분 | 인구 |
---|---|
원주민 (무슬림, 귀화 유대인) | 10,800명 |
프랑스인 | 15,700명 |
외국인 (이탈리아인 포함) | 10,500명 |
합계 | 37,000명 |
히포는 로마 속주 누미디아의 여러 부속 교구 중 하나였으며, 콘스탄틴 주교 관할 구역의 일부였다. 이곳에는 고대 유적, 가난한 자매회가 지은 병원,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헌정된 대성당이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는 주교 수도원 외에도 최소 세 곳의 수도원이 교구 내에 있었다.
3. 기독교 역사
이 교구는 250년경에 설립되었다. 히포 레기우스의 주교는 다음 여섯 명만 알려져 있다.
이곳은 450년경에 폐지되었다.
3. 1. 초기 기독교와 주교들
히포 레기우스는 고대 주교구였으며, 로마 속주 누미디아의 여러 부속 교구 중 하나이자 콘스탄틴 주교 관할 구역의 일부였다.[1] 이곳에는 고대 유적, 가난한 자매회가 지은 병원,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헌정된 대성당이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는 주교 수도원 외에도 최소 세 곳의 수도원이 교구 내에 있었다.
이 교구는 250년경에 설립되었다. 히포 레기우스의 주교는 다음 여섯 명만 알려져 있다.
이곳은 450년경에 폐지되었다.
3. 2. 히포 공의회
히포에서는 393년, 394년, 426년에 세 차례의 교회 회의가 열렸다.[1] 397년(6월과 9월 두 차례), 401년에도 아우렐리우스 주교의 주도로 더 많은 시노드가 열렸다.
고대 북아프리카 교회의 시노드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카르타고에서 열렸다. 키프리아누스의 편지를 통해, 아프리카 주교들은 박해 시기를 제외하고 적어도 1년에 한 번, 봄에 모였으며 때로는 가을에도 모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키프리아누스가 재임한 10년(249-258) 동안 6~7번의 시노드가 열렸고, 아우렐리우스(391-429) 시대에는 15번 이상 열렸다. 393년 히포 시노드는 매년 총회를 열도록 명령했지만, 이는 주교들에게 부담이 되었고, 카르타고 시노드(407)에서는 아프리카 전체의 필요를 위해 필요할 때만 총회를 열고 가장 편리한 장소에서 열기로 결정했다. 모든 지역의 주교들이 총회에 참석할 필요는 없었다. 393년 히포 시노드에서는 각 교구에서 "고위 성직자"를 파견하도록 했다.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는 해당 지역 주교들의 가난으로 인해 한 명만 파견하도록 했다. 393년 히포 시노드와 397년 카르타고 시노드에서 성서의 책 목록이 작성되었으며, 이 책들은 현재까지도 가톨릭 정경의 구성 요소로 여겨진다.
3. 3. 명목 교구
1400년 히포 교구는 가톨릭 라틴 명목 교구로 명목상 부활했으며, (최하위) 주교급에 해당하며 기록된 담당자는 없다.[1]
1867년 9월 23일에 히포 교구는 콘스탄티누스 로마 가톨릭 교구와 통합되면서 소멸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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