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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타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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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리타 다케오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 중장이었다. 1889년 이바라키현 미토시에서 태어나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구축함 함장, 수뢰전대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 레이테 만 해전에서 미군 수송선단을 공격하라는 임무를 받았으나, 공격을 망설이고 회항한 '수수께끼의 반전'으로 유명하다. 종전 후에는 해군병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지압사, 대서인으로 생활하다가 197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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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타 다케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구리타 다케오 (1942–45)
해군 중장 구리타 다케오 (1942–45)
출생일1889년 4월 28일
출생지미토시, 이바라키현, 일본
사망일1977년 12월 19일
사망지니시노미야시, 효고현, 일본
묘소다마 묘원
별칭구리타 다케오
군 경력
소속일본 제국 해군
복무 기간1910년–1945년
최종 계급해군 중장
주요 지휘 경력일본 해군사관학교
제2함대
제3전함사단
제7순양함사단
제4구축대대
제1구축대대
제25구축대대
제12구축대대
제10구축대대
곤고
아부쿠마
오이테
와카타케
하기
하마카제
우라카제
시구레
참전 전투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순다 해협 해전
인도양 기습
미드웨이 해전
솔로몬 제도 전역
과달카날 전역
필리핀해 해전
레이테만 해전
시부얀해 해전
사마르 해전
서훈훈2등 서보장
가족 관계
배우자시즈에 (사토 오사무의 여동생)
기타 정보
은퇴 후 활동필경업

2. 생애

1889년 4월 28일 이바라키현 미토시에서 한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해군 군인이었다.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라 과묵하고 성실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1910년 일본 해군병학교를 38기로 졸업하고 함선 근무를 시작하여, 1938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여러 작전에 참가하며 중장으로 승진했다. 1944년 10월, 필리핀 탈환을 시도하는 미군을 저지하기 위한 쇼호 작전(레이테만 전투)에서 주력 함대를 이끌고 미군 수송선단 공격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레이테 만에 무방비 상태로 정박 중이던 미군 수송선단을 눈앞에 두고도 공격을 포기하고 함대를 돌린 결정은 "수수께끼의 반전(謎の反転)"이라 불리며 큰 논란을 낳았다. 이 결정은 미군조차 의아하게 여겼으며, 결과적으로 필리핀 함락과 일본 연합함대의 사실상 괴멸로 이어졌다.

전후에는 해군병학교 교장을 지내다 전쟁이 끝난 뒤 지압사, 대서인 등을 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레이테만 전투에서의 그의 판단은 오랫동안 일본 전사가들 사이에서 논쟁거리가 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889년 4월 28일 이바라키현 미토시에서 한학자 구리타 츠토무(栗田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4] 아버지는 대일본사 편집원으로도 활동했으며, 할아버지 구리타 히로시는 도쿄 제국대학 교수이자 문학 박사였다. 구리타 가문은 미토번 무사 집안으로, 조상은 세이와 겐지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지나, 겐로쿠 시대에 미토로 이주하여 기름 장사를 했다고 한다.[14] 외할아버지는 해군 군인 사토 오사무(佐藤脩)이다.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 아래 자라 말수가 적고 성실했으며, 학문에도 뛰어나고 노력하는 인물이었다고 평가받는다.[14]

구제 미토 중학교(현재의 이바라키현립 미토 제1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05년 에타지마의 일본 해군병학교에 입교하여 1910년 7월 18일 38기로 졸업했다. 졸업 성적은 149명 중 28등이었다.[15][1] 사관 후보생 시절에는 순양함 카사기와 니이타카에서 실무를 익혔다.[1]

