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룬 구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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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훌룬 구룬은 15세기부터 17세기 초까지 쑹화강 유역에 존재했던 여진 부족 연맹체이다. 나치불루를 시조로 하며, 명나라로부터 관직을 제수받아 세력을 확장했다. 1561년 부얀이 울라 여러 부락을 통합하고 울라성을 축조하며 버일러를 자칭했다. 16세기 후반 누르하치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훌룬 구룬은 건주여진에 흡수되었으며, 하다는 1599년, 호이파는 1607년, 울라는 1613년, 여허는 1619년에 멸망했다. 훌룬 구룬은 조선과 외교 관계를 맺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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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룬 구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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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룬 구룬 | |
![]() | |
만주어 이름 | ᡥᡡᠯᡠᠨ ᡤᡠᡵᡠᠨᡳ |
만주어 로마자 표기 | Hūlun Gurun |
위치 | 중국 내몽골 자치구 |
행정 구역 | |
지급시 | 후룬베이얼 시 |
기 | 시린궈러 맹 둥우주무친 기 싱안 맹 후허트 기 |
아이막 (해체) | 동내몽골 자치구 |
역사 | |
설치 | 1692년 |
폐지 | 1949년 |
인구 | |
1940년 | 1,541,278명 |
2. 역사
훌룬 구룬은 시조 나치불루가 쑹화강 유역에 정착하며 시작되었다.[1] 그의 후계자들은 세력을 확장하고 명나라로부터 관직을 받으며 발전했으나,[2][3][4][5] 내부 권력 다툼으로 혼란을 겪기도 했다.[6] 이후 왕타이가 등장하여 해서여진을 통합하고 완 한( ᠸᠠᠨ ᡥᠠᠨ|Wan hanmnc)을 칭하며 세력을 떨쳤다.[7] 다른 한편에서는 부얀이 1561년 울라 부족을 통합하고 울라성을 축조하여 버일러를 자칭했다.[8][9] 초기에는 강성했던 하다에 종속되기도 했으나,[10] 하다의 혼란을 틈타 독립하고 세력을 회복했다.[11] 만타이의 급작스러운 죽음 이후,[13] 그의 동생 부잔타이가 누르하치의 도움으로 수장이 되었다.[13] 부잔타이는 여허, 몽골, 조선 등과 관계를 맺으며 세력을 키우려 했으나,[14][15][16][17][18][19][20][21] 점차 강성해지는 건주여진의 누르하치에게 결국 복속되었다. 훌룬 구룬을 이루던 하다, 호이파, 울라, 여허는 1599년부터 1619년 사이에 차례로 누르하치에게 흡수되었다.[22][23]
2. 1. 건국과 발전
훌룬 구룬의 시조인 나치불루는 본래 호이파와 울라 지역 사이의 키르사강 상류 유역에서 성씨 없이 살다가 쑹화강 유역으로 이주하여 울라 부족의 수장이 되었다.[1]나치불루의 아들 샹기얀도르호치가 수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울라의 마지막 한인 부잔타이 후손 가문의 족보 『오랍합살호패륵후배당책(烏拉哈薩虎貝勒後輩檔冊)』에 따르면, 샹기얀도르호치는 1,000여 리에 달하는 넓은 영역을 다스리며 훌룬 구룬을 이끌었다고 한다. 그의 사후 아들 기야마카쇼주구가 울라의 수장이 되었다.[2] 기야마카쇼주구는 1443년 명(明)으로부터 올자전위(兀者前衛)의 지휘(指揮) 벼슬을 받았다.[3]
기야마카쇼주구의 사후 아들 둘기가 수장 자리를 계승했다.[4] 둘기는 성화 연간(1464년-1487년)에 명나라로부터 올자전위도독(兀者前衛都督)으로 임명되었다.[5]
둘기 사후 명목상 국주 자리는 차남 구더이주얀에게 넘어갔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다른 계파로 이동했다. 명나라로부터 탑산전위도독(塔山前衛都督)으로 임명된 것은 기야마카쇼주구의 다른 아들 수허터였고, 이후에는 기야마카쇼주구의 넷째 아들 수이툰의 아들인 커시너가 도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커시너 도독과 그의 아들 처처무는 같은 일족인 바다이다르한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결국 처처무의 아들 왕타이는 시버의 수이하 호톤으로 피신했고, 커시너의 다른 아들 왕주 와일란은 하다로 가서 수장이 되었으나 곧 살해당했다. 이후 사태를 수습한 왕주 와일란의 아들 볼콘 셔진은 시버로 망명해 있던 왕타이를 새로운 수장으로 추대했다.[6] 왕타이는 요동(遼東)에서 개원(開原) 동부 지역에 거주하던 해서여진을 통합하며 세력을 키웠다.[7] 그는 완 한(
