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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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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의 소설가로, 1899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1972년 사망했다. 그는 일본인 최초로 196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섬세한 표현으로 일본인의 심성을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는 《이즈의 무희》, 《설국》, 《천 개의 학》, 《산의 소리》 등이 있으며, 1972년 가스 중독으로 사망하여 자살과 사고사 논란이 있다.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 등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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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기본 정보
가와바타 야스나리
가마쿠라 자택에서
출생일1899년 6월 11일
출생지오사카시기타구
사망일1972년 4월 16일
사망지즈시시
직업작가
활동 기간1924년–1972년
장르소설, 단편 소설
수상노벨 문학상 (1968년)
주요 작품설국
기성
이즈의 무희
고도
배우자가와바타 히데코
사조신감각파
모교도쿄 대학
일본어 표기 정보
이름川端 康成(かわばた やすなり)
출생일1899년 6월 14일
출생지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기타구 덴진바시 1초메 16-12번지
성장지오사카부 미시마군 도요카와촌 오아자 슈쿠쿠쇼 아자 히가시무라 11번지 (현 이바라키시 슈쿠쿠쇼 1초메 11-25)
사망일1972년 4월 16일
사망지일본 가나가와현 즈시시 고쓰보 즈시 마리나
묘지가마쿠라 영원 (가마쿠라시 주니쇼)
직업소설가, 문예평론가
국적일본
학력문학사 (도쿄제국대학, 1924년)
모교도쿄제국대학 국문학과 졸업
활동 기간1919년 - 1972년
장르소설, 문예비평
주제무구한 생명에 대한 숭배, 서정, 마계
자타일여, 만물일여, 애니미즘
생과 죽음의 유전, 유현, 심령주의
일본의 전통, 모노노아와레
사조신감각파, 신흥예술파
주요 작품이즈의 무희(1926년)
아사쿠사 홍단(1929년 - 1930년)
수정환상(1931년)
서정가(1932년)
금수(1933년)
설국(1935년 - 1948년)
천마리 학(1949년 - 1952년)
산의 소리(1949년 - 1954년)
잠자는 미녀(1960년 - 1961년)
고도(1961년 - 1962년)
수상문예간담회상 (1937년)
기쿠치 간상(1944년, 1958년)
일본예술원상(1952년)
노마문예상(1954년)
괴테 메달 (1959년)
예술문화훈장(1960년)
문화훈장(1961년)
마이니치 출판문화상(1962년)
노벨 문학상(1968년)
정3위 훈1등욱일대수장(1972년, 몰시 서위 서훈)
데뷔 작품『치요』(1919년)
『초혼제일경』(1921년)
십육세의 일기(1925년, 집필 1914년)
배우자히데코
자녀마사코 (양녀), 가오리 (사위)
친척산파치로 (조부), 가네 (조모)
에이키치 (부), 겐 (모)
요시코 (누나), 고타로 (백부)
아카리, 아키나리 (손자)
구로다 히데타로, 히데타카 (백부, 사촌 형)
다나카 소노, 이와타로 (백모, 사촌 형)
아키오카 타니, 요시나리 (숙모, 사촌 형)
영향무샤노코지 사네아쓰, 에마 슈
다니자키 준이치로, 도쿠다 슈세이
호리코시 교세이, 나가타 미키히코, 요시이 이사무
오시카와 슌로, 노가미 야에코
나이토 지요코, 아리모토 호스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시가 나오야
스트린드베리, 아르치바셰프
도스토옙스키, 조이스
카미유 플라마리옹
올리버 로지, 잇큐 소준
겐지 이야기, 마쿠라노소시, 중세 문학
, 범신론, 마쓰오 바쇼, 사이교
영향을 받은 사람후지사와 다케오, 기타조 미오
오카모토 가노코, 나카자토 쓰네코
가지이 모토지로, 후쿠나가 다케히코
노가미 아키라, 사와노 히사오
이시하마 쓰네오, 미시마 유키오
호시 신이치, 쓰쓰이 야스타카
마쓰모토 세이초, 요시모토 바나나
오가와 요코, 이시다 이라
오미치 다마키, 다나카 신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서명

2. 생애

1912년(메이지 45년)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중학교(지금의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1914년 할아버지마저 죽자 도요사토무라의 구로다(黒田)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중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작가에 뜻을 두게 된 것은 중학교 2년때의 일로 1916년(다이쇼 5년)부터 『교한신보(京阪新報)』에 단편, 『분쇼세카이(文章世界)』에 단가를 투고하게 되었다. 1917년(다이쇼 6년)에 졸업하자 도쿄로 상경해 아사쿠사 구라마에(蔵前)의 사촌 집에서 얹혀 살면서 예비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여 제1고등학교의 1부 을(乙) 영문과에 들어갔다. 이듬해 가을에 이즈를 여행하다가 떠돌이 예인과 만나 교유한 경험은 훗날 『이즈의 무희』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 뒤 10년 동안 유가시마(湯ヶ島) 온천 여관을 드나들게 되었다.

1920년(다이쇼 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지만, 이듬해 국문과로 전과했다. 대학 동기로는 기타무라 기하치(北村喜八)、혼다 아키라(本多顕彰)、스즈키 히코지로 등이 있었다. 입학한 해에 곤 도코, 스즈키 히코지로 등과 함께 동인지 『신사조(제6차)』 발행을 기획하여 국문과로 전과한 이듬해에 실행에 옮겼고, 그곳에 발표한 작품 「초혼제일경(招魂祭一景일본어)」이 기쿠치 간에게 인정받아 『분게이슌주(1923년 창간)의 동인이 되어 문인의 길에 들어섰다. 1924년 대학을 졸업하고(졸업 논문은 「일본소설사 소론日本小説史小論」) 요코미쓰 리이치, 가타오카 갓페이(片岡鉄兵), 나카가와 요이치(中河与一), 사사키 모사쿠(佐佐木茂索), 곤 도코 등 14명과 함께 동인지 『분게이지다이](文芸時代일본어)』를 창간, 「

2. 1. 유년 시절과 가족의 죽음 (1899년 ~ 1914년)

1899년(메이지 32년) 6월 14일 오사카부오사카시기타구 코노하나정 1정목 79번 집(현・오사카시 기타구 텐진바시 1정목 16-12)에서 의사인 아버지 카와바타 에이키치와 어머니 겐(ゲン)의 장남으로 태어났다.[35][36][37] 7개월의 조산이었다.[41][42] 4살 위의 누나 요시코가 있었다.[43] 아버지 에이키치는 도쿄의 의학교 세이세이가쿠샤(현・일본의과대학의 전신)를 졸업하고 개업의를 하고 있었지만, 폐를 앓고 있어 허약했다.[35][44] 또한, 한학과 서화를 즐기는 다재다능한 사람이기도 했다.[45]

1901년(메이지 34년) 1월, 아버지 에이키치가 결핵으로 사망했다(32세 사망).[35][37][49] 에이키치는 임종 직전에, 서를 남겼다.[44] 이후 어머니 겐의 친가 근처인 오사카부 니시나리군토요사토무라 다이지 덴노지쇼 182번지(현・오사카시 히가시요도가와구다이도미나미)로 이사했으나, 1902년(메이지 35년) 1월 10일 어머니 겐 또한 같은 병으로 사망했다(37세 사망).[35][52][53][54]

부모를 잃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할아버지 카와바타 사하치로와 할머니 카네와 함께 본적지인 오사카부 미시마군토요카와무라 다이지 슈쿠쿠쇼 아자 히가시무라 11번 집(후의 오사카부 이바라키시 다이지 슈쿠쿠쇼 1540-1. 현・이바라키시 슈쿠쿠쇼 1정목 11-25)으로 이사했다.[35][52][53][54]

카와바타 가는 호족이나 자산가로서 마을을 지배했던 구가로 대대로 토요카와무라의 장야이자 대지주였지만, 할아버지 사하치로는 젊은 시절에 여러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했고, 사하치로 대에 대부분의 재산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다.[43][55] 할머니 카네는 겐과 마찬가지로 구로다 가 출신(이모와 조카 관계)으로, 끊어질 위기에 처했던 카와바타 가에 시집 온 사람이었다.[52] 부모의 병사는 어린 야스나리의 가슴에 〈(부모가) 죽은 나이쯤 되면 나도 죽을 것이다〉라는 〈병과 요절에 대한 두려움〉을 새겼다.[44][60]

1906년(메이지 39년) 4월, 미시마군 도요카와보통고등소학교(현・이바라키시립 도요카와 소학교)에 입학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입학식 때,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가 놀라’ 겁과 공포 때문에 울었다.[42][52][61] 초등학교 시절 친구에 따르면, 강성의 성적은 좋았고, 작문에 능숙하여 다른 아이들을 압도했다고 한다.[49] 사사카와 료이치는 초등학교 동급생이었다.[65][66]