1911년 12월 해군 소위로 임관하여 통보함 타츠타에 배치되었다.[1] 이후 여러 함선과 보직을 거치며 경력을 쌓았다. 1938년 11월 15일 소장으로 진급하기까지의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계급주요 보직 및 학력
1910소위 후보생일본 해군병학교 38기 졸업 (28등/149명), 순양함 카사기, 니이타카 승선
1911해군 소위타츠타 승선
1912해군 소위수뢰학교 보통과 학생
1913해군 중위포술학교 보통과 학생, 전함 사쓰마 승선
1915해군 중위구축함 사카키 분대사, 순양함 이와테 승선
1916해군 대위사세보 해병단 분대장, 순양함 토네 분대장
1917해군 대위해군대학교 을종 학생
1918해군 대위수뢰학교 고등과 학생, 구축함 미네카제 수뢰장
1919해군 대위제5전대 참모
1920해군 대위구축함 야카제, 하카제 어뢰 장교 또는 부장, 구축함 시구레 함장 (첫 지휘)
1921해군 대위구축함 오이테 함장, 제4전대 참모, 수뢰학교 교관[1]
1922해군 소령
1924해군 소령제2호 구축함(와카타케) 함장[1]
1925해군 소령구축함 하기 함장[1]
1926해군 소령구축함 하마카제 함장[1]
1927해군 중좌구축함 우라카제 함장[1]
1928해군 중좌수뢰학교 교관
1930해군 중좌구레 공창 어뢰 실험 부원, 제25구축대 사령관[1]
1932해군 대좌제10구축대 사령관, 제12구축대 사령관[1]
1934해군 대좌아부쿠마 함장[1]
1935해군 대좌수뢰학교 교두
1937해군 대좌곤고 함장[1]
1938해군 소장제1수뢰전대 사령관[1]



곤고 함장 시절, 부하 장교가 큰 실례를 범했음에도 크게 꾸짖으면서도 용서해주어, 해당 장교가 구리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며 감격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77] 1939년 11월 25일에는 제4수뢰전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2. 2. 해군 경력 초기

1889년 4월 28일 이바라키현 미토시에서 한학자 구리타 이소시(栗田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4] 아버지는 대일본사 편집원이기도 했으며, 조부는 도쿄 제국대학 교수이자 문학 박사인 구리타 히로시였다. 미토번 무사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로부터 미토의 기풍을 반영한 엄격한 교육(무골과 불언실행)을 받고 자라 과묵하고 성실한 성격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청년 시절의 구리타는 학문도 뛰어나고 노력가였으며 인격도 높이 평가받았다.[14]

구제 미토 중학교(현재의 이바라키현립 미토 제1고등학교)를 거쳐, 1905년 에타지마의 해군병학교에 입교하여 1910년 7월 18일 38기로 졸업했다. 졸업 성적은 149명 중 28위였다.[15]

사관후보생 시절에는 순양함 카사기와 니타카에 승선하여 연습 항해를 했다. 1911년 12월 해군 소위로 임관하여 통보함 타츠타에 배속되었다. 1912년 12월 수뢰학교 보통과, 1913년 5월 포술학교 보통과 학생 과정을 수료했다.

1913년 12월 해군 중위로 진급하여 전함 사쓰마에 승선했고, 1915년 3월에는 구축함 사카키의 분대사, 같은 해 6월에는 순양함 이와테 승조원으로 근무했다.

1916년 10월 사세보 진수부 해병단 분대장을 지냈고, 같은 해 12월 1일 해군 대위로 승진하여 순양함 토네의 분대장이 되었다. 1917년 12월 해군대학교 을종 학생, 1918년 4월 수뢰학교 고등과 학생 과정을 이수했다. 이후 구축함 미네카제, 야카제, 하카제 등에서 수뢰장(어뢰 장교) 및 부장 등으로 근무했다. 1920년 12월, 구축함 시구레 함장을 맡아 처음으로 함선 지휘관이 되었으며, 1921년 8월에는 구축함 오이카제 함장을 역임했다.[1] 같은 해 11월부터 수뢰학교 교관을 지냈다.

