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다 소에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도요다 소에무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이자 제독으로, 1885년 오이타현에서 태어나 1957년 사망했다. 그는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함선에서 복무했으며, 해군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군사참의관 부관, 영국 주재 무관 보좌관 등을 역임했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제2함대 사령장관, 연합함대 사령장관을 거쳐 군령부 총장을 지냈다. 그는 포츠담 선언에 반대하며 무조건 항복에 저항했으나, 종전 후 전범으로 기소되었지만 무죄로 풀려났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연합함대사령장관 - 고가 미네이치
고가 미네이치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연합함대 사령장관을 지냈으며, 해군병학교 졸업 후 여러 함선 근무와 주요 요직을 거쳐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후임으로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되었으나 팔라우 대공습 중 사망하여 대함거포주의론자이자 영미 협조파로서 복잡한 면모를 보였던 그의 사망과 일본 해군의 몰락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 연합함대사령장관 - 요나이 미쓰마사
요나이 미쓰마사는 일본 제국 해군 군인이자 정치가로, 해군 무관으로서 국제적 경험을 쌓고 연합함대 사령장관과 해군대신을 역임했으며, 추축국 진영 참여에 반대하고 미영과의 협상을 모색하다 총리대신에 취임했으나 육군과의 갈등으로 사임, 태평양 전쟁 말기 해군대신으로 포츠담 선언 수락에 기여한 인물이다. - A급 전범 용의자 - 쇼와 천황
쇼와 천황은 메이지 천황의 손자로 태어나 124대 일본 천황으로 즉위하여 사망할 때까지 재위하며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침략 전쟁에 관여했다는 논란이 있으며, 전후에는 상징적인 천황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고 그의 전쟁 책임 문제는 논쟁의 대상이다. - A급 전범 용의자 - 무타구치 렌야
일본 제국 육군 장군 무타구치 렌야는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 노구교 사건과 임팔 작전 등 주요 사건에 관여했으며, 전후 전쟁 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그의 군사적 능력과 작전 실패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 일본 해군 대장 - 사이토 마코토
사이토 마코토는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이자 정치가로, 해군대신, 조선총독, 내각총리대신 등을 역임하며 해군력 확장, 문화 통치 추진, 만주국 승인, 국제연맹 탈퇴 등의 행적을 남겼으나 2·26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 일본 해군 대장 - 나구모 주이치
나구모 주이치는 1887년 출생하여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진주만 공격을 지휘한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이며, 미드웨이 해전 패배 후 사이판 전투에서 자결하고 해군 대장으로 추서되었다.
도요다 소에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출생일 | 1885년 5월 22일 |
출생지 | 기쓰키, 오이타현, 일본 |
사망일 | 1957년 9월 22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
묘소 | 도쿄도후추시 도고지 |
본명 | 도요다 소에무 (豊田 副武) |
군 경력 | |
소속 | (일본 제국 해군) |
복무 기간 | 1905년 – 1945년 |
최종 계급 | 해군 대장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
주요 지휘 경력 | |
함선 지휘 | 유라 제7 잠수함대 휴가 |
부서 지휘 | 병기동원국 해군통신국 해군교육국 해군 군무국 |
함대 지휘 | 제4함대 제2함대 |
기타 지휘 | 해군 건설국 구레 진수부 해군 평의회 요코스카 진수부 연합함대 해상호위함대 |
해군 참모총장 | |
직책 | 해군 군령부 총장 |
임기 시작 | 1945년 5월 29일 |
임기 종료 | 1945년 10월 15일 |
수상 | 스즈키 간타로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
이전 | 오이카와 고시로 |
이후 | 폐지 (사무실 폐쇄) |
훈장 | |
훈장 | 서보장 (1등) |
2. 생애
도요다 소에무는 1885년 5월 22일 오이타현 기쓰키시에서 태어났다. 1904년 해군병학교에 입교하여 1905년 졸업하였다. 해군병학교 동기로는 도요다 사다지로가 있었다. 졸업 후 함정에서 해상근무를 하다 해군대학교를 거쳐 영국에 대사관 주재무관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후 여러 함장과 참모를 역임하다 1931년 해군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1935년 해군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는 구레와 요코스카 해군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다가, 1944년 3월 고가 미네이치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비행기 사고로 행방불명된 후 그 후임이 되었다. 그는 "아호 작전"(레이테 만 전투)과 "덴호 작전"(오키나와 해상전)을 입안하였으나, 모두 미해군에게 대패하였다. 1945년 5월 연합함대 사령장관직을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에게 넘기고 군령부 총장에 취임하였다.
