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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 (15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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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진은 1560년에 태어나 임진왜란 시기에 활약한 조선의 무신이다. 1583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밀양 부사를 거쳐 임진왜란 초기 동래성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작원관 전투에서 고군분투했으나, 명나라 장수에게 구타당하여 사망했다. 영천성 전투 승리를 이끌고, 제1, 2차 경주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영남 지역의 왜군을 압박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736년에는 의열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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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 (1560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박진 장군 묘비
박진 장군 묘비
이름박진
한자 표기朴晉
로마자 표기Bak Jin
별명자는 명보(明甫), 명부(明夫), 여회(汝晦), 시호는 의열(毅烈), 작위는 응천군(凝川君)
출생과 사망
출생일1560년 8월 25일
출생지조선 경상남도 밀양부 밀양읍 내일동 (현 밀양시 내일동)
사망일1597년 3월
사망지조선 한성부
사망 원인폭행치사(구타 후유증)
거주지
거주지조선 경상남도 밀양
국적
국적조선
학력 및 종교
학력한학 수학
종교유교(성리학)
가족 관계
배우자전처 윤혜선, 후처 안동 김씨
부모박인수(부) / 강릉 김씨(모)
친척조부 박언, 외조부 김자달
경력
직업무신, 군인
최종 계급경상우도병마절도사, 황해도병마절도사, 전라도병마절도사, 독포사, 병조참판(종2품)
소속 부대조선 육군
지휘경상우도, 황해도 전라도병영
주요 참전 전투/전쟁동래성 전투
밀양성 전투
작원관 전투
영천성 전투
제1차 경주성 전투
제2차 경주성 전투
기타 이력1583년 과거 급제. 증 병조판서 응천군, 가증 좌찬성

2. 생애

박진은 1560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병조판서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밀흥부원군에 추봉된 박인수이며, 어머니는 강릉 김씨이다.[1] 무관 가문 출신으로 음직으로 군관이 되었다. 여절교위로 재직 중 1583년(선조 16년) 24세에 별시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6] 이후 비변사에서 무신으로 있다가 1589년(선조 22년) 심수경의 추천으로 선전관에 발탁되었고, 1592년 밀양 부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올라오는 왜군에 맞서 우병사 김성일과 함께 진주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후 군사 300여 명을 이끌고 동래성으로 지원을 갔으나, 부산진동래성 함락 이후 조선군이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지면서 밀양성으로 복귀하였다. 4월 16일 병사 모집 중 일본군 선발대가 밀양 근처까지 진격했다는 첩보를 접하고, 작원관에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작원관 전투에서 패배하고 성 안의 시설과 군량 창고를 불태운 뒤 도주했다.[7]

1592년 5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남은 병사를 수습해 소규모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같은 해 8월 권응수의 도움을 받아 영천성 전투에서 영천성을 탈환했다.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 사야가(김충선으로 개명)가 박진에게 귀순하였다.[11] 안강에서 장군 회의를 열고 제1차 경주 전투를 치렀으나 패배하였고, 이후 군사를 재정비하여 제2차 경주 전투에서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경주성을 탈환하였다. 이 공으로 1592년 9월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로 승진했다.[12]

1593년(선조 26년) 2월 동지중추부사가 되었고, 같은 해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하고, 일본군 수급 111개를 베어 의주 행재소에 보냈다.[13] 4월 12일 왕명으로 한 자급 특진[14]하여 가의대부가 되었다. 1593년 독포사(督捕使)로 밀양과 울산 등지에서 왜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고, 그해 7월 명나라 장수 관유격(毌遊擊)에게 곤장을 맞기도 하였으나,[16] 흔들리지 않고 출정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597년(선조 30년) 3월 정유재란명나라 장수 누승선(婁承先)에게 구타당하여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20]

2. 1. 생애 초기

박진은 1560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병조판서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밀흥부원군에 추봉된 박인수이며, 어머니는 강릉 김씨이다.[1] 아버지는 절충장군 행의흥위부호군과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사후 병조판서와 영의정에 추증되고 밀흥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고, 임당 정유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1] 자는 여회(汝晦)[5], 명보(明甫) 또는 명부(明夫)였다. 무관 가문 출신으로 음직으로 군관이 되었다. 여절교위로 재직 중 1583년(선조 16년) 24세에 별시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6] 이후 비변사에서 무신으로 있다가 1589년(선조 22년) 심수경의 추천으로 선전관에 발탁되었고, 1592년 밀양 부사가 되었다.

