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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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벌국은 삼한 시대에 상주시 함창읍 일대에 존재했던 호로국에서 기원한 국가이다. 진한에 속해 신라의 지배를 받다가 249년 신라에 반기를 들었으나 멸망했다. 신라는 사벌국 지역에 사벌주를 설치했고, 이후 상주정 설치, 감문주로의 개편 등을 거쳐 삼국 통일 이후 상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사벌주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경덕왕 때 행정 체제가 개편되어 상주라는 별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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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한 - 조문국
조문국은 신라 벌휴 이사금 2년에 신라에 복속된 삼한 시대의 부족 국가이며, 의성군 금성면 일대가 도읍지로 추정되고 374여 기의 고분군과 조문국 경덕왕릉이 남아 있다. - 진한 - 고령가야
고령가야는 가야 소국과는 관련없이 신라 영역이었던 상주시 함창읍 일대에 고려 초 붙여진 이름으로, 신라 말 호족 세력이 가야를 참칭한 것에서 유래되었으며 고로왕, 마종왕, 이현왕 등의 왕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실체에 대한 논쟁이 있다. - 상주시의 역사 - 상주 전투 (1592년)
상주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의 기습으로 조선군이 참패하여 왜군의 한양 진격을 용이하게 하고 조선의 국방 체계의 취약성을 드러낸 전투이다. - 상주시의 역사 - 함창 전투
1950년 7월 하순 한국전쟁 중 대한민국 제1사단은 함창군에서 북한군 제13사단과 제1사단을 맞아 싸워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낙동강 방어선 형성 시간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지만, 전황 악화로 낙동강선으로 철수했다. - 한국의 옛 나라 - 태봉
태봉은 궁예가 건국한 후고구려의 국호로, 고려 건국에 영향을 미치고 불교 문화 발전에 기여했으나 궁예의 폭정으로 멸망했으며, 도성터가 비무장지대에 있어 연구가 어렵다. - 한국의 옛 나라 - 진국
진국은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 사이 한반도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로 추정되지만, 실존 여부, 위치, 규모에 대한 학계 논쟁이 있으며, 사서 기록에 따라 위만조선에 복속된 국가로, 또는 삼한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사벌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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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국가 | 사벌국 |
위치 | 경상북도 상주시 일대 |
존속 기간 | 고대 국가 |
성립 시기 | 2세기경 |
멸망 시기 | 신라에 병합 |
정치 | |
지배층 | 토착 세력 |
역사 | |
발전 | 2세기 후반 낙동강 유역의 소국 성장 |
신라와의 관계 | 신라에 조공, 후기에는 정복 전쟁 발생 |
멸망 | 신라에 병합 |
문화 | |
특징 | 청동기문화와 초기 철기문화 기반 |
언어 | 고대 한국어 (추정) |
고고학적 연구 | |
유적 | 고분군 성터 유물 다수 발굴 |
연구 과제 | 사벌국 실체 규명 주변 국가와의 관계 연구 고대 사회 문화 연구 |
참고 자료 | |
문헌 | 삼국사기 삼국유사 |
연구 서적 | 사벌국 관련 연구 서적 다수 출간 |
2. 역사
신라는 백제와 달리 탈해 이사금 통치 후반기에 울산, 부산 일대를 시작으로 주변국을 정복하기 시작할 때까지 일개 소국 상태에 불과했지만, 진한 제국(諸國)을 사실상 자국 영토처럼 강력히 통제하며 지배하고 있었고, 사벌국은 사실상 신라의 속국이었다. 신라는 1세기 후반 부산, 울산으로 진출하며 가야와 항쟁하고, 2세기 초반에는 실직국 등 동해안 일대를 공략하며 영토를 확장하는 한편, 사벌국을 발판으로 백두대간 이북으로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아달라 이사금 3년인 156년에는 계립령(鷄立嶺), 아달라 이사금 5년인 158년에는 죽령(竹嶺)길이 개통되자 진한의 세력권은 충북과 강원도 일대까지 뻗치게 되었다. 사벌국은 신라의 대 백제 병참기지로서 군사적인 지배를 받고, 서쪽 영역이 신라와 백제의 전쟁으로 시달림을 받자 불만이 누적되었으며, 진한 소속의 소국들까지 신라에 지속적으로 합병되자 위기감을 느끼고 독립을 꾀하였다.