1922년 12월 해군 소령으로 진급했다. 1924년 12월 제2호 구축함(와카타케급 구축함 사나에 추정) 함장, 1925년 12월 구축함 하기 함장, 1926년 12월 구축함 하마카제 함장을 지냈다.[1]

1927년 12월 해군 중령으로 승진하여 구축함 우라카제 함장을 맡았다. 1928년 12월 다시 수뢰학교 교관을 맡았고, 1930년 3월에는 구레 공창 어뢰 실험부원으로 근무했다. 1930년 11월 제25구축대 사령관, 1932년 5월 제10구축대 사령관을 역임했다.[1]

1932년 12월 1일 해군 대령으로 승진하여 제12구축대 사령관이 되었다. 1934년 11월 15일에는 경순양함 아부쿠마 함장, 1935년 11월 15일에는 수뢰학교 교두(교감)를 지냈다. 1937년 12월 1일에는 전함 곤고 함장을 역임했다.[1] 곤고 함장 시절, 큰 무례를 저지른 초급 장교를 꾸짖으면서도 용서해주자 그 장교가 감격하여 구리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울며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77]

1938년 11월 15일 해군 소장으로 승진하여 제1수뢰전대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39년 11월 25일에는 제4수뢰전대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겼다.[1] 진주만 공격 당시에는 제7순양함 전대 사령관이었다.[2]

2. 3. 제2차 세계 대전

1940년 11월 1일, 제7전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이 지휘하는 남견함대 소속으로 말레이 작전에 참가했다. 이후 보르네오 공략전, 아난바스 공략 작전, 팔렘방 공략 작전 등을 지원했다.

1942년 1월 28일에는 바타비아 해전에 참전했다. 3월에는 안다만 공략을 지원했으며, 4월에는 인도양 작전의 일환으로 벵골 만에서 통상 파괴 작전을 수행하여 제7전대 단독으로 10척 이상의 연합군 선박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17] 이 작전에서 구리타는 6척의 중순양함과 경항공모함 류조를 이끌고 총 13만 5천 톤의 선박을 격침시켰다.[2] 5월 1일에는 해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6월에는 미드웨이 해전에 공략 부대 지원대로 참가했으나, 이 전투에서 휘하의 중순양함 미쿠마를 잃었다. 특히 휘하 순양함인 모가미와 미쿠마가 충돌한 후, 손상된 두 함선을 남겨두고 철수한 결정은 논란이 되었다. 당시 구리타 함대는 무선 침묵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연합함대 사령부조차 이들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으며, 안전 해역으로 퇴각한 뒤에야 위치를 보고했다. 그 사이 미쿠마는 미군의 공격으로 격침되었고, 모가미, 아사시오, 아라시오는 간신히 퇴각에 성공했다. 구리타는 작전 속행을 위해 손상되지 않은 구마노와 스즈야를 이끌고 주력 부대와의 합류를 우선시했는데,[19] 이는 상부의 명령을 따른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손상된 함선들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20][23]

7월에는 제3전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0월에는 과달카날 전역에서 전함을 이끌고 헨더슨 비행장에 대한 함포 사격을 지휘했다. 당초 구리타는 육상 포격의 어려움을 이유로 이 작전에 반대했으나,[25]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강한 의지에 따라 작전을 수락했다. 그는 작전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26] 이 포격은 918발의 포탄을 투하하여 일본 해군의 함포 사격 중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 성공 덕분에 다음 날 일본군은 비교적 안전하게 과달카날에 병력을 보급할 수 있었다. 10월 26일에는 남태평양 해전에도 참가했다.

1943년 2월에는 과달카날 섬 철수 작전인 케호 작전을 지원했다. 같은 해 8월, 해군대학 갑종 과정을 수료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제2함대 사령장관에 임명되었다.[27] 구리타는 해군대학 갑종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한 경험이 있으며, 스스로 "머리가 나빴다"고 회고하기도 했다.[29] 제2함대 사령장관 임명에 대해서는 본인 스스로도 의외라고 생각했다고 전해진다.[30] 11월에는 부겐빌 섬 역상륙 지원을 위해 제2함대 주력을 이끌고 라바울에 입항했다가 라바울 공습을 겪었다. 같은 해 훈1등 서보장을 수여받았다.

