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포왜성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구포왜성은 임진왜란 시기 일본군이 김해와 양산 사이의 연락을 위해 축조한 일본식 성으로, 김해 죽도왜성의 지성이다. 낙동강변에 위치하여 선박 정박이 가능했으며, 일본에서는 카도카이성으로 알려져 있다. 성벽은 나사 모양으로 쌓였고, 성 상단부의 석축지가 남아 있어 왜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2002년과 2004년 발굴 조사를 통해 건물지, 유물 등이 확인되었으며, 현재는 부산북구문화빙상센터 건립으로 외성이 소실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93년 완공된 건축물 - 눌차왜성
눌차왜성은 1593년 임진왜란 시기 일본군이 조선 수군에 대항하기 위해 가덕도에 축조한 왜성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건설되었으며, 연곽식 구조를 갖추고 있다. - 1593년 완공된 건축물 - 임랑포왜성
임랑포왜성은 부산 기장군 임랑리에 위치한 왜성으로, 본성은 방모산 정상에, 외곽부는 임랑천 방향 구릉에 위치하며 철도 및 도로 건설로 대부분 파괴되어 일부만 남아있다. - 부산광역시의 기념물 - 경상좌수영성지
경상좌수영성지는 경상좌도 수군 총 지휘관이 있던 진영으로, 1652년 부산포로 옮겨진 후 1895년까지 사용되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성은 1692년 재건된 것으로, 방어 시설을 갖추었으나 현재는 성벽과 남문, 홍예문만 남아있다. - 부산광역시의 기념물 - 김해 죽도왜성
김해 죽도왜성은 임진왜란 때 나베시마에 의해 축조된 성으로, 낙동강 지류에 인접하여 김해 북쪽 방어의 요충지 역할을 했으며, 발굴 조사를 통해 유물이 확인되었다. - 부산광역시의 성 - 금정산성
금정산성은 부산, 양산에 걸쳐 있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산성으로, 조선 중기부터 존재했으며 낙동강 하구와 동래를 방어하는 요충지로서 숙종 때 개축되었고 현재 일부 복원되어 사적 제215호로 지정되었다. - 부산광역시의 성 - 경상좌수영성지
경상좌수영성지는 경상좌도 수군 총 지휘관이 있던 진영으로, 1652년 부산포로 옮겨진 후 1895년까지 사용되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성은 1692년 재건된 것으로, 방어 시설을 갖추었으나 현재는 성벽과 남문, 홍예문만 남아있다.
구포왜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성곽 정보 | |
![]() | |
이름 | 구포왜성 |
다른 이름 | 감동포성, 구포의성 |
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1동 산93번지 |
종류 | 평산성 |
축성 연도 | 1593년 |
철거 연도 | 1598년 |
건축가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다치바나 무네시게 다치바나 나오쓰구 지쿠시 히로카도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모리 히데모토 |
통치자 | 구로다 나가마사 |
유적 | 석벽 호구 오르막 석벽 해자 |
문화재 지정 정보 |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6호 |
좌표 | |
위도 | 35.21667 |
경도 | 129.000694 |
2. 역사
구포왜성은 김해 죽도왜성의 지성으로 1593년 일본장수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가 김해와 양산 사이의 연락을 취하려는 목적으로 쌓은 왜성으로 낙동강변을 끼고 그 아래 선박이 정박할 수 있었다.[1] 임진왜란시 일본군 나베시마(鍋島直茂)의 군사들이 주둔하면서 방어했는데 부산지역에 있는 11개의 왜성 가운데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편에 속하며, 일본에는 '''카도카이성'''(カードカイ城)으로 알려져 있다.[1] 성 상단부의 석축지는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어 왜성 연구의 좋은 자료이다. 성벽은 나사모양으로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좁히면서 올려 쌓았다. 구포왜성이 위치한 의성산은 거북이 형태의 산으로, 높고 넓은 쪽에 본성이 있고, 머리 부분인 낮은 산에 외성이 있었으나, 외성이 있던 머리 부분은 부산북구문화빙상센터가 건립되면서 사라졌다.