2. 1. 1. 출생과 가계

박진은 1560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병조판서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밀흥부원군에 추봉된 박인수이며, 어머니는 강릉 김씨이다.[1]

아버지 박인수는 절충장군 행의흥위부호군과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사후 병조판서와 영의정에 추증되고 밀흥부원군에 추봉되었다. 박진은 규정공 박현의 후손이자 충정공 청재 박심문의 5대손이다. 증조부 박백령은 사헌부 감찰, 할아버지 박언은 세자익위사부솔을 지냈다.[1]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고, 임당 정유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1]

관계이름
증조부박백령 (朴白齡)
조부박언 (朴彦)
부친박인수 (朴麟壽)
모친강릉 김씨 (江陵 金氏)
외조부김자달 (金自達)
배우자윤혜선, 파평 윤씨 (坡平 尹氏)
배우자안동 김씨 (安東 金氏)


2. 1. 2. 과거 급제와 군인

자는 여회(汝晦)[5], 명보(明甫) 또는 명부(明夫)였다. 무관 가문 출신으로 음직으로 군관이 되었다. 여절교위로 재직 중 1583년(선조 16년) 24세에 별시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6] 이후 비변사에서 무신으로 있다가 1589년(선조 22년) 심수경의 추천으로 선전관에 발탁되었고, 1592년 밀양 부사가 되었다.

2. 2. 임진왜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4월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올라오는 왜군을 맞아 우병사 학봉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진주에서 왜군과 맞서 싸웠다. 이후 부사 박진은 군 내 병사 300여 명을 이끌고 동래성으로 지원 나갔다.[7] 당시 성을 빠져나온 경상좌병사 이각과 함께 동래성 북쪽의 소산역에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박진의 군사는 제1선에, 이각의 병사는 제2선에 배치했다.[7]

일본군부산진동래성을 함락시키자 조선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졌다. 박진은 소산역에서 퇴각하여 밀양성으로 복귀하였으나, 병력 수습이 어려웠다.[7] 4월 16일 병사 모집 중 일본군 선발대가 밀양 근처까지 진격했다는 첩보를 접했다.[7] 이후 경상좌병사 이각 등과 소산을 지키다 패배하고 왜군이 성 안으로 몰려오자 성 안에서 싸우다 포위되었으며, 탈출하여 밀양부를 불태우고 후퇴했다. 경상우도 방어사 조준(趙俊)의 종사관 이수광(李睟光[8])은 박진이 밀양 부사로서 왜적이 크게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지키면 빠져나가지 못할 것으로 여겨 도망갈 계책을 세웠다고 비판하였다.[9]

박진은 밀양성에서 동쪽으로 40리 떨어진 작원관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작원관은 부산에서 양산, 밀양, 청도, 대구를 거쳐 서울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7]

일본군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래성을 함락시킨 다음 날인 16일 본국으로 전황 보고서를 보냈다. 양산군수 조영규가 동래성에서 전사하여 방어 병력이 전무한 양산으로 곧장 진격한 일본 제1군의 선발대는 17일 양산에 무혈 입성했다. 4월 18일 동래성에 주둔한 일본 주력군까지 양산으로 진격했다. 그들은 다시 밀양성 방면으로 선발 부대를 급파시켰다. 조선군일본군의 파죽지세에 밀려 낙동강을 따라 북진을 허용하였다.[7]

고니시 유키나가는 주력군의 선두에 서고 소 요시토시 등 여섯 장수가 일본군 병력 1만 8700명을 이끌고 밀양성의 병력을 만났는데, 조선군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킴과 동시에 별동대를 내륙의 산악 지형으로 우회시켰다.[7] 이때 박진은 험한 산이 낙동강과 맞닿아 있는 양산에서 밀양으로 향하는 좁은 길과 강의 벼랑 사이에 적은 군사들로 길목을 지켰다.[7]

