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고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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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곤고는 일본 제국 해군이 영국 비커스사에 발주하여 건조한 금강급 순양전함의 1번함이다. 곤고 산에서 이름을 따왔으며, 1913년 취역 당시 세계 최강의 무장을 갖춘 전함으로 평가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여러 차례 개장을 통해 성능을 향상했다. 1944년 11월, 타이완 해협에서 미 해군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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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고 (전함) - [배(Ship)]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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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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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명 | 곤고 (金剛) |
함명 유래 | 곤고산 |
건조 | 1911년 |
건조 조선소 | 비커스 조선 및 엔지니어링, 배로인퍼니스 |
기공 | 1911년 1월 17일 |
진수 | 1912년 5월 18일 |
취역 | 1913년 8월 16일 |
소속 | 일본 제국 |
최종 운명 | 1944년 11월 21일, USS Sealion (SS-315)에 의해 포르모사 해협에서 침몰 |
제적 | 1945년 1월 20일 |
제원 | |
함급 | 곤고급 순양전함 |
배수량 | 36,600 톤 |
길이 | 222 미터 |
폭 | 31 미터 |
흘수 | 9.7 미터 |
추진 | 증기 터빈, 4축 |
속도 | 30 노트 |
항속 거리 | 14 노트에서 10,000 해리 |
승조원 | 1360명 |
무장 (1913년) | |
주포 | 356mm 해군포 8문 (2연장 4기) |
부포 | 15cm 50구경 해군포 16문 (단장 16기) |
기타 | 76mm 해군포 8문 (단장 8기), 6.5mm 기관총 4정 |
무장 (1944년) | |
주포 | 356mm 해군포 8문 (2연장 4기) |
부포 | 152mm 해군포 8문 (단장 8기) |
대공포 | 127mm 함포 12문 (2연장 6기), 25mm 96식 대공 기관포 100문 (3연장 15기, 2연장 8기, 단장 40기) |
장갑 | |
수선대 장갑 | 203mm |
갑판 | 38–58mm (이후 강화) |
포탑 | 229mm |
버베트 | 254mm |
2. 함명의 유래
곤고의 함명은 나라현과 오사카부의 경계에 있는 곤고 산에서 유래했다.[65] 1877년 진수된 코르벳함 곤고에 이어 두 번째로 사용된 함명이다.[65] 계획 당시 명칭은 '이(伊)호 장갑순양함'이었으나, 건조 중 순양전함으로 함종을 변경하면서 곤고로 명명되었다.[150]
1907년 러일 전쟁 종결 2년 후, 일본 제국 해군은 곤고의 건조를 결정했다. 초기에는 장갑순양함으로 계획되었으나, 1906년 영국이 드레드노트를 완성시킨 이후 전함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설계를 확정하지 못했다.[53]
곤도 모토키가 기본 계획을 담당했다.[143] 설계는 비커스사의 수석 설계사 조지 서스턴 경이 담당했으며,[53] 필립 와츠의 영향도 컸다.[88] 서스턴은 오스만 제국 해군에 수출 예정이었던 전함 에린을 바탕으로 순양전함을 설계했다. 주포는 당시 영국이 채택하고 있던 13.5인치보다 조금이라도 위력이 있는 14인치를 채택하여, 일본 해군이 세계 최대 함포를 가진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53]
3. 건조 경위
1908년 영국이 초노급 순양전함 인빈시블급 3척을 준공하고,[53] 1909년에는 초노급 전함 오라이온급을 기공함과 동시에, 당시 세계 최대 함이 될 초노급 순양전함 라이온급을 계획하는 상황을 고려하여, 1911년 일본 해군은 곤고를 초노급 순양전함으로 건조하도록 계획을 변경했다. 예산은 1910년에 통과되었다.[53]
당시 일본 해군은 1907년 계획한 국산 초노급 전함 가와치형을 건조 중이었으나, 기술적으로 서구에 뒤떨어지는 점이 많아 곤고는 기술 도입을 겸하여 영국에 설계 및 건조를 의뢰했다.
일본 해군은 당초 주포로 50구경 12인치 포를 선정하고, 1910년 6월 25일 비커스사와 암스트롱사를 상대로 입찰 공고를 냈다.[66] 14인치 포 장비 안도 있었지만, 4월 13일에 열린 자문 회의에서는 야마우치 마스지와 마쓰모토 와 등 6명이 12인치 포를 지지했고, 14인치 포 지지는 야마시타 겐타로뿐이었다.[67] 그러나 실제 계약에서는 14인치 포를 장착한 472C안이었다.[68]
이러한 변경에는 영국 주재 가토 히로지가 입수한 시험 데이터를 토대로 부하를 일본에 파견하여 14인치 포 안으로 변경시켰다는 설과, 군령부와 해군 대신, 차관이 결정을 뒤집었다는 설이 있지만, 어느 쪽이든 무리가 있거나 이유가 불분명하다.[69] 실제로는 12인치 포 장비는 결정된 것이 아니었고, 변경이 가능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70] B46안은 12인치 포 장비 함으로는 너무 커서, 대구경 포 장비로 변경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고 추정된다.[70] 또한, 입찰 공고에서는 13.5인치 포 장비 안으로 생각되는 설계도 요구되었다.[71] 1910년 3월에는 가토에게 14인치 시험 포의 가격 협상 명령이 내려져, 14인치 포 시험을 하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다.[72]
이 과정에서 일본 측은 비커스사 쪽으로 기울게 된다.[73] 암스트롱사는 대구경화에 대한 대응이 늦었고 13.5인치 포의 제조 능력이 없어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74] 입찰 직전인 7월 말, 14인치 포 장비 안이 갑자기 나타났다.[75] 그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구레 해군 공창의 판단 입수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76] 14인치 포 탑재 설계 안은 암스트롱사는 요구받아 제출한 흔적이 없어, 일본 측이 이미 비커스사로 발주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77] 1909년 9월 26일, 비커스사의 472C안으로 결정되었다.[78]