도요다는 포츠담 선언이 제시한 무조건 항복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일본 항복 이후 전범 재판에 기소되었으나 무죄로 풀려났고, 1957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도요다는 일본 해군 장교들 가운데 일본이 미국의 막강한 산업 능력과 전쟁 능력에 맞서 승리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집단의 일원이었다.[5]
2. 1. 초기 경력
도요다 소에무는 1904년 해군병학교에 입교하여 1905년 졸업했다. 졸업 성적은 171명 중 26등이었다.[5] 졸업 후 순양함 하시다테와 닛신에서 해군 소위 후보생으로 복무했다.[5] 1906년 해군 소위로 임관한 후에는 구축함 아사쓰유에 배속되었다.1908년 해군 중위로 진급한 후, 해군 포술학교와 해군 수뢰학교에서 수학하며 어뢰 및 해군 포술 전문가가 되었다. 1911년 해군 대위로 진급, 순양전함 구라마 분대장을 거쳐 1913년 해군포술학교 교관 겸 부관을 역임했다.
1915년 해군대학교 갑종 제15기 학생으로 입학하여 1917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1917년부터 1919년까지 요시마쓰 모타로 제독의 부관으로 활동했다.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영국 주재 해군 무관 보좌관으로 파견되었으며, 이 기간 중 1921년 해군 중령으로 진급했다.
2. 2. 군 경력
도요다는 오이타현 출신으로 1905년 해군병학교 제33기로 입교하였다. 졸업 이후 함정에서 해상근무를 하다 해군대학교를 거쳐 영국에 대사관 주재무관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후 여러 함장과 참모를 역임하다 1931년 해군 소장으로 진급하였다.일본으로 돌아온 후, 도요다는 순양함의 부장으로 배속되었다. 그는 이후 여러 참모직을 거쳤고, 1925년 12월 1일 해군 대좌로 진급했으며, 1926년에는 첫 지휘관 직책인 순양함 유라를 맡았다. 1930년 12월에는 전함 휴가의 함장이 되었다. 런던 해군 군축 조약 기간 동안 그는 1931년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과 함께 런던을 방문했다.[4] 1931년 12월 1일, 도요다는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다.[4]
1931년 12월부터 1933년 2월까지 도요다는 일본 제국 해군 군령부 제2부 부장이었고, 1935년 11월 15일 해군 중장으로 진급했다.[4]
1935년부터 1937년까지 도요다는 해군성 해군사무국 국장을 역임했고, 1937년 10월 20일 제4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이어서 1938년 11월 15일 제2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두 함대 모두 중일 전쟁에서 중국 침공을 지원하기 위해 활동했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그는 해군 조선 기술 본부장을 역임했다.[4]
3. 태평양 전쟁
도요다는 미국과의 전쟁에 강하게 반대했다.[3] 1941년 9월 18일 진주만 공격 당시 구레 진수부 사령관이었으며,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1942년 11월 10일, 최고 전쟁 평의회 위원이 되었으며, 해군 항공 분야의 자금 증대를 위해 노력했다. 1943년 4월 21일, 요코스카 진수부 사령관으로 전임되었다.
1944년 5월 3일, 고가 미네이치 제독의 사망 후 연합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6월,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제국 해군의 결정적인 패배를 초래한 "A-Go 작전"을 입안하고 실행했다. 그는 다시 레이테 만 해전에서 또 다른 대패를 초래한 "쇼-고 작전"을 실행했다. 그는 전함 야마토를 오키나와현으로 향하는 텐고 작전을 승인했다.
1945년 5월 29일, 오이카와 코시로의 후임으로 군령부 총장이 되어 일본 제국 해군의 마지막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도요다는 일본의 항복에 관한 여러 차례의 어전 회의에 참여했다. 포츠담 선언에 대한 항의에 동참하고, 일본 본토 방어를 주장했다.
