힝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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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힝니야는 훌룬 구룬의 군주 나치불루의 6세손으로, 만타이 재위 시기 울라 내부의 친여허파 수장으로 건주여진과의 접근을 반대했다. 만타이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수장 자리를 얻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여허와 코르친부로 도주했다. 그의 아들들은 청나라 초기에 아부타이 관할에 편입되었으며, 힝니야는 역모 혐의로 족보에서 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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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힝니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관직 | 울라(Ula, 烏拉) 사르다성(薩爾達城) 성주, 버일러(貝勒) |
| 사망지 | 몽골 코르친부(科爾沁部) |
| 이름 | |
| 한국어 | 힝니야(Hingniya, 興尼牙, 興尼雅) |
2. 생애
힝니야는 Hūlun gurun (扈倫國) 군주 Nacibulu (納齊布祿)의 6세손이다. 그의 증조부 구선상구루(固森桑古鲁)는 명에 조공하고 구한하위도독(嘔罕河衛都督)에 임명되었으며, 손자 Buyan (布顏)을 도와 Ula (烏拉) 건국에 공을 세워 사르다성(薩爾達城) 성주가 되었다.[3]
힝니야는 Mantai (滿泰)가 울라의 군주로 있을 때 사르다성 성주 자리를 세습했다. 당시 울라는 구러산 전투(古勒山之戰)에서 건주여진(建州女眞)에게 패배한 후 건주여진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했지만, Yehe (葉赫)와 인척 관계였던 힝니야는 이에 반대하며 친여허 노선을 추구했다.[4][5] 그는 건주여진에 포로로 잡혀 있던 만타이의 동생 Bujantai (布占泰)를 잠재적 경쟁자로 보고 제거하려 했으며, 울라의 수장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 했다.[5][6]
1596년, 만타이가 변방 순시 중 피살되자 힝니야는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다.[5][6] 그는 만타이 사후 권력을 장악하려 했으나, 울라의 전통적인 후계자 결정 방식과[7] 건주여진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건주여진은 포로였던 부잔타이를 울라로 돌려보내 즉위시켰고, 부잔타이는 숙부 Bokdo (博克多)의 지지까지 얻었다.[5] 결국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힝니야는 여허로 도주했다가 다시 코르친부로 피신했다.[5]
이후 힝니야의 아들들인 우나부(烏納布), 눅타카(弩克他喀), 커타카(克他喀)는 청(淸) 초기에 소환되어 만타이의 아들 Abutai (阿布泰) 휘하의 정백기(正白旗) 좌령(佐領)에 편입되었다.[8][9] 그러나 나라씨(納喇氏)의 조훈(祖訓)에 따라 역모를 꾀한 힝니야와 그의 후손들은 족보에서 제외되었다.[10]
2. 1. 가계와 초기 활동
힝니야는 훌룬 구룬(扈倫國)의 군주 나치불루(納齊布祿)의 6대손이다. 그의 증조부인 구선상구루(固森桑古鲁)는 명에 중서사인(中書舍人) 신분으로 조공하였고, 이후 구한하위도독(嘔罕河衛都督)에 임명되었다. 구선상구루는 손자 부얀(布顏)을 도와 울라(烏拉) 건국에 공을 세웠으며, 그 공으로 사르다성(薩爾達城)의 성주가 되었다.[3]힝니야는 만타이(滿泰)가 울라의 군주로 있을 때 사르다성 성주 자리를 세습했다. 당시 울라는 구러산 전투에서 건주여진(建州女眞)에게 크게 패배하였고, 만타이의 동생인 부잔타이(布占泰)는 건주여진에 포로로 잡혀갔다. 이 사건 이후 울라는 기존의 외교 노선을 변경하여 여허(葉赫)와 거리를 두고 건주여진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 했다.[4]
그러나 힝니야는 여허의 수장과 인척 관계였기 때문에, 울라 내부에서 친(親)여허파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울라가 건주여진과 가까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힝니야는 만타이에게 여러 차례 건주여진을 공격하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그의 실제 속내는 건주여진의 힘을 빌려 포로로 잡혀 있는 부잔타이를 제거하고, 이를 통해 울라와 여허의 동맹을 다시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만타이는 힝니야의 건의를 모두 거절했다.[5] 또한 힝니야는 울라의 수장 자리를 물려받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기에, 능력이 뛰어난 부잔타이를 경계했다. 그는 만약 부잔타이가 울라로 돌아온다면 자신의 계획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힝니야는 자신의 기반인 사르다성을 떠나 부하들을 이끌고 울라성(烏拉城)으로 들어가 주둔하며 정치 권력의 중심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6]