1944년 6월에는 필리핀 해 해전(마리아나 해전)에 참가했다. 이후 연료 사정을 고려하여 함대를 이끌고 수마트라 섬의 링가 정박지로 이동하여 쇼호 작전을 대비한 훈련에 임했다. 10월에는 레이테만 전투에 제2함대(중앙 부대) 사령관으로 참전했다.

2. 3. 1. 레이테 만 해전

1944년 10월 필리핀 근해에 상륙하려는 미군을 저지하기 위한 일본군의 쇼호 작전(레이테만 전투)에서, 구리타는 수송선단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아 함대를 지휘했다. 그는 시부얀 해 해전과 사마르 해전에서 IJN 제2함대 "중앙 부대"(제1유격부대)의 사령관을 맡았다. 이 함대는 세계에서 가장 큰 전함인 야마토무사시를 포함하여, 구형 전함 나가토, 곤고, 하루나, 순양함 10척, 구축함 13척으로 구성되었으나, 결정적으로 항공모함은 없었다.

구리타는 헌신적인 장교였으나 헛되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함장이 "함선과 함께 침몰"하는 것은 귀중한 경험과 리더십의 낭비라고 생각했다. 도요다 소에무 제독으로부터 산베르나디노 해협을 통과해 레이테의 미국 상륙 지점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구리타는 이 작전이 함선과 생명의 낭비라고 여겼다. 그의 함대가 상륙 5일 후에야 레이테 만에 도착할 수 있어 빈 수송선만 공격하게 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는 도쿄의 안전한 벙커에서 공중 엄호도 없이 가망 없는 싸움을 명령한 상관들에게 불만을 품었다. 한편, 도요다 제독은 이 작전이 큰 도박임을 알면서도, 연료와 보급품 부족으로 어차피 무용지물이 될 함대를 잃는 위험보다 잠재적 이득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작전 개시 전, 구리타는 제1호 작전 (레이테 만 해전을 포함한 작전)에 대해 필리핀에서의 함대 작전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적 수송선단 격멸의 중요성을 인지했지만, 미군과의 항공 전력 차이 때문에 작전 성공 가능성을 절반 정도로 보았고, 충분한 항공 지원도 기대하지 않았다[33]。 또한 직전의 대만 해전 전과 보고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상당한 성과로 생각했으나, 이후 정보들을 통해 의구심을 품고 전과를 절반 정도로 판단했다[33]

작전 중 구리타 함대는 잠수함의 공격과 시부얀 해 해전을 거치며 큰 손실을 입었다. 10월 24일에는 기함인 중순양함 아타고가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하여, 구리타는 제2함대 사령부를 야마토로 옮겨야 했다. 야마토로 옮겨왔을 때부터 분위기는 무거웠다고 전해진다[32]

이어진 사마르 해전에서 구리타는 미군 호위항공모함 부대와 조우했다. 그는 이 적을 '할시' 제독 휘하의 정규 고속 항공모함 부대로 오인했다[33]。 제1전대 사령관 우가키 중장이 남쪽의 적 외에 북쪽에도 적 함대가 있다며 공격 방향 전환을 건의했으나, 구리타는 레이테만 돌입이 늦어질 것을 우려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33]。 전투 후, 구리타는 적 기동 부대 중 하나를 격멸했다고 판단하고 다시 레이테 만으로 향하려 했으나, "야키 1카"(ヤキ1カ) 지점에 새로운 적 기동 부대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목표를 변경하여 함대를 반전시켰다. 결국 레이테 만 돌입이라는 작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귀환했다. 이 결정은 훗날 "수수께끼의 반전(謎の反転)", "구리타 턴" 등으로 불리며 큰 논란을 일으켰고, 미군조차 의아하게 여길 정도였다. 이 작전 실패로 필리핀은 미군에게 넘어갔고, 일본 해군 연합함대는 대부분의 함선을 잃고 사실상 괴멸되었다.