작원관 전투 무렵 경상감사 김수의 독려로 전라도와 경상우도의 인근 군현에서 소규모 조선군이 지원을 오고 있었다. 이 조선군들은 박진의 선발대와 마주쳤으나 일본군의 주력으로 오인하여 급히 퇴각하다가 수많은 병사들이 낙동강에 빠져 죽었다.[7]

박진은 일본군의 우회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군관 이대수와 김효우 등의 직속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우회 부대를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앞에는 절벽이요, 뒤와 옆은 적이었다. 배수진을 치고 격전을 벌였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돌과 바위를 굴러 항전하다 조총에 총격을 당해도 일본군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정면으로 들어오는 일본 주력군도 앞면과 옆면으로부터 공격해 왔고, 최후의 일각까지 밀양 관군은 치열한 육박전을 벌였지만 일본군의 대병력을 이기지 못했다. 군관 이대수, 김효우 등 3백여 군사가 거의 전멸당하고, 박진과 부하 몇 명만 후퇴했다.[7] 박진은 작원관 방어선이 무너지자 성 안의 각종 시설과 군량 창고를 불태우고 도주했다.[7]

1592년 5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남은 병사를 수습해 소규모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같은 해 8월 영천성 전투에서 권응수의 도움을 받아 영천성을 탈환했다.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 사야가(김충선으로 개명)가 박진에게 귀순하였다.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으로 조선에 왔으나, 한 차례의 전투도 하지 않은 채 박진에게 귀순, 선조에게 김해 김씨[10] 성을 하사받고 이름을 충선(忠善)이라 지었다.[11]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전쟁의 대의명분을 찾을 수 없었던 사야카는 항왜의 길에 들어서 조선 장수가 되어 경상도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11]

안강에서 장군 회의를 열어 16읍의 군사를 이끌고 경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병력을 편성, 권응수, 경주 판관(判官) 박의장 등을 선봉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경주를 공격, 제1차 경주 전투를 치렀으나 복병의 기습으로 500명의 군사만 잃고 후퇴했다.[12]

그러나 군사들의 사기를 돋운 뒤 한달 후 군사를 재정비하여 다시 제2차 경주 전투를 치렀다. 이때 신무기 비격진천뢰 (
임진왜란 때 사용된 비격진천뢰
) 등을 사용해 경주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고 영남 지역의 왜군들을 해안 쪽으로 압박했다. 일본군은 상주나 서생포로 퇴각하여 영남 지역 중심부 수십개 읍의 함락을 면할 수 있었다. 이 공으로 9월 선조로부터 양가죽 옷을 하사받고, 1592년 9월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로 승진했다.[12]

1593년(선조 26년) 2월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같은 해 2월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하고, 일본군 수급 111개를 베어 왕이 있는 의주 행재소에 보냈다.[13] 대소신려들이 그가 보내온 수급 111개를 보았으며, 이는 왕조실록에 기록되었다. 4월 12일 왕명으로 한 자급 특진[14]하여 가의대부가 되었다.

2. 2. 1. 전란 초기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4월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올라오는 왜군을 맞아 우병사 학봉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진주에서 왜군과 맞서 싸웠다. 이후 부사 박진은 군 내 병사 300여 명을 이끌고 동래성으로 지원 나갔다.[7] 당시 성을 빠져나온 경상좌병사 이각과 함께 동래성 북쪽의 소산역에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박진의 군사는 제1선에, 이각의 병사는 제2선에 배치했다.[7]

2. 2. 2. 밀양성 전투 패전

일본군부산진동래성을 함락시키자 조선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졌다. 박진은 소산역에서 퇴각하여 밀양성으로 복귀하였으나, 병력 수습이 어려웠다.[7] 4월 16일 박진은 병사 모집 중 일본군 선발대가 밀양 근처까지 진격했다는 첩보를 접했다.[7] 이후 경상좌병사 이각 등과 소산을 지키다 패배하고 왜군이 성 안으로 몰려오자 성 안에서 싸우다 포위되었으며, 탈출하여 밀양부를 불태우고 후퇴했다.