1596년, 만타이가 변방을 순시하던 중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힝니야가 이 암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었다.[5][6] 사건 이후 힝니야는 울라성으로 돌아와 수장의 권력을 차지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울라의 조훈(祖訓)에 따르면, 전임 수장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을 경우 부족 회의를 통해 후계자를 결정해야 했다.[7] 게다가 만타이 피살 소식을 들은 건주여진이 군대를 보내 부잔타이를 울라로 돌려보내 즉위시키려 했고, 부잔타이는 숙부 복도(博克多)의 지지까지 얻어냈다. 결국 힝니야의 수장 계승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여허로 도주했다.[5] 이후 다시 코르친부로 도주했다. 그의 아들들인 우나부(烏納布), 눅타카(弩克他喀), 커타카(克他喀)는 청(淸) 초기에서야 소환되어, 만타이의 셋째 아들인 정백기(正白旗) 소속 아부타이(阿布泰)의 관할 아래 좌령(佐領)에 편입되었다.[8][9] 나라씨(納喇氏)의 조훈에는 '종족으로서 역모를 꾀한 자는 족보에서 내보낸다(宗族謀逆出譜)'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힝니야 본인은 물론 그의 후예들도 족보에 오르지 못했다.[10]
2. 2. 만타이 암살 사건과 권력 투쟁
만타이 재위 시기, 울라는 구러산 전투에서 건주여진에게 크게 패배하였고, 이 전투에서 만타이의 동생 부잔타이가 포로로 잡히는 등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 사건 이후 울라는 기존의 동맹이었던 여허와 거리를 두고 건주여진과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다.[4]그러나 힝니야는 여허 수장과 인척 관계였기에 울라 내부의 친여허파 핵심 인물이었으며, 울라가 건주여진과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만타이에게 여러 차례 건주여진 공격을 건의했는데, 이는 건주여진의 힘을 빌려 포로로 잡힌 부잔타이를 제거하고 여허와의 동맹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였으나, 만타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5] 또한 힝니야는 개인적으로 수장 자리를 노리고 있었으며, 능력이 뛰어난 부잔타이가 돌아올 경우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했다. 그는 자신의 근거지인 사르다성을 떠나 울라성으로 거처를 옮겨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려 했다.[6]
1596년, 만타이가 변방을 순시하던 중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힝니야가 이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었다.[5][6] 만타이 사후, 힝니야는 즉시 수장의 권력을 장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울라의 조훈(祖训) 규정상, 전임 수장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을 경우 부족 회의를 통해 후계자를 결정해야 했다.[7] 결정적으로 건주여진이 만타이 피살 소식을 듣고 군대를 동원하여 포로였던 부잔타이를 울라로 돌려보내 즉위시키려 했다. 부잔타이는 숙부인 복도(Bokdo, 博克多)의 지지까지 확보하면서[5] 힝니야의 권력 장악 시도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결국 힝니야는 여허로 도주했다가[5] 이후 코르친부로 다시 피신했다. 그의 아들들인 우나부(烏納布), 눅타카(弩克他喀), 커타카(克他喀)는 청 초기에 소환되어 만타이의 셋째 아들 아부타이(Abutai, 阿布泰)가 관리하는 정백기(正白旗) 좌령(佐領)에 편입되었다.[8][9] 나라씨(納喇氏)의 조훈(祖訓)에는 '종족의 일원이 역모를 꾀하면 족보에서 제외한다(宗族謀逆出譜)'는 규정이 있어, 힝니야 본인과 그의 후손들은 족보에 오르지 못했다.[10]
2. 3. 도주와 이후 행적
1596년, 만타이가 변방 순시 중 피살되자 힝니야는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다.[5][6] 만타이 사후 힝니야는 도성으로 돌아가 수장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으나, 울라의 전통 규정상 전임 수장이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으면 부족 회의를 통해 후계자를 결정해야 했다.[7] 게다가 건주여진이 만타이 피살 소식을 듣고 부잔타이를 울라로 돌려보내 즉위시키려 했고, 부잔타이가 숙부 복도(Bokdo, 博克多)의 지지까지 얻으면서 힝니야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힝니야는 여허로 도주하였고,[5] 이후 다시 코르친부로 도망쳤다.힝니야의 아들들은 청(淸) 초기에 소환되어 만타이의 삼남이자 정백기(正白旗) 소속인 아부타이(Abutai, 阿布泰)가 관할하는 좌령(佐領)에 편입되었다.[8][9]
| 아들 이름 | 한자 표기 | 비고 |
|---|---|---|
| 우나부 | 烏納布 | 청 초기에 소환되어 아부타이 좌령에 편입 |
| 눅타카 | 弩克他喀 | 청 초기에 소환되어 아부타이 좌령에 편입 |
| 커타카 | 克他喀 | 청 초기에 소환되어 아부타이 좌령에 편입 |
힝니야는 부족 간의 이권 다툼과 권력 암투의 희생양으로 평가된다.
[1]
서적
中华书局编
나라씨(納喇氏) 족보에는 '종족 중 역모를 꾀한 자는 족보에서 내보낸다(宗族謀逆出譜)'는 규정이 있었기에, 힝니야 본인은 물론 그의 후예들도 족보에 오르지 못했다.[10]
3. 평가 및 의의
참조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政协永吉县文史委员会
[9]
서적
[10]
서적
政协永吉县文史委员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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