한편, 커시너를 살해했던 바다이 다르한을 제거한 구더이주얀 사후, 훌룬의 수장 자리는 그의 아들 타이란에게, 그리고 다시 타이란의 아들 부얀에게 계승되었다. 1561년, 부얀은 울라의 여러 부락을 무력으로 통합하고 쑹화강 연안의 홍니에 울라성(烏拉城)을 건설한 뒤 스스로 버일러(beile, 貝勒)를 칭하며 훌룬 구룬의 전성기를 열었다.[8][9] 부얀의 사후 아들 부간이 수장 자리를 이었다. 당시 부얀의 종형제인 하다의 완 한 왕타이의 세력이 매우 강성하여 여진 각 부족의 패권을 장악했고, 울라 역시 하다에 종속되었다. 울라는 하다와 협력하며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명나라와도 하다를 통해 교류했다.[10] 그러나 왕타이가 사망하고 후계자 후르간마저 즉위 1년 만에 병사하면서 하다가 후계자 분쟁으로 혼란에 빠지자, 울라는 이 기회를 틈타 하다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이후 여허와 연합하여 수완과 시버 두 부족을 나누어 차지하고, 과거 울라의 지배하에 있던 수이하성을 되찾는 등 세력을 확장했다.[11] 부간의 사후 아들 만타이가 뒤를 이었다.[12] 만타이는 아들과 함께 변경 마을인 수와얀 시란을 수리하고 해자를 파는 작업을 감독하던 중, 마을 부녀자 두 명을 탐하다가 밤중에 그 남편들에게 살해당했다.[13]
만타이 사후, 누르하치(Nurhaci, 努爾哈赤)에게 4년간 억류되었던 만타이의 동생 부잔타이가 수장 자리를 계승했다. 그는 누르하치가 파견한 툴쿤 후왕잔과 볼콘 피양구 휘하 병력의 보호 아래 숙부 힝니야의 암살 위협을 극복하고 한으로 즉위했다.[13] 부잔타이는 여허 및 몽골 부족들과의 관계를 강화했으며,[14] 1597년에는 여허와의 혼인 동맹을 발판 삼아 동해여진(東海女眞) 와르카 부의 안추라쿠 일대에 있는 로툰 등 세 부족을 복속시켰다.[15] 1603년부터 1605년 사이에는 조선 함경도 종성의 동관과 온성의 유원을 공격하여 조선군과 충돌하기도 했으며,[16][17][18] 건퇴 지역에 병력을 주둔시켜 인근 조선의 번호(藩胡, 복속된 여진 부족)였던 동해여진 부족들을 복속시켰다.[19][20] 이러한 활동을 통해 부잔타이는 1605년 조선 조정으로부터 당상(堂上)의 직첩을 받았다.[21]
그러나 16세기 후반부터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건주여진(建州女眞)의 누르하치는 점차 주변 부족들을 통합하며 패권을 확장해 나갔다. 한때 누르하치의 도움으로 즉위했던 울라의 부잔타이처럼 일부 세력은 독립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결국 훌룬 구룬을 이루던 부족들은 모두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에 흡수되었다. 하다는 1599년, 호이파는 1607년, 울라는 1613년, 여허는 1619년에 각각 복속되었다.[22][23]
2. 2. 건주여진과의 갈등 및 멸망
만타이 사후, 울라 수장은 누르하치에게 4년간 억류되었던 만타이의 아우 부잔타이가 계승하였다. 그는 누르하치가 보낸 툴쿤 후왕잔과 볼콘 피양구 휘하 병력의 보호를 받으면서 숙부 힝니야의 암살 시도를 피하여 한으로 즉위하게 된다.[13] 부잔타이는 즉위 후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로부터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고자 여허 및 몽골 부락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고,[14] 1597년에는 여허와의 혼인동맹을 이용하여 동해여진 와르카의 안추라쿠 일대 로툰 등 세 부족을 신속시켰다.[15] 또한 조선과의 관계에도 힘썼는데, 1603년부터 1605년 무렵에는 함경도 종성의 동관과 온성의 유원을 공격하여 조선군과 충돌하기도 했으나,[16][17][18] 건퇴 지역에 병력을 주둔시켜 인근 조선의 번호였던 동해여진 부족들을 추가로 신속시키고,[19][20] 1605년에는 마침내 조선 조정으로부터 당상(堂上)의 직첩을 받기도 했다.[21]그러나 16세기 후반부터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는 점차 세력을 확장하며 여진 통합에 나섰다. 누르하치의 도움으로 즉위한 부잔타이가 독립을 시도하며 반기를 들기도 했지만,[22] 결국 훌룬 구룬의 각 부족들은 누르하치의 강력한 군사력 앞에 차례로 복속되었다. 각 부족의 멸망 시기는 다음과 같다.[22][23]
