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타 데쓰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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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가타 데쓰잔은 1884년 나가노현 스와시에서 태어난 일본 제국의 군인이다.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수석 또는 차석으로 졸업한 수재로, 육군 대신으로 거론될 정도로 촉망받았으나, 1935년 육군성 군무국장으로 재직 중 황도파 장교인 아이자와 사부로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죽음은 일본 육군 내 파벌 갈등을 심화시켰고, 2·26 사건 및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등 일본의 격동기 정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총력전 체제 구축을 추진하며, 만주 사변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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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타 데쓰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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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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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엘 페로 (El Perro) |
인물 정보 | |
출생일 | 1884년 1월 14일 |
출생지 | 일본, 나가노현, 스와시 |
사망일 | 1935년 8월 12일 |
사망지 | 일본, 도쿄 |
묘소 | 도쿄도, 미나토구, 아오야마 영원 부속 다테야마 묘지 |
군사 경력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904년 – 1935년 |
최종 계급 | 육군 중장 (사후 추서) |
근무 | 일본 육군성 군무국장 |
소속 부대 | 제45 기갑 보병 사단 |
2. 생애
1884년 나가노현 스와시에서 태어난 나가타 데쓰잔은 일본 육군 유년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모두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 육군대학교도 2위로 졸업한 수재였다. 장래 일본 육군 대신으로 거론될 정도였으나, 1935년 육군성 군무국장실에서 황도파였던 아이자와 사부로 중좌에게 암살당했다.[27] 이는 황도파의 중심 인물 마사키 진자부로 육군 대장이 교육총감직에서 경질된 사건이 원인이었다. 나가타는 사망 당시 육군 소장이었으며, 사후 육군 중장으로 추서되었다.
나가타 데쓰잔 암살 이후 통제파와 황도파의 파벌 분쟁은 더욱 심해져,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2·26 사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나가타가 이끌던 통제파는 도조 히데키가 계승하여 일본을 태평양 전쟁으로 이끌었다.
1926년 나가타 데쓰잔은 국가 총동원 기관 설치 준비 위원회 간사가 되어 내각의 자원국, 육군성의 동원과와 통제과 설치를 이끌었고, 초대 동원과장이 되었다.[7] 1928년 동원과장을 사임했으며, 후임은 도조 히데키가 되었다.[7]
1934년 10월, 나가타는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정치 지배와 총력전 계획에 영향을 받아, 육군의 주장을 정치·경제 분야에 침투시켜 완전한 국방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국방의 본의와 그 강화의 제창』이라는 육군 팸플릿을 출판했다.
나가타는 도조 히데키, 도미나가 교지, 무토 아키라 등 일석회의 일부와 함께 고노에 후미마로를 중심으로 하는 혁신 내각을 통해 혁신 정책을 실현하려 했다. 이들은 사회민중당의 가메이 간이치로, 아소 히사시 등과 협력하고, 혁신 관료와 연락을 취하며, 반대 쿠데타까지 계획했다. '정치적 비상 사태 발발에 대한 대책 요강'이라는 구체적인 안건도 마련되었다. 또한 군내 반대파인 황도파를 추방하고, 부내 질서를 어지럽히는 청년 장교를 탄압하려 했다.[9]
2. 1. 초기 생애
1884년 1월 14일 나가노현 스와시에서 지역 타카시마 병원장인 나가타 시게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가타 가문은 대대로 스와번을 섬긴 의사 집안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27] 어린 시절부터 이와나미 쇼텐의 설립자인 이와나미 시게오와 친구였으며, 평생 우정을 나누었다.1890년 다카시마 심상소학교, 스와 고등소학교(현 스와 시립 다카시마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후지와라 효과의 이름이 유래된 중앙기상대장 후지와라 사쿠헤이와 동급생이었다.
1895년 아버지 시카리가 사망하고, 같은 해 10월 도쿄시 우시고메구 아이지쓰 심상고등소학교로 전학했다. 1898년 9월에는 도쿄 육군 지방 유년학교에 입교했다.
1903년 5월에 사관후보생이 되어 보병으로 보병 제3연대에 배속되었다.
