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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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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전차는 1899년부터 1968년까지 서울 시내에서 운행된 노면전차이다. 1898년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어 대한제국 고종의 지원을 받아 서대문에서 청량리 구간을 시작으로 운행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전기가 운영을 맡았으며, 해방 후에는 한국인의 손으로 운영되다 1968년 11월 30일 전 노선 운행이 중단되었다. 이후 차량 노후화, 교통 체증 유발 등의 문제로 폐지되었으며, 현재 363호와 381호 두 대의 차량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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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전차 - [철도 노선]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보신각 앞에 정차한 서울전차의 모습
한국어 표기서울전차
한자 표기서울電車
일본어 가타카나 표기ソウルジョンチャ
로마자 표기Seoul Jeoncha
다른 뜻경성궤도
도시 철도 정보
체계명서울전차
체계명2서울電車
종류노면전차
국가대한제국, 대한민국
운행 지역서울특별시
상태폐지
역 수72
이용자420,379명 (1962년)
개통일1899년 5월 20일
폐지일1968년 11월 30일
소유자한성전기회사 (1899년 ~ 1909년)
일한와사 (1909년 ~ 1915년)
경성전기 (1915년 ~ 1961년)
한국전력 (1961년 ~ 1966년)
서울특별시 (1966년 ~ 1968년)
운영자한성전기회사 (1899년 ~ 1909년)
일한와사 (1909년 ~ 1915년)
경성전기 (1915년 ~ 1961년)
한국전력 (1961년 ~ 1966년)
서울특별시 (1966년 ~ 1968년)
영업 거리40.6km
궤간1067 mm (협궤)
전철화직류 600V

2. 역사

서울전차의 역사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 대한제국기 (1899년~1909년): 1899년 한성전기회사가 서울전차를 개통하면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어린이 사망 사고로 인한 폭동으로 운행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이후 노선이 확장되고 1904년 한미전기회사로 변경되었다. 1909년에는 일본에 의해 일한가스전기에 매각되었다.[3]
  • 일제강점기 (1909년~1945년): 일한가스전기는 투자를 통해 노선을 확장하고 복선화하였다. 1915년에는 경성전기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한국인과 일본인 거주 지역 간 운임 차별 문제로 인해 운임 인하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1930년대 이후에는 버스와의 경쟁 심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어려움을 겪었다.
  • 해방 이후 (1945년~1968년): 1945년 해방과 함께 한국인이 전차 사업을 인수했지만, 한국 전쟁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1952년 운행이 재개되었고, 미국으로부터 차량 지원을 받기도 했다. 1960년대 들어 차량 노후화와 교통 체증 유발 문제로 인해 1966년 서울시로 사업이 이관되었고, 결국 1968년 운행이 중단되었다.


각 시대별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기주요 내용
대한제국기 (1899년~1909년)
일제강점기 (1909년~1945년)
해방 이후 (1945년~1968년)


2. 1. 대한제국기 (1899년~1909년)

서울전차는 대한제국 시기(1899년~1909년)에 처음 도입되었다. 이는 전기 도입 사업의 일환으로,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를 설립한 콜브란(H. Collbran)과 보스트위크(H.R. Bostwick)가 전력 수요를 확보하기 위해 전차 부설을 추진하면서 시작되었다.[11] 이들은 고종황제의 홍릉 행차 시 발생하는 재정적, 시간적 낭비를 전차로 해결할 수 있다고 설득하여 허가를 얻고 황실의 투자까지 받았다.[12]

1898년 9월 15일, 흥화문 앞에서 전차 철도 개설 예식이 거행되었고,[12] 일본인 기술자들이 참여하여 서대문에서 종로,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에 이르는 약 8km 구간의 단선 궤도와 전차선을 설치하였다. 1899년 5월 20일(음력 4월 초11일)에 개통식을 갖고 운행을 시작하였는데,[14] 이는 아시아에서 교토에 이어 두 번째이자 수도에 부설된 최초의 전차였다.