당시 비커스사와 암스트롱사는 일을 분할하려는 결탁 관계를 맺고 있었다.[79] 그러나 곤고 건조에서는 비커스사가 독점하게 되었다. 비커스사는 배로우 조선소의 선대가 비게 되어 독점하지 못하면 고용 유지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80] 비커스사의 독점은 일본 측이 반대하지 않는 한 일을 나누기로 한 조항을 이용한 것이었다.[82] 비커스사는 암스트롱사를 방심시켜 입찰에서 이기기 위해 수수료나 뇌물(후술) 등으로 막대한 지출을 했다.[83]
초기 계약 가격은 2367100GBP였다.[84] 이 가격을 바탕으로 미쓰이 물산에 5%, 일본제강소에 2.5%의 수수료가 지불되었다.[84] 비용은 신형 철갑판 사용으로 50000GBP, 아트 메탈 추가로 148GBP가 추가되었다.[84]
일본제강소는 창립 당시 계약에 따라 자사에서 제조가 불가능하여 영국 측으로 넘긴 주문분의 2.5% 수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규정을 확대 해석하여 수수료를 요구했고, 비커스사는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85]
배로우-인-퍼니스 조선소장 매켄지의 의뢰로 바실 자하로프를 통해 일본 해군의 후지이 코고로에게 31195GBP (약 300000JPY)가 "특별 지급"으로 지출되었다.[86] 이는 비커스사가 조직적으로 관여한 것이었다.[87]
1914년 1월, 지멘스 도쿄 지사에서 로이터 통신으로 유출된 전보와 ''아사히 신문'', ''뉴욕 타임스''의 추가 보도로 일본 당국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독일과 영국의 무기 회사들이 뇌물과 리베이트를 주고받은 정황이 드러났다. 지멘스는 고위 일본 관료들에게 15%의 비밀 리베이트를 지급하고 있었는데, 비커스가 25%를 제안하며 더 높은 가격을 제시했다. 비커스는 1911년과 1912년에 일본 제국 해군의 후지 제독에게 210000JPY을, 마쓰모토 가즈 중장에게는 ''곤고 (전함)'' 건조 계약을 따내기 위해 40000JPY을 지급했다. 가즈는 1914년 5월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400000JPY의 벌금과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곤고'' 건조 계약을 둘러싼 지멘스-비커스 스캔들의 결과로 야마모토 곤노효에 총리의 내각은 1914년 3월 23일 사임했다. 비커스의 일본 파트너인 미쓰이 기업의 고위 임원들도 사임했다.[6][7]
4. 건조
영국은 곤고 건조에 적극 협력했다. 비커스사는 전함 미카사, 카토리를 건조한 실적이 있었고, 러일 전쟁의 일본해 해전에서 미카사의 활약을 자랑스럽게 여겨 일본 해군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52]
발주에 즈음하여, 영일 양국 간에 다음의 약속이 이루어졌다.
비커스는 파견 요원을 받아들여 기술 지도를 실시했다.[52] 일본에서 건조 입회 감독관, 선체, 기관, 무기 각 부문의 기술 장교, 히에이를 건조하는 요코스카 해군 공창의 공원들이 다수 파견되었으며, 하루나와 키리시마를 건조하는 가와사키 조선소와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기술자와 공원이 건조 기술 습득과 조사를 위해 영국으로 건너갔다.[52][53] 콩고의 설계도는 계약에 기초하여 일본에 인도되었고, 동형함 3척은 본함의 도면을 바탕으로 국내에서 건조되었다.[52][53]
1912년 5월 18일 진수식을 거행했다.[150] 1913년 8월 16일 준공[145] 후 일본으로 회항했다.
5. 무장
비커스가 건조한 곤고는 취역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장을 갖춘 전함이었다.[2] 주포는 4개의 2연장 포탑 (전방 2개, 후방 2개)에 탑재된 8문의 비커스 14인치 (356 mm)/45 구경 해군포였다.[2] 각 주포는 분당 약 2발의 속도로 약 35451.29m 사거리의 고폭탄 또는 철갑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9] 미국 해군 해군 정보국은 이 포탑이 "영국의 15인치 포탑과 유사"하지만, 섬광 방지 면에서 개선되었다고 언급했다.[11] 1941년, 표적 지정을 돕기 위해 곤고의 철갑탄에는 빨간색 염료가 사용되었다.[11] 주포는 90발의 탄약을 탑재했으며, 대략 250~280발의 포신 수명을 가졌다.[11]
곤고의 부포는 원래 16문의 50구경 6인치(15.2cm) 포, 8문의 3인치(7.6cm) 포, 8문의 수중 약 53.34cm 어뢰 발사관으로 구성되었다.[2] 6인치 해군포는 분당 5~6발을 발사할 수 있었고, 약 500발의 포신 수명을 가졌다.[12] 두 번째 개장 동안, 구형 3인치 포가 제거되었고 8문의 5인치 (127 mm) 40 구경 양용포로 교체되었다. 이 포는 분당 8~14발을 발사할 수 있었으며, 800~1,500발의 포신 수명을 가졌다.[13] 1944년 10월까지, 곤고의 부무장은 8문의 6인치(15.2cm) 포, 8문의 5인치(12.7cm) 포, 122문의 96식 대공 속사포로 재구성되었다.[14]
6. 장갑
순양전함이었던 곤고는 장갑이 비교적 얇았다. 주 장갑대는 약 15.24cm~약 20.32cm였다. 곤고의 갑판 장갑은 약 2.54cm, 약 3.81cm, 약 6.99cm 두께의 장갑판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구역에 따라 두께가 달랐다. 주포의 탄약을 보호하는 약 22.86cm 두께의 바벳 장갑과 약 25.40cm 두께의 포탑 전면, 약 22.86cm 측면 및 후면 장갑을 갖추고 있었다.[15]
7.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은 독일 제국과 교전 상태였다. 일본은 영국과 영일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영일 동맹에 따라 독일에 선전 포고를 했다. 1914년 8월, 칭다오 전투에 대비하여 곤고는 동형함 히에이와 함께 제1함대에 편성되었다.[3] 곤고는 태평양 항로 보호를 위해 미드웨이 방면을 초계했다.[3]
8. 군축 조약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921년 11월 11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워싱턴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체결된 군축 조약으로 인해 전함 및 항공모함의 보유 수에 제한이 가해졌다.[92]
일본 제국 해군은 88함대 계획에 따라 곤고급 순양전함을 8척 건조할 예정이었으나,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으로 인해 아마기형 순양전함 4척 건조로 계획이 변경되거나, 13호형 순양전함 4척 건조 계획이 중지되었다.[92]
곤고는 1933년에 함령 20년에 도달하여 대체함 건조가 가능해짐에 따라 곤고 대체함 건조가 계획되었다. 후지모토 기쿠오 조선 소장과 히라가 유즈루 조선 중장이 각자 설계안을 제출했으나,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회의에서 전함 건조 중지 조치가 5년 연장되면서 계획은 중지되었다.[92] 런던 해군 군축 회의에서 기존 군함 수 삭감으로 인해 동형함 히에이는 일시적으로 연습 전함이 되었으나, 일본과 이탈리아는 제2차 런던 해군 군축 회의에서 탈퇴를 표명하면서 군축 조약 기간 만료 후 히에이는 다시 전함으로 복귀하였다.