훌룬 구룬의 역사는 시조 나치불루[1] 이후 여러 인물들의 활동으로 전개되었다. 나치불루의 아들 샹기얀도르호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1,000여 리에 달하는 광대한 영역을 다스렸으며,[2] 그의 아들 기야마카쇼주구는 1443년 명나라로부터 올자전위(兀者前衛) 지휘(指揮)에 임명되기도 했다.[3] 기야마카쇼주구의 아들 둘기 역시 성화 연간(1464-1487)에 명나라로부터 올자전위도독(兀者前衛都督) 직책을 받았다.[4][5]
3. 주요 인물
둘기 사후에는 그의 차남 구더이주얀이 명목상 국주 자리를 이었으나, 실제적인 영향력은 명나라로부터 관직을 받은 다른 인물들에게 분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기야마카쇼주구의 다른 아들인 수허터는 탑산전위도독(塔山前衛都督)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기야마카쇼주구의 4남 수이툰의 아들인 커시너가 도독 자리를 이었다. 그러나 커시너와 그의 아들 처처무가 일족인 바다이다르한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처처무의 아들 왕타이는 시버의 수이하 호톤으로 피신했고, 커시너의 다른 아들 왕주 와일란은 하다의 수장이 되었으나 곧 살해당했다. 이후 사태를 진압한 왕주 와일란의 아들 볼콘 셔진이 시버에 망명해 있던 왕타이를 하다의 새로운 수장으로 추대하며 하다 중심의 세력이 부상하게 된다.[6] 왕타이는 이후 해서여진을 통합하고 완 한( Wan han|완 한mnc)을 칭하며 명나라의 이성량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7]
한편, 커시너 부자를 살해한 바다이다르한을 제거한 구더이주얀의 가계는 아들 타이란을 거쳐 손자 부얀으로 이어졌다. 부얀은 1561년 울라 부족을 통합하고 울라성을 축조하며 버일러(beile, 貝勒)를 자칭하는 등 세력을 키웠다.[8][9] 부얀의 사후에는 아들 부간이, 그 뒤를 이어 손자 만타이가 수장 자리를 계승했다.[10][12] 부간 대에는 종형제인 하다의 왕타이 세력이 강성하여 울라도 하다에 종속되기도 했다.[10] 그러나 만타이는 수와얀 시란이라는 마을에서 부녀자를 탐하다가 그 남편들에게 살해당했고,[13] 그의 동생 부잔타이가 누르하치의 도움으로 울라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13]
16세기 후반 건주여진의 누르하치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하다(1599년), 호이파(1607년), 울라(1613년), 여허(1619년) 등 훌룬 구룬을 구성하던 주요 부족들은 차례로 누르하치에게 복속되었다.[22][23]
3. 1. 나치불루
훌룬 구룬의 시조인 나치불루는 본래 호이파와 울라 지역 사이의 키르사강 상류 유역에서 성씨 없이 홀로 살던 인물이었다. 이후 쑹화강(송화강, 숭아리강) 유역으로 이주하여 울라 부족의 수장이 되었다.[1]
3. 2. 부얀
구더이 주얀의 사후 훌룬의 수장은 그의 아들 타이란에게 계승되었고, 그 후 타이란의 아들 부얀으로 이어졌다.[8] 1561년, 부얀은 울라의 여러 부락을 무력으로 통합하고, 쑹화강(송화강) 연안에 있는 홍니 지역에 울라성(烏拉城)을 축조하며 세력을 키웠다. 이후 스스로 버일러(beile, 貝勒)를 칭하며 훌룬 구룬의 기반을 다졌다.[8][9]
부얀의 사후에는 아들 부간이 수장 자리를 계승했다. 이 시기에는 부얀의 종형제이자 하다의 한인 왕타이의 세력이 매우 강성하여 여진족 전체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울라 역시 하다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으며, 하다가 주도하는 질서에 협력하며 명나라와의 교역 등 공동의 이익을 추구했다.[10] 그러나 하다의 왕타이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후르간마저 즉위 1년 만에 병사하면서 하다 내부에 후계자 분쟁이 발생하자, 하다는 급격히 쇠퇴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울라는 하다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세력으로 다시 성장했다. 울라는 여허와 연합하여 과거 하다에게 넘어갔던 수완과 시버 두 부족 지역을 나누어 점령하고, 본래 울라의 영토였던 수이하성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11]