초기 전차는 40인승 차량 8대와 황실 전용 귀빈차 1대로 구성되었으며, 개통 당시 큰 환영을 받았다.[13] 그러나 개통 열흘 후, 종로 2가에서 어린아이가 전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15]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전차가 파괴되고 불타는 사건이 발생했다.[16] 이 사건으로 일본인 전차 종업원들은 운행을 거부하고 철수했으며, 5개월간 운휴 후 미국인 운전수들이 고용되어 운행이 재개되었다.

전차는 빠르고 편리하여 인기를 얻었고, 노선 연장 요구가 이어졌다. 개통 당해에 남대문까지 노선이 연장되었고, 1900년에는 남대문에서 용산까지 연장되어 화물 수송도 실시되었다. 서대문까지의 연장 과정에서는 경인철도와의 평면 교차 문제로 일본과 갈등이 있었으나 외교적 노력으로 해결되었다.

1904년, 한성전기회사는 자금난으로 미국의 엠파이어 트러스트사에 합자되어 한미전기회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17]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1896년 아관파천 등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었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묘소인 홍릉을 자주 참배했는데, 이때 많은 수행원을 동반하는 데 드는 비용이 컸다. 미국 기술자들은 전차 설치를 통해 비용 절감과 수입 증대를 동시에 이룰 수 있다고 제안했고, 왕실과 미국 기술자들의 공동 출자로 1898년 한성전기가 설립되어 전차 설치 사업이 진행되었다.[12]

동대문 옆에 발전소가 건설되었고, 1899년 4월 8일 서대문-청량리 구간에서 개통식이 거행되어 전차 운행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승객이 많았으나, 어린이 치사 사고로 폭동이 일어나 전차가 소실되기도 했다. 일본인 운전사들이 사직하고 미국인 운전사가 부임할 때까지 운행이 중단되기도 했다.

1900년 5월 18일, 또다시 인명 사고가 발생하여 전차 유리창과 승차권 판매소가 파괴되고, 미국인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2]

이후 남대문, 용산 방면으로 노선이 확장되고 차량도 증강되었다. 한성전기는 자금 조달을 위해 미국 신탁회사에 회사를 매각했고, 한미전기가 사업을 인계받았다. 그러나 1909년 한미전기는 일본시부사와 에이이치상사에 매각되어,[3] 전차 사업은 일제의 '''일한가스전기''' 관할이 되었다.

2. 2. 일제강점기 (1909년~1945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일한가스주식회사는 대대적인 투자를 통해 종로~남대문~동자동 간 노선과 종로~동대문 간 노선을 복선화하였다. 또한, 밀폐형 차량을 대거 도입하였다. 1915년, 일한가스주식회사는 경성전기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노선 역시 빠르게 확장되었다.[11]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지역 사회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특히 한국인이 많이 살던 서대문과 마포 지역은 운임을 비싸게 받고, 일본인이 많이 살던 용산 지역은 운임을 낮게 받는 식으로 운영하여 문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운임 인하 운동이나 시영(부영) 운동 등 공영화 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920년대 이후 서울 인구가 급격히 늘면서 주택 부족으로 움집을 짓고 사는 토막민이 대규모로 발생하는 등 도시 과밀화 문제가 심각해졌다. 그러나 전차는 이러한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교통난을 겪게 되었다. 또한, 부영 버스 및 경성버스의 버스 운행으로 경쟁이 심화되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경성전기주식회사는 반강제(半鋼製) 보기(Bogie) 차량을 도입하고, 시내 정거장을 무정차 통과하는 등의 대책을 세웠다. 무정차 통과를 통해 시내에 난립한 정거장을 정리하는 일부 개선 효과는 있었으나, 전반적인 교통난 해소에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1910년 한국이 일본의 통치하에 들어가면서, 서울전차는 일한가스전기(日韓瓦斯電気), 이후 '''경성전기'''의 관할이 되었다. 경성전기는 조선반도 중앙부를 영업 지역으로 하는 전력 회사로, 전력 사업과 함께 서울의 노면전차 사업을 운영했다. (이 외에 1942년에는 조선반도 중부의 금강산전기철도를 합병하여 전력 사업과 철도 운영을 이어받았다.)