1904년 10월 24일 일본 육군사관학교(16기)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1월 1일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육사 동기생인 오카무라 야스지, 오바타 도시시로와 함께 육사 제16기 삼우조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1908년 일본 육군대학교(23기)에 입교하여, 1910년 11월 2위/52명(수석은 우메즈 미지로)으로 졸업하고 은사의 군도를 수여받았다.[5]
2. 2. 군 경력
1884년 나가노현 스와시에서 태어난 나가타 데쓰잔은 일본 육군 유년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모두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 육군대학교도 2위로 졸업한 수재였다. 장래 일본 육군 대신으로 거론될 정도였으나, 1935년 육군성 군무국장실에서 황도파였던 아이자와 사부로 중좌에게 암살당했다.[27] 이는 황도파의 중심 인물 마사키 진자부로 육군 대장이 교육총감직에서 경질된 사건이 원인이었다. 나가타는 사망 당시 육군 소장이었으며, 사후 육군 중장으로 추서되었다.나가타 데쓰잔 암살 이후 통제파와 황도파의 파벌 분쟁은 더욱 심해져,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2·26 사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나가타가 이끌던 통제파는 도조 히데키가 계승하여 일본을 태평양 전쟁으로 이끌었다.
나가타는 1904년 10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11년 11월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전후 덴마크, 스웨덴, 스위스, 독일 등 유럽 각국 일본 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했다. 1923년 2월 귀국하여 일본 육군 참모 본부에서 여러 부서의 관리자로 근무했으며, 독일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1927년 3월 대좌로 진급하여 육군 제3보병연대 지휘관을 맡았고, 1932년 소장으로 진급, 1933년에는 육군 제1보병여단장이 되었다.
관동군 군의부장 가지츠카 류지 중장의 증언에 따르면, 1949년 하바롭스크 전범 재판에서 나가타는 1930년대에 이시이 시로가 제안한 세균전(생물학전) 프로그램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류지는 이시이가 나가타의 지원에 감사하여 731 부대 본부가 있는 핑팡 구역 사무실에 나가타의 흉상을 보관했다고 증언했다. 류지는 나가타를 육군성 군사과장으로 지목했다.
나가타 데쓰잔의 군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 | 내용 |
---|---|
1904년 | 육군사관학교 졸업 (16기 수석), 육군 보병 소위 임관,[21] 보병 제3연대 보충 대대 부속 |
1906년 | 보병 제58연대 부속 |
1907년 | 육군 보병 중위 진급 |
1911년 | 육군대학교 졸업 (23기) |
1912년 | 교육 총감 부속 근무 (제1과) |
1913년 | 육군 보병 대위 진급, 독일 주재 (~1914년) |
1915년 | 포로 정보국 담당, 덴마크 주재, 스웨덴 주재 (~1917년) |
1917년 | 임시 군사 조사 위원 |
1919년 | 육군 보병 소령 진급 |
1921년 | 스위스 공사관 부속 무관 |
1923년 | 참모 본부 부속, 교육 총감부 과원, 육군 보병 중령 진급, 육군대학교 교관 (겸임) |
1924년 | 보병 제50연대 부속, 육군 기술 본부 부속, 군사과 고급 과원, 육군대학교 교관 (겸임) |
1925년 | 국본사 평의원 촉탁 |
1926년 | 육군 병기 본창 부속 (작전 자료 정비 회의 간사), 정비국 동원 과장 |
1927년 | 육군 보병 대령 진급 |
1928년 | 보병 제3연대장 |
1930년 | 육군성 군무국 군사 과장 |
1932년 | 육군 소장 진급, 참모 본부 제2부장 |
1933년 | 보병 제1여단장 |
1934년 | 육군성 군무국장 |
1935년 | 아이자와 사부로 중좌에게 피살, 순직으로 중장 진급 |
2. 2. 1. 바덴바덴 밀약