3. 3. 부잔타이
만타이 사후, 울라의 수장은 누르하치에게 4년간 억류되었던 그의 동생 부잔타이가 계승했다. 부잔타이는 누르하치가 보낸 툴쿤 후왕잔과 볼콘 피양구가 이끄는 병력의 보호 아래 숙부 힝니야의 암살 위협을 극복하고 한으로 즉위했다.[13]
즉위 후 부잔타이는 여허 및 몽골 부족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힘썼다.[14] 1597년에는 여허와의 혼인 동맹을 활용하여 동해여진(東海女眞) 와르카의 안추라쿠 지역 로툰 등 세 부족을 복속시켰다.[15] 그는 조선과의 관계에도 주목하여, 1603년부터 1605년 사이에는 함경도의 종성 동관(潼關)과 온성 유원(柔遠)을 공격하여 조선군과 충돌하기도 했다.[16][17][18] 또한 건퇴(乾退) 지역에 병력을 주둔시켜 인근의 조선 영향 아래 있던 동해여진 부족들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려 시도했다.[19][20] 이러한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통해 부잔타이는 1605년 조선 조정으로부터 당상관(堂上官) 직첩을 받으며 외교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21]
16세기 후반, 건주여진의 누르하치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해서여진 부족들과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누르하치의 지원으로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잔타이는 점차 독자적인 세력 구축을 시도하며 누르하치와 대립각을 세웠다. 그러나 누르하치의 공세 앞에 울라는 결국 1613년 건주여진에 복속되었고, 부잔타이의 독자 세력 구축 시도는 좌절되었다. 이는 하다(1599년), 호이파(1607년), 여허(1619년) 등 다른 해서여진 부족들이 차례로 누르하치에게 흡수되는 과정의 일부였다.[22][23]
3. 4. 왕타이 (완 한)
커시너 도독과 그의 아들 처처무가 일족인 바다이다르한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처처무의 아들인 왕타이는 시버의 수이하 호톤으로 피신해야 했다. 한편, 커시너의 다른 아들 왕주 와일란이 하다의 수장이 되었으나 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당했다. 이후 사태를 수습한 왕주 와일란의 아들 볼콘 셔진은 시버에 망명해 있던 왕타이를 하다의 새로운 수장으로 추대했다.[6]
하다의 수장이 된 왕타이는 요동에서 개원 동부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던 해서여진 세력을 통합하며 강력한 기반을 마련했다.[7] 그는 스스로 완 한( Wan han|완 한mnc)이라 칭하고, 여진과 몽골의 여러 지도자들은 물론 명나라의 요동총병(遼東總兵) 이성량과도 긴밀한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맺으며 세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왕타이의 통치 아래 하다는 강성해져 여진 각 부의 패권을 장악했다. 그의 종형제인 부얀이 다스리던 울라 역시 하다에 종속되어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울라는 하다와의 협력을 통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며 왕타이의 패권을 지지했고, 명나라와의 교류도 하다를 통해 이루어졌다.[10] 이처럼 왕타이는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훌룬 구룬 전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명실상부한 패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왕타이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후르간이 즉위한 지 불과 1년 만에 병사하자, 하다에서는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며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하다의 내분은 왕타이가 구축했던 강력한 세력 기반을 급격히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다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울라는 여허와 함께 수완(Suwan)과 시버(Sibe) 두 부족을 나누어 점령하고 과거 울라의 영토였던 수이하성(城)을 되찾는 등 하다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 확장에 나섰다.[11] 결국 왕타이의 강력한 통치는 그의 사후 지속되지 못했고, 이는 하다의 쇠퇴와 더불어 훌룬 구룬 전체의 분열과 약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4. 훌룬 구룬과 조선의 관계