일본 통치 초기에는 황금정(현·을지로, 일본인 거리)과 경성역(현·서울역), 그리고 교외 각 지역으로 노선이 연장되었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시가지의 적자 노선 일부가 철거되기도 했지만, 북부의 돈암정, 한강 남쪽의 신길정, 영등포 지역으로도 노선이 확장되었다.

차량은 개업 당시 차량을 대체하여 다이쇼 시대부터 쇼와 초기까지 제작된 목조 단차와 목조 보기차가 대부분 자체 공장에서 제작되었다. 그 외에도 철도국 공장, 용산공작, 다나카차량(현·근기차량) 부산 공장 등 조선에서 제작된 차량도 있었다. 1930년대 이후에는 반강제 보기차가 제작되기 시작했지만, 이들은 이전 차량과 달리 일본차량 등 내지에서 제작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중 한쪽 면에 3개의 문을 가진 300급은 1945년경까지 약 100량이 제작되어 한국 독립 후에도 주력으로 사용되었다.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전차 사업은 점차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차량 검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차량 개량이나 교체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선로와 전기 시설 역시 심각하게 혹사당했다.

경성전기 회사 건물

2. 3. 해방 이후 (1945년~1968년)

1963년 11월 서울 시내 전차의 모습


일제 패망과 함께 경성전기주식회사의 전차 사업은 한국인의 손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시 동원기의 혹사와 광복의 기쁨에 환호하는 시민들의 난동으로 인해 전차는 수난을 겪었다. 해방 후 보름 동안 차량 가동 대수는 101대에서 59대로 급감했다. 서울시는 귀국 동포와 북한으로부터의 월남자 증가로 인구 밀도가 크게 증가하여 전차 운행은 더욱 가혹한 상황이었다. 좌우익 대립에 따른 혼란으로 노동조합의 파업, 태업, 사보타지 등이 속출하여 1947년에는 하루 27대만 운행할 정도로 혼란이 극심했다. 이후 단체협약 등을 통해 상황이 호전되면서 가동률이 회복되어 1948년에는 133대가 운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상화 노력은 한국 전쟁 발발로 인해 무참히 훼손되었다. 전쟁 피해는 심각하여 궤도 총 연장 46,204m 중 5,128m가 손실되었고, 차량 227대 중 104대가 소실되었으며, 전차선은 모조리 파괴되었다. 이후 복구에 착수하여 1952년 6월 2일에 67대를 투입, 한강대교 구간을 제외한 전 노선의 운행이 재개되었으나, 이는 응급 복구에 가까웠고 각종 부품과 자재 부족으로 노후화가 점차 진행되었다.

전쟁 복구 과정에서 미국은 1952년 6월 19일에 전차 40량을 지원하였다. 이 중 20량을 부산전차가 사용하고, 나머지 20량을 서울시가 인수하여 각 노선에 배차하였다. 1953년에는 추가로 부속품 구매 자금을 부산전차와 함께 지원받아 1957년까지 31대를 추가 복구 투입하였으며, 1956년에는 53대의 전차를 지원받아 이 중 36대를 경성전기가 인수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 전차 사업은 난항에 빠졌다. 차량 노후화가 진행되고 투자 소요가 발생했지만 전차 요금은 동결되었고, 이로 인해 전차 사업 적자는 크게 누적되었다. 시설 역시 응급 복구와 수리에 치중하고 신차 도입은 미미하여, 차량 213대 중 196대가 내구 연한인 20년을 초과했다. 레일 역시 평균 사용 연수가 38년으로 내구 연한을 초과했다. 인건비, 도로 점용료 증가는 사업 적자 폭을 더욱 키웠으며, 차량 증가로 노면 전차는 느린 속도와 잦은 고장으로 서울 도심교통 체증을 유발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경성전기는 전차 사업의 서울시 인수를 추진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고, 민간 매각 역시 실패하였다.

1966년 4월 초, 서울특별시장으로 취임한 김현옥은 <교통난 완화책>을 발표했다. 단기적으로는 지하도, 육교, 도로 등을 건설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전차를 폐지하고 지하철을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서울시는 세종로 지하도 건설에 착수했고, 이를 위해 한국전력이 운영하는 궤도와 전차선 철거가 필요했다. 서울시는 관련 법령[21]에 따라 전차 운영 중단에 따른 손실을 보상하거나 전차 사업을 매수해야 했으나, 한국전력의 협조를 얻지 못했다.