구리타 자신은 레이테 만 해전에 대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으로 죽는다는 기분은 어떤 때에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략도 안 돼. 전투도 안 돼. 하지만 가야만 해"[30], "그래도 가야만 했다. 중앙 돌파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적의 레이테 상륙을 맞이하여 하루를 서둘러 그것을 쳐부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라고 술회했다[34]。 사마르 해전의 전과에 대해서는 "내가 확인한 전과는 격침 항공모함 1, 순양함 1이었다"고 평가하며, 제10전대가 보고한 과장된 전과(정규 항공모함 1척 격침, 1척 대파)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고, 전반적으로 자신의 부대가 올린 전과가 크지 않다고 느꼈다고 말했다[33]

1945년 1월 10일, 구리타는 쇼와 천황으로부터 레이테 해전에서의 공적에 대한 위로의 말을 받았다. 1월 15일에는 해군병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어 마지막 교장이 되었다. 이 인사에 대해 전후 다카기 소키치 소장은 "레이테의 패장을 병학교 교장으로 앉혔다"고 비판했으나[64][65], 오쿠미야 마사타케 중좌는 "전쟁 초기 외에는 제1선 부대의 주요 지휘관 중에서 패장이 아니었던 우리나라 제독은 전무하다"고 반박했다[65]。 당시 병학교 생도였던 가마타 요시로는 구리타를 "패장의 장은 아니다"라고 평가했으며[66], 만년의 구리타 근처에 살았던 오카 지로(78기생)는 그를 "불세출의 대제독", "유례없는 명장·용장"이라고 높이 평가했다[73]。 반면 테라자키 류지 대좌는 오카 지로의 평가가 극단적이라며 명장이라는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67]。 레이테만 전투에서의 구리타의 판단은 일본의 전사가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2. 4. 종전 후

레이테만 전투 이후 일본군 내 일부 세력으로부터 끝까지 싸우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12월, 구리타는 지휘에서 해임되었고, 암살 위협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 해군병학교 교장으로 발령되었다.[9][10] 일본의 항복 후인 10월 5일에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미국 전략 폭격 조사단, 일본 해군 기술 조사단,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참모 제2부 역사과 등 점령군으로부터 조사를 받고 진술했으며, 이 기록은 후에 공개되었다.[68] 일본 해군 기술 조사단으로부터 야마토급 전함의 주포 구경을 질문받자 "모릅니다"라고 답했다. 이는 기밀 유지가 엄격했던 당시 상황에서 함선의 정확한 전투력을 모르는 고급 장교가 많았기 때문으로 설명된다.[69]

공직 추방으로 군인 연금 지급이 중단되었던 시기[70], 다른 해군 장성급 인사들이 여러 지원을 받은 것과 달리[71], 구리타는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그는 연금이 부활한 1953년 8월 1일까지[72] 대학 강의록 가리판 필경 등의 부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71] 이후 서기와 안마사 등으로 일하며 딸과 그 가족과 함께 조용히 지냈다.

전후 미국 해군 장교가 미국 전략 폭격 조사단의 조사를 위해 그를 찾아갔을 때의 일화가 있다. 젊은 미 해군 장교는 윌리스 MB에서 내려 정원에서 일하는 구리타의 소박한 모습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전쟁이 끝난 지 1년도 안 되어, 역사상 가장 큰 함대를 지휘했던 사람이 거기서 감자를 손질하고 있었다."[11]

구리타는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정치나 전쟁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12] 다만, 전사한 동료들을 기리기 위해 매년 두 차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으며, 해군병학교 동기인 미카와 군이치 중장과는 전후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73] 1966년, 오랜 동료였던 오자와 지사부로의 임종을 지켜보며 말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는 언론, 특히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73] 해군병학교 후배인 오카 지로(해병 78기)가 전기 집필을 제안했을 때도 "잡지 기자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47] 전후 취재에 소극적이었던 이유에 대해 "변명하면 할수록 자신을 낮출 뿐이다. 아는 사람만 알면 된다. 나구모 주이치처럼 죽었더라면 시원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30]