훌룬 구룬의 수장 부잔타이는 조선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1603년부터 1605년 무렵 조선의 함경도 지역인 종성의 동관(潼關)과 온성의 유원(柔遠)을 공격하여 조선군과 충돌하였다.[16][17][18] 또한 건퇴(乾退) 지역에 병력을 주둔시켜 인근에 있던, 조선의 번호(藩胡)였던 동해여진 부족들을 자신의 세력 아래 두었다.[19][20] 이러한 군사적 충돌과 세력 확장 속에서도 외교적인 관계는 이어져, 부잔타이는 1605년 조선 조정으로부터 당상(堂上)의 직첩(職牒)을 받기도 하였다.[21]
참조
[1]
서적
팔기만주씨족통보
[2]
서적
팔기만주씨족통보
[3]
역사기록
영종예황제실록(英宗睿皇帝實錄)
[4]
역사기록
만주실록(滿洲實錄)
[5]
역사기록
헌종순황제실록(憲宗純皇帝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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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만주실록(滿洲實錄)
[7]
인용
A Translucent Mirror: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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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8]
역사기록
만주실록(滿洲實錄)
[9]
서적
팔기만주씨족통보
[1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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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共永吉县委史办公室
[11]
서적
乌拉国简史
中共永吉县委史办公室
[1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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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적
太祖武皇帝實錄
[1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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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京出版社.
[15]
서적
太祖武皇帝實錄
[16]
역사기록
선조실록(宣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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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선조실록(宣祖實錄)
[18]
역사기록
선조실록(宣祖實錄)
[19]
역사기록
선조실록(宣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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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선조실록(宣祖實錄)
[21]
역사기록
선조실록(宣祖實錄)
[22]
인용
The Manch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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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ey-Blackwell
[23]
인용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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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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