김현옥 서울특별시장과 박영준 한국전력주식회사 사장이 전차궤도사업 양도·양수에 관한 조인식을 하고 있다.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 방한[22]에 맞춰 지하도를 완공해야 했던 서울시는 전차 사업 인수를 적극 추진했다. 1966년 4월 19일 경제장관회의에서 '서울시내 전차궤도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5월 10일 김현옥 시장은 연내 전차 사업 인수 계획을 발표했다. 1966년 5월 18일 국무총리 훈령 제32호에 따라 서울시의 전차 사업 이관이 급속히 진행되었고, 1966년 6월 1일 서울시는 전차 201대와 종업원 1,620명을 한국전력주식회사로부터 인수했다.

전차 사업 이관 직후인 1966년 6월 10일부터 8월 25일까지 세종로 지하도 공사로 효자동-남대문과 신문로-화신백화점 간 전차 운행이 중단되었다.[23] 이 중 세종로-효자동 구간은 도로 정비로 궤도와 침목을 아스팔트로 복개하면서 운행이 중단되었다.

1967년 10월 5일 전차 요금이 100% 인상되었으나, 나머지 구간 운행은 유지되었다. 1967년 9월 발표된 〈전차 현대화 5개년계획〉에서 각 노선을 외곽으로 이설한다는 계획이 나왔으나, 1968년 4월 16일 발표에서는 외곽 이설은 언급되지 않고 철거 계획만 강조되었다. 시영화와 폐지 추진 과정에서 전차 사업 종사자들은 시영 버스 또는 서울시 산하 사업소, 택시 회사 등으로 재취업하여 고용 문제는 일단락되었다.[24]

1968년 11월 30일 서울전차 전 노선이 운행 중지되었다. 이후 1974년 수도권 전철이 개통할 때까지 서울 시내 대중교통은 전적으로 버스에 의존하게 되었다.

2. 4. 연표

'''대한제국기'''

  • 1898년 2월 19일: 콜브란과 보스트위크가 대한제국으로부터 전기사업권을 획득하여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였다.[11]
  • 1898년 12월 25일: 서대문~청량리 간 단선 궤도 및 전차선이 설치되었다.[12]
  • 1899년: 종로~남대문 간 단선 노선이 신설되었다.
  • 1899년 5월 17일: 전차 개통식이 거행되었다.[14]
  • 1901년 1월: 남대문~구용산 간 단선 노선이 신설되었다.
  • 1901년 7월: 서대문~남대문 간 단선 노선이 신설되었다. 이 노선은 숭례문에서 분기하여 칠패로와 의주로를 거쳐 서대문 앞 전차 종점으로 이어지는 순환 형태였으나, 2~3년 후 폐지되었다.[25]
  • 1909년 6월 23일: 한성전기회사가 일한가스주식회사에 매각되었다.[18]


'''일제강점기'''