1906년 9월 9일 할머니 카네가 사망하고(66세 사망), 할아버지와 둘이서 살게 되었다. 1909년(메이지 42년) 7월 21일, 따로 살던 누나 요시코도 1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53] 카와바타에게 누나의 모습은, 할머니 장례식 때의 희미한 기억뿐이라고 한다.[43] 초등학교 5, 6학년이 되자, 결석도 거의 없어지고, 성적은 모두 “갑”이었다.[66] 그림에 능숙했기 때문에, 문인화를 즐기던 할아버지의 권유로 화가가 되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고학년이 되자 서적 탐독에 관심이 쏠렸다.[47]

1912년(메이지 45년)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중학교(지금의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1914년 할아버지마저 죽자 도요사토무라의 구로다(黒田)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중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2. 2. 작가 지망과 초기 활동 (1912년 ~ 1924년)

1899년 6월 14일, 아버지 에이키치(榮吉)와 어머니 겐(ゲン) 사이에서 태어났다. 1901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외가가 있던 오사카시 히가시요도가와구로 이사했으나, 이듬해 어머니마저 사망하여 이바라키시의 할아버지 미하치로(三八郞)와 할머니 가네(カネ)와 함께 살게 되었다. 1906년 이바라키 시립 도요카와 소학교에 입학하였고, 동급생으로 사사가와 료이치가 있었다. 9월에 할머니, 1909년에는 누나마저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1912년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중학교(현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고등학교)에 수석 입학했다. 2년 뒤 할아버지까지 사망하자 중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이때 하급생으로 오오야 소이치가 있었다. 작가를 지망하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로, 1916년부터 『교한신보(京阪新報)』, 『분쇼세카이(文章世界)』 등에 투고했다.

1917년 졸업 후 도쿄로 상경, 아사쿠사의 사촌 집에 얹혀살며 제일고등학교 1부 을(乙) 영문과에 들어갔다. 이듬해 가을 이즈 여행에서 떠돌이 예인과 교유한 경험은 훗날 『이즈의 무희』의 모티브가 되었다. 이후 10년 동안 유가시마 온천 여관을 드나들었다.

1920년 고등학교 졸업 후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국문과로 전과했다. 대학 동기로는 기타무라 기하치(北村喜八), 혼다 아키라(本多顕彰), 스즈키 히코지로 등이 있었다. 같은 해 곤 도코, 스즈키 히코지로 등과 동인지 『신사조(제6차)』 발행을 기획, 이듬해 실행에 옮겼다. 여기에 발표한 「초혼제일경(招魂祭一景일본어)」이 기쿠치 간에게 인정받아 『분게이슌주』 동인이 되었다. 1924년 대학 졸업 후(졸업 논문은 「일본소설사 소론日本小説史小論」) 요코미쓰 리이치 등과 동인지 『분게이지다이』를 창간, 「이즈의 무희」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다.

2. 3. 신감각파와 다양한 실험 (1924년 ~ 1934년)

1924년 10월,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요코미쓰 리이치 등과 함께 동인 잡지 『문예시대』를 창간했다.[157] 이 잡지는 자연주의에서 유래한 일본 문학 운동에 대한 반발이자,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에도 반대하는 "예술을 위한 예술" 운동이었다.[5] 유럽다다이즘아방가르드 운동에 자극받은 『문예시대』는, 프롤레타리아 문학파의 『문예전선』과 함께 쇼와 문학의 두 흐름을 형성했다.[51][152] 가와바타는 『문예시대』 창간에 대해 종교를 대신하여 문예가 인간 구제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담아 「창간의 글」을 썼다.[157] 창간호에 실린 요코미쓰의 「머리 및 배」를 통해 동인들은 신감각파로 명명되었다.[166]

가와바타는 『문예시대』에 「단편집」, 「제2단편집」이라는 제목으로 단편소설을 자주 게재했다. 이러한 소품들(손바닥 소설)은 실연이나 고아 기질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려는 열망을 담고 있었다.[66] 가와바타는 손바닥 소설이 일본 특유의 발전을 하고, 와카하이쿠처럼 일반 서민들이 창작하는 날이 오기를 꿈꿨다.[152][167]

1926년 1월과 2월에는 「이즈의 춤추는 소녀」,「속 이즈의 춤추는 소녀」를 『문예시대』에 연재하여, 이즈 여행의 추억을 작품화했다. 6월에는 단편소설(손바닥 소설)을 수록한 첫 작품집 『감정 장식』이 금성당에서 간행되었다.

1929년 9월 17일, 아사쿠사 공원 근처로 이사하여, 다시 학생 시절처럼 아사쿠사 주변을 산책했다.[186] 12월부터는 「아사쿠사 홍단」을 『도쿄 아사히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아사쿠사 붐이 일었다.

1930년대에는 나카무라 무라오, 오자키 시로, 류탄지 유 등의 「십삼인 클럽」에 참가했다. 「십삼인 클럽」은 문예를 정치적 강권 아래에 두려는 마르크시즘 문예에 만족하지 못하는 작가들의 단체였다.[32] 1931년 1월과 7월에는 의식의 흐름 수법을 도입한 「수정 환상」을 『개조』에 발표했다. 이 작품은 가와바타가 시도해 온 여러 실험의 도달점이라 할 수 있다.[32]

2. 4. 《설국》과 전후 문학 (1934년 ~ 1968년)

1934년(쇼와 9년) 1월, '문예담화회'가 결성되어 시마자키 도손, 도쿠다 슈세이, 마사무네 하쿠초, 요코미쓰 리이치 등이 참여했고, 가와바타도 회원이 되었다.[59] 6월에는 처음으로 니가타현의 에치고유자와를 방문하여 게이샤 마쓰에이(본명 고다카 기쿠)를 만났으며,[205] 이를 계기로 『설국』의 집필을 시작했다.[194]

『설국』 고마코의 모델·마쓰에이(1934년)


1935년 1월, 「저녁 노을의 거울」을 『문예춘추』에, 「흰 아침의 거울」을 『개조』에 발표하며, 『설국』 연작의 단속적 게재가 시작되었다.[194] 같은 해, 아쿠타가와 상·나오키 상이 창설되어 요코미쓰 리이치와 함께 아쿠타가와 상 심사 위원이 되었다.[194]

1937년 5월 가마쿠라시 니카이도로 이사했다.[194] 6월, 새로 쓴 부분을 더하여 연작을 정리한 『설국』을 소겐샤에서 간행하여 제3회 문예담화회상을 수상했다.[194] 1947년 10월에는 「속 설국(続雪国)」을 『소설 신초』에 발표하며, 약 13년 만에 『설국』을 완결했다.

무려 12년간 창작에 심혈을 기울인[8] 《설국》은 니가타현 미나미우오누마군 유자와정의 온천 마을을 배경으로, 도쿄의 부유한 방탕아 시마무라와 게이샤 고마코의 사랑을 그린 소설이다.[8] 가와바타의 미의식이 절정을 이루는 작품으로 평가받으며,[8]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가와바타는 일본펜클럽 제4대 회장으로 취임하고, 1957년 도쿄에서 열린 국제펜클럽 대회에서 주최국 일본 측 회장으로 활약하는 등 국제적인 활동을 펼쳤다.[286] 1958년에는 국제펜클럽 부회장으로 취임하였다.[286]

1949년부터 『천 개의 학』과 『산의 소리』의 각 장을 단속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66] 『산의 소리』는 전쟁 시대의 상처가 짙게 남아 있는 시대의 가족을 그린 명작으로서 전후 문학의 정점에 위치하는 작품이 되었다.[66] 1954년 『산의 소리』 단행본이 쓰쿠마 서방에서 간행되어 제7회 노마 문예상을 수상했다.[274]

1961년 1월부터 『아름다움과 슬픔과』를 『부인공론』에, 10월부터는 『고도』를 『아사히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했다.[298]

1968년 10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상 위원회는 "일본인의 심정의 본질을 그린, 몹시 섬세한 표현에 의한 서술의 탁월함"을 수상 이유로 밝혔다.[293] 12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수상식에서 가와바타는 일본 정부가 수여한 문화 훈장이 달린 몬쓰키하오리하카마 차림으로 수상에 임했고, 기념 강연 「아름다운 일본의 나」를 행했다.[293]

2. 5. 노벨 문학상 수상과 죽음 (1968년 ~ 1972년)

노벨 문학상 수상 무렵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68년 10월 17일, 일본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11] 수상 이유는 "뛰어난 감수성으로 일본인 정신의 본질을 표현하여 세계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기 때문이다(for his narrative mastery, which with great sensibility expresses the essence of the Japanese mind.)"였다.[307] 대상 작품은 설국, 천우학, 고도와 단편 수월, 점의 편지 등이었다.[308] 1961년에 처음 후보가 된 이후 7년 만에 수상한 것이며,[293][294] 1966년까지 매년 후보가 되었던 것이 밝혀졌다.[295][309]