9. 개장
곤고는 완성 이후 세계 최대이자 최강의 전함으로 그 이름이 세계에 널리 알려졌으며, 일본 해군의 전력은 전례 없는 비약을 이루었다.[53]
9. 1. 제1차 개장까지의 소규모 개장
1914년 10월부터 다음 해 봄까지 나침 함교 상부에 전방 마스트와 연결되는 노천 갑판을 설치했다.[155] 7, 8번 90cm 탐조등을 110cm 탐조등으로 교체했다.[155][143] 1915년 7월에는 1, 2번 90cm 탐조등을 110cm 탐조등으로 교체했다.[155][143]1916년 말, 전방 삼각 마스트 꼭대기의 사격 관측소에 방위반 조준 장치를 설치하여 약 22,000m까지 포격이 가능하게 되었다.[143] 주포탑 위에 있던 자포(子砲, 8cm 단포)를 철거하고,[143][155] 8cm 외통포(外筒砲)를 장비했다.[155] 역풍이 불 때 배기 매연이 함교에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제1연돌의 높이를 높게 변경하고, 연돌 상부에 방연판(防煙盾)을 설치했다.[143] 사격 명중률 향상을 위해 전방 마스트 야드 전면에 측적소(測的所)를 설치했다.[143]
1918년 3월 4일, 1, 2번 연돌 양현 최상부 갑판의 8cm 단포를[155] 8cm 단장고사포 4기로 변경했다.[155][143] 전방 마스트 기반의 달아낸 부분과 제1연돌 옆의 탐조등을 폐지하고, 제1연돌과 제2연돌 사이에 탐조등대를 설치하여 탐조등을 이동했다.[143] 제2연돌 꼭대기에 연로(煙路) 빗물 침입 방지막을 부착했다.[143] 포탑과 함교 전면부에 측거의를 설치했다.[143] 앞부분 삼각 마스트를 폐지하고 사격 지휘소를 포함한 망루형 함교로 만들었다.[143]
1925년 11월 1일부터 주포 앙각을 25도에서 33도로 올려,[155] 최대 사정거리를 25,000m에서 28,500m로 늘렸다.[143] 포실(gunhouse) 지붕 장갑을 3인치에서 6인치로 강화했다.[155] 후방 삼각 마스트 위의 사격 관측소를 철거했다.[143] 제3포탑 후방의 상부 구조물 위에 수상 정찰기를 탑재하고, 이를 끌어 올리기 위한 데릭 포스트와 붐을 우현에 설치했다.[143]
9. 2. 제1차 개장 (1928년 10월 ~ 1931년 9월)
요코스카 해군공창에서 1928년 10월부터 1931년 9월 15일까지 수평 및 수중 방어력 강화와 연료를 중유로 변경하는 개장이 이루어졌다.[155] 1931년 6월 1일부로 순양전함에서 전함으로 함종이 변경되었다.[155]개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주 보일러를 이호 함본식 보일러 36기에서 개량형인 로호 함본식 보일러 중유·석탄 혼소 보일러 6기, 중유 전소 보일러 4기 등 총 10기로 교체했다.[143]
- 탄약고 상부 갑판에 두께 4인치의 NVNC 장갑판을 추가하고, 기관 구획의 보일러실 및 기계실 위 하부 갑판에는 두께 3인치의 HT 강화재를 추가하여 수평 방어를 강화했다.[143]
- 포탑 지지대 원통부 장갑판과 외부에 노출된 포탑 장갑을 3인치 늘려 6인치로 강화했다.[143]
- 연돌, 통풍로, 양탄통(揚弾筒)이 방어 갑판을 통과하는 부분의 장갑을 4인치에서 7인치 범위로 강화했다.[143]
- 어뢰와 근거리에서 터진 포탄 등에 대한 수중 방어를 위해 선체 주요 부분 바깥쪽에 1인치 두께의 HT재를 3~4장 덧붙였다.[143]
- 주 보일러실 바깥쪽 연료 창고 안에 두께 2인치의 HT재 세로 격벽을 새로 설치했다.[143]
- 수중 방어를 위해 흘수선의 4/5 길이에 총 용량 3,000t의 벌지를 설치했다. 선수와 선미 부분은 물을 채우는 구획으로, 중앙부는 연료 탱크로 사용했다. 함선의 폭이 넓어져 수중 저항과 배수량이 증가하여 속력은 떨어졌으나, 복원 성능은 향상되었다.[143]
- 연돌을 하나 줄여 총 2개의 연돌을 갖게 되었다. 중유 사용 증가로 기존 석탄 창고 일부는 기름이 새지 않도록 처리하고 급유 배관을 설치하여 중유 탱크로 사용했으며, 이로 인해 중유 탑재 총량이 5,000t이 되어 항속 거리는 14노트(kt) 운행 시 2,000해리 늘어났다. 또한, 연기의 색이 옅어져 멀리서 발견될 확률이 줄어들었다.[143]
- 함교 구조를 변경하여 장루(檣楼) 꼭대기에 사격 지휘소를 설치했다.[143]
- 3번 주포탑 뒤쪽에 수상 정찰기 3기를 탑재할 수 있는 설비를 설치했다.[143]
- 수중 어뢰 발사관 4기를 철거했다.[143]
- 이 외에도 함내 전반에 걸쳐 의장 수정이 이루어졌다.[143]

9. 3. 제1차 개장과 제2차 개장 사이의 소규모 개장
1933년(쇼와 8년)에 8cm 단장 고각포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12.7cm 연장 고각포 4기를 장비했다.[94] 같은 해 5월에는 40mm 연장 기총 2기를 장비했다.[94] 1934년(쇼와 9년) 1월에는 캐터펄트를 장비했다.[94] 같은 시기에 부포를 철거하고 포곽 개구부를 폐쇄했다.[94]9. 4. 제2차 개장 (1935년 6월 ~ 1937년 1월)
요코스카 해군공창에서 1935년 6월 1일부터 1937년 1월 8일까지 ''곤고''의 두 번째 개장이 이루어졌다.[4] 이 개장은 항공모함 함대를 호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함미는 약 7.92m 늘어나 세장비가 개선되었고, 기존의 16개 보일러는 11개의 유류식 칸폰 보일러와 최신 기어 터빈으로 교체되었다.[5] 함교는 일본의 탑 마스트 양식에 맞춰 완전히 재건되었으며, 사출기가 추가되어 나카지마 E8N 또는 가와니시 E7K 정찰 및 관측 수상기를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14][25]장갑도 대대적으로 강화되었다. 주 장갑대는 8인치(약 203mm)로 균일하게 강화되었고, 약 12.70cm에서 약 20.32cm 깊이의 대각선 격벽이 추가되어 보강되었다.[26] 포탑 장갑은 약 25.40cm로, 데크 장갑 일부는 약 10.16cm로 강화되었다.[26] 탄약고 방호 역시 약 10.16cm로 강화되었다.[5]
이러한 개조를 통해 ''곤고''는 배수량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30knots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있게 되어 고속 전함으로 재분류되었다.[14]
9. 5. 제2차 개장에서 제2차 세계 대전까지의 소규모 개장
