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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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허는 16세기 후반 훌룬 구룬의 나라 씨족을 정복하고 여허강 유역에 정착한 투메드인에서 시작된 부족이다. 시조 싱건 다르한 이후 여러 수장을 거치며 명나라와 관계를 맺었으나, 1583년 칭기야누와 양기누 형제가 사망하고, 이후 건주 여진의 누르하치와 대립했다. 1593년 구러 산 전투에서 패배하고 1619년 사르후 전투 이후 누르하치에게 멸망하여 허투알라 인근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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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허 | |
---|---|
개요 | |
이름 | 여허 나라 |
만주어 | ᠶᡝᡥᡝ |
한자 | 葉赫 (엽혁) |
역사적 배경 | |
후룬 4부 | 후룬 우라 호이파 하다 |
여허 | ᠶᡝᡥᡝ |
2. 역사
여허는 투메드 출신 싱건 다르한(ᠰᡳᠩᡤᡝᠨ
ᡩᠠᡵᡥᠠᠨ|Tumet Singgen Darhanmnc)이 훌룬 구룬의 장(ᠵᠠᠩ|Jangmnc)이 다스리던 나라 씨족을 정복하고 그곳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1][2] 싱건 다르한은 자신의 성씨를 투메드에서 나라로 바꾸었고, 이후 여허강 유역으로 이주하면서 여허라고 불리게 되었다.
싱건 다르한의 뒤를 이어 시르커 밍가투, 치르가니, 추쿵거, 타이추, 타탄주를 거쳐 칭기야누와 양기누 형제가 버일러를 자칭하며 여허를 다스렸다. 1583년 칭기야누와 양기누는 명나라 이성량과의 충돌로 사망하고, 이후 칭갸누의 아들 부자이와 양기누의 아들 나림불루가 각각 그 지위를 계승했다.
1593년 여허는 다른 부족들과 연합하여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를 공격했으나 크게 패하고 부자이는 전사했다. 부자이 사후 동여허는 부양구가 계승했고, 누르하치와 혼인동맹을 맺었으나, 나림불루는 이를 파기했다. 1604년 누르하치는 몽고 저저의 죽음을 빌미로 여허를 침공했다.
1609년 나림불루가 사망하고 동생 긴타이시가 계승했다. 1613년 누르하치는 다시 여허를 침공하여 큰 피해를 입혔고,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여허는 명나라를 지원했으나 패배했다. 같은 해 9월 누르하치는 여허를 함락시켰고, 긴타이시와 부양우는 처형당했다. 부양우의 동생 부르항우 등은 목숨을 구제받고 팔기에 편입되었으며, 이후 여허는 허투알라 인근으로 강제 이주되어 무인지대가 되었다.
2. 1. 건국 및 초기 역사
여허는 투메드인이었던 싱건 다르한(ᠰᡳᠩᡤᡝᠨᡩᠠᡵᡥᠠᠨ|Tumet Singgen Darhanmnc)이 훌룬 구룬의 장(ᠵᠠᠩ|Jangmnc)의 나라 씨족을 정복하고 그 지역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1][2] 싱건 다르한은 자신의 성씨를 투메드에서 나라로 바꾸었고, 이후 여허강 유역으로 이주하면서 여허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1][2]
싱건 다르한 사후 아들 시르커 밍가투(ᠴᡳᡵᡤᠠᠨᡳ|Sirke Minggatumnc)가 수장 자리를 계승했고, 시르거 밍가투 사후에는 그의 아들 치르가니(ᠴᡳᡵᡤᠠᠨᡳ|Cirganimnc)가 계승했다.[3] 치르가니는 1484년 명나라로부터 관직을 받았으나,[4] 16세기 초 명나라로의 입공을 막았다는 이유로 명군에게 살해당했다.[6]
치르가니 사후 아들 추쿵거(ᠴᡠᡴᡠᠩᡤᡝ|Cukunggemnc)가 수장이 되었고, 명나라 변경을 자주 공격했다.[7] 1513년 명나라의 회유로 관직을 받았으나,[8] 1551년경 하다의 왕주 와일란에게 살해당하고 칙서를 빼앗겼다.[10][11]