4. 군령부 총장
1945년 5월 29일 군령부 총장에 취임했다. 쇼와 천황은 "사령장관 실격자를 총장으로 하는 것은 좋지 않다"라며 도요다의 취임에 반대했지만, 해군 대신 요나이 미쓰마사는 "젊은이(본토 결전파)의 지지를 받는 도요다라면 젊은이를 억누르고 종전으로 이끌 수 있다"라고 천황에게 말하며 설득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젊은이를 억누르기는커녕 오히려 밀려나는 형세가 되었고, 요나이는 친한 지인에게 "도요다에게 배신당한 기분이다. 실망했다"라고 말했으며, 쇼와 천황은 "요나이의 실패다. 요나이를 위해 안타깝다"라고 회고했다.[8]
전쟁 말기, 군령부 차장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과 함께 철저 항전을 주장했다. 하지만 도요다는 자서전에서 태평양 전쟁 말기 철저 항전 주장을 통해 평화파와 입장을 달리함으로써 해군 내부 결전파의 폭주를 막았다고 변명했다.
다카기 소키치는 도요다의 견해에 대해 "괴로운 변명일 뿐 논점이 매우 불분명하다"라고 지적하며, "총장, 차장은 한 방면, 한 전장의 지휘관이 아니라, 천황 폐하 최고의 통수 막료로서 전쟁 지도에 대한 중요 사항을 쥐고, 국가의 전반적인 상황을 대관해야 할 입장이었을 것이다. 전황에 휩쓸려 전국민의 재난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잘못이다"라고 비판했다.[9] 요시다 도시오는 "만약 이때, (도요다가 종전파 편에 서서) 처음부터 3대 3이 아니라 4대 2의 균형이었다면, 현실처럼 포츠담 선언 수락이 가능했을까. 그렇다면 이 3대 3이라는 숫자는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은 것인가. 도대체 도요다 총장의 속내는 어떠했는가"라고 썼다.[10]
8월 9일 낮에 열린 최고 전쟁 지도 회의에서, 군령부 총장인 도요다가 초청받지도 않은 군령부 차장 오니시 다키지로를 동석시키는 문제 행위가 있었다. 더 나아가 8월 12일, 도요다는 육군 참모 총장 우메즈 요시지로와 함께 포츠담 선언 수락 반대를 주장했다.[11] 같은 날 해군 대신 요나이 미쓰마사는 도요다와 오니시 두 사람을 불렀다. 요나이는 도요다의 행동을 "대신에게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그렇게 중대한 문제를 육군과 함께 상주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 나는 군령부의 하는 일에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 일은 분명히 일단은 해군 대신과 의견을 교환한 후에야, 군령부라고 해도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어제 해군부 내 일반에 내린 훈시는 이러한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행동을 보인 것은 부적절하기 그지없다"라고 비난했고, 도요다는 "죄송합니다"라는 모습으로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12]
5. 패전 이후
도요다는 1945년 11월 14일 도쿄에서 랄프 A. 오브스티 해군 소장에게 심문을 받았는데, "매우 지적이고 박식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일본 정부 내에서 육군이 가진 정치적 권력의 크기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으며, 중국과의 전쟁을 "어느 정도의 희생을 치르더라도" 끝내고 병력과 자원을 태평양 전선에 재배치했어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4]
이후 SCAP 점령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8년, "전쟁의 법규와 관습을 위반한 죄"로 전범 혐의를 받았다. 그는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고, 결국 무죄로 풀려나 1949년에 석방되었다. 그는 전범 혐의로 기소된 일본군 중 유일하게 무죄를 받은 인물이었다.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 중인 미국 해군 전함 미주리 함상에서[13] 일본 측 전권 대표단과 연합국 대표가 참석한 제2차 세계 대전 항복 문서 조인식이 거행되었으나, 도요다는 참석을 거부했다. 결국 토미오카 사다토시 해군 소장이 대리로 참석했다. 도요다의 행동은 "대장으로서 언어도단", "여성스럽다"라며 비판받았다.