1935년(쇼와 10년) 6월부터 1937년(쇼와 12년) 1월까지 요코스카 해군 공창에서 곤고는 대규모 개장을 받았다. 주로 기계 교체를 통해 속력을 높이고 무장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52]- 기존 주 보일러를 제거하고 로호(ロ号) 함본식 대형 중유 전소 보일러 8기를 장착했다.[52]
- 주 기계를 함본식 기어드 터빈 4기로 교체했다.[52]
- 보일러 배치를 변경하고 보일러실 구획을 폐지하여 연료 탱크로 사용했다.[52]
- 선체 저항을 줄이기 위해 함미를 7.4m 연장했다.[52]
- 파도 타기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선수재를 뾰족한 형태로 변경했다.[52]
- 함교 구조와 관련 시설을 대폭 개조했다. 돛대 꼭대기에 10m 측거의를 설치하고, 사격 지휘 장치를 새로운 형식으로 교체했다. 이러한 장비의 진동을 막기 위해 함교 구조 돛대 뒤에 굵은 보강 지주를 설치했다.[52]
- 후부 함교 구조를 대형화하고, 두 번째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와 열을 피하기 위해 경사를 주었다.[52]
- 주포의 앙각을 33도에서 45도로 올려 최대 사정거리를 28500m에서 33000m로 늘렸다.[52]
- 부포의 앙각을 30도로 하여 최대 사정거리를 늘리고, 포대 좌와 포곽을 개정했다.[52]
- 수중 발사관을 전부 폐지하고, 창고 또는 연료 탱크로 사용했다.[52]
- 40mm 기총을 철거하고 25mm 연장 기총을 10기 탑재했다.[52]
이 외에도 함내 여러 장비를 개정하여 거주성을 향상시켰다.[52]
개장 결과, 기관 출력은 136,000마력으로 상승하여 속력은 30.3노트가 되었다. 연료 탑재량은 6,480t, 18노트에서의 항속 거리는 9,800해리가 되어, 근대적인 고속 전함으로 변모했다.[52]
요약에 따르면, 추가적으로 다음과 같은 개장이 이루어졌다.
- 벌지 내에 강관을 배치했다.[52]
- 자기 기뢰 방지를 위해 현외 전로를 설치했다.[52]
- 주·배수 장치를 신설했다.[52]
- 방독 장치를 신설했다.[52]
- 주포탑의 장갑판을 증후(增厚)했다.[52]
1944년 1월, ''곤고''는 대공포 설비 재구성을 위해 드라이 도크에 들어갔다. 6인치 포 4문과 2연장 25mm 기관총 2기를 제거하고 5인치 연장포 6문과 25mm 3연장 기관총 4기로 교체했다.[25]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 25mm 3연장 기관총 13기와 단장 기관총 40기를 대공 무장에 추가하여 총 100기 이상이 되었다. 8월에는 6인치 포 2문을 더 제거하고 18기의 단장 기관총을 추가로 설치했다.[25]
10. 제2차 세계 대전
곤고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전함 중 유일하게 30노트가 넘는 고속전함이었다. 이러한 특징 덕분에 여러 작전에 투입될 수 있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 당시 곤고는 콘도 노부타케 제독의 지휘 아래 남부(말레이) 부대의 주력 부대로 참전했다.[27] 1941년 12월 4일, 곤고는 태국과 말라야 반도 침공을 지원하기 위해 태국 남부와 말레이시아 북부 해안에 도착했다.[28] 영국 주력함대 격파 이후 곤고는 말라야 해역에서 철수하여 증원 수송선 보호 및 필리핀 루손의 링가옌 만 상륙을 지원했다.[3]
1942년 1월, 곤고는 암본 섬 공습을 지원했고,[3] 2월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침공("작전 J")에 참가하여 자바 섬 공습을 엄호했다.[5] 3월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서부 해안의 크리스마스 섬을 포격했다.[3] 4월에는 실론의 콜롬보와 트리코말리 공격에 참여하여 영국 해군에 타격을 입혔다.[29]
1942년 5월 27일,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했으나[3][27] 일본 해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31] 이후 곤고는 과달카날 상륙에 대응하여 출항했고, 10월 13~14일 밤에는 하루나와 함께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33][34]
1942년 10월 26일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곤고는 공격을 받았지만 피해를 입지 않았다. 11월에는 과달카날 해전에서 일본군을 지원했지만, 과달카날 해전에서 일본이 패배하면서 곤고는 트럭으로 돌아갔다.[3]
10. 1. 남방 작전
말레이 해전에서 곤고는 영국 해군 동양함대의 기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대치했다. 그러나 신형 킹 조지 5세급 전함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곤고는 직접적인 포격전 대신, 일본 제국 해군 항공대와 수뢰전대의 공격으로 영국 함대를 상대할 계획이었다. 당시 영국군은 일본 항공 전력을 과소평가하여 호위 전투기 없이 작전을 수행했고, 그 결과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순양전함 리펄스를 잃었다.[107] 작전 후, 곤고가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포격전이 가능한 거리까지 접근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이후 곤고는 아카기, 소류, 히류, 즈이카쿠, 쇼카쿠를 포함한 나구모 기동부대의 호위함으로 인도양에 진출했다. 1942년 3월 6일, 곤고는 제2항공전대, 제1수뢰전대, 제17구축대와 함께 기동부대 본대에서 분리되어 크리스마스섬으로 향했다. 곤고를 포함한 별동대는 크리스마스섬에 함포 사격을 실시했다. 이어서 실론 해전(1942년 4월 5일 ~ 1942년 4월 9일)에 참가했다. 미드웨이 해전(1942년 6월 5일 ~ 1942년 6월 7일)에는 히에이와 함께 공략 부대에 참가했다. 그 후 1942년 6월 9일부터는 북방 작전 지원에 종사했다.