1920년(다이쇼 시대 9년) 주 스위스 일본 대사관 부 주재 무관이 되었다. 1921년(다이쇼 10년) 나가타는 러시아 공사관 부 무관(독일에서 대기)인 오바타 도시시로 소좌와 유럽 출장 중인 오카무라 야스지 소좌와 함께, 같은 해 10월 27일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회합을 가졌고, 다음 날에는 도조 히데키도 합류했다. 이들은 육군 내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으로 대표되는 조슈벌 지배 타파, 인사 쇄신, 군제 개혁, 총동원 체제 구축을 목표로 하는 데 합의했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는 검찰 측이 이를 군부 독재로 이어지는 단초라고 언급했다.[10]오카무라는 "다이쇼 10년 10월 27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나가타 데쓰잔, 오바타 도시시로와 저 3명이 육군 혁신의 혈맹을 맺었다는 사건은 바로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육군은 야마나시 한조 육군대신, 우에하라 유사쿠 참모총장 이하 사쓰마, 조슈벌이 지배하고 있었다. 나가타(시나노), 오카무라(막신), 오바타(도사)는 모두 육사, 육대의 우등생이지만, 번벌에 속하지 않아 기존의 사쓰마, 조슈벌 중심의 인사로는 출세를 기대할 수 없었다. 이들은 이러한 현상을 타파하고, 더 나아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유럽에서의 총력전 체제 구축을 일본에서도 시행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에 찬동하는 중견 장교들의 공부회로서 일석회가 결성되었다.[11]
2. 3. 총력전 체제 구축 추진
1926년(다이쇼 15년), 나가타 데쓰잔은 국가 총동원 기관 설치 준비 위원회 간사가 되어 내각의 자원국, 육군성의 동원과와 통제과 설치를 이끌었고, 초대 동원과장이 되었다.[7] 1928년(쇼와 3년) 동원과장을 사임했으며, 후임은 도조 히데키가 되었다.[7]1934년(쇼와 9년) 10월, 나가타는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정치 지배와 총력전 계획에 영향을 받아, 육군의 주장을 정치·경제 분야에 침투시켜 완전한 국방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국방의 본의와 그 강화의 제창』이라는 육군 팸플릿을 출판했다.
나가타는 도조 히데키, 도미나가 교지, 무토 아키라 등 일석회의 일부와 함께 고노에 후미마로를 중심으로 하는 혁신 내각을 통해 혁신 정책을 실현하려 했다. 이들은 사회민중당의 가메이 간이치로, 아소 히사시 등과 협력하고, 혁신 관료와 연락을 취하며, 반대 쿠데타까지 계획했다. '정치적 비상 사태 발발에 대한 대책 요강'이라는 구체적인 안건도 마련되었다. 또한 군내 반대파인 황도파를 추방하고, 부내 질서를 어지럽히는 청년 장교를 탄압하려 했다.[9]
2. 4. 파벌 갈등과 암살
1884년 나가노현 스와시에서 태어난 나가타 데쓰잔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 육군대학교를 2위로 졸업한 수재였다. 장래가 촉망되는 육군 대신 후보였으나, 일본 육군 내부 파벌 분쟁에 휘말려 황도파 소속 아이자와 사부로 중좌에게 암살당했다.[27]나가타 데쓰잔 암살의 원인은 황도파의 중심 인물 마사키 진자부로 육군 대장이 교육총감직에서 경질된 사건이었다. 당시 육군성 군무국장이었던 나가타는 육군 소장이었으며, 사망 후 육군 중장으로 추서되었다.
1930년대 중반, 나가타는 일본 군부 내 급진적인 황도파에 반대하는 온건파인 통제파의 지도자로 여겨졌다. 그는 국가 비상사태 시 군대와 민간 경제를 총력전 체제로 만들기 위해 국가 동원 전략을 계획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행동은 부패한 정당 정치와 재벌과의 결탁을 "최대 악당"으로 여기는 황도파의 격렬한 반감을 샀다.[2]
1935년 7월, 나가타의 정치적 책략으로 마사키 진자부로가 강제 퇴역당했다. 이는 아이자와 사부로를 분노하게 했다.
1935년 8월 12일, 나가타는 도쿄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아이자와 사부로에게 칼로 암살당했다. 이는 아이자와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체포될 때 저항하지 않았던 아이자와는 "절대적인 영역에 있었기에, 긍정도 부정도, 선도 악도 없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3]
나가타의 암살은 통제파와 황도파의 파벌 분쟁을 심화시켰고, 1936년 2·26 사건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황도파는 제거되고 통제파가 군대 내에서 완전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아이자와는 1936년 7월 군사 재판을 거쳐 총살형에 처해졌다.