추쿵거 사후 아들 타이추(ᡨᠠᡳᠴᡠ|Taicumnc)가 수장을 계승했고,[12] 그의 장남 타탄주(ᡨᠠᡳᡨᠠᠨᠵᡠ|Tatanjumnc)는 하다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타탄주 사후 그의 차남과 3남인[13] 칭기야누(ᠴᡳᠩᡤᡳᠶᠠᠨᡠ|Cinggiyanumnc)와 양기누(ᠶᠠᠩᡤᡳᠨᡠ|Yangginumnc) 형제가 제부를 정복하고 각각 성에 거주하며 버일러를 자칭했다.[14]
1583년 1월 경, 칭기야누와 양기누는 명나라 이성량과의 충돌로 인해 아들들과 함께 사망했다.[15][16] 이후 이성량은 여허를 공격했으나 큰 피해를 입고 회군했다.[17]
칭갸누의 아들 부자이(ᠪᡠᠵᠠᡳ|Bujaimnc)와 양기누의 아들 나림불루(ᠨᠠᡵᡳᠮᠪᡠᠯᡠ|Narimbulumnc)는 각각 부친의 지위를 계승했다. 1593년 여허는 다른 부족들과 연합하여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를 공격했으나 크게 패했고, 부자이는 전사했다.[19][20][21]
부자이 사후 동여허는 부양구(ᠪᡠᠶᠠᠩᡤᡡ|Buyanggumnc)가 계승했고, 누르하치와 혼인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나림불루는 건주와의 동맹을 파기했다.[22] 1603년 몽고 저저가 위독하여 누르하치가 장모를 건주로 오게 하려 했으나 나림불루가 허락하지 않았고, 몽고 저저는 병사했다. 1604년 누르하치는 이를 빌미로 여허를 침공했다.[23]
1609년 나림불루가 병사하고 동생 긴타이시가 계승했다. 1613년 누르하치는 여허를 재침공하여 큰 피해를 입혔고, 긴타이시는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24]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여허는 명나라를 지원했으나 패배했다.[25] 그해 9월 누르하치는 여허를 함락시켰고, 긴타이시와 부양우는 처형당했다.[27][28] 부양우의 동생 부르항우(ᠪᡠᡵᡥᠠᠩᡤᡡ|Burhanggūmnc) 등은 목숨을 구제받고 팔기에 편입되었다.[29][30] 이후 여허는 허투알라 인근으로 강제 이주되어 무인지대가 되었다.[31]
2. 2. 칭기야누와 양기누
여허의 시조 싱건 다르한(ᠰᡳᠩᡤᡝᠨᡩᠠᡵᡥᠠᠨ|Tumet Singgen Darhanmnc)은 본래 투메드인이었으나 훌룬 구룬의 장(ᠵᠠᠩ|Jangmnc)의 나라 씨족을 정복하고 그 지역에 정착한 후 성씨를 투메드에서 나라로 바꾸었다. 이후 여허강 유역으로 이주하면서 여허라고 불리게 되었다.[1][2] 싱건 다르한 사후 여허의 수장은 아들 시르커 밍가투(ᠴᡳᡵᡤᠠᠨᡳ|Sirke Minggatumnc)가 계승했고, 시르거 밍가투 사후에는 그의 아들 치르가니(ᠴᡳᡵᡤᠠᠨᡳ|Cirganimnc)가 계승했다.[3] 치르가니는 1484년 명나라에게서 관직을 받았다.[4] 그러나 16세기 초 명나라로의 입공을 막았다는 이유로 명나라 군대에게 죽임을 당했다.[6]
치르가니 사후 아들 추쿵거(ᠴᡠᡴᡠᠩᡤᡝ|Cukunggemnc)가 수장 지위를 계승, 아버지의 뜻을 이어 다른 여진 추장과 연합하여 명나라 변경을 자주 공격했다.[7] 1513년, 명나라의 회유를 받고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았다.[8] 1524년에는 지위가 승격되었다.[9] 그러나 추쿵거는 1551년 무렵 하다의 왕주 와일란에게 살해당했고,[10] 여허는 하다에게 모든 칙서를 빼앗겼다.[11]
추쿵거 사후 아들 타이추(ᡨᠠᡳᠴᡠ|Taicumnc)가 수장을 계승했고,[12] 타이추 이후 그의 장남 타탄주(ᡨᠠᡳᡨᠠᠨᠵᡠ|Tatanjumnc)는 추쿵거를 죽이고 칙서를 강탈한 하다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타탄주 사후 그의 차남과 3남인[13] 칭기야누(ᠴᡳᠩᡤᡳᠶᠠᠨᡠ|Cinggiyanumnc)와 양기누(ᠶᠠᠩᡤᡳᠨᡠ|Yangginumnc) 형제가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각각의 성에 거주하니, 하다인들이 신속하였고, 형제가 마침내 모두 버일러를 자칭했다.[14]