10. 2. 솔로몬 제도의 전투
1942년 8월 상순 이후 과달카날 전투에 참가하였다. 10월 13일, 구리타 다케오 제3전대 사령관의 지휘 아래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했다.[3] 이 포격에서 곤고와 하루나는 약 14630.40m 거리에서 973발의 14인치 고폭탄을 발사하여, 헨더슨 비행장의 두 활주로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미 해병대의 항공 연료 대부분을 파괴했다.[34] 또한 해병대 전투기 90대 중 48대를 파괴 또는 손상시켰고, 41명의 해병대원을 사망시켰다.[34] 이 포격은 전쟁에서 가장 성공적인 일본 전함 작전으로 평가받는다.[27] 그러나 비행장을 일시적으로 기능 정지 상태로 만들었지만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했다.이어서 남태평양 해전 (1942년 10월 26일)에서는 육군의 과달카날 섬 총공격 지원에 종사했다.[3] 제3차 솔로몬 해전 (1942년 11월 12일 - 15일)에서는 특공 공격대(제11전대, 제10전대)와 전진 부대(제2함대, 제4수뢰전대)를 지원했다. 그 후 케 작전 (1943년 2월 1일 - 7일)에서는 과달카날 섬으로부터의 일본군 철수를 위한 함정 지원에 종사했다.[3]
마리아나 해전 (1944년 6월 19일 - 20일)에서는, 오자와 기동부대 및 전위 부대의 일원으로 미군 기동부대 함재기와 교전했다.[103]
10. 3. 쇼호작전

곤고는 사마르섬 해역에서 호위 항공모함 갬비어 베이, 구축함 호엘, 호위 구축함 새뮤얼 B. 로버츠의 격침에 기여했다고 여겨진다.[111]
구리타 다케오 제독이 지휘하는 함대는 1944년 10월 22일 브루나이만을 출격, 제3전대 사령관 스즈키 요시오 소장은 곤고에 탑승하여 제2함대(제1유격부대) 지휘관 구리타 다케오 제2함대 사령장관(기함 아타고)의 한 척으로 레이테만을 목표로 했다. 10월 23일 이른 아침, 팔라완섬 해역에서 미 잠수함 2척(다터, 데이즈)의 습격을 받아 중순양함 아타고(제2함대 기함)와 마야가 침몰, 중순양함 다카오가 대파되어 구축함 2척(아사시모, 나가나미)에 호위되어 이탈하는 피해를 입었다. 아타고 침몰 후, 제1유격부대 지휘관 구리타 다케오 중장은 야마토에 장기를 게양했다.