10월 시데하라 내각 발족 시, 요나이는 해군 대신을 사퇴하고 후임으로 도요다를 추천했지만, 점령군의 전범 혐의 조사와 해군부 내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요나이가 해군성 폐지까지 대신을 역임했다. 10월 15일 해군성 출사, 11월 30일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12월 2일,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일본 정부에 도요다 체포를 명령했다(제3차 체포자 59명 중 1명).[14] A급 전범 혐의로 스사가모 구치소에 구류되었지만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는 불기소되었고, 이어진 GHQ 재판 (도요다 재판)에서 벤 브루스 블레이크니 및 조지 A. 파네스 두 변호사의 노력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공직 추방되었다.[15]
도요다는 1950년에 회고록을 출판했으며, 1957년 72세의 나이로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6. 평가
이노우에 시게미는 전후(戰後)에 도요다에 대한 평가가 180도 바뀌어, 쇼와 천황의 뜻을 무시하고 철저 항전을 주장하거나 항복 문서 조인식에 참석하지 않는 등의 행동으로 인해, 전전(戰前)에는 칭찬 일색이던 평가가 전후에는 비난에 가까운 평가로 완전히 바뀌었다고 평가했다.[17]
7. 가족 관계
- 아내는 해군 중장 에구치 린로쿠의 장녀 에구치 리토이다.
- 장남은 도요다 레이이치이다. 장인은 야기 코키치이다.
8. 연표
- 1885년(메이지 18년) 5월 22일 - 오이타현하야미군기쓰키정 (현 기쓰키시)에서 출생
- 1904년 (메이지 35년) 12월 17일 - 해군병학교 입교 (제33기)
- 1905년 (메이지 38년) 11월 28일 - 해군병학교 졸업, 해군 소위 후보생으로 2등 순양함 "하시다테" 승선.
- 1906년 (메이지 39년)
- * 2월 15일 - 연습함대 원양 항해
- * 8월 30일 - 장갑순양함 "닛신" 승선.
- * 12월 20일 - 해군 소위 임관.
- 1907년 (메이지 40년) 9월 28일 - 3등 구축함 "아사쓰유" 승선.
- 1908년 (메이지 41년)
- * 7월 31일 - 해군 포술학교 보통과 학생.
- * 9월 25일 - 해군 중위 진급.
- 1909년 (메이지 42년)
- * 1월 20일 - 해군 수뢰학교 보통과 학생.
- * 4월 30일 - 제14어뢰정대 부속.
- 1910년 (메이지 43년) 12월 1일 - 해군대학교 을종 학생.
- 1911년 (메이지 44년)
- * 5월 22일 - 해군 포술학교 고등과 제8기 학생.
- * 11월 29일 - 해군 포술학교 고등과 졸업.
- * 12월 1일 - 해군 대위 진급, 순양전함 "구라마" 분대장.
- 1913년 (다이쇼 2년) 12월 1일 - 해군 포술학교 교관 겸 부관.
- 1915년 (다이쇼 4년) 12월 13일 - 해군대학교 갑종 제15기 학생.
- 1917년 (다이쇼 6년)
- * 4월 1일 - 해군 소령 진급.
- * 11월 26일 - 해군대학교 갑종 졸업 (20명 중 수석).
- * 12월 1일 - 해군성 출사, 군사참의관 부관.
- 1919년 (다이쇼 8년)
- * 11월 25일 - 해군성 출사 겸 요코스카 진수부 부속.
- * 12월 1일 - 영국일본 대사관 부속해군 주재 무관 보좌관.
- 1921년 (다이쇼 10년) 12월 1일 - 해군 중령 진급.
- 1922년 (다이쇼 11년)
- * 8월 1일 - 귀국.
- * 12월 1일 - 경순양함 "구마" 부장.
- 1923년 (다이쇼 12년)
- * 4월 1일 - 요코스카 진수부 부속.
- * 6월 1일 - 해군성 군무국원.
- 1925년 (다이쇼 14년) 12월 1일 - 해군 대좌 진급, 군령부 출사 겸 해군대학교 교관.
- 1926년 (다이쇼 15년)
- * 7월 15일 - 요코스카 진수부 부속.
- * 11월 1일 - 경순양함 "유라" 함장.