12월 3일 하네다를 출발하여 스웨덴으로 향했지만, 그날 아침 가와바타는 집을 나서기 직전에 갑자기 "모두, 마음대로 다녀오세요. 저는 가지 않습니다"라고 불쾌해했다.[318] 주변 보도진과 축하객의 소란에 대한 무절제함에 참을 수 있는 한계에 다다른 순간이었다고 보인다.[307] 12월 10일,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린 노벨상 시상식에 몬쓰키하오리하카마 정장을 하고 문화훈장을 걸고 참석했다. 12월 12일에는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양복 차림으로 수상 기념 강연 "아름다운 일본의 나(美しい日本の私일본어) 그 서론"을 일본어로 했다.[23][319] 이 강연에는 도겐, 묘에, 사이교, 료칸, 잇큐 등의 와카와 시, 가 인용되었고, 에드워드 G. 사이덴스티커에 의해 동시통역되었다. 가와바타는 성 루치아 축제(루치아제) 다음 날인 13일에 피로로 쓰러져 식사도 하지 않고 15일 밤까지 잠들어 있었다고 한다.[318]

수상 이후, 1969년부터 1974년에 걸쳐 신초샤에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전집"(전19권)이 간행되었고, 타이베이의 아시아 작가 회의뿐 아니라 1970년에 대한민국에서의 서울 국제펜클럽 대회에 출석하였으며 일본 근대 문학관의 명예 관장으로도 취임했다.[11] 하지만 노벨상 수상 뒤에 발표한 작품은 단편 몇 개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노벨상 수여에 따른 중압이 원인이었다고 한다.[11]

1972년 4월 16일, 가나가와현 즈시시의 맨션 「즈시 마리나」의 자택 작업실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가스 중독에 의한 자살로, 향년 73세였다.[15] 평소 복용하던 수면제 (하이미나르) 중독 증상이 있었고, 서재에서 수면제 빈병이 발견되었다.[38][195] 방에는 "비범한 재능"이라고 높이 평가하여 전년에 구입한 무라카미 히데오의 그림 「카날 그란데」가 장식되어 있었고,[338] 베개 옆에는 막 개봉한 마시다 만 위스키 (조니 워커) 병과 컵이 있었고, 유서 비슷한 것은 없었다고 한다.[24]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국내외에 충격을 주었다.[24]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자살 동기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미시마 유키오와 달리 가와바타는 유서를 남기지 않았고, 그의 글에서 자살에 대한 내용을 상당히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5] 그러나 그의 일본인 전기 작가인 오쿠노 다케오는 그가 200~300일 동안 미시마에 대한 악몽을 꾸었고, 미시마의 유령에 끊임없이 시달렸다고 전했다. 그는 지속적인 우울증 상태에 있었으며, 말년에 친구들에게 여행 중 비행기 사고를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15]

1973년에 재단법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기념회에 의해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이 제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5년에는 이바라키시립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관'이 개관했다. 또한 이바라키시 명예 시민으로도 임명되었다.

3. 작품 목록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소설가로서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집필했으며, 그의 작품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터키어, 한국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16][17]

연도일본어 제목한국어 제목비고
1926伊豆の踊子일본어
Izu no odoriko
이즈의 춤추는 소녀
1930浅草紅團일본어
Asakusa kurenaidan
아사쿠사의 주홍색 무리
1935–1937,
1947
雪国일본어
Yukiguni
설국
1949–1952千羽鶴일본어
Senbazuru
천마리 학
1949–1954山の音일본어
Yama no oto
산의 소리
1950–1951虹いくたび일본어
Niji ikutabi
무지개
1951–1954名人일본어
Meijin
바둑의 명인
1954みづうみ(みずうみ)일본어
Mizuumi
호수
1961眠れる美女일본어
Nemureru bijo
잠자는 미녀의 집
1962古都일본어
Koto
옛 수도
1964美しさと哀しみと일본어
Utsukushisa to kanashimi to
아름다움과 슬픔
1964片腕일본어
Kataude
한 팔
1964–1968, 1972たんぽぽ일본어
Tanpopo
민들레
1923–1972掌の小説일본어
Tanagokoro no shōsetsu
손바닥만한 이야기들테노히라/掌일본어 글자에 대해 tanagokoro 발음을 선호[18]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일본어), 설국(雪国일본어), 고도(古都일본어), 단포포(たんぽぽ일본어), 산소리(山の音일본어), 여자라는 것(女であること일본어), 명인(名人일본어), 이즈의 여로(伊豆の旅일본어), 무희(舞姫일본어) 등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4. 수상 경력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37년 「설국」으로 문예간담회상을 수상했다. 1944년에는 「고향」, 「석양」 등으로 기쿠치간상을 수상했다. 1952년 「천 마리의 종이학」으로 예술원상을 수상했고, 1954년에는 「산소리」로 제7회 노마 문예상을 수상했다. 1958년 도쿄 국제 펜클럽에서 활약한 공로로 제6회 기쿠치간상을, 1962년에는 「잠든 미녀」로 제16회 마이니치 출판 문화상을 수상했다.

1948년부터 1965년까지 일본 펜클럽 회장으로 재임하며 일본 문학을 영어와 기타 서구 언어로 번역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10] 1959년에 프랑크푸르트시 괴테 메달을 수상했고, 1960년에는 프랑스 예술문학훈장 훈장을 받았으며,[10] 1961년에는 일본의 문화훈장을 받았다.[10] 196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69년에는 하와이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17]

5. 일화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는 일본 문학사에 수많은 명작을 남긴 작가로,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쓴 작가로 평가받는다.[199] 그의 작품 대부분은 문단의 연구 대상이 되었으며, 그 자신도 창작에 관한 수필 등을 통해 작품 속 모델, 로케이션, 등장 사물 등이 순전한 창작이 아닌 경우가 많음을 밝혔다.

가와바타는 사람을 오랫동안 응시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181][199] 도둑이 그의 응시에 놀라 도망친 일화나, 하숙집 할머니가 집세 독촉을 포기하고 돌아간 일화 등은 그의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181][199]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그의 시선에 압도되어 식은땀을 흘리거나, 심지어 울음을 터뜨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199][375] 가와바타 자신은 이러한 침묵과 응시에 개의치 않는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상대방이 울음을 터뜨렸을 때 "어떻게 된 겁니까"라고 묻기도 했다.[199][375]

가와바타의 부인 히데코는 "그의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그의 날카로운 눈"이라며, 그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의 단점을 간파하는 데 작용한다고 말했다.[376] 호리 타쓰오의 부인 타에코는 "그 큰 눈을 한결같이 크게 뜨고, 쏘아보듯이 본다"고 표현했으며,[377] 요시유키 준노스케는 "사물 자체의 본질이 비치는 눈", "허무를 비추는 눈"이라고 묘사했다.[378]

미시마 유키오는 가와바타의 눈을 바둑이나 검도 달인의 눈에 비유하며, "사람을 응시하는 죽은 듯한 날카로움이 아니"라고 평했다.[380] 그러나 미시마는 가와바타가 서양인을 바라볼 때는 아이와 같은 순수한 호기심을 보인다고 언급하며, 그의 시선에 담긴 다양한 면모를 드러냈다.[199]

호죠 마코토는 가와바타의 눈빛에 대해 "사물의 본질을 간파하려고 하기 때문에 날카롭게 보이는 것"이며, "상대를 깊이 알려고 하기 때문에 '무섭게'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318]

가와바타는 말수가 적음과 응시하는 버릇 때문에 첫 만남의 사람들에게는 다가가기 어려운 인상을 주었지만, 실제로는 매우 친절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등 따뜻한 면모를 지닌 인물이었다.[199] 미시마 유키오는 가와바타를 "따뜻하고 의협심 있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그의 행동이 위선적이지 않고 "달인"과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199]

무로 세이세이는 가와바타의 인품에 대해 "냉정과 온정의 양면이 싸우고, 가볍게 사람을 사랑하지 않지만,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에서는 이 사람만큼의 작가는 나의 지식 밖이다"라고 말했다.[383]

교토의 사사키주조에서 만든 일본 청주를 맛보고 "이 술의 풍미야말로 교토의 맛"이라며 자신의 작품 고토의 제목을 지어주기도 했다.[401] 말년에는 쿠와하라 타케오에게 그 술을 맛보여 주기 위해 추운 밤에 30분이나 걸어 술을 사러 갔다는 일화도 있다.[401]

바둑을 좋아하여 일본 기원에는 가와바타가 쓴 「심오유현(深奥幽玄)」이라는 족자가 걸려 있다. 아마추어 최상급의 바둑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김소운과의 일화는 그의 바둑 실력을 짐작하게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가노야 해군항공대에 첩보반으로 부임하여 특공에 대한 취재를 하기도 했다.[244] 그는 대본영 보도부 소속 다카도 대위로부터 "특공을 잘 봐 두십시오. 다만 쓰고 싶지 않으면 쓰지 않으셔도 좋다. 언젠가는 이 전쟁의 실상을 글로 써주셨으면 좋겠다"라는 통고를 받았다.[388] 그는 특공대원들과 교류하면서도 특공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는데, 다카도는 "섬세한 신경이었기에 (특공에 관해서) 붓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244]