2. 5. 사망 이후
1935년 8월 12일, 나가타는 황도파의 중심 인물 마사키 진자부로(眞崎甚三郎)를 교육 총감직에서 경질한 일로 인해, 육군성 군무 국장실에서 황도파 소속 아이자와 사부로(相沢三郎) 중좌에게 암살당했다.[27] 나가타는 사망 당시 육군 소장이었으며, 사후 육군 중장으로 추서되었다. 정사위 훈1등에 서훈되었고 서보장을 수여받았다. 묘소는 도쿄도 미나토구 아오야마 영원 부속 다테야마 묘지에 있다.나가타의 암살 이후, 통제파와 황도파의 파벌 분쟁은 더욱 심화되어,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2·26 사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나가타가 이끌던 통제파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가 계승하여 일본을 태평양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기획원 총재였던 스즈키 데이이치는 전후 "만약 나가타 데쓰잔이 있었다면 태평양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가타가 살아있었다면 도조가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 회상했다.[12]
3. 평가
나가타 데쓰잔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통제파는 그를 "억울하게 살해된 희생자"로 보는 반면, 황도파는 "일본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쇼와 군벌의 원흉"으로 평가한다.[13]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만주 사변 이후 나가타의 행적에 대한 해석 차이에서 비롯된다.[13]
최근에는 나가타의 대륙 정책 및 군비 정책을 근거로 "전쟁으로 가는 길을 막으려 했던 군인"이라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14] 그는 1920년대 중반 정당 정치와 공존할 수 있는 육군 조직 개혁을 목표로 했고, 만주 사변 이전부터 현지 군의 통제를 위해 노력했다. 그의 죽음이 중일 전쟁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13] 또한 "육군을 독주(폭주)시키지 않겠다"는 신념과 "일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일본의 국방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자각을 가져야 한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13]
기획원 총재였던 스즈키 데이이치는 전후 "만약 나가타 데쓰잔이 있었다면 태평양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가타가 살아있었다면 도조가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 회상했다.[12]
나가타 암살 사건은 통제파와 황도파의 파벌 싸움을 격화시켰고, 이는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2·26 사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나가타 사후 도조 히데키가 통제파를 이끌었고,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주도하게 된다.
3. 1. 긍정적 평가
나가타 데쓰잔은 통제파의 수장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특히 만주 사변 이후 그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13]통제파는 나가타를 "억울하게 살해된 희생자"로 보는 반면, 황도파는 "일본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쇼와 군벌의 원흉"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나가타의 대륙 정책 및 군비 정책을 근거로 "전쟁을 막으려 했던 군인"이라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14]
나가타는 1920년대 중반 정당 정치와 공존할 수 있는 육군 조직 개혁을 목표로 했고, 만주 사변 이전부터 일관되게 현지 군의 통제를 위해 노력했다. 그의 죽음은 중일 전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육군을 폭주시키지 않겠다"는 신념과 "일본 국민 개개인이 국방의 책임을 자각해야 한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그를 단순한 합리주의적 군인을 넘어, 정치적 신념과 이상을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으로 평가하게 한다.[13]
이시하라 간지 등이 관동군을 동원해 일으킨 만주 사변을 나가타와 일석회는 지지했다. 결과적으로 나가타가 관동군의 폭주를 지지한 것은 사실이다.[15]
하지만, 나가타가 만주 사변에 찬동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사변 3개월 전, 나가타는 군사 과장으로서 "만몽 문제 해결 방안 대강"을 작성, 제출했다.[16] 이 대강에서는 "관동군 자제, 국제 여론을 아군으로 만들기" 등을 제시하며 당면한 분쟁을 회피하는 방침을 내세웠다.
사변 당시,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독립 국가 건설" (만주국) 안을 제출하자, 나가타는 외무성, 해군성과 연계하여 "지방 정권 수립"이라는 대안을 제시하고, 아라키 사다오 육군 대신에게 성급한 국가 건설을 막는 방침을 승인받았다.[17] 나가타는 푸이 옹립에도 반대하며[17] 관동군의 이타가키와 정면으로 대립했다.