2. 1. 상고 시대
상주 지역은 신상리 구석기 유적의 조사에서 밝혀졌듯 태고적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 청동기 시대에는 청리 일대 등 여러 곳에서 유적이 확인되었다.[4]2. 2. 삼한 시대
삼한 시대에 '''호로국(戶路國)''' (혹은 사벌국)이 현재의 상주시 함창읍 일대에 존재했다. 호로국은 진한에 속했는데, 진한은 변한과 함께 마한의 지배를 받아 마한에서 각 진한 소국으로 태수(太守)를 파견했다.이후 진한이 경주의 사로국(斯盧國)을 중심으로 마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자, 호로국(사벌국) 또한 마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진한연맹을 맺고 상주 일대의 곡창지대를 기반으로 번창하기 시작했다. 마한은 서기 9년에 백제에 국권을 박탈당해 멸망했고, 서기 63년에 백제가 마한의 잔당을 소탕하면서 낭자곡(娘子谷城)[1]까지 진출했다. 이에 진한연맹은 사벌국의 서쪽 경계인 구양(狗壤)[2], 와산(蛙山)[3]에서 백제와 접하게 되었다. 이듬해 진한에 귀순한 복암성(覆巖城)의 영유권 문제를 놓고 사로국 중심의 진한과 백제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백제는 계속해서 구양과 와산을 공격해 점령하기도 했지만, 번번이 사로국에 패퇴했다. 다루왕 때 시작된 전쟁은 기루왕 때에 간신히 진정되었고, 사벌국은 사로국의 강력한 군사적 통제하에 놓였다.
2. 3. 신라 시대: 사벌국과 사벌주
249년 첨해 이사금 1년에 사벌국이 신라에 반기를 들고 백제에 귀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신라는 석우로를 파견했고, 사벌국은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다.[4]신라는 사벌국의 영역에 사벌주를 설치했다. 신라가 주(州)를 설치하는 등 지방제도를 정비한 것은 지증왕 때의 일이라 하여 첨해 이사금(재위 247~261년) 때에 사벌주가 설치되었다는 기사[5]는 믿을 수 없다고 하지만, 이 시기의 주는 직할로 지배하기 시작한 소국을 편의상 주로 불렀거나, 아니면 지증왕대에 주제도가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은 실은 지방행정을 정비했던 것을 오해한 것으로 그 이전에도 주 군현의 행정체제가 어설프게나마 시행되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6] 삼국사기 기록에서 지증왕 이전에도 사벌주라는 명칭이 한 두번 더 나온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7] 신라의 주는 애초에 군관구라는 성격도 같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진한제국 방어의 최일선이자 대외진출의 교두부인 사벌국에 맨 먼저 일찌감치 세워져서 이후의 주의 모범이 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시기에 사벌 일대가 신라의 직할영토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벌국 패망 후 얼마 뒤인 294년 유례 이사금 10년에 사도성(沙道城)을 쌓고 사벌주의 호민(豪民) 80여 가를 그곳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첨해 이사금 때 설치된 사벌주는 이후에도 552년 진흥왕 13년에 상주정(上州停)이라는 지방 군단이 설치되는 등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557년 진흥왕 18년에 주 치소가 개녕 일대로 옮겨져 감문주가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 이후 삼국 통일 후인 687년 신문왕 7년에 일선[8]에서 다시 치소가 옮겨 옴으로서 부활했고 동시에 상주성(尙州城)이 축조되었다. 사벌주는 경덕왕 대에 행정체제가 개편되면서 상주(尙州)라는 별호가 내려졌다. 사벌주에 소속된 군현은 오늘날 낙동강 상류지역인 안동시 임하면 일대를 경계로 서쪽으로는 영주시 일부, 청송군 일부, 예천군, 문경시, 의성군, 군위군, 김천시 일부, 충북의 청원, 보은, 옥천, 영동, 황간 일대가 관할에 속하였다.
3. 사벌주
552년(진흥왕 13년)에 상주정(上州停)이라는 지방 군단이 설치되어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557년 (진흥왕 18년) 주 치소가 개녕 일대로 옮겨져 감문주가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가, 삼국통일 후인 687년(신문왕 7년)에 일선[8]에서 다시 치소가 옮겨 오면서 부활했고 동시에 상주성(尙州城)이 축조되었다. 경덕왕 대에 행정체제가 개편되면서 상주(尙州)라는 별호가 내려졌다. 사벌주에 소속된 군현은 오늘날 낙동강 상류지역인 안동시 임하면 일대를 경계로 서쪽으로는 영주시 일부, 청송군 일부, 예천군, 문경시, 의성군, 군위군, 김천시 일부, 충청북도의 청원, 보은, 옥천, 영동, 황간 일대가 관할에 속하였다.