일본국유철도의 디스커버 재팬 캠페인에 자신의 강연 제목과 비슷한 "아름다운 일본과 나"라는 부제 사용을 승낙하고 직접 글을 써주기도 했다.[404] 1971년에는 히타치 그룹의 TV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으며,[405] 1971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는 하타노 아키라를 지지하며 선거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113][407]

6. 사망과 그 이후

사망 당시 그의 사인은 자살로 보도되었고 이것이 통설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가와바타의 사망 전후 상황으로 볼 때 자살이 아닌 사고사가 아니냐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72년 가스 중독으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미망인을 포함한 여러 측근과 친구들은 그의 죽음을 사고사로 여기고 있다. 도널드 리치가 제기한 한 이론에 따르면, 그는 목욕 준비 중 실수로 가스 밸브를 잠갔다는 것이다. 자살 동기에 대한 여러 이론들이 제기되었는데, 그중에는 건강 악화(파킨슨병 진단), 불륜, 1970년 친구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 충격 등이 있다.[15] 미시마와 달리 가와바타는 유서를 남기지 않았고, (역시 미시마와 달리) 그의 글에서 자살에 대한 내용을 상당히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동기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일본인 전기 작가인 오쿠노 타케오는 그가 200~300일 동안 미시마에 대한 악몽을 꾸었고, 미시마의 유령에 끊임없이 시달렸다고 전했다. 그는 지속적인 우울증 상태에 있었으며, 말년에 친구들에게 여행 중 비행기 사고를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망 당시, 사인은 자살로 보도되었고, 그것이 거의 확정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서가 없었던 점과 사망 전후의 상황으로 미루어 사고사라는 견해도 있다. 각각의 견해의 동기와 근거는 다음과 같다.

;자살설

#사회의 근대화에 따라 일본에서 사라져 가는 「모노노아와레」의 세계에 순교했다는 문학적 견해.[27]

#:가와바타는 패전 후, 〈일본 고래의 슬픔 속으로 돌아갈 뿐이다〉[237]라는 결의 아래 작가 활동을 계속했고, 『아름다운 일본의 나―그 서설』에서는 자신에게도 맥맥이 이어져 내려오는 옛 일본인의 심성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러한 일본인의 심성이었던 「모노노아와레」의 세계가 역사의 필연에 의해 근대 세계로 대체된다면, 자신도 그 멸망해 가는 세계에 순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27]

#:자살한 해에 발표된 수필 『꿈 환상과 같이』에는, 〈친구 모두의 목숨은 이미 멸망했고, 내가 사는 것은 화중의 연꽃〉이라는 노래가 있으며, 마지막에는, 〈오다 노부나가가 노래하고 춤춘 것처럼, 나도 출진의 각오를 새롭게 해야만 한다〉고 결론지었다.[334] 또한 이 해 1월 5일에 있었던 문예춘추사의 신년회에서의 마지막 강연도, 「나도 아직, 신인이고 싶다」라는 말로 끝맺었다.[23][422]

#:유서는 없지만, 생전에, 〈마릴린 먼로의 유서가 없다는 것은, 무언의 죽음은 무언의 말이라고 생각하네요〉라고 말했다.[423]

#교유가 깊었던 미시마 유키오할복 자살(미시마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견해.[424][425][426]

#:가와바타는 장례위원장이기도 했다. 가와바타는, 〈미시마 군의 죽음으로부터 나는 요코미치 군이 떠올라 잊을 수가 없다. 두 천재 작가의 비극이나 사상이 비슷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요코미치 군이 나와 동년배의 무二의 사사友였고, 미시마 군이 나보다 연하의 무二의 사사友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두 사람 이후에 또 다시 살아있는 사사友를 만날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258]

#:미시마 사후 하야시 후사오가 쓴 추도 책 『슬픔의 거문고』에 쓴 서문에, 〈겨울의 눈 오는 날, 비 오는 날, 흐린 날, 나는 쇼난의 바다를 본다. 완전히 혼자의 방에서, 「슬픔의 거문고」를 계속 읽고, 나 자신의 말은 없는 것이다〉라고, 즈시 마리나의 맨션의 방에서 그것을 적고 있었던 것이 나타나 있다.[427]

#:미시마의 죽음이 가와바타의 마음에 충격을 준 것은, 미시마의 재능을 발굴하고 평가했던 가와바타의 심정이었다.[425] 양자는, 「거시적으로는 전후를 부정하는 저변의 정신 구조」로 연결되어 있으며, 「요절의 미학」에 매료되는 마음은 가와바타의 내부에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가와바타도 또한, 다니자키 준이치로나 시가 나가야와 같은 「작가의 정년을 누리는 것」의 길을 일부러 선택하지 않았다.[425]

#노쇠에 대한 공포.

#:침대에 누워서 밑의 처리도 스스로 할 수 없게 되어 죽어간 할아버지·사부로를 돌보았던 15세 때의 기억이, 노쇠에 대한 구체적인 공포가 되었다(할아버지 간병에 관한 것은 단편 『열여섯 살의 일기』에서 그려지고 있다).[428]

#가와바타가 좋아했던 집안일 돕는 사람 겸 운전수 여성(가명·카가와 누이코)이 그만둔다는 것을 알리고, 더 있어 달라고 간청했지만, 그녀가 나가노현 미나미아즈미군 호다카정(현·아즈미노시)으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우스이 요시미의 소설 『사고의 전말』(筑摩書房, 1977년)로부터의 견해.[429][430] 카가와 누이코는, 이토 하츠메와 마찬가지로 부모와의 인연이 희박하고, 친부의 사망 후, 의붓어머니가 재혼하고, 신슈(나가노현)의 화원이 양부가 된 딸이었고, 가와바타가 자택의 집안일 돕는 사람으로 데려왔던 여성이다.[325] 일설(오타니노 아츠시)에 따르면, 가와바타는 누이코에게 강하게 매료되었다고 한다.[431]

#:이 『사고의 전말』은, 유족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제소를 받고, 화해 당시의 조건에 의해 절판되었다. 연구서적인 관점으로부터도, 사실과 전혀 다른 엉뚱한 정보(가와바타나 누이코, 이토 하츠메가 부락 출신자라는 허위)나, 그 여성 본인으로부터 직접 취재하고 들은 것이 아닌 결함 등을 가와바타 연구자로부터도 지적받고 있다.[325] 또한, 부락해방동맹 나가노현 연합회로부터 차별을 조장하는 책으로 규탄받았다.[432] 참고로, 이 카가와 누이코 본인에게, 2012년(헤이세이 24년) 시점에서 접촉을 시도한 모리모토 히토시에 따르면, 누이코는 면담 취재를 일절 거절하고, 『사고의 전말』에 대해서는, 「그 소설 속의 여성과 자신은 무관계이다」라고 하며, 「단 하나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 가와바타 선생님이 집착했는지 어떤지, 모른다는 것입니다」라고 남편을 통해 전하고 있다.[325] 그러나, 누이코가 가와바타의 사망 직후, 양부에게 「선생님의 자살의 원인은 저에게 있는 것 같다」라고 털어놓은 것에 관해서는, 종합적인 관점으로부터 사실일 것이라고 모리모토는 검증하고 있다.[325]

#노벨 문학상 수상 후, 소설의 창작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멈춰 버린 것 등, 상 수상에 의한 다망함이나 중압감에 의한 이유. 가와바타는 수상 후에 〈이 수상은 대단히 명예로운 일이지만, 작가에게 있어서는 명예라는 것은, 오히려 중압감이 되고, 방해가 되어, 압박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465] 연재하고 있던 『민들레』도, 수상 결정의 10월부터 중단되어 버리고, 미완으로 남았다.[465]

#맹장염 수술을 했다든지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과, 타치노 노부유키, 시가 나가야, 친했던 사촌 형제·아키오카 요시아이의 죽음이 잇달아 있고, 몸과 마음이 흔들려 기가 죽어 버려, 순간의 악마에게 사로잡혀 버렸다는 이유.[339]

;사고사설

#이전부터 수면제를 상용하고 있었다. 사망 시 수면제(하이미날) 중독 증상이 있었다고 한다.[38]

#가와바타가 일본 펜클럽 회장 때 신뢰를 보냈던 부회장이었던 세리자와 코지로는, 추도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죽음』에서, 자살이 아니었다는 설을 말하고 있다.[433] 가와바타는, 같은 해 가을에 개최되는 일본 문화 연구 국제 회의(일본 펜클럽 주최)의 준비에서도 책임자로서 다망했다.