구포왜성 본성은 왜성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상태로 최고 10m 높이의 성벽과 성의 상단부의 석축지 1개의 누각지가 남아있어, 일본식 성의 연구에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1]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장수 고바야카와 등이 김해와 양산 사이의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쌓은 일본식 성으로 김해 죽도성의 지성이다. 일명 감동포성이라고도 하며, 구법곡의 신이라고도 한다. 지역 주민들은 이곳을 의성이라 부른다. 이것은 신라시대에 왜구의 침략을 받게 되자 신라의 황용 장군이 오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성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다는 전설과 관련되어 있다./이 성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장수 고바야까와 등이 김해와 양산 사이의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쌓은 일본식 성으로 김해 죽도성의 지성이다. 일명 감동포성이라고도 하며, 구법곡의 신이라고도 한다. 지역 주민들은 이곳을 의성이라 부른다. 이것은 신라시대에 왜구의 침략을 받게 되자 신랴의 황용 장군이 오백명의 군사를 이끌고 성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다는 전설과 관련되어 있다.일본어[2]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군의 장수 나베시마의 군사들이 주둔하였다고 한다. 성안에 천수각지 1개소가 남아 있으며, 성의 상단부에는 10m 높이의 성벽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군의 장수 나베지마의 군사들이 주둔하였다고 한다. 성안에 천수각지 1개소가 남아 있으며, 성의 상단부에는 10m 높이의 성벽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일본어[2]
성벽은 비스듬히 경사져 있으며, 아랫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나사모양으로 돌며 성수각지 1개소가 비스듬히 경사져 있으며,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나사모양으로 감돌며 좁혀 올렸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쌓은 일본식 성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성벽은 비스듬히 경사져 있으며, 아랫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나사모양으로 돌며 성수각지 1개소가 비스듬히 경사져 있으며,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나사모양으로 감돌며 좁혀 올렸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쌓은 일본식 성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일본어[2]
실내빙상장의 건립으로 인하여 2002년과 2004년 2차례에 걸쳐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지성부를 발굴조사하였다./실내빙상장의 건립으로 인하여 2002년과 2004년 2차례에 걸쳐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지성부를 발굴조사하였다.일본어[3]
조사에서 구릉 정상부를 정방형에 가까운 형태로 둘려진 폭 3m, 깊이 1m의 단면 ‘V’자상의 공굴을 비롯하여 그 위에 조성된 토루와 외곽으로 장옥 24동, 호구, 수혈유구, 굴절 등이 조사되었다. 장옥은 정면 8칸, 측면 1칸, 정면 2칸, 측면 6칸 등의 건물로 주혈 간격은 180~200cm 정도이다./조사에서 구릉 정상부를 정방형에 가까운 형태로 둘려진 폭 3m, 깊이 1m의 단면 ‘V’자상의 공굴을 비롯하여 그 위에 조성된 토루와 외곽으로 장옥 24동, 호구, 수혈유구, 굴절 등이 조사되었다. 장옥은 정면 8칸, 측면 1칸, 정면 2칸, 측면 6칸 등의 건물로 주혈 간격은 180~200cm 정도이다.일본어[2]
출토유물로는 일본 전국시대 조리용구인 스리바치(㨹鉢)와 중국 명대의 청화백자편, 조선시대의 분청사기편, 지석편, 와편 등이 출토되었다./출토유물로는 일본 전국시대 조리용구인 스리바찌(㨹鉢)와 중국 명대의 청화백자편, 조선시대의 분청사기편, 지석편, 와편 등이 출토되었다.일본어[2]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군은 한반도 남해안 각지에 왜성군을 축조하여 진을 쳤다. 구포왜성은 김해 죽도왜성의 출성으로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중심으로 축성을 시작했다. 낙동강에 면해 있으며, 맞은편의 김해 죽도왜성과 마주보고 있었다. 또한 배의 정박도 가능했다.
경장의 역에서는 주로 구로다 나가마사가 재번(在番)하고 있었다.