만주국 건국 이후, 나가타는 "현지 군 억제, 독립 국가 건설 저지" 등의 노력이 무산되자 만주 사변의 현 상황을 추인할 수밖에 없었다. 여론이 만주국 승인으로 기울고, 건국으로 만주 사변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기에[13], 나가타는 "만주국 육성"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럼에도 푸이 옹립에는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나가타는 만주 사변 이전에 관동군에 45식 24cm 유탄포를 보냈고, 이시하라는 이 포를 만주 사변의 공로 중포라고 칭했다. 그러나 이 포는 나가타가 만주 시찰 당시 관동군의 군비가 빈약한 것을 보고 군비 증강을 위해 보낸 것이지, 만주 사변을 위해 보낸 것은 아니었다.
1935년 8월 4일, 중국 비전투 구역에서 일본군 수비대가 공격받아 부상당하는 난저우 사건이 발생하자, 나가타는 신속하게 대응했다. 8월 6일, 관동군에게는 군 중앙과의 긴밀한 연락을 지시하여 견제하고, 사후 처리는 톈진군(중국 주둔군)에 맡겼다. 육군성은 외무성과 협의하여 "대북중 정책"을 수립, "비전투 구역에서 무력 충돌 불안 제거" 방침을 발표했다. 이 방침은 "화북 각 정권과의 친선", "화북 지역과의 경제 협력 추진" 등을 실천 과제로 제시했다. 이러한 대응을 통해 나가타는 루거우차오 사건과 같은 사건 확대를 저지하고, 관동군의 독주에 대처하는 방법을 제시했다.[18] 다만, 이때 나가타는 대중 일격론을 주장했다.
3. 2. 부정적 평가
나가타 데쓰잔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통제파는 그를 "억울하게 살해된 희생자"로 보는 반면, 황도파는 "일본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쇼와 군벌의 원흉"으로 간주한다.[13] 이러한 평가는 만주 사변 이후 나가타의 행적에 대한 해석 차이에서 비롯된다.[13]최근에는 나가타가 "전쟁으로 가는 길을 막으려 했던 군인"이라는 연구도 있다.[14] 그는 1920년대 중반 정당 정치와 공존할 수 있는 육군 조직 개혁을 목표로 했고, 만주 사변 이전부터 현지 군의 통제를 위해 노력했다. 그의 죽음이 중일 전쟁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13] 또한 "육군을 독주(폭주)시키지 않겠다"는 신념과 "일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일본의 국방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자각을 가져야 한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13]
그러나 나가타가 이시하라 간지 등이 일으킨 만주 사변을 지지한 것은 사실이다.[15] 비록 만주 사변 3개월 전, "만몽 문제 해결 방안의 대강"을 통해 관동군의 자제와 국제 여론을 고려한 분쟁 회피 방침을 제시했지만,[16] 결과적으로 관동군의 폭주를 막지 못했다.