6. 1. 자살과 사고사 논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72년 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다. 사인은 자살로 보도되었고 이것이 통설이 되었으나, 유서가 없었던 점과 사망 전후의 상황으로 미루어 사고사라는 견해도 있다.[38]

자살설의 근거로는, 교류가 깊었던 미시마 유키오할복 자살(미시마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점[424][425][426], 1971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후보 하타노 아키라(秦野章)를 지원했으나 낙선한 것에 대한 수치심, 노쇠에 대한 공포[428], 노벨 문학상 수상 후 창작의 어려움[465] 등이 거론된다. 미시마 유키오의 장례식 위원장을 맡기도 했던[258] 가와바타는, 미시마의 죽음 이후 심한 악몽에 시달렸다고 전해지며[425], 지속적인 우울증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자살설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자살은 시기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고, 도쿄도지사 선거 지원은 자살 동기로는 너무 약하며, 노쇠에 대한 공포나 가정부의 퇴직 등은 구체적인 증명이 없거나 주관적인 기술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특히 가와바타가 좋아했던 가정부의 퇴직과 관련된 내용은 우스이 요시미의 소설로 각색되었으나 유족들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해 절판되기도 했다.[429][430]

사고사라는 견해는 가와바타가 평소 수면제를 복용하고 있었다는 점[38], 유서가 없었다는 점, 난방 기구 사용 착오로 인한 가스 중독 가능성 등을 근거로 제시된다. 가와바타의 일본 펜클럽 회장 시절 부회장이었던 세리자와 코지로는 추도기에서 자살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433] 또한 가와바타의 죽음 전후로 그를 만났던 여러 관계자들은 가와바타에게서 자살을 암시하는 어떤 징후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증언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미망인을 포함한 여러 측근과 친구들은 그의 죽음을 사고사로 여기고 있다. 도널드 리치는 가와바타가 목욕 준비 중 실수로 가스 밸브를 잠갔다는 이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6. 2. 사후 평가와 기념 사업

1973년 3월, 재단법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기념회”에 의해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이 제정되었다.[66] 1974년 4월 16일 삼회향에는 이와테현 에사군 이와야타도(현・오슈시 에사구)의 마스자와 분지를 내려다보는 무카야마 공원의 고지에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인연이 있는 땅” 기념비가 건립되었다.[139][344] 또한 이이다 고원에는 가와바타 친필의 글씨 “설월화시최사우”를 새긴 문학 기념비가 건립되었다.[345]

1976년 5월, 가마쿠라시 하세 264번지(현・하세 1-12-5)의 가와바타가의 부지 안에 “가와바타 야스나리 기념관”이 완성되어 공개되었다.[66] 1981년 5월 20일, 오사카의 스미요시 신사 경내에 『반교』의 문학비가 건립되었고[194][346], 6월에는 나가노현 카미스이내군 키무사토무라(현・나가노시 키무사토) 쇼우간지 경내에 『목가』의 한 구절과 가와바타 친필의 도겐 젠지의 “본래의 면목”이 새겨진 문학비가 건립되었다.[194] 이 문학비를 세우는 것을 발안한 가와마타 준도는 1936년 11월 23일 신장제의 학교식 귀가길에 가와바타에게 길을 물었던 초등학생이었다.[194][347]

같은 해 1981년 5월 1일에는 이즈의 유가시마의 수생지에 『이즈의 춤꾼』의 서두 문장을 새긴 새로운 문학비가 세워지고 제막식이 거행되었다.[348] 비 왼쪽에는 가와바타의 얼굴을 딴 청동 레리에프가 있다.[348] 1985년 5월에는 이바라키시립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관이 개관했다.

1995년,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체류했던 구주정 우에노구치 온천의 여관의 한 방이 현의 커뮤니티 소책자에 소개되었다.[349] 2009년 11월 14일, 기후현 기후시 미나토정 397-2의 호텔 파크에서 우카이 관람선 승강장으로 가는 도중의 포켓 파크명수에 소설 『봉화』에 착안한 “봉화의 상”이 건립되어 제막식이 거행되었다.[350]

2014년에는 가와바타가 이토 하츠에에게 보낸 미투고 서간 1통과 하츠에로부터 가와바타에게 보낸 서간 10통이 가와바타의 구택에서 발견되었다.[351][352][353][354] 2018년 이바라키시에 의해 가와바타 야스나리 청춘 문학상이 제정되었다.[355]

2019년, 탄생 120주년을 맞아 히메지시립미술관과 히메지문학관에서 “탄생 120주년 문호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미의 컬렉션전”이 개최되어, 가와바타가 수집한 미술품이나 직필 원고, 서간 등 약 280점이 공개되었다.[356][357]