경상우도 방어사 조준(趙俊)의 종사관 이수광(李睟光[8])은 "박진이 밀양 부사로서 왜적이 크게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지키면 빠져나가지 못할 것으로 여겨 도망갈 계책을 세워 황산 잔도에서 왜적을 방어하겠다고 핑계하고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가 그대로 도망갔다"고 비판하였다.[9]

2. 2. 3. 작원관 전투

박진은 밀양성에서 동쪽으로 40리 떨어진 작원관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작원관은 부산에서 양산, 밀양, 청도, 대구를 거쳐 서울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7]

일본군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래성을 함락시킨 다음 날인 16일 본국으로 전황 보고서를 보냈다. 양산군수 조영규가 동래성에서 전사하여 방어 병력이 전무한 양산으로 곧장 진격한 일본 제1군의 선발대는 17일 양산에 무혈 입성했다. 4월 18일 동래성에 주둔한 일본 주력군까지 양산으로 진격했다. 그들은 다시 밀양성 방면으로 선발 부대를 급파시켰다. 조선군일본군의 파죽지세에 밀려 낙동강을 따라 북진을 허용하였다.[7]

고니시 유키나가는 주력군의 선두에 서고 소 요시토시 등 여섯 장수가 일본군 병력 1만 8700명을 이끌고 밀양성의 병력을 만났는데, 조선군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킴과 동시에 별동대를 내륙의 산악 지형으로 우회시켰다.[7] 이때 박진은 험한 산이 낙동강과 맞닿아 있는 양산에서 밀양으로 향하는 좁은 길과 강의 벼랑 사이에 적은 군사들로 길목을 지켰다.[7]

작원관 전투 무렵 경상감사 김수의 독려로 전라도와 경상우도의 인근 군현에서 소규모 조선군이 지원을 오고 있었다. 이 조선군들은 박진의 선발대와 마주쳤다. 이들을 일본군의 주력으로 오인하여 급히 퇴각하다가 수많은 병사들이 낙동강에 빠져 죽었다.[7]

박진은 일본군의 우회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박진은 군관 이대수와 김효우 등의 직속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우회 부대를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앞에는 절벽이요, 뒤와 옆은 적이었다. 그들은 죽느냐 죽이느냐하는 배수진을 치고 격전을 벌였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돌과 바위를 굴러 항전하다 조총에 총격을 당해도 일본군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정면으로 들어오는 일본 주력군도 앞면과 옆면으로부터 공격해 왔고, 최후의 일각까지 밀양 관군은 치열한 육박전을 벌였지만 일본군의 대병력을 이기지 못했다. 군관 이대수, 김효우 등 3백여 군사가 거의 전멸당하고, 부사 박진과 부하 몇 명만 후퇴했다.[7] 박진은 작원관 방어선이 무너지자 성 안의 각종 시설과 군량 창고를 불태우고 도주했다.[7]

2. 2. 4. 영천성 전투

이후 1592년 5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남은 병사를 수습해 소규모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같은 해 8월 영천성 전투 당시 영천성은 함락되었으나 영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정세아, 조희익 등을 중심으로 의병을 결성하고 영천성을 근거지로 하여 안동 주둔 왜군과 상응하고 있었던 왜적을 격파하려 하자 이 소식을 접하고 별장 권응수에게 군사를 딸려 파견, 의병을 돕게 하여 영천성을 탈환했다. 권응수의 지휘로 조선군은 대승을 거두고 말 200여 필, 총통과 창검 900여 개를 노획하였고 일본군의 포로로 끌려간 조선 백성 1,090여 명을 구출하였다.[1]

이때 박진은 경주 안강에 본진을 두고 영천성 전투를 배후에서 지원하였는데, 사실은 의병을 자신의 휘하에 두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기 전 부관인 별장 권응수를 보내 이들을 지원하게 했고,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는 군관 변응규를 보내 치사를 하고 군기와 화약류 등을 보내주고 지원, 격려하는 등 장수로서 넓은 도량을 보였다.[1]