10월 24일, 제1유격부대·제2부대(제3전대(곤고, 하루나), 제7전대(구마노, 스즈야, 지쿠마, 도네), 제10전대(야하기, 우라카제, 하마카제, 이소카제, 유키카제, 노와키, 기요시모))는 시부얀해의 대공전에 참가했다. 미군기는 주로 제1전대(야마토, 무사시, 나가토)를 공격, 전함 무사시가 침몰, 중순양함 묘코도 탈락하는 피해를 입었다. 제3전대는 거의 피해가 없었다.[112]
10월 25일 오전 6시 45분, 제1유격부대는 사마르섬 해역에서 클리프턴 스프라그 소장이 이끄는 제77.4임무부대의 제3군(통칭 타피3전대)과 조우했다. 미 호위 항공모함군은 전함부대(야마토, 나가토, 하루나, 곤고)의 선제 포격을 받아, 마침 도래한 스콜(squall)로 퇴피하기 위해 동쪽으로 도주했다. 연막을 전개하고, 7시 6분부터 잇달아 스콜로 도망쳤다. 구리타 장관이 이끄는 제1유격부대는 제5, 제7전대를 선두로 추격을 시작, 곤고는 제5, 제7전대에 뒤따라 동쪽으로 향했다.[113] 하루나도 이에 따랐지만, 마리아나 해전에서의 추진기 고장이 수리되지 않아 26kt밖에 낼 수 없어 곤고와 거리가 벌어져, 제3전대는 각 함이 뿔뿔이 흩어져 진격하게 되었다. 28kt으로 돌격하는 제7, 제5전대의 후방에서 따라오던 곤고는 7시 14분에 구축함에 포격을 가한 후 스콜에 돌입했다. 7시 22분에는 항공기에서 기총 소사를 받아 주포 측거기가 손상(9시에 수리 완료)되었고, 스콜에 돌입했기 때문에 7시 25분에는 포격을 중지했다. 7시 33분에는 호엘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어뢰를 회피했지만, 이후 미국 함대를 확인하고 예측 위치인 동남동쪽으로 전속력으로 돌격했다.[114] 7시 59분에 스콜에서 벗어난 곤고는 미 항공모함군을 남서 방향으로 발견, 8시 2분부터 주포와 부포로 포격을 재개한 후, 8시 5분에 남쪽으로 함수를 돌려 낙오했던 갬비어 베이를 쫓아가 중순양함 부대와 함께 공격했다.[115][114] 8시 20분, 갬비어 베이는 곤고 주포의 근접탄에 의한 기뢰 효과, 또는 중순양함 부대 주포의 수중탄으로 인해 전방 기계실이 침수, 속도가 11kt까지 저하되었다. 그 결과 곤고와 중순양함 부대의 집중 공격을 받아 8시 45분에 항행 불능, 9시 11분에 침몰했다. 곤고는 8시 50분에 "항공모함 1척 대화재 대폭발"을 보고하고 사격을 중지했다.[114]
곤고는 8시 55분에 "우리 140도 방향의 항공모함으로 향한다"고 보고하고 남동쪽 방향의 항공모함군으로 향하려 했지만, 구리타 장관은 위치상 가까운 하루나에 공격을 명령했기 때문에, 곤고는 남서 방향의 항공모함군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곤고는 중순양함 부대의 포격으로 40발의 명중탄을 받아 만신창이가 된 호위 구축함 새뮤얼 B. 로버츠와 9시 2분에 조우, 주포를 일제 사격하여 직격탄을 날렸다. 곤고의 주포탄을 전방 5인치 포탑과 후부 기계실에 맞아 치명상을 입은 새뮤얼 B. 로버츠는 9시 35분에 총원 퇴거를 실시했다.[114] 이후 경순양함 야하기와 제17구축대(구축함 우라카제, 이소카제, 유키카제)의 쐐기 포격을 받아 10시 5분에 침몰했다.[116] 그러나 곤고는 새뮤얼 B. 로버츠와의 전투로 항공모함군 추격에서 뒤처지게 되었다.[114]
9시 11분에 기함 야마토에서 발신된 "차례차례 집결하라"는 집결 명령을 9시 25분에 수신한 곤고는 명령에 따라 북상했다. 오후 1시 28분, 곤고는 항공기의 급강하 폭격을 받아 큰 손상을 입었다. 28일 브루나이로 귀환했다.[117]
사마르 섬 해역에서 곤고가 소비한 탄약 수는 다음과 같다.[117]
탄종 | 수량 |
---|---|
3식 통상탄 | 98발 |
1식 철갑탄 | 211발 |
0식 통상탄 | 170발 |
4식 통상탄 | 177발 |
3식 통상탄약포 | 100발 |
통상 탄약포 | 2,028발 |
기총 | 50,230발 |
갬비어 베이를 어느 함이 격침시켰는가에 대해서는 저서에 따라 여러 설이 존재하며, 곤고 외에 야마토[118][119], 하구로[119], 지쿠마[120], 도네[121] 등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한다. 곤고는 해전의 전과 보고로서 항공모함 1척의 공동 격침과 구축함 1척의 격침을 보고하고 있으며[114], 갬비어 베이의 전과를 단독 격침이 아닌 공동 격침으로 언급하는 자료도 있다.[122]
사마르섬 해역에서의 중순양함 조카이의 피탄에 관해, 제4전대 괴멸 후 조카이가 배속된 제5전대(사령관 하시모토 신타로 중장) 기함 하구로의 승무원이었던 전사 연구가 이시마루 노리아키가, 조카이의 피탄을 하구로의 함교에서 목격한 동함 통신장 원량용, 피탄된 조카이로부터의 통신을 하구로 전신실에서 수신한 신호병 남리 구니히로 이등병 조장, 및 당시 곤고 승무원 3명의 증언을 토대로, '곤고에 의한 오사(誤射)가 있었다'는 설을 주장했다. 곤고의 망루원은 즉시 조카이를 오사했다는 것을 깨닫고 함교에 보고했고, 곤고의 시마자키 토시오 함장은 동함을 추격전에서 제외시켰다. 곤고가 조카이를 오사한 것에 대해, 하구로에서는 함장, 부함장으로부터 엄중한 함구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이시마루에 따르면, 오사의 원인은 하시모토 사령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돌격한 조카이 측에 있었다고 한다.[123]
전함 곤고의 전투 상세 보고에서는 포전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원거리 사격(240 이상) 이번 전투에서 시계 불량과 함께 항공모함의 함형으로부터 측정이 곤란하여 사격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웠다."
"(로) 중거리 이내의 사격 측정이 비교적 용이해졌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 전측 측거를 이용해 연막 내에서도 적의 발포의 푸르스름한 섬광에 의해 계속 조준하여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고 인정한다."
11. 침몰
1944년 11월 21일 새벽 3시경, 타이완 해협에서 일본 해군 전함 곤고는 미 해군 잠수함 시 라이언의 공격을 받았다. 시 라이언이 발사한 6발의 어뢰 중 2발이 곤고의 좌현에 명중했다.[3] 이 공격으로 곤고의 보일러실 2개가 침수되었지만, 처음에는 16kn 속도로 항행이 가능했다.[46]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곤고의 피해는 점점 심각해졌다. 함령 30년이 넘어 노후화된 선체는 리벳 이음매 부분까지 침수되며 파손 범위가 넓어졌고, 경사도 심해졌다.[134] 오전 5시경에는 속도가 11kn로 줄었고, 결국 주력 함대에서 이탈하여 구축함 하마카제와 이소카제의 호위를 받으며 타이완 지룽시 항구로 향하게 되었다.[46]
그러나 곤고는 항구에 도착하지 못했다. 주력 부대에서 분리된 지 15분 만에 곤고는 45도나 기울어졌고, 통제 불능 상태로 침수되기 시작했다.[47] 오전 5시 18분, 모든 동력을 잃은 곤고에 퇴선 명령이 내려졌고,[47] 5시 24분, 대피가 진행되던 중 전방 14인치 탄약고가 폭발하면서 곤고는 빠르게 침몰했다.[37] 이 사고로 제3전대 사령관 스즈키 요시오 소장과 함장을 포함한 1,200명 이상의 승무원이 목숨을 잃었다.[37]
곤고는 일본 전함 중 유일하게 잠수함의 뇌격으로 침몰한 함선이다.[129]
12. 전후
현재 곤고의 위령비는 나가사키현 사세보시 히가시 공원에 있다.