2022년, 사후 50년을 맞아 일본근대문학관에서는 “사후 50년・일본근대문학관 개관 55주년 가와바타 야스나리전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사랑받은 사람―”이 개최되었다.[358][359] 가나가와근대문학관에서는 특별전 “사후 50년 가와바타 야스나리전 무지개를 짓는 사람”이 개최되어 약 400점의 자료가 전시되었다.[361][362][363] 게임 「문호와 연금술사」와의 타이업 기획도 있었다.[363][36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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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논문 1987
[27] 논문 2003
[28] 논문 第三章 精神の傷あと―『みち子もの』と『伊豆の踊子』― 川嶋 1969
[29] 논문 論考 1991
[30] 논문 基底 1979
[31] 논문 新感覚――『文芸時代』の出発 アルバム川端 1984
[32] 논문 第一編 評伝・川端康成――非情 板垣 2016
[33] 논문 第二部第五章 新人才華 進藤 1976
[34] 논문 太陽 2009
[35] 서적 茨木の名誉市民 川端康成氏と豊川―その幼少期と手紙― 私家版 1970-04
[36] 간행물 孤児根性について 愛知教育大学 1969-02
[37] 간행물 解説
[38] 간행물 川端康成集注釈、川端康成年譜、注釈者あとがき
[39] 간행물 川端康成 略年譜
[40] 간행물
[41] 간행물 祖母 若草 1925-09
[42] 간행물 思ひ出すともなく 毎日新聞 1969-04-23
[43] 간행물 父母への手紙(続)(父母への手紙 第三信) 若草 1932-09
[44] 간행물 あるかなきかに(父母への手紙 第五信) 文藝 1934-01
[45] 간행물 少年 人間 1948-05-1949-03
[46] 간행물 私のふるさと 週刊サンケイ 1963-07-15
[47] 간행물 作家に聞く――川端康成、川端康成 文學 1953-03
[48] 간행물 第一編 評伝・川端康成――孤児
[49] 서적 若き日の川端康成氏と川端家、ノーベル賞受賞の川端康成氏と川端家、川端康成とふるさと 宿久庄 1972-08, 1971-04, 1990-04
[50] 간행물 川端家の親戚たち―康成の階層的基盤― 文學 1976-03
[51] 간행물 年譜
[52] 간행물 故園 文藝 1943-05-1945-01
[53] 간행물 年譜
[54] 간행물 川端康成、その故郷 新潟大学 新大国語 1975-03
[55] 간행물 十六歳の日記 文藝春秋 1925-08-09
[56] 간행물 川端康成と祖父三八郎 国語と国文学 1975-11
[57] 간행물 資料断片・川端康成の系図 位置 1963-10
[58] 간행물 川端康成、家柄と家系意識 愛知教育大学 国語国文学報 1974-12
[59] 간행물 文学的自叙伝 新潮 1934-05
[60] 간행물 父母への手紙(第一信) 若草 1932-01
[61] 간행물 行燈――落花流水 風景 1964-02
[62] 간행물 抒情歌 中央公論 1932-02
[63] 간행물 油 新思潮 1921-07
[64] 간행물 川端康成伝の問題点
[65] 서적 人類みな兄弟 講談社 1985-08
[66] 간행물 川端康成年譜
[67] 간행물 会葬の名人(のち「葬式の名人」) 文藝春秋 1923-05
[68] 간행물 父母への手紙(続)(父母への手紙 第四信) 若草 1933-09
[69] 간행물 『内に深く泉を胸に探る』少年
[70] 개인기록 春夜友を訪ふ 1920-03-03
[71] 書籍 あとがき 新潮社 1948-05-00
[72] 書籍 康成と壮一と サンケイ新聞生活情報センター 1982-04-00
[73] 雑誌記事 後姿 1932-04-00
[74] 雑誌記事 日向 1923-11-00
[75] 雑誌記事 骨拾ひ 1949-10-00
[76] 書籍 あとがき 新潮社 1948-12-00
[77] 雑誌記事 大黒像と駕籠 1926-09-00
[78] 雑誌記事 一流の人物 1926-07-00
[79] 書籍 作家案内――川端康成
[80] 雑誌記事 春を見る近眼鏡 1926-04-00
[81] 日記 當用日記 1915-02-04
[82] 日記 當用日記 1915-03-01
[83] 雑誌記事 文章雑感 1932-03-00
[84] 日記 當用日記 1916-01-20
[85] 書籍 『伊豆の踊子』成立考
[86] 日記 當用日記 1916-04-11
[87] 原稿 湯ヶ島での思ひ出 1922-08-00
[88] 書籍 寛政重修諸家譜
[89] 雑誌記事 川端君の若い頃 筑摩書房 1955-11-00
[90] 雑誌記事 無常迅速――青春修行記 1950-05-00
[91] 学術論文 新資料紹介 川端康成『生徒の肩に柩を載せて 葬式の日、通夜の印象』 2012-00-00
[92] 書籍 年譜
[93] 雑誌記事 川端康成君の生活 有精堂 1929-11-00
[94] 書籍 第一章 生い立ち――一高めざして上京
[95] 雑誌記事 父の名 1943-02-00
[96] 雑誌記事 『浅草紅団』について 1951-05-00
[97] 雑誌記事 川端君と盛岡 1968-11-00
[98] 書簡 川端松太郎宛ての葉書 1918-10-31
[99] 書簡 川端松太郎宛ての葉書 1918-11-02
[100] 書籍 天城路慕情――「伊豆の踊子」のモデルを訪ねて 新塔社 1978-11-00
[101] 雑誌記事 川端康成の青春――未発表資料、書簡、読書帳、『新晴』(二十四枚)による― 1979-08-00
[102] 書籍 第二章 文壇へのデビュー――出世作『伊豆の踊子』
[103] 日記 當用日記 1915-03-30
[104] 書籍 川端康成の思い出
[105] 日記 日記 1922-05-01
[106] 간행물 康さん 1972-11
[107] 간행물 川端康成と心霊学 1970-05
[108] 일기 日記 1923-01-01
[109] 간행물 川端康成 2005
[110] 간행물 青春を語る―よき師、よき友に恵まれて― 学習研究社 1969-11
[111] 간행물 ちよ 1919-06-18
[112] 간행물 処女作の祟り 1927-05
[113] 간행물 本当の自殺をした男 1972-06
[114] 서적 川端康成の許婚者 伊藤初代の生涯 江刺文化懇話会 1991-02
[115] 간행물 第十六章 川端康成の恋 2010
[116] 간행물 “カフェ下宿”事件など 1963-01
[117] 간행물 『伊豆の踊子』論―踊子・薫の二面性をめぐって― 1975-11
[118] 서적 川端康成と岩谷堂 江刺文化懇話会 1972-12
[119] 간행물 川端さんのこと 1974
[120] 간행물 川端康成・愛の体験 1976-03
[121] 간행물 あとがき 新潮社 1948-08
[122] 간행물 南方の火 1923-08
[123] 간행물 第一章 死の影のもとに――〈魔界〉の淵源 第六節 運命のひと 伊藤初代 null
[124] 간행물 『南方の火』の写真 1972-11
[125] 간행물 篝火 1924-03
[126] 간행물 南方の火 新潮社 1948-08
[127] 간행물 愛の体験・第二部 1978-03
[128] 간행물 第一部第七章 恋愛 null
[129] 간행물 横光利一弔辞 1948-02
[130] 간행물 非常 1924-12
[131] 간행물 彼女の盛装 1926-09
[132] 간행물 川端さんとの五十年 1972-06
[133] 간행물 あとがき 新潮社 1948-10
[134] 간행물 暴力団の一夜 1927-05
[135] 일기 日記 1923-11-20
[136] 간행물 第一章 死の影のもとに――〈魔界〉の淵源 第七節 喪われた物語『篝火』 null
[137] 간행물 『川端康成』編 解説 1994
[138] 간행물 第一編 評伝・川端康成――愛 2016
[139] 간행물 愛の体験・第三部 1978-03
[140] 간행물 川端康成『父の十年』―『旅心の美しさ』と『明るい喜び』― 2013-03
[141] 간행물 感謝――私の得た最初の原稿料 1925-01
[142] 간행물 今月の創作界 1922-01-31, 1922-02-15, 1922-02-17, 1922-02-18
[143] 간행물 新春創作評 犬養健氏の三作 1923-02
[144] 간행물 日記 1924-03-30
[145] 간행물 犬養健氏 1928-11
[146] 웹사이트 製造の歴史 Vol.3 国内向け「森永ビスケット」の誕生 https://www.morinaga[...] 森永ビスケット公式サイト 2024-09-27
[147] 간행물 芥川龍之介氏と吉原 1929-01-13
[148] 서적 人権からみた文学の世界【大正篇】 https://books.google[...] ゴマブックス 2015
[149] 웹사이트 第56回NSRI都市・環境フォーラム (no.296) 『デモクラシーの帝都~東京が世界第一級となりえた時代の都市と建築』 松葉一清氏 武蔵野美術大学教授 https://www.nikken-r[...] 2012-09-11
[150] 기타
[151] 간행물 大火見物 1923-11
[152] 간행물 第一編 評伝・川端康成――出発
[153] 간행물 遺産と魔 "1923-12-26-1923-12-29"
[154] 간행물 第一部第十章 『文藝時代』創刊
[155] 간행물 あとがき 新潮社 1951-04
[156] 간행물 五月の手帖 1929-05
[157] 간행물 『文藝時代』創刊の辞――〈新しき生活と新しき文藝〉 1924-10
[158] 간행물 あとがき 新潮社 1950-03
[159] 간행물 佐々木味津三宛ての書簡 1924-08-15
[160] 간행물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24-08-22
[161] 간행물 文藝春秋の無礼 1924-12
[162] 간행물 ユダの揚言 1925-02
[163] 간행물 第二部第一章 『文藝時代』廃刊
[164] 간행물 第十五章 菊池寛『文藝春秋』を創刊
[165] 간행물 新感覚時代――国語との血戦
[166] 간행물 新感覚派の誕生 1924-11
[167] 간행물 掌篇小説の流行 1926-01
[168] 간행물 あとがき 改造社 1938-08
[169] 간행물 第一章 出会い
[170] 간행물 第一年 1925-12
[171] 간행물 作家案内―川端康成
[172] 간행물 あとがき 新潮社 1949-03
[173] 간행물 あとがき 新潮社 1949-06
[174] 간행물 文学的回想 新潮社 "1953-10-1954-12"