2. 1. 축성 및 역할
구포왜성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장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이 김해와 양산 사이의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쌓은 일본식 성으로 김해 죽도성의 지성이다. 일명 감동포성이라고도 하며, 구법곡의 신이라고도 한다.[2] 지역 주민들은 이곳을 의성이라 부르는데, 이는 신라시대에 왜구의 침략을 받게 되자 신라의 황용 장군이 오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성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다는 전설과 관련되어 있다.[2]이 성은 금정산 한 지맥이 끝나는 구포지방에 위치하고 있는데, 서쪽으로 낙동강을 끼고 있어 선박을 정박할 수 있도록 하였다.[2]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군의 장수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군사들이 주둔하였다고 한다. 성안에 천수각지 1개소가 남아 있으며, 성의 상단부에는 10m 높이의 성벽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2] 성벽은 비스듬히 경사져 있으며, 아랫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나사모양으로 돌며 성수각지 1개소가 비스듬히 경사져 있으며,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나사모양으로 감돌며 좁혀 올렸다.[2]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군은 한반도 남해안 각지에 왜성군을 축조하여 진을 쳤다. 구포왜성은 김해 죽도왜성의 출성으로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중심으로 축성을 시작했다. 낙동강에 면해 있으며, 맞은편의 김해 죽도왜성과 마주보고 있었다. 또한 배의 정박도 가능했다. 경장의 역에서는 주로 구로다 나가마사가 재번(在番)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쌓은 일본식 성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2]
2. 2. 임진왜란 당시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장수 고바야까와 등이 김해와 양산 사이의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쌓은 일본식 성으로 김해 죽도성의 지성이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중심으로 축성을 시작했다. 일명 감동포성이라고도 하며, 구법곡의 신이라고도 한다. 지역 주민들은 이곳을 의성이라 부른다. 이것은 신라시대에 왜구의 침략을 받게 되자 신라의 황용 장군이 오백명의 군사를 이끌고 성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다는 전설과 관련되어 있다. 이 성은 금정산 한 지맥이 끝나는 구포지방에 위치하고 있는데, 서쪽으로 낙동강을 끼고 있어 선박을 정박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낙동강에 면해 있으며, 맞은편의 김해 죽도왜성과 마주보고 있었다. 또한 배의 정박도 가능했다.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군의 장수 나베지마의 군사들이 주둔하였다고 한다. 성안에 천수각지 1개소가 남아 있으며, 성의 상단부에는 10m 높이의 성벽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 경장의 역에서는 주로 구로다 나가마사가 재번(在番)하고 있었다.
성벽은 비스듬히 경사져 있으며, 아랫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나사모양으로 돌며 성수각지 1개소가 비스듬히 경사져 있으며,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나사모양으로 감돌며 좁혀 올렸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쌓은 일본식 성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2. 3. 전설
3. 구조
2002년과 2004년, 실내빙상장 건립으로 인해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구포왜성의 지성부를 두 차례 발굴조사하였다.[3] 조사 결과, 구릉 정상부를 정방형에 가깝게 둘러싼 폭 3m, 깊이 1m의 단면 'V'자형 공굴과 그 위에 조성된 토루, 외곽으로 24동의 장옥, 호구, 수혈유구, 굴절 등이 확인되었다. 장옥은 정면 8칸, 측면 1칸, 또는 정면 2칸, 측면 6칸 등의 건물로, 주혈 간격은 180~200cm 정도이다.[2] 출토 유물로는 일본 전국시대 조리용구인 스리바찌/㨹鉢일본어와 중국 명나라 시대의 청화백자편, 조선시대의 분청사기편, 지석편, 기와편 등이 있다.[2]
3. 1. 성벽
3. 2. 건물지
2002년과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지성부를 발굴조사하였다.[3] 구릉 정상부를 정방형에 가까운 형태로 둘러진 폭 3m, 깊이 1m의 단면 ‘V’자상의 공굴을 비롯하여 그 위에 조성된 토루와 외곽으로 장옥 24동, 호구, 수혈유구, 굴절 등이 조사되었다. 장옥은 정면 8칸, 측면 1칸, 정면 2칸, 측면 6칸 등의 건물로 주혈 간격은 180~200cm 정도이다.[2]일본 전국시대의 조리용구인 스리바찌(㨹鉢)와 중국 명대의 청화백자편, 조선시대의 분청사기편, 지석편, 와편 등이 출토되었다.[2]
4. 갤러리
5. 교통
부산 도시철도 2호선 덕천역에서 도보로 이동 가능하다.
6. 같이 보기
참조
[1]
문서
부산진왜성.PDF 일본 고시 내용 부산·마산·울산·부산진지성문 왜성 호칭 구포·안골왜성 유적 발굴문 Busanjin Waeseong Dwarf Castle.PDF Contents of Japanese Notice Busan, Masan, Ulsan, Busan Jinji Castle Gate
https://drive.google[...]
[2]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3]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4]
문서
원래는 갈마봉성이였으나 임진왜란에 석축을 헐어낸 후 일본식으로 재구축 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성북왜성 영토로 변했다.
[5]
간행물
당감동 성지 2차 발굴조사
https://museum.busan[...]
부산박물관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