2. 2. 5. 항왜 사야가 귀순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 사야가(김충선으로 개명)가 박진에게 귀순하였다. 사야카는 선조에게 김해 김씨[10] 성을 하사받고 이름을 충선(忠善)이라 지었다.[11]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으로 조선에 왔으나, 한 차례의 전투도 하지 않은 채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순하였다.[11]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전쟁의 대의명분을 찾을 수 없었던 사야카는 항왜의 길에 들어서 조선 장수가 되어 경상도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11]

2. 2. 6. 제1차, 제2차 경주성 전투



안강에서 장군 회의를 열어 16읍의 군사를 이끌고 경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병력을 편성하여 권응수, 경주 판관(判官) 박의장 등을 선봉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경주를 공격, 제1차 경주 전투를 치렀으나 복병의 기습으로 500명의 군사만 잃고 후퇴했다.[12]

그러나 군사들의 사기를 돋운 뒤 한달 후 군사를 재정비하여 다시 제2차 경주 전투를 치렀다. 이때 신무기 비격진천뢰 등을 사용해 경주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고 영남 지역의 왜군들을 해안 쪽으로 압박했다. 일본군은 상주나 서생포로 퇴각하여 영남 지역 중심부 수십개 읍의 함락을 면할 수 있었다. 이 공으로 9월 선조로부터 양가죽 옷을 하사받고, 1592년 9월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로 승진했다.[12]

1593년(선조 26년) 2월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같은 해 2월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하고, 일본군 수급 111개를 베어 왕이 있는 의주 행재소에 보냈다.[13] 대소신려들이 그가 보내온 수급 111개를 보았으며, 이는 왕조실록에 기록되었다.

4월 12일 왕명으로 한 자급 특진[14]하여 가의대부가 되었다.

2. 3. 생애 후반

1593년 독포사(督捕使)로 밀양과 울산 등지에서 왜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해 7월 명나라 장수 관유격(毌遊擊)은 심유경(沈惟敬)의 말을 듣고 왜적을 비호하여 박진 등 네 장군을 묶어다가 곤장을 쳤으나, 왕이 분개하였다.[16] 그럼에도 박진은 흔들리지 않고 출정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2. 3. 1. 한성부 상경과 재출정

1593년 4월 별장에 임명되어 한성부로 소환되었다.[15] 이때 그는 오랫동안 습증(濕證)을 앓아 활을 당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전처럼 칼날을 무릅쓰고 싸울 수는 없었으나 위엄과 명성이 이미 드러나 있어 아군들도 그를 신뢰하였다.[15] 4월 20일 왕명으로 명나라의 유총병을 만나 군사에 대한 일을 논의하고 명나라 이 제독의 파병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당시 피난 중 행재소(行在所)의 호위 문제를 고민하던 선조는 박진의 전과와 명성을 감안하여 그를 부원수로 임명해서 여러 장수들을 독전시키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조신들은 그가 각 도와 읍에서 활동하며 두드러진 전과를 거두고 있고, 영남 지역을 회복한 것도 그의 공이므로 민심을 고려해야 된다며 반대하였다.

1593년 독포사(督捕使)로 내려가 밀양과 울산 등지에서 왜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해 7월 명나라 장수 관유격(毌遊擊)은 심유경(沈惟敬)의 말을 듣고 왜적을 비호하여 박진 등 네 장군을 묶어다가 곤장을 치고 욕을 보여 왕이 분개하였다.[16]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출정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2. 3. 2. 구타 치사 사건

1597년(선조 30년) 3월 정유재란명나라 장수 누승선(婁承先)에게 구타당하여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20] 그는 누승선에게 구타당한 뒤 병으로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피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아 감히 신병을 참고 있다가 사망에 이르렀다.[20] 윤경립과 한준겸은 그의 시신에서 가슴뼈가 부러진 것을 확인하였다.[20] 그러나 박진을 구타한 명나라 장수는 처벌받지 않았고, 관련 기록도 남아있지 않아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

3. 사후

박진장군묘(경기도 기념물 제110호)


경기도 적성군 두일리(현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산149-2 홍의로의 묘소 위편에 안장되었으며[21], 그의 사후 모친은 그의 묘소 근처에서 살았다.[20] 사후 윤성립과 한준겸[22]의 건의로 조정에서 유족을 구휼하였다.

