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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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계광순은 평안북도 선천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관료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에는 정치인과 기업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강원도, 함경남도 등에서 고위직을 역임하며 독립운동 탄압에 가담했다. 광복 후에는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가 탈출한 경험을 바탕으로 납북 인사들에 대한 증언을 남겼다. 2002년과 2008년 친일파 명단에,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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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광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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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계광순 |
국적 | 대한제국 → 대한민국 |
출생일 | 1909년 2월 16일 |
사망일 | 1990년 3월 19일 |
본관 | 수안 계씨 |
정치 | |
의정 활동 |
2. 생애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으로, 신의주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마쓰야마(松山)고등학교를 거쳐 1932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이듬해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관료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평강군 군수, 함경남도 경찰부 보안과장,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강원도 및 평안북도 내무부장 등 고위직을 역임하며 식민 통치에 적극 협력했다. 특히 독립운동 탄압, 내선일체 및 황민화 정책 선전, 조선임전보국단 결성 관여 등 뚜렷한 친일 행적을 보였다.[5][6]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광복 당시 37세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관료 이력을 쌓았다.
광복 후에는 일제 강점기 관료로 근무했던 강원도를 기반으로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민주당 소속으로 4대, 5대, 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한국 전쟁 중에는 조선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가 탈출한 경험이 있으며,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납북 인사들에 대한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7][8] 정계 은퇴 후에는 한국광업주식회사 사장, 한국제포사 회장 등을 지내며 기업인으로 활동했다.[1][3]
199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사망했으며[4], 사후 그의 일제 강점기 활동이 인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다[3].
2. 1. 일제 강점기 활동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으로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마쓰야마(松山)고등학교를 거쳐 1932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이듬해인 1933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식민지 조선의 관료로 활동하기 시작했다.초기에는 강원도 경부와 평강군 군수(1934년), 파주군 군수(1934년) 등을 지냈으며, 이후 경상남도 광공부장,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강원도지부 감리관, 강원도 참여관, 강원도 농회장 등 식민지 조선의 고위직을 역임했다. 특히 독립운동 탄압과 전시 동원 체제 구축에 깊이 관여했으며,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직책 | 비고 |
---|---|---|
1932년 |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 |
1933년 |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합격 | |
1934년 | 평강군 군수, 파주군 군수 | |
1936년 | 함경남도 경찰부 보안과장 (경시) | 독립운동 탄압 역할 수행 |
1937년 | 척무성 식산국 사무관 | |
1940년 |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겸임 |
1940년경 | 조선미술가협회 이사장 |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재직 시, 친일 미술인 지원[5] |
1943년 | 강원도 내무부장 | |
1944년 | 평안북도 내무부장 | 조선근로동원원호회 평안북도 지부 이사 겸임[1][3] |
계광순은 경찰로 관료 생활을 시작하여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함경남도 경찰부 보안과장을 지냈다. 또한 일제의 침략 전쟁이 확대되면서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정책에 깊이 관여했다. 지원병제 실시 때는 지원병 전형 심사위원을 맡았고, 징병제 실시를 위해 조선총독부 징병제 시행준비위원회 간사로 활동했다.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한 총독부 저축장려위원회 간사로 일하는 등, 일제 강점기 관료 중에서도 친일 성향이 뚜렷한 인물이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으로 재직할 당시에는 조선미술가협회 이사장을 맡아 친일 미술인들을 지원했으며[5], 1941년 잡지 《삼천리》와의 인터뷰에서는 '대동아공영권 건설과 조선 민중'이라는 제목 하에 황민화와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한, 대표적인 친일 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증언[6]도 존재한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다[3].
2. 2. 해방 이후 정치 활동
광복 후에는 일제 강점기 관료로 다년간 근무했던 강원도를 기반으로 삼아 정치인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평안북도 도민회 회장, 대한펜싱협회 회장(1960년) 등으로 대한민국 사회의 지도층 인사로 활동했다.[1][3] 광업 개발공사 대표, 무역회사 사장을 거쳐 정계에 입문했다.[1]한국 전쟁 중에는 조선인민군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평양형무소까지 끌려갔다가 탈옥한 경험이 있다. 당시 광산 회사의 사장을 맡고 있었는데, 탈출 후 각종 지면을 통해 체포와 납북 당시의 경험담을 다수 남겼다. 계광순은 북한으로 납북되었다가 살아 돌아온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기에, 정지용 등 납북된 인사들에 대한 그의 증언은 한동안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정지용의 북행 경위나 이광수의 최후 등에 대한 그의 서술은 나중에 북한 측 발표 내용과 다른 경우가 있어 논란이 있다.[7][8]
1958년 제4대 총선거에서 강원도 춘천시 선거구에 야당인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1960년에는 제5대 민의원으로 재선되었으며, 당시 장면 계열의 민주당 신파 소속이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제6대 국회에도 진출하여 3선 의원을 지냈다. 정계 활동 중 민주당 춘천시 당 위원장, 강원도당 위원장, 국회 재경위원장, 민주당 당기위원장, 민중당 중앙상무위원 등을 역임했다.[1]
정계 은퇴 이후에는 사업가로 활동하며 한국광업주식회사 사장, 한국제포사(한국제함사) 사장 및 회장(1972년~)을 지냈다.[3] 199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아카디아에서 사망했다.[4]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다.[3]
2. 3. 기업인 활동 및 납북 경험
해방 후 광업 개발공사 대표, 무역회사 사장을 지내며 기업인으로 활동했다.[1][3]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광산 업계에 종사했던 그는 한국 전쟁 발발 당시 광산 회사 사장을 맡고 있었다. 전쟁 중 조선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서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후 평양형무소까지 끌려갔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탈출 후 계광순은 여러 지면을 통해 자신의 체포 및 납북 경험담을 상세히 증언했다. 그는 북한에서 생환한 몇 안 되는 인사 중 하나였기에, 그의 증언은 한국 전쟁 중 납북된 다른 인사들의 소식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었다. 대표적으로 시인 정지용이 자발적으로 북한으로 간 것이 아니라 명백히 납북되었다고 증언하였다. 하지만 정지용의 북행 경위나 소설가 이광수의 최후 등에 대한 그의 증언 내용은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의 발표와 차이가 있어, 증언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7][8]
정계 은퇴 후에는 다시 사업가로 활동하며 한국광업주식회사 사장, 한국제포사 회장을 지냈고, 1972년에는 한국제함사 사장 및 회장을 역임했다.[3]
2. 4. 사망
199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아카디아에서 사망했다[4].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됐다[3].3. 사후 평가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수록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3].
4. 역대 선거 결과
(정당 득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