  • 1910년 7월 21일: 구용산~신용산 간 단선 노선이 신설되었다.
  • 1910년 8월 26일: 종로~동자동 간 복선 노선이 신설되었다.
  • 1910년 12월 20일: 창경원선이 신설되었다.
  • 1911년 4월 11일: 청량리선이 연장되었다.
  • 1911년 12월 7일: 본선이 복선화되었다.
  • 1912년 2월 12일: 남대문~서울역 간 노선이 복선화되었다.
  • 1912년 3월 23일: 신용산선이 복선화되었다.
  • 1912년 6월 3일: 원효로선(일제 당시 모토마치 구간)이 복선화되었다.
  • 1912년 6월 25일: 을지로2가~6가(일제 당시 코가네쵸 구간) 간 노선이 신설되었다.
  • 1912년 12월 6일: 을지로6가~광희문 간 노선이 신설되었다.
  • 1914년 6월 8일: 왕십리선이 신설되었다.
  • 1915년 8월 26일: 광화문~의주로 간 노선이 복선화되었다.
  • 1916년 10월 30일: 종로4가~창경원 간 노선이 복선화되었다.
  • 1920년 11월 8일: 을지로 입구 접속선로가 신설되었다.
  • 1920년 11월 27일: 남대문역~서대문우체국 간 노선이 신설되었다.
  • 1921년 6월 23일: 동대문~광희문 간 노선이 신설되었다.
  • 1923년 8월 20일: 종로~안국동 간 노선이 신설되었다.
  • 1926년 3월 30일: 광화문~옛 중앙청(총독부)간 노선이 복선화되었다.
  • 1926년 4월 19일: 장충단선이 신설되었다.
  • 1927년 12월 19일: 옛 중앙청(총독부)~적선동 간 노선이 복선화되었다.
  • 1928년 9월 18일: 경마장선이 복선화되었다.
  • 1928년 10월 17일: 남대문~광화문 간 노선이 신설되었다.
  • 1929년 7월 10일: 청량리~동 역전 연장선이 신설되었다.
  • 1929년 8월 5일: 종로~안국동 간 노선이 복선화되었다.
  • 1929년 9월 3일: 신용산~한강인도교 간 노선이 신설되었다.
  • 1934년 5월 17일: 용산서~구용산 간 노선이 복선화되었다.
  • 1934년 10월 3일: 청량리선이 복선화되었다.
  • 1935년 9월 23일: 독립문~영천 간 노선이 신설되었다.
  • 1936년 8월 31일: 서대문~마포 간 노선이 복선화되었다.
  • 1937년 8월 14일: 한강교~노량진 간 노선이 신설되었다.
  • 1941년 7월 21일: 창경원~돈암동네거리 간 노선이 신설되었다.


'''해방 이후'''

  •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한국인이 전차사업을 인수하였다.
  •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전차 운행이 중지되었다.
  • 1952년 6월 2일: 전차 운행이 재개되었다.
  • 1952년 7월 3일: 미국제 도입 차량이 투입되기 시작하고 영등포~노량진 선이 개통되었다.
  • 1958년: 복구가 완료되고 최장 영업거리를 달성하였다.
  • 1961년 7월 1일: 경성전기, 조선전기, 남선전기 등 전력 3사가 통합되어 한국전력이 출범하면서 서울전차 사업도 한국전력에서 운영하게 되었다.
  • 1963년 5월 30일: 일본 후지샤료(富士車輛)로부터 신차 8대를 도입하여 구형 차량을 교체하였다.
  • 1963년: 마포차고 궤도를 연장하고 서대문, 서울역 앞, 돈암동선 등 보수 공사를 실시하였다.
  • 1964년: 서울 신문로 2가 궤도공사, 을지로 4가 분기점 개수공사, 동대문 앞 궤도 개수공사를 실시하였다.
  • 1965년: 일본으로부터 신차 35량을 도입하여 구형 차량을 교체하였다.
  • 1966년 4월 4일: 김현옥 서울 시장이 〈서울특별시 교통난 완화책〉 공약에서 중기대책으로 전차 철거를 천명하였다.
  • 1966년 6월 1일: 전차사업이 한국전력에서 서울시로 이관되었다.
  • 1966년 6월 2일: 세종로 지하도 공사 관계로 서대문~종로네거리 간 및 남대문~효자동 간 운행이 중단되었다.
  • 1966년 9월 30일: 세종로 지하도 완공으로 서대문~종로네거리 간 운행이 재개되었다.
  • 1967년 9월 20일: 〈전차 현대화 5개년 계획〉이 발표되었다.
  • 1968년 11월 30일: 이날 자정부로 전차 운행이 정지되면서 서울전차가 폐지되었다.

3. 운영

1960년대에 이르러 전차 사업은 차량과 레일 노후화, 요금 동결로 인한 적자 누적, 인건비 및 도로 점용료 증가, 교통 체증 유발 등의 문제로 난항을 겪었다.[23] 경성전기는 서울시에 전차 사업 인수를 추진했으나 거절당했고, 민간 매각도 실패했다.