그의 구타 사망 사실은 사간(司諫) 윤경립이 경연에서 언급함으로써 알려졌다. 1597년 5월 사간(司諫) 윤경립이 경연장에서 그가 중국인 장수에게 구타당하여 죽었으며, 그의 노모를 구휼할 것을 청하였다.[20]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가 후일 응천군(凝川君)에 추봉되었고, 다시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추증되었다.

그의 묘소는 한때 민간인출입통제구역 내에 위치해 있었으나 후에 공개되었다. 묘소의 오른쪽에는 1987년에 후손이 건립한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소는 1987년 2월 12일 경기도 기념물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1736년(영조 12년) 12월 의열(毅烈)의 시호를 받았다.

4. 가족 관계

안동 김씨 (安東 金氏)


5. 평가와 비판

임진왜란 당시 많은 장수들이 도망치는 상황에서도 박진은 밀양 부사로서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 항전하여 충성심과 의기를 보여주었다.[20]

또한 지략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강적이 쳐들어오자 여러 고을은 달아나기에 바빴지만, 박진은 약한 군사로도 강적에 맞서 죽기를 각오하고 여러 번 승리하는 성과를 올렸다. 비록 남로(南路)를 차단하여 적의 기세를 저지하지는 못했으나, 그의 담력과 지략은 훌륭했다.[23]

참조

[1] 웹사이트 Tomb of Bak Jin https://archive.toda[...]
[2] 서적 Samurai Invasion. Japan's Korean War 1592–98 Cassell & Co 2002
[3] 문서 선원록에 이름이 남아 있다.
[4] 문서 晋으로도 쓰인다.
[5] 웹인용 박진 https://web.archive.[...] 2011-12-20
[6] 웹인용 박진 https://web.archive.[...] 2011-12-20
[7] 뉴스 작원관에서 장렬히 전사한 300명의 군사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4-09-17
[8] 문서 실학자이자 지봉유설의 저자이다.
[9] 간행물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선조실록 1592-06-28
[10] 문서 김수로계 김해 김씨와 구별하여 우록 김씨로도 부른다.
[11] 뉴스 항왜(降倭) 김충선을 아십니까?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5-04-29
[12] 간행물 박진이 경주를 수복하다 선조수정실록 1592-09-01
[13] 간행물 영남좌도 절도사 박진이 왜적을 베어 행재소에 보내오다 선조실록 1593-02-16
[14] 간행물 박진과 승장 유정을 가자하라고 분부하다 선조실록 1593-04-12
[15] 간행물 박진을 서울에 주둔하게 하고 별시 무과를 보아 군사와 군량을 주라고 분부하다 선조실록 1593-04-12
[16] 간행물 박진 등에게 곤장을 친 관 유격의 일로 경략에게 게첩을 보내라 전교하다 선조실록 1593-07-18
[17] 간행물 임금이 편전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각자의 의견을 말하게 하다 선조실록 1593-11-05
[18] 간행물 수군의 작전 통제권을 가지고 대신들과 논의하다 선조실록 1597-01-27
[19] 간행물 대신들이 황정욱의 일과 무과 출신자를 선발하는 것 등을 건의하다 선조실록 1597-02-25
[20] 간행물 《주역》을 진강하고 김응남이 서계초를 올리고 군량·축성 문제 등을 의논하다 선조실록 1597-05-29
[21] 문서 그의 묘소 바로 아래 17m 지점에 홍의로의 묘가 있고, 홍의로 묘에서 12m 아래는 홍의로의 부인 서원염씨 묘소가 있다.
[22] 문서 인조비 인열왕후 한씨의 친정아버지
[23] 간행물 박진을 서울에 주둔하게 하고 별시 무과를 보아 군사와 군량을 주라고 분부하다 선조실록 1593-04-12
[24] 간행물 전사한 훈련 봉사 김호를 추증하고 대신을 인견하여 심유경의 강화회담 등을 논하다 선조실록 1592-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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