1954년 저널리스트 이토 마사노리와의 짧은 인터뷰에서는 레이테 해전에서 회항하여 전투를 계속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고 말했으나, 이후 이 진술을 철회했다. 『마루』 1957년 11월호에 그의 증언이 실렸고, 작가 고지마 노보루는 동기 츠치다 히토시의 도움으로 3차례 인터뷰하여 『비극의 제독』에 그 내용을 게재했다. 수교회(水交会, 해군 예비역 장교 단체) 부활 후에는 기고 활동도 했다.[74] 1971년 방영된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애니멘터리 결단』 기획 당시 발행된 『결단 VOL.3』에서는 신나 조후와의 인터뷰가 실렸다.

80대가 되어서야 전기 작가 오카 지로에게 레이테만에서의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전쟁에서 이미 패배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하들의 목숨을 헛되이 희생시키지 않으려 함대를 철수시켰다고 주장했다.[12]

1971년 4월, 제1회 필리핀 방면 해상 위령 순배단에 참가하여[75] 전세선 사쿠라 마루를 타고 해상 전적지를 돌며 위령했다.[75]

가족에게 해군 시절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고, 손자들에게는 상냥했으며 꾸짖는 일 없이 마작 등을 즐겼다고 한다. 레이테 해전을 다룬 추리 소설 등이 나왔을 때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듯 보였다고 손자는 회고했다. 구리타가 "이제 어디론가 가고 싶다"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47]

작가 에반 토마스는 뉴스위크 기자 다카야마 히데코와 협력하여 구리타의 유족 및 관계자들을 인터뷰하고 『레이테 해전 1944 - 미일 4명의 지휘관과 함대 결전』을 저술했다. 단, 이 책은 구리타가 생전에 남긴 증언들을 거의 소개하지 않고, 전후 그가 과묵함을 지킨 것처럼 묘사했다는 지적도 있다.

1977년 12월 19일,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에서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묘는 도쿄도 후추시의 다마 묘지에 있다.

3. 평가


  • 구축함장 6회, 구축대 사령 3회, 함장 2회, 수뢰전대 사령관 2회, 전대 사령관 2회의 경력이 있다[76].
  • 야구를 좋아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한신 타이거스를 응원했다[47].
  • 검도에 뛰어나 해군 내에서는 거합의 달인으로 알려졌다[77].
  • 제3전대 사령관 시절 통신 겸 항해 참모였던 이치키자키 히데마루에 따르면, 스포츠 만능으로 수영은 수부류(水府流)의 달인이었고 테니스, 철봉, 궁도에도 능했으며, 중학교 시절에는 야구 선수로 대학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씨름 관람과 이야기를 좋아했으며, 부하 함장의 조함술을 유심히 지켜봤다고 한다[82].
  • 연합함대 참모장을 지낸 쿠사카 류노스케 중장은 구리타를 "대단한 맹장(猛将)"이라고 평가했다.
  • 작가 카메이 히로시에 따르면, 쇼와 40년대 중반까지도 구리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해군 관계자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71]. 카메이는 군인이 전후에 "내심은 반대였다"고 말하는 것을 비판하며, 변명하지 않고 침묵하는 구리타의 자세를 옹호하기도 했다[73].
  • 후루무라 게이조 소장은 구리타의 레이테 만 해전 당시 행동이 "부하에게 헛된 죽음을 주지 않으려는 정이 두터운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레이테 만 작전이 사실상 특공과 다름없었다며, 작전을 입안한 연합함대 사령부, 특히 도요다 소에무 당시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직접 함대를 이끌고 돌격했어야 했다고 비판하며 구리타를 옹호했다[71].
  • 부하였던 요시다 토시오에 따르면, 구리타는 "나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당신들은 나왔으니, 작전 절차는 당신들이 맡아달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78].