1966년 4월,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은 교통난 완화책으로 전차 폐지 및 지하철 건설을 발표했다. 서울시는 세종대로 지하도 건설을 위해 한국전력공사의 궤도와 전차선 철거를 추진했고,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 방한에 맞춰 전차 사업 인수를 서둘렀다. 1966년 6월 1일, 서울시는 전차 201대와 종업원 1,620명을 인수했다.[23]

사업 이관 직후 세종로 지하도 공사로 효자동-남대문, 신문로-화신백화점 간 전차 운행이 중단되었다. 1967년 10월 전차 요금이 인상되었으나, 1968년 4월 발표된 계획에서는 전차 철거만 강조되었다. 전차 사업 종사자들은 시영 버스, 서울시 산하 사업소, 택시 회사 등으로 재취업되었다.[24]

1968년 11월 30일, 서울 전차 전 노선이 운행 중지되었다. 이후 서울 시내 대중교통은 1974년 수도권 전철 개통 전까지 버스에 의존하게 되었다.

개업 당시 서울전차는 정차장 없이 승객이 신호를 보내면 정차하는 방식이었고, 차장이 기계식 운임 계산기로 운임을 계산했다. 이후 정차장을 두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운임은 승차 전 매표소에서 표를 구매하거나 차장이 징수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어 폐지 시까지 유지되었다.

전차는 모든 역에 정차하는 각역 정차 방식이었으나, 1930년대에는 서울 과밀화와 정차장 과다로 도심 일부 구간에서 무정차 통과가 시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승객들의 불평으로 정차장 폐지, 조정으로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에는 사회 혼란과 차량 노후화 등으로 각역 정차 방식으로만 운행되었다.

3. 1. 영업 방식

1960년대에 이르러 전차 사업은 난항을 겪었다. 차량 노후화로 투자가 필요했지만, 전차 요금은 동결되어 적자가 누적되었다. 213대의 전 차량 중 196대가 내구 연한인 20년을 초과했고, 레일 역시 평균 사용 연수가 38년으로 내구 연한을 초과했다. 인건비, 도로 점용료 증가와 차량 증가로 인한 서울 도심교통 체증 유발 비난까지 더해졌다. 경성전기는 전차 사업의 서울시 인수를 추진했으나 거절당했고, 민간 매각도 실패했다.

1966년 4월,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은 교통난 완화책을 발표했다. 단기적으로는 지하도, 육교, 도로 건설, 중·장기적으로는 전차 폐지 및 지하철 건설이 골자였다. 서울시는 세종대로 지하도 건설을 위해 한국전력공사의 궤도와 전차선 철거가 필요했다. 관련 법령에 따라 손실 보상이나 사업 매수가 필요했지만, 한국전력공사의 협조를 얻지 못했다.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 방한에 맞춰 지하도를 완공해야 했던 서울시는 전차 사업 인수를 적극 추진했다. 1966년 4월 19일 경제장관회의에서 '서울시내 전차궤도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5월 10일 김현옥 시장은 연내 전차 사업 인수 계획을 발표했다. 1966년 5월 18일 국무총리 훈령 제32호로 사업 이관이 가속화되었고, 1966년 6월 1일 서울시는 전차 201대와 종업원 1,620명을 인수했다.

사업 이관 직후 세종로 지하도 공사로 효자동-남대문, 신문로-화신백화점 간 전차 운행이 중단되었다.[23] 세종로-효자동 구간은 궤도와 침목이 아스팔트로 복개되어 운행이 중단되었다.

1967년 10월 5일 전차 요금이 100% 인상되었으나, 나머지 구간은 운행되었다. 1967년 9월 〈전차 현대화 5개년계획〉에서 노선 외곽 이설 계획이 나왔으나, 1968년 4월 16일 발표에서는 철거 계획만 강조되었다. 전차 사업 종사자들은 시영 버스, 서울시 산하 사업소, 택시 회사 등으로 재취업되었다.[24]

1968년 11월 30일, 서울 전차 전 노선이 운행 중지되었다. 1974년 수도권 전철 개통 전까지 서울 시내 대중교통은 버스에 의존하게 되었다.

개업 당시 서울전차는 정차장 없이 승객이 신호를 보내면 정차하는 방식이었다. 차장이 기계식 운임 계산기로 각 승객의 운임을 계산했다.