명나라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 이성량은 여허에게 칙서를 하사할 것을 허락하였고, 1583년 1월 전후 칭기야누와 양기누는 통시를 하기 위해 진북관에 이르렀는데, 이때 개원의 관왕묘(關王廟)에서 양측이 충돌하여 두 버일러와 그 아들들이 모두 죽었다.[15][16]
2. 3. 누르하치와의 대립 및 멸망
누르하치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수년간 니칸 와이란을 제거하고 숙수후, 후너허, 왕야, 동오, 저천 등을 정복했다.[18] 이에 여허의 국주 나림불루와 부자이는 1593년 하다의 멍어불루, 울라의 부잔타이, 호이파의 바인다리, 코르친 몽골의 옹가대 등과 9부 연합군을 결성하여 건주여진을 공격했다.[19] 그러나 누르하치는 구러 산에 매복과 장애물을 설치해 연합군을 대패시켰고, 이 과정에서 부자이는 전사했다.[20][21]부자이 사후 동여허는 부양구가 계승했다. 1597년 부양구는 여동생 몽고 저저를 누르하치에게 시집보냈고, 나림불루는 동생 긴타이시의 딸을 다이샨에게 시집보내 건주와 혼인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나림불루는 건주와 몽골 사이의 갈등을 유발하고, 울라의 부잔타이와 동맹을 맺어 건주와의 동맹을 파기했다.[22]
1603년 몽고 저저가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누르하치는 장모를 건주로 초청했으나, 나림불루가 이를 거절했고 몽고 저저는 결국 사망했다. 1604년 누르하치는 이 사건을 빌미로 여허를 침공해 장 성과 아키란 성 등을 함락하고 많은 여허인과 가축을 노획했다.[23]
1609년 나림불루가 사망하자 동생 긴타이시가 동여허를 계승했다. 긴타이시와 부양우는 1613년 울라 멸망 후 여허로 망명한 부잔타이의 송환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누르하치는 여허를 재침공해 19개 성을 파괴하고 우수 성의 여허인 300여 호를 포획했다. 긴타이시와 부양우는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해 조총병 1,000여 명을 원조받았다.[24]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여허는 명군을 원조했으나 패배했다.[25] 같은 해 9월 누르하치는 여허를 급습했고,[26] 동여허가 함락되어 긴타이시는 처형당했다.[27] 서여허의 부양우도 항복 후 처형되었다.[28] 부양우의 동생 부르항우 등은 목숨을 구제받았고, 여허인들은 팔기에 편입되었다.[30] 이후 여허는 무인지대가 되었다.[31]
3. 주요 인물
wikitext
이름 | 만주어 표기 |
---|---|
싱건 다르한 | Singgen Darhanmnc |
시르커 밍가투 | Sirke Minggatumnc |
치르가니 | Cirganimnc |
추쿵거 | Cukunggemnc |
타이추 | Taicumnc |
이름 | 만주어 표기 |
칭기야누 | Cinggiyanumnc |
부자이 | Bujaimnc |
부양구 | Buyanggūmnc |
이름 | 만주어 표기 |
양기누 | Yangginumnc |
나림불루 | Narimbulumnc |
긴타이시 | Gintaisimnc |
3. 1. 여허
이름 | 만주어 표기 |
---|---|
싱건 다르한 | |- | 시르커 밍가투 || |- | 치르가니 || |- | 추쿵거 || |- | 타이추 || |} 3. 2. 서여허3. 3. 동여허
수정 내용:
4. 씨족
ᠨᠠᡵᠠ 참조
[1]
서적
滿州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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