[175] 간행물 外村繁宛ての書簡 1927-01-01
[176] 간행물 湯ヶ島の日々 1985
[177] 간행물 『伊豆の踊子』の装幀その他 1927-05
[178] 서간 淀野隆三宛ての書簡 1927-03-07
[179] 서간 淀野隆三宛ての書簡 1927-01-04
[180] 간행물 四つの机 1940-07-02
[181] 간행물 熱海と盗難 1928-02-05
[182] 간행물 嘘と逆 1929-12
[183] 서간 仲町貞子宛ての書簡 1928-03-20
[184] 서간 川端秀子宛ての書簡 1928-02-15
[185] 간행물 村山知義氏と熱海 1928-11-25
[186] 간행물 上野桜木町へ 1929-11
[187] 간행물 浅草の川端先生 平凡社 1957
[188] 간행물 第二部第四章 浅草
[189] 간행물 文芸張雑 文学上の左翼 1929-10
[190] 간행물 第二章 愛犬秘話
[191] 간행물 三月文壇の一印象 1933-04
[192] 간행물 第二部第七章 昭和八年
[193] 간행물 第二部第六章 一つの整理期
[194] 간행물 第三章 千客万来の日々――満州行
[195] 간행물 第十一章 自裁への道――〈魔界〉の果て 第六節 昭和四十七年四月十六日
[196] 간행물 第五章 ひとつの断層―みち子像の変貌と『禽獣』の周辺―
[197] 간행물 略年譜 1984
[198] 간행물 解説 河出書房 1950-08
[199] 간행물 永遠の旅人――川端康成氏の人と作品 1956-04
[200] 간행물 川端康成の東洋と西洋 1957-02
[201] 간행물 純文学の精神 1933-07-07
[202] 간행물 文芸復興とは 1934-01-01
[203] 간행물 新人待望 1934-01
[204] 간행물 末期の眼 1933-12
[205] 간행물 『雪国』のモデル考――越後湯沢のおける川端康成 1972-11
[206] 간행물 川端康成 中央公論社 1955-02
[207] 간행물 文芸時評 中島直人氏 1934-02-01
[208] 간행물 『いのちの初夜』推薦 1936-02
[209] 간행물 文芸時評 『純粋小説論』の反響 1935-06
[210] 서간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35-10-22
[211] 논문 川端康成宛ての葉書 1935-11-02
[212] 논문 川端さんの家 新潮社 1960-04
[213] 논문 文芸時評 佐左木俊郎氏 1933-06
[214] 논문 文芸時評 1935-07
[215] 논문 覚書 金星堂 1936-01
[216] 논문 軽井沢だより 1936-10
[217] 논문 第一編 評伝・川端康成――回帰
[218] 논문 略年譜
[219] 논문 秋風高原――落花流水 新潮社
[220] 논문
[221] 논문 あとがき 新潮社 1949-12
[222] 논문 文芸時評 豊田正子 1938-11-03
[223] 논문 文芸時評 徳田、正宗氏の作品 1933-07-01
[224] 논문 文芸時評 懸賞入選作品 1934-02
[225] 뉴스 囲碁二十一世名人、死去 毎日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 1940-01-19
[226] 서적 大晦日のローストビーフ――23の物語 文化出版局 1976-07
[227] 논문 第三部第二章 敗戦
[228] 논문 文芸時評 わが愛の記 1941-03
[229] 논문 敗戦のころ 1955-08
[230] 논문 座談会「川端康成氏を囲んで」
[231] 논문 満州国の文学 1944-07
[232] 논문
[233] 논문
[234] 논문 第四章 戦時下の川端康成――自己変革の時代(一)第三節 『故園』の祖父と『英霊の遺文』
[235] 논문
[236] 논문
[237] 논문 哀愁 細川書店 1947-10
[238] 논문 東海道
[239] 논문 片岡鉄兵の死 1945-03
[240] 논문
[241] 논문
[242] 논문 英霊の遺文 1944-12
[243] 논문 選者として(戦記文学賞制定発表) 1944-06
[244] 논문
[245] 논문 第四章 戦時下の川端康成――自己変革の時代(一)第五節 鹿屋特攻基地
[246] 書籍 第三章 作家の声名の確立――特攻隊への鎮魂 実録 1992
[247] 雑誌 生命の樹 婦人文庫 1946-07
[248] 書籍 山根 1979
[249] 書籍 敗戦日記 文藝春秋新社 1959-04
[250] 書籍 杉山 1972
[251] 書籍 第五章 鎌倉文庫 秀子 1983
[252] 書籍 第四章 戦時下の川端康成――自己変革の時代(一)第七節 終戦と島木健作追悼 森本・上 2014
[253] 書籍 11 玉音放送――8月15日正午〔ホッとする国民〕 クックス 1971
[254] 雑誌 島木健作追悼 新潮 1945-11
[255] 雑誌 武田麟太郎と島木健作 人間 1946-05
[256] 新聞記事 私の遍歴時代 東京新聞
[257] 書籍 IV 川端康成と三島由紀夫 越次 1983
[258] 雑誌 三島由紀夫 新潮 1971-01
[259] 雑誌 続・川端康成の思い出(二) 補巻2・書簡 1984
[260] 雑誌 十五年戦争下の川端康成 社会文学 1991-07
[261] 雑誌 川端康成文学の魅力 国文学 解釈と鑑賞 1991-09
[262] 書籍 隣人・川端康成 文藝春秋 1969
[263] 書籍 江分利満家の崩壊 新潮社 2012-10
[264] 展覧会図録 川端康成コレクション 伝統とモダニズム 東京ステーションギャラリー 2016
[265] 書籍 日本ペンクラブ三十年史 社団法人日本ペンクラブ 1967-03
[266] 雑誌 判決の日 社会 1949-01
[267] 書籍 川端康成の芸術的抵抗――菊地と横光を葬う 三枝 1961
[268] 書籍 あとがき 川端康成全集第10巻 花のワルツ 1950-05
[269] 書籍 小谷野 2013
[270] 雑誌 天授の子 文學界 1950-02
[271] 書籍 『ただ一つの日本の笛』を吹く アルバム川端 1984
[272] 書簡 川端秀子宛ての書簡 1950-04-26, 1950-04-27
[273] 雑誌 新日本名所案内62 水郷 週刊朝日 1965-07-02
[274] 書籍 あとがき 川端康成全集第15巻 千羽鶴・山の音 1953-02
[275] 新聞記事 朝日新聞夕刊 1952-03-26
[276] 書籍 川端さん、久重への旅
[277] 雑誌 九州の旅から 芸術新潮 1953-08
[278] 書籍 略年譜
[279] 書籍 あとがき 三笠書房 1953-02
[280] 書籍 懐しき文士たち 戦後篇 文春文庫
[281] 서적 川端文学――海外の評価 早稲田大学出版部 1969-04
[282] 논문 川端文学とノーベル賞――盈虚の美学の微茫な接点 1991
[283] 간행물 川端康成氏の欧州旅行から 新潮 1957-08
[284] 간행물 川端・モーリヤック会見記 新潮 1957-09
[285] 논문 三十歳を迎えるペンクラブ
[286] 뉴스 雨のち晴――国際ペン大会を終つて 朝日新聞 1957-09-10
[287] 서적 ハワイの虹 晩成書房 1978-09
[288] 서적 新聞集成昭和編年史 昭和34年版 3(自5月-至6月) 新聞資料出版 2011
[289] 서적 新聞集成昭和編年史 昭和34年版 5 (自9月-至10月) 新聞資料出版 2012
[290] 논문 第七章 美への耽溺―『千羽鶴』から『眠れる美女』まで―
[291] 논문 第三部第六章 晩年
[292] 서적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61-05-30
[293] 웹사이트 川端康成 ノーベル賞選考で新資料 https://web.archive.[...] 2012-09-04
[294] 뉴스 三島由紀夫、ノーベル文学賞最終候補だった 63年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4-01-03
[295] 뉴스 三島ノーベル賞目前だった 読売新聞 2014-01-04
[296] 뉴스 ノーベル文学賞の65年選考 川端が「日本人で最有力」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6-01-05
[297] 웹사이트 記者が見た ノーベル文学賞秘話 https://web.archive.[...] 2018-10-10
[298] 서적 古都 新潮社 1962-06
[299] 서적 「伊豆の踊子」物語 フィルムアート社 1994-07
[300] 논문
[301] 논문 一草一花――『伊豆の踊子』の作者
[302] 뉴스 文化大革命に関する声明 東京新聞 1967-03-01
[303] 논문 三島由紀夫と戦後 中央公論新社 2010-10
[304] 논문 第四章 川端家の人びと
[305] 간행물 父 川端康成のこと 新潮臨時増刊 川端康成読本 1972-06
[306] 논문
[307] 논문 第三部第七章 ノーベル賞受賞
[308] 논문 第9章 抱擁する『魔界』――たんぽぽ
[309] 웹사이트 川端康成 ノーベル文学賞受賞2年前の選考で高評価 https://web.archive.[...] 2017-01-03
[310] 뉴스 川端康成氏にノーベル文学賞 毎日新聞 1968-10-18
[311] 논문 かなたへの疾走
[312] 웹사이트 ノーベル文学賞 明らかになる“秘話” http://www9.nhk.or.j[...] NHK News Web 2015-03-31
[313] 방송 特別番組 川端康成氏を囲んで NHK
[314] 논문 年譜 1968-10-18
[315] 논문 作家案内―川端康成:戦後川端文学の意味――分裂する二つの時計
[316] 간행물 秋の野に 1968-12
[317] 간행물 夕日野 1969-01
[318] 서적 川端康成・心の遍歴 二見書房 1969
[319] 간행물 第四章 戦後の名作と社会的活動――日本の心を語る
[320] 간행물 キスリングの少女
[321] 간행물 茨木市で 新潮社 1968-12
[322] 서적 #추정 1997
[323] 간행물 伊藤整 1970-01
[324] 서적 川端康成と東山魁夷――響きあう美の世界 求龍堂 2006-09
[325] 간행물 エピローグ 三十五年後の『事故のてんまつ』――虚実と『縫子』をめぐる人びと
[326] 뉴스 川端康成氏、台北へ アジア作家会議に出席 朝日新聞 1970-06-15
[327] 간행물 『事故のてんまつ』その後 1977-11
[328] Youtube 三島由紀夫 自決 Yukio Mishima No.880_1 https://www.youtube.[...] 中日映画社
[329] 간행물 『母』なるものへの旅心
[330] 간행물 恩師に代わりて序を書く――川端康成先生と『三島事件』――