3. 1. 설치 배경과 초기 역사
신라는 사벌국의 영역에 사벌주를 설치했다. 신라가 주(州)를 설치하는 등 지방제도를 정비한 것은 지증왕 때의 일이라 하여 첨해 이사금(재위 247~261년) 때에 사벌주가 설치되었다는 기사[5]는 믿을 수 없다고 하지만, 이 시기의 주는 직할로 지배하기 시작한 소국을 편의상 주로 불렀거나, 아니면 지증왕 대에 주 제도가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은 실은 지방행정을 정비했던 것을 오해한 것으로 그 이전에도 주, 군, 현의 행정체제가 어설프게나마 시행되었었던가[6]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지증왕 이전의 삼국사기 기록에서 사벌주라는 명칭이 한두 번 더 나온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7] 신라의 주는 애초에 군관구라는 성격도 같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진한제국 방어의 최일선이자 대외진출의 교두부인 사벌국에 먼저 설치되어 이후 주의 모범이 되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시기에 사벌 일대가 신라의 직할영토가 되었다는 것이다.사벌국이 패망하고 얼마 뒤인 294년 유례 이사금 10년에 사도성(沙道城)을 쌓고 사벌주의 호민(豪民) 80여 가를 그곳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3. 2. 행정 구역 변화
신라는 사벌국의 영역에 사벌주를 설치했다. 신라가 주(州)를 설치하는 등 지방제도를 정비한 것은 지증왕 때의 일이라 하여 첨해 이사금(재위 247~261년) 때에 사벌주가 설치되었다는 기사[5]는 믿을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주는 직할로 지배하기 시작한 소국을 편의상 주로 불렀거나, 아니면 지증왕대에 주제도가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은 실은 지방행정을 정비했던 것을 오해한 것으로 그 이전에도 주, 군, 현의 행정체제가 어설프게나마 시행되었었던가[6]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 이후 지증왕 이전의 삼국사기 기록에서 사벌주라는 명칭이 한두 번 더 나온다는 점이다.[7] 신라의 주는 애초에 군관구라는 성격도 같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진한제국 방어의 최일선이자 대외진출의 교두부인 사벌국에 먼저 설치되어 이후 주의 모범이 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시기에 사벌 일대가 신라의 직할영토가 되었다는 것이다.사벌국이 패망하고 얼마 뒤인 294년 유례 이사금 10년에 사도성(沙道城)을 쌓고 사벌주의 호민(豪民) 80여 가를 그곳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첨해 이사금 때에 설치된 사벌주는 이후에도 552년 진흥왕 13년에 상주정(上州停)이라는 지방 군단이 설치되는 등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557년 진흥왕 18년에 주 치소가 개녕 일대에 옮겨져 감문주가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 삼국통일 후인 687년 신문왕 7년에 일선[8]에서 다시 치소가 옮겨 옴으로써 부활했고 동시에 상주성(尙州城)이 축조되었다. 경덕왕 대에 행정체제가 개편되면서 상주(尙州)라는 별호가 내려졌다. 사벌주에 소속된 군현은 오늘날 낙동강 상류지역인 안동시 임하면 일대를 경계로 서쪽으로는 영주시 일부, 청송군 일부, 예천군, 문경시, 의성군, 군위군, 김천시 일부, 충청북도의 청원, 보은, 옥천, 영동, 황간 일대가 관할에 속하였다.
3. 3. 군사적 중요성
신라는 사벌국의 영역에 사벌주를 설치했다. 신라의 주는 애초에 군관구(軍管區)라는 성격도 같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진한(辰韓)제국 방어의 최일선이자 대외진출의 교두부인 사벌국에 맨 먼저 일찌감치 세워져서 이후의 주의 모범이 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시기에 사벌 일대가 신라의 직할영토가 되었다는 것이다.[5][6][7]294년 유례 이사금 10년에 사도성(沙道城)을 쌓고 사벌주의 호민(豪民) 80여 가를 그곳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첨해 이사금때에 설치된 사벌주는 이후에도 552년 진흥왕 13년에 상주정(上州停)이라는 지방 군단이 설치되는 등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557년 진흥왕 18년에 주 치소가 개녕 일대에 옮겨 감문주가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가 삼국 통일 후인 687년 신문왕 7년에 일선[8]에서 다시 치소가 옮겨 옴으로서 부활했고 동시에 상주성(尙州城)이 축조되었다.
참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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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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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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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적
삼국사절요
[5]
서적
삼국사기
[6]
서적
삼국사기
[7]
서적
삼국사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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