이 방식은 곧 정차장을 두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운임은 승차 전 매표소에서 표를 구매하거나 차장이 징수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어 폐지 시까지 유지되었다.

전차는 모든 역에 정차하는 각역 정차 방식이었다. 1930년대에는 서울 과밀화와 정차장 과다로 표정속도 및 처리 용량이 악화되어 도심 일부 구간에서 무정차 통과가 시도되었다. 종로 등 일부 정차장을 사용하지 않는 방식이었으나, 불평으로 유지되지 못하고 정차장 폐지, 조정으로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에는 사회 혼란과 차량 노후화, 대량 손실로 각역 정차 방식으로만 운행되었다.

3. 2. 노선 및 운행 계통



차고지는 다음과 같았다.

1968년 11월 30일 서울전차의 전 노선이 운행 중지되기 전까지의 노선은 다음과 같다.

노선구간
왕십리-영등포왕십리 - 을지로6가 - 을지로4가 - 남대문 - 남대문로5가 - 남영동 - 사당역 - 영등포역
청량리-마포청량리 - 성동역 - 동대문 - 종로4가 - 정종로 - 서대문 - 마포
동대문-을지로6가동대문 - 을지로6가
돈암동-을지로4가돈암동 - 종로4가 - 을지로4가
남대문-효자동남대문 - 지청앞 - 정종로 - 중앙청(총독부 앞) - 효자동
남대문로5가-영천남대문로5가 - 서울역 - 서대문 - 영천
남영동-원효동남영동 - 원효동
남영동-삼각지남영동 - 삼각지 차고


4. 이설 계획 (미실현)

1967년에 발표된 5개년 계획은 도심지의 교통에 지장을 주는 노면전차를 폐지하고, 이를 시 외곽 지역의 교통난이 심각한 지역에 이설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이설 노선은 다음과 같다.[24]


  • 영천~불광동~갈현동
  • 왕십리~화양리
  • 청량리~면목동
  • 영등포~화곡동


그러나 이 계획은 서울시 측이 전차 폐지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급조된 것이라는 평가가 있으며, 실제로 과다한 건설비 등의 이유로 실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았다고 한다.[24]

5. 차량

서울전차의 차량은 1898년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면서 도입되었다. 초기에는 40인승 차량 8대와 황실 전용 귀빈차 1대로 구성되었으며, 개통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12] 1899년 5월 20일(음력 4월 초11일) 정식 개통 당시 아시아에서는 교토에 이어 두 번째, 수도에 부설된 것으로는 최초였다.[14]

초기 전차는 개방형으로, 추위와 비바람을 막기 어려웠고 나무 의자로 만들어져 불편했지만, 빠르고 편리하여 인기를 끌었다. 운전은 일본 교토시전의 경력자들이 맡았고, 차장은 한국인이었다.[13] 승차권은 상등과 하등으로 구분되었고, 별도 정류장 없이 승객 요구에 따라 정차했다.

그러나 개통 직후 종로2가에서 어린아이가 전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고,[15] 이로 인해 시민들이 전차를 파괴하고 불태우는 폭동이 일어났다.[16] 이후 일본인 운전사들이 운행을 거부하고 전원 철수하면서 5개월간 운휴 사태가 발생했다. 한성전기회사는 미국인 운전수와 기계공을 모집하여 운행을 재개했다.

1900년 5월 18일, 또다시 인명 사고가 발생하여 전차 유리창과 승차권 판매소가 파괴되었다.[2] 이 사고로 미국인이 부상을 입자, 다른 미국인들이 군중에게 총을 쏘는 사건이 발생했고, 주동자 7명이 체포되었다.[2]

이후 노선이 확장되면서 차량도 늘어났다. 한성전기는 자금 조달을 위해 미국 신탁회사에 회사를 매각했고, 한미전기가 사업을 인계받았다. 그러나 1909년 한미전기는 일본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회사에 다시 매각되어,[3] 전차 사업은 일한가스전기의 관할이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전차는 경성전기의 관할이 되었다. 경성전기는 전력 사업과 함께 전차 사업을 운영했다. 일본 통치 시기 동안 차량은 자사 공장, 철도국 공장, 용산공작, 다나카차량(현·근기차량) 부산 공장 등에서 제작된 목조 단차와 목조 보기차가 주를 이루었다. 1930년대 이후에는 반강제 보기차가 제작되었는데, 이들은 일본차량제조 등 일본에서 제작되었다. 특히 300급 차량은 1945년경까지 약 100량이 제작되어 한국 독립 후에도 주력으로 사용되었다.