구리타의 전투 지휘에 대해 적극성이 부족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 나카지마 치카타카 중좌는 구리타를 "중요한 순간에 사라진다"라고 평가했다[79][80].
  • 요시다 토시오 중좌는 혹독한 해상 근무 환경이 구리타로 하여금 위험을 피하려는 합리적인 감각을 갖게 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 오쿠미야 마사타케 중좌는 구리타가 관여한 작전 대부분이 제공권이 없는 상태에서 장시간, 장거리 함대 운용을 요구하는 무리한 것이었음을 지적하며, 그가 태평양 전쟁 내내 중앙의 작전 실패를 수습하는 역할만 맡게 되었다고 설명했다[65].
  • 사토 키요오 대위는 레이테 만 해전에서의 행동을 포함한 구리타 비판이 강한 어조로 이루어지지만, 실증적 근거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81].
  • 오쿠미야 마사타케 중좌와 레이테 만 해전 당시 중순양함 토네의 함장이었던 마유즈미 하루오 대좌는, 해군대학교 갑종 과정 출신이 아니었던 구리타에게 해대 갑종 졸업자들이 책임을 떠넘기는 경향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4. 연보


  • 1889년 4월 28일: 이바라키현 미토시에서 한학자 구리타 츠토무의 차남으로 출생. 조부는 도쿄 제국대학 교수이자 문학 박사인 구리타 히로시이다. 청년 시절 학문이 뛰어나고 노력가였으며 인격도 높았다고 평가받는다[14].
  • 구제 미토 중학교 (현재의 이바라키현립 미토 제1고등학교) 졸업.
  • 1910년 7월 18일: 해군병학교 졸업 (38기, 149명 중 28등)[15]. 소위 후보생으로 연습 항해에 나섬.
  • 1911년
  • 3월: 순양함 "니타카" 승무.
  • 12월 1일: 해군 소위 임관, 통보함 "다쓰타" 승무.
  • 1912년 12월 1일: 수뢰학교 보통과 학생.
  • 1913년
  • 5월 24일: 포술학교 보통과 학생.
  • 12월 1일: 해군 중위 진급, 전함 "사쓰마" 분대사.
  • 1915년
  • 3월: 구축함 "사카키" 분대사.
  • 6월: 순양함 "이와테" 분대사.
  • 1916년
  • 10월: 사세보 해병단 분대장.
  • 12월 1일: 해군 대위 진급, 순양함 "토네" 분대장.
  • 1917년
  • (날짜 불명): 구축함 "가바" 분대장.
  • 12월 1일: 해군대학교 을종 학생.
  • 1918년
  • 4월: 수뢰학교 고등과 학생.
  • 12월 1일: 수뢰학교 고등과 졸업, 구축함 "미네카제" 수뢰장.
  • 1919년 6월: 제5전대 참모.
  • 1920년
  • 3월: 구축함 "야카제" 수뢰장.
  • 6월: 구축함 "하카제" 수뢰장.
  • 12월 1일: 구축함 "시구레" 함장.
  • 1921년
  • 8월: 구축함 "오이카제" 함장.
  • 9월: 제4전대 참모.
  • 11월: 수뢰학교 교관.
  • 1922년 12월 1일: 해군 소좌 진급.
  • 1924년 12월 1일: 제2호 구축함 함장.
  • 1925년 12월 1일: 구축함 "하기" 함장.
  • 1926년 12월 1일: 구축함 "하마카제" 함장.
  • 1927년 12월 1일: 해군 중좌 진급, 구축함 "우라카제" 함장.
  • 1928년 12월 10일: 수뢰학교 교관.
  • 1930년
  • 3월: 구레 공창 어뢰 실험 부원.
  • 11월 15일: 제25구축대 사령관.
  • 1932년
  • 5월: 제10구축대 사령관.
  • 12월 1일: 해군 대좌 진급, 제12구축대 사령관.
  • 1934년 11월 15일: 순양함 "아부쿠마" 함장.
  • 1935년 11월 15일: 수뢰학교 교두.
  • 1937년 12월 1일: 전함 "공고" 함장. 당시 부하 장교의 무례를 꾸짖으면서도 용서했다는 일화가 있다[77].
  • 1938년 11월 15일: 해군 소장 진급, 제1수뢰전대 사령관.
  • 1939년 11월 25일: 제4수뢰전대 사령관.
  • 1940년 11월 1일: 제7전대 사령관.
  • 1942년
  • 5월 1일: 해군 중장 진급.
  • 7월: 제3전대 사령관.
  • 1943년
  • 7월: 출사(出仕).
  • 8월: 제2함대 사령장관에 친보(親補)됨.
  • 1945년
  • 1월: 해군병학교장.
  • 10월: 예비역.