만주국 건국 과정에서도 나가타는 외무성, 해군성과 연계하여 "지방 정권 수립"이라는 대안을 제시하고 푸이 옹립에 반대하는 등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지만,[17] 결국 만주국 건국을 추인했다.[13]
나가타가 만주 사변 전에 45식 24cm 유탄포를 관동군에 보낸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만주 시찰 당시 관동군의 군비가 빈약했기 때문이며, 만주 사변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암살 직전인 1935년 8월, 난저우 사건이 발생하자 나가타는 신속하게 대응하여 톈진군(중국 주둔군)에 사후 처리를 맡기고, 대북중 정책을 통해 "화북의 각 정권과의 친선", "화북 지역과의 경제 협력 추진" 등을 내세워 사건 확대를 저지하려 했다.[18] 그러나 이때 나가타는 대중 일격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기획원 총재였던 스즈키 데이이치는 전후 "만약 나가타 데쓰잔이 있었다면 태평양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가타가 살아있었다면 도조가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 회상했다.[12]
4. 일화
- 나가노현 스와군 가미스와정 혼마치(현 스와시) 출신으로, 군립 다카시마 병원장 나가타 시카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가타가는 대대로 다카시마번의 번의를 맡아온 집안으로, 데쓰잔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스와 출신으로 이와나미 쇼텐의 창립자인 이와나미 시게오와는 평생 교우 관계였다.[5]
- 1904년 10월 24일에 육군사관학교(16기)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같은 해 11월 1일에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육사 동기인 오카무라 야스지, 오바타 도시시로와 함께 육사 제16기 삼우조 중 한 명으로 평가받게 되었다.[5]
- 1910년 11월에 육군대학교(23기)를 2위/52명(수석은 우메즈 미지로)으로 졸업하고, 은사의 군도를 수여받았다. 육대 23기의 동기로는 우메즈, 하스누마 시게루, 마에다 도시이에, 이가리 료스케, 이리에 지로쿠로, 오가와 쓰네사부로, 오바타 도시시로 등이 있다.[5]
- 1934년 육군사관학교 사건이 발생하자, 무라나카 코지 대위, 이소베 아사이치 1등 주계를 비롯한 청년 장교들은 나가타가 마사키 진자부로 교육총감의 실각을 획책하는 통제파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했다.[10]
- 1935년 7월 15일의 인사이동에서 마사키 교육총감이 해임된 것은 나가타의 음모에 의한 것이라고 황도파에 의해 선전되었다. 이를 믿은 아이자와 사부로 중좌는 나가타에게 사직을 요구했고, 같은 해 8월 12일에는 군무국장실에서 군도로 나가타를 살해했다.[11]
- 육군대학교 시절 제자가 나가타 국장을 찾아왔을 때, 나가타는 5·15 사건에 대해 제자에게 물었고, 제자가 범인들을 비난하자, 나가타도 동의하며,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에게 고금의 명장에도 비할 바 없는 훌륭함을 느낀다고 칭찬하며, 10월 사건 이후의 군 내부의 일부 불온한 움직임을 언어도단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가타도 이누카이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19]
- 육군대학교 시험 직전, 우수한 나가타는 혼자 유유히 과목 외의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본 동기생 오바타가 "우리들이 너무 초라하니, 적어도 공부하는 흉내라도 내주지 않겠나"라고 나가타에게 간청했다는 일화가 있다.[20]
참조
[1]
서적
Materials on the Trial of Former Servicemen of the Japanese Army Charged with Manufacturing and Employing Bacteriological Weapons
https://books.google[...]
Foreign Languages Publishing House
[2]
서적
Japanese Political History Since the Meiji Renovation 1868–2000
[3]
서적
East Asia: Identities and Change in the Modern World
Pearson Prentice Hall
[4]
서적
鉄山永田中将
川流堂小林又七本店
[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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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日本陸軍興亡の二十年
丸, 潮書房
[7]
서적
二・二六事件の偽史を撃つ
国民新聞社
[8]
서적
亀井貫一郎氏談話速記録
[9]
서적
二・二六と青年将校
三一書房
[10]
서적
日本の曲り角
千城出版
[11]
뉴스
永田鉄山軍務局長、現役中佐に斬られる
東京日日新聞
昭和10年8月1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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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NHKスペシャル「日本人はなぜ戦争へと向かったのか」
[13]
서적
永田鉄山 平和維持は軍人の最大責務なり
ミネルヴァ書房
[14]
서적
政党内閣の崩壊と満州事変
ミネルヴァ書房
[15]
간행물
満蒙問題感懐の一端
外交時報
[16]
서적
今村均回顧録
芙蓉書房
[17]
서적
木戸幸一日記・上
東京大学出版会
[18]
서적
永田鉄山 昭和陸軍「運命の男」
文春新書
[19]
서적
続・陸軍大学校
芙蓉書房
[20]
서적
永田鉄山 昭和維新「運命の男」
文春新書
[21]
웹사이트
陸軍現役将校同相当官実役停年名簿 昭和9年9月1日調
https://dl.ndl.go.jp[...]
偕行社
[22]
관보
叙任及辞令
官報
1904-12-17
[23]
관보
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官報
1918-07-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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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1923-08-0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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辞令
官報
1922-02-14
[26]
관보
叙任及辞令
官報
1934-02-08
[27]
서적
《히로히토:신화의 뒤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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