태평양 전쟁 종결 후, 전차 운영은 경성전기로 이양되었다. 그러나 1950년 한국 전쟁으로 차량 절반 이상이 소실되었다. 1951년, 미국은 애틀랜타로스앤젤레스에서 불필요해진 차량 52량을 한국에 지원했고, 그중 20량이 서울 전차에 도입되었다. 1950년대 후반, 국제협력단(ICA) 원조로 국내에서 차량을 신규 제작하거나 일본 후지중공업[4]의 신차를 도입하여 수송력을 회복했다. 1961년, 경성전기 등 전력회사가 합병되어 한국전력공사가 발족하면서 전차 경영 주체가 변경되었다.

1960년대 후반, 경제 성장으로 자동차 보급이 증가하고, 시설 노후화와 요금 동결로 전차 사업은 어려움을 겪었다. 1968년 11월 30일, 서울전차는 운행을 중지했고, 한국에서 노면전차는 사라졌다.

현재 서울 시내에는 363호와 381호, 2량의 전차가 보존되어 있으며, 모두 대한민국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363호는 국립서울과학관에,[5] 381호는 서울역사박물관에 보존 및 전시되어 있다.[6] 2023년, 광화문 발굴 조사에서 당시 선로가 발견되었다.[7]

참조

[1] 웹페이지
[2] 서적 京城府史 https://books.google[...] 京城府 1934
[3] 간행물 『渋沢栄一伝記資料』第54巻 渋沢栄一伝記資料刊行会 1909-06-16
[4] 웹페이지
[5] 웹사이트 旧ソウル市電の保存車両の写真(韓国の地下鉄・都市鉄道サイト内) http://www.2427junct[...]
[6] 뉴스 ソウル電車381号、41年前の姿で登場 https://japanese.joi[...] 中央日報 2009-09-15
[7] 뉴스 日帝、朝鮮の「王の階段」をコンクリートで覆い…宮殿遺産への「テロ」 https://japan.hani.c[...] ハンギョレ 2023-05-16
[8] 웹사이트 위례선 트램에 바란다…17일 온라인 주민공청회 https://mediahub.seo[...] 서울시 2024-07-18
[9] 웹사이트 路面電車が57年ぶりにソウルを走る 慰礼トラム着工 https://world.kbs.co[...] KBS WORLD 2024-07-18
[10] 서적 1962
[11] 서적 서울교통사 서울특별시 2000
[12] 뉴스 황성신문 1898-09-16
[13] 뉴스 황성신문 1899-05-04
[14] 뉴스 황성신문 1899-05-19
[15] 뉴스 AMERICAN WORK IN KOREA.; The United States Minister to the Hermit Nation Talks -- Bad Start of a Trolley Road. http://query.nytimes[...] 뉴욕타임즈 1899-07-18
[16] 뉴스 Trolley Cars in Disfavor in Korea http://query.nytimes[...] 뉴욕타임즈 1899-06-29
[17] 뉴스 매일경제신문 1986-04-02
[18] 뉴스 황성신문 1910-02-01
[19] 뉴스 매일경제신문 1986-04-02
[20] 법률 서울특별시영 전차 운임 조례 개정 https://archives.seo[...] 1967-06-24
[21] 법률 궤도사업법 제23조(매수권 및 매수요구권)
[22] 웹페이지
[23] 공고 서울특별시공고제94호(세종로 지하도공사에 따른 전차 일부노선 임시휴지 및 변경 운행공고)
[24] 서적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 한울 2005
[25] 서적 성 베네딕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소장 서울사진 서울역사박물관 2014
[26] 서적 発掘カラー写真 1950・1960年代鉄道原風景 JTBパブリッシング 2005
[27] 서적 한국전기백년사 한국전력주식회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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