5. 수상

참조

[1] 웹사이트 Kurita Takeo https://archive.toda[...] 2007-02-25
[1] 웹사이트 Offensive Forces https://archive.toda[...] 2007-02-25
[2] 웹사이트 Rear-Admiral Takeo Kurita https://web.archive.[...] 1999-2000
[3] 서적 The End of the Imperial Japanese Navy W.W, Norton 1956
[4] 문서 The End of the Imperial Japanese Navy
[5] 문서 The End of the Imperial Japanese Navy
[6] 문서 The End of the Imperial Japanese Navy
[7] 문서 The End of the Imperial Japanese Navy
[8] 문서 The End of the Imperial Japanese Navy
[9] 서적 PHP Institute
[10] 서적 Iwanami Shoten
[11] 문서
[12] 웹사이트 Understanding Kurita's 'Mysterious Retreat' https://web.archive.[...] United States Naval Institute 2004-10
[13] 문서 『人事興信録 第8版』
[14] 문서 世界大海戦史考
[15] 문서 日本軍艦戦記 文春文庫ビジュアル版
[16] 문서 最上型重巡
[17] 간행물 丸スペシャル 95 蘭印攻略作戦 インド洋作戦
[18] 문서 ミッドウェー戦記
[19] 문서 ミッドウェー戦記
[20] 문서 日米空母決戦ミッドウェー
[21] 문서 ミッドウェーの奇跡
[22] 문서 ミッドウェーの奇跡
[23] 문서 太平洋戦争
[24] 문서 指揮官と参謀
[25] 문서 撃沈 光人社NF文庫
[26] 문서 提督と参謀
[27] 문서 指揮官 文春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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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문서 悲劇の提督 南雲忠一中将 栗田健男中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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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문서 戦艦大和に捧ぐ PHP研究所
[33] 문서 比島沖海戦に関する陳述書 1949-12-20
[34] 문서 決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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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서적 失敗の本質
[38] 간행물 レイテ沖"謎の反転"の真相 潮 1986-09
[39] 서적 レイテ沖海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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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문서
[44] 문서 決断会見記
[45] 간행물 丸 潮書房 19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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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서적 レイテ沖海戦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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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서적 レイテ沖海戦1944―日米四人の指揮官と艦隊決戦 白水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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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간행물 亀井宏「敗北提督たちの戦後史」『[[歴史群像]]太平洋戦史シリーズVOL.10 連合艦隊の最期』
[74] 간행물 『海軍の回想』第23号 栗田健男他2名
[75] 서적 戦艦武蔵戦闘航海記 八重岳書房 1988
[76] 서적 『日本海軍史』(第9巻)、『日本陸海軍総合事典』
[77] 서적 海軍おもしろ話 戦前・戦後篇 徳間文庫 1994
[78] 서적 良い指揮官・良くない指揮官 14人の海軍トップを斬る! 光人社 1996
[79] 서적 『聞書き日本海軍史』第10章 PHP出版
[80] 서적 『聯合艦隊作戦室から見た太平洋戦争』 光人社NF文庫
[81] 서적 駆逐艦「野分」物語
[82] 간행물 市来崎秀丸「第三戦隊のガ島砲撃」『丸別冊 太平洋戦争証言シリーズ9 ソロモンの死闘 ガダルカナルをめぐる海空戦記』潮書房、1988年、151ペー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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