[331] 간행물 あとがき 新潮社 1973-01
[332] 간행물 二つの歌碑―展覧化プロデュースの軌跡― 求龍堂 2006-09
[333] 간행물 川端康成コレクションのすべて 東山魁夷と川端康成、魂の交流
[334] 간행물 夢 幻の如くなり 1972-02
[335] 간행물 『眼』の記憶 1992
[336] 간행물 手記 わが父 川端康成 1972-07
[337] 간행물 夫・川端康成の生と死 1977-11
[338] 간행물 終章 虚空に處はしたまへ
[339] 간행물 第六章 終章
[340] 간행물 死面(デス・マスク)をとる 1972-06
[341] 서적 #추정
[342] 간행물 小説・川端康成 1972-07
[343] 서적 #추정
[344] 간행물 出世作『伊豆の踊子』の慕情
[345] 웹사이트 『川端康成記念碑』 https://web.archive.[...]
[346] 웹사이트 川端康成文学碑 https://osaka-info.j[...] 2015-03-09
[347] 서적 川端康成と信州 あすか書房 1996-11
[348] 간행물 『伊豆の踊子』と新文学碑 1981-05-23
[349] 간행물 『広報おおいた』 https://www.pref.oit[...] 大分県 1995-08
[350] 뉴스 川端文学に触れて…『篝火の像』岐阜市に建立へ 岐阜新聞 2009-09-29
[351] 뉴스 川端康成 初恋の手紙発見 読売新聞 2014-07-09
[352] 웹사이트 川端康成が恋人に宛てた手紙見つかる http://www9.nhk.or.j[...] NHK「かぶん」ブログ(NHK科学文化部) 2016-03-11
[353] 논문 恋文 2014
[354] 논문 川端康成 初恋の頃 2016
[355] 서적 最新文学賞事典2014-2018 日外アソシエーツ 2019
[356] 웹사이트 生誕120年 文豪川端康成と美のコレクション展 https://www.museum.o[...] アイエム(インターネットミュージアム) 2022-10-11
[357] 웹사이트 川端康成の美意識探る 収集の国宝や直筆原稿展示 姫路 https://www.kobe-np.[...] 兵庫おでかけプラス 2022-10-11
[358] 서적 川端康成展 人を愛し、人に愛された人 公益財団法人日本近代文学館 2022
[359] 웹사이트 没後50年・日本近代文学館開館55周年 川端康成展 ―人を愛し、人に愛された人― https://www.bungakuk[...] 日本近代文学館 2022-10-11
[360] 웹사이트 大阪で川端康成没後50年展 小説「古都」の苦労話紹介 https://news.yahoo.c[...] 共同通信 2022-10-11
[361] 서적 没後50年 川端康成展 虹をつむぐ人 県立神奈川近代文学館、公益財団法人神奈川文学振興会 2022
[362] 웹사이트 特別展「没後50年 川端康成展 虹をつむぐ人」 https://www.kanabun.[...] 神奈川近代文学館 2022-10-11
[363] 뉴스 垣間見る文豪の素顔 神奈川近代文学館 没後50年川端康成展 2022-10-10
[364] 웹사이트 「神奈川近代文学館×文豪とアルケミスト」タイアップ https://bungo.dmmgam[...] DMM GAMES 2022-10-11
[365] 논문 川端康成 人と作品 2003
[366] 논문 第二部第二章 昭和文壇 1976
[367] 논문 川端康成の芸術 1938
[368] 뉴스 川端康成ベスト・スリー――『山の音』『反橋連作』『禽獣』 毎日新聞 1955-04-11
[369] 논문 川端文学の特質 1969
[370] 논문 『みづうみ』と『眠れる美女』 1962
[371] 논문 人と作品――川端文学の源郷 1991
[372] 논문 パリ安息 1964-07-12
[373] 논문 川端康成 1958
[374] 논문 横光利一と川端康成 1955-02
[375] 논문 現代作家寸描集――川端康成 1949-09
[376] 논문 あの鋭い眼が……――私の夫に就て語る 1929-12
[377] 논문 川端先生のこと 1960
[378] 논문 川端康成論断片 1968
[379] 논문 川端康成コレクションのすべて 豊穣の時を迎えて――近代絵画 2009
[380] 논문 川端康成印象記 1946-01-27
[381] 논문 當用日記 1916-01-23
[382] 논문 2013
[383] 논문 推薦文 1959
[384] 논문 2013
[385] 논문 川端さんの寛容 1961-08
[386] 논문 (제목 정보 없음) 1994
[387] 뉴스 最後の従軍 朝日新聞 1962-08-06
[388] 논문 (제목 정보 없음) 1994
[389] 뉴스 最後の従軍 朝日新聞 1962-08-06
[390] 편지 1945-05-02
[391] 편지 1945-04-28
[392] 논문 (제목 정보 없음) 1979
[393] 논문 (제목 정보 없음) 1972
[394] 논문 (제목 정보 없음) 1972
[395] 논문 (제목 정보 없음) 2010
[396] 논문 (제목 정보 없음) 2009
[397] 논문 (제목 정보 없음) 2009
[398] 논문 (제목 정보 없음) 1987
[399] 논문 (제목 정보 없음) 1987
[400] 서적 海軍神雷部隊 最初の航空特別攻撃隊 海軍神雷舞台戦友会 1996-03
[401] 잡지 川端康成氏との一夕 文藝春秋 1972-06
[402] 웹사이트 川端康成、白洲正子、織田作之助…が通った名店を訪ねて https://intojapanwar[...] 小学館 2023-11-17
[403] 웹사이트 チキンバスケット発祥!三島由紀夫が通った 「銀座キャンドル」が麻布十番に復活オープン! https://www.atpress.[...] ソーシャルワイヤー株式会社 2023-11-17
[404] 잡지 ディスカバー・ジャパンの衝撃、再び Voice 2010-10
[405] 잡지 川端康成氏CM出演の波紋! ヤングレディ 1971-07
[406] 뉴스 川端康成のカラー映像見つかる テレビCM用か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5-02-24
[407] 잡지 三十二 三島の霊と話をしていた川端康成
[408] 잡지 特集 おそるべし川端康成コレクション 芸術新潮 2007-02
[409] 뉴스 川端邸 文豪の書画続々 朝日新聞 2017-01-25
[410] 잡지 反橋 風雪別冊 1948-10
[411] 잡지 あとがき
[412] 잡지 解説 横光利一 中央公論社 1966-04
[413] 잡지 聖徳太子幼像 口絵解説 新潮社 1960-06
[414] 잡지 口絵解説 新潮社 1949-09
[415] 잡지 川端康成コレクションのすべて 豊穣の時を迎えて――茶道具・うつわ類 美を見出す眼
[416] 잡지 凍雲篩雪(浦上玉堂)口絵解説 新潮社 1960-05
[417] 잡지 凍雲篩雪(浦上玉堂)口絵解説 新潮社 1970-01
[418] 잡지 川端康成、満州を撮る
[419] 서적 川端康成 美しい日本 鎌倉文学館 特別展 開館35周年記念 2020-10-04
[420] 서적 川端康成 美しい日本 鎌倉文学館 特別展 開館35周年記念 2020-10-04
[421] 법령 昭和30年6月22日文化財保護委員会告示第33号
[422] 잡지 新人でゐたい 1972-06
[423] 서적 川端康成氏に聞く(三島由紀夫と中村光夫との座談会) https://iss.ndl.go.j[...] 河出書房新社 1962-12
[424] 잡지 三島由紀夫と川端康成 1972-12
[425] 잡지 時空を超越するもの 1972-07
[426] 서적 21 『わが友ヒットラー』
[427] 서적 『悲しみの琴』に献辞
[428] 서적 川端康成の生と死
[429] 서적 事故のてんまつ 筑摩書房 1977-06
[430] 서적 私小説のすすめ 平凡社 2009-07
[431] 서적
[432] 서적 第十二章 五年後の『事故のてんまつ』 第六節 『事故のてんまつ』の部落差別
[433] 서적 人間の意志 新潮社 1990-07
[434] 서적 第一部第二章 出生
[435] 잡지 川端康成、母の秘密と身替りの母 1974-06
[436] 서적 第六章 『住吉』連作――〈魔界〉の門 第七節 痛恨と断念『隅田川』
[437] 서적 林房雄宛ての書簡 1939-07-27
[438] 서적
[439] 서적
[440] 오디오 川端康成ハワイ大学講義 源氏物語と自作を語る アポロン音楽工業 1987
[441] 웹사이트 川端康成が囲碁殿堂入り(第19回囲碁殿堂表彰) https://www.nihonkii[...]
[442] 서적 解題――生きてゐるのに
[443] 서적 文豪をめぐる八人の作家たち
[444] 서적 ノーベル紀行 文研出版 1973-04
[445] 서적 石濱恒夫宛ての書簡 1950-03-07
[446] 서적 淀野隆三宛ての書簡 1927-02-01
[447] 잡지 梶井基次郎 1934-09
[448] 서적 片岡光枝宛ての書簡 1944-08-09
[449] 서적 手帖 (Pocket Diary) 1915
[450] 서적 當用日記 1916-01-24
[451] 서적 川端康成コレクションのすべて 美の存在と発見――古賀春江
[452] 잡지 文芸時評 窪川氏の『レストラン・洛陽』 1929-10
[453] 서적 川端さんとの縁 ゆまに書房 1999-04
[454] 신문 文芸時評 『無法人』と『万暦赤絵』 1933-08-30
[455] 잡지 志賀直哉 1971-12-1972-03
[456] 간행물 芥川龍之介賞選評第一回昭和十年上半期 文藝春秋 1935-09
[457] 간행물 川端康成へ 文藝通信 1935-10
[458] 간행물 太宰治氏へ 芥川賞に就いて 文藝通信 1935-11
[459] 서적 川端康成宛ての書簡 筑摩書房 1999-04
[460] 간행물 芥川賞予選記 文學界 1936-09
[461] 간행물 日記 1923-01-06
[462] 간행물 第二部第十二章 『童謡』
[463] 간행물 追悼記序 文學界 1938-02
[464] 서적 序 真光社 1948
[465] 간행물 孤独と向きあって
[466] 간행물 三島由紀夫宛ての書簡 1962-04-17
[467] 간행물 三島の死と川端康成 新潮 1990-12
[468] 간행물 恐るべき計画家・三島由紀夫―魂の対話を読み解く
[469] 간행물 横光利一文学碑 1959-12
[470] 서적 二人だけの「愛・宇宙」六十兆個のバラード 近代文藝社 2010-12
[471]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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