1930년 제1차 개장으로 제거된 곤고의 보일러는 현재 구레시 해사 역사 과학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2008년 중요 과학 기술 사료 (미래 기술 유산) 제00002호로 지정되었다.[139][140]
곤고 침몰 당시 함수에 게양되었던 군함기는 승무원이 회수하였고, 이 승무원이 포로가 된 중화민국에 접수되었다가 1969년 반환되어 해군 OB회 '구로시오회(黒潮会)'에 의해 관리되었다. 이후 2009년 회원의 고령화로 해산된 후 군함기를 회수한 승무원의 고향인 후쿠오카현 이즈카시에 기증하여 이즈카 시 역사 자료관에 보존되고 있다.[141]
13. 주요 성능
항목 | 건조 당시 (1913년) | 1차 개장 후 (1930년) | 2차 개장 후 (1938년) | 최종 (1944년) |
---|---|---|---|---|
배수량 | 상비 27,500t | 기준 29,330t | 기준 32,200t, 공시 36,314t | |
전장 | 214.6m | 222m | ||
전폭 | 28.04m | 31.02m | ||
흘수 | 8.38m | 8.65m | 9.6m | |
주 보일러 | 야로우식 혼소 보일러 36기 | 로호 함본식 전소 보일러 4기, 로호 함본식 혼소 보일러 6기 | 로호 함본식 보일러 8기 | |
주 기관 | 파슨스식 직결 터빈 2기 4축 | 함본식 터빈 4기 4축 | ||
축마력 | 64,000shp | 136,000shp | ||
속력 | 27.5kt | 26kt | 30.3kt | |
항속거리 | 8,000해리/14kt | 9,500해리/14kt | 10,000해리/18kt | |
연료 | 석탄 4,000t, 중유 1,000t | 석탄 2,661t, 중유 3,292t | 중유 6,000t | |
승무원 | 1,201명 | |||
주포 | 비커스식 35.6cm 연장포 4기 | |||
부포 | 비커스식 15.2cm 단장포 16문 | 비커스식 15.2cm 단장포 14문 | 비커스식 15.2cm 단장포 8문 | |
고각포 | 없음 | 8cm 단포 7문 | 12.7cm 연장포 4기 | 12.7cm 연장포 6기 |
기총 | 없음 | 25mm 연장 10기 | 25mm 3연장 18기, 25mm 연장 8기, 25mm 단장 30정 | |
어뢰 | 53cm 수중 발사관 8개 | 53cm 수중 발사관 4개 | 없음 | |
기타 무장 | 8cm 단포 12문 | 21호 전탐 1기, 22호 전탐 2기, 13호 전탐 2기 | ||
장갑 | 흘수선 203mm, 갑판 19mm, 주포 덮개 75mm, 주포 앞쪽 방패 250mm, 부포곽 152mm | 흘수선 203mm, 갑판 19mm[1], 주포 덮개 152mm, 주포 앞쪽 방패 250mm, 부포곽 152mm | ||
탑재기 | 없음 | 3기 | 3기, 캐터펄트 1기 |
[1] 수평 방어 보일러실 64mm, 기관실 83~89mm, 탄약고 102~114mm, 조타실 76mm 등.
14. 함장
취임일자 | 계급 | 성명 |
---|---|---|
1912년 12월 1일 | 대좌 | 나카노 나오에 |
1913년 12월 1일 | 대좌 | 야마나카 시바키치 |
1914년 12월 1일 | 대좌 | 마츠오카 슈조 |
1915년 12월 13일 | 대좌 | 아라카와 츄고 |
1916년 12월 1일 | 대좌 | 요시오카 한사쿠 |
1917년 12월 1일 | 대좌 | 카네마루 키요츠구 |
1918년 4월 9일 | 대좌 | 시마우치 칸타 |
1919년 4월 1일 | 대좌 | 노자키 코쥬로 |
1919년 11월 20일 | 대좌 | 타지리 타다지 |
1920년 11월 12일 | 대좌 | 무타 카메타로 |
1921년 11월 20일 | 대좌 | 타케미츠 하지메 |
1922년 12월 1일 | 대좌 | 세키 칸죠 |
1923년 11월 20일 | 대좌 | 키시이 코이치 |
1924년 11월 1일 | 대좌 | 하치스미 사부로 |
1925년 12월 1일 | 대좌 | 마츠시타 하지메 |
1927년 12월 1일 | 대좌 | 요시다 젠고 |
1928년 12월 10일 | 대좌 | 이케나카 켄이치 |
1930년 12월 1일 | 대좌 | 이케다 케이노스케 |
1931년 12월 1일 | 대좌 | 히구라시 토요토시 |
1932년 12월 1일 | 대좌 | 콘도 노부타케 |
1933년 11월 15일 | 대좌 | 미키 타이치 |
1934년 11월 15일 | 대좌 | 키시모토 카네지 |
1935년 11월 15일 | 대좌 | 스카라 타마조 |
1936년 12월 1일 | 대좌 | 마츠우라 에이지로 |
1937년 12월 1일 | 대좌 | 쿠리타 타케오 |
1938년 11월 15일 | 대좌 | 스즈키 요시오 |
1939년 10월 20일 | 대좌 | 니시무라 쇼지 |
1939년 11월 15일 | 대좌 | 타나카 라이조 |
1941년 4월 15일 | 대좌 | 오스기 모리이치 |
1941년 8월 15일 | 대좌 | 코야나기 토미지 |
1942년 12월 26일 | 대좌 | 이쥬인 마츠지 |
1943년 7월 17일 | 대좌 | 시마자키 토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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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ato and Musashi Internet Photo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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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6
[44]
서적
Lundgren (2014)
[45]
서적
Boyle (1998)
[46]
서적
Wheeler (1980)
[47]
서적
Wheeler (1980)
[48]
문서
海軍制度沿革11-2(1972)
[49]
문서
日本の戦艦(上)2001
[50]
문서
戦史叢書31海軍軍戦備1
[51]
문서
軍艦建造購入交渉雑件/英国3巻/4.軍艦金剛
[52]
서적
歴史群像太平洋戦史シリーズ21 金剛型戦艦
[53]
서적
日本戦艦物語I
[54]
문서
艦船要目公表範囲(昭和12年12月1日)
[55]
문서
海軍制度沿革11-2(1972)
[56]
문서
戦艦『金剛』行動年表
[57]
문서
内令昭和20年1月
[58]
문서
日本の戦艦(上)2001
[59]
서적
歴史群像太平洋戦史シリーズ65 決定版 金剛型戦艦