- 1927년 (쇼와 2년) 11월 15일 - 제7잠수대사령.
- 1928년 (쇼와 3년) 12월 10일 - 해군성 교육국 제1과장.
- 1930년 (쇼와 5년) 12월 1일 - 전함 "휴가" 함장.
- 1931년 (쇼와 6년) 12월 1일 - 해군 소장 진급, 해군 군령부 참모 제2반장.
- 1932년 (쇼와 7년) 10월 10일 - 겸 제4반장.
- 1933년 (쇼와 8년)
- * 2월 23일 - 면 제4반장.
- * 9월 15일 - 연합함대참모장 겸 제1함대 참모장.
- 1935년 (쇼와 10년)
- * 3월 15일 - 해군성 교육국장.
- * 11월 15일 - 해군 중장 진급.
- * 12월 2일 - 해군성 군무국장 겸 장관 회의 의원.
- 1937년 (쇼와 12년) 10월 20일 - 제4함대 사령장관.
- 1938년 (쇼와 13년)
- * 10월 13일 - 훈1등 서보장 수여.
- * 11월 15일 - 제2함대 사령장관.
- 1939년 (쇼와 14년) 10월 21일 - 해군성 함정본부장.
- 1941년 (쇼와 16년) 9월 18일 - 해군 대장 진급, 구레 진수부 사령장관.
- 1942년 (쇼와 17년) 11월 10일 - 군사 참의관.
- 1943년 (쇼와 18년) 4월 21일 - 요코스카 진수부 사령장관.
- 1944년 (쇼와 19년) 5월 3일 - 연합함대 사령장관.
- 1945년 (쇼와 20년)
- * 5월 29일 - 군령부 총장.
- * 11월 30일 - 예비역 편입.
- 1957년(쇼와 32년) 9월 22일 - 심장 마비로 사망, 향년 72세.
9. 서훈 내역
10. 저서
- 最後の帝国海軍|사이고노 데이코쿠 가이군일본어 - 1950년 출간, 1989년 주부노토모샤에서 신판 발행, 2017년 주코 문고에서 재출간(도다카 가즈시게 해설).
11. GHQ 역사과 진술록
도요다 소에무가 GHQ 역사과에서 진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1]
- 1949년 (쇼와 24년) 8월 29일: 전 해군 대장 군령부 총장 도요다 소에무에 대한 질문
- 1949년 (쇼와 24년) 9월 1일: 1945년 6월 22일 최고 전쟁 지도자 회의, 덜레스・후지무라 야스지 교섭, 원자 폭탄 등에 관하여
- 1949년 (쇼와 24년) 12월 1일: 일본의 종전에 관한 회상
- 1949년 (쇼와 24년) 12월 1일: 종전 시의 회상 약간
- 1950년 (쇼와 25년) 3월 10일: 1945년 6월 6일 및 8일 최고 전쟁 지도 회의에 관하여
참조
[1]
서적
Imperial Japanese Navy
[2]
웹사이트
Naval History of WW2
http://navalhistory.[...]
[3]
문서
Toyoda Trial Transcripts
Utah State Library
[4]
문서
Toyoda Trial Transcripts
Utah State Library
[5]
서적
最後の帝国海軍
[6]
서적
海軍神雷部隊
海軍神雷部隊戦友会
[7]
서적
戦史叢書93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7)戦争最終期
[8]
서적
『昭和天皇独白録』
[9]
서적
『高木惣吉日記と情報』
[10]
서적
『四人の軍令部総長』
[11]
서적
戦史叢書93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7)戦争最終期
[12]
서적
戦史叢書93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7)戦争最終期
[13]
웹사이트
外務省外交史料館 戦後70年企画 「降伏文書」「指令第一号」原本特別展示 降伏と占領開始を告げる二つの文書
https://www.mofa.go.[...]
외무성
2015-08-31
[14]
뉴스
梨本宮・平沼・平田ら五十九人に逮捕命令
毎日新聞(東京)
1945-12-04
[15]
서적
公職追放に関する覚書該当者名簿
日比谷政経会
[16]
뉴스
毎日新聞
1952-04-22
[17]
서적
海軍の昭和史
光人社NF文庫
[18]
간행물
官報
1907-02-1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