[60]
서적
日本戦艦物語1
[61]
문서
達明治45年5月
[62]
문서
艦艇類別等級表(昭和16年12月31日)
[63]
문서
死の商人
[64]
문서
ただし、前弩級戦艦であった敷島型戦艦朝日 (戦艦)|朝日が工作艦として太平洋戦争に実戦参加
[65]
문서
艦船名考(1928)
[66]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67]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68]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69]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70]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71]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72]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73]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74]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75]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76]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77]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78]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79]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80]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81]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82]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83]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84]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85]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86]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87]
서적
日英兵器産業とジーメンス事件
[88]
서적
日本戦艦物語I
[89]
문서
正木義太傳
[90]
문서
正木義太傳
[91]
간행물
週刊 栄光の日本海軍パーフェクトファイル
[92]
문서
達大正2年8月
[93]
문서
達大正1年11月(2)
[94]
서적
歴史群像太平洋戦史シリーズ21 金剛型戦艦
[95]
문서
死の商人
[96]
문서
死の商人
[97]
문서
死の商人
[98]
문서
死の商人
[99]
문서
死の商人
[100]
문서
死の商人
[101]
서적
歴史群像太平洋戦史シリーズ65 決定版 金剛型戦艦
[102]
서적
日本海軍艦艇写真集 戦艦金剛・比叡
光人社
[103]
문서
連合艦隊戦艦12隻を探偵する
[104]
서적
歴史群像太平洋戦史シリーズ65 決定版 金剛型戦艦
[105]
서적
戦史叢書 海軍軍整備(1)
[106]
서적
回想の提督
[107]
서적
連合艦隊戦艦12隻を探偵する
[108]
서적
中部太平洋方面海軍作戦<2>昭和十七年六月以降
[109]
서적
中部太平洋方面海軍作戦<2>昭和十七年六月以降
[110]
논문
愛しの「雪風」わが忘れざる駆逐艦 海の真剣勝負に勝ちぬいた栄光の武勲艦の記録
光人社
[111]
기타
[112]
서적
日本海軍艦艇写真集 戦艦金剛・比叡
光人社
[113]
기타
[114]
서적
歴史群像太平洋戦史シリーズ65 決定版 金剛型戦艦
[115]
서적
日本海軍艦艇写真集 戦艦金剛・比叡
光人社
[116]
기타
[117]
서적
日本海軍艦艇写真集 戦艦金剛・比叡
光人社
[118]
기타
[119]
서적
連合艦隊下巻・激闘編
世界文化社
[120]
서적
レイテ沖海戦 下巻
光人社NF文庫
[121]
서적
砲術艦長黛治夫―海軍常識を覆した鬼才の生涯
光人社NF文庫
[122]
기타
[123]
논문
レイテ沖海戦の真実⑥ サマール沖の誤射事件
[124]
기타
[125]
기타
[126]
기타
[127]
기타
[128]
기타
[129]
기타
[130]
기타
[131]
기타
[132]
기타
[133]
기타
[134]
기타
[135]
기타
[136]
기타
[137]
기타
[138]
기타
[139]
웹사이트
重要科学技術史資料登録「ヤーロー式ボイラー」
http://yamato-museum[...]
[140]
웹사이트
建築設備技術遺産認定 巡洋戦艦「金剛」搭載のヤーロー式ボイラー
http://yamato-museum[...]
[141]
웹사이트
目録詳細/戦艦「金剛」軍艦旗
https://adeac.jp/iiz[...]
2023-09-04
[142]
아시아역사자료센터
海軍辞令公報(部内限)第691号 昭和16年8月15日
[143]
서적
日本初の超弩級金剛型の誕生
[144]
서적
金剛型の建造
[145]
문서
金剛|戦艦|199.21米|28.04米|8.38米|基準29,330頓|速力26.0節|短艇籔13|英国毘社|明治44-1-17|明治45-5-18|大正2-8-16|36cm…8 15cm…16 12.7cm高角|発射管-4|探照燈6|タルビン4|艦本式10|推進器數4|馬力64,000
[146]
논문
戦艦『金剛』行動年表
[147]
문서
内令第五〇號(軍極秘) 呉鎮守府在籍 軍艦 熊野|佐世保鎮守府在籍 軍艦 金剛 軍艦 那智 右帝國軍艦籍ヨリ除カル 昭和二十年一月二十日 海軍大臣
[148]
서적
決定版 金剛型戦艦
[149]
서적
日本戦艦物語1
[150]
문서
達第五十八號 英國ニ於テ建造ノ伊號装甲巡洋艦ヲ金剛ト命名セラル 明治四十五年五月十八日 海軍大臣 男爵 齋藤實
[151]
문서
艦艇類別等級表|軍艦|戦艦|金剛型|金剛、榛名、霧島
[152]
문서
正木義太傳
[153]
문서
金剛副長時代 中佐
[154]
문서
達第百九號 艦艇類別等級別表中比叡ノ次ニ金剛ヲ加フ|大正二年八月十六日 海軍大臣 男爵 斉藤實
[155]
서적
역사군상 태평양전사 시리즈21 금강